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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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대륙, 아틀란티스의 가상의 지도다.
1. 문서 기재 조건
이 문서에 기재하는 정보는 '''"상식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사물이나 사건"'''이라고 하는 미스터리의 사전적 의미를 만족한다는 가정 하에, 다음과 같은 기재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2. 일반 미제 사건
2.1. 국내 미제 사건
- 국새 실종 사건: 1949년 5월에 제작되어 1962년까지 사용되었던 대한민국 제1호 국새가 실종된 사건. 심지어 실종 추정 시각은 1960년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진 건 2005년 국정감사 때였다. 또한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도 불분명하며 현재 알려진 어떤 짐승[2] 모양의 형태라는 설이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회수되기 전까지는 미스터리로 남을 듯하나 찾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상태다.
- 금산사 연쇄 화재 사건: 1986년 12월 6일 금산사에서 화재가 일어나 보물 제476호 대적광전이 소실된 데 이어 1988년 4월 28일에는 나한전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경찰에서는 이 두 화재 모두 방화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지었지만 금산사 측과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는 방화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참고로 금산사는 증산계 종교들에서도 성지로 여기고 있어 금산사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불교계와 증산계 종교들이 여러 번 갈등을 빚은 바 있다.
- 배우 김주혁 교통사고: 사고 발생 시점으로부터 4년이 넘었지만 김주혁의 사인(死因)이 된 교통사고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부검을 통해 졸음을 유발하는 항히스타민제 성분이 발견됐지만, 극미량이었으며 1차 충돌 후에도 운전이 부자연스러운 것을 미루어 보아 졸음운전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다.
- 남양주 아파트 밀실 살인사건: 3중 보안 관문이 갖춰진 최신 아파트 14층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범인의 동기는 물론 침입과 탈출 방법조차 전혀 알아내지 못한 희대의 미제 사건이다. 심지어 단 한 명의 용의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해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폐지되었으나 정작 이 사건은 적용 받지 못했다.
- 문경 십자가 시신 사건: 대한민국 내 미스터리 사건 중 가장 기괴한 사건 중 하나. 자살임은 명백해 보이지만,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라 도와준 사람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체 누가 도왔고, 무엇을 위해 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 박근혜 5촌 살인사건: 아직까지 유력한 용의자가 나오지 않고 있는 사건이다. 문제는 언론인들조차 취재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했을 만큼, 사건에 대한 유력 세력의 은폐시도가 빈번하게 벌어졌다[3] . 이 점으로 미루어 이 사건은 육영재단의 관계자에 의한 청부살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4] .
- 속초 영랑동 백골 사건: 강원도 속초시의 관광지이자 석호인 영랑호 인근 횟집에서 보수공사를 벌이던 중 신원을 알 수 없는 백골 16구가 무더기로 발견된 사건. 6.25 전쟁 희생자로 추정되어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이 조사를 실시했으나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 철수하고, 의견만 분분할뿐 현재까지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
- 우지 파동: 사건의 발단이 되는 익명의 투서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다.
- 윤영실 실종 사건: 경찰의 소극적인 수사 태도 때문에 정인숙과 더불어 전두환 정권의 희생양이 아니냐는 설이 있을 정도다.
- 이형호 유괴 사건: 대한민국 3대 미제 사건 중 하나.
- 장자연 사건: 사건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유력한 용의자들에 대한 공소시효가 모두 만료되었고, 재조사 과정에서 유일한 증인으로 지목되었던 윤지오가 수사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혼란만 더 가중시켰기 때문에 사건 해결의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다가 결국 장자연의 전 소속사 대표였던 김종승의 위증 혐의만 겨우 재조사된 후 사건이 영구 미제로 종결되었다. 그나마 2018년에 기소되었던 조희천 기자가 유죄 판결을 받았더라면 성추행 용의자들을 약간이나마 재수사할 수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다.
- 제종철 의문사 사건: 2002년 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두 학생 미선이, 효순이 사건에 대한 촛불 집회를 이끌어낸 인물. 2003년 다시 촛불 집회를 준비하다가 철도에서 사망한 채 발견됨. 사망 이유가 불확실하고 철도까지 접근이 어려운 점 등 경찰은 많은 의문을 뭉개버리고 타살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며 자살로 발표. 모종의 세력이 자살시켰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는 상태. 2016년 12월 24일 그것이 알고싶다에 방송되었다.
- 조두형 유괴사건: 대한민국 최초로 아이를 유괴하고 돈을 달라고 협박한 사건이다.
- 주한미군 하사관 연쇄 사망사건: 1992년 2월과 4월, 주한미군 기지에서 벌어진 하사관 두명의 사망사건. 빌리 레이 하그로브 상사는 기지 근처에서 목을 매고 죽은채로 발견되었고 그의 친구인 마이클 카마이클 상사도 기지내 라커룸에서 목을 매고 죽은채로 발견되었다. 목을 매고 죽어서 자살로 보였지만 두 사람의 가족들은 두 하사관이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으며 카마이클 상사는 친구인 하그로브 상사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있던차에 본인도 사망한채로 발견되는등 의혹도 있는 사건이다.
- 최덕근 영사 피살 사건: 1996년 10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 최덕근 영사가 숙소로 귀가하던 중 피살된 사건. 살해에 쓰인 흉기가 독침인 걸로 미루어 북한 공작원의 소행으로 의심되었으나, 범인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범인의 실체에 관해서는 북한 공작원설 이외에도 레드 마피아설, 네오 나치 등 인종주의자설, 단순 강도설, 심지어 러시아 정보 당국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사건 발생 2개월 후인 12월 15일에는 모스크바 주재 한국 대사관 김선태 공사의 숙소에 누군가가 문을 부수고 침입해 들어온 사건이 발생했는데, 단순 절도범의 소행인지 이 사건과 연관이 있는 자의 소행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로선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이 정설인데 연해주 일대가 접경 지역인 데다 러시아에는 북한인이 많이 체류하고 북한 공작원도 매우 많기 때문. 1996년 당시에는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소탕작전에 대한 보복공격 또는 북한이 연쇄적으로 벌인 대남도발로 추정했다.
- 화성 해안초소 K-2 소총 사취 사건: 1997년 1월 3일 당시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육군 제51사단 해안 초소에 40대로 보이는 군복 차림의 남성이 나타나 자신을 수도 군단에 새로 전입한 백 소령이라고 밝히고 소초장에게 K-2 소총 한 자루와 실탄 30여 발을 빌린 뒤 그대로 잠적한 사건. 자신을 백 소령이라고 밝힌 이 남성의 정체가 무엇인지,[5] 무슨 목적으로 K-2 소총을 빼돌렸는지, 어떻게 관계자가 아니면 알기 힘든 해당 부대 내부 정보[6] 를 알고 있었는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밀덕계에서는 범인이 위에 나온 것처럼 군부대 내부 정보를 잘 알고 소초장이 깜박 속을 정도로 전혀 어색하지 않게 행동한 점, 군경의 수사에도 단서가 전혀 나타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범인을 북한 공작원으로 보고 있다. 북한 특작부대가 국군으로 가장하기 위해 기존에는 M16 소총을 북한에서 무단으로 카피 및 생산해 왔으나 국군의 주력이 K-2로 바뀌자 K-2 샘플을 구해와 카피 생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K-2를 빼돌렸다는 것.
- KT 아현지사 화재 사고: 화재 원인이 밝혀지지 못해서 북한측의 공작이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왔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개구리 소년, 화성 연쇄살인 사건, 이형호 유괴 사건을 한국 3대 미스터리로 꼽아 특집 방송을 한 바 있다. 한국의 3대 미제 사건은 모두 영화화되었는데, 《아이들…》, 《살인의 추억》, 《그놈 목소리》가 바로 한국 미제 사건 3부작.
2.2. 해외 미제 사건
- 3억 엔 사건: 범인이 경찰 간부의 아들이고, 사건의 파장을 우려해 간부가 아들을 살해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이 있다.
- 가부키초 빌딩 화재사건: 화재의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는데 방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 김정남 피살 사건: 피의자가 붙잡히고 배후도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만, 피의자의 배후에 있는 북한 당국이 김정남을 살해한 의도와 그의 아들인 김한솔의 행방[7] , 그리고 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단체 천리마민방위[8] 의 정체 등, 사건 자체에 얽힌 의혹이 매우 많다.
- 다미엔 네틀스 실종 사건: Damien Nettles. 1996년 실종 당시 16세였다. 집 근처 피시 앤드 칩스 가게에서 목격된 것을 마지막으로 영영 실종되었다. 아직까지도 실종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 레베카 코리엄 실종 사건: Rebecca Coriam. 영국인 여성으로, 2011년에 디즈니 원더(Disney Wonder) 호 크루즈선에 승선했다가 영영 실종되었다.
- 마이애미 좀비 사건: 루디 유진(Rudy Eugene)이라는 이름의 한 남성이 고속도로 진입로 인근에서 나체로 타인의 얼굴을 물어뜯은 후 사살된 사건. 신종 마약 때문일 것이라는 수사 결과가 있으나 자세한 내막은 불명이다.
- 만프레트 프리츠 바요라트 사망 사건: Manfred Fritz Bajorat. 한동안 행방불명되었던 독일 탐험가로, 어느 날 참으로 뜬금없게도 필리핀 해변에서 자신의 보트 안에 미라가 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건조하고 소금기 있는 공기가 부패를 막아 주었다고... 부검의 윌벤 메이어(Wilben Mayor)는 사인이 심장마비라고 확인했다. 그런데 부검의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그의 사망일이 보트가 발견되기 불과 10일 전이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시신은 열흘 만에 완벽히 미라로 변한 것이라는 얘기. 이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는 둘째치더라도,[9] 도대체 이 사람이 어쩌다 보트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고 왜 하필 필리핀 해변에서 발견되었는지도 미궁 속에 빠졌다.참고로 그는 아내와 행복한 생활을 하다 아내와 이혼했으며,그가 죽기 몇 년 전 아내는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이혼 후에는 아내와 일체 연락을 주고받지 않던 그가 아내가 사망하는 시점에 맞춰 여정을 시작한 것도 미스터리라고.
- 말레이시아항공 370편 추락사고: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관제탑에 미확인 비행물체의 항적이 잡혔으나, 적대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레이시아 공군이 이를 요격하지 않고 놔 두었는데 그 미확인 비행물체가 MH370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상항로를 이탈해 미확인 비행물체가 되었다는 것. 많은 전문가들이 기장의 자살 비행이 아닐까 의심하고, 최종보고서도 그와 비슷한 의혹을 제시한다.[10]
- 맥스 헤드룸 전파납치 사건: 아직도 범인이 누군지, 무슨 의도로 벌인 짓이었는지는 미제로 남아 있다.
- 삿포로 OL 살인사건: 현재까지 용의자의 행방을 모른다.
- 세일리시 해 잘린 발 연쇄발견 사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와 미국 워싱턴 주에 인접한 세일리시 해에서 2019년 지금까지 총 잘린 발 20여 개가 계속해서 발견되는 사건이다. 캐틀 뮤틸레이션의 인간 버전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설득력 없는 추측일 뿐이다.
- 세타가야 일가족 살인사건: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 악마의 시 번역자 피살사건: 이란 정부의 특수요원 또는 이슬람교 근본주의자의 테러 사건이라는 추측이 있다.
- 에토레 마요라나 실종사건: 에토레 마요라나는 마요라나 페르미온 등으로 유명한 초기 양자역학의 거물들 중의 한 사람인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인데, 1938년에 같은 물리학자인 삼촌에게 의문스러운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는 팔레르모에서 나폴리로 가는 배에 탑승한 뒤 실종되었다. 결국 그의 행방은 영영 알 수 없는 듯하다가, 1997년에 베네수엘라의 한 정비공이 1955년에 자신에게 차 수리를 의뢰한 사람이 에토레 마요라나라고 주장해서 큰 화제를 모았다. 이에 이탈리아 경찰이 그 정비공이 증거로 내세운 사진에 찍힌 남자의 신원을 분석했고, 그 결과, 사진 속 남자의 정체가 에토레 마요라나가 맞다고 밝혀져 1955년 즈음까지는 생존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나, 무엇 때문에 갑자기 모국인 이탈리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베네수엘라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는지, 1955년에 재등장한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 엔자이 사건
- 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 피해자가 반원전을 주장하다가 도쿄전력 측에 살해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 제국은행 사건: GHQ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다.
- 하카마다 사건: 대표적인 엔자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진범이 밝혀지지 않았다.
- 엘도라도 제인 도 살인사건: 1991년 미국 아칸소의 엘도라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피해자의 생전 사진도 여럿 있음은 물론 범인도 검거된 사건이지만, 피해자가 썼던 이름들이 모두 가명인 까닭에 피해자의 신원을 밝혀내지 못해, 피해자의 진짜 신원은 현재까지도 불명이다.
- 오우랑 메단 호 사건: 배 안에 모든 사람이 죽은 대량사망사건. 중요한 증거인 배가 폭발해버렸기 때문에 사망사인이나 기타 사안을 알 수가 없다. 관련자료가 부족한 탓인지 픽션이라는 주장도 많다.
- 이노카시라 공원 토막살인 사건: 피해자가 국적 불명의 스파이들에게 표적으로 지목된 사람으로 오인받아서 살해당했다는 주장이 있고, 현재로선 가장 유력한 설이다.
- 제니퍼 페어게이트 사망 사건: 오슬로 플라자(Oslo Plaza)에서 제니퍼 페어게이트(Jennifer Fairgate)라는 가명을 댄 여성이 의문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 사망한 여성의 신원은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자살로 보았으나 특이하게도 여성이 갖고 있던 가방에는 25발의 총알과 라벨이 잘린 상의가 여러 벌 있었다.
- 카이론 호먼 실종 사건: Kyron Horman. 미국 오리건 주의 유명한 아동 실종 사건으로, 실종 당시 나이는 7세. 초등학교에서 하교하던 길에 실종된 이후로 행방이 묘연하다.
- 케이옐린 라우더 실종 사건: 케이옐린 라우더(Kayelyn Louder)라는 30세 여자가 실종된 사건. 마지막 목격은 CCTV에 찍힌 것으로, 비를 맞고 맨발로 밖을 돌아다니며 혼잣말을 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실종자 사진) 그리고 실종 2개월 후 한 강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부검 결과 사인을 판단할 수 없어 아직도 수사가 진행 중이다.
- 코리 맥키그 실종 사건: Corrie McKeague. 영국 공군 소속으로 2016년 실종 당시 23세. 서퍽 주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Bury St. Edmunds) 시의 한 길가에서 마지막 뒷모습이 CCTV로 촬영되었다.
- 킴벌리 모로 실종사건: Kimberly Moreau. 실종 당시 17세로, 미국 메인 주에서 1986년 5월 10일에 발생한 사건. 이후 2015년 9월경 유튜브에 "00b4a56" 이라는 요상한 채널이 이 사건 당일에 찍은 캠코더 영상과 함께 암호화된 숫자 영상들을 올리다가 계정 정지를 당해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미해결 사건이다.
- 티모시 핏젠 실종 사건: 2010년대 서구에서 유명해진 아동 실종 사건으로, 일리노이 오로라 시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간혹 '오로라 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실종 당시 티모시 핏젠(Timmothy Pitzen)의 나이는 불과 6세. 어머니와 함께 방과 후에 즉흥적으로 리조트 소풍을 떠난 그는 얼마 동안은 어머니와 행복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CCTV에 잡혔으나, 어머니가 약물 복용으로 갑작스레 자살한 채 발견되었을 때 티모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그 이후로 영영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경찰의 백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왜 자살했는지,[11] 아들은 어디로 간 것인지, 애초에 이들이 어째서 소풍을 떠난 것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실종자 사진)
2019년 4월 티모시라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으나, 결국은 23세[12] 청년의 사기로 밝혀졌다.
- 프론-크레머르스 사망 사건: 2014년에 두 네덜란드 여성 하이커 리산 프론(L.Froon)과 크리스 크레머르스(K.Kremers)가 파나마 정글에서 실종된 후 유해로 발견된 사건. 여러 차례 911 통화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고, 심야에 찍은 알 수 없는 의도의 사진들이 다수 발견되어 당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결과적으로 단순 사고사로 매듭지어지기는 했지만 고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불명이고, 유해와 소지품이 발견된 경위 역시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 BOAC 스튜어디스 살인사건: 일명 '쇼와 최대의 미제사건'.
- YOGTZE 사건: 1984년 독일에서 귄터 스톨(G.Stoll)이 의문의 죽음을 맞은 사건. 죽기 직전에 마지막 메모로 남긴 YOG'TZE 라는 단어는 아직도 의미를 모른다.
2.3. 관련 문서
3. 역사상의 미스터리
3.1. 한국사의 미스터리
- 견훤의 능(陵): 현재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무덤이 견훤의 능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무덤이 진짜 견훤의 능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때문에 이 능의 공식 명칭도 앞에 전(傳)을 붙여 전견훤묘(傳甄萱墓), 말 그대로 "견훤의 능으로 전해지는 무덤"이다.
- 고려 말기와 관련된 미스터리
- 고종의 사인(死因): 1919년 식혜를 마시고 잠에 들었다 일어나서 차를 마신 후 사망하였다. 당시부터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어서 독살설이 꽤 설득력이 있었으며, 일본 개입설이 제기되었다. 그에 따라서 3.1 운동의 원인이 되었으나 실제로 독살당한건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일본 개입설과 관련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일단, 유사역사학에 근거한 단순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 다른 왕들에 대한 암살 의혹과는 달리, 고종에 대한 독살 의혹은 주류 학계부터가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 궁예의 출신 성분: 본인이 정말로 신라 왕자였는지 불분명하다. 일단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헌안왕의 아들이며, 어릴 때 왕실에서 쫓겨나 유모가 대신 양육했고, 후에 성씨를 김씨에서 궁씨로 바꿨다고 한다. 그런데 신라 서적인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에는 문성왕의 사촌동생인 김예라는 인물이 등장한다.[14] 그러나 김예가 궁예와 동일인물인지는 사료 부족으로 불분명하다. 여담으로 궁예가 폭군이었다는 기록이 후대의 왜곡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주류 역사학계는 이 주장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오히려 궁예가 알려진 그대로 폭군이 맞는 것으로 보고 있다. 궁예가 태봉의 수도로 삼았던 철원에서만 그에게 온정적으로 평가하는 설화가 전래되고 있고, 다른 지역에서는 그의 악평을 담은 설화가 전래되기 때문이다
- 김익상의 최후: 1923년에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이후의 행적이 매우 불분명하다. 그의 사망 연대도 책에 따라 1925년이라고 하기도 하고 1943년이라 하기도 한다.
- 김충선의 정체: 임진왜란당시 일본군의 선봉에 섰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조선에 귀화해서 일본군을 상대로 큰 공을 세우고, 이후 조선의 무장으로서 병자호란에서도 공을 세운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인물이지만 그의 정체와 일본에서의 행적이 밝혀지지 않아 학자들의 골머리를 앓게 하고 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가공의 인물'드립까지 나오기도 했다.[15]
- 김함보: 금나라의 시조가 되었다고 여겨지는[16] 김씨성을 가진 정체불명의 신라인이다.[17] 비록 '김함보가 신라인이니, 여진족이나 금나라가 모두 한국사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지만, 적어도 여진족의 지배층 중에 신라계 인물이 있었을 가능성은 주류 학계에서도 꽤나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김함보의 원래의 성씨가 여진족의 성씨인 '완안'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출신은 신라[18] 일지언정 일단은 여진계였다는 설이 힘을 얻었다. 즉, 그의 정체는 여진계 신라인이라는 것이다.[19]
- 김홍도와 관련된 미스터리
- 김홍도의 말년 행적과 사망 연도: 김홍도가 언제 죽었는지는 현재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며, 일단 1810년까지는 김홍도에 대한 기록이 나오므로 그 이후에 사망했음은 확실하다. 아래의 도슈사이 샤라쿠 미스터리와 관련하여, 김홍도가 도슈사이 샤라쿠의 정체라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도슈사이 샤라쿠의 활동 시기에 김홍도는 조선에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화풍도 김홍도의 것과는 차이가 상당하는 것도 밝혀져서 가설이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20] .
- 김홍도의 작품에 대한 위작 논란: 그동안 김홍도의 작품으로 여겨지던 작품의 상당수가[21] 동시대의 다른 화가가 그린 위작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한국의 문화예술계를 충공깽에 빠뜨리고 있다. 이 설이 사실이라면 김홍도의 화풍에 대한 기존의 학설을 모두 뒤엎어야하기 때문이다.
- 낙랑군: 한사군 중에선 세 번째로 오랫동안 살아남은 군현인데,[22] 다른 군현들이 부여나 고구려 등의 토착민 국가들의 독립이나 정복으로 인해 폐지되어 사라진 것과 달리, 낙랑군은 고구려의 발흥과 함께 패망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나서 한참 만에 또 고구려에게 정복당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등으로 관련 기록이 모순되기도 하고, 원래 낙랑군이 있던 자리에 최씨낙랑국이라는 독립국의 기록이 나왔다가[23] 느닷없이 중국 왕조의 소속 군현인 낙랑군으로 다시 언급되는 등, 관련 기록들이 개판이라서 역사학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때문에 낙랑군의 정확한 존속 기간은 물론, 중간에 등장하는 최씨낙랑국의 실체, 그리고 낙랑군의 상세한 역사가 모두 불명이다.
- 노르망디의 한국인: 1944년에 있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에 미군에 체포된 정체불명의 동양계 나치 독일군 병사로, 그의 존재에 대해서는 미국의 역사학자인 스티븐 앰브로스[24] 가 자신의 저서에서 처음 언급했다. 그 정체에 대한 가설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앰브로스 본인이 제시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일본군으로 징집됐다가 소련군에 체포되어 강제 편입된 뒤에 다시 독일 국방군에 체포되어 재징집된 한국인이라는 설이지만[25][26] ,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다른 가설로는 한국인이 아닌 중앙아시아 출신 소련군 포로가 독일군에 투항했다는 설이나[27] , 독일에 체류 중이던 동양계 사람이 징집됐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전부 도시전설 이상의 신빙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 정체불명의 동양인의 최후에 대해서도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가서 영구 정착했다는 설, 소련군에 넘겨져서 굴라그에 수감되었다는 설, 이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설이 맞다는 전제 하에 한국으로 귀국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노르망디의 한국인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28] 한국사로 간주할 수도 있고, 세계사로 간주할 수도 있다.
- 목만치와 관련된 미스터리
- 목만치의 정체: 일본서기에 따르면 목만치는 권력을 잡고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여 권세를 휘둘렀다고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국내 사서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30] 그렇기에 그의 정체를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 목협만치(木劦滿致)와의 관계: 목협만치는 개로왕 대의 귀족으로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그러나 목만치와 이름이 완벽하게 같기 때문에[31] 동일인물로 추정되지만, 목만치는 구이신왕 대의 인물이며 목협만치는 개로왕 대의 인물로 시대 차이가 나기 때문에 현재는 가설 단계에만 있다.
- 키노 오이와노스쿠네[32] 와의 관계: 키노 오이와노스쿠네는 가야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인물로, 그 정체는 일본인 내지는 가야인이나 백제인으로 추정된다.[33] 특히 한일 사학계에서는 목만치와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근대적인 민족주의 관념이 전무했던 고대인이라서 그의 국적이 무엇인지를 제끼고 생각해도, 그가 가야를 상대로 반기를 든 동기도 의문이고,[34] 이 반란은 그 대상인 백제와 가야의 여러 구성국들은 물론 고구려까지 키노 오이와노스쿠네의 동맹 자격으로 참가한 대규모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반란의 진행 과정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서 역사학자들의 의문을 낳고 있다.[35]
- 미륵사의 몰락 과정: 미륵사는 백제 무왕 대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나 발굴 조사 결과 드러난 그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무왕 이후 시기의 미륵사에 대한 기록이 빈약하다. 그래서 이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 어떻게 어떠한 과정을 거쳐 몰락해 갔는지가 미스터리다. 그간의 발굴 조사에 따르면 적어도 여말선초 시기까지는 비록 초창기에 비해 그 규모가 축소되었거나 혹은 파괴와 재건을 반복해 가면서 어떻게든 사찰로 존속하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 최종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 민승호 암살 사건: 고종 11년, 당대의 실권자 중 한 명이었던 민승호가 폭탄 테러로 인해 본인, 어머니, 아들까지 3대가 한꺼번에 사망한 암살 사건. 조선 역사를 통틀어 고관대작이, 그것도 가족과 함께 테러로 암살당했다는 건 비교할 만한 사건조차 꼽기 힘들 만큼 엄청난 일이었지만, 사건의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용의자로 흥선 대원군 혹은 그의 일파가 꼽히지만 그쪽에서 범행을 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
- 박연의 조선인 후손들: 1622년에 조선의 제주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선원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가 조선 땅에 영구히 정착한 후에 이름을 박연으로 바꾸고 조선인과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며 살다가 조선 땅에서 천수를 누리다 자연사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36] . 하지만, 개개인마다 성씨와 본관이 있을 정도로 혈통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가문마다 반드시 족보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박연의 후손들이 어찌되었는지, 그들의 혈통이 단절되었다면 언제 단절되었는지가 알려지지 않은 건 상당한 의문을 낳고 있다[37] . 때문에 2000년대에 대한민국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가 합동으로 박연의 후손을 찾는 작업에 돌입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38][39]
- 발해와 관련된 미스터리
- 대조영: 걸걸중상과 실제 부자 관계인지, 실제로 고구려의 유민이었는지 불확실하다.[40] . 또한 그가 발해를 건국한 후 그의 재위기간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 발해의 멸망 과정: 갑작스러운 멸망 과정이 의문이며, 한때 주류 역사학계 내에서 백두산 폭발로 인한 멸망설이 떠돌았었다. 다만 최근에는 발해 멸망보다 백두산 분화가 나중의 일임이 밝혀져서, 거란에 의해 수도가 예상보다 빠르게 함락됐다는게 어느 정도 정설로 굳혀지는 상황이지만, 대폭발 전에 지진이나 이상기후 등의 전조 증상으로 민심 혼란이나 왕권 약화 등의 문제를 유발해 멸망에 간접적인 영향을 줬을 수도 있고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백두산은 1000년 단위의 대분출 주기와 100년 단위의 소규모 분출 주기가 공존해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분출 시기를 알 수가 없으므로 멸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해서 백두산 폭발 멸망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 발해의 문화인류학적 구성: 발해의 언어가 어느 쪽 계통인지, 그리고 '발해인'들이 어느 민족에 가까운 이들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아직까지는 주류 학계내에서 말갈계 주민들과 고구려계 주민들이 발해 전체의 인구 수 내에서 비슷한 비율을 차지하였다는 설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말갈계가 더 많았다는 주장과 고구려계가 더 많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고, 소수 의견이지만,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융합하여 독자적인 민족인 '발해인'으로 거듭났다는 설도 있다[41] . 이는 발해어로 된 기록을 해독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발해 문자로 된 기록들이 완전히 해독되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발해사를 중국사로 볼 수는 없다는 점에는 학자들의 절대다수가 동의하는 상황이다.[42]
- 백제 무왕과 관련된 미스터리
- 무왕의 출생 성분: 여러 가설이 있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입증된 것이 없다.
- 서동요의 실체: 서동과 선화공주의 연애담은 한국사에서 매우 유명하며, 서동은 백제 무왕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무왕과 진평왕 시기에 백제와 신라는 앙숙 사이었기에[43] 무왕이 실제로 신라의 왕족과 결혼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으며,[44] 더 나아가 선화공주라는 인물이 실존인물인지조차 불분명하다.
- 익산쌍릉의 피장자: 쌍릉은 무왕과 왕후의 무덤으로 여겨지고 있었는데, 2018년 7월 17일 고고학계와 전문가들의 발굴조사 결과 대왕릉에서 발굴된 유골은 무왕의 것이 맞다는 판정을 내렸다. 소왕릉에 대해서는 2019년 재발굴 및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문자 그대로 티끌 하나도 남지 않고 전부 도굴되었기에 무덤 어디에도 피장자가 선화공주임을 알려주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으며, 피장자가 선화공주가 아님을 알려주는 증거또한 나오지 않았다.
- 백제 의자왕과 관련된 미스터리
- 모계의 의문: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무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명확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서동 설화가 사실이라면 의자왕의 어머니는 선화공주이며, 모계 가문은 신라의 왕실이 된다. 또는 기록에 남아있는 무왕의 왕후인 사택 왕후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으나, 사택 왕후는 의자왕의 친모가 아니라는 가설이 우세하다.
- 말년의 사치: 의자왕이 말년의 사치로 인해 몰락해서 나당 연합군에 패배했다는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의자왕이 일으켰던 친위 쿠데타와 성충이 옥에서 죽기 전에 보냈던 상소문[45] , 멸망 직전까지 국가 체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갔음을 암시하는 사료 등을 근거로 의자왕이 사치를 부렸다는 기록은 신라와 당이 왜곡한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46] 자세한 것은 의자왕 문서 참조.[47]
- 은고부인: 일본서기,[48]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대당평백제국비문>[49] 등의 사료에 따르면 백제 멸망에는 하시카시(大夫人)[50] 의 만횡이 원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은고부인이 요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북명: 고구려와 신라를 다룬 사서에 언급되는 나라. 위치 등 너무나 많은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일단 학계에서는 고구려에 대한 기록에 나오는 북명과 신라에 대한 기록에서의 북명은 동일한 장소가 아니라, 이름만 같은 곳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고있다[51] . 북명이라는 이름의 한자를 뜻풀이하면 '북쪽 바다'라는 뜻이므로 단순히 북쪽에 있는 나라나 부족들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라는 설도 있지만, 신라 관련 기록에 나오는 북명이면 몰라도,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 언급되는 북명은 일반명사가 아니라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부족을 가리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게 현재의 정설이다. 일단 신라 관련 기록의 북명은 함경도 일대로 비정되고 있으며[52] , 고구려 관런 기록의 북명은 만주 북부나 연해주 일대로 추정될 뿐, 어느 장소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 사육신과 관련된 미스터리
- 사육신 역사성 논란: 사람들이 사육신에 대해 알고 있지만, 사육신 구성원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김문기 포함 논란: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된다는 주장에 따라 새롭게 헌창되었으며, 사육신묘에 추가되었다. 하지만 김재규가 학계에 김문기를 사육신에 포함하라는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있으며, 사육신 문중과 금녕 김씨 문중 간의 지속적인 갈등을 빚고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여전히 사칠신이라 하지 않고 사육신이라 하고 있으며 김문기를 포함하지 않고 있으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육신과 그 구성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김문기가 진짜 사육신의 일원인지 알 수 없다.
- 석탈해의 출신지: 석탈해의 출신 성분에 대하여 삼국사기에서는 왜국의 동북쪽 1천리에 위치한 다파나국[53] 의 왕자였노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이 다파나국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일컬어지고 있다. 일단 석탈해 관련 설화에서 그가 가야의 왕위를 두고 수로왕과 대결을 벌이다가 패했다는 얘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석탈해가 어느 지역의 유력자 출신임은 분명하다고 보고있다. 석탈해에 정체에 대해서는 종래에는 인도 출신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고[54] , 그 이외에 현재 유력시되는 가설로 캄차카 반도 출신설[55] 과 사할린 및 일본의 도호쿠 지방, 홋카이도 출신설[56] , 한반도 동북부에서 이주한 옥저계나, 동예계 유이민 설, 현재의 강원도 지방에서 이주한 토착 부족 출신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 성한왕: 신라의 태조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지만[57] , 이 사람이 누구인지가 밝혀지지 않았다. 일단 주류 학계는 기존에 알려진 왕들 중의 한명에게 올려진 왕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소현세자: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례로 꼽힌다.
