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산장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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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개
3. 결과
4. 현대판 물산장려운동
5. 해외의 비슷한 사례
6. 각종 패러디
7. 같이보기


1. 개요


'''우리가만든것우리가쓰자'''

'''광목'''은''' 태극셩'''[2]

그다음

농구(農具) 불로초(不老草) 산삼(山蔘) 삼신산(三神山)

내공으로 천도(天桃)[3]

무엇보다 값이적고 물건조흔 조선광목

갓튼값이면다홍치마로

팔기나사기나이왕이면

'''조선사람 조선광목'''

우리손으로맨든

'''광목'''

상기 인용문은 경성방직주식회사의 광고로, 사살상 '''한국 애국 마케팅의 시초격이자''' 물산장려운동을 대표하는 광고. 이와 함께 ‘今日부터 實行’이 쓰인 신문 기사도 자주 보이는 사료 중 하나. 당연하지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한다.
민립대학설립운동과 함께 1920년대 민족주의자들의 대표적인 실력 양성 운동이다.

2. 전개


3.1 운동을 겪은 1920년대, 일제는 기존의 강권 통치(무단통치)[4]만으로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방향을 바꾸어 유화책과 회유책을 통해 식민지를 지배하기를 원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 불황을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를 본격적으로 활용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대에는 회사령의 규정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회사의 설립이 쉬워지자, 자본력이 우월했던 일본 기업들이 조선으로 진출하려 했다.[5]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조선 내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물산 장려 운동이 시작되었다. 1922년을 즈음해서 일본이 관세를 철폐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운동은 조선 물산 장려회를 중심으로 본격화되었고, 자작회나 부인회 등이 참여하였다.
운동 내용은 4글자로 요약하면 신토불이 되겠다. ‘조선 사람 조선 것’, ‘우리 것으로 살자’ 등의 슬로건을 내세웠으며, 조선 사람은 일본 등 타국의 물건 대신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쓰자는 운동이다. 평양에서 조만식 등의 조선 내 자본가들이 주도하여 시작되었으며, 서울에 지부가 설치된 뒤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한반도 내 언론사들도 공조해서 앞다투어 물산장려광고를 실었는데 이 자쓰가리우...가 바로 그런 광고들 중 하나로 오늘날 물산장려운동의 면모를 소개하는 예시로 쓰이면서 유명해졌다.
물산장려운동의 행동강령 3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 첫째, 의복은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는다. [6]
  • 둘째, 우리 손으로 만든 토산품은 우리 것을 이용하여 쓴다.
  •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상용하되, 부득이한 경우 외국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을 써서 가급적 절약을 한다.

3. 결과


물산 장려 운동의 사상적 도화수가 된 것이 누구인가? 저들의 사회적 지위로 보나 계급적 의식으로 보나 중산 계급임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적어도 중산 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대변인인 지식 계급, 또 솔선하여 물산 장려의 실행적 선봉이 된 것도 중산 계급이 아닌가.

실상을 말하면 노동자에게는 이제 새삼스럽게 물산 장려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네는 벌써 오랜 옛날부터 훌륭한 물산 장려 계급이다. 그네는 자본가, 중산 계급이 양복이나 비단옷을 입는 반면 무명과 베옷을 입었고, 또 저들 자본가가 위스키나 브랜디나 정종을 마시는 반면 소주나 막걸리를 먹지 않았는가?

....(중략)....

이리하여 저들은 민족적, 애국적이라 하는 감상적 미사로서 눈물을 흘리며 저들과 이해가 전연 상반된 노동 계급의 후원을 갈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적으로 자각한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저들도 외래 자본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며, 따라서 저들의 전략에 빠져 계급 전선을 몽롱케는 못할 것이다.

ㅡ 이성태.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사회주의자가 본 물산장려운동>. 동아일보 1923.3.20

그러나 이 때 조선의 공업은 대부분 기계화되지 않은 수공업이었기 때문에 생산성과 공급력이 크게 떨어졌다. 그래서 물산장려운동 시작 이후에 수요만이 늘어나자 공급자들은 생산을 늘리는 대신에 그냥 가격만 올려서 국산물품 가격이 폭등하였고, 결과적으로 국내 자본가와 상인만 이득을 보게 되었다. 때문에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은 '''"우리는 외국 사치품 같은 거 쓴 적 없는데 이 운동 때문에 오히려 국산품 값이 오른다??"'''라고 비판하였다. 이쪽 계열이 주장하기에는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 '우린 이미 물산장려파다' 정도인데. 전자의 경우에는 말 자체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나오던 말이다. 한마디로 일본인 자본이든 조선인 자본이든 농민 뜯어먹고 사는 부르주아라는 것. 그리고 후자는 그냥 국산 기업에 만든 고무신 신을 것 짚신 꼬아서 공짜로 신는 것과 같은 경우가 많았다는 거다. 이미 임노동의 재화는 소비되고 있다는 것.
당시 산미증식계획으로 인해 쌀값이 폭등해서 농민이 몰락하고 지주층이 흥하게 되는데, 이 지주층들 중 대다수가 일본인 아니면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지주층이 산미증식계획으로 쌓아놓은 돈으로 회사를 세웠고, 관세가 철폐되고 경쟁이 심화되니까 조선인 기업이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운동을 벌인 것인데, 이 운동의 중추가 민족주의 계열이라지만 참가원중 대다수가 타협적 민족주의와 친일파[7]였고, 결국 1920년대 후반에는 민중의 외면을 받으면서 쇠퇴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민중들은 이미 국산품마저 살 돈도 없었으니까.'''[8] 하지만 그나마 이어진 명맥도 조선총독부의 간섭으로 인해 끊겨버렸다.
부정적인 면이 많아 한계가 드러나는 독립운동이었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좌우합작운동의 영향으로, 조선물산장려회와 사회주의 청년단체 서울청년회와 결합하여 '조선민흥회'가 만들어졌고, 이 조선민흥회가 사회주의 단체장 모임인 '정우회'와 결합하여, 20년대 국내 독립운동 최대의 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된 뿌리가 되었다.

