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에 차우셰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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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제 파탄? 웃기지 마세요. 우리나라 식료품 가게에는 유기농 식료품으로 가득하답니다."[2]
루마니아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공산당 서기장. 자칭 '카르파티아 산맥의 천재(Geniul din Carpaţi, 영어로 The Genius of the Carpathians)'이자 '콘두커토르(Conducător; 지도자, 지휘자)'.[3] 긴 칭호로는 '정열적이고 총명하며 매력적인 인격의 영원한 우리의 지도자'. '''그러나 전세계에 존재하는 독재자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사악한 독재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만천하에 낱낱이 알려준 인물이다.''' 또한 공산권 국가 원수 중에서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받았다."나 같은 지도자는 500년 만에 한 명씩밖에 나오지 않는다." -1970년대 초 보건부 장관에게
2. 생애
3.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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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발렌틴, 엘레나, 니쿠, 조이아, 니콜라에.
루마니아 사람들은 엄격한 통제와 세뇌에도 루머를 통해 차우셰스쿠 가족들의 행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발렌틴과 부모와의 갈등, 조이아 사건, 니쿠의 음주운전, 중매결혼 실패, 나이트클럽 여급과의 추문 등 모르는 것이 없었다. 다만 언론 자유와 정보의 소통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니쿠의 악행이나 조이아가 관련된 수많은 사건들이 부풀려진 면도 없지 않다. 차우셰스쿠의 세 자녀는 체제의 수혜자들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들이기도 했다. 그래도 셋 다 부모에 비하면 훨씬 개념인이기는 했다.
3.1. 발렌틴 차우셰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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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tin Ceaușescu
1948년 2월 17일 생.
장남 발렌틴은 그나마 집안의 상식인이었다. 차우셰스쿠 부부와 사이가 나빴는데 그 이유는 발렌틴의 아내 이오르다나 보릴러가 반이 유대인 핏줄인 동시에[4] 차우셰스쿠 정적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우셰스쿠 부부에게 냉대를 받아 특권층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채 방 두 개짜리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차우셰스쿠 사후 헌법에 의해 설립된 구국전선들의 행동대원에게 자진해서 투항한 발렌틴은 당시 이오르다나와 이혼한 후 중앙위원회 의원이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차우셰스쿠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재판을 해야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이때 발렌틴은 자신이 부모인 차우셰스쿠 부부의 반대편에 섰다는 정당성과 어머니 엘레나를 증오했다는 사실로 맞서려고 했으며, 차우셰스쿠 사후에 발렌틴이 런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며 일했던 '원자 핵 물리연구소'도 그를 지원했기 때문에 결국 재판은 받지 않았다.
2015년 기준으로 차우셰스쿠 일가의 유일한 생존자인 발렌틴은 현재 핵물리학자로 살고 있으며, 그래도 아버지는 사랑했으나 어머니 엘레나는 증오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의 세 자녀 중 유일하게 자손을 남겼다. 이오르다나와의 사이에서 아들 다니엘(1981년생)을 남겼으며, 이오르다나와 이혼 후 다른 사람과 재혼하여 딸 알렉산드라를 보았다.(1996년생)
3.2. 조이아 차우셰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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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ia Ceaușescu
1949년 3월 1일 ~ 2006년 11월 20일
조이아의 경우도 발렌틴의 경우와 비슷하다. 수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을 때 조이아는 정권의 실체를 알고 역겨워 했다. 그래서 1974년 그녀는 가출을 했는데 이 가출이 '조이아 사건'이라고 불릴 정도로 파장이 커지게 된다.
그녀가 가출하자 비밀경찰이 그녀를 찾기 위해 총동원됐다. 그녀를 찾기 위해 그녀와 친한 사람들을 모조리 가둬 그녀의 소재를 심문했다. 그렇게 잡혀간 사람들은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그녀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후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렇듯 젊은 여성으로서의 조이아의 생활은 악몽 같았으며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었지만 결국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후 차우셰스쿠와 엘레나는 조이아에게 역심을 품게 만든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들은 조이아와 친하게 지낸 수학연구소 일원들이 조이아를 심리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을 조이아에게 보헤미안 기질을 주입시켰다는 이유로 연구소를 해산시켜버린 뒤 연구원들을 다른 연구소로 분산시켰다. '조이아 사건'의 충격이 루마니아 학계에 미친 영향은 가히 공포에 가까웠다.