- 안시성주의 정체: 흔히 그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근거가 없다. 사실 안시성주의 본명은 물론, 고구려-당 전쟁 전후에 그에 대한 기록조차도 남지않아서 그 정체를 추정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미스터리
- 북위의 백제 침공: 《삼국사기》뿐 아니라 당대의 기록인 《남제서》에서도 언급되는 사건으로 북위와 백제가 총 3차례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북위가 어떻게 고구려와 바다를 지나 백제에 도달한 건지, 또한 왜 침공한 것인지 고대 기록의 부재로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북위가 백제를 침공하려면 바다를 건너거나 육상으로 왔다면 고구려의 영토를 통과해야하는데, 어느 부분이든 미스테리 하다. 자세한 것은 동성왕 항목 참조.
- 영조, 정조의 치세와 관련된 미스터리: 영조와 정조의 치세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우선 몇 가지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첫째로, 영조와 정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왕들 중의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권력을 견제할 세력이 전혀 없었다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둘째로, 노론은 이들은 물론, 그 가족들에게도 어떠한 해코지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술했듯이, 영조와 정조의 권력은 매우 강력해서, 노론 측에서 이들의 권력에 발목을 잡는 것은 고사하고, 이들의 생전에 왕권을 견제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못했고, 그럴 의도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65] . 애초에 영조와 정조, 사도세자가 모두 노론과 한패였던 만큼[66] , 구태여 목숨걸고 같은 편을 팀킬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노론은 이미 각각 뒷날의 시파와 벽파로 이어진 남한당과 북한당으로 분열되어있어서,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67] . 심지어 노론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정조와 사도세자의 적으로 지목한 정순왕후 김씨와 그녀의 친정인 경주 김씨 가문, 그리고 화완옹주[68] 마저, 실제로는 두 부자의 열렬한 지지자였다[69] . 마지막으로, 사도세자는 노론이 아닌 아버지 영조에 의해 직접 죽임을 당했다는 것과 정조가 암살당한 게 아니라 자연사했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가 48살에 죽었다는 점에서 요절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전근대 시대 군주들은 워낙 격무에 시달리다보니, 평균 수명이 4, 50대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 역시 정조와 비슷한 44살의 나이로 병사했으며, 세종대왕 역시 50대의 나이로 과로사했다. 되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당대 군주들치고는 상당히 장수한 케이스다. 게다가 딱히 군주가 아니더라도 전근대 시절까지는 평민들조차도 4, 50대에 죽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정조는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선 가장 평범한 인생을 살았고[70] , 일국의 군주라서 격무에 시달리던 그의 삶을 돌아보면, 언제 질병이나 과로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71] .
- 나경언 고변 사건의 동기: 임오화변의 1차적인 원인이 된 사건으로, 나경언이라는 인물이 사도세자가 저지른 많은 비행에 대해 영조에게 폭로하여,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하지만, 노론 음모론에서 노론의 사주로 이런 비행을 폭로했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역사학자들이 당대의 기록들을 대조해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나경언이 그 어떤 배후도 없이 단독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노론 측에선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한 것에 대해 되려 대노하여 나경언의 목을 벨 것을 청하는 한편, 세자에게 선처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기록 또한 발견되며, 이 역시 당대의 여러 기록에서 교차검증이 된다. 그래서 이 사건은 그가 단독으로 일으킨 일임은 분명하다고 보여지지만, 대신들조차 영조의 편집증적인 성격을 알아서 세자의 악행에 대해 쉬쉬하던 것을, 나경언이 무엇하여 죽음을 불사하고[59] 사실을 밝힌 것인지가 의문이다[60] .
- 임오화변의 내막: 사도세자의 죽음의 과정을 담은 기록이 정조에 의해 사라지면서 역사학자들의 골을 부여잡게 하고 있다. 관련 기록을 파기할 것을 지시한 사람이 영조라는 설도 있는데, 기록을 삭제한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영조에서 정조의 치세 기간 동안에 임오화변과 관련된 기록이 대거 삭제되었으므로, 현재로서는 이 참극을 눈 앞에서 직접 목격한 혜경궁 홍씨나 화완옹주, 또는 당대의 여러 대신들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상황을 재구하는 수 밖에 없다. 영조가 앓고있던 정신질환[61] 이나, 이복형인 경종의 죽음의 원흉이라고 의심받던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62] 에 심하게 시달렸다는 점떄문에, 학계에서는 임오화변의 원인은 정치적인 원인이 아닌 왕실 내부의 가정사 문제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고 있다.[63] 하지만, 그것만 논하기에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가한 학대가 당대의 대신들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었기 때문에, 꼭 그것만으로 아들을 죽여야했는지가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 정조의 암살을 기도한 자: 정조에 대한 암살기도에 대해 논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첫째로 정조는 절대로 암살로 죽은 게 아니라 자연사했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에 대한 암살을 기도한 자가 누구든지 간에 노론은 절대로 정조의 암살을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초에 노론은 임오화변[64] 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분열되었으며, 정조 본인은 이들 중에서 어디에 속해있던지 간에 일단은 명백히 노론에 속해있었다. 그래서 딱히 정조를 죽일 필요도 없고,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던 당시에, 과연 누가 그를 암살하고자 했는지가 의문이다. 세손 시절부터 암살 위협을 받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개인적인 원한이 동기였거나, 암살 위협 자체가 정조가 왕권 강화의 명분을 만들고자 날조한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런 기록이 나온 이유에 대해서 합당한 해석이 나오지 않고 있다.
- 효장세자의 죽음: 영조의 서장자로 1728년 10세의 어린 나이에 병으로 단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요절에 대하여 영조가 직접 친국한 기록이 있고 매흉에 대한 기록과 독살에 대해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으며 관련이 있으리라 추측되는 선의왕후의 죽음도 석연치 않다. 하지만, 절대왕권을 행사한 영조의 치세 하에서, 대체 누가 효장세자나 선의왕후, 정조에 대한 암살을 기도하느냐가 의문이다.
- 윤동주, 송몽규 생체실험 피해 논란: 이른바 '마루타'로 불리는 생체실험의 피해자들 중에 윤동주와 그 사촌 형인 송몽규가 있다는 주장은 예전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지만, 거의 음모론에 가까운 수준이어서 상당한 기간동안 학계에서는 무시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기록에서 생체실험의 정황이라고 추정되는 서술이 발견되면서, 주류 학계에서 실제로 이 둘이 생체실험의 희생자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 원균의 최후 행적: 칠천량 해전 당시 전사했다고 전해지나 이는 선전관 김식의 장계를 통해 알려진 사실일 뿐, 그가 전사하지 않고 살아서 전장을 빠져나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 을미사변: 대부분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흥선 대원군과 친일 개화파가 개입했다는 야사가 있다. 또 에조 보고서, 베베르 보고서 등 기록들이 남아 있어 어떤 기록이 사실인지 알 수 없다.
- 을지문덕의 출신 성분과 최후: 당대 아시아의 최강대국이던 수나라를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72] 엄청난 전과를 거뒀음에도 그의 출신 성분이나 최후에 대한 기록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의문이다. 그래서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당나라에 이름이 비슷한 울지경덕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점과 을지문덕의 성 또는 직위명이라고 추정되는 '을지'가 퉁구스제어로 사신을 뜻한다는 점[73] 에서 외국계 귀화인이거나,[74] 고구려 후기에 신진 권력층으로 성장한 하급 귀족 출신이라고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최후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고구려-수 전쟁 이후에 그가 어찌되었는지는 불명이다.
- 의열단의 정체불명의 조력자: 김원봉을 포함한 의열단 소속 독립운동가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이 의거에 사용하기 위한 폭탄 등의 무기를 지원해준 지속적으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에 최재형과 신용호[75] 같이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해준 민간 사업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의열단 단원들이 언급하는 이 조력자는 한국인이 아닌 헝가리인이며, 때문에 출신 국적에서 따온 가명인 마자르[76] 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으며[77] , 심지어 광복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 이상의 문학인 데뷔 동기: 건축 기사로 일하다가 시인으로 등단한 기간 중 2년의 시간 동안 행적이 밝혀지지 않았다. 장래 유망한 인물이 갑자기 배고픈 시인이 된 계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임나일본부설: 현재 일본의 극우들이 오늘날의 가야 일대를 왜국이 정복하고 다스렸다는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도 근거가 없는 설이므로 학계의 인정을 전혀 받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로 임나일본부라고 할 수 있는 정체불명의 기관에 대해 일본서기에 기록이 된 부분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히 답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가야의 여러 소국들과 일본 간의 외교를 위해 설립한 외교공관이라는 설과, 이 설의 축소판으로 가야에 상주하며 외교 창구 역할을 하던 일본 사신의 직함이라는 설[78] , 가야 영토 내의 일본인 거주지를 정복 활동의 결과로 왜곡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설로는 백제의 가야 침공에 대한 기록을 일본 측에서 자신들의 활동으로 왜곡했다는 설과, 자연재해를 피해서 가야로 피난한 일본인 난민들의 일시적인 거주지라는 설, 일본어족이 성립한 후에 한반도에 잔존한 일본계 소수민족에 대한 기록이 남았다는 설도 있지만[79] , 한국과 일본 양국의 학자들도 어느 쪽으로도 자신있게 비정하지 못하고 있다.
- 장영실과 관련된 미스터리
- 장영실의 몰락 원인과 최후: 황희나 조말생은 뇌물이나 비리로 사형당할 뻔 했다가 겨우 사면 받았는데에 비해, 조선시대의 과학에 큰 업적을 남겼던 장영실은 가마 사고의 문제로 곤장 80대형을 받았다. 이런 세종대왕의 다른 모습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의구심을 들게 했다. 이렇게 과학에 대한 호기심때문에 그를 중용하고도, 왜 사소한 실수 하나로 그를 완전히 실각시켰는지에 대해 확실한 설명을 하는 학설은 없으며, 실각 이후에 장영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80] . 다만 온수역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건강이 좋지 않던 세종은 온천 같이 자기 건강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여느 전제군주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장영실의 몰락도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아니다. 장영실이 만든 문제의 가마는 세종이 온천여행을 할 때 타고 다니려고 만든 가마였는데 만약 그게 실제로 사용되다 부서져버렸다면 탑승자(세종)가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세종실록에 의하면 장영실 본인이 '이 가마는 부서지지 않을 겁니다'라고 호언장담했으니 왕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죄도 추가되고... 그나마 세종이 성품이 어진 임금이었으니 장영실이 한 번의 잘못으로 비참한 말년을 보냈을 가능성이 낮은 것이다. 만일 장영실이 모셨던 임금이 인조나 연산군 같은 영 좋지 못한 성격의 소유자였더라면...
- 장영실의 출생 배경: 장영실이 본래 동래부 소속의 관노였던 사실은 매우 유명하지만, 그가 노비의 삶을 살게 된 원인은 수상쩍은 부분이 많다. 우선 그의 본관인 아산 장씨의 족보에는 그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은 등재되어 있지않다. 특히 중간에 면천되었다고는 하나, 당시까지는 일부 상류층들만 족보를 따지던 조선 초기에 노비가 본관이 있었다는 점, 아산 장씨 문중들이 족보에 이런저런 윤색을 가했을 가능성을 고려해도[81] 장영실의 증조부는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당대의 역사 기록으로도 교차검증되는 사람이라서, 그가 본래는 꽤 이름있는 집안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때문에 장영실이 노비로 태어나게 만들었던, 집안의 몰락의 원인에 대해서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아산 장씨 가계가 원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한반도로 이주한 중국인 가문이라서 외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조선의 조정이 이들을 배척하고 노비로 강등했다는 설이나[82] , 장영실의 조부가 고려의 충신이어서 조선 왕조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다가 노비로 굴러떨어졌다는 설이 있지만[83] , 여말선초의 혼란으로 인해 소실된 기록이 많아서 자세한 사정이 알려져 있지 않다.
- 저고여 피살 사건: 여몽전쟁의 단초가 된 사건이지만, 당시 고려를 방문했던 몽골 사신인 저고여를 살해한 자가 누구인지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한나라가 자국의 사신이 고조선을 방문했다가 살해당했을때 지체 하지않고 바로 침략을 했다는 사례에서 보듯, 저고여를 죽인 범인이 고려 사람이였다면 몽골 측에서도 곧바로 고려를 침략해서 정복 하려고 했을텐데, 몽골은 사건이 발발한 1225년이나 이듬해 1226년에 침공하지 않고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서 잊혀질 법도 한 1231년에 침공했다. 그리고 고려는 저고여가 피살 당한 장소가 자신들의 관할 영토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자신들의 범행을 부정했고 금나라를 지목했다.
- 전태일의 분신#s-1 사건: 전태일의 몸에 불을 붙인 김개남(가명)[84] 이 누구인지 아직도 밝혀진 것이 없다. 그나마 알려진 정보는 전태일 평전에서는 그가 전태일과 친했으며 함께 노동 인권 운동을 한 자라는 묘사가 있다. 사건의 여파를 생각하면 당시 경찰이나 정보 기관 등에서 찾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어째 언급되는 경우가 없다.[85] 정황상 주위 사람들은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결과적으로 자살을 도와준 것이 되기에 전태일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끝내 그의 정체를 밝히지 않아 미스터리로 남았다.
- 정여립 모반 사건: 날조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모반인지 모함인지를 입증할 증거들이 3년 후에 일어난 미증유의 국난 이후 소실되는 바람에 남아 있지 않아 아직도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개수 실록에서도 설명을 잘 못해주는 것은 마찬가지. 정여립 문서도 참고하기 바람.
- 제국익문사: 대한제국 시기에 고종의 주도로 설립된 관영 언론사이자, 첩보기관으로 고종의 밀서를 외국 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준 단체다. 문제는 그만큼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도 매우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며 활동했던지라, 여기에 속해있던 인물들이 누가 있었는지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 제4공화국과 관련된 미스터리: 제4공화국은 유신 체제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기나긴 독재 시기였던데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금기의 사안으로 여겨졌고 친박 등 다양한 정치 세력이 남아 있어 끝내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 10.26 사건: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을 암살한 원인은 2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차지철과 김재규 간의 충성 및 2인자 권력 경쟁설, 부마항쟁설로 나뉠 수 있으나,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또,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을 암살하고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갔는데, 마찬가지로 왜 그 쪽으로 갔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미국 개입설과 북한 개입설[86] 도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 김형욱의 실종: 한때 박정희 정권 하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낼 정도로 그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김형욱은, 이후에 이후락과의 대립으로 인해 모든 권력을 잃고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그 이후에 영영 실종되어버리고 1979년에 대한민국 법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망처리되었다. 일단 그의 나이로 보아서는 천수를 누렸다고 해도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사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이 더 큰데 프랑스 파리 근교의 양계장에서 분쇄기에 갈려 죽어 닭모이가 되었다는 야사가 있다. 공식적으로 김형욱의 죽음이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만일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게 사실이라면, 그 범인은 박정희의 지령을 받고 파견된 마피아들이나 대한민국의 첩보원들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들이 그의 실종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87]
-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사람들은 문세광이 박정희를 저격하는 과정에서 육영수가 저격당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발견된 탄두가 없다는 점, 그의 허벅지가 멀쩡한 점, 총알 하나가 권총에 남아 있다는 점, 그가 탔던 차량이 위장 번호판으로 달려 있었다는 점을 들어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 장준하의 사인(死因): 등산 중 실족에 의한 사고사로 발표되었으나, 타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으며, 제4공화국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남아 있다.
- 제5공화국과 관련된 미스터리: 이는 지난 문민정부 시절 단행된 12.12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관련 수사와 사법 처리과정에서 끝내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 5.18 민주화운동 발포 명령자: 5.18 민주화운동 왜곡과 관련된 부분들이 많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 최규하 대통령 하야: 최규하 전 대통령의 하야가 본인의 의사였는지, 신군부의 압력에 의해서였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또 그가 하야한 이후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출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 중종 시기의 괴수 출현 소동: 아래의 제보당의 괴수 사건과 더불어 역사학자들과 동물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역사적 기록이며, 현재는 중종반정 직후 불안한 정세를 반영하고 있는 집단 히스테리 내지는 실존하는 맹수인 호랑이나 곰, 표범 따위를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있다. 영화 물괴의 주요 소재.
- 태조왕 시기에서부터 신대왕까지의 삼국사기의 기록: 태조왕에서부터 차대왕, 신대왕까지의 기록은 상당히 불분명한 점이 많다. 우선, 태조왕과 차대왕, 신대왕 본인들부터 명림답부와 같은 그들의 신하들까지도 생몰 기간이 터무니없이 길게 기록되어 있는 점이나, 태조왕이 국가의 시조에게나 붙여지는 태조(太祖)라는 왕명이 붙여진 이유가 역사학계의 오랜 떡밥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김부식이 견강부회식으로 왕과 그 대신들의 수명을 어거지로 끼워 맞추었거나[88] , 당대의 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설만 난무할 뿐, 그 어떤 것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 한반도의 고인돌: 고인돌은 비단 한반도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발견되는 유적이긴 하지만 유독 한반도에 많이 집중되어 있다[89] . 이처럼 한반도에서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해명된 바가 없다. 일단, 한반도는 타 지역에 비해 적은 노동력으로 고인돌을 쉽게 만들 수있는 지형이 많다고 하지만, 그래도 무거운 돌을 이용해 어떤 구조물을 만드는 것 자체가 상당히 중노동에 속해서, 이를 만든 목적도 불분명하고 무엇보다도 이런 것의 공사를 강요할 권력자가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고인돌을 만든 것 자체가 많은 의문을 남기는 상황이다.
- 함흥차사: 아버지 태조가 아들 태종이 미워서 함흥에 갔으며, 이에 태종은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차사를 함흥에 보냈으나 태조가 그들을 죽였기 때문에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아들 태종이 태조를 지지하는 인사들이 태조와 접촉하지 못 하도록 그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 해씨 고구려설: 한때 고구려 왕실의 성씨가 초창기에는 해씨였다가 고씨로 바뀌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다. 그 근거로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가 해씨인 것과 왕실의 출신 부족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뀌었다는 것이 제기되었지만[90] , 현재 주류 역사학계는 해씨=고씨이고[91] , 원래부터 고구려 왕실은 고씨였다고 보고있다.
- 허가이의 최후: 북한으로 귀국한 고려인들이 주축이 된 조선로동당 내 세력인 소련파의 수장이던 허가이는 6.25 전쟁의 종전을 앞둔 1953년에 평양 시내의 방공호 안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는데, 통상적으로는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없고, 오히려 그 이후로 소련으로 망명한 허가이의 딸은 아버지가 김일성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었음을 호소했고, 반대로 허가이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탓에 알려진대로 자살을 했을 것이란 설이 있으나, 단편적인 증언 이외에는 그의 죽음의 과정을 알 수 있는 사료가 전혀 없어서 허가이의 최후에 대해 역사학자들 중 그 누구도 자신있는 설명을 하지못하고 있다.
- 헤이그 특사와 관련된 미스터리
- 이준의 사인(死因): 황성신문의 장지연이 이준의 사인에 대해 할복 자살설을 제기했으며, 한편 뉴욕 타임즈에서는 자살설을 제기했다. 한편 현지의 한 언론은 이준이 뺨 종기를 앓았으며, 종기 처치 도중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한 것으로 보도했다고 한다는데 출처는 확실하지 않다. 또 하나의 유력한 설은 감기로 인한 사망이다. 이준을 포함한 특사 3인이 회의장 앞에서 입장을 요구할 때 헤이그에 큰 비가 내렸는데, 이때 이준이 고뿔이 걸려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것. 이런 설들을 종합한다면 이준이 감기에 걸린 가운데 몸을 돌보지 않고 외교전을 펼쳤고 면역력이 약해진 가운데 세균에 감염되어 단독에 걸렸고 사망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설은 이준이 헐버트의 미국외교의 성과와 이위종의 복귀를 기다리다가 병세가 악화되었을 거란 추측을 하고 있다. 또, 일각에서는 일본 독살설이 제기되고 있으나 정확한 사인을 밝히지 못 하고 있다.
- 이위종의 말년 행적과 최후: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인공 3명 중 한 명이다.[92] 헤이그 사건 이후에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 귀족 여성과 혼인했다는 것과 소련 건국 이후에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여 소련 육군의 장교가 되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1924년에 이때까지 자신의 행적을 자서전 형식으로 작성해 당에 올린 이후의 행적이 일절 알려져 있지 않다.
- 홍길동의 최후: 체포된 이후의 행적이 불분명하다. 체포된 이후에 탈옥해 오키나와로 가 활약했다는 설이 있으며, 류큐 섬의 호족인 오야케아카하치(オヤケアカハチ)와 홍길동이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다만, '홍길동=오야케아카하치' 설은 이미 주류 학계에서 부정되었다.
- 황옥: 영화 밀정의 등장인물인 이정출[93] 의 모델이 된 사람이다. 현재까지도 주류 역사학계 내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인지 독립운동가인지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인물인데, 그와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약산 김원봉이 그를 끝까지 의열단의 일원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본래 친일 성향의 인물로서 의열단에 잠입한 스파이였다가 의열단 단장이던 김원봉에게 감화되어 진짜로 독립운동가로 돌변한 인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94]
3.2. 세계사의 미스터리
- 11대 판첸 라마의 행방과 생사 여부: 1959년에 중국이 티베트를 합병하고 지배한 뒤로, 인도로 망명하는 데 성공한 14대 달라이 라마와는 달리, 10대 판첸 라마는 그대로 티베트에 남았는데, 그가 입적한 후에 게둔 최키 니마가 11대 판첸 라마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에 중국 공산당은 게둔 최키 니마를 납치해서 숨겨버린 뒤에, 친중 성향의 걀첸 노르부를 11대 판첸 라마로 옹립했다.[95] 당연히 절대 다수의 티베트인들과 14대 달라이 라마, 전세계의 티베트 불교 신자들은 걀첸 노르부의 판첸 라마 즉위를 부정하고 있으며, 사라진 정통 판첸 라마인 게둔 최키 니마의 행방에 대해 해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2021년 현재까지도 중국 공산당 측은 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96]
- 갈족: 오호십육국시대 당시에 중국의 북부를 침공하여 전조 및 후조 등의 나라를 세운 정체불명의 민족들이며, 후조가 멸망할 시에 염위를 세웠던 염민[97] 에 의해 종족의 대부분이 학살당하면서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역사학자들은 갈족의 정체를 코카소이드계나 튀르크계[98] , 또는 예니세이계[99] 중 하나일 것이라고 보고 있지만, 갈족의 언어나 문화에 대한 기록[100] , 혹은 그들의 유골같은 것도 거의 발견된 적이 없어서, 이들의 정체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
- 건문제: 사망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도 밝혀진 바가 없고,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 과야킬 회담: 남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되는 회담으로, 남아메리카 독립의 거물 두 사람인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 마르틴[101] 이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벌였던 이 회담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102] 일단 볼리바르가 공화주의자였던 데 반해, 산 마르틴은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는 점[103] 에서 갈등을 빚은 것이 과야킬 회담의 전말이 아닌가하는 추정은 있으나, 회담의 내용이나 진행 과정, 그 결과는 밝혀진 바가 없다. 확실한 것은 회담 당시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굉장히 냉랭했고, 회담 이후에 산 마르틴이 아르헨티나에서 추방당하여 프랑스로 망명했다는 것뿐이다.[104]
- 관체족: 오늘날의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 살던 토착민들로, 베르베르인과 동계의 민족이라는 것을 빼면, 이들의 전반적인 문화나 생활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17세기 이후로 관체족은 모두 절멸했지만, 현대 카나리아 제도 주민들의 혈통에 관체족의 피가 섞여있다. 특이하게도 이슬람교를 믿지 않았던 몇 안되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 계열 민족들 중의 하나이다.[107]
- 귀마르의 피라미드: 카나리아 제도의 원주민들인 관체족이 세운 피라미드형의 건축물로, 원래 고고학계에서는 관체인들이 해풍을 막기 위해 조성한 바람막이 벽이나,[105] 농사짓다가 골라져 나온 돌들을 버린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탐험가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토르 헤이에르달이 귀마르의 피라미드들의 서쪽 계단은 동짓날 아침의 일출 방향을 따라 조성되었음을 밝혀내어, 이 피라미드가 당대의 천문학 지식을 적용하여 인위적으로 지었음을 밝혀내면서, 관체족들이 이를 어떻게 지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관체족이 체계적인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중앙집권제 국가를 세운 것도 아니라서[106] 피라미드의 건축 배경이나 건설 방식은 상당한 의문을 낳고 있다.
- 광서제의 죽음: 당시에는 병사로 발표되었지만 2008년 중국의 조사결과 비소가 발견되어서 독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의심가는 인물로는 서태후와 위안스카이가 있으나 확실치 않고 황위가 고작 3살인 푸이에게 넘어가고 서태후도 이틀 후 급사하였다. 그나마 개혁 의지가 있던 그의 죽음으로 청나라는 그대로 멸망하게 되었다.
- 괴베클리 테페: 최근 들어서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을 하악거리게 하고 있는 유적지. 수메르 문명의 건설 이전에 만들어진 유적지인데, 무려 기원전 11,000년경의 건축물이다. 일종의 종교적 성소였다고 추정되는 이 유적지 때문에 종교나 체계적인 건축물의 건설이 신석기 시대에 농업이 등장하고 나서야 이루어졌다고 여겨지던 기존의 학설을 크게 수정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몰타의 타르신 신전이나, 역시 몰타에 있는 바퀴 자국 지형이 있다.
- 그리고리 라스푸틴: 사망 원인 및 이전의 행적이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성립 과정: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 중의 태반은 인도유럽어족 신화의 신이나 그리스 지역의 토속신이 아닌 비(非) 그리스계 신화에서 기원한 신들이다. 예를 들면, 헤라는 아나톨리아 반도 선주민들의 지모신이며,[108] 아폴론, 아르테미스 남매와 그들의 어머니인 레토 역시 그 기원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토속신이었다. 게다가 헤르메스는 아예 무슨 신화의 신이 기원이 된 게 아니라, '건너서 넘어가다'라는 추상적 개념에서 기원한 신이다. 이렇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의 기원을 밝히는 문제는 곧, 그리스인과 그리스어의 기원을 밝히는 문제와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 이런 연구에 의한 결과로, 그리스인은 지금의 캅카스에서 기원한 민족임이 밝혀진 바 있고, 여기서 아직 캅카스에서 살고 있는 인도유럽어족 계열 민족인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이 동계라는 주장까지 나와 주류 학계의 진지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109]
-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을사의 변에서 나카노오에 황자와 함께 소가노 이루카를 죽이고 소가씨의 몰락에 큰 기여를 한 동시에 다이카 개신의 주역이며 후지와라의 시조인 인물이지만, 일본서기에서의 기록만 보면 매우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그가 백제계 도래인임을 암시하는 정황 증거가 매우 많기에 도래인이라는 가설이 우세하며, 일본 사학계에서는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행적이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과 상당히 겹친다는 점에 주목하여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와 부여풍이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을 제기하고 있다.[110]
- 난마돌: 미크로네시아 현지의 토착민들이 세운 도시였는데, 이곳이 왜 버려지고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도시가 되었는 지가 불명이다. 애초에 미크로네시아 토착민 문명 자체가 이걸 세운 이들이 지금의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오스트로네시아계 민족들이었다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밝혀진 바 없다. 다만, 난마돌과 관련된 설화가 미크로네시아 연방 현지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되고 있으므로, 이 설화가 난마돌과 관련된 역사를 밝혀줄 중요한 열쇠로 여겨진다.
- 노자: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 〈노장신한열전〉에 따르면 잉태 후 81년 만에 출생했고, 주나라 수장실의 관리를 지낼 때 공자와 회견했으며, 주나라를 떠나는 길에 관윤을 만나 《도덕경》을 저술하여 전해 주었다고 전해지는데, 사마천의 기록에 따른다면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 인물로 간주되지만 오늘날에는 노자가 공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인지, 나아가 노자라는 인물 자체가 실존 인물인지 여부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노자가 저술한 《도덕경》 역시 노자가 직접 저술한 것인지, 아니면 미지의 인물이 노자의 이름으로 펴내거나 가탁(假託)한 것인지 알 수 없다.
- 대 모라비아 왕국: 체코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인데, 멸망 직전의 과정이 기록의 부족으로 인해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111] 말하자면, 위의 발해의 유럽 버전인 셈이다. 대 모라비아의 멸망 이후에 체코의 정치적 헤게모니는 보헤미아 왕국으로 넘어간다.
- 데린쿠유: 아나톨리아 반도의 카파도키아에 위치한 지하 도시의 유적으로, 당대의 첨단 과학 기술들이 총동원되어 건설된 도시이다.[112] 문제는 이런 도시를 세운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인데, 한때 학계에서는 로마 제국 초기에 기독교인들이 탄압을 피해 숨어들어가느라고 세운 도시였다는 주장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졌으나, 도시의 건설 시기가 로마가 있기도 전인 기원전 2000년경이라는 게 밝혀지면서[113] , 기독교인의 피난처로 세워졌다는 가설은 부정되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용도로 처음 만들어진 도시가 로마 제국 시기에 기독교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용도가 변경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114]
-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齋 寫樂): 일본의 천재적 풍속 화가로 1794년에 갑자기 등장하여 불과 10개월 동안 작품 145점을 남기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그의 정체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때 샤라쿠의 정체가 조선의 화가 김홍도라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었으나, 샤라쿠가 활동했던 1794~1795년에 김홍도는 조선에 있었음이 공식 기록에서 확인되었다.[115]
- 라울 발렌베리: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될 뻔한 수많은 유대인들을 스웨덴 시민권자로 둔갑시켜서 구출해낸 의인으로, 소련에게 납치된 후의 그의 최후가 미스터리이다. 가장 유력한 설은 소련군에 의해 굴라그에 수감되어 사망했다는 설이다.
- 라이 텍: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말레이시아 공산당의 서기로 일제 패망 후 그가 일본의 스파이였음이 밝혀졌다. 심지어 일본뿐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에도 부역한 3중 스파이였다. 문제는 라이 텍이라는 이름부터 그가 사용한 50개가 넘는 가명 중 하나이며 출생년도, 출생지, 성장과정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116] . 또한 1946년에 공산당 자금을 횡령한 후에 행방불명되었다. 가장 유력한 설은 말레이시아 공산당의 부탁을 받은 베트남 독립당원들에 의해 살해 된 후에 메난 강에 수장됐다는 것이지만 이 설은 말레이시아 공산당에서 부정하고 있다.
- 람캄행 대왕의 실제 행적: 람캄행 대왕이란 태국 역사의 첫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수코타이 왕국의 명군으로, 오랫동안 태국인들의 민족 영웅으로서 추앙받아왔으나,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이 위조된 것일 가능성이 유력해지면서 람캄행의 실제 행적과 더불어 비문에 등장하는 수코타이 왕국의 발전상의 실체가 크게 의심받고 있다[117] . 만일 람캄행의 행적과 수코타이 역사가 이 비문을 통해 조작된 것이라면, 태국의 초기 역사 전체를 몽땅 수정해야 할 것이다.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협력했던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국민당의 원로 정치인인 랴오중카이가 암살당한 것지만, 정작 이 사건의 배후가 누구인지가 밝혀진 바가 없다[118] . 국민당 좌파가 이 사건으로 큰 이득을 봤으나, 랴오중카이 본인이 좌파라는 점에서 이들이 배후일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또한 그의 죽음이 우파가 숙청당하는 빌미가 되었다는 점때문에 우파도 배후일 가능성은 없는지라, 2020년 현재까지 이 사건의 진실은 베일에 싸인 상황이다.
