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헨조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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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enjod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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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파키스탄 남부, 인더스 문명이 남긴 최대의 도시 유적. 카라치에서 북동 300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모헨조다로'라는 이름은 해석하자면 '사자(死者)의 언덕'이라는 뜻이다.[3] 그 이유는 드라비다인에 의해 세워진 인더스 문명이 지금의 북부 인도인의 조상인 인도아리아인에 의해 정복당하고, 이로 인해 멸망한 민족의 중심지가 바로 이곳, 모헨조다로였기 때문. 현재는 일부분만이 발굴되었다는 듯하며, 현지 주민들은 이곳을 꺼린다고 한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벽돌로 지어져 있다. 당시에는 2층 건물을 올리는 방법이 없어 모든 건물은 1층이지만, 사막의 더위를 피해 높게 지은 것이 특징이다.
꽤나 정교한 계획 도시였기 때문에 전체적인 모습은 바둑판에 가깝다. 각 건물 사이의 도로는 열십(十)자로 나 있으며, 그 좌우로는 벽돌은 한 층 낮추어 만든 수로가 파여 있어 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도시에는 거대한 대중 목욕탕이 있는데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기 전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성소였으리라 여겨진다.
모헨조다로 유적지에서 놀라운 기술력으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이 하수도 시설과 대중 목욕탕(대욕장) 시설이다. 둘 다 오늘날과 다를 바 없는, 완벽에 가까운 성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공통점. 목욕탕의 경우 벽면에 콜타르를 발라 방수 처리까지 하였으며 지금도 손상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다만 오늘날과 다를 바 없이 완벽에 가깝다는 말은 어폐가 있는 것이, 기원 전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굉장히 선진적인 기술력이라는 것이지 현재의 관점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다. 일례로 모헨조다로에는 각 가정의 생활하수를 배출하고 한 곳에 모아 저장하는 하수도 시설이 있었는데, 하수관의 냄새가 역류하여 극심하였을 뿐더러(가정에 연결된 하수관의 끝에 이것저것 덮어놓았던 흔적이 있다) 일정 주기로 모아놓은 하수가 범람하였다고 한다.
모헨조다로가 초고대문명설의 좋은 떡밥으로 활용되는 이유이자 이곳의 가장 큰 미스터리로 손꼽히기도 하는 점이다. 즉, ''''모헨조다로에서 핵전쟁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
1978년 모헨조다로 유적지를 조사하던 대번포트와 빈센트는 현지 마을사람들이 '유리가 된 마을'로 부르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곳으로 조사를 나섰는데, 정말 현지인들의 말대로 수많은 유리조각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는 것. 이곳에서 나온 유리결정들을 조사해보니, ''''순간적인 고열을 받은 모래가 녹았다가 응고되어 생성된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유리조각에서 높은 수치의 방사능이 검출되었으며, 모헨조다로 유적지의 일부에서도 높은 수준의 방사능이 검출되기도 했다고 한다. 자연적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려면 운석이 충돌했다는 것으로 밖엔 볼 수 없는데, 유적지 주변의 그 어디에도 크레이터가 없다는 것으로 봐서 몇몇 학자들이 ''''고대 인더스의 모헨조다로에서는 핵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모헨조다로에서 핵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데에 가장 큰 근거는 고온에서 만들어지는 유리 파편, 유적지 주변의 높은 방사능, 그리고 썩거나 훼손되지 않은 사체를 근거로 드는데, 사실 이 중 대부분은 자연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고온에서 만들어지는 유리 파편의 경우에는, 굳이 핵폭발이나 혜성 충돌이 아닌, '''벼락/번개나 지각 변동에 의해서도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모헨조다로는 파키스탄에 위치해 있으므로, 히말라야 산맥의 지각 변동에 의해 고온에서 만들어지는 유리 파편들이 충분히 생겨날 수 있다고 한다. 부패하지 않은 시신의 경우 죽음을 맞이한 때는 기원전 1800년 경으로 밝혀지는데, 이 때는 인더스 문명의 쇠퇴기였기 때문에 아사나 탈수증, 빈혈 등으로 죽음을 맞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핵폭발보다는, 쇠퇴기에 지속되었던 기근과 가뭄 등에 의한 쇠퇴 현상 중 발생했던 죽음으로 보는 것이 더욱 논리적. 결정적으로 '''인더스 문명이 어떻게 쇠퇴해갔는지에 대해 밝혀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실상 백골과 그 유적에 대해서는 많은 가설이 존재한다.