결국 조이아 사건으로 약 200명이 넘는 능력있는 수학자들이 루마니아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다. 그러자 조이아는 인맥을 동원하여 수학연구소 일원들에게 출국비자를 얻어 주었는데, 이것이 차우셰스쿠 부부를 화나게 만들었다.[5] 결국 부쿠레슈티 대학의 심리학과도 폐쇄해 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이후 차우셰스쿠 부부와는 거의 데면데면하게 지냈고 차우셰스쿠 부부가 혁명으로 죽은 후에는 조이아도 체포되었으나 8개월 후 풀려났다.
그러나 조이아는 전의 직장에 복귀하지 못했고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담배를 껴안고 살았고 결국 2006년 57세라는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80년 미르체아 오프레앙이라는 공학자(당시 부쿠레슈티 공과 대학 교수)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녀는 없었다.
차우셰스쿠 부부 사후에도 발렌틴처럼 공식적으로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증언을[6] 남긴바 있다.
3.3. 니쿠 차우셰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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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u Ceaușescu
1951년 9월 1일 ~ 1996년 9월 26일
이렇듯 형과 누나가 차우셰스쿠 부부에게 반항하여 후계자 자리에서 탈락한 관계로 그나마 차우셰스쿠 부부와 사이가 괜찮았던 니쿠가 차우셰스쿠 정권의 후계자로 낙점되어서 별명이 '가족의 황태자'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비운의 엘리트 학자라는 인상이 강했던 형과 누나와는 다르게 학창시절부터 공부보다는 노는것을 더 좋아했고, 파티를 즐기고 도박질로 해외에서 거액을 날리거나 음주운전을 하는 등 플레이보이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다보니 후계자같은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마냥 놀아재꼈던것은 아니라서 1980년대에 루마니아 공산당의 주요직책에 오르며 후계자 수업을 받았을때는 어려움이 있는 지방에다가 배급품을 전달하는데 힘을 썼고, 이때의 일화가 나중에 재판과정 중에 공개되어 어느정도 평가가 반전된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부모보다는 훨씬 책임감이 있었던듯하다.
여담으로 니쿠와 좋은 친구였던 사람들 중 하나는 악명높은 이라크 전 대통령 사담 후세인의 아들 우다이 후세인이었다.[7]
이렇듯 애초부터 루마니아 인민들에게 날라리 취급을 받았을 정도로 인상이 좋지 못했던 인물이었고, 자신이 마음에 들던 여자와 결혼하려고 했을때 그 여자가 어머니의 지시에 의해 능욕을 당하는 등 마냥 화기애애한 일만 있지는 않았음에도 반항이라도 한 형과 누나에 비하면 부모에게 직접적인 반항을 하지 않았기에 각종 루머가 나돌았는데 이 때문에 루마니아 혁명 이후로 재판에 넘겨져서 여러가지 혐의로 인해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상기한 것처럼 개념차고 책임감 있는 모습도 많이 보여줬다는 증언들도 많았기 때문인지 징역 5년으로 감형되었다. 1996년 9월 26일 니쿠 차우셰스쿠는 간경화로 감옥에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결국 빈의 병원에서 4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8] 사망 후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 묻혔다.