- 로마 제국과 관련된 미스터리
- 고대 로마의 초창기 역사: 황당하게도 뒷날 온 지중해를 호령하게 되는 희대의 대제국의 초기 역사의 많은 부분이 기록 부족으로 인해 수수께끼에 싸여있는 상태이다[119] . 로마 7왕에 해당하는 왕들의 정체에서부터, 로마가 당대에는 다소 생소했던 공화정 체제를 무슨 경위로 받아들였는지가 모두 의문에 싸여 있다.[120] 관련 기록이 부족해진 이유는 초창기에 켈트족의 침공으로 로마 시가 불타고 각종 공물을 뜯기면서 관련 기록들이 불타서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방화 주체: 중세 이후부터 내려온 오래된 논쟁으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운 자가 누구냐는 것이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도서관의 건립을 명령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 측근들이 직접 남긴 기록물이나, 당대의 학술서적 및 문학 작품들이 대거 소장되어 있어서 도서관의 소실은 대단히 뼈아픈 손실로 여겨지므로, 이 도서관에 방화를 저지른 주체가 누구인지 논쟁이 활발하다. 한때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방화한 주체로 무슬림으로서는 최초로 이집트를 지배한 사람인, 정통 칼리파 우스만과 그를 따라온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추정되었으나 분명한 근거가 없었고, 현대에는 되려 고대 로마 시대의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이 도서관을 불태웠다는 설도 있다[121] .
- 히스파니아 제9군단의 해산 계기와 과정: 고대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창설된 히스파니아 제9군단은 이름대로 로마의 히스파니아 속주에 주둔해있던 군단이다.[122] 이 군단은 서기 120년 경을 전후하여 갑자기 모든 사료에서 기록이 사라져버렸고, 이에 대한 전말이 전혀 알려지지 않아서 역사학자들의 의문을 낳고 있다. 독일의 역사학자인 테오도어 몸젠은 히스파니아 제9군단이 108년에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발생한 켈트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동원되었다가, 현지 반란군에게 전멸당했다는 가설을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오히려 제9군단이 이 반란에서 살아남아서 브리타니아에서 철수했고[123] , 이후에 다른 무력 분쟁을 해결하는데 동원되었다가 거기서 궤멸되었다는 설도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브리타니아 속주에서의 반란 이외에 이들을 전멸시켰던 무력 분쟁으로 오늘날의 이스라엘 지역인 유대 속주에서 현지 유대인들이 일으킨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에 있었던 파르티아와의 분쟁이 지목되기도 하나, 모두 분명한 증거가 없는 상황이다. 현재까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치세 이전에 이 군단이 완전히 해산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 로어노크 식민지: 1588년부터 1589년까지 북아메리카 지역에 세운 잉글랜드의 식민지로 'CROATOAN'이라는 의미불명의 글자만 남긴 채로 주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멸망했다. 현재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이들이 기근으로 인해 식민지를 버리고 인근의 다른 원주민 부족에 합류하여 동화되어 사라진 것으로 추정하지만, 어느 부족에 동화된 것인지가 불명이다.
- 루트비히 라이히하르트의 마지막 행적: 루트비히 라이히하르트가 누구냐하면, 독일 출신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탐험에 공헌한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였다. 1848년 당시의 뉴사우스웨일스 총독부[124] 의 의뢰로 호주 북부를 탐사하다 영영 실종되었다.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설과 탐험 도중에 기갈로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하며, 어찌되었던 간에 당시의 호주의 상황으로 보아서[125] 탐험지에서 사망한 것은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126]
- 마르틴 하이데거의 친나치 행적: 일단 마르틴 하이데거가 나치당에 가입했고 나치와 히틀러에 대해 우호적인 견해를 나타낸 바 있어 하이데거가 나치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 자체는 하이데거를 옹호하는 측에서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까지 나치에 개입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하이데거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하이데거가 나치를 지지하는 주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별다른 정치적 활동 없이 학자 본업에 충실했음을 들며 하이데거와 나치의 관계가 그리 깊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측에서는 그가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 재임 시절 유태인, 반나치 성향 교수 추방 및 나치 이념에 맞지 않는 도서 정리 사업에 협력한 점 들어 나치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에 동조한 진성 나치임을 주장한다. 특히 하이데거의 직계 제자들이 학계에서 거의 은퇴한 21세기 들어 하이데거와 나치의 관계가 그동안 알려진 것 이상으로 긴밀했다는 의혹들이 속속들이 제기되고 있다.
- 마속의 최후: 《삼국지연의》 및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를 통해 가정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처형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삼국지》 〈촉서〉 9권 마량전에는 투옥 중에 사망한 걸로, 11권 상랑전에는 상랑이 마속의 탈주를 묵인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마속의 최후에 관한 의문점을 낳고 있다.
- 마이클 록펠러 실종 사건: 록펠러 가문의 일원이며 당시 뉴욕 주지사였고 후일 부통령을 지냈던 넬슨 록펠러의 아들 마이클 록펠러가 1961년 뉴기니 탐험 도중 실종된 사건. 20세기를 대표하는 실종 사건 중 하나이며 흠좀무하게도 가장 유력한 설은 원주민에게 식인을 당했다는 것이다. 록펠러 가에 대한 평전에서도 식인종에 의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 만력제의 폐정 원인: 장거정 사후 만력제는 30여 년간 황제로서의 소임을 방기하였고, 그 결과 명은 점차 쇠망을 향해 치닫게 되었는데, 만력제가 정무를 폐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만력제에게 등이 굽고 한쪽 다리가 짧은 기형이 있었음을 짐작케하는 기록이 발견되었으므로[127] , 이 때문에 그가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국정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으리라는 추정이 주류 역사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 만세일계: 일본 극우들의 주장과는 달리, 주류 역사학계는 일본 황실의 가계가 200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단일하게 내려왔을리는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왕조가 몇번이나 교체되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황실 가문은 언제 등장한 가문인지가 불분명하다[135] .
- 진구 황후의 실제 모델: 현재 주류 역사학계는 진구 황후가 실존 인물이 아님을 명확하게 밝혀냈고, 따라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후대에 왜곡된 내용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전설의 실제 모델이 된 어떤 실존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사이메이 덴노[128] 나 히미코와 같은 실존한 여성 덴노라는 설과[129] , 야마토 조정과 관련없는 일본계 부족의 여성 추장의 침략 기록이 와전됐다는 설[130] , 신라계 도래인 출신의 실존한 여성 군주라는 설[131] 이 있지만, 각각의 학설이 진구 황후 전설의 내용과 조금씩 어긋나기 때문에 확실한 해답이 없다.
- 히미코 즉위 후부터 고훈 시대까지의 천황들의 계보: 일본 역시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전국시대다, 태평양 전쟁이다 하면서 갖은 전란에 시달린 까닭에 많은 문화재들이 소실되었고[132] , 때문에 고대사 연구에 필요한 사료들이 매우 부족한 상태다. 이에 따라서, 일본서기와 같이 임나일본부설 등의 역사왜곡에 쩔은 프로파간다조차도 일본의 고대사를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쓰일 만큼[133] ,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남아있는 사료들을 신빙성 여부와 관계없이 최대한 박박 긁어모아서 그중에서 사실인 부분만 추려나가는 식으로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해도 고훈 시대 직전까지의 역대 천황들의 계보를 자세히 알기 어렵다는 것. 일본 황실의 족보는 태평양 전쟁기 혹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온갖 윤색을 다 해놓은 결과물이라서[134] , 히미코 즉위 이후에 어떤 천황들이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왜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 측 기록에서 왜왕(=일본의 천황)이 보낸 사신들이 조공을 바치고 돌아간 기록이 있지만, 정작 일본 사신들에 의해 중국 황실에 소개된 '왜왕'들 중에서 실제 당시의 천황이였다고 추정되는 이들이 매칭이 잘 되지않는다.
- 말라가시인의 마다가스카르 이주: 언어학, 인류학적 조사를 통해 말라가시인들이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 널리 분포된 말레이-폴리네시아인들과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는데, 이들이 어떻게 바닷길이 개척되기 훨씬 이전에 동남아시아에서 인도양의 망망대해를 가로질러 마다가스카르 섬에 상륙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밝혀지지 않았다. 말레이인은 전근대 시기부터 이미 캐터머런이라는 전통 배[136] 를 이용해 태평양을 항해하기도 하고 그것으로 이미 11세기에 남아메리카에 도달한 적도 있으므로, 마다가스카르도 이런 배를 타고 왔다고 볼 수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이 배로도 당시에 동남아시아에서 동아프리카 방향으로 인도양을 횡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137] . 무역풍이라고도 불리는 인도양의 편서풍 때문에 서기 7, 8세기 경에나 동쪽에서 서쪽으로 인도양을 횡단할 수 있는 배가 만들어졌는데, 기원전의 말레이인들이 이게 가능했을지가 의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말레이인의 진출도 태평양이 있는 동쪽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 미노스 문명: 그리스의 크레타에 건설된 유럽 최초의 문명이지만, 이들이 남긴 기록들이 전부 해독이 이루어지지 않아서[138] 미노스 문명에서 사용한 언어나[139] , 미노스 문명의 주민들의 계통[140] , 미노스 문명의 실제 이름[141] 이 모두 불명이다.
- 미와 와사부로의 최후: 미와 와사부로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악랄하게 심문하고 고문을 한 악질 형사로, 이 시기의 경성부 시민들이라면 다들 이름을 아는 네임드 경찰이었다. 그러나 8.15 광복 이후로 갑자기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조차 그에 대한 기록이 완전히 사라져버려서 그의 최후가 어떠한지는 의문에 싸여있다[142] . 자세한 건 항목 참조.참고로 야인시대에서는 일본패망후 근무하던 경찰서에서 권총자살한것으로 나온다
- 바다 민족: 청동기 시대 지중해권 문명들의 리즈 시절을 끝장낸 장본인들[143] . 일단 그 구성에 있어서는 그리스인,[144] 시칠리아 원주민,[145] 블레셋인[146] 등의 다양한 민족들의 집합체이지만,[147] 이들의 기원이 어떻게 되는지, 왜 이집트, 미케네, 아시리아 등의 지중해의 강대국들과 충돌을 빚어가면서까지 민족 대이동을 벌인 것인지가 불분명하다.[148]
- 바수반두(Vasubandhu, 세친世親): 고대 인도 불교의 고승으로, 전승에 따르면 아상가(Asanga, 무착無着)의 아우로서 원래는 소승 불교에 속했으나 나중에 대승 불교로 전향하여 유식(唯識) 사상을 집대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소승의 바수반두와 대승의 바수반두가 진짜 동일인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대승 불교 전통이 강한 한국과 일본의 불교학계에서는 《아비달마구사론》의 저자인 소승불교의 바수반두와 유식 사상의 집대성자인 대승의 바수반두를 사실상 동일 인물로 간주하지만 서양의 인도학-불교학계에서는 소승의 바수반두와 대승의 바수반두를 다른 시대의 동명이인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 바실리 필라토프의 정체: 바실리 크세노폰트비치 필라토프(1907~1988)는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를 사칭한 인물이다. 니콜라이 2세의 가족들 중 알렉세이 황태자와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황녀의 유해는 2007년까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알렉세이와 마리아는 당시 죽지 않고 탈출했다는 생존설이 돌았다. 필라토프는 알렉세이를 사칭한 수많은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다른 사칭자들과 다른 점은 일단 다른 사칭자들은 돈을 노리고 생전에 본인이 알렉세이라고 주장했으나 필라토프는 죽기 전 유언으로 본인이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라고 남겼다. 또한 필라토프의 전체적인 골격과 얼굴 생김새 등이 알렉세이와 매우 유사했으며, 그는 일개 구두 제화공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오르간, 피아노, 하프시코드 등 여러 악기들을 연주할 수 있었고, 고전 음악과 러시아의 민속 음악, 오페라에도 조예가 깊었고 러시아의 역사에 박식했으며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포함해서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 6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필라토프는 하층민인 일개 구두 제화공의 자녀라기에는 상식적으로는 납득될 수 없는 다방면의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사기를 위해 노력 혹은 조작했다고 반론할 수도 있으나, DNA 검사 결과 필라토프의 자녀들의 유전자와 로마노프 왕조의 유전자가 일치하였다. 즉 필라토프는 로마노프 왕가의 일원이었던 것. 이러한 점들 때문에 학자들은 그가 탈출에 성공한 알렉세이 황태자라고 믿었으나, 2007년 알렉세이 황태자와 마리아 황녀의 유골이 발굴되면서 필라토프는 알렉세이 황태자가 아님이 밝혀졌다. 필라토프는 유언으로 자신이 알렉세이라고 밝혔기에 가짜 아나스타시야처럼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함이라고 볼 수 없다. 더군다나 DNA 검사 결과까지 로마노프 왕조와 일치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필라토프는 로마노프 왕조의 방계 후손이거나, 니콜라이 2세의 혼외자녀 또는 숨겨진 자녀였기 때문에 일반 귀족으로 숨겨 키워서 로마노프 왕조 숙청 때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필라토프 본인도 자신이 알렉세이 황태자의 동생 혹은 이복동생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소련 치하에서 자신의 친족들이 숙청당하는 것을 보고 신분을 숨기고 있다가 임종 직전에 그걸 공개했는데, 노년에 기억에 혼선이 생겨 자신이 알렉세이 본인이었다고 잘못 기억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필라토프 본인이 이미 사망했고, 자녀들도 필라토프의 임종 직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돼서 앞으로도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많다.
- 베이징 원인 해골의 행방: 1927년 베이징 근교 저우커우디엔(周口店)에서 발견된 베이징 원인(北京猿人, Sinanthropus Pekinensis)의 해골이 중일전쟁 와중에 행방불명되었는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소실되었다면 어떻게 소실되었는지는 전쟁이 끝나고 70여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 보이니치 문서: 발견 직후에 알 수 없는 글자들로 되어있어서 큰 화제를 모았던 미해독 문서다. 대충 중세기의 여러 가지 자연과학 지식들을 집대성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라고 짐작되었고, 최근에는 여러 여성들이 물 속에 몸을 담그는 모습이 나오는 페이지가 있는 점과 책 전반에서 여러 약초들이 두루두루 소개되는 점으로 미루어 중세 시대의 건강관리법을 다룬 책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149] . 문서에 적힌 언어의 정체[150] 가 밝혀져 있지 않고, 저자도 미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151]
- 불멸의 연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스스로 남긴 기록에서 '불멸의 연인'이라고 언급한 인물이다. 그의 젊은 시절의 첫사랑인 줄리에타 귀차르디라는 여자[152] 나 그녀를 소개해준 친구 테레제 폰 브룬스비크,[153] 그리고 그의 말년에 맞은 동명이인인 여제자라는 설도 있고, 앞서 언급한 여사친 테레제의 언니인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154] 가 불멸의 연인이라는 설도 있다. 베토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엘리제를 위하여의 '엘리제'가 이 '불멸의 연인'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도 있다..
- 빅토르 최 의문사 사건: 소련의 록 밴드인 키노의 리더였던 빅토르 최가 지금의 라트비아 영토인 투쿰스에서 차를 타고 가던 중에 다가오는 버스와 정면충돌하여 그 자리에서 즉사한 사건인데, 이 사건은 당시 공산권 국가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155] . 왜냐하면, 빅토르 최는 단순히 잘 나가는 록 스타가 아니라, 당대 가장 유명하고 활동적이었던 자유주의 운동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못마땅히 여긴 소련 당국의 수뇌부들이 그를 사고로 위장해서 고의로 죽였다는 설이 심도 있게 제기된다. 당시의 정황도 단순 사고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다.
- 사마충의 장애 원인: 사마충은 현재 기준으로 경계선 지능 내지는 3급 정도의 지적 장애를 가졌던 사람이었다. (훗날 서진의 운명과 중국의 역사를 바꿀) 이 황제의 장애에 대한 발생 원인이 의학계의 미스터리로 남은지라, 그저 선천적으로 불운한 확률에 걸렸다는 설부터 시작해서 어떤 외부 세력이 고의적으로 다치게 해서 멍청하게 만들었다는 설까지 나돈다. 유력한 설은 선천적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156]
- 사해문서: 유대교 역사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료인데, 발견 당시에는 사해 근처의 동굴에 봉인되어 있었다. 문제는 언제, 어떤 경위로 이 문서들을 봉인했는지가 불분명하다. 바빌론 유수 당시에 유대인들이 중요한 기록을 보존하고자 동굴 속에 매장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마사다 요새의 반란이 진압될 때 로마군에 의해 문서들이 반달리즘의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서 굴 속에 은닉했다는 설이 있다.
- 산해경: 지은이뿐만 아니라 그 내용 역시 오리무중이다. 책 자체만 남았다.
- 세계 대공황: 21세기에도 이 경제 역사상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여러 경제학적 이론이 있지만 왜 전례 없을정도로 강한 불황이 시작돼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전세계에 퍼졌는지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합의를 보지 못했다.[157][158]
- 센 강의 미지의 여인: 프랑스 센 강(Seine river)에서 건져올린 신원불명의 익사체로, 자는 듯이 반듯한 외모라 화제를 모았다. 일부는 시신의 얼굴이 오늘날 인공 호흡 훈련용 마네킹의 모티브가 되었다고도 하지만, 망자가 도대체 누구였는지는 불명이다. 유체의 데스 마스크
- 수메르 문명: 이들의 기원이나 타 민족과의 언어학적, 문화 인류학적 연관 관계가 모두 불명이다.
- 시바의 여왕: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솔로몬 왕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남방에서부터 찾아온 명철하고 부유한 여왕으로 묘사된다. 솔로몬에게 즉석에서 퀴즈를 냈으나 온갖 세상의 모든 학문에 청산유수처럼 통달한 모습을 보고 탄복하여 여왕이 가져온 막대한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 나온다. 그에 더해 솔로몬 왕과의 염문설도 도는 인물. 일단 남방이라고는 하나 구체적으로 이 여왕의 정체가 불명인데, 에티오피아 등지에서는 여왕을 자기네 역사에 편입시키는 모양이다.[159]
- 아나사지 문명: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미국 애리조나 주 일대에서 번성한 문명인데,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애리조나 현지의 선주민 푸에블로족의 조상이나 사촌 격의 민족이 건설했다는 것 말고는 문명의 전반적인 모습이나 멸망 원인이 의문투성이이다. 오늘날의 미시시피 강 일대에서 번성한 도시 국가군인 미시시피 문명이 이들의 후손 내지는 자매 문화권이며, 아나사지 문명과 함께 오늘날의 미국 영토에 속한 지역에서 도시 국가를 이룰 정도로 크게 번성한 단 둘뿐인 문명이다. 특히 아나사지 문명은 현대의 미국을 제외하면 앵글로아메리카 유일의 대제국이었다.
- 아돌프 히틀러: 그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해소되지 않았다.
- 아메리카 원주민과 관련된 미스터리: 거의 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아메리카 이주나, 그들과 타 민족 간의 접촉 여부에 대한 것들이다.
- 데네예니세이어족: 비교언어학계에서 예니세이어족[160] 와 나데네어족[161] 이 하나의 어족인 데네예니세이어족을 이룬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문화인류학계와 역사학계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가설의 첫 물증이 나왔다고 여기고 있다. 헌데, 둘은 실제로 기본 어휘와 문법에서 유사점이 대거 발견되었으므로, 하나의 어족을 이룬다는 설이 기정사실로 인정받고 있지만, 과연 예니세이어족의 화자들이 실제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조상인지는 확실치 않다. 거꾸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일부가 아시아로 재이주해서 오늘날의 예니세이어족 계통의 민족들이 나왔다는 주장도 있고, 실제로 아메리카 원주민들 중에서 유픽족[162] 은 실제로 일부가 알래스카에서 그들의 기원지로 추정되는 시베리아로 되돌아간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분명한 것을 알기 어렵다[163] . 거기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분화하는 과정을 학계에서 분석하는 와중에, 어느 민족이 어떤 민족의 후손인지에 대한 계통 분류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 가설을 따라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조상 민족을 특정하는 건 무리가 있다[164] .
- 최초로 아메리카 원주민과 조우한 이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아메리카에 정착한 이래로, 흔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최초로 원주민들과 조우한 자로 알려져 있으나, 콜롬버스 도래 이전에 이미 바이킹이 북아메리카 동북부 해안에 상륙한 바 있으며,[165] 폴리네시아인 역시 남아메리카 서해안에 상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66] 거기다가 고대 페니키아의 탐험가들이나, 중세기의 바스크인 어부들[167] , 혹은 정화가 이끈 명나라 대함대의 일부가 아메리카에 도달한 적이 있었다는 설도 있으며, 심지어 14세기 무렵에 성전기사단의 잔당들이 아메리카로 달아났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168] . 이에 따라 현대에 아메리카 원주민의 하플로그룹을 분석한 결과, 원주민 전체가 몽골로이드와 코카소이드가 분화되기 전에 유라시아 대륙에 살았던 고아시아 인종의 후손들임이 밝혀지면서, 누가 먼저 이들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든지 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도래 이전까지는 원주민들과 타 민족 사이에 혼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이 밝혀졌다[169] .
- 테카식-칼릭스틀라우아카 머리: 1933년에 멕시코의 톨루카 계곡에 있는 15세기 경의 무덤에서 출토된 두상인데, 이 조각상의 얼굴 모습이 흡사 유럽인을 연상케해서 고고학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때 이 두상에 대해 이것을 '발굴'했다고 주장하는 연구진들이 날조한 것이라는 설이 제기된 바 있지만[170] , 조사 결과 이 조각상은 진품으로 결론이 났다. 그래서 고고학계에서는 이 조각상이 어떤 사람을 조각한 것인지에 대해 큰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서는 로마인이나 고대 그리스인같은 고대의 유럽인이 실제로 아메리카에 도달한 것을 본 현지 원주민들이 이를 조각한 것이라는 설, 역시 백인계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페니키아나 유럽 등지의 선박이 오늘날의 모로코나 포르투갈 앞바다에서 난파하면서 떠내려온 물품이 해류를 타고 아메리카까지 떠내려와서 현지인들에 의해 건져졌다는 설, 고대 이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앞서서 아메리카를 방문한 사람이 있었다는 설과 연구자들의 단순한 착각이라는 설까지 난무하지만 확실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 아카드: 아가데라고도 한다. 처음으로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 아카드 왕국의 수도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요 도시 중 소재가 파악되지 못한 유일한 도시다. 역시 발견된다면 초기 메소포타미아 통일제국의 역사를 다시 써야할 발견이 될 것이다.
- 안네 프랑크 가족을 밀고한 자: 이웃들도 그 행방을 몰랐을 정도로 감쪽같이 숨는 데 성공했던 안네 프랑크의 가족들이 발각된 원인에 대해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밀고에 의해 발각되었을 가능성으로는 안네 가족들을 돕던 미프 히스의 친척이 안네 일가의 막대한 재산을 노리고 밀고했다는 설과[171] 똑같은 동기로 안네의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의 부하 직원이 밀고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밀고가 아니라, 우연히 나치 독일군의 수색에 걸려들었다는 설도 있다.
- 안티키테라 기계: 서기 1세기 무렵에 제작된 세계 최초의 아날로그 컴퓨터로, 인류 역사에서 1642년 파스칼이 기계식 계산기를 발명하면서 등장했다고 알려진 톱니바퀴를 이용한 작동 원리를 적용시킨 물건이라서 고고학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온갖 도시 전설과 조작 의혹이 짙은 오파츠 중에서 단 세 개뿐인 진품들 중 하나이다.[172] 다만, 현대의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에 자연과학이나 공학 부문에서 비약적인 성과가 자주 나왔다는 점을 들어서[173] 안티키테라 기계도 그런 성과들의 일부라고 보고 있다. 진짜 미스터리한 건, 이걸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다. 당대의 네임드 학자들이 이 기계의 발명자라고 주장되긴 했으나, 모조리 부정당하여서 이 기계의 실제 발명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 애거서 크리스티: 1926년 12월경부터 11일간 실종된 적이 있었는데, 이 실종과 관련된 의혹들이 무엇 하나 제대로 해소된 바 없다. 특히 애거서 크리스티 본인이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더군더나 언급을 피했기 때문에 수많은 추측만 남았다. 공식적으로는 남편의 외도에 충격을 받고 일시적으로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일으켰던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렇게 볼 수 없는 부분도 많아서...
- 앰브로스 비어스: 악마의 사전으로 유명한 작가로, 1913년에 멕시코 혁명의 영웅인 판초 비야를 만나러 가다가 영영 실종되어 버렸다. 판초 비야에 의해 총살되었다는 주장은 그가 판초의 지지자였다는 점에서 부정되고 있으며, 아마도 판초가 이끄는 혁명군을 따라가다가 전사했거나, 멕시코로 건너가기 전에 앓고있던 천식의 악화로 인해 사망했다는 추정이 있으나, 현재 그의 최후 행적을 알 수 있는 어떠한 기록도 남지 않아서, 끝내 그의 행방은 미스터리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하는 에토레 마요라나 실종 사건 및 애거서 크리스티 실종 사건과 함께 20세기 초반에 발생한 실종 사건 중에서는 가장 사회적 파장이 컸다.
- 어밀리아 에어하트 실종 사건: 미국의 대표적인 장기 미제 사건 중 하나로, 가장 널리 알려진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해 사망했다는 설 이외에도 무인도인 가드너 섬에 조난당했다 사망했다는 설, 심지어 일본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다.
- 에드가 앨런 포우의 최후: 죽기 직전의 행적이 미상이며 목격담은 있으나 확실치 않다.
- 에드워드 5세: 납치된 이후 사망까지의 행적이 묘연하다..
- 에든버러의 미니어처 관: Edinburgh's miniature coffins. 1836년에 지역 소년들이 토끼굴 속에서 우연히 발굴한, 길이 3~4인치 정도의 17개의 작은 관(棺). 그 속에는 사람의 형상을 한 작은 목제 조각상들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이 작은 관들을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만든 것인지가 불명. 많은 민속학자들과 향토사학자들, 고고학자들, 스코틀랜드 문화 전문가들이 달려들어 연구했으며 나중에는 DNA 검출까지 시도했으나 별다른 진전은 없는 상태. 일단 제기된 가설들로서 중요한 정치 운동 지도자들을 기념하는 물건이라는 설, 또는 그 지역의 악랄한 범죄자가 피해자들을 살해한 후 기념품처럼 만든 것이라는 설이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관 속의 조각상의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에토레 마요라나 실종사건: 에토레 마요라나는 중성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예견하고[174] , 그 자신이 스스로의 반입자가 되는 마요라나 페르미온의 존재를 예견한 희대의 천재 물리학자였다. 하지만, 1937년 나폴리 대학교의 물리학과 정교수로 임용되는 등으로 승승장구하던 차에, 1938년에 동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 소장인 안토니오 카렐리와 삼촌인 퀴리노 마요라나[175] 에게 의미심장한 편지를 남기고 팔레르모에서 나폴리로 가는 배에 탑승했다가 그대로 실종되었다[176] . 이후에 1955년에 베네수엘라에서 정체불명의 남성이 차 수리를 의뢰하고 수리공과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1997년 이탈리아 경찰이 이를 분석한 결과, 남자의 정체가 에토레 마요라나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50년대까지는 그가 생존해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1955년 이후의 마요라나의 행적도 전혀 밝혀진 바 없으며, 무엇보다도 20세기 초반의 물리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전도유망한 과학자가 왜 모든 것을 버리고 베네수엘라로 간 것인지, 그리고 실종되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가 모두 불명이다.
- 에트루리아 문명: 로마 제국보다 앞서서 이탈리아에 존재했던 문명인데, 오늘날의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이탈리아로 이주해 온 이들이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들의 기원이 어떻게 되는지가 밝혀진 바가 없다.
-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이전 행적: 탄생부터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기 전까지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루가의 복음서[177] 2장 41절부터 52절까지의 기록뿐, 이외의 행적에 대해서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178]
- 요가: 그 기원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진 바 없다. 원시 브라만교에는 없었다가 나중에 브라만교가 인도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아리아인의 민족종교에서 범인도적 종교인 힌두교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 사망 사건과 가짜 드미트리: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는 러시아의 황태자로 류리크 왕조의 마지막 황자였으나, 7살 때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타살당했다. 현재까지도 드미트리 황태자를 살해한 인물이 누구인지,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것뿐만 아니라, 이 드미트리 황태자를 사칭한 사람들의 존재도 역사학자들을 엿먹이고 있는데, 3명의 가짜들 중, 첫 번째로 드미트리 황태자를 사칭한 인물[180] 을 제외하면, 나머지 둘의 정체는 밝혀진 바가 없다.[181] 러시아를 한동안 국가 막장 테크를 타게 만든 대사건치고는 많은 부분이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 유대인 및 유대교와 관련된 미스터리
- 유대교의 형성과정: 유대교는 특이하게도 처음 기록에 등장할 때부터 유일신교로서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는 동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종교와 비교해도 특이한 부분이다. 그래서 유대교 신앙이 형성된 과정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예로부터 끊이지않았지만, 아직은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에 쌓여있다. 한때는 이집트 제18대 왕조의 파라오인 아케나톤[182] 이 추진한 유일신 운동과 뿌리가 같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으나, 둘 다 신이 하나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빼면 아무런 공통점도 없어서 부정되었다. 또는 비슷한 세계관을 가진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오히려 유대교가 조로아스터교보다 더 먼저 성립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역시 부정되었다[183] . 그래서 현재는 유대교를 포함한 아브라함계 종교의 악마인 사탄이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빛의 신인 샤이탄에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메소포타미아 신화를 믿던 이들 사이에서 아케나톤의 유일신 운동과 비슷한 종교 개혁 운동이 벌어진 것을 기원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지만,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사료나 유물이 전무한 상황이다.
- 출애굽기: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했다는 이야기 자체는 역사적인 실존성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고고학적으로 지금의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갑작스레 유·이민들의 이주가 증가하기 시작한 시기가 있었음이 확인되어 적어도 출애굽기의 성립에 영향을 준 어떤 사건이 있었음은 확인되고 있다.
- 원조비사의 저자: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하는 과정을 다룬, 몽골 제국의 초기 역사를 다룬 원조비사는 유목민 스스로가 남긴 역사서로,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비사에는 칭기즈 칸의 인간적인 면모나[184] , 정사에서 언급되지 않은 여러 가지 일화 등이 기록되었으므로, 저자는 오래 전부터 칭기즈 칸을 지켜본 최측근인 듯하다. 하지만, 원조비사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현재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몇몇 사람이 후보에 오르고는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없어서 저자를 특정하기가 어렵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기 생애: 영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비해 윌리엄 셰익스피어 본인의 생애가 많이 알려진 게 없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게, 비록 당대의 중산층 자제들이 주로 다니던 그래머 스쿨을 다니다가 중퇴했을만큼 어느 정도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몰락한 지역 유지의 아들에 불과한 일개 평민 출신자의 생애가 상세히 알려져 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건 그가 극작가로서 명성을 얻은 뒤의 일이었다. 현대에도 연예인이 유명세를 얻고 나서야, 그의 이전 행적이 언론이나 팬들에 의해 조명되기 시작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185] . 하지만, 이 때문에 셰익스피어가 누군가의 필명이라는 헛소문까지 돌 정도로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후대의 역사학자들에게 아쉬움을 주고 있다.
- 은-주 역성혁명 이전의 주나라의 역사와 기원: 주나라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현대 한족의 조상인 화하족의 기원을 밝히는 문제와도 엮여있는 떡밥이며, 나아가서 중국티베트어족의 언중들이 고대에 어떻게 퍼져나갔는지에 대한 논쟁으로도 이어진다. 은주 역성혁명이 있던 시기의 주나라와 상나라의 구성 민족은 모두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민족이었음은 틀림없지만, 주나라가 처음부터 화하족의 한 부류였는지, 아니면 본래 이민족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불분명하며[186] , 다만 이들이 원래는 말 등의 가축을 길러서 살아가는 목축민들[187] 이었다는 점에서 일단 당대에는 상나라와 얼마나 가까운 민족이었느냐와는 별개로 거의 이민족 취급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188] .