또한 데번포트와 빈센트가 얘기했던 '유리로 된 마을'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먼저 그 '유리로 된 마을'이 어디인지 확실히 밝히지 않았으며, 제삼자도 본 적이 없는 장소라는 것.[4] 게다가 진짜로 핵폭발이 일어났다고 해도 고작 800야드 정도밖에 안되는 국소적인 범위에서만 파편이 발견될 수는 없으며, 아무리 유리 파편이 널려 있고 이것이 초고온에서 생성되는 물질이라고 해도 결국 '''증거를 찾은 장소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 증거는 없느니만 못하다는 것'''이 된다.
심지어 핵전쟁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첫 번째로 내세우는 것이 이 유리 파편인데, 여기서 발견되는 유리 파편은 핵폭발 시 생겨나는 유리 파편과는 모양에도 생성 과정에도 차이가 있다고 한다. 핵폭발시 생겨나는 유리 파편은 거친 표면을 가진 반면 이 곳에서 발견되는 파편들은 매끈하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모습인데, 이는 생성 과정에서 그 모양을 달리하기 때문이라고. 이쯤되면 고대 모헨조다로는 핵전쟁보다는 환경의 변화, 기근, 가뭄 등의 자연적인 요인에 의해 쇠퇴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헨조다로에서의 핵전쟁설을 만들어낸 이유는, 아마도 그 시대에 불던 미스테리 열풍의 분위기를 탄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 가장 처음 핵전쟁설을 주장한 데번포드는 이것을 책으로 써냈는데, 미스테리가 열풍을 일으키던 당시엔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짭짤한 수익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에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단 그가 '아마추어 연구가'였기 때문. 실제로 그는 지질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넓지 않았으며, 당시에는 핵폭발로 인해 생겨난 유리 파편을 사고 파는 것이 금지되었을 때였다고 한다. 덕분에 가장 중요한 증거물이었던 '유리 파편'에서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일부에선 "2층 건물도 제대로 못만들던 시대에 어떻게 그보다 훨씬 더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핵무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라면서 간단히 반박하고 있다.
인더스 문명이 남긴 최대의 도시 유적답게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소녀 무희의 동상과 수많은 동물상과 모신상.
더불어 인더스 문자가 쓰인 유물들도 출토되고 있지만, 그 의미는 현재까지 해독되지 못하고 있다. 문자를 해석하려면 기다란 문장이 필요한데 인더스 문자는 도장,벽등에 그려진 단어들만 찾을수 있기 때문에 해독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세계 4대 문명 중 '''유일하게 해독되지 못한 문자'''.
문제는, 1965년 이후 더 이상 연구가 되고 있지 않다. 영국인들과 인도인들이 옛날 인도 문명과 연관이 있을까 해서 연구해 왔으나 1948년 인도 파키스탄 분리 이후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쳐들어온 유목민의 자손들인 파키스탄의 주류 인종들은 이곳에 아무 관심이 없어 방치하고 있고, 그나마 허용하던 외국 연구자들도 1965년 이후로는 지반침식이라는 핑계를 대고 더 이상의 발굴을 허용하지 않고 있어서 이곳에 대한 관심이 그 이후에는 전세계적으로 매우 떨어졌다[5] . 파키스탄에서는 이곳에 대해서는 전혀 연구를 안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위에 1978년 연구자들이 들어갔다고 했지만, 그냥 취재에 가까운 것이었을 것이고 이들이 펴낸 책이 유사역사학에 가까운 핵전쟁이야기였던 것으로 볼 때, 진지한 연구자는 아니었다.