4. 성격
인민의 고혈을 빨아서 자신의 사치를 위해 쓰고 잔혹한 유혈진압을 서슴치 않았던 차우셰스쿠의 면모는 얼핏 보기엔 계산적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런 것과는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먼 인간상이었다. 20세기 최악의 독재자인 아돌프 히틀러와도 닮은 구석이 있는 셈. 인간 히틀러가 독재자 히틀러로서의 모습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던 것처럼 인간 차우셰스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렸을 적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므로 지식수준이 거의 문맹이나 다름없어 간단한 전치사를 헷갈릴 정도로 무식했다. 또한 대인관계에서의 사교능력도 부족했고, 말더듬이였으며,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고, 그런 까닭에 자신의 과거를 감추려 했다. 말더듬으로 인한 콤플렉스, 불투명한 미래, 가난한 삶으로 인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비참한 과거를 잊고 싶었다. 차우셰스쿠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것과 간단한 보고서 몇 페이지조차 쉽사리 읽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을 몹시 부끄럽게 생각했다. 당연히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무지했으므로 그는 많은 시간을 내 공산당 관련 서적을 탐독했으며 특히 공산당 기관지인 '불꽃'은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챙겨 읽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라는 말은 바로 이 작자를 보고 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차우셰스쿠는 엘레나밖에 몰랐으며 다른 여자를 굳이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고 그의 측근들이 증언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 그는 여자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1974년 젊은 시절의 동료였던 키부 스토이카가 실연을 당하고 자살하자 고작 그런 일로 목숨을 끊을 수 있냐며 경멸하기까지 했다.
세간에 알려진 엽기적인 행위들, 주변 사람들을 못살게 군 일들의 대부분은 그의 아내 엘레나가 저지른 일이었다. 그는 그런 아내를 의지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아마 그는 루마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공처가일 것이다. 최소한 그녀는 대중 앞에서는 충실한 아내였지만, 사석에서는 차우셰스쿠를 남편으로 존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했다. 하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식사시간이나 약속시간에 늦기라도 하면 차우셰스쿠는 안절부절 못하고 시계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긴장하면 항상 그랬듯이 말 더듬는 습관이 튀어나왔고 땀까지 흘렸다."고 한다.
또한 나쁘거나 엽기적인 행각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친절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차우셰스쿠가 사냥을 갔을 때 머무르는 통나무집의 관리인 여자는 차우셰스쿠의 뻔뻔스러운 충복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엘레나는 무척 싫어했다지만 차우셰스쿠는 좋아했다. 여자는 "차우셰스쿠는 정말 친절한(?) 사람이었지요. 한 번은 비밀경찰견이 차우셰스쿠의 애견 코르부를 물어버렸어요. 불경스러운 짓을 한 개를 비밀경찰들이 쏴 죽여 버리자 차우셰스쿠는 몹시 화를 냈습니다. 또 한 번은 거실 벽난로에서 새어나온 연기가 거실을 꽉 채운 일이 있었습니다. 엘레나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니 동지에게 독약을 먹이려 한다고 꾸짖더군요. 그녀는 나를 비밀경찰에 넘기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런데 차우셰스쿠가 나서더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엘레나를 말렸습니다."라고 증언했다.
4.1. 음모론 신봉자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는 암을 진단받자, 자기가 소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소련의 비밀경찰인 KGB가 루마니아 서기장 궁전에 방사선을 쏘아 그 방사선이 자기 방의 문고리를 뚫고 방안까지 들어와서 자신이 암에 걸리게 공작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병맛 망상을 들은 사람들은 어이없어했으나 유일하게 이에 맞장구쳐주는 사람이 바로 차우셰스쿠였다.
사람들은 차우셰스쿠가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와 오랫동안 친분이 있어서 일부러 말을 맞춰주는 것이거나, 더 큰 신임을 얻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야비한 술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차우셰스쿠는 저 이야기를 철썩같이 믿은 것이었다. 그는 문맹이었던 데다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었고 이게 암살에 대한 망상에 시달리는 이유가 되었다.
차우셰스쿠는 해외여행 때에도 암살을 두려워하여 세균을 이용한 독살을 우려하여 악수하고 난 뒤 즉석에서 손을 닦았고, 자기가 먹을 음식을 가지고 다녔고, 식사 때마다 영양사와 감별사가 배석하였다. 차우셰스쿠가 먹을 음식은 소량을 먼저 연구소로 보내 검사를 거친 다음 24시간 동안 별도로 보관했으며, 선물받은 물건들을 다 뒤져서 확인하게 했다.