- 이집트 제18왕조와 관련된 미스터리
- 네페르티티의 최후: 네페르티티는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인 아케나톤의 왕비인데, 남편의 사후에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의문이다. 한때는 아케나톤이 사망하기 직전에 궁을 나왔다는 설도 제기되었으나, 그녀가 투탕카멘 왕의 장모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는 정황이 있어서 이 설은 부정되고 있고, 현재는 스스로 파라오로 즉위하고 이름을 바꿨다는 설이 유력하다. 문제는 그녀의 바뀐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고[189] , 그녀의 미라도 발견되지 않았다[190] . 일단 주류 학계는 그녀가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했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 투탕카멘의 사인: 이집트 제18왕조의 왕인 투탕카멘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가 사망한 당시는 물론이고 현대까지 무수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한때는 그의 미라의 두개골에서 갈라진 흔적이 발견되어서 그가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었지만, 후속 연구에서 투탕카멘이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두개골의 갈라진 부분이 완전히 봉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단순한 오해로 결론났다[191] . 그래서 오늘날에는 미라의 모습을 토대로 그의 생전 모습을 복원한 결과, 오랜 근친혼으로 인한 선천적인 장애가 있음이 밝혀져서, 현재 주류 학계에서는 이것이 그의 사인과 관련되어있다고 보고 있다. 진짜 미스터리인 부분은 투탕카멘의 죽음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이고 그게 그의 장애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가 불편한 몸으로도 꽤 능동적으로 통치를 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192] , 알려지지 않은 어떤 대외 활동 중에 당한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는 설[193] 과, 선술한 장애때문에 생긴 합병증으로 급사했다는 설이 제기되지만, 확실한 해답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 인더스 문명: 이 문명을 세운 이들이 누구인지도, 이들의 언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불분명하다.
-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토의 위치: 어느 나라건 간에 자국 최초의 국가의 영토나 수도의 위치에 대해서 논쟁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이게 크게 다루어지느냐 하면, 야마토가 위치한 곳을 추적해 봄으로서 일본인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민족인 야마토 민족의 기원은 물론, 한국과 일본의 인류학적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기원에 대한 떡밥이 주류 역사학계와 비교언어학계의 오랜 떡밥인 만큼, 야마토의 위치가 어디였느냐가 밝혀짐에 따라 이러한 많은 의문들이 대거 해소되리라고 보고 있다. 대체로 큐슈에 있었다는 설과 지금의 교토 근교였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 전갈왕: 영화 스콜피온 킹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고왕국 시대 이전의 상·하 이집트를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왕이다. 그러나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고 현존하는 기록에서도 그저 전갈 기호로만 묘사되고 있다.[194]
- 정화의 대원정: 관련 기록이 상당수 소실되면서 정화가 이끈 명나라의 대함대가 어디어디에 도달했는지가 불분명해졌다. 호주나 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설도 있지만,[195] 우선 명나라의 함대가 동아프리카까지 도달한 것은 입증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기의 바티칸: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 교황인 비오 12세가 이탈리아 각지의 신부와 주교, 수도자들에게 홀로코스트를 피해 교회로 달아나는 이들[196] 을 숨겨서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은 있었고, 연합국이 이탈리아를 점령했을 때, 전쟁의 피해를 입은 수많은 로마 시민들을 위해 구호활동을 한 기록은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는 이는 연합국 군대가 이탈리아 반도로 진출한 뒤의 기록으로, 그 이전에 바티칸이 파시스트 이탈리아나 나치 독일 등의 추축국을 대상으로 무슨 입장을 취했는가가 의문에 싸여있다. 이 시기에 대하여 충격적이게도 비오 12세가 홀로코스트로 죽어가던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성소수자들을 외면했다는 증언도 있으며, 심지어 아예 바티칸과 가톨릭 교회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추축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드물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 비오 12세 본인이 남긴 기록이지만, 이 기록들은 비오 12세의 유언에 따라 친구이자 비서였던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197] 가 모조리 소각한 바람에 그 내용을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존 F. 케네디를 암살한 리 하비 오즈월드에게 배후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서 논란이 되고 있으며, 실제로 오즈월드 본인도 자기는 음모의 희생자라고 주장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진상이 밝혀지기도 전에 오즈월드 마저 잭 루비의 손에 암살당하여 모든 것이 의혹 수준에 그치게 되었다. 이런 의혹과 관련하여, 잭 루비의 오즈월드 암살 역시 누군가가 배후에 있다는 주장이 있다.
- 중세 이전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역사: 동시대의 이집트가 이집트 상형문자와 여기서 파생된 신관 문자 및 민중 문자를 개발하여 대대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기록이 많이 남아서 그 역사를 소상히 알 수 있는 데 반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역사는 자체 문자가 없어서 알려진 바가 많이 없다. 심지어는 13세기까지 존재한 와가두 제국[198] 의 역사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고, 고대 이집트 문명의 바로 밑에 위치해 있던 누비아 문명에 대해서도 모르는 부분이 많으며, 짐바브웨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이기도 한 짐바브웨 신전 또한 토착민 문명이 세웠다는 것 말고는 관련 정보가 하나도 알려진 게 없다[199] . 여기에 더해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또 있는데, 바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민족들의 대부분의 조상격인 반투족들이 어떻게 발전한 농업 기술을 보유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이 서아프리카에서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까지 도달했을 때, 이들의 숫자가 기본이 수천 명은 된 것으로 보이고 목축만으로 부양하기 힘든 이 정도의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수준 높은 농업 기술이 발달하였다고 전해지나, 이런 기술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논란이 많다. 사막화되기 이전의 사하라 지역도 농사가 불가능한 사바나 지역이었는데 발달된 농업 기술을 얻게 된 경위로, 학자들은 어떻게든 스스로 농업 기술을 얻었다는 설과 동쪽의 이집트인들이랑 접촉해서 농업 기술을 배워갔다는 설이 있다.[200] 역사학자들에게 있어서 아프리카는 아직도 미지의 대륙이라고 할 수 있다.
- 지미 호파 실종사건: 미국 노동운동계의 거물 지미 호파가 실종된 사건은 미국의 대표적인 장기 미제 사건이다. 그가 의문의 실종을 당한 것에 대해 세간에서는 마피아들에게 납치되어 죽임을 당한 뒤에 뉴욕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메트라이프 스타디움 등지에 암매장당했다는 설이 퍼져 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다큐멘터리 전문 채널인 디스커버리 채널의 인기 프로그램인 Mythbusters의 진행자인 애덤 새비지와 제이미 하이네만[201] 이 초음파 탐지기를 이용해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을 조사한 결과, 이 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졌다. 지미 호파의 생년월일로 보나, 갑작스럽게 실종된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2020년 현재까지 그가 살아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고, 정황상 살해당한 후에 어딘가에 암매장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유력하지만, 현재까지도 그 위치는 불명이다.
- 진 Z. 한나한 - 말레이시아의 공산당 투쟁을 쓴 작가지만 본명 등 여러 가지 신원사항이 불명이다. 그의 저작들이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는 기밀문서들을 토대로 했으므로 아시아 문화에 정통한 CIA의 협력자라고 추정할 따름이다.
- 짐새: 사서 기록만 보면 과거에 실존했던 동물이라는 것을 의심하기 어려운 수준인데, 사람을 끔살시킬 맹독을 깃털에 품고 있는 새라는 게 현대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어려운 터라 실존 여부, 실존했다면 정말 사람을 죽일 만큼 강한 독성이 있었는지, 그리고 실존했다면 왜 사라졌는지 등이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최근에는 깃털 등에 독을 지닌 조류가 발견됨으로써 짐새의 실존 여부에 신빙성이 생기고 있다. 과거 중국에서는 짐새가 나오면 산에 불을 질렀다고 하니 멸종했을 수도 있다.
- 차이코프스키의 사인: 흔히 차이코프스키는 콜레라 감염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작 당대의 관습대로 그의 시신에 입을 맞추는 의식을 했던 장례식의 조문객들이 콜레라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점으로 보아 사실이 아니라고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자였다는 점을 근거로, 당시의 호모포비아적인 분위기에 따라 독살당했거나, 음독 자살을 강요받는 형식으로 타살당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 설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없다. 역사학자들도 독극물에 의한 사망을 유력한 사인으로 보지만, 누가 무슨 이유로 그랬냐는 논란이 있으며, 심지어 진짜로 독살당한 게 맞는 가하는 논란까지 있다.[202]
- 찬드라 보스: 그의 죽음에 관한 부분이 미스터리에 싸여있다. 타이완 근교의 상공에서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소련이 납치해서 굴라그에 수감했다는 설 또한 심도 있게 고려된다.
- 철가면: 17세기 프랑스의 정체불명의 재소자로, 볼테르는 그가 루이 14세의 쌍둥이 형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내놓았다. 최근에는 상당히 유력한 가설이 제기되었는데, 이 사람의 정체는 외스타슈 도제라는 왕실 주치의라는 것이다.[203]
- 츠지 마사노부의 마지막 행적: 1961년 4월 4일에 갑작스럽게 호치민을 만난다면서 동남아로 떠나버렸고 이후 라오스 북부 고원에서 불교 승려로 변장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그 이후의 행적은 알아낼 수가 없어 마지막 최후에 대해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츠지의 실종 1년 뒤, 산케이 신문 기자인 노다 마모루가 동남아시아 현장에서 취재한 결과에 따르면 파테트라오군과 접촉하다 7월 경 하노이로 향한 뒤 실종되었다는 제보를 들었다고 한다. 노다는 직접 북베트남으로 들어가서 츠지 마사노부의 행방을 쫒으려고 했지만 입국 비자가 나지 않아 그 시점에서 취재를 끝냈다.
- 쿠타이 왕국: 보르네오 동부에서 기원후 4–5세기에 '쿠타이'라는 고대 왕국이 있었다는 것은 5세기의 물라와르만 비문이 발굴되어 확인되었는데, 여기에는 쿠타이 왕국의 3대에 걸치는 왕사가 적혀 있다. 그렇지만 5세기 전반에 집권한 물라와르만(Mulavarman) 이후 이 쿠타이 왕국에 대한 기록은 2021년 현재 기준으로 14세기까지는 거의 완전히 공백 상태고, 고고학 조사에 따라 관련 유물만 극히 드물게 발굴되는 수준이다. 이 지역은 보르네오 동부, 도서부 동남아시아 교역로 외곽에 위치해서 외부 관찰자들의 관심이 그리 높은 지역도 아니어서 이렇다 할 외부 기록도 찾기 힘들다. 이런 위치에 어떻게 4–5세기라는 동남아시아 기준 매우 이른 시점에 기록 문화가 발달한 국가가 생겨났는지도 미스터리이다.
- 쿼티의 개발 계기: 빠른 속도로 치다보니 기계가 걸려서 개발했다는 설이 정설이었는데 최근 들어 이설에 대한 반박들이 나왔다. 오늘날에 가장 많이 쓰이는 영문 자판 배열인데도 아직 이 자판 배열의 정확한 기원은 불확실하다.
- 타르신 신전: 달리 타르시엔 신전(It-Tempji ta' Ħal Tarxien)이라고도 불리는, 몰타에 존재하는 정체불명의 유적지로, 1992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몰타의 거석 신전의 일부다. 문제는 이 유적의 건립 시기가 기원전 3250년경에서 기원전 2800년경 정도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유럽에는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 말고는 다른 문명이 없었기에 이 신전을 건립한 이들이 누구인지가 밝혀지지 않았다[204] . 더욱이 타르신 신전을 세운 이들이 무슨 신을 믿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신전 내부에는 제단(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존재함을 확인했기 때문에 종교적 건축물임을 알 수 있었을 뿐이지, 이곳에서 지냈으리라고 보여지는 종교 의식과 관련된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고, 신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도 존재하지 않아서 의문점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 타르테소스: 테오티우아칸, 티와나쿠, 나스카 문명과 함께 고고학자들을 하악거리게 하는 고대 문명인데, 문제는 타르테소스 문명과 관련된 것들이 전부 수수께끼에 싸여있다는 점이다. 타르테소스인들이 기록한 문자가 적힌 글이 발견되기는 했으나 전혀 해독되지 않았고 지중해의 고대 문명들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부유했던 타르테소스의 수도의 위치도 불명이다. 일단 이 문명을 세운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이라고 추정된다[205] .
- 텍사스 알렉산더의 정체: 텍사스 알렉산더란 미국 텍사스 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유명한 블루스 가수다. 문제는 그의 가족에 대한 의문이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206] . 그가 라이트닝 홉킨스[207] 의 사촌이란 주장도 있고, 같은 시기에 활약한 또다른 블루스 가수인 프랭키 리 심스의 삼촌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의혹에 대해 텍사스 알렉산더 스스로가 일절 해명하지 않고 사망하여, 영원한 의문점으로 남았다.
- 티니스: 이집트 초기왕조의 수도로서 도시의 존재 자체는 고대 기록에서 검증이 되지만 아직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전갈왕을 비롯하여 수수께기 투성인 이집트 초기왕조의 의문을 풀 열쇠로 추정되고 있기에 수많은 학자들이 티니스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 파라과이 건국부터 1870년 이전까지의 역사 : 3국 동맹 전쟁 패전으로 파라과이 초기 역사와 관련된 기록물 및 유물들이 대거 브라질 제국군에 전리품으로 약탈되어 브라질로 옮겨졌는데, 이 파라과이 초기 역사의 기록물 및 유물들이 2018년 9월에 발생한 브라질 국립박물관 화재 사고로 대부분 소실되면서 파라과이 건국으로부터 1870년에 이르는 역사는 이제 미지의 영역으로 남게 되고 말았다.
- 필트다운 인의 위조범: 화석은 위조된 것으로 판정되었지만, 위조범이 누구인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위조 용의자로 거론되는 인물들 가운데에는 추리 작가 아서 코난 도일, 화석학자이자 예수회 신부인 테아르 드 샤르뎅도 있다.
- 피리 제독의 지도: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지도 제작자였던 피리 레이스가 만든 지도들은 당대의 다른 지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정밀함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유사역사학자들이나 초고대문명설 신봉자들이 주장하는 남극 대륙이 그려진 지도를 운운하는 건 순전한 낭설에 불과하지만, 당시만 해도 영국이 찻주전자 비스무리한 모양으로 그려진다던가, 한반도가 섬으로 오인되는 등, 정밀도가 개판이던 시기에 어떻게 고도의 정밀함을 자랑하는 지도를 그렸는지가 수수께끼.
- 하나라: 실존성이 분명히 입증된 상나라와는 달리 하나라는 갑골문에서도 언급되지 않아서[208] 그 실체가 오리무중이다. 다만 전설상의 나라라고 보기에는 하나라가 실존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상나라 이하의 역사서에서 꾸준히 등장하므로 실존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고,[209] 실제로 상나라와는 별개의 문화권에 속하는 유물이 발견된 적이 있다.[210] 같은 사례로 요 임금과 순 임금의 실존 여부 문제가 있다.
- 하시마 섬: 한국사와의 연관도 깊지만, 이 섬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사람들 중에는 중국인들도 많이 있었던 데다[211] , 결정적으로 하시마 섬 자체가 한국령이 아닌 일본 영토이므로, 세계사 부분에서 다룬다. 일단,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는 일본의 주장대로 강제적인 노역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지만,[212] 전쟁 발발 이후에는 다들 아는 대로 헬게이트의 공간으로 변모했다[213] . 하시마 섬의 대부분이 일본 정부에 의해 관광객의 접근이 금지된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세한 진상을 알기 어렵다[214] .
- 하와라의 미궁: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기록된 이집트의 거대한 미궁. 헤로도투스뿐만 아니라 스트라보등도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과연 실존하는 유적인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논란 중이다. 미궁이 실존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집트 하와라 지역을 유력한 장소로 본다.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로 유적이 있을 만한 장소로 추정되는 곳까지 찾아냈지만 이집트 정부가 조사를 불허하여지금까지도 고고학적 조사가 없었던 탓에 실존여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았다.
- 하인리히 뮐러: 2차 대전 후 그의 최후 행적이 의문이다.
- 하자르족: 중세기에 유대교를 국교로 삼았던 유일한 민족으로, 이들의 기원이 어떻게 되는지는 물론,[215] 이들이 무엇을 계기로 유대교를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문화적, 종교적 헤게모니를 유대인과 동화시켰는지가 불분명하다. 일단 이들이 튀르크 계통이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현재 폴란드에 살고 있는, 튀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유대교 신자들인 카라임파가 하자르족의 후손들이다.
- 해럴드 홀트 실종 사건: 위의 마이클 록펠러 실종 사건 및 애거서 크리스티 실종 사건과 함께 20세기를 떠들썩하게 한 실종 사건으로, 호주의 수상이었던 해럴드 홀트가 1967년에 현직 수상 신분으로 지인들과 함께 휴가를 즐기던 중에 실종되어 버린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당시 홀트 수상은 경호원들도 뿌리치고 혼자 바다로 헤엄쳐 갔는데, 그 뒤로 그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고, 호주 해군과 경찰의 수색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헤엄치던 도중에 파도에 쓸려서 익사했다는 설과, 그가 유례없는 친중 성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사실 해럴드 홀트는 중국 측에 포섭된 스파이이며, 당시에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그가 사고를 가장하여 미리 약속된 지점까지 헤엄쳐서 중국 스파이와 접선한 뒤에 그대로 중국으로 망명했다는 설도 있으나,[216] 유력한 가설은 없는 상태이다. 일단 호주 정부는 공식적으로, 그가 수영하던 도중에 사고사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 혼노지의 변: 일국의 국가원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동기가 의문에 싸여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10.26 사건과 상당히 유사하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트롤링을 벌였다는 설과 배후가 있다는 설이 있으며, 배후가 있다는 설은 다시 그 배후가 조정이라는 설과[217]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설[218] , 예수회가 배후라는 설도 있으나[219] 셋 다 분명한 증거는 없다.
- 훈족: 서기 4세기에서 5세기까지 로마 제국을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은 정체불명의 유목 민족. 이들의 기원에 대하여 흉노와 동일 민족이라는 설, 슬라브계라는 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나 인도유럽계 종족이라는 설이 난무하고 있다.
- 흉노: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 중국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유목 민족. 지속적인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흉노 문화의 상세한 모습이 밝혀지고 있으나, 아직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튀르크계라는 설과 몽골계라는 설, 인도 유럽어족계 종족이라는 설이 난무하고 있다.[220] 위의 훈족과의 관계도 불분명하다.
- 힌두교의 성립 과정: 브라만교에서 힌두교가 파생되어 나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 성립 과정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운 부분이 많다. 구체적으로는 리그베다와 같은 베다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신들이 어찌하여 비슈누, 시바와 같은 신들보다 격이 떨어지게 되었는지, 이들 신들에 대한 신앙이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가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비슈누나 시바 등의 신들의 기원을 인도 유럽어족의 공통 신화에서 찾는 학자도 있지만, 그런다기에는 다른 인도 유럽어족 계열의 신화인 그리스 로마·신화나, 슬라브 신화, 북유럽 신화의 신들과 이들이 대응되지가 않는다[221] . 오히려 인도 유럽어족 신화의 신들과 가까운 신은 아그니, 바루나 등과 같은 베다 신화의 신들이다.[222] 다만, 당시 인도에서 종교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불교가 힌두교한테 그 지위를 넘겨주게 된 것은 미스터리가 아니다.[223] 위에서 언급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성립 과정에 대한 논의와 함께 힌두교의 성립 과정을 밝혀내는 과정은 인도 유럽어족의 원시 공통 조어를 재구하는 데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이 원시인구어를 사용했던 아리아 민족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고 있다.[224]
4. 다른 문명과 초고대문명설 관련 정보
- 로스트 테크놀러지
- 그리스의 불: 정확한 제조법과 배합법이 실전되었다. 석유 화합물을 쓰지 않았나 하는 의견이 통설.
- 비거: 설계도가 전해지지 않아 추측만 할 뿐이다.
- 사약: 정확한 제조법과 배합법에 대해 다양한 가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 아르키메데스의 거울: Mythbusters 등은 이것이 기록에 나온 것만큼 그리 엄청난 것은 아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내놓았다.
- 문자 체계
- 다이튼 바위(Dighton Rock): 미국 매사추세츠 소재. 각인된 글자들은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못했다.
- 데이브 스키에(Dave Skye): 한자와 유사하지만 훨씬 복잡한 형태의 정체불명의 문자들을 쉬지 않고 빼곡하게 적어내려가는 흑인 남성으로, 이 사람이 적어놓은 문자 체계의 정체와 그 의미는 본인을 포함하여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본인에 따르면 다이애나 왕세자비 사망 사건 당시를 기점으로 하여 갑자기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분노 내지 간절한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관련 영상
- 로혼치 사본: 중세 시대의 교양 종교 서적이라고 추정되지만, 이 문서를 작성하는 데 쓰인 문자와 언어가 해독되지 않았다.
- 롱고롱고: 이스터 섬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언어인 라파누이어를 기록할 때 사용한 문자이지만, 남아있는 텍스트가 별로 많지 않아서 해독에 난항을 겪고 있다. 현재는 이스터 섬에 유럽인들이 도래했을 때, 그들이 문자를 사용한 것을 보고 원주민들이 모방해서 만든 글자라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
- 선문자 A: 고대 미노아 문명이 사용하던 문자 체계.
- 보이니치 문서: 2017년에 해독이 완료되었다고는 하나,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해독이 불완전한 것으로 보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만, 해독 방식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다.
- 빈카 기호(Vinča symbols): 루마니아 지역에서 발굴되는 고대의 미스터리한 픽토그램으로, 일례로 타르타리아 판(Tărtăria tablets)의 경우 그 내용이 해독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충격적인 것은 이게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라는 것. 만약 이 빈카 기호가 문자체계가 확실하다면 인류의 언어와 문자의 기원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싱가포르의 돌
- 파에스토스 원반
- 인더스 문자: 인더스 문명때의 유적지인 모헨조다로에서 도장, 인장 형태로 많은 문자들이 발견되었지만, 인장이다보니 같은 문자로 추측되는 계열 내에서도 형태 변형이 굉장히 다양하고 글 자체가 짧아, 이것이 대체 무엇을 뜻한 글자이며 표음 문자인지 표의 문자인지도 아직 알 수 없는 상황. 산스크리트어와의 연관성도 제시되지만 실질적 연관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며, 해독된 부분이 전혀 없다. 다만 이는 인더스 인장 자체의 수가 해독되기에는 너무 적은 이유인 것도 있다. 즉, 문자 체계도 난해하고 자료 수도 적은 것.
- 미접촉부족: 아직도 문명화의 수준이 낮은 지역에는 외부인들과의 유의미한 교류가 없거나 드물었던, 이른바 미접촉부족이 있을 수도 있다. 지금은 사라진 민족 집단에 대해서는 위의 "세계사의 미스터리" 단락을 이용바람.
- 뉴기니 섬: 인도네시아령인 이리안자야와 독립국인 파푸아뉴기니 모두, 20세기까지도 존재만 확인했을 뿐, 외부와의 그 어떤 유의미한 접촉도 없는 부족이 많이 남아있었다. 최근에 파푸아뉴기니 정부와의 접촉에 성공한 한 부족의 경우, 아버지는 돌도끼같은 조잡한 석기로 무장한 전사였는데, 그 아들은 파푸아뉴기니 공군에 입대해서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는, 보기엔 참 언밸런스해 보이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225] 다만 이제 웬만해서는 대부분의 부족들이 최소 한 번이라도 외부와의 접촉을 해본 적이 있었던 데다, 아직도 부족별로 뿔뿔이 흩어져 싸우는 통에 어지간한 부족들은 AK-47에 RPG까지 들고 다니는 중이다.[226] 그러니 이제는 아예 외부와의 교류가 없는 지역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 동남아시아의 정글 지대: 비록 이제는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부족들이 외부와의 접촉에 성공하여 더 이상 비문명 지역이라고 하기는 어려워 졌지만, 현재도 태평양 전쟁 시기나, 식민지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때문에, 혹여는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외부 문명과 '접촉'만 했을 뿐, 문명의 이기 자체는 거부하는 부족들도 꽤 많은 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쿠부족들로,[227] 2000년대에 디스커버리 채널 측에서 도시로 이주해 살던 쿠부족 남성 한명을 통해 여자와 아이들의 모습을 촬영하지 않는 조건으로[228] 겨우 부족민들의 생활상을 촬영할 수 있었는데, 거의 헐벗고 다니면서 화전 농업을 통한 유랑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자기들 영토에서 불법적으로 벌목을 하던 외지인 벌목꾼들에게 쿠부족의 장로가 벌금형을 선고하면서 이를 돈이 아닌 옷으로 지불하라고 판결하기도 했다.[229] 이런 식으로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부족들이 동남아시아 정글 지대에 아직도 수백여 부족은 족히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230]
- 아마조니아 열대 우림: 아마존의 험악한 환경으로 인해 20세기에나 그 존재가 알려진 부족도 있고, 21세기인 현재에 이르러서야 존재가 드러난 부족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1950년대에 그 존재가 처음 알려진 와오라니족인데[231][232] , 이들과 처음 조우하는데 성공한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들과 우호적인 접촉을 시도했지만, 이들을 공포스런 존재로 여긴 와오라니족들에게 살해당한 적도 있을 정도로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극심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자기들의 영토가 속한 에콰도르의 정부와 접촉하는데 성공한 뒤로, 외부인과 어느 정도의 교류는 하는 수준이 되었지만,[233] 여전히 이들 못지 않게 현대 문명의 이기를 접하지 못한 아마조니아 원주민들은 상당히 많다고 추정된다.
-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 현지 원주민들의 상당수가 현대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이다. 일단 이 지역 전체가 인도령이기는 하나, 형질인류학적으로나, 문화인류학적으로나 인도 본토의 문화권과는 관련이 없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도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더 비슷하다.
- 노스 센티널 아일랜드: 일명 지구 최후의 비문명화 지역. 이 섬의 원주민들이 도대체 누구이며 몇 명이고 어떤 수준의 문명을 일구었으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234] 이들이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극히 꺼리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뿐만 아니라 인도 정부도 이들과의 접촉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따라서 향후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이들의 생활사는 계속 의문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 파키스탄 및 아프가니스탄 국경의 산악 지대: 2001년의 대 테러 전쟁 도중에 있었던 실례로, 20세기 초에 영국군과의 조우를 겪은 후에 단 한 차례도 외부와의 교류를 하지 않던 마을이 있었는데, 당연히 탈레반도 이곳의 존재를 몰라서 이 마을 사람들도 탈레반이 누구냐고 말하는 지경이었고, 전기 제품도 차량도 없이 전근대 시대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마을에 2001년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서 탈레반을 몰아낸 뒤에 이곳을 발견하였을 때, 하늘에서 날아오는 헬리콥터를 보고 기겁을 하여 19세기에나 쓰던 구식 총으로 대응 사격을 하기도 했고, 겨우겨우 이들에게 적의가 없음을 보이면서 접촉을 하는 데 성공한 미군들이 이들에게 통조림과 같은 유용한 것을 건네주자, 이를 신기하게 여기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 지대에는 이런 산악 지대가 많아서 아직도 외부와의 접촉이 뜸한 지역이 상당히 많다.[235]
- 오파츠, 유물, 유적들
- 님루드 렌즈(Nimrud lens): 앗시리아 유적지에서 발굴된 볼록렌즈. 다만 학계에서는 장식 중 하나로 보고 있고 렌즈 효과는 우연의 산물로 보고 있다. 영문위키 참조.
- 다뉴세문경: 거울 뒷면의 원형 무늬가 0.3mm마다 하나씩 새겨져 있는데, 현재까지도 그 제작기술을 추정만 할 뿐 정확하게 알 수 없다.
- 메인 페니: 미국의 메인 주 해안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15세기경의 노르웨이 동전 유물인데, 이것이 왜 이곳에서 대량으로 발견됐는지가 미스터리다.[236] 일단 이 유물은 날조된 것이 아니라고 보여진다.
- 바이공 파이프(Baigong pipe): 백공산 철관이라고도 하며 칭하이성 하이시 몽골족 티베트족 자치주의 주도인 더링하의 백공산 근처에서 발견된 철관 같은 특징의 물건들이다.
- 보로부두르: 건설 시기와 그 의도, 건설자 등이 모두 불명인 수수께끼의 유적으로,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유적들 중 하나이다.
- 사크사이와만(Saksaywaman): 페루 쿠스코 소재. 잉카 문명 당시 건설된 거석 유적. 거대한 돌로 쌓은 돌벽이 바늘 하나 들어갈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정밀한 시공으로 세워져 있어서 이슈가 되고 있다.
- 세이킬로스의 비문: 현존하는 악보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완성형 악보. 비석은 세이킬로스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어떤 이유로 만들었고 왜 그 곳에 묻혀 있었는지 정체불명.
- 아이우드의 쐐기(wedge of Aiud): 루마니아에서 발견된 알루미늄 쐐기. 그러나 11,000년 전의 마스토돈 유골과 함께 출토되어 논란을 일으켰다. 이것도 위의 런던 해머처럼 광물 채굴이나 채석 작업 도중에 지층에 박힌 쐐기가 오랜 기간 동안 묻혀있다가 출토된 것으로 추정된다.
- 아이제르너 만(Eiserne Mann)
- 알 나슬라 바위(Al Naslaa Rock): 사우디 아라비아 소재. 거대한 바위가 정 중앙으로 완벽하고 깔끔하게 둘로 쪼개져서 고스란히 세워져 있다. 자연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깔끔해서 마치 어떤 초고대문명이 레이저로 바위를 가른 것처럼 보일 정도.
- 요나구니 수중 유적: 이쪽은 이제 인류 문명과는 관련이 없다고 보는 쪽이 대세다. 즉, 학계의 공식 입장은 이 구조물이 자연물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이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자연적으로 형성됐는지를 규명하는 게 또 문제다.
- 위니페소키 호수의 유물(Lake Winnipesaukee mystery stone)
- 코스타리카의 돌 구체(#)
- 타셰바의 성터: 1940년에 오늘날의 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인 하카시야 공화국의 수도인 아바칸 인근의 도로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후한 시대[237] 의 중국 양식의 성터인데, 이 성을 건설한 사람에 대해 논란이 많다. 일각에서는 이 성터의 축조 시기가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1세기 경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그 유명한 전한의 비운의 명장인 이릉[238] 이나 그 후손이 세운 것이라고 추정했으나, 분명한 증거는 없다. 다만, 주류 고고학계와 역사학계는 이 유적의 건설자가 꼭 이릉이 아니더라도, 한나라에서 흉노로 귀순한 한족 출신 유력자였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다.[239]
- 피라미드: 음모론자들 사이에서는 쿠푸왕의 피라미드와 그 주변 피라미드들의 배치가 신기할 정도로 오리온자리의 허리띠 부분[243] 과 일치한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돌고 있으며, 이에 따라 외계인이나 초고대문명의 작품이라고 떠드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이집트인들이 고대로부터 기하학과 천문학에 빠삭한 이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기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244] . 이것보다 진짜로 고고학자들의 의문을 자아내는 부분은 바로 피라미드의 건축 방식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흙으로 비탈길을 만들어서 건축에 필요한 석재를 쌓아올렸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이렇게하면 비탈길이 피라미드보다도 더 거대해져 버린다는 점에서 주류 학계에서는 부정되고 있다[245] . 그리고 피라미드 건설에 보통 2, 30년은 기본으로 잡았는데, 학자들이 추정되는 피라미드를 이루는 돌의 총 개수를 토대로 건축 시간을 계산했는데, 6분마다 하나씩 올리는 무식하게 빠른 속도여야 저 정도의 건설 기간이 맞춰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겉면만 큼지막한 것으로 쌓아올리고 내부는 잡석으로 처리했다는 추론을 해보기도 했으나, 당대 이집트인의 세계관 상으로 그런 건축 방식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라서 부정되었다. 결국 현재까지도 피라미드의 건축 방식은 큰 의문점으로 남았다.[246]
- 쿠푸왕의 피라미드: 음모론스러운 부분을 모조리 무시하고 보면,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다른 피라미드와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간직한 신기한 유적이다. 일단 내부 구조부터 이상한 점이 있는 것이 용도 불명의 방이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현재 주류 학계에서는 이 방들은 기술력의 한계로 인한 극심한 부실공사로 인해 생긴 틈에다가 새로운 방을 조성하는 식으로 땜빵하느라 생긴 결과물들이라고 보고 있는데[240] , 문제는 이 방들 중에서 그 어디에서도 쿠푸 왕 본인의 미라는 발견된 적이 없으며 이것이 도굴된 흔적도, 도굴 우려때문에 이장한 흔적도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241] . 그래서 전술한 용도 불명의 방들 중 어딘가에 실제 미라가 안치되었다는 설과,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실제로는 무덤 역할이 아니었다는 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242] 사실 이 피라미드 말고도 쿠푸 왕의 치세 전후에 지어진 피라미드 역시 같은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피라미드들도 미라나 유물이 안치되어 있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 지상화(Geoglyph) 및 언덕 그림(Hill figure)
- 나스카 지상화
- 루드 맨(Rude man): 어떤 인물을 묘사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한때, 선사 시대나, 그 이후 고대에서 중세 초의 켈트족들이 그린 것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이 그림에 대한 기록이 17세기 이후에나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가설이 부정되었고, 현재는 17세기에 누군가가 알 수 없는 목적으로 그렸다는 것이 정설이다[247] .