4. 현대판 물산장려운동


2019년 현재 2019년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이 운동을 계승하고 있다. 이미 일부 언론사에서도 이 운동을 '2019년판 물산장려운동'으로 지칭하고 있다.기사 참조 이 운동은 한일 무역 분쟁으로 촉발된 것인데 한국에서는 이 분쟁을 '일본의 경제 침탈 시도'로 간주하고 2019년 7월부터 대대적으로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추진했으며 이 운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2019년 8월 현재 이 운동으로 인해 이전까지 국내 수입산 맥주 부동의 1위를 차지했던 일본 맥주 수입이 급감하여 벨기에, 미국에 밀린 3위로 뚝 떨어졌고 유니클로를 비롯한 일본 의류 브랜드의 매출도 70% 이상 뚝 떨어졌으며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대마도, 큐슈 등지에선 진지하게 매출 감소를 우려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불매운동은 일본제만 피하자는 것이므로 그 외 국가 제품들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 무엇보다 일본제를 피하면 남는건 국산뿐이던 그 시절과는 달리 현재는 다른 국가 기업들도 많이 진출해있고 해외직구 등도 보편화된 상태라 국민들의 선택의 폭이 훨씬 넓어진 상황인데, 그때도 지금도 국산은 가성비에 대해 말이 많은 상황이라 물산장려운동 시절처럼 국산의 가격이 폭등하는 등의 문제는 없다는 사소하면서도 큰 차이가 존재하긴 한다.

5. 해외의 비슷한 사례


해외에서도 역시 이와 비슷한 형태의 정치적 불복종 운동들이 보여지는 경우가 있었다.
국가 혹은 민족의 부를 민중의 힘으로 살리자는 이 운동은 국채보상운동, 금모으기 운동이나 인도 제국스와데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 팔레스타인의 대 이스라엘 투쟁이었을 때, 아랍계 팔레스타인인들은 같은 아랍계 국가인 튀니지에서 나온 메카 콜라를 썼는데, 2002년 이스라엘에 대한 우회적인 시위를 목적으로 튀니지 기업가가 만상품을 사용했고, 판매 수익의 10%가 팔레스타인 어린이를 위한 기금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거리 매점에서도 큰 인기를 끄는 등, 이들은 자체적으로 물가를 단속해서 특정인들만 이득을 보는 상황을 경계했다.

6. 각종 패러디


항목 맨 위의 경방 광고 이미지는 근현대 국어 표현과 쓰여진 방향이 현대 한국어와는 반대인 우횡서우종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인지 많이 패러디되었다. 물산장려운동의 배경은 몰라도 저 광고만은 아는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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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2 소총. '우리가 쓰자'가 아니라 '우리가 쏘자'라는 차이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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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A로도 패러디되었다. 캐릭터는 목긴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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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갤에서도 패러디 하였다. 캐릭터는 롤링스타즈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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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리틀 포니 투니버스 더빙 관련 패러디도 등장했다.
한 트위터리안이 위상수학 관련 패러디도 만들어냈다.
2017년 10월 대성마이맥사설모의고사에도 패러디가 등장하였다.

7. 같이보기



[1] 그 당시 표기법으로 한글을 적은 것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한다.[2] 현대 한글과 다른 표기법이 많다보니 이것도 태극’성’을 의미하는데 그 시절 표기법으로 태극셩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경우는 제품 이름, 즉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태극셩이라고 해서 잘못된건 아니다. Ketchup의 정식 표기가 케첩이지만 오뚜기 케’챂’은 그 제품만의 고유명사라서 괜찮은 것처럼.[3] 상기한 제품들 중 낯이 익은 불로초나 산삼 등도 있지만 농구, 삼신산, 천도 등은 정체가 불분명한데, 경방에서 낸 광고임을 고려하면 불로초와 산삼을 포함해서 전부 경방의 브랜드명으로 추정된다. 즉 경방의 광목의 브랜드명이 태극셩인 것처럼 경방에서 취급하는 또 다른 상품들의 브랜드명이라는 것. 해당 항목들을 괄호로 묶고 아래에 “무엇보다 값이적고 물건조흔 조선광목”이라고 표기한걸 보면 저 이름들이 전부 광목 제품 이름임을 짐작케 한다.[4] 그 예로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치안을 담당하던건 일본 헌병, 즉 군인이였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방침 변화로 헌병 대신 치안을 담당할 경찰 조직이 신설되었다. [5] 아이러니하게도 회사령의 허가제는 일본 중소기업들도 싫어했다.[6]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된 이후, 그동안 무명옷으로도 만족했던 사람들이 일본이나 청나라에서 온 수입품에 혹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사치를 부린 바 있다.[7] 멀리 갈 것 없이 이 운동을 주도한 것이 김성수의 경성방직, 약칭 경방의 초대 사장이 대표적 친일파 박영효이다.[8] 어린이용 경제사 만화인 《아하! 그땐 이런 경제생활을 했군요》에선 80% 이상이 국산이든 일제건 소비할 능력이 전무할 정도로 가능한 소작농이나 노동자들인데, 우리가 무슨 돈이 있냐며 피로에 쩌든 상태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