또한 그의 동료 스토이카가 자살한 이유가 소련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다니거나, 괴이한 음모론을 설파해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했다.
4.2. 일화
그래도 젊은 시절 투사의 면모가 있어서 마치 로버트 무가베가 그랬듯이 "과거에는 청운의 꿈을 품은 혁명가였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태생적으로 인간 쓰레기'였다.''' 차우셰스쿠와 같이 생활했던 동료들은 위의 사람들에게는 온갖 아첨과 아양을 떨었으나 아랫사람들은 무자비하게 괴롭혔으며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진 인간이었고, 부하나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악한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일례로 수감시절의 에피소드를 들 수 있다. 그가 수감되었을 때 동료 재소자 중 오스만이라는 사람이 심각하게 아픈 상태였고 재소자들은 그를 위해 음식을 십시일반 모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그 음식을 차우셰스쿠가 중간에 탈취하여 먹어버렸다. 이를 두고 동료 재소자들이 차우셰스쿠를 몰아 세우며 비난하자 그는 성장기 청소년의 생존권을 근거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9] 이에 재소자들은 크게 분노하여 그를 처참할 정도로 폭행했다. 이후 그는 말을 더듬는 버릇과 어눌한 말투, 잘 웃지 않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찍은 사진 중에서 차우셰스쿠가 활짝 웃는 사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공산권 국가들의 수장 중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그의 쓰레기 같은 인성을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나치에 맞서 파르티잔 활동을 하는 등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 티토는 집권한지 얼마 되지 않은 그와 멧돼지 사냥을 나선 적이 있는데, 차우셰스쿠가 산탄총으로 먼저 멧돼지를 쐈지만 맞지 않았고, 티토는 백발백중이었다. 그런데 멀리서 그가 달려와 자기가 잡았다며 멧돼지를 가로채려 들자, 티토는 "이봐, 당신의 총알은 땅에 박혀있을 걸?" 라고 디스하면서 멧돼지를 가져갔다(...). 이 일이 있은 뒤, 티토는 단지 공식 석상에서만 친한 척 했을 뿐 그와 사석에서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한번은 한 외국 언론인이 차우셰스쿠에게 ‘엘레나가 귀하의 부인이라는 사실 이외에 정치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 질문에 차우셰스쿠가 말하길.
한 마디 질문에, 저런 일장연설을 했다(...).“사회주의 정부의 조직제체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으로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겠습니다.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집단 지도체제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심의기구의 의사 결정에 노동자들과 함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지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노동자를 포함해서 여러 사람들이 활동하는 기업이나 경제적, 사회적 조직에는 이런 심의기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여자들은 집단적인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모든 문제에 대해 집단적인 의사결정을 하지요. 정부 또한 집단적인 지도체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의회의 역할을 대신하는 당에서는 중앙위원회와 집행위원회가 국가 발전과 외교 정책에 관한 문제들을 결정합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정부의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엘레나도 사회 발전에 관한 숙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5. 평가
구 공산권 독재자 중 가장 사악하고 잔학한 독재자를 들 때 지금까지도 반드시 언급될 정도로 평이 매우 나쁘다. 루마니아 국내에서도 1989년 공산 정권 붕괴 후 국가를 파탄낸 역적으로 규정되어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은 처벌되고 있으며 과거 공산권의 맹주였던 러시아나 기타 과거 같은 공산 국가였던 폴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체코 등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서도 평가가 안 좋다. 그나마 옛 소련이나 기타 다른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은 독재 치하였다지만 상태는 좋았다. 소련의 경우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분위기가 많이 완화되었고 거기다 이들 국가군들은 한 집권자의 권력 독점을 제어하는 견제 장치도 그럭저럭 갖추고 있었다. 루마니아 같은 경우도 공산정권 수립 후 초기에 집권 지도자에 대한 견제 장치가 어느 정도 있었지만 1965년 차우셰스쿠가 집권하고 이후에 그가 지나친 실정과 정책 실패, 이외 다른 공산당 계파 세력들을 탄압, 제거하면서 그 견제 장치가 철저히 박살나버렸다.