- 블라이드 음각그림(Blythe Intaglios):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비행기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으며, 종교적인 의미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사하마 라인(Sajama Lines): 볼리비아에 위치한 거대한 그림. 비행기에서만 볼 수 있는 완벽에 가까운 직선이 수천~수만 개 수놓여 있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 아타카마 거인
- 윌밍턴의 롱맨(Long man of Wilmington)(#)
- 파라카스의 촛대(Paracas Candelabra): 비탈에 그려진 거대한 촛대 그림. 고대 파라카스 문명이 그린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어떤 용도나 목적으로 그렸는지는 오리무중이다. 뱃사람들을 위해 그려놓은 표시라는 설이 있긴 하다.
- 초고대문명설
- 괴베클리 테페: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에 건설된 건축물.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에서 현 인류와의 간격보다, 수메르 문명의 발생시기와 괴베클리 테페가 건설된 시기의 간격이 훨씬 크다.
- 레무리아
- 마추픽추
- 모아이
- 모헨조다로: 인더스 문명 최초의 도시.
- 무 제국
- 바퀴 자국 지형(Cart ruts): 터키의 프리지언 계곡(Phrygian valley), 몰타의 "Misrah Ghar il-kbir", 멕시코의 틀락스칼라(Tlaxcala) 지형이 유명하다. 위의 요나구니 수중 유적이 특이하게 침식된 자연물임이 밝혀져서 이것도 자연물이라는 떡밥이 있었지만, 주류 지질학계와 고고학계조차 이것이 신석기 시대의 인공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뭣 때문에 이런 걸 굳이 만들었는지가 의문이다.[248]
- 브라흐마스트라 ※: 인도의 고대 전설에 등장하는 무기로, 현재의 핵무기와 묘사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 비마나 ※
- 비미니 로드(Bimini road)
- 스핑크스
- 아틀란티스: 레무리아나 무 대륙 설화가 순전히 오해를 한 것이거나 완전히 날조된 이야기인데 비해, 아틀란티스 설화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목격한 어떤 고대 문명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설이 있고, 관련 학계에서도 이 설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아틀란티스의 모티브가 된 문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계 내에서도 의견이 통일되어있지 않아서, 미노스 문명 설, 키프로스 설[249] , 타르테소스 설, 도거랜드 설[250] , 모로코 설[251] 등이 있지만, 정설로 인정받는 설은 아직 없다.
- 요르단의 초대형 원(#)
- 푸마 푼쿠(Puma Punku): 볼리비아 소재.
- 피라미드
- 환상 유적(環狀遺跡) 또는 헨지(Henge)
5. 정보기관·조직·비밀결사·음모론 관련 정보
- 11B-X-1371: 무언가 알 수 없는 사람이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알 수 없는 배경음악(이라고 하기에는 소음에 가까운 소리)이 흐르는 내용의 유튜브 동영상. 2016년 초, 이 동영상의 제작자라 주장한 사람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진위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사실상 음모론과는 관련이 없다고 보아진다.
- 9.11 테러/도시전설
- 군산복합체: 전 세계의 전쟁과 분쟁들은 군산 복합체의 사주를 받아 벌어지고 있다는 음모론.
- 고스트넷: 전 세계 각국의 주요 기밀들을 해킹하고 있다는 대규모의 사이버 해킹 활동이다. 중국이 가장 유력한 국가로 거론 중이나 중국 정부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 나치
- 난수방송: 사실 방송 주체와 그 목적 등은 이미 알려진 상태인 만큼 미스터리까지는 아니다. 다만 특유의 음산한 분위기와 암호화된 내용, 그리고 정보 기관과 관련된 각종 미스터리와 음모론 때문에 흔히 주목받는다.
- 대역: 각 국가의 중요 인물들이 사실은 대역일 뿐이라는 음모론.
- 딥웹: 이야기에 따르면 온갖 불법과 반인륜, 부도덕의 엑기스가 모여 있다는 인터넷 세계의 지하로 극도의 익명성으로 인해 그 정보가 표면으로 올라오는 순간 경찰서 정모를 할 사람들이 많다고 알려진 그 곳이다. 여하튼 각종 소문이 무성한 곳이며 한국에는 소라넷이나 히든 위키 등이 딥웹의 사례로 꼽힌다.
- 로스차일드
- 마인드 컨트롤
- MK 울트라: 미국 정부가 실제로 연구한 것을 확인하고 인정했다.
- 보헤미안 그로브: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넓고 우거진 숲으로, 이 속에서 정기적으로 전 세계 최상위 금수저들끼리의 비밀 친목 모임이 열린다고 전해진다. 거대한 올빼미 석상이 랜드마크. 알렉스 존스(A.Jones)[252] 등의 음모론자들은 이곳에서 밤마다 세계 지도층들이 비밀스러운 인신공양 의식 및 사탄 숭배 의식을 거행한다고 떠들기도 한다. 2000년에 보헤미안 그로브에 참여하는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한 언론과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자신들은 그냥 아는 사람들끼리 가끔씩 모이는 친목회라고 증언한 적이 있다.[253]
- 비밀결사: 비밀결사라고 다 적지 말고, 그 단체에 관해 어떤 부분이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지 구체적으로 지목해서 기재하자.
- 빌더버그 클럽
- 시온 수도회
- 삼극위원회
- 삼합회: 현재는 중화권에서 조직폭력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지만, 청나라 말기의 개화기 시기만 해도 당대의 반정부주의자들의 비밀결사였다[254] . 하지만, 이들 내부의 규율이나 구체적인 활동 내역은, 실제의 역사 기록과 도시전설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아래의 흥중회와 동일 집단이었다는 설도 있고, 쑨원의 혁명 활동에 도움을 준 세력 중 하나였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건 모른다.
- 성전기사단
- 일루미나티
- 장미십자회
- 제국익문사: 대한제국 시기에 활동했던 국영 언론사이자, 첩보 조직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준 단체지만, 이들의 활동 내역이나 구성원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황이다.
- 중국동맹회
- 프리메이슨: 중세기의 석공 길드에서 출발했다는 설이 있고, 본인들도 이를 주장하긴 하나, 공식적인 기록은 18세기 경부터 등장한다. 2020년 현재의 프리메이슨은 18세기 이래로 더이상 비밀결사가 아니지만,[255] 그 이전에는 비밀주의 단체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 피타고라스학파: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인 피타고라스[256] 가 창립한 수학자 집단이긴 한데, 문제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 집단도 겸한 비밀 단체라서, 그 내부의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 흥중회
- Cicada 3301
- KKK
- 사이언톨로지
- 사토시 나카모토: 가상 화폐인 비트코인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정체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일본인, 혹은 일본계라는 확증도 없는 실정.
- 소련과 관련된 음모론
- 사라진 소련 우주비행사(Lost cosmonauts)
- 지트커(Zhitkur): 일명 소련의 AREA 51로 불리는 비밀 연구 기관이다.
- 시온 성모 마리아 교회 : 에티오피아 악숨 소재의 교회로서 그 유명한 성궤를 보관하고 있다고 알려진 장소이다. 실제로 지역 주민들은 이 곳에 진짜 성궤가 보관되어 있다고 굳게 믿으면서 관련 행사까지 벌이고 있지만, 그 성궤가 외부에 일절 공개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검증이 되지 않았다. 교회 측에서는 정말 자신들이 성궤를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궤 보존을 위한 직책까지 두고 있고, 성궤를 보관하고 있다는 전승 자체는 무척 오래되었기 때문에 대체 이 교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 악마 숭배자: 광란의 난교 파티, 살인, 마약, 아동 유괴 등의 흉흉한 소문들이 따라다니지만, 그 어떤 것도 실제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 일부는 일루미나티와도 접점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암호
- 유대인
- 음모론 필수요소
- 인터넷 3대 미스터리[258]
- 왜 그리스는 새벽에 축구해요?
- 이회창 흙오이 먹는 사진: 2002년 대한민국 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가 흙오이를 먹는 사진이 온라인 상에서 흔적도 없이 모두 증발해 버린 사건. 지금과는 달리 당시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인터넷 과거 기록 삭제 대행 업체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나, 이 역시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 확실하진 않다.(자세한 내용은 흙오이 문서와 잊힐 권리 문서 참조)
- 일본 궁내청 서릉부 및 정창원: 현재 한국 국내에서 실전되었거나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으로 약탈해 간 한국 고대사 관련 문헌, 사료들이 여기에 보관되어 있다는 떡밥이 있다.
- 자작극
- 전파납치: 애쉬타 전파납치 사건, 맥스 헤드룸 전파납치 사건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 조지아 가이드스톤
- 켐트레일
- 토인비 타일
- 마리아의 구원방주: 1985년에 창시된 사이비 종교로, 성모상에서 피눈물이 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이는 거짓말이지만, 구원방주 측에서 주장한 성모상에서 흘러내렸다는 피눈물이라고 주장한 액체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진 바가 없다. 그냥 물감일 수도 있지만, 피눈물이 진짜로 피로 이루어져 있다면, 당시 신도의 살인이나 폭행, 인신 공양 등이 이루어졌을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259][260]
6. 우주, 외계인, UFO 관련 정보
- 드로파 석(Dropa Stones): 비슷한 것으로 롤라도프 판(Lolladoff plate)이 있다.
- 메시에 102: 메시에 천체 목록에 102번째로 기록된 천체로, 프랑스의 천문학자인 피에르 메솅이 처음 발견하여 그의 동료인 샤를 메시에가 이 천체를 재관측하고 천체 목록에 기록하였다. 문제는 현재 그 존재가 밝혀지는 천체들 중에서 메시에 102에 대응하는 천체가 무엇인지가 규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메시에와 메솅이 메시에 101를 관측한 결과를 혼동하여 없는 천체를 본의 아니게 지어냈다는 설과, 용자리 방향에서 관측할 수 있는 은하인 NGC 5866[262] 라는 설, NGC 5928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 외계인: 세계적으로 외계인을 보았다는 목격담은 한둘이 아니고, 정부가 외계인들의 노예가 되었다느니 하는 얘기도 매우 흔하지만, 그 얘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거진 다 특정 사건사고[265] 와 관련하여 해당 국가의 군대나 첩보요원들이 뒷수습을 위해 조사하던 것이 와전된 경우거나, 돈을 노린 사기 행각의 일환 내지는 관심종자들이 관심받으려고 가짜 뉴스를 퍼뜨린 경우에 속한다.
- 그레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어좁이에 대두이고 고글을 쓴 듯 큰 눈을 한 외계인.
- 렙틸리언: 뱀이나 도마뱀 같은 파충류 외계인으로 용자리에서 왔단 설이 있다. 목격담이 꽤 많고 꽤 세부적인 편. 시가형 UFO는 이들이 타고 다닌다고 한다.
- 노르딕: 인간형 외계인으로 말 그대로 인간인데 이상한 옷을 입고 있고 북유럽 백인처럼 생겼다.[263] 항간에선 이들이 화성이나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에서 왔다고 믿는다. 지구인에게는 가장 우호적이며 파충류 외계인을 싫어한다고 한다.[264]
- 시리우스족: 목격 사례는 없는 설정상(?)의 외계 종족으로 중립적이지만 평화 애호적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 플랫우즈의 몬스터
- 유명 외계인 인물 및 생물
- 옴넥 오넥: 금성에서 미국으로 내려와 가족을 꾸리며 살고있다고 주장하는 여성이다. 이 인물의 저서가 한국에 소개된 적도 있다. 홈페이지
- 파인 갭: 단, 당초 알려진 UFO 격추 시도 영상은 의도적으로 잘라내고 설정을 덧붙인 영상으로 밝혀졌다. 실제로는 얼음 덩어리와 우주선의 분사로 인한 장면으로 판명. 기지 자체는 실존하는 곳이기 때문에 취소선은 부적절하다. 파인 갭과 캐틀 뮤틸레이션을 연결하려는 설명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해당 문서 참고.
- 덜스 지하 기지: 미군이 외계인과 손잡고 민간인들을 납치해 비밀 실험을 벌이고 있다는 음모론.
- KIC 8462852: 백조 자리 항성으로 "태비의 별"(Tabby's star)이라고도 불린다. 불규칙하게 깜박이는 감광 현상을 일으키는데 이는 마치 그 별과 지구 사이에 존재하는 장애물에 빛이 가로막히는 것처럼 보인다. 일각에서는 외계 문명이 이 별의 주위에 거대한 다이슨 스피어 같은 구조물을 건설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는 중이나, 천문학계에서는 먼지 때문일 것으로 보고 있다. # ##
- UFO: 다양하게 설명되지만 한 가지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 최초 발견 이후에야 수많은 목격담이 쏟아진 것도 의문.
- 가평 UFO
- 광해군 시기의 UFO 소동
- 글래스고 상공 UFO 니어미스: 2012년 12월 2일, 글래스고 공항에 접근 중이던 A320 항공기가 "Baillieston" 지역 3,500ft 상공에서 푸른빛과 노란빛의(blue and yellow) 불상의 비행체와 니어미스를 일으켰다고 의심되는 사건. BBC에도 소개되었다.(#)
- 서울 UFO 격추미수 사건
- 황해 허상 항적 사건
- 로스웰 UFO 추락 사건
- 바르지냐 UFO 사건
- 피닉스 UFO 사건(Phoenix Light): 1997년, 미국 애리조나 주의 도시 피닉스(Phoenix) 상공에서 야간에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목격하는 가운데 다수의 발광체가 V 자 형태를 이루어 비행한 사건. 불빛들은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면서 전체적으로 거의 동일한 방향과 속도로 이동했고, 이 때문에 많은 목격자들과 UFO론자들은 이것이 여러 개의 조명을 가진 하나의 비행체라고 믿었다. 문제의 발광체들은 나중에 일렬로 정렬한 형태로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 회의론자들은 이것이 단순히 비행기 내지는 군에서 사용한 조명탄이라고 믿고 있다.
- 태양 근처의 UFO들 - 가장 미스터리하고 꽤 유명한 부분으로 대부분 태양을 관측하는 위성으로부터 찍힌다. 대부분 떼거지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크기도 꽤나 거대한 편이다. 2018년 9월 초쯤에 거대한 뭔가가 지나가고 9월 11일에 이상한 게 찍힌 후 태양 관측소가 연쇄 폐쇄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것 때문이 아닐까하는 음모론도 생기는 중이다[267] . 대체로 천문학자들은 그동안 관측하기 어려웠던 태양을 공전하는 소행성들이 UFO의 정체라고 추정하고 있다.
- 남극에서 발생한 정체불명의 고에너지 우주선[268] : 남극에 설치되어있던 중성미자 검출기에서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중성미자가 포착되어 전세계의 과학자들을 충공깽에 빠뜨린 바 있다. 현재는 두 가지 가능성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한 가지는 그냥 우주에서 날아온 중성미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구 내부에서 모종의 메커니즘에 의해 방출된 중성미자가 검출되었다는 것이다.
- USO - 미확인 수중 물체(Unidentified Submerged Object)
7. 예언 관련 정보
- 예언서
- 표충비: 밀양 소재. 국난이 닥칠 때마다 땀을 흘린다고 알려져 있다.
8. 생물학 관련 정보
- 고구마의 전파 과정: 고고학자와 식물학자들을 엿먹이는 대표적인 미스터리로, 아직까지 고구마가 어떻게 원산지인 남아메리카에서 전세계로 전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일단 폴리네시아와 뉴기니의 고구마는 폴리네시아인들이 직접 남아메리카까지 가서 전파했다는 설이 주류 학계에서 공인받고 있지만,[269] 유라시아 및 아프리카의 경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나 동시기의 다른 탐험가들에 의해 전파되었다는 기존의 가설이 DNA 분석 결과에 따라 부정되면서 미궁에 빠졌다.[270]
- 고추의 한국으로의 전래 과정: 고추 자체는 멕시코가 원산인 관계로, 유럽에 고추가 소개된 뒤인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한국에 전래된 것만은 확실히 밝혀졌지만, 무엇을 계기로 고추가 전래된 것인지가 의문이다. 왜란 당시에 일본군이 오늘날의 최루탄격으로 일종의 화학 무기로 사용했던 것이 알려지면서[271] 그 용도가 식용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고, 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과의 국교가 재개되면서 수입된 것이 시초라는 설도 있으나, 한국의 농학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확정된 설은 아직 없다.
- 대멸종
- K-Pg 멸종(백악기-제3기 절멸 사건): 대부분의 공룡, 익룡 등 당시 육상 생물종의 75%가, 장경룡, 암모나이트 등의 해양 생물종의 상당수가 멸종한 사건. 허나 양서류를 비롯한 민물 생태계의 피해가 미미했던 점, 악어 등의 분류군이 생존한 점 등의 의문은 아직까지 이견이 난무한다.
- 네메시스 가설: 최근에 존재 여부를 두고 왈가왈부 되고있는 가설상의 행성인 티케 및 가설상의 갈색 왜성인 네메시스와 관련이 깊은 가설로[272] , 알려지지 않은 오르트 구름 내의 행성급 이상의 천체가 태양으로부터 1.5광년 정도 떨어진 궤도를 공전하면서 다량의 소행성들을 태양계 안쪽의 궤도로 끌어들여서 주기적인 대멸종을 야기한다는 것이 가설의 요지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천체가 존재하는지가 의문이라서, 가설 자체도 상당한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273]
- 앙코르와트의 공룡 조각: 앙코르와트 사원 벽면에 양각으로 장식된 문양 중에 공룡처럼 생긴 것이 있어서 이슈가 되었다.
- 페름기 대멸종: 위 백악기-제2기 절멸 사건을 콩라인으로 만든 자연사상 최악의 대멸종이다. 일단 시베리아 트랩이라고 부르는 슈퍼화산의 분화가 원인이라는 설이 기정사실화되어 있지만, 이 멸종이 어떻게 종결되었는지는 불명이다.
- 어드스톨(Erdstall): 독일 근방에서 다수 발견되는 미스터리한 지하 터널. 대략 중세 즈음의 인공물로 추정되나 그 용도가 불명이다. 이 동굴에는 "고블린의 감옥"이라는 이명이 붙어있는데, 일각에서는 이것이 작은 크립티드들을 붙잡아 감금하던 장소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 크립티드
- 신비동물학
- 기름구덩이 오징어(oil pit squid): 1996년에 미국 인디애나에서 발견된, 오징어로 의심되는 생물. 한 공장의 근로자들이 우연히 유독한 기름 웅덩이에서 발견하여 통에 담아두었으나, 본격적으로 그 정체를 확인하기 전에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이는 지역 주민들의 증언과 언론 매체들의 보도를 통해 기록이 남아 있으나, 어떠한 객관적 증거물도 남아있지 않은 데다 1건의 목격 사례 이외에는 사실상 추가 목격 사례가 없기 때문에 조작 혐의를 받고 있기도 하다. 우연히 평범한 오징어가 거기 빠졌다는 설, 대규모의 박테리아 군체라는 설, 지렁이의 일종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확인할 방법은 없다.
- 맨 힐 섬의 사체
- 악어인간 제이크 (Jake the alligator man)
- 인어
- 리자드맨[274] : 일루미니티, 외계인과 많이 엮인다.
- 프레스노 나이트크롤러
- 짐새
- 호수괴물 및 해룡(Sea serpent)[275]
- 라가르플리요르트 벌레(Lagarfljót Worm): 아이슬란드 소재 라가르플리요르트 호수에 소재한다고 믿어진다.
- 오고포고: 캐나다에서 목격되는 호수 괴물. 캐나다 판 네시.
- 챔프
- 인간형 괴수
- 신비식물학
- 신비동물학
- 범고래: 수중/육상 동물을 가리지 않고 잡아먹는 흉포한 포식자지만 유독 인간만은 공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 52 헤르츠 고래: 일명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1989년에 소리가 발견된 이후 현재까지 미 해군의 관측기에 해당 생물체가 내는 52Hz의 주파수가 잡히고 있다.
- 유전적 탈모가 치유되지 못하는 이유 : 일명 남성탈모라 불리우는 유전적 탈모는 다른 탈모와 달리, 불치병으로 판정을 받는데, 이것은 일부 남성호르몬이 모근과 모세포를 방해한다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왜 남성호르몬의 일부가 모근을 공격하는는 것과, 다른 탈모와 달리, 모발을 괴사시키고, 그에 대한 치유가 불가능한,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다. 일단 확실한 것은, 탈모의 비율은 유전적 다양성에 비례하고, 탈모를 일으키는 유전자가 네안데르탈인에서 물려받았단 것이다.[277] 실제로 전세계적으로 순혈 현생인류인 코이산족들[278] 의 탈모율이 가장 적은 것과 관계가 있다. [279]
9. 유령, 귀신, 심령현상 관련 정보
- 검은 수도사의 집(Black Monk House): 영국 웨스트 요크셔의 폰테프랙트 마을 소재. 영국 전역에서 가장 흉악한(violent) 심령 현상이 발생하는 흉가라고 하며, 이곳의 유령은 실제로 사람을 공격한다고 한다. 주소는 30 East Dr, Pontefract WF8 2AN
- 그림에 관련된 심령 현상
- 고뇌에 찬 남자: 《The Anguished Man》. 일명 저주받은 그림이자 피로 그린 그림이다. 국내에는 어떤 화가가 자신의 피로 그림을 그렸다는 카더라로 잘 알려져 있다.
- 미틀스 플랜테이션의 거울(Myrtles Plantation Mirror): 유령이 빈번히 발견되거나, 의문의 손자국이 저 혼자 찍히는 거울.
- 사후세계
- 임사체험(NDE)
- 윤회
- 전생
- 루크 루엘만(Luke Ruehlman): 1993년 시카고 팩스턴 호텔 화재 당시 사망했던 흑인 여성 팸 로빈슨(Pam Robinson)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2007년생 백인 남자아이. "화재 열기에 쓰러진 후 천국을 보았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꼬마 남자아이가 되어 있었으며 모두가 나를 '루크'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 제임스 라이닝거(James Leininger): 2차 대전 당시 조종사 제임스 허드슨(James Hudson)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로 유명하다.(관련 유튜브 영상(한국어)) 특히 그는 자신이 부모를 '선택'했다는 발언을 하거나, 항공기 정비에 관해 언급하는 등 부모를 여러 차례 놀라게 했다.
- 캐머런 매콜리(Cameron McCauley): 스코틀랜드 바라 섬(Barra island)에 살던 셰인 로버트슨(Shane Robertson)의 기억을 갖고 태어난 아이.
- 지옥
- 천국
- 환생
- 안나 베이커의 웨딩드레스(Anna Baker's Wedding Dress): 일명 귀신들린 드레스. 안나 베이커라는 여성이 부모의 반대로 약혼남과의 결혼이 무산되자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은 후, 그녀가 부모 몰래 장만해 두었던 웨딩 드레스가 발견되었다. 사람들의 목격담에 의하면 유리장에 보관된 웨딩 드레스가 밤중에 갑자기 저 혼자 나풀나풀 춤을 추거나,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입은 듯한 모습으로 저 혼자 돌아다니거나, 웨딩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처녀 귀신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행여라도 이 드레스를 입어 보는 사람은 현재 혹은 미래의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는 전설 같은 저주도 전해져 내려온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소재.
- 유체이탈(OBE)
- 전자음성현상(EVP현상; electronic voice phenomenon): 전화 등의 전자 기기를 활용해서 유령이나 망자가 메시지를 남긴다고 알려진 현상. 주로 백색소음이나 자동 응답기가 대표적인 의사 소통의 채널로 거론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잘 활용하면 고인이나 이미 무지개 다리를 건넌 애완 동물과 "대화"를 할 수 있으리라 믿기도 한다.
- 크레센트 호텔(Crescent hotel): 미국의 대표적인 귀신들린 호텔로 알려져 있으며 정상 영업 중이다.
10. 초능력, 초자연현상 관련 정보
- 고행
- 못 침대: 못을 촘촘하게 박은 침대 위에 눕거나 앉는 것.
- 낚싯바늘: 크고 날카로운 바늘에 자신의 피부 일부를 꿰어 매달리는 것.
- 동물비(Rain of Animals)
- 라 만차 네그라(La Mancha Negra): 스페인어로, 영어로 번역하면 "검은 얼룩"이라는 뜻. 베네수엘라에 나타나며 학자들은 불량 아스팔트에서 유출되는 기름 찌그레기들로 본다.
- 툰문 고속도로: 홍콩 신계 툰문에 있는 고속도로로 피투성이가 된 처녀귀신이 자주 목격되어 교통사고가 나는 곳이다. 홍콩 경찰이 수사를 했지만 정체를 밝히지 못했고 도로관리국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해 항간에서는 1960년대 차 사고로 죽은 중국본토인 여성 근로자의 원혼이라는 주장을 한다.
- 마녀
- 몬테레이 마녀(Monterrey witch): 몬테레이 인근 산지에서 괴기스럽게 생긴 노파가 날아다닌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으며, 한 시민은 심지어 미상의 물체가 하늘을 유유히 날아가는 모습을 찍기까지 했다. 회의론자들은 특수효과를 활용한 주작 내지는 단순히 주인 잃은 풍선일 뿐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몬테레이 경찰관들이 이 물체에 공격당했다는 주장까지 TV 인터뷰를 통해 한 지라 주인 잃은 풍선이나 특수효과를 이용한 주작은 아닐 수 있다.[280]
- 메투엔의 물 악마: 1963년 10월경 매사추세츠 주 메투엔(Methuen) 마을에서 처음 발생한 사건. 프란시스 마틴(Francis Martin) 일가의 집 벽이 갑자기 젖어들더니 이윽고 차디찬 찬물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당시 실외 온도를 고려하더라도 이는 너무 차가운 것이었고 배관 시설에도 문제가 없었다. 나중에는 집안 곳곳에서 물이 터져나오거나 2피트 정도로 분수처럼 뿜어져 올랐고, 견디다 못한 가족이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자 그곳에서도 갑자기 집에서 물이 터져나오기 시작했으며, 심지어는 정부에서 단수시킨 집으로 이사했는데도 또 물이 쏟아져나왔다. 이 이상한 사건은 계속 문제의 가족을 따라다니다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이에 대해 당국에서 '건물에 습기가 축적된 것' 이라고 설명한 것 이외에 알려진 것은 없다. #
- 배니싱: 미제 행방불명 사건을 약간 다르게 부르는 명칭이라고도 한다.
- 메리 셀러스트호 사건
- 브라이언 섀퍼 실종 사건: 오하이오대 의대생인 브라이언 섀퍼(Bryan Shaffer)가 행방불명되어 당국의 수색에도 불구하고 찾지 못한 사건.
- 브루노 보그스 실종 사건: 브라질 아크레 주의 젊은 청년 브루노 보르헤스(Bruno Borges)가 실종된 사건으로, 그의 방에서는 아무런 가구나 가전 없이 흰 바닥과 벽, 천장에 빼곡히 적힌 글과 그림들이 알 듯 모를 듯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14권의 두꺼운 책, 조르다노 브루노의 동상, 조르다노 브루노가 외계인과 함께 서 있는 그림이 담긴 액자도 있었다. 그는 평소에도 외계인이나 일루미나티 등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 아이린모어 등대지기 실종사건
- 잃어버린 로어노크 식민지: 16세기 말 영국이 노스 캐롤라이나 해안의 로어노크(Roanoke) 섬에 개척한 식민지의 이주민들이 1587년~1590년 사이에 모두 사라져버린 사건으로 나무 담장에 새겨진 'CROATOAN'이라는 단어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DNA 조사와 더불어 언어를 조사하여, 그들이 인근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합류·동화하였다는 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전엔 스페인인, 프랑스인 등 타 식민지 개척민들에게 공격당했다는 설도 있었다.[281]
- 제이미슨 가족 실종 사건: 지난 2009년, 미국 오클라호마 주의 제이미슨(Jamison) 씨 가족이 집에 귀신이 들렸다고 주장하다가, 어느 날 일가족이 다같이 짐을 싸서 애완견과 함께 차를 몰고 어디론가 떠난 뒤 실종된 사건. 훗날 간신히 발견된 차 안에서는 대량의 현금과 다양한 집기들, 그리고 굶어 죽어가는 애완견이 발견되었지만 일가족만큼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주 정부가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펼쳤으나 별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이후 산 속에서 이들 가족의 해골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조이타 호 선원 실종 사건: 조이타 호(MV Joyita) 선원들이 너무 감쪽같이 사라져 있어서 "남태평양의 메리 셀러스트호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 카즈 2호 유령요트 사건(#)
- 파양호 선박 실종 사건: 이른바 중국판 버뮤다 삼각지대.
- 프레데릭 발렌티크 실종 사건: 호주 멜버른 상공에서 벌어진 실종사건으로 관제탑 무전 등을 종합할 때 CFIT(해상 추락)으로 잠정 결론 지어진 항공 사고다. 피해자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프레데릭 발렌티크가 평소 UFO의 광적인 매니아라서 비행착각을 UFO 납치로 받아들인 듯 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 USS NAVY L-8 사건: 1942년 8월 16일 미 해군 제32 비행선전대 소속 비행선 L-8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초계임무 도중 승무원인 어니스트 드와이트 코디 중위와 언신 찰스 엘리스 아담스가 실종된 채로 추락한 사건. 대도시 한복판에 일어난 사건으로 목격자도 많았으며 당시 추락하는 비행선을 찍은 사진들도 남아 있다.
- 요정의 고리(Fairy circles): 아프리카 나미비아 등지에서 발견되는 이상한 토양 환경으로, 땅에 둥근 모양으로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둥근 공간이 숭숭 뚫려있고 그 가장자리에는 잡초가 나 있다. 흰개미 때문이라는 설이 있긴 하지만 확실한 설명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흰개미와 지하수의 영향을 받아 중간 원 부분에 식물이 자라지 않는다고 설명된다.(사진1, 사진2, 네이버캐스트)
- 저주: 대개는 독립된 사건들을 줄줄이 엮어서 저주라고 부르는 것에 가깝다.
- 버스비의 저주받은 의자(Busby's chair)(#)
- 저주받은 다이아몬드
- ESP
- 공중부양
- 사이코메트리
- 순간이동
- 스푼 벤딩
- 염동력
- 염사
- 인디고 아이들: 다양하고 특별한 초능력을 선천적으로 타고 태어난다고 믿어지는 어린이들로, 차크라 에너지가 몸 전체에서 남색으로 빛나고 있다고 한다.(#)
- 천리안(리모트 뷰잉)
-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천리안과 같은 초능력을 소련과의 첩보전에서 써먹을 수 있다고 믿은 미군이 한때 진지하게 추진했던 극비 프로젝트. 천리안이 가능했다면 첩보활동의 혁명이 되었겠지만 현실은...
