모나 펜디

 




1. 개요
2. 생애
2.1. 범행
2.2. 구속
3. 사후
4. 앨범

Maznah binti Ismail, 1956.1.1 ~ 2001.11.2

1. 개요


말레이시아의 가수, 의료인이자 '''살인자'''. 1993년 정치인 마즐란 이드리스를 암살했는데 정치인을 암살한 연예인이라는 점이 마치 존 윌크스 부스와 비슷하기도 하다.
비록 흉악범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가수였다는 이유 때문에 고영욱처럼 일부 동정심을 얻기도 하나, 그 여부를 떠나서 죄가 용납될 수는 없는 노릇이며 때문에 오늘날 말레이시아 가요계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2. 생애


1956년 1월 1일 퍼를리스캉아르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앨범 "Diana I"를 내고 가수로 데뷔했다. 수록곡 "Ku Nyanyikan Lagu Ini", "Ratapan Anak" 등으로 이름을 알렸으나, 인기가 더럽게 없었는지 2년 만에 가요계를 떠났다. 본명은 마즈나 빈티 이스마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에 사용한 예명인 모나 펜디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흔히 알려진 Mona Fendi라는 표기는 잘못된 것이고 Mona Fandey가 맞다.
가요계를 떠난 이후 보모(말레이 전통의학)로 직업을 바꾸었고, 이후에는 의료인으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2.1. 범행


1993년 전후로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마즐란 이드리스가 당시 집권당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의 차기 유력 의원으로 바짝 떠오르고 있었고, 그의 출신지인 파항 주에서 지지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는 냉전이 바로 끝나면서 말레이시아 내부에서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고, 그동안 UMNO의 일당독주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고 민주행동당(DAP) 등을 위시로 한 야당의 힘이 세지기 시작하면서[1] 본인의 앞날도 가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비록 파항 주가 다소 보수적인 지역이라 반이슬람 성향[2]인 DAP가 힘을 쥐기는 힘들었으며 더더욱이나 DAP가 혼자서 뛰던 때라 UMNO에게 유리한 구도였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본인도 모든 것을 알 수야는 없었다.
이러한 불안 속에 잠겨있던 마즐란은 의료인으로 전향한 모나에게 손을 뻗었다. 전통 의학의 힘을 빌리면 심적으로도 안정감을 취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면 당선이 무난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1993년 7월 1일, 모나와 그의 남편인 아판디는 마즐란을 부부의 집으로 초대했다. 마즐란은 조만간 있을 총선에서 당선되는 것이 목표라며[3] 모나 부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모나는 마즐란에게 바닥에 눕고 눈을 감으라고 지시했다. 마즐란은 그 지시대로 따랐고, 곧 모나가 말한 대로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돈이 떨어지기는 개뿔...'''
같이 집에 있었던 보좌관 주라이니는 이 틈을 타서 도끼로 마즐란의 목을 쳤다. 그리고 3인방 일대는 마즐란의 시체를 거리낌 없이 토막내기 시작했고 곧바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렀다. 얼마나 심각했냐면, 무려 '''18조각'''으로 토막났다. 이 작자들은 시체를 자신들의 집 앞에 매장했고, 고인의 돈을 훔쳐다가 한참 떨어진 쿠알라룸푸르로 도주했는데 그 돈이 무려 30만 링깃으로 한화 약 '''1억원'''에 달하는 수치였다. 그리고 이 돈으로 비싼 메르세데스 벤츠 자동차를 샀고 성형수술까지 해 완전 딴 사람으로 위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모를 경찰이 아니었다.'''

2.2. 구속


사건 바로 이튿날, 경찰은 마즐란이 실종되었다는 신고를 받고 곧바로 수사에 나선다. 당연히 모나 일대가 있던 쿠알라룸푸르에서도 수사가 이루어졌는데, 도중에 마즐란의 시체가 발견되자 주라이니는 경찰에게 "한번 보고 싶다"는 말을 전한다. 하지만 '''제 발로 자살골을 넣고 말았다'''. 이 한 마디로 모나 일행이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었고, 얼마 후 셋은 경찰에 구속되었다.
바로 트므를로 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되었고, 살인이나 유괴 등을 얄짤 것 없이 사형으로 다스리는 말레이시아 형법에 따라, 이들 셋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제서야 뒤늦은 후회를 한 일행은 억울하다며 항소했지만, 용서는 개뿔 2심 판결 또한 그대로 사형이었다. 참고로 한국과는 달리 말레이시아는 '''2심이 마지막'''이다. 3심은 없기 때문에 결국...
이후 카장 교도소에서 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며 복역하다가, 2001년 11월 2일 모나 일행은 형장에서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언급했다시피 항소 당시 자신들은 잘못했다며, 한 번만 용서해 달라며 반성하는 척 했지만 이는 훼이크였고, 죽기 직전에도, 그것도 교도소에서 KFC 치킨을 시켜달라며 교도관에게 끈질기게 요구했는데 결국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KFC 치킨을 맛나게 먹으며 일생의 마지막 끼니를 채웟다. 그걸 들어준 교도관도 참 대단하다... 거기다가 피의자보다 피해자의 인권을 더 중시하는 말레이시아 사회를 감안한다면...[4] 더욱이 재판장에서도 화려한 옷을 입고 나오면서 "나 봐, 팬이 많지?"라고 자랑하고 다녔는데 애초에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과연 진짜로 그럴까?

3. 사후


사형제를 무조건 반대하는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이들의 사형 집행을 규탄했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를 들은 척도 안 했고, 여론 또한 되레 앰네스티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현재도 말레이시아 살인계의 대표 인물로 꼽히며, 세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21세기 최초의 말레이시아 살인사건이었다. 후에도 미디어에서 종종 화자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처음에 언급했다시피 모나는 가수로 출발했지만, 정작 사람들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가수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살인자로서의 이미지이다. 그만큼 가수 시절에는 인기가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

4. 앨범


[1] 참고로 또다른 유력 야당인 인민정의당(PKR)은 훗날인 1999년에 창당되었으며, 지금 PKR의 수뇌부들은 당시 UMNO에 있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선명 야당 하면 DAP가 유일했다고 보면 된다.[2] 다만 극우는 아니었다. 우경화가 본격화된 건 2000년대 전후였다.[3] 사실 9대 총선은 1995년에 치러졌지만, 바로 지난 총선이 1990년에 있었고, 말레이시아와 같은 내각제 국가에서는 조기총선이 가능하기 때문에 당초에는 1993년 말이나 1994년을 유력하게 보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차기 총선이 언제인지 당초에는 아무도 모르며, 마즐란 입장에서도 이를 미리미리 대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모양.[4] 범죄자의 인권을 중시하는 한국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그것도 흉악범이,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저렇게 배달음식을 먹겠다고 교도관한테 조른다는 것 자체가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것과 같다. 실제로 김길태의 경우도 자장면을 시켜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했으며 그의 팬카페에서도 "김길태에게 자장면 시켜 보내자"는 글이 올라왔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부부도 구속 직후 제공되는 음식에 불평을 해대면서 사과를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했었는데 어쨌거나 이들도 사과를 먹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