또한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노르웨이 등 냉전 당시 자본주의 진영에 속해있던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사악한 독재자로 대부분 비난을 받고 있다.
집권기 당시 뛰어난 탈소련 외교 정책의 수완으로 한때 서방에서는 소련의 자국 간섭에 대항해 독자적 공산주의 노선을 취한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와 함께 그를 긍정적으로 보기도 했으나 차우셰스쿠 정권 당시 독재 정권의 핍박을 피해 미국 등 서방 세계 국가들로 망명한 루마니아인들을 통해 차우셰스쿠 정권의 인권 유린과 독재 정치, 천인공노할 만행들이 곳곳에서 제기되면서 그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서방 국가들은 경악하고 차우셰스쿠에게 등을 돌렸다. 거기다 1989년 차우셰스쿠 정권이 전복되고 냉전 체제가 종식되면서 이제는 서방에서도 그냥 나라 생으로 말아먹은 독재자로 인식하고 있다.
2015년, 루마니아 정부에 의해 국가법으로 차우셰스쿠 부부에 대한 찬양, 고무가 금지되었다.#
5.1. 루마니아 국내의 재평가와 엇갈리는 호불호
그렇지만 차우셰스쿠 이후로 민주화 되었지만 차우셰스쿠의 뒤를 이은 일리에스쿠 사회민주당 정권은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성향이 남아있었던데다가[10] 경제적으로 무능하기 짝이 없어 물가통제에 실패하는 바람에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고, 이 때문에 많은 국영기업들이 민영화되면서 평생직장과 많은 복지혜택들은 사라졌고 부패는 여전히 심했다. 1996년 총선에서 중도우파정권으로 교체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경제사정은 나쁘기는 매한가지였으며 내분이 터지기까지 했다. 이렇듯 1990년대 루마니아의 경제상황은 차우셰스쿠가 축출되었음에도 매우 암울했으며 1980년대 이래로 나빠져만 갔던 루마니아의 경제가 다시금 회복의 길로 접어든 것은 2000년대 들어와서였기 때문에 90년대 중반부터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차우셰스쿠 시절 때가 좋았지 하면서 차우셰스쿠에 대한 향수가 크게 늘어났다.[11] 허나 그렇다 해도 차우셰스쿠가 행한 기행과 사치는 무시할 수 없는데다가, 임기 후반기의 무리한 경제정책으로 국민들의 삶이 중상위권에서 동유럽에서도 하위권으로 떨어진건 엄연한 사실이었고, 더군다나 차우셰스쿠 시절 정책의 후유증으로 에이즈 문제 같은 문제점이 많았기 때문에 루마니아 내에서 차우셰스쿠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 또한 여전히 많으며 특히 젊은층에서 차우셰스쿠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루마니아 내에서 차우셰스쿠에 대해 호불호가 엇갈리는 그야말로 팽팽한 평가를 보이고 있다. 2013년 여론조사에 의하면 차우셰스쿠 이전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게오르기우데지에 대해서는 42.3%의 긍정과 39.1%의 부정적 답변으로 나뉘었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 대한 질문에는 47%가 '루마니아 역사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 '부정적이었다는 46.9%였다. 하지만 차우셰스쿠의 부인인 엘레나 차우셰스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답변이 '''80.2%'''로 월등히 높았다. 18~34세 젊은 층은 51.2%가 부정적인 답변을 한 반면에 65세 이후의 연령층에서는 긍정적인 답변이 51.7%였다. 공산주의 영향이 컸던 몰도바, 부코비나 지역은 51.7%가 공산주의에 긍정을 나타낸 반면, 바나트 지역은[12] 단 36.2%만이 긍정적이었다는 답변을 했다. 출처
또한, 부패인식지수는 3.8(2009)로서 역시 부패가 심각한 중국(3.6)과 비슷한 수준이다. 루마니아는 경제위기가 주기적으로 찾아오고 있기 때문에 몇년마다 한번씩 긴축을 실시하고 있으며, 1991년과 2009년에 다시 IMF 구제금융 신세를 졌고, 2012년에는 커다란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더구나 민주화 이후 차우셰스쿠 시절에는 없었던 실업과 빈부격차가 생겨나서 루마니아 국민들은 더 고통을 겪는 중이다. 말하자면 예전에는 공평히 고통을 분담했는데, 이제는 본인의 재산에 따라 겪는 고통이 달라졌고, 대부분의 서민은 상대적 박탈감을 더 느끼는 중이다. 아마도 경제상황이 좋아지지 않는 이상, 차우셰스쿠에 대한 재평가는 점점 힘을 얻어갈 가능성도 있다.