Moenjod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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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인도 파키스탄 남부, 인더스 문명이 남긴 최대의 도시 유적. 카라치에서 북동 300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모헨조다로'라는 이름은 해석하자면 '사자(死者)의 언덕'이라는 뜻이다.[3] 그 이유는 드라비다인에 의해 세워진 인더스 문명이 지금의 북부 인도인의 조상인 인도아리아인에 의해 정복당하고, 이로 인해 멸망한 민족의 중심지가 바로 이곳, 모헨조다로였기 때문. 현재는 일부분만이 발굴되었다는 듯하며, 현지 주민들은 이곳을 꺼린다고 한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벽돌로 지어져 있다. 당시에는 2층 건물을 올리는 방법이 없어 모든 건물은 1층이지만, 사막의 더위를 피해 높게 지은 것이 특징이다.
꽤나 정교한 계획 도시였기 때문에 전체적인 모습은 바둑판에 가깝다. 각 건물 사이의 도로는 열십(十)자로 나 있으며, 그 좌우로는 벽돌은 한 층 낮추어 만든 수로가 파여 있어 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도시에는 거대한 대중 목욕탕이 있는데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기 전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성소였으리라 여겨진다.
모헨조다로 유적지에서 놀라운 기술력으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이 하수도 시설과 대중 목욕탕(대욕장) 시설이다. 둘 다 오늘날과 다를 바 없는, 완벽에 가까운 성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공통점. 목욕탕의 경우 벽면에 콜타르를 발라 방수 처리까지 하였으며 지금도 손상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다만 오늘날과 다를 바 없이 완벽에 가깝다는 말은 어폐가 있는 것이, 기원 전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굉장히 선진적인 기술력이라는 것이지 현재의 관점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다. 일례로 모헨조다로에는 각 가정의 생활하수를 배출하고 한 곳에 모아 저장하는 하수도 시설이 있었는데, 하수관의 냄새가 역류하여 극심하였을 뿐더러(가정에 연결된 하수관의 끝에 이것저것 덮어놓았던 흔적이 있다) 일정 주기로 모아놓은 하수가 범람하였다고 한다.
2. 고대 핵전쟁의 흔적?
모헨조다로가 초고대문명설의 좋은 떡밥으로 활용되는 이유이자 이곳의 가장 큰 미스터리로 손꼽히기도 하는 점이다. 즉, ''''모헨조다로에서 핵전쟁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
1978년 모헨조다로 유적지를 조사하던 대번포트와 빈센트는 현지 마을사람들이 '유리가 된 마을'로 부르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곳으로 조사를 나섰는데, 정말 현지인들의 말대로 수많은 유리조각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는 것. 이곳에서 나온 유리결정들을 조사해보니, ''''순간적인 고열을 받은 모래가 녹았다가 응고되어 생성된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유리조각에서 높은 수치의 방사능이 검출되었으며, 모헨조다로 유적지의 일부에서도 높은 수준의 방사능이 검출되기도 했다고 한다. 자연적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려면 운석이 충돌했다는 것으로 밖엔 볼 수 없는데, 유적지 주변의 그 어디에도 크레이터가 없다는 것으로 봐서 몇몇 학자들이 ''''고대 인더스의 모헨조다로에서는 핵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2.1. 반론
모헨조다로에서 핵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데에 가장 큰 근거는 고온에서 만들어지는 유리 파편, 유적지 주변의 높은 방사능, 그리고 썩거나 훼손되지 않은 사체를 근거로 드는데, 사실 이 중 대부분은 자연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고온에서 만들어지는 유리 파편의 경우에는, 굳이 핵폭발이나 혜성 충돌이 아닌, '''벼락/번개나 지각 변동에 의해서도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모헨조다로는 파키스탄에 위치해 있으므로, 히말라야 산맥의 지각 변동에 의해 고온에서 만들어지는 유리 파편들이 충분히 생겨날 수 있다고 한다. 부패하지 않은 시신의 경우 죽음을 맞이한 때는 기원전 1800년 경으로 밝혀지는데, 이 때는 인더스 문명의 쇠퇴기였기 때문에 아사나 탈수증, 빈혈 등으로 죽음을 맞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핵폭발보다는, 쇠퇴기에 지속되었던 기근과 가뭄 등에 의한 쇠퇴 현상 중 발생했던 죽음으로 보는 것이 더욱 논리적. 결정적으로 '''인더스 문명이 어떻게 쇠퇴해갔는지에 대해 밝혀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실상 백골과 그 유적에 대해서는 많은 가설이 존재한다.
