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위동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문위동'''
'''文渭東'''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남평 문씨[1]
'''출생'''
1903년 2월 23일
경상남도 김해군 가락면 봉림리
(現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2]#
'''사망'''
1976년 5월 1일
부산시
(현 부산광역시)
'''학력'''
진주공립농업학교 (명예졸업)
'''묘소'''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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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문위동은 1903년 2월 23일 경상남도 김해군 가락면 봉림리(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에서 문익점의 19대손으로 정6품 승훈랑(承訓郞)의 품계를 가진 아버지 문종주(文鍾周)와 어머니 창녕 조씨 사이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4]
그는 1919년에 진주공립농업학교에 진학했고, 1919년 4월 13일 봉림마을의 음지 바위 아래에서 사촌 문위호(文渭鎬)와 윤상기(尹相基), 변동윤(