다만, 반공 성향이 강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여전히 강하며, 특히 차우셰스쿠를 그리워한다는 러시아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도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6. 관련 서적
- 루마니아와 차우셰스쿠 - 이원복 구성, 정일봉 글/그림. 어문각. 1990.
- 차우셰스쿠 악마의 손에 키스를
[1] 원칙적으로는 '니콜라에 체아우셰스쿠'로 적는 것이 맞지만 '차우셰스쿠'가 많이 쓰이다 보니 이 쪽이 표준으로 정해졌다. 물론 원 발음도 빨리 하면 나름 비슷하게 들리지만. 사실 루마니아어에서 ia와 ea는 둘 다 '야'처럼 발음하는데 어원에 따라 구분한다.[2] 당시 루마니아의 국영방송인 TVR은 관영방송 특성상 진열장이 가득 찬 가게에 차우셰스쿠가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촬영해 내보냈지만 실상은 나라 전체가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였다. 그 가게는 선전을 위해 일시적으로 꾸몄을 뿐이었다. 물론 이 발언이 나온 1980년대 초까지야 나름대로 물자공급이 잘되었으니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83년 이후로는 거짓말이 되어 버렸다.[3] 콘두커토르란 칭호는 사실 이온 안토네스쿠 때부터 썼던 (군사적) 독재관의 이름으로 두체나 퓌러 같은 칭호과 비슷한 개념이다.[4] 실제로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 집권 이전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학살하던 전적이 있었다.[5] 애시당초 부부는 조이아가 수학을 공부하는 걸 싫어했다고 한다.[6]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을 비밀 경찰을 통해 감시해 악영향을 남겼으며, 아버지가 권력을 가진 후 판단력을 상실했다고 깠다.[7] 우다이는 건물에 숨어 농성을 벌이다가 미군이 TOW 대전차미사일을 건물에 퍼부어 시체가 조각났다고 한다.[8] 술을 즐겨마신 것이 원인으로 생각되고 있다.[9] 만약 이때 배가 고파 그랬다고 하면서 사과라도 했으면 동료 재소자들은 이해하고 용서할 여지가 있었지만 차우셰스쿠는 그 마저도 걷어찬 것이다.[10] 오죽하면 게오르기우데지와 차우셰스쿠가 없는 공산당 정부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11] 현지인에 따르면 기성세대들 중에는 잘 살던 과거(사회주의 시절)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히곤 한다고 한다. 단순히 일시적인 향수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게 실제로 차우셰스쿠 때 주택을 많이 건설했고 일리에스쿠 시절에 주택 민영화 조치를 단행하면서 루마니아는 유럽에서 주택소유율이 가장 높은 국가가 되었다. 또한 상기한 대로 집권 초중기에는 (비록 외채빨이 있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 제법 넉넉하게 살았던 시절(1965~1977, 길게는 1981년까지) 인민들이 꽤나 풍족하게 먹고 살았던 호황기가 있기도 했다.[12] 루마니아인 뿐 아니라 헝가리인,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독일인 등 비교적 다양한 민족이 거주한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