또한 데번포트와 빈센트가 얘기했던 '유리로 된 마을'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먼저 그 '유리로 된 마을'이 어디인지 확실히 밝히지 않았으며, 제삼자도 본 적이 없는 장소라는 것.[4] 게다가 진짜로 핵폭발이 일어났다고 해도 고작 800야드 정도밖에 안되는 국소적인 범위에서만 파편이 발견될 수는 없으며, 아무리 유리 파편이 널려 있고 이것이 초고온에서 생성되는 물질이라고 해도 결국 '''증거를 찾은 장소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 증거는 없느니만 못하다는 것'''이 된다.
심지어 핵전쟁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첫 번째로 내세우는 것이 이 유리 파편인데, 여기서 발견되는 유리 파편은 핵폭발 시 생겨나는 유리 파편과는 모양에도 생성 과정에도 차이가 있다고 한다. 핵폭발시 생겨나는 유리 파편은 거친 표면을 가진 반면 이 곳에서 발견되는 파편들은 매끈하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모습인데, 이는 생성 과정에서 그 모양을 달리하기 때문이라고. 이쯤되면 고대 모헨조다로는 핵전쟁보다는 환경의 변화, 기근, 가뭄 등의 자연적인 요인에 의해 쇠퇴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헨조다로에서의 핵전쟁설을 만들어낸 이유는, 아마도 그 시대에 불던 미스테리 열풍의 분위기를 탄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 가장 처음 핵전쟁설을 주장한 데번포드는 이것을 책으로 써냈는데, 미스테리가 열풍을 일으키던 당시엔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짭짤한 수익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에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단 그가 '아마추어 연구가'였기 때문. 실제로 그는 지질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넓지 않았으며, 당시에는 핵폭발로 인해 생겨난 유리 파편을 사고 파는 것이 금지되었을 때였다고 한다. 덕분에 가장 중요한 증거물이었던 '유리 파편'에서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일부에선 "2층 건물도 제대로 못만들던 시대에 어떻게 그보다 훨씬 더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핵무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라면서 간단히 반박하고 있다.
3. 인더스 문명의 유산
인더스 문명이 남긴 최대의 도시 유적답게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소녀 무희의 동상과 수많은 동물상과 모신상.
더불어 인더스 문자가 쓰인 유물들도 출토되고 있지만, 그 의미는 현재까지 해독되지 못하고 있다. 문자를 해석하려면 기다란 문장이 필요한데 인더스 문자는 도장,벽등에 그려진 단어들만 찾을수 있기 때문에 해독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세계 4대 문명 중 '''유일하게 해독되지 못한 문자'''.
문제는, 1965년 이후 더 이상 연구가 되고 있지 않다. 영국인들과 인도인들이 옛날 인도 문명과 연관이 있을까 해서 연구해 왔으나 1948년 인도 파키스탄 분리 이후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쳐들어온 유목민의 자손들인 파키스탄의 주류 인종들은 이곳에 아무 관심이 없어 방치하고 있고, 그나마 허용하던 외국 연구자들도 1965년 이후로는 지반침식이라는 핑계를 대고 더 이상의 발굴을 허용하지 않고 있어서 이곳에 대한 관심이 그 이후에는 전세계적으로 매우 떨어졌다[5] . 파키스탄에서는 이곳에 대해서는 전혀 연구를 안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위에 1978년 연구자들이 들어갔다고 했지만, 그냥 취재에 가까운 것이었을 것이고 이들이 펴낸 책이 유사역사학에 가까운 핵전쟁이야기였던 것으로 볼 때, 진지한 연구자는 아니었다.
4. 관련 문서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죽음의 언덕'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4] 이 장소는 현지인들이 꺼리는 곳이기도 하고,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비밀리에 유지되고 있어 그 위치를 정확하게 모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가설에서는 의도적으로 핵전쟁설을 퍼트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유는 부와 명예를 위해.[5] 탈레반을 포함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창궐로 인해 치안이 불안정해진 탓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