- 잉고 스완: 천리안으로 목성의 고리를 보았다고 주장한 인물.
- 초능력 논문 게재 사건
- 텔레파시
- 투시
- 파이로키네시스
- 프로젝트 시그마
- Strange sound
- 무두스 소음(Moodus noises)
- 타오스 험(Taos hum)
- 하늘 지진(Skyquake)
11. 지역에 관한 미스터리
- 게티스버그 삼각지대(Gettysburg triangular field): 게티즈버그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미국의 유명한 심령 스폿 중 하나.
- 나스타포카 호(Nastapoka arc): 캐나다 퀘벡 주 북쪽에 있는 완벽한 동그라미 모양의 해안선 지형.
- 느타벨리스: 다벨리스 동굴(Davelis cave)이라고도 한다. 그리스 소재. 유명한 무법자 느타벨리스(Ntavelis)가 아테네 인근 펜텔리(Penteli) 산의 이 동굴에 은거한 적이 있으며, 이후 이런저런 초자연 현상이 목격되는 심령 스폿이 되었다.
- 디 아이(The Eye): 아르헨티나 소재. 늪지 한복판에 존재하는 수상쩍은 초승달 모양 호수인데,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 ## 좌표는 34˚15'07.8" S, 58˚49'47.4" W.
- 룽유 동굴(The Longyou Grottoes): 중국 저장성 소재. 고대의 유산이라고 짐작되나, 그 규모와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기록도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다.
- 마더 쉽튼의 동굴(Mother Shipton's cave): 영국 노스 요크셔 네어즈보로(Knaresborough) 인근 소재. 강변 동굴 입구에서 물이 지속적으로 흘러내리는 석화 우물(petrifying well)로, 이 물을 1주 정도 맞고 있는 물체는 그대로 돌이 되어버린다. 인형이나 신발은 1주 이내, 자전거 정도 크기의 물체는 1달 정도가 소요된다. 과학자들은 이 물에 유달리 무기물이 많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빠른 시간에 석화가 진행되는지는 불명이다.
- 베닝턴 삼각지대(Bennington triangle): 미국 버몬트 주 남서부 소재. 1920-1950년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었으며 특히 1945-1950년 사이에는 5명이 연이어 실종되었던 대표적인 배니싱 스폿이다. 이곳 소문에 따르면 그곳에는 "베닝턴 몬스터"라는 괴물[282] 이 살았다고 전해졌다.
- 브리지워터 삼각지대(Bridgewater triangle): 일명 저주받은 땅. 미국 매사추세츠 주 남부 소재.
- 산타크루즈 미스터리 스폿: 사진 보기 - 무섭다기보다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관광명소. 진짜로 심령 현상이나 미스터리 현상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시각적 착각(Visual illusion)의 결과이다.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소재. 참고로 오레곤 볼텍스(Oregon Vortex)라고 거의 비슷한 다른 관광지가 하나 더 있다.
- 애틀란타의 피의 집: 1987년 9월경 신고된 이상한 현상으로, 실내 이곳저곳에서 자꾸 누군가의 피가 흩뿌려진 모습이 발견되는 집. 경찰은 이 피가 O형이라고 밝혔지만 주인 부부는 양쪽 모두 A형이었다. 또한 상처 입은 야생동물일 가능성도 없다고 확인했다. 회의주의자들은 주인 부부의 딸이 병원에서 일한다는 점을 들어, 부모와 재정적 문제로 마찰을 빚은 자녀들이 고의로 몰래 뿌린 피라고 믿고 있다. #
- 오크 섬의 보물: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의 오크섬에서 1795년 이래로 현재 진행형인 미스터리. 땅을 파면 팔수록 묘한 유물이 드문드문 출토되고 있다. 보물의 주인에 대해서는 성전기사단, 해적 캡틴 키드, 마리 앙투와네트 등이 거론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섬의 지도가 묘사되어 있는 12세기 문서의 사본이 발견되기도 했다. 일단 콜럼버스 이전에 바이킹들이 북미에 가본 적이 있긴 하다.
- 유령섬: 한때 '발견' 되어 지도상에 표기되었으나, 추후 측량이나 탐험, 위성 촬영 등으로는 그 존재가 사라져서 더 이상 지도에 표기되지 않는 섬. #목록
- 제주도 월령리 선인장 군락: 멕시코가 원산지인 이 선인장이 어떻게 수백 년 전부터 수천 킬로미터가 넘게 떨어진 제주도에서 자생했는지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학자들은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온 것으로 추정하나 확실치는 않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 춤추는 숲(dancing forest):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소재. 숲의 나무들의 나무둥치가 제각기 기이한 모양으로 크게 비틀려 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그랬다기에는 너무 비일반적인 모양이기에 온갖 추측들이 있는데, 그 지역 수목의 자연적 생장행태라는 설, 핵방사능의 영향이라는 설, 거센 바람에 의해 변형되었다는 설 등이 있지만,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 루마니아에도 호이아바치우라는 이름의 비슷한 숲이 있다.
- 카네토 디 카로니아: 시칠리아 북부의 작은 해변 마을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잦은 화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심지어 엑소시즘까지 했을 정도. 과학자들은 단순 방화 사건이라고는 하지만, 저절로 전기 스파크가 튀면서 화재가 시작되는 걸 봤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서... 심령적인 이유로 발화가 나타나는 현상은 "염화"(Pyrokinesis)라고도 부른다.[283][284]
- 카시쿨락스카야 동굴 : Кашкулакская пещера. '카스쿨라츠카야' 라는 발음으로도 알려져 있다. 러시아의 소위 '검은 악마 동굴' 로 불리며, 예전부터 악마를 달래는 의식이 전해져 왔다고 한다.
- 파톰스키 크레이터(Patomskiy crater): 정체불명의 분화구로, 폭발한 흔적이 없고, 만들어진 시기가 고작 300년이라서 의문이 있는 크레이터다. UFO설, 운석 충돌설들이 있지만, 밝혀지지 않았다.
- 포벨랴(Poveglia): 이탈리아의 심령 스폿. 흑사병 환자들을 격리 조치한 섬인데, 이후로 귀신을 목격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가혹한 학대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정신 병원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해서 여러 의미로 흉흉한 소문이 많다.
- 헤드리스 밸리(The Valley of the Headless Men): 정식 명칭은 없다. 캐나다 노스웨스트 준주의 나하니 국립 공원(Nahanni National Park Reserve)[285] 의 Headless Valley와 관련되어 전해져 오는 이야기. 1908년 경, 사금으로 한몫 잡으려 이 곳에 왔던 유럽인 금광 탐사자 둘이 목 없는 시체로 발견되고 나서부터 전해지기 시작한 전설이다. 또한 이 사건 전에도 유럽인 개척자들이 오기 한참 전에 구전으로 전해진 다른 사건이 있었는데, 옛날에 나하 족(Naha Tribe)이라는, 산에서 살며 근처 다른 마을을 약탈했던 호전적인 원주민 종족이 있었는데 어느 날 영문 모를 이유로 전부 갑작스레 사라졌다고 한다. 게다가 인근의 다른 원주민들은 이 곳이 귀신들린 지역 혹은 악마가 사는 지역이라며 유난히 꺼렸고 그 근처도 가지 않았다.(영어 위키백과) 저주받은 계곡, 갑작스레 모습을 감춘 원주민 종족, 사라진 금, 사금 채취꾼의 의문스런 죽음 등에 관한 얘기가 떠돈다. 당시 옛날이었을 뿐더러 현재까지도 이 지역이 유난히 고립된 지역이라[286] 사건의 목격자, 단서, 연관성 등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문제 없이 국립 공원으로 잘만 운영되고 있다.
12. 기인·기행·유명인
- 글로리아 라미레즈: 1994년에 미국 리버사이드 종합병원(Riverside General Hospital) 응급실에 심부정맥 문제로 인해 실려왔다가 사망한 여성으로, 입원 당시 자궁경부암 말기 환자였다. 그런데 의료진이 아무리 제세동을 실시해도 효험이 없었으며, 그녀의 혈액은 딱 봐도 이상한 입자들이 잔뜩 떠다니는 상태였고, 도리어 그녀의 피부 및 혈액과 접촉한 간호사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바람에 의료진들과 다른 환자들이 긴급 대피하기도 했다. 얼마 못 가서 그녀는 심장기능의 정지로 인해 사망했으며, 어째서 그녀와 접촉한 의료진들이 줄줄이 쓰러지고 입원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확실한 설명이 없다. 일단은 지극히 유해한 화학물질인 황산다이메틸(dimethyl sulfate)이나 메틸아민(methylamine)에 노출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이 존재한다. 이 인물은 세간에 "The toxic lady"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으며, 많은 법의학 매체 및 메디컬 드라마 등에서 참고하기도 했다.
- 나타샤 뎀키나: 투시능력과 확대능력, 그리고 낯선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질병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알려졌다.
- 독립 영양 인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하지만 당사자들의 주장 말고는 다른 근거가 전혀 없다.
- 딘 카나시스(Dean Karnazes): 일명 "영원히 달릴 수 있는 사람"으로 불리는 마라톤 선수로, 2005년에 80시간 44분 동안 560km를 쉬지 않고 잠도 안 자고 달리는 기록을 세웠다.
- 로이 설리번: 번개를 7번 맞고 생존한 사람.
- 리칭윈(Li Ching-Yuen): 256세만큼 장수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197세라는 얘기도 있다.
- 미셸 로티토(Michel Lotito): 유명한 이식증 환자로, "뭐든지 먹을 수 있는 남자"(Monsieur Mangetout)라는 별명이 있다. 그가 먹은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다름아닌 세스나 150. 그는 18대의 자전거와 8개의 샹들리에를 먹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 벤자만 카일(Benjaman Kyle): 희귀하고 극심한 기억상실증을 경험한 미국인 남성. 그는 삶의 어떤 특정 시점 이전까지 갖고 있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으며, 여기에는 그의 원래 이름과 정체성, 거주지, 가족 친지, 직업 등조차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벤자만 카일이라는 이름 역시 뒤늦게 붙은 가명인 것. 미스터리한 점은, 보통 이런 경우 언론을 타서 얼굴이 알려지게 되면 가족이나 지인들이 나타나게 마련인데, 아무도 이 사람이 원래 누구이고 뭐 하던 사람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벤자만 카일의 과거 행적은 완벽히 의문으로 남아 있는 상태였으나, 유전자 검사와 친족 검사의 힘으로 2015년에 그가 인디아나 출신의 William Burgess Powell임이 밝혀졌다.
- 빔 호프(Wim Hof):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이스맨"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추위를 타지 않는다. 심지어 에베레스트를 반바지 차림으로 등산한 적도 있다. 미국 TV 프로그램 《Fact or Faked》에서는 이 사람이 추위 속에서도 심부 체온과 심박수를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모 아웃도어 브랜드 광고도 찍었으며 국내에도 방송된 적이 있다.
- 〈스탠 리의 슈퍼휴먼즈〉(Stan Lee's Superhumans):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스탠 리가 히스토리 채널에서 2010-2014년 사이에 진행하던 다큐멘터리 쇼. 쉽게 말해서 미국판 기인열전. 보다보면 별의별 신기한 사람들이 나온다.
- 안젤로 파티코니(Angelo Faticoni; 1859-1931): 이탈리아계 미국인. 일명 "절대 물에 빠지지 않는 사람" 혹은 인간 코르크(Human Cork). 하버드 대학교 연구팀이 몸에다 납 추를 매달거나 의자에 묶어놓고 물에 빠뜨려 보았지만 15시간 이상 부유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 전기인간
- 줄스 보글레이(Jules Bourglay; 1858-1889): 미국 코네티컷 주 인근에서 자주 목격되던 남루한 방랑자. 행색을 따서 레더맨(Leatherman)이라고도 한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으로 추정되며, 동굴 등에서 장작을 때며 풍찬노숙을 했다. 그의 사진들이 몇몇 남아 있지만 그가 대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갑론을박이 진행중이다. 무덤은 뉴욕 주 오시닝에 있다.
- 함보 라마: 본명은 다쉬 도르조 이티길로프(Даши-Доржо Итигэлов). 1852년에 태어나 1927년에 입적한 라마 불교의 고승으로, 2002년 발견 당시 죽은 지 수십 년이 되도록 시신이 썩지 않고 있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과학자들은 자기-미라화(Self-mummification)의 사례라고 생각하며, 과학적으로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함보 라마가 생전에 라마 불교의 의술에 정통했음도 그 근거가 되고 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어느 승려의 기도'란 제목으로 다루었다. 현재 그의 미라는 러시아의 이볼가 사원에 모셔져 있고 티베트 불교의 성지가 되었다.
13. 인터넷 관련
- 유튜브 괴담
- 흰방녀
-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상대방을 낚을때 이용하는 짤방으로 흑인 남성이 유희왕 카드를 들면서 씨익 웃는 표정을 짓는 짤방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정작 사진 속 흑인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한때 엑조디아를 완성시켜 유희왕 카드게임 대회에서 우승하여 유명세를 탄 제럴 멕케이 윈스턴이라는 설이 나돌았으나 정확한 근거가 없어 거짓이라고 판명되었다. 결국 사진 속 장소[287] 만 밝혀지고, 사진 속의 흑인의 정체는 현재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14. 미스터리 관련 사이트
- 괴물딴지: 다양한 관련 정보가 존재하지만 2010년 이후로는 운영을 포기했는지 더 이상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뉴스 기사 정도나 2010~2011년도에 일부 올라왔을 뿐... 각 분야에 있는 대부분 이야기거리도 2000년대 초~중반에 등록한 매우 오래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15. 관련 문서
[1] 개구리 소년은 와전된 이야기이다. 따라서 개구리 소년은 정확한 명칭이 아니다.[2] 삽살개 모양과 유사하나 삽살개라 볼 수 없는 특징들이 있어 상상의 동물일 것으로 추정된다.[3] 당시 이 사건을 취재하던 김어준과 주진우 두 사람과 그것이 알고싶다의 제작진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과 접선하여 취재에 응하고자 했던 증인들이 자기들이 왔다가기 전, 혹은 왔다간 후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고 하며, 이들의 죽음에 대한 경찰의 수사도 미온적이었다고 한다. 결국 남은 한 명의 증인과 취재하기 위해, 평소 친분이 있던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을 대동해서 자신들과 증인의 신변에 위협을 주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어렵사리 얻어낸 방송분도 하마터면 SBS 내부의 내통자에 의한 고의적인 방해로 인해 전부 삭제될 뻔했으나, 간신히 백업본을 이용해 방송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이 사건에는 유력 인사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당시 경찰은 피해자인 박근혜의 5촌 조카 둘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이라고 발표했지만, 피해자들끼리 사이가 매우 좋았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추정된다.[5] 당시 범인이 사칭한 백모 소령은 실존 인물로, 사건이 일어난 부대에 근무한 적이 있었으며, 사건 당시에는 특전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6] 행보관 도 상사의 안부를 물으며 신상에 훤했다.[7] 자유조선이 일으킨 2019년 주스페인 북한 대사관 습격 사건이 일어난 뒤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현재 미국 영토 내에서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고있다고 한다.[8] 2019년 3월 1일 자로, 이름을 '자유조선'으로 바꾸고 자신들이 현 북한 정권을 대체할 임시 정부라고 선포했다. 임시정부 창설 선포 영상에 서울의 탑골공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천리마민방위 관계자 중에 남한인이 있음은 분명해보인다.[9] 어쩌면 소금이나 기후 때문에 사망 시기를 잘못 알아내거나, 알아내기 힘든 경우일수도 있다.[10] 다만, 여객기를 발견하지 못 하였기 때문에 블랙박스 판독이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로 이것 역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다.[11] 우울증을 호소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어머니는 기본적으로 기행을 한 적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으며, 아들과의 관계 역시 아주 자연스럽고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12] 실종되던 2011년에 6세였으므로 23세일 리가(...).[13] 여기서는 그냥 이날 궁궐이 탔다고만 서술되어 있으며 왜 탔는지는 서술하고 있지 않다. 또한 불탔다는 날짜 또한 수정실록에는 서기 1592년 음력 4월 14일,선조실록은 서기 1592년 음력 5월 3일(혹은 서기 1592년 음력 5월 3일 이전)로 기록하고 있다.[14] 헌안왕은 문성왕의 숙부로, 궁예가 정말 헌안왕의 아들이라면 궁예는 문성왕과 사촌 사이가 된다.[15] 물론 왜군 장수가 조선에 감화되어 자진 투항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조선총독부의 날조였었다.[16] 금나라에서 자기들 역사를 기록한 책인 금사에 나와있는 내용이다.[17] 또는 고려인. 대충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에 여진족의 땅으로 넘어간 듯하다.[18] 또는 고려.[19] 이런 고귀한 혈통의 이방인 후예는 창업군주의 출신과 관련된 전설에 흔히 나오는 부류다. 즉 주몽이 용의 아들이라거나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와 유사한 형태다.[20] 김홍도가 일본에 간 적이 있기는 하나, 그때가 1788년의 일이라서 1794년부터 시작해서 단 1년 남짓만 활동한 도슈사이 샤라쿠와 동일인일 가능성은 없다. 당시의 에도 막부의 폐쇄적인 외교 정책으로 미루어보면, 외국인이 잠깐동안 슬쩍 활동하고 사라질 만한 정황도 존재하지 않았다.[21] 단원풍속도첩에 실린 그림들이 위작설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22] 한사군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군현은 현도군, 그리고 대방군인데, 낙랑군과는 다르게 현도군은 정확한 위치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는 것만 빼면, 딱히 논란이 되는 건 없다.[23] 사실 최씨낙랑국이 독립국인지도 논란이 많다.[24] 동명의 드라마의 원작으로도 유명한 책인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하다.[25] 이 설에 의하면 이 비운의 한국인은 무사히 한국으로 귀국했지만, 나라가 독립한지 불과 5년 만에 전화에 휩싸였으므로, 또다시 전쟁에 징집되는 비극을 맞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26] 참고로 강제규 감독의 영화 마이웨이가 이 가설에 근거해서 만들어졌다.[27] 여기서 다시 이 사람의 정체가 한국인이 맞다는 설이 나오기도 했다. 이 설에 의하면, 이 사람은 원래부터 소련 땅에 살다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이라고 하며, 그 이후에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함께 소련군에 징집되었다가 독일 국방군의 포로가 되어, 최종적으로 연합군에게 목격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병사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설에 의하면, 중앙아시아의 원주민인 카자흐인이나 우즈베크인, 키르기스인이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된 경우라고 한다.[28] 아예 이 이야기 자체가 도시전설이라는 설도 있다.[29] 참고로 이완용은 그 행적과는 별개로 당대 뛰어난 명필이기도 했다.[30] 다만 후술한 목협만치가 목만치와 동일인물이라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31] 목(木)씨는 대성팔족 중 하나인 목리(木刕)씨의 축약형으로, 목협(木劦)씨는 목리(木刕)씨의 오기로 추정된다. 즉 두 인물의 가문과 이름은 완벽히 일치하는 것.[32] 한국어 독음은 기생반숙녜이다.[33] 혹은 이들의 혼혈인이라는 설도 있는데, 어느 쪽이건간에 한반도 통일을 외쳤던 것으로 미루어서, 출신 성분이 무엇이든지간에 일단은 한국인에 좀더 가까운 정체성을 가졌다는 점은 분명하다.[34] 일단 그는 삼국통일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고구려와 동맹을 맺긴 했다.[35] 현존하는 한국 쪽의 사료에서 이 반란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인데, 여기서도 대수롭지 않은 사건인양 간단히 언급할 만큼, 당대에도 관련 기록들이 이미 대거 소실된 상태였다.[36] 당시에 박연은 조선에서 탈출하여 네덜란드로 귀국하려는 생각을 몇번 한 적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모조리 실패한 후에 자포자기로 영구 정착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연 입장에서는 이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이, 당시 조선 조정에서 서양인을 신기하게 여겼기 때문에 박연에게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어 무관이 되게 한 후에 유럽식 대포를 제작하는 기술직에 특채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여성과 혼인을 시키고 생계를 지원해주어서 편안히 정착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박연은 본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사략선 선장, 즉, 네덜란드 정부의 공인을 받은 해적이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해적선 선장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을리가 만무하므로,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고 안정된 지위를 제공한 조선에게 마음이 끌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37] 물론 한국의 성씨의 상당수는 개화기 이후에나 수가 급격히 늘어나서 오늘날과 비슷한 인구 비율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한국인들의 뿌리에 대한 집착은 이미 조선 시대부터 굉장히 남다른 수준이었다. 당대의 법률로 현직 관료가 아닌 사람도 4대째까지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용했는데, 뒤집어말하면, 이는 보통의 사람들도 자기 증조부모까지는 이름을 정확히 기억할 만큼, 조상이 누구고 자기 뿌리가 어떻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확고했다는 뜻이다.[38] 박연이 한국 땅에 정착한 지가 근 400년이 다 되가므로, 그의 후손이 현존한다고 한들 오랫동안 지속된 혼혈로 인해 외양 상으로는 보통의 한국인과 구분하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걸 감안해도 그의 후손들이나 가계도에 대한 기록이 일절 남아있지 않다는 건 여전히 의문이다.[39] 참고로 박연은 이미 네덜란드에서 결혼해서 처자식을 둔 상태였으므로, 네덜란드에는 그의 후손들이 현존하고 있다. 그럼 박연이 중혼한 거 아니냐하면 맞는 말이긴 한데, 도의적인 측면에서 고향에 영원히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현지에서 새로 결혼하고 사는 것을 뭐라 할 수가 있나.[40] 다만 대조영이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것으로 보아 그 정체는 고구려 유민 혹은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추측된다.[41] 세계사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민족들끼리 융화하여 새로운 민족이 되는 경우는 많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사에서도 부여계와 예맥계, 고조선계 부족들끼리 융화하여 생겨난 고구려의 사례가 있으며, 세계사적으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유래한 게르만계 민족인 바이킹과 러시아의 유럽 지역의 토착민인 슬라브인 및 극소수 우랄어족 계통의 민족들이 합쳐져서 오늘날의 러시아인이 된 사례가 있다.[42]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던 중국 공산당의 동북공정 정책에 최초로 헤드샷을 날린 이들이 다름아닌 중국의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다.[43] 백제는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와 싸우다 국왕인 성왕이 전사한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무왕 또한 심심할 만하면(...) 신라를 침공하였다.[44] 그러나 선화공주가 신라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패해서 백제로 온 것이라면, 선화공주가 신라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왕과 함께 신라를 맹공격했다는 추론이 충분히 가능하다. 당장 정사에서도 신라의 왕자였지만 왕실에서 쫓겨난 탓에 신라에 엄청난 적대감을 가져 신라를 맹공격한 인물이 존재한다. 이 추측을 따르면 서동 설화에서 선화공주가 가짜 뉴스로 인해 궁궐에서 쫓겨났다는 부분은 선화공주가 권력 다툼에서 패하여 유배를 갔다는 사실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45] 조만간 나당 연합군이 반드시 침공할테니, 이들을 막으려면 적군이 탄현과 기벌포를 넘게 하면 안 된다는 내용의 전쟁 전략을 서술한 상소이다. 그러나 간신과 요사스러운 대부인을 멀리 하라거나 사치와 향락을 줄이라는 내용은 없다. 일부 사학자들은 의자왕이 실제로 간신과 대부인의 손에 놀아나 사치를 즐겼다면, 이를 지적하여 귀양을 갔다고 기록되어 있는 성충이 마지막 상소문에서 다시 한 번 사치에 대해 언급했을 것임을 지적한다.[46] 의자왕은 마지막에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된 것을 후회한다(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고 했으나, 성충의 전략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는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간언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는지는 알 수 없다.[47] 한 가지 염두할 점은, 이 가설은 말년의 의자왕을 옹호하는 가설이 아니라, 의자왕의 패착은 왕권 강화의 시기를 잘못 잡았다는 것임을 주장하는 가설이다. 즉 신라, 당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고위 권신들을 대거 숙청했던 것이 패착이라는 것.[48]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기록 자체는 일본세기에서 인용했다.[49] 당이 백제를 정복한 후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긴 것이다.[50] 그대로 읽으면 ‘대부인’으로, 여기서는 의자왕의 왕후를 의미한다. 하시카시는 일본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백제어)로, 백제에서 왕후 혹은 부인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추측된다.[51]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는 고구려보다 북쪽에 있는 부여를 정복하려고 하는 대목에서 북명을 언급하고 있으며, 부여보다 북쪽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 말하는 북명은 함경도가 아니라고 여겨진다.[52] 그 위치 때문에 신라 관련 기록에서 언급되는 북명은 동예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으로 본다.[53] 다른 기록에서는 용성국 또는 화하국이라고 나오기도 한다.[54] 다만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이 주장에 대하여 신라에 불교가 유입된 후에 불교적인 윤색이 더해진 결과물이라고 보고있다. 한때 일본의 언어학자인 오노 스스무가 주장한 일본어가 타밀어에서 기원했다는 학설과 연계되어 석탈해가 일본으로 이주한 타밀인의 후손이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었으나, 일본 어디에서도 타밀계 유이민이 있었다는 고고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어서 석탈해 타밀인 설과 일본어 타밀어 기원설이 같이 타격을 입었다.[55] 석탈해 관련 설화에 나오는 까치와 관련된 이야기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설화가 캄차카 반도의 원주민들인 축치인들의 설화에서 발견되었다.[56] 도호쿠 지방과 홋카이도는 지금이야 일본의 주류 민족인 야마토 민족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고대에는 아이누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지역이다. 이 설에 따르면, 석탈해는 한반도 동남부로 이주해온 아이누계 이주민이다.[57] 신라의 건국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태조왕이 건국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태조'라는 시호를 받은 것처럼, 건국자에 준하는 중시조라는 의미에서 이런 칭호가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 주류 역사학계는 알려진 그대로 박혁거세가 신라의 건국자라고 보고 있다.[58] 당시에 독립운동가들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가명을 쓴 것도 있고, 역사학계의 숱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김두성이라는 이름의 독립운동가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독립운동가들이 가명을 쓰는 이들이 많았는데, 백범 김구 선생만 해도 백정선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했고, 유명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산의 이름도 가명이었다.[59] 실제로 나경언은 급작스런 고변을 하여 임금을 놀라게 했다는 죄로 처형되었다.[60] 이 사건 전에 사도세자가 정신병을 앓는 와중에 내시 한 명을 베어죽인 일이 있었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영화 사도에서는 그 살해된 내시가 나경언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복수심에 불타서 그의 행적에 대해 고변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이건 창작물의 설정이고, 실제 기록에는 나경언과 문제의 내시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않고 있다.[61] 편집증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현대의 정신과 의사가 당대의 기록을 보고 영조에게 편집증이 있었다고 진단했다.[62] 당대에도 세자 시절의 영조가 경종을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고, 그래서 이인좌의 난의 주모자들은 국문을 당하는 와중에 영조에게 너라고 부르면서 "네가 전하를 죽였느냐!"며 악을 쓰는 하극상까지 벌일 정도였다. 그러나 경종 본인이 영조가 자신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정했으며, 무엇보다도 이미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점, 마지막으로 영조가 형이 위독해진 것에 대해 심하게 자책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주류 학계에서는 단순한 음모론으로 치부하고 있다. 설령 영조가 경종의 죽음에 일조했다고 해도, 의도적인 게 아니라 모르고 그랬을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63] 이런 학계의 분석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바로 사도다. 기존의 영조나 정조 관련 창작물들이 정치 투쟁을 다룬 것인데 반해, 사도에서는 학계의 추정대로 영조 개인의 인간성 문제와 사도세자의 정신의학적인 문제, 기타 주변 왕실 인물들과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64] 이 사건도 노론이 일으킨게 아니라, 영조가 독단적으로 벌인 짓이다. 정작 노론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으려고 애썼는데, 외려 이 때문에 영조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주요 인사들이 대거 파직되면서 뿔뿔이 분열되어 버렸다.[65] 당시 왕위를 노릴 직계왕손이 사도세자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손도 있었다지만, 상식적으로 멀쩡히 살아있는 세자를 냅두고, 그 아들인 세손을 추대하는 짓을 벌일 리가 없다. [66] 이후에 노론이 정치 성향이나, 사도세자를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 문제 등으로 인해 시파와 벽파로 나뉘었으므로, 노론이라고 해서 꼭 보수 성향인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영조는 분명히 보수 성향이 짙은 왕이었고, 이것때문에 사도세자와 그를 중심으로 한 노론의 주류 세력들이 진보적 성향을 드러낸 것에 대해, 영조가 이를 아니꼬와해서 아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설이 학계에서 제기된 바 있다. 이 설에서도 물론 임오화변은 영조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짓이고, 노론 전체가 세자를 보호하는 입장이었다는 전제는 분명히 깔려있다. 이 설의 문제점은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이 너무 짧아서, 그의 실제 정치 성향이 어땠는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67] 조폭이나 일진 패거리를 일컫는 단어인 불한당이 여기서 유래했다. 당시에는 노론의 분파들 중에서 그 어디에도 끼지 않은 중립파를 멸칭으로 불한당(不漢黨)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쓰는 단어는 '땀도 안 흘릴 정도의 냉혈한'이라는 뜻의 한자(不汗黨)를 쓰는 것으로 바뀌긴 했으나, 이쯤부터 이런 말이 쓰인 건 사실이다. 자세한 건 정병설 항목 참고.[68] 화완옹주는 영조가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한 자식이었다. 이쪽도 노론 음모론때문에 자기 오빠인 사도세자를 죽게 한 악녀라는 오해를 받은 것과는 달리, 오히려 당대인들조차 극도의 브라콘이라고 봤을 만큼 자기 오빠를 끔찍이도 아꼈던 사람이다.[69] 정조가 죽어가면서 어린 순조를 정순왕후 김씨에게 맡겼고, 뒷날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정순왕후를 포함한 경주 김씨 세력이 실각할 때까지 그녀는 의붓손자이기도 한 선왕의 유훈을 충실히 지켰다.[70] 조선시대 왕들의 일상은 이랬다. 새벽 4시 경에 일어나서 아침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에 공부를 하다가, 그 뒤에 식사를 하고 곧바로 어전 회의에 참석해서 신하들과 정책에 대해 논하거나, 올라온 상소문을 읽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 다음에는 경연이라 하여 홍문관에서 열리는 강의에 참석해서 국정에 필요한 내용을 학습하였고, 이후에 저녁식사를 먹은 후에 다시 공부를 하고 일성록이라는 이름의 일기장을 작성한 뒤에 겨우 잠에 들었다. 이때의 시간이 오후 10시였다. 이 정도면, 훨씬 복잡한 행정 처리를 해야하는 현대의 대통령들조차도 격무에 시달린다는 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정조의 삶은 이런 일이 매일 반복되는 피곤한 인생이었다.[71] 노론 음모론때문에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조는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서 가장 권력이 센 군주들 중의 한 사람이다. 이미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에서 자기 최측근을 임명했다가 마음대로 숙청해버리는가 하면, 왕궁 경호를 핑계로 왕실 친위대인 장용영까지 설치했기 때문에, 암살 기도는 고사하고 정조와 정치적으로 대적하는 것 자체가 자살 행위나 다를 바 없었다. 그의 아들인 순조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를 바지사장 삼아서 권력을 농단하려고 암살 기도를 하는 자가 없었을까하는 주장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때문에 미리 자신과 친밀한 사이였던 대비 정순왕후 김씨에게 뒷일을 부탁했고, 실제로 정조가 사망하자 곧바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체제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를 암살해봤자 아무런 정치적 이득도 얻을 수가 없었다.[72] 무려 회전에서 100만 명 이상의 대군을 전멸시켰다.[73] '을지'의 '지'는 고대 한국어로 오늘날의 '님'에 해당하는 존칭접미사다.[74] 이 설에 의하면, 을지문덕은 선비계 고구려인이라고 한다. 이는 울지경덕이 을지문덕과 친족이거나, 비슷한 출신 성분을 가졌으리라는 가정에서 나온 가설이다.[75] 참고로 이 두 사람도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특히 신용호는 교보생명의 창립자이기도 하다.[76] 헝가리어로 헝가리를 부르는 이름이다.[77] 사실 앞서 헝가리인이라고 한 것도 조력자 본인의 주장일 뿐이며, 실제 그의 국적이 어디인지는 의열단 단원들도 모른다고 한다.[78] 즉, 오늘날 방식대로 하면 가야 주재 일본 대사인 셈이다.[79] 현재의 유력한 가설에 의하면, 일본어족의 원향은 한반도 남부라고 한다.[80] 장영실의 최후에 대해서는 실각 이후에 즉각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는 설과, 이후에 기존보다 다소 낮은 직책으로나마 간신히 복권되었다는 설, 고향으로 내려가서 은퇴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 중 확실한 설은 아직 없지만, 급작스러운 몰락과는 별개로 그의 말년은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보여진다. 장영실과 함께 파직되었던 동료 과학자들이 복권된 후에 본래의 업무로 되돌아왔으나 그만은 이런 기록이 없다는 점과, 이 시기의 장영실이 이미 고령의 나이였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법적으로 복권은 되었으나 업무 복귀가 불가능한 나이라서 복직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자세한 정황은 모르지만, 그의 최후는 의외로 새드엔딩이 아니었던 것이다.[81] 실제로 이런 문제때문에 일반적으로 족보는 사료로 쓰이지 않는다.[82] 실제로 고려에 비해 조선은 다소 폐쇄적인 경향이 있어서, 원나라 시기의 혼란을 피해 망명한 수많은 외국계 민족들에게 강력한 동화 정책을 실행한 바 있었다. 가령 세종대왕의 치세까지만 해도 조선으로 이주한 위구르족들을 중심으로 하여 존속해오던 이슬람 신자들의 커뮤니티가 조정에서 이들을 유교로 강제 개종시키면서 와해된 바 있으며, 한족이나 목호의 난 이후에도 잔존한 몽골인도 조선식 상투를 틀게 하고 한국어의 사용을 강요하면서 억지로 동화시켜 버린 바 있다. 이 때문에 장영실의 조상들이 이런 동화정책에 저항하다가 역적으로 몰려서 노비로 전락했다는 설이 있다.[83] 이와는 별개로 장영실의 조상은 조선과 별 인연이 없고 잠시동안만 조선을 방문했는데, 그동안에 조선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사생아가 장영실 본인이나 그의 아버지라는 설도 있다. 이는 조상이 꽤나 명망있는 사람인데 반해, 장영실은 노비 신분으로 태어난 사실과 부합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장영실의 어머니가 개인이 소유한 노비가 아닌 관청 소유의 노비, 즉, 관노인데 장영실의 조상이 무슨 수로 국가 재산인 관노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만드냐는 것이 있다.[84] 동학 농민 운동의 주요 인물인 김개남에서 따왔다.[85] 다만 전태일 평전이 나오기 전까지는 전태일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도 있긴 했다.[86] 이쪽은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과 연계하여 나오고 있는 중이다.[87] 영화감독인 신상옥이 전처인 최은희와 함께 납북되었다가 둘이 함께 탈북한 후에 프랑스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때 김형욱과도 만난 바 있었는데, 당시 그는 신상옥에게 자기가 저술하고 있는 책의 원고들을 보여주면서 "이게 출판되면 나는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면서 희희낙락했는데, 이 만남이 있은 후에 오래지 않아서 김형욱이 돌연히 실종되었다. 그가 쓰던 책의 내용과 실종 사건이 관련이 깊다면 이 책은 박정희의 부정부패와 각종 치부를 폭로하는 책으로 추정되며, 아마도 이것이 그가 실종되는 원인이 되었으리라고 보여진다.[88] 김부식 본인도 이런 기록에 의구심을 품긴 했으나, 전근대 시대의 기술력으로는 고고학 연구를 통한 고증을 하는게 불가능했던 터라,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측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는 헤로도토스가 히스토리아를 저술했을 때나,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했을 때에도 맞닥뜨렸던 것이다. 따라서 이때 당대의 역사가들도 밝혀내지 못한 부분은 현대의 고고학자들이 관련 유물과 유적, 기록물들을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서 연구하고 있는 상황이다.[89] 수치는 기록마다 왔다갔다 하는 듯하다.[90] 참고로 해씨라는 성은 우리가 아는 태양에서 온 것이 맞다.[91] 고주몽의 고씨나, 고구려의 '고'가 모두 한자로는 높을 고이고, 옛날 사람의 관념에서 높이 떠있는 건 태양이기 때문에 '해'와 '고' 모두 고구려어에서 동의어로 통했으리라고 보여진다.[92] 나머지는 이준, 이상설이다.[93] 극중에서 송강호가 이정출 역으로 분했다.[94] 물론 절대 다수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던 만큼, 황옥 역시 어쩌다보니 상황에 따라 독립 운동 노선으로 슬그머니 갈아탄 기회주의자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95] 걀첸 노르부의 부모가 중국 공산당의 당원이다.[96] 1989년에 행방불명된 게둔 최키 니마의 행방이나 생사 여부가 2021년 현재까지도 수수께끼에 싸여있는 점으로 보아선, 어쩌면 중국 공산당에 의해 비밀리에 처형되었을 수도 있다.[97] 참고로 염민은 한족 출신이었다.[98] 여기서 다시 순수 튀르크계라는 설과 튀르크화한 코카소이드계 민족이라는 설로 나뉜다. 인도유럽어족 계통이라는 설도 페르시아계 민족이라는 설과 토하라인이라는 설로 나뉜다. 어느 쪽이건 간에 분명한 증거는 없는 상황이다.[99] 시베리아 북부에서 기원한 이들이다.[100] 아예 발견이 안된 것은 아니나, 너무 단편적인 기록들 뿐이라서 이걸로 갈족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무리다.[101] 둘 중 시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에서, 호세 데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에서 국부로 숭앙받는다.[102] 회담 자체가 두 사람 외에는 누구도 참관하지 않았고, 회담의 내용과 진행에 대해서 두 사람 중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고 죽었다.[103] 호세 데 산 마르틴 자신이 직접 군주가 되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유럽의 왕족들 중 한 사람을 군주로 옹립하고 실권을 정부와 의회가 행사하는 방식을 지향한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 왕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목숨걸고 투쟁했던 상황에서 그런 주장을 하겠다는 얘기는, 시몬 볼리바르에게는 그냥 스페인 치하로 되돌아가겠다는 얘기로 들렸을 법하다.[104] 과야킬 회담 이후로 추방당한 호세 데 산 마르틴은 이후로 경조사 때문에 임시 귀국한 것 빼고는, 두 번 다시는 아르헨티나 땅을 밟지 못했다.[105] 대한민국에도 이런 용도로 지은 구조물이 있다. 1박 2일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전라남도의 여서도라는 섬은 강한 바닷바람을 막아내고자 주민들이 돌을 쌓아서 벽을 조성했는데, 그 모양이 고대 유적지를 연상케 할 정도로 기묘해서 종종 '한국의 마추픽추'라고도 부른다고 한다.[106] 관체족이 전멸할 때까지 카나리아 제도는 계속 부족 사회를 유지했으며, 거대 규모의 피라미드의 건축을 명령할 정도의 강력한 지배자가 나온 적도 없었다.[107]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몰타인이나 에티오피아인, 에리트레아인, 레바논의 아랍인은 기독교를 믿는 등, 대부분의 아프리카아시아어족 계열 민족들이 이슬람교를 믿지 않을 지언정, 일단 아브라함계 종교를 믿는 이들이긴 했다. 그러나 관체족은 그것도 아니고, 절멸 직전까지 자신들의 토착 신앙을 고수했다.[108] 아나톨리아 반도에도 인도유럽어족 계열 민족들이 살았으므로 상관없는 것 아니냐 하겠지만, 이 지역의 선주민은 뒷날 고대 로마의 초기 역사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에트루리아인들이며, 이들은 인도 유럽어족이 아니라 알프스 산맥 원주민들과 기원이 같은 민족들이다. 그래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토속신들이 그리스인들이 원래 섬기던 신이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109] 그리고 이 주장에서 인도유럽어족의 기원 및 분화 과정과 관련된 중요한 가설인 아르메니아 가설이 등장했다. 때문에 신화 연구가 역사 연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예시로 자주 거론되는 게 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연구에 대한 부분이다.[110] 족보를 위조했든, 나카토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든 방법은 많다.[111] 확실한 것은, 오늘날의 헝가리를 세운 마자르족의 침략이 멸망의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다만 마자르족의 침략 이후로 대 모라비아가 얼마나 버텼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 모라비아의 마지막 왕이 누구인지는 다소 분명치 않다.[112] 물론 도시의 경영 방식이 당대 최첨단의 기술이 반영되었다는 것이고, 데린쿠유의 건설 과정은 의외로 단순했다. 데린쿠유가 부드러운 화산암 지대에 있어서 웬만한 도구로도 파내기가 쉬웠던 것이다. 훨씬 후대인 동로마 제국 시기에 데린쿠유와 가까운 곳에 세워진 도시인 카파도키아도 이런 식으로 화산암을 파내서 만든 인위적인 동굴에 집과 교회 등을 지어서 조성한 도시였다.[113] 정확히는 데린쿠유가 세워진 터널의 착공 시기가 이때다. 터키의 고고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기원전 8,9세기 쯤에 프리기아인들이 모종의 이유로 이곳에 거주지를 차리면서, 그때부터 도시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114] 도시 내부에 교회로 사용된 지역이 발견되었다.[115] 근데 사실 김홍도의 말년의 행적도 미스터리이다. 일단은 이미 언급했듯이, '김홍도=도슈사이 샤라쿠' 설은 부정된 상태이나, 1810년 이후로는 김홍도의 행적이 기록에 일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116] 영어판 위키피디아에서는 라이 텍의 본명이 호앙 아 낙 또는 팜 반 닥, 이 둘 중 하나라고 나오며, 베트남의 응에틴성 출신으로 1901년생이라고 나온다. 이 서술이 맞다면, 일단 라이 텍이 베트남인인 건 확실한 듯 하다.[117] 이 비문에 19세기에나 쓰이던 식의 문법이 나타나고 있고, 중도에 서술자의 시점이 바뀌거나, 문체가 바뀌는 부분도 있어서 비문 자체가 후대의 가작일 가능성이 매우 유력하다. 게다가 발견자라는 사람이 당시 태국의 왕세자였던 라마 4세였기때문에, 태국 내에서 민족주의적인 여론을 들끓게 하고,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고자 고의로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태국 왕실은 이에 대해 해명을 하기는 커녕, 되려 이 문제를 조사하는 영국의 역사학자인 마이클 라이트에게 태국에서 추방해버리겠다면서 자꾸만 그의 연구에 훼방을 놓고 있다.[118] 랴오중카이의 암살범은 현장에서 사살되었다.[119] 초기 라틴어로 된 기록은 여럿 발견되고 있지만, 현대의 언어학자들은 물론 고대 로마의 지식인들도 해독에 실패했다. 그래서 이 기록만으로는 로마의 초기 역사를 알아내는 건 무리다.[120] 물론 전근대 시대에 공화국이었던 나라는 생각보다 많았다. 고대 로마는 물론, 로마의 대선배격으로 그리스의 각 폴리스들이 먼저 공화정을 실시하였으며, 아메리카 원주민인 이로쿼이 연맹도 연맹의 총 수장을 부족 회의에서 선출했다. 말기의 카르타고나, 판관기 시기의 이스라엘도 공화국이었으며, 심지어는 동북아시아에서 공화(共和)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는 주나라부터 시작해 한반도의 동예나 옥저까지도 왕이 없었다고 나온다.[121] 고대 로마 시기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당대의 존경받던 학자인 히파티아를 잔혹하게 살해한 적이 있으니 그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이 때문에 히파티아가 살해당할 당시에 도서관도 같이 불탔다는 설도 있다.[122] 영화 센츄리온과 더 이글은 이 9군단을 소재로 만들었다.[123] 여기서 다시 히스파니아 제9군단이 켈트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는 설과 진압에 실패했다는 설로 나뉜다.[124] 지금의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스 주와 뉴질랜드 전역을 관할하는 총독부였으며, 오늘날의 호주 연방 정부의 전신이다.[125] 당시의 호주 대륙은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비견될 정도로 헬게이트였다. 백인들의 침략으로 인해 억울하게 땅을 빼앗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이 원한 때문에 지나가는 백인 탐험가들에게 적대적이었으므로 이들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광활한 초원과 사막이 펼쳐져 있어서 탐험 도중에 식량이나 물이 바닥나면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타기가 무척 쉬웠다. 즉, 이런 곳을 탐험하다 돌아오지 못했으면 십중팔구는 현지에서 사망했다고 보아야 했다.[126] 비슷한 사례로, 영국 해군 장교인 존 프랭클린이 이끄는 탐사대 전원이 북극에서 조난사한 사례가 있다. 이쪽은 항해 일지와 같은 기록물이 일체 발견되지 않아서 사건 자체가 미스터리로 남은 경우이다.[127] 만력제의 유골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래서 그의 외양에 대한 연구는 오직 남겨진 기록으로만 할 수 있는 실정이다.[128] 백제 멸망 직전에 백제를 돕고자 군대를 파병한 바 있어서, 진구 황후의 실제 모델로 유력하게 지목되고 있다.[129] 이 경우는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타이국의 위치 논쟁과도 엮이는데,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진구 황후 전설은 히미코와 같은 여성 군주의 통치 하에 있던 야마타이국이 벌인 일본 열도 내에서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이,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내용으로 둔갑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130] 이 설에 의하면, 일정 지역의 정복과 지배 목적이 아닌 약탈이 목적이라고 한다. 실제로 신라 초기부터 왜구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이쪽도 꽤 주목받는 설이다.[131]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의 주장이다.[132] 전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재 파괴 사례가 오다 노부나가가 벌인 히에이 산의 방화 사건이다. 당시에 히에이 산은 민중들을 수탈하고 군대를 조직하여 군벌화한 승려들의 부패의 온상이 된 곳이라서, 오다군에 의해 히에이 산의 절들이 대거 불타버리자 당대의 민중들은 크게 환호했지만, 뒷날의 고고학자들에게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수많은 문화재들이 소실된, 뒷목잡고 쓰러지는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133] 물론 주류 역사학자들이 바보도 아니고 일본서기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일본서기에 들어있는 의문스러운 부분을 걸러가면서 실제 고대 일본의 역사를 재구해보는 식인 거다. 일례로,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정벌했다는 삼한정벌 신화의 주인공인 진구황후에 대해서는 사이메이 덴노나, 히미코 및 그 손녀인 이요와 같은 실존하는 여성 통치자를 모델로 한 가상인물이라고 주류 역사학계에서 결론이 지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 모델이 정확히 누구냐는 논쟁을 통해 수시로 신라와 가야 등의 한반도계 국가들이 벌이는 군사적 충돌에 시달리던 당시 일본의 정세를 분석하는 것이 있다.[134] 대표적인 경우가, 초대 천황인 진무 덴노. 일본사에서는 아직 문명조차 세워지지 않은 신석기 시대인 조몬 시대와 생몰년이 겹치는 지라, 실제의 역사와 매칭이 안된다. 그래서 황실 족보는 사료로 쓰기가 불가능하다.[135] 현존하는 황실 가문은 고훈 시대 무렵부터 이어져 왔다고 추정되지만, 이를 입증할 근거가 부족하다.[136]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에 나오는 그것이다.[137] 현재의 추정에 따르면, 말라가시인은 현재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일대에서 발원한 민족으로, 중도에 아라비아 반도나, 인도, 몰디브 등에 상륙한 바 없이 인도양을 서쪽으로 직접 횡단하여 마다가스카르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대의 기술로 인도양의 편서풍을 어떻게 뚫고 지나갔는지에 대한 의문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138] 미노스 문명의 주민들은 선형 A 문자와 선형 B 문자라는 일종의 선형 문자로 된 기록을 남겼는데, 아직 이 문자의 해독에 성공한 학자가 없다. 이외에도 파에스토스 원반에 쓰였던 문자도 있었지만 이것 역시 해독에 성공하지 못했다.[139] 인도유럽어족 계통 언어라는 주장은 다시 고대 그리스어의 직계 조상이나 자매 언어라는 설과, 아나톨리아어파라는 설로 나뉜다. 그 이외에는 에트루리아어가 속한 어족으로 추정되는 티레니아어족이라는 설도 있다.[140] 인도유럽어족 계통이라는 설도 있고, 에게 해 제도의 토착민들로, 에트루리아인의 사촌 격인 민족으로 추정되는 티레니아인이라는 설도 있지만, 확실한 건 유골이 발견되지도 않았고, 미노스 문명에서 사용한 문자인 선형 A 문자도 해독되지 못해서 알기 어렵다.[141] 고대 이집트 측의 기록을 보면 크레타 출신 용병들을 '케프티우(Keftiu)'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이 미노스 문명의 주민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이름이었으리라는 추정이 있다.[142] 평소 미와 와사부로에게 원한을 품었던 김두한이 그를 죽이고 암매장했다거나, 8.15 광복 당시에 모국의 패망에 대한 충격으로 자살했다는 설이 있고, 그냥 일본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자연사했다는 설도 있으나, 전부 도시전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143] 일단 기록을 보면, 기원전 1700년대 쯤에 처음 기록이 등장해서 기원전 1100년대에 이집트의 파라오인 람세스 2세가 남긴 "더 이상 바다 민족이란 없다!"라는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의 역사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즉, 이들은 최소 6세기 동안이나, 악명을 떨쳤던 이들이라서 '단번에' 지중해권 문명들의 리즈 시절을 끝낸 건 아니다. 하지만, 바다 민족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당시에는 이들의 존재가 지중해 일대의 국가들에게 상당히 충공깽스럽게 받아들여진것도 사실이며, 심지어 몇몇은 이들에게 패망하기까지 했으므로 그 후로도 6세기 동안은 바다 민족 출신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쓰거나, 이들의 침략을 무척 두려워하는 기록이 속속들이 나올 만큼, 공포의 대상으로 불린 것도 사실이다. 이는 비슷한 이미지인 바이킹이나 몽골인들을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둘 다 각각 9세기에서 12세기까지, 그리고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실제로 서유럽 및 동유럽, 남유럽의 수많은 나라를 무력으로 위협하여 내내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첫 등장 시에 이들을 보고 '신의 징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고대에는 이런 바이킹과 몽골인들의 역할을 바다 민족이 했다고 볼 수 있다.[144] 오늘날의 스파르타를 포함한 그리스의 차코니아 지방 주민들의 기원이 되는 도리아인을 말한다.[145] 뒷날 로마 제국을 세운 로마인들의 먼 친척뻘되는 민족이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로마인들의 언어인 라틴어와 시칠리아 원주민들의 언어는 큰 틀에서는 전부 인도유럽어족 이탈리아어파에 속하나, 어군 수준에서 분류가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146] 성경에도 나오는 민족들이며, 다윗 왕의 즉위와도 관련있는 민족이다. 인도유럽어족 계통으로 추정되지만, 세부적으로 어느 어파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단은 구약 성서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나, 당대의 다른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그리스인과 동계이거나, 아나톨리아 반도를 거쳐온 그리스인 이민자들이라고 추정된다.[147] 바다 민족으로 분류되는 민족들 중에는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트로이인들(히타이트인들의 사촌뻘되는 민족이다.)과 에트루리아인의 조상격인 민족인 티레니아인도 있다.[148] 바이킹의 경우와 같이 원거리 무역 활동이나 용병 활동을 동반한 일종의 해적 행위가 목적이었다는 설과 중세 초의 게르만족의 대이동처럼 외적의 침입이나 기후환경의 변화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인해 목숨을 건 대이동을 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149] 참고로 이 문서에는 무려 은하가 나온다. 은하라는 개념이 처음 밝혀진건 19세기 말엽의 일이며, 그 존재가 확실히 입증된 건 1917년에 미국의 천문학자인 에드윈 허블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중세시대의 문서에 어떻게 은하가 나올 수 있겠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데, 옛날에는 은하의 정체를 모른 채로 그 모양만 알아서 이를 '소용돌이 성운'이라는 이름의 성운의 한 종류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중세기의 기록에 은하가 나오는게 그리 이상한 건 아니며, 단지 은하로서 인식된 게 아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은하 그림때문에 이 문서의 정체가 중세 유럽의 자연과학 관련 백과사전 내지는 교양과학 서적이라는 설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150] 만주어, 베트남어 등의 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쪽 언어라는 주장도 있고, 아랍어나 히브리어라는 주장도 있으며, 문서의 저자가 창안한 인공어라는 주장도 있다. 어느 쪽이든 문서에 적힌 언어를 기술하는 데 쓰인 문자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아서 모두 가설에 불과한 상태이다.[151] 2017년에 이 문서를 해독했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오류로 끝났다. 다만, 문서 해독 방식에 있어서 유의미한 진전은 있었다. 항목 참조.[152] 귀족 출신 여성이었는데, 일개 평민에 불과했던 베토벤과의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혼에 실패했다.[153] 문자 그대로의 친구, 즉, 여사친에 불과했다는 설도 있고, 사실은 줄리에타와의 이별 이후에 친구 사이를 넘어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154] 사족으로 이 사람과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가 있었다는 설이 있으며, 주류 역사학계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있다. 자세한건 루트비히 판 베토벤/베토벤이 남긴 화제 문서 참조.[155] 자본주의 진영에서의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과 동급의 여파를 가져왔다고 보면 된다.[156] 그런데 이 선천적 장애설 중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처럼 유전병 인자가 우연히 겹치는 바람에 저지경이 되었다는 흠좀무한 새로운 가설이 등장했다.[157] 그래서 이 사태의 간접적인 원인이 제1차 세계 대전이었다는 것과 결과이자 해결책이 뒤이어 벌어진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견해로 보아, 이 초유의 사태가 사실 비밀결사의 소행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있을 정도다. 한편 이와 별개로 로스차일드 가문같은 유대 자본이 벌인 공작이라는 음모론과 이 사태에서 유일하게 공산주의로 이념으로 건국한 소련만이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보았기 때문에 한때 소련이나 공산당 측의 공작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등장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런 음모론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보면 된다.[158] 세계 대공황의 발생 원인을 대침체의 발생 원인과 결부시켜서 설명하는 주장도 있다. 2008년의 경제위기의 원인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이었듯, 대공황 역시 당대에 널리 퍼진 자유방임주의의 모순때문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현재 경제학계는 이쪽에 크게 무게를 둔다.[159] 환빠와는 달리 이쪽은 허황된 얘기가 아니다. 일단 에티오피아의 공용어인 암하라어나, 그 조상 언어인 그으즈어는 모두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의 셈어파 계열 언어이고, 북쪽에 있는 이집트의 고대 이집트어는 같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이긴 하지만 셈어파가 아닌 함어파에 속하므로, 당시에는 에티오피아와 그 주변국들인 소말리아, 지부티, 에리트레아 정도만 셈어파 언어가 쓰이고 있었다. 게다가 훨씬 뒤에 에티오피아에 세워진 악숨 왕국의 경우 바다 건너 예멘까지 원정을 나간 사례도 있었던 만큼,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 에티오피아인이 등장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덕분에 시바의 여왕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 자체는 셈어파 계열 언어가 전파된 과정을 밝히는 것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160] 케트어가 속한 언어군으로,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 일대에 화자들이 주로 분포해있다.[161] 나바호어, 애서배스칸어, 에야크어 등이 속한 언어군이며, 북아메리카 서부에 화자들이 주로 분포해있다.[162] 이누이트의 사촌뻘되는 민족이며, 이들의 언어인 유픽어는 이누이트어와 함께 이누이트알류트어족으로 분류된다.[163] 유픽족이나 이누이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분류되는 다른 민족들과는 기원이 전혀 다르다. 이들을 제외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고(古) 몽골로이드계이고, 유픽족이나 이누이트족은 그 이후에 형성된 현대 몽골로이드 계통이다.[164] 아메린드어족 가설이라 하여, 이누이트나 유픽족, 알류트족이 쓰는 이누이트알류트어족 계통 언어들을 제외한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 전체를 하나의 어족으로 묶는 가설은 있지만, 주류 언어학계로부터 기정사실로 취급되고 있기라도 하는 데네예니세이어족과는 달리, 완전히 가설로만 취급되고 주류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학설이 아니다.[165] 바이킹들이 그린란드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이누이트족과 조우했다는 설도 있다. 9세기경에 아이슬란드에 막 상륙한 바이킹들의 기록에서 조난당해 사망한 국적불명의 사람 두 명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들의 정체가 그린란드에서 표류해 온 이누이트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66] 그 근거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래 이전의 폴리네시아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구마의 존재와 고구마를 가리키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소속 언어들의 어휘들이 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말레이 폴리네시아어군 조어로 고구마를 가리키는 단어인 쿠우말라(kuumala)는 케추아어로 고구마를 뜻하는 쿠마라(kumara)에서 차용한 말이다. 인류학자들은 형질인류학 연구를 통해, 폴리네시아인들이 케추아계 부족들과 조우한 곳이 지금의 페루와 칠레의 국경지대에 해당하는 곳임을 밝혀내었다.[167] 9세기 경부터 바스크족들은 유럽에서 어부나 무역상같은 항해사들을 많이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했을 만큼, 전통적으로 조선 기술과 항해 기술이 크게 발전해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종종 아이슬란드까지 진출해서 어업이나 포경업에 종사하곤 했고, 그 흔적이 바로 바스크어와 아이슬란드어의 피진이라는 혼종이다. 이런 관계로 어쩌면 바스크인들이 아이슬란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린란드를 통해 오늘날의 캐나다 북동부 지역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168] 이 주장은 아래의 오크 섬의 보물 떡밥과도 연결된다.[169] 여담으로, 뜻밖에도 고구마의 전파 과정에 대한 미스터리가 바이킹의 북아메리카 진출 이전에도 아메리카 원주민과 접촉한 이들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다. 오세아니아에서의 고구마 전파 과정에 대해서는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이 11세기에 남아메리카까지 가서 고구마를 가져왔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나머지 지역의 경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나 그 이후의 탐험가들이 고구마를 가져왔던 것이 시초라는 설이 부정되면서 생물학계의 미스터리로 남았다. 이때 종래의 학설을 부정하는 근거로 제시된 게 고구마의 DNA 정보를 연구한 결과인데, 이 연구에 의해 무려 1200년 전부터 아메리카 밖으로 고구마가 전파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식물이 사람의 도움도 없이 타 대륙으로 퍼져나갈 수는 없으므로, 결국 이미 폴리네시아 원주민들보다도 먼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조우했거나, 최소한 아메리카 땅이라도 밟은 이들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170] 공룡이 그려져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화제를 모았던 이카의 돌이 현지인의 날조로 만들어진 것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던 만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171] 안네 프랑크 일가의 비극적인 결말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안네 프랑크는 금수저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가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가 가세가 기울자,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간승리의 주인공이었던지라, 전쟁 전만 해도 부족한 것 없이 유복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일가가 홀로코스트의 위협을 피해 달아나자, 그들의 막대한 돈을 노린 이들이 꽤 있었다.[172] 나머지는 네브라 하늘 원반과 파에스토스 원반이다.[173] 안티키테라 기계가 만들어지기 2세기 전에 에라토스테네스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아스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고 두 곳에서 태양의 남중 고도를 측정한 다음에, 이를 토대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해낸 바가 있었다. 당연히 현대에 지구과학자들이 계산해낸 수치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6000km정도로 고대인의 계산 결과치고는 상당히 정확한 수치를 얻어내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헤론은 무려 증기 기관을 이용한 장난감을 만들어보기도 하였다. 물론 경제성의 문제로 인해 증기 기관이 실용화되려면 18세기 산업 혁명기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고대의 인류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성과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고 있던 건 사실이다.[174] 그 유명한 마리 퀴리의 딸과 사위로도 잘 알려진 이렌 졸리오퀴리와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부부가 실시한 실험 결과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양성자와 질량이 거의 같은 입자를 에토레 마요라나가 발견했는데, 이것이 바로 중성자였다. 당시 유명한 물리학자였던 엔리코 페르미가 빨리 이것을 발표하라고 하였으나, 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긴 마요라나가 거부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영국의 물리학자인 제임스 채드윅이 에토레 마요라나의 분석 결과와 동일한 결과를 재현해내는 데 성공하여 1935년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175] 참고로 이 사람도 물리학자였다.[176] 배가 조난을 당한 것이 아니고, 에토레 마요라나 본인만 감쪽같이 사라졌다.[177] 공동 번역 기준 제목. 가톨릭 역본은 루카 복음서, 개신교 역본은 누가복음.[178] 다만, 일부 성경학자들은 예수의 12세 당시 기록 이후로 아버지 요셉의 기록이 더이상 보이지 않는 점을 근거로, 아버지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장남인 예수가 요셉을 대신하여 가장의 역할을 대신 했다고 추측한다.[179] 문명의 이름인 올멕은 훨씬 후대에 중앙 아메리카에 정착한 아즈텍족이 붙인 이름이었는데 나우아틀어로 고무 인간이라는 뜻이다.[180] 그리고리 오트리피예프라는 정교회 수도자 지망생이었는데, 가족들이 수도자의 길을 걸으라고 수도원에 들여보냈더니 되라는 수도자는 안 되고 달아난 양아치였다. 그런데 이 인간이 별안간 우글리치 공 드미트리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소문이 돌자, 갑자기 자기가 그 사라진 황태자였다고 믿고는 폴란드 귀족 여인 마리나 므니제치와 결혼하고 폴란드 세력을 끌어들여서 러시아의 차르의 지위를 차지했다. 근데 이게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사라진 왕자를 자칭하면서 외국군을 끌고 와서 보위를 강탈한 격이라서 러시아 국민들이 피꺼솟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그를 차르의 지위에서 끌어내버리고는 대포에 장전해서 폴란드 방향으로 발사해버렸다. 일개 양아치 하나가 거하게 오해를 해서 나라를 헬게이트로 만든 셈이다.[181] 일단 2번째 가짜는 리투아니아의 감옥에서 탈옥한 죄수라고 하며, 3번째는 동방정교회 사제 양성 과정을 밟던 부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과거 행적이나 본명 등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골때리는 건 이 둘은 자기가 진짜로 사라진 황태자라고 믿은 첫 번째 가짜와는 달리 자기들이 가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출세하려고 전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간 큰 사기꾼이라는 소리다.[182] 그 유명한 파라오인 투탕카멘의 아버지이자, 미인으로 유명했던 왕비인 네페르티티의 남편이다.[183] 조로아스터교는 기원전 6,7세기 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대교는 그보다 더 오래된 기록에도 그 존재와 교리가 전해지고 있었다.[184] 자신을 누르고 우두머리 노릇을 하려던 이복형 벡테르를 죽인 바람에 어머니 호엘룬의 분노를 산 일이나, 자기 아버지 예수게이를 비열하게 죽인 타타르족을 잔인하게 학살한 일 등에서 볼 수 있는 비정한 모습과 이에 대비되는 그의 숙적이자, 평생의 친우였던 자무카와의 감동적이고도 안타까운 우정 이야기 등, 학살자나 정복자로서의 냉정한 모습으로만 기억되던 칭기즈 칸의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기록이다.[185] 그래서 21세기에 데뷔한 연예인인 이지아도 자신의 과거사를 밝히길 꺼려서 한동안 이회창의 흙오이 사건이나, 윤은혜의 왜 그리스는 새벽에 축구해요? 사건과 함께 인터넷 상의 3대 미스터리로 회자되기도 했다. 물론, 그 쉬쉬하던 과거사의 실체가 까발려지고, 이를 부정하고 미화하는 병크를 터뜨린 후에는 연예계에서 깔끔하게 매장되었지만.[186] 중국티베트어족 계통의 다른 민족이었을 수도 있지만, 아예 완전히 다른 계통의 민족이 화하족에 동화되어 생겨난 민족일 수도 있다. 현재 주나라를 세운 민족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187] 유목민은 아니다. 동북아시아 역사에 처음 등장한 유목민은 호(胡)라고 불리운 이들로, 이들은 무려 기원전 7세기 경에서야 연나라와 조나라의 기록에서 언급이 되는 이들이다. 주나라가 건국될 시기에 있었던 또다른 목축민으로 토하라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에 거주하던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민족들로, 이들도 이 시기에는 아직 유목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다.[188] 같거나 유사한 민족끼리 서로를 적대하거나, 이질적으로 여기는 일은 세계사적으로는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양상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삼국시대의 한국 왕조들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등으로 나뉘어서 피터지게 싸워댔고, 고려 시대까지 탐라 사람들을 외국인 취급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현대의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의 국민들도 문화인류학적으로는 세르보크로아트인으로 분류되어서 언어도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같고, 문화적으로도 전혀 차이가 없는 완전히 같은 민족이지만, 그 말을 구 유고 사람들에게 하면 크게 욕먹을 가능성이 높다.[189] 아케나톤 사후의 기록에 '네페르네페르아텐'이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이름의 유사성말고는 이 사람이 네페르티티와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고, 네페르네페르아텐이라는 인물 자체가 정체불명의 인물이다.[190] 네페르티티 본인 또는 그 친족으로 추정되는 미라는 발견되었다.[191] 애초에 투탕카멘은 10살의 나이로 즉위하긴 했으나, 그 배경에서 자신의 장모이자 계모인 네페르티티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즉위했다는 점과 더불어, 즉위 후에 그가 능동적인 통치를 했다는 점, 그의 파라오위를 노릴 수 있는 강력한 상대인 아이가 그의 사후에나 투탕카멘의 이복누나이자 왕비인 안케센나멘과 결혼하면서 즉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살아생전의 투탕카멘은 생각보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더군다나 뚜렷하게 드러나는 정적도 없어서 정치적으로 위협을 받은 적도 없다는 사실 역시 밝혀지면서, 그가 살해당했다는 설은 힘을 잃었다.[192] 투탕카멘의 치세 중에 누비아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노예나 기타 진귀한 야생동물 등의 물품을 조공으로 받은 기록이 있고, 그가 궁궐 내에서 무예를 익힌 기록도 확인되었다.[193] 투탕카멘의 미라에서 심장이 제거되어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설이다. 이는 심장이 인간의 이성이 발현되는 곳이라고 생각하여 미라 제작 시에도 심장을 남겨두던 당대 이집트인의 사고방식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부분으로, 당시 미라 제작자들이 그의 심장을 보존하는데 실패하여 그들의 내세관과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부득이하게 제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심장이 손상될 정도의 사인으로 사고사를 거론하는 학자들도 많은데, 이와 관련하여 제기된 가설 중에는 투탕카멘이 전차 경기를 하던 중에 전차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는 설도 있었다. 사고사했다는 가설들의 공통점은 투탕카멘이 가지고 있던 선천적 기형때문에, 통상의 비장애인들이 당하는 사고에 비해 훨씬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보는 것이다.[194] 현재 이집트가 통일된 초창기에 전갈왕 - 나르메르 - 메네스 - 호르아하 순으로 통일 이집트를 통치한 군주들이 기록에 등장하는데, 이 중에서 나르메르와 메네스는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 그러나, 나머지도 같은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195] 아메리카는 몰라도, 호주에 도달했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유럽인의 도래가 있기 훨씬 전부터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과 교류를 해 온 바가 있어서 퀸즐랜드 주에서는 이들의 영향으로 잠시나마 농업이 시도되기도 했고, 말루쿠 제도와 뉴기니 섬 서부의 원주민들도 오래 전부터 중국이나 일본 및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교역을 해왔다. 그러니 명나라의 함대가 호주까지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심지어 정화의 대원정이 있기 훨씬 전부터 중국인들이 호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196] 대부분은 유대인이었으나, 공산주의자나, 프리메이슨 단원, 성소수자 및 반(反) 나치 운동가들도 여럿 있었다.[197] 한때 '여교황'(La Papessa)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을 만큼, 비오 12세의 치세에서 바티칸의 실권자였다. 이는 비오 12세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힘든 상황으로 생긴 신경쇠약이 나날이 악화되어서 바티칸의 국가원수로서의행정 실무는 전혀 보지 못하며 가톨릭 교황으로서 종교 관련 업무만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황이 행해야 할 행정 처리를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가 대행하였는데, 문제는 수녀는 사제가 아닌 수도자이기 때문에 교회 행정에 관여할 권한이 없었으므로, 당대에도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198] 흔히 가나 제국으로 알려진 나라이다.[199] 11세기 경의 아랍인 상인들이 오늘날의 짐바브웨까지 내려가서 관련 기록을 남기기도 했지만, 이는 비슷한 시기에 북아메리카로 갔던 바이킹 탐험가들 수준으로 일회성 방문에 그친 터라, 문화적으로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200] 일단 주류 학계에서는 서아프리카가 이집트에서 너무 멀다는 점을 들어 반투족들 스스로가 농업 기술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는 설에 무게를 두고 있기는 하다.[201] 참고로 이 둘은 미국 영상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특수효과 전문가이자, 수준급 공학자들이다.[202] 소련 시절에 차이코프스키의 유해를 분석한 결과, 비소가 검출되기는 했다.[203] 실제의 철가면은 검은 벨벳으로 된 복면을 얼굴에 쓰고 있었다. 철가면의 정체가 외스타슈 도제라는 최근의 가설에서는 왜 그가 복면을 쓸 것을 강요받았냐는 의문점을 도제가 그저 왕실 주치의, 즉, 범털(돈 많고 백 있는 복역수)이라서 복면이 씌워진 것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의 복면은 그저 죄수에게 씌우는 용수의 역할이었을 뿐, 딱히 죄수의 신분을 숨기기 위한 용도는 아니었다.[204] 몰타가 북아프리카와 매우 가깝다는 점을 들어, 당시에 누미디아라고 불리던 북아프리카 지역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인들이 세운 것이 아닐까하는 의혹도 제기된 바 있지만, 현재까지 이집트 및 수단 이외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발견된 문명의 흔적은 기원전 800년경에 지금의 튀니지 일대에 건설된 카르타고를 포함한 페니키아인들의 식민도시가 최초다. 그 이전에는 문명을 이룰 정도로 발전한 문화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후에 신석기 시대의 인류가 건설한 유적인 괴베클리 테페가 발견되면서, 타르신 신전을 건립한 이들이 꼭 문명을 이루고 산 것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205] 바스크인들의 조상 격 민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애초에 바스크어와 이베리아 반도 원주민들의 언어인 이베리아어 간의 비교언어학적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료가 부족하여 바스크어와 이베리아어가 실제로 친연성이 있는 언어인지, 단순한 언어동조대인지는 규명되지 않았다. 또 이베리아 반도에는 이미 기원전부터 켈트족들이 오늘날의 스페인의 갈리시아에 정착해 살았기 때문에, 타르테소스가 켈트계 국가이거나, 켈트계와 이베리아계 또는 바스크계와의 혼혈인 집단이 건설한 국가였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 이외에는 페니키아인들이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해서 세운 나라라는 설도 존재한다.[206] 텍사스 알렉산더에 대해 흑인라는 점과 텍사스 주의 소도시인 주어트에서 살다왔다는 점, 생몰년도와 출생지까지 몽땅 밝혀져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친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알려진 내용들도 모두 텍사스 알렉산더 본인의 증언에 의한 것뿐이라서,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207] 네임드 블루스 가수들 중 한 명.[208] 흔히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세웠다고 알려진 탕왕에 대해서도 갑골문에선 그저 나라를 중흥시켰다는 기록만 있다. 참고로 갑골문에서 말하는 상나라의 건국자는 삼황오제라고 하는 제곡이다.[209]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하나라 왕실의 후손에게 기나라 제후의 작위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 등, 하나라의 실존을 확신하고 쓴 기록이 계속해서 보이므로 상나라와 별개의 민족으로서 하나라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된다.[210] 하나라나 상나라에 대한 연구 자체는 중국티베트어족과 한족의 기원을 밝히는 연구와도 연관이 깊다.[211] 당시에 이곳에서 근무했던 한국인 강제징용자의 증언에 따르면, 1945년 8월 중순경에 모두가 잠든 사이에 갑자기 중국인 노동자들만 따로 소집되었는데, 이후 광산 쪽에서 의문의 폭발음이 들린 뒤에 두번 다시는 중국인들을 볼 수 없었고, 일본인 직원들도 모두 섬을 떠났다고 한다. 이는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학살의 가능성을 짐작케하는 중요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212] 물론 사방이 막힌 폐쇄된 섬이었으니, 이런 작은 사회의 특성상 실제로 인권 유린 행위가 있었어도 쉬쉬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전반적인 복지 수준이 괜찮았던 건 사실이다.[213] 하시마 섬에서의 석탄 채굴이 처음 시작됐을 때만해도 꽤 괜찮은 수준의 월급이 지급되었고, 일본인과 한국인이 동등한 대우를 받았기때문에, 각지에서 일꾼들이 몰려들었다고한다. 당시에는 광부들을 위해 당대에는 매우 귀한 음식인 열대과일이 특식으로 지급되었으며, 일제강점기 기준으로 쾌적한 구조의 숙소를 배정받을 정도로 복지 수준이 좋았고, 여기까지는 일본 정부의 주장과 일치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로 갈수록 전황이 일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결국 1943년부터는 직원들에게 제공되던 복지가 크게 줄고 월급이 체불되는 일도 비일비재해지면서, 하시마 섬 광산으로 취직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겼다고 한다. 그때부터는 이로 인해 부족해진 노동력을 한국이나 중국 등지에서 징발한 인력을 동원해 강제로 노역을 시키는 식으로 충당했고, 이때부터 세간에 알려진대로 하시마 섬 전체가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214] 일본 정부가 자세한 진상조사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해서 일부러 못 들어가게 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사실 과거사 청산 문제에 일본 측이 협조적이었다고 해도 건물들이 너무 노후화되어 있어서 붕괴의 위험때문에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다.[215] 이들이 튀르크 계통이라는 점에서 돌궐의 분파일 것이라는 설은 있다.[216]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 거의 음모론에 가까운 내용이라서 전문가들도 거의 무시하는 설이다.[217] 이 설에 따르면, 오다 노부나가가 천황의 지위를 노릴 것을 두려워해서 공경 및 황족들과 친분이 있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오오기마치 덴노가 오다 노부나가를 토벌하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한다.[218]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혼노지의 변 이후에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 뒤에 오다 가문 전체를 토사구팽한데서 나온 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종용한 뒤에, 정말로 반란이 일어나자 재빠르게 그를 토벌하고는 입을 닦았다고 한다.[219] 이 설은 예수회를 통해 일본 정계에 포르투갈이 개입하려했다는 설과도 이어진다.[220] 거기에 히말라야 산맥의 토착어인 부르샤스키어를 쓰던 종족이라는 설도 있고, 시베리아 원주민 중의 하나인 예니세이인과 동계 민족이라는 설도 있다.[221] 실제로 시바의 경우는 인더스 문명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연구에서 오늘날의 시바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게 묘사된 정체불명의 신을 숭배하고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본래는 인도유럽어족계통의 민족들이 들어오기 전에 드라비다인들이 믿었던 전통신앙의 신이 아닐까하는 추정이 나왔다. 이 설을 원(原) 시바 가설이라고 하며, 이 추정에 따라 비슈누와 그의 여러 아바타라들도 역시 드라비다 신화의 신들이나 영웅들이었으리라는 추정이 나왔다.[222] 일례로, 베다 신화의 신들 중 하나인 바루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우라노스에 대응한다.[223] 이유는 크게 3가지가 있는데 첫째, 불교가 힌두교에 비하면 꽤나 금욕적인 부분이 많다는 점 때문이다. 불교가 창설될 당시에는 극단적인 고행을 강요받던 수행자들의 수행법을 크게 간소화하여 금욕주의적인 요소를 많이 줄이기는 했지만, 훨씬 더 후대에 나온 힌두교보다는 당연히 빡빡한 부분이 많았다. 당장 스님들의 음주와 육식이 제한되고, 결혼마저 금지되는 것을 생각해보자. 소고기를 금한 것 빼고는 금욕 따위는 장식에 불과한 종교가 힌두교인 걸 보면 당대의 많은 인도인들이 불교에서 힌두교로 갈아탔으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당장 힌두교에서 소고기를 금지한 것도 원래는 불교에서 육식을 크게 제한한 것이 그 기원이었다. 두번째 이유는 브라만교, 힌두교의 유력자들도 바보는 아니었던지라 불교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수수방관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현재도 힌두교에서는 비슈누의 수많은 아바타르 중에는 석가모니도 있는데 이는 브라만교, 힌두교가 불교로부터 당대의 헤게모니를 탈환하기 위한 의도적 전략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해당 프로파간다를 퍼뜨릴 초창기에야 당연히 불자들로부터는 개소리 취급받을 게 뻔하지만 세대가 교체될수록 이러한 전략에 적대감이 줄어드는 부분을 이용하여 융화 정책을 꾀했던 것. 이러한 전략은 헬레니즘 제국, 고대 로마 등지에서도 자주 활용했던 방법으로 가령 점령지의 이집트인을 포섭한다치면 현지인과 제국 본토의 신앙을 융화하여 제우스+오시리스=세라피스, 헤르메스+아누비스=헤르마누비스 같은 식으로 제국 본토 문화에 손쉽게 복속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인도의 이슬람화도 불교에 크게 타격을 주었는데 힌두교야 이미 종교적 헤게모니를 탈환하고 확고히 자리를 잡은 지 오래였으므로 이슬람이 다시 약세가 된 후 또다시 종교적 헤게모니를 탈환할 수 있었지만 불교는 이미 인도에서는 그 세가 많이 쇠약해지고 힌두교에 융화된 부분도 없잖아있었기에 더욱 타격이 컸던 것.[224] 신화를 재구하는 게 세계사와 아무 관련 없는 것 같지만, 신화의 재구 과정에서 해당 신화를 믿어온 민족의 성립 과정과 그 와중에 밝혀지지 않은 많은 부분을 밝혀내는데 막대한 역할을 하므로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당장 그리스 로마 신화의 기원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리스인과의 동계 민족으로 추정되는 민족들을 찾아낼 수 있었고, 힌두교의 성립 과정을 밝히는 과정에서 인더스 문명을 구성하던 민족에 대한 단서를 하나하나 찾을 수 있었다.[225] 이 이야기는 《총, 균, 쇠》에 실리기도 하였다.[226]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취재한 어떤 부족은 나무로 AK-47 모양을 깎아서 자기네 부족의 수호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쓰기도 했다.[227] 스스로는 '숲 속의 사람'이라는 뜻의 '오랑 림바(Orang Rimba)'라고 칭하며,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말레이계 화전민 종족이다.[228] 여자나 아이들이 카메라에 찍히면 부정을 탄다고 믿어서였다.[229]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돈이 쓸모 없어서였는데, 정작 당장 벌금으로 지불할 많은 옷이 없던 벌목꾼들과 그들의 고용주는 취재 당시에 옷 대신 돈으로 벌금을 지불했다.[230] 동남아시아의 대륙에 속하는 부분인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 일대는 물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도서 지역과 내륙 지역에도 이런 비문명 지역은 수두룩하며, 전술한대로, 이들의 대부분은 가혹한 식민 지배를 피해 달아난 부족들이다. 이런 부족 중의 하나인 라오스의 말레이계 민족인 라오퉁은 라오스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타이계 민족들의 탄압으로 인해 라오스의 고산 지대로 달아나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그 이외에도 19세기에 청나라 조정의 핍박을 견디지 못해 중국에서 라오스 영토로 달아난 소수 민족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미국 지배 시기의 필리핀에서 태어나 자랐던 라몬 막사이사이는 어린 시절에 친미 성향의 필리핀의 지배층들의 착취를 피해 숲속으로 숨어든 부족민들을 만나 그들과 사냥을 하러 다닌 경험이 있었다.[231]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하면 안돼 짤방의 주인공들 맞다.[232] 참고로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마존 강을 탐험했던 사람인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본래 유럽의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을 위해 투피족들에게 배워서 사용하던 투피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원주민 종족들과 조우한 내용이 나온다. 투피어는 당시 아마조니아 정글 지대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굉장히 널리 쓰이던 언어였고, 따라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콩키스타도르들이나 선교사들도 원주민들과의 우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자주 배웠던 언어였다. 그런 언어가 통하지 않는 민족과 조우한 경험은 오레야나에게는 굉장히 생소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물론 투피어나 그 친척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아마조니아 원주민 민족들은 많지만,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가 언급한 위치 등으로 미루어보면 그가 접촉한 이들의 정체는 16세기 경의 와오라니족이나 그 조상격 종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침 와오라니족이 사용하는 언어인 와오라니어는 비교언어학적인 분류 상으로는 고립어로 들어가며, 투피어는 투피어족 투피과라니어파로 분류된다.[233] 그래서 이후에 멀리 대한민국의 방송국인 SBS에서 이들을 촬영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와오라니족 측에서 흔쾌히 허락해줄 정도가 되어,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 아마조니아 편에서 이들의 모습이 방송을 탔다. 뭐 한국에서는 결과적으로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하면 안돼같은 흑역사만 남았지만, 비록 SBS 제작진들의 주작이 좀 섞였을지언정 와오라니족들은 굉장히 호의적인 분위기 하에서 자기들의 전통 문화를 상세히 보여주었다.[234] 일단, 문화인류학자들은 이들의 정체를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에 속한 다른 섬에 살던 원주민들 중에서 우연히 노스 센티널 아일랜드로 흘러들어간 부류라고 추정하고 있다.[235] 덕분에 아프가니스탄은 위의 동남아시아 및 뉴기니 섬 일대와 함께 민속학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곳으로 꼽힌다. 가령, 이곳에는 인도아리아인들이 인도 아대륙에 처음 유입되던 시기에 산악 지대에 정착한 이들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칼라쉬인이나, 이란 및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거주하는 몇 안되는 드라비다계 민족인 브라후이인도 있으며, 고립어인 부루샤스키어를 쓰는 훈자 지역민 등과 같은 매우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민속학자 및 문화인류학자, 언어학자들에게는 매우 이상적인 연구 장소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런 지역이 탈레반들에게는 재기를 꿈꿀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되어준다는 게 문제다. 워낙 산이 많아서 은신해 있기에도 적합하고, 외부 사정을 전혀 모르는 이들을 꾀어서 자기들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도 있으니, 탈레반을 때려잡으러 온 미군과 정부군의 골치를 여간 썩히는 게 아니다.[236] 빈란드와의 연관성이 제기된 바 있으나, 빈란드 자체는 14세기경의 소빙하기로 인해 그린란드가 몰락할 때까지 그저 질 좋은 목재를 공수하기 위한 장소로만 애용되었을 뿐, 현지 원주민들에 의해 정착지가 정복당해 망한 뒤로는 두 번 다시는 정착이 시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이킹들이 동전을 사용하러 그곳까지 갈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이 동전들은 그린란드의 정착지마저 몰락한 14세기보다 더 이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237] 정확히는 전한에서 후한으로 넘어가는 극초기 시대의 양식[238] 사마천의 고자되기와 연관이 깊은 사람이다. 흉노의 대규모 기마 부대를 알보병들만으로 무려 8번이나 막아내었다가, 누적되는 막심한 피해를 견디지 못하여 중과부적으로 흉노군에 항복했다. 문제는 당시 전한의 황제인 무제가 전후사정은 알아보지도 않은 채, 항복한 사실만 가지고 트집잡아서 이릉의 일족을 멸해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이 때문에 빡친 이릉이 정말로 흉노에 귀순해버렸다.[239] 이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에 한자가 쓰인 것이 많았다.[240] 당대의 기술로 쿠푸왕의 피라미드같은 무식하게 큰 건축물을 안정적으로 쌓아올리는 데는 한계가 분명했다. 당장 쿠푸 왕의 선대 왕인 스네프루 왕의 사례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스네프루 왕은 엄청난 건축덕후로, 종래의 계단식 형태이던 초창기 피라미드의 모양을 오늘날 우리가 아는 깔끔한 정사각뿔 모양으로 만들고자하는 욕심에 정사각뿔 모양의 피라미드를 지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는 첫번째 것은 기술의 한계로 인해 폭삭 무너져버렸고, 두번째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 놓인 바람에 중간에 비스듬하게 꺾인 모양이 되었다가, 세번째에서야 간신히 우리가 아는 모양이 되었다. 이걸 더 크게 짓는다고 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41] 현존하는 기록에 의하면, 맨 처음 이 피라미드를 도굴한 사람은 압바스 왕조의 알 마아문인데, 문제는 그가 처음 이곳에 도굴단을 파견했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보고 흑심품은 놈들이야 많았을 테니, 벌써 누군가가 털어가지 않겠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전술한 대로 미라나 부장품이 있었다가 도굴된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알 마아문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는 기록을 남겼고, 이후의 고고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도 피라미드 안에 무엇을 안치한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242] 후자는 피라미드 따위는 장식이고 실제 쿠푸 왕의 무덤은 따로 있다는 설과도 이어진다.[243] 한국에서는 삼태성이라고 부르던 부분이다.[244] 2014년도 리부트판 코스모스를 보면 선사 시대부터 인류는 사냥과 농사를 시작할 시기와 더불어 당대에는 하나의 과학 이론으로 당당하게 인정받던 점성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계절에 따른 별의 움직임을 읽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로부터 상식적으로 농부가 자기 땅의 넓이 정도는 알고있어야 할 텐데, 이때문에 고대로부터 기하학에 대한 지식이 중요했다. 꼭 이집트인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문명을 이룩한 민족들은 상당한 수준의 기하학과 천문학 지식을 갖추곤 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나, 황하 문명, 마야 문명 등이 그 예다.[245] 피라미드는 아니지만, 당태종이 안시성 전투 당시에 안시성 공략을 위해 쌓은 흙더미로 된 산의 높이가 성벽의 높이보다도 컸다. 단순히 성벽을 넘어가려고 인위적으로 쌓은 것도 성보다 거대해질 수 밖에 없었는데, 남아있는 피라미드에서 그런 비탈길을 만들었다는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흙으로 이렇게 높은 구조물을 쌓아올리면 구조물 자체가 너무 불안정하여 쉽게 무너진다. 선술한 당태종의 공성용 토산도 난데없이 내린 폭우로 와르르 무너져 버렸는데, 뻑하면 나일 강이 범람하는 이집트에서 건설용 비탈길이 공사가 끝날 때까지 무사했을 리는 없다.[246] 최근에는 한국의 한 고고학자가 기중기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공교롭게도 피라미드 주변에서 기중기의 부품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이 발견된 바 있다.[247] 괴짜 예술가의 예술 작품이라는 설에서, 지역 주민들이 마을에 특색을 주고자 일부러 그렸다는 설, 당대의 사이비 종교 교단들이 제의를 목적으로 그렸다는 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248] 일단 주류 학계는 신석기 시대의 인류가 스톤헨지나, 괴베클리 테페같은 건축물을 짓느라고 사용한 석재를 운반한 흔적이거나, 당대의 농업용 수로라고 추정하고 있다.[249] 미노스 문명 시기만 해도 크레타와 키프로스는 그리스인이 주류 민족이 아니었다. 당대의 이 두 섬의 주류 민족이 누구였는지는 아직 수수께끼에 쌓여있지만, 동시대의 그리스에 비하면 상당히 발전한 문명이었기에 아틀란티스의 모티브가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이곳은 자연재해로 인해 멸망했다는 플라톤의 기술과 큰 차이가 있는데다, 당시에도 그리스 본토와 꾸준히 교류했을 만큼, 그리스인들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곳이라서 이곳이 아틀란티스였을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250] 도거랜드란 오늘날의 영국과 네덜란드, 덴마크 사이의 바다에 존재했던 육지를 말하는데, 현재까지 가장 이른 시기에 있었던 빙하기인 뷔름 빙하기에 해수면의 하강으로 인해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구석기 시대의 거주지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여기가 바로 아틀란티스라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마침 이곳의 거주지는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도거랜드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멸망했기 때문에, 아틀란티스가 자연재해로 인해 멸망했다는 플라톤의 기술과 일치한다. 하지만 도거랜드의 거주지는 도시를 이루고 살 정도의 문명은 절대 아니었던지라,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었다는 기술과 배치되므로, 이곳이 아틀란티스가 아니라고 보는 설도 존재한다.[251] 모로코에서 인간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지형이 발견되면서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학설이다. 지형의 모양이 플라톤이 묘사한 아틀란티스의 묘사와도 일치하고, 페니키아의 탐험가들이 모로코까지 가서 식민지를 건설하기도 했므로, 이곳이 아틀란티스의 모티브가 됐을 가능성이 유력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 지형이 진짜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냐는 것과, 문제의 지형이 있는 지역이 실제로 자연재해를 겪었던 곳이냐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지역에 대한 조사도 거의 불가능한 것이, 여기는 모로코 왕실 소유의 토지고, 왕실 측에서 이곳에 대한 조사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252] 피자게이트 등의 헛소문을 퍼뜨린 인물로, 유명한 가짜 뉴스 단체인 인포워즈(Infowars)를 설립했다. 참고로 이 단체는 어찌나 음모론과 각양각색의 유사과학이 판치는지, 2016년도에 최악의 과학 정보 사이트 4위에 올랐다.[253] 사실 드넓은 숲 지대는 무언가 딥다크한 것을 은밀하게 벌이기엔 생각보다 적합치 않은 곳이다. 이런 곳에서 상류층들이 모여봐야 말 그대로 친목질 밖에 할 수 없을 것이고, 잘해야 자기들끼리 술 파티나 섹스 파티 정도나 벌이다가 적발되어 망신당하는 수준이다.[254] 오늘날의 중화권 조직폭력배를 가리키는 말로서의 삼합회는 중화민국 초기의 혼란기를 틈타서 나타난 조폭들이 이들을 사칭한데서 기원했다.[255] 오히려 18세기에는 조지 워싱턴을 포함한 서구권 각국의 내로라하는 유명인들이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뒤에, 이를 출세의 증거로 삼아 세간에 과시하곤 했다. 그리고 현대에는 회원 수가 급격히 줄어든 바람에 SNS를 이용해 공개적으로 회원을 모집하는 등, 신비주의 컨셉도 갖다버린지 오래다.[256]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유명한 그 수학자맞다.[257] 특히 한국의 일부 유사 역사학자들은 단군이 이스라엘 10지파 중 하나인 단 지파 출신이라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258] 목록에 있는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하나는 '이지아 과거'로, 미스터리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해당 목록에서 삭제.[259] 이에 관한 증거는 PD 수첩에서 피눈물에 있는 DNA를 조사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윤 율리아가 예수님의 피를 함부로 만질 수 없다며 이를 피하려고 했던 점.[260] 이에 대해서는 영화 촬영시에 피가 튀는 모습을 연출하는 용도로 주로 쓰이는 특수 염료가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의외로 사이비 종교 신자나 교주들이 자주 사용하는 트릭이다.[261] 위의 맨 인 블랙도 국가 기밀 유출을 우려해서 조사 중이던 정부 요원을 보고 착각한 것이 와전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정부 요원들이야 해야 할 일을 한 거지만, 요원들의 고압적인 자세에 쫄은 이들이 어디서 주워들은 외계인 음모론 따위랑 헷갈리면서, 외계인의 존재를 숨기려는 수상한 놈들이라는 식으로 착각한 것이, 살이 붙어서 와전된 것이다.[262] 렌즈형은하나, 나선은하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63] 영화 '새엄마는 외계인'에서 외계인으로 나온 킴 베이싱어를 떠올려보면 된다.[264] 한국에서도 산에서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서 온 사람을 만났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 외계인은 보통의 한국인과 똑같이 생겼고 지구의 환경 오염을 매우 걱정했다고 했다. 한국 UFO 연구 협회에 보고된 사례다.[265] 주로 비밀리에 실시된 군사기술 실험이나 극비리에 개발한 신무기의 시연이 실패한 경우.[266] 명왕성이 행성에서 왜행성으로 재분류되기 전에는, 있을지도 모르는 가설상의 행성을 제10행성이라고 불렀다.[267] 하지만, 어이없게도 한 잡지에서 보도한 바에 의하면, 한 청소부의 컴퓨터에서 발견된 음란물(...) 때문에 폐쇄 되었다고 발표했다. 기사대로면, 포르노를 다운받는 과정에서 컴퓨터 바이러스가 퍼져서 연구소의 컴퓨터들이 치명타를 입은 탓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생각보다 이는 흔한 일이라서 일본에서도 해상자위대의 대원들이 군함에 탑재된 컴퓨터로 야동을 다운받다가 군사정보 몇개가 유출되게 만들어서 코로 와사비를 먹은 사례가 있었다.[268] 위키러들이 우주선하면 떠올릴 spaceship 말고, 우주에서 날아온 여러 광선인 cosmic ray다.[269] 폴리네시아 현지 언어들의 조어로 고구마를 쿠우말라(kuumala)라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 등지에서 쓰이는 언어인 케추아어로 고구마를 쿠마라(kumara)라고 한다. 이는 폴리네시아인이 오래 전에 남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270] DNA 분석 결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래 이전에 이미 아프리카에 전래되었음이 밝혀져서, 고구마의 전파 과정에 대한 의문이 더욱 커졌다.[271] 개화기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고추를 식용으로 쓰지 않았다.[272] 2019년 이후로는 네메시스가 소형의 블랙홀이라는 설도 나오고 있다.[273] 하지만, 최근에 WISE 우주 망원경의 관측에 의하면, 오르트 구름 내에 행성급 이상의 천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결과가 나와서, 가설 자체가 폐기될 위기에 놓였다.[274] 외계인 성향이 강한 크립티드[275] 호수 괴물이라고 해도 네시 또는 네시와 비슷한 괴수가 전부로 네시는 사실상 가짜로 판명되었다.[276] 예티의 것으로 추정되는 털 몇 가닥의 DNA를 분석해본 결과, 현생 북극곰과 친연관계에 있는 종류임이 밝혀졌다. 때문에 생물학자들은 고대 티베트인들이 고대의 히말라야 산맥에 서식하던 어떤 곰과 동물을 목격한 것을 오해한데서 예티에 대한 전설이 나왔다고 추정하고 있다.[277] 그것도 모계다.[278] 초기 인류의 직계인 만큼, 유전적으로 가장 다양하다.[279] 실제로 남성호르몬과 유전적 다양성이 인간보다 훨씬많은, 침팬지의 경우, 인간에 비해, 유전적 탈모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다.[280] 2004년에 레오나르도 가예고스라는 경찰관이 순찰 도중 이 마녀에게 공격당했다며 지역 방송국 인터뷰에 나와 말한 적 있다.[281] 노스 캐롤라이나는 지금의 조지아, 테네시 등과 함께 버지니아 식민지로 당시 버지니아는 스페인 땅 플로리다와 접경 중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적국 정착민을 충분히 공격했을 수 있다.[282] 키가 3m나 되는 온 몸이 털로 뒤덮였다고 한다.[283] 이 표현을 고안한 사람이 다름아닌 스티븐 킹.[284] 사실 어원적으로 따지면 옳은 번역은 염화(念火)가 아닌 화동(火動)에 가깝다. Pyro(불)과 Kinesis(움직임)의 조합이기 때문.[285] 1978년에 유네스코 자연 유산으로 등록되었다.[286] 현재 나하니 국립 공원에 가려면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인근 마을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가거나 경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야 한다.[287]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공공도서관에서 찍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짤방은 2008년경에 찍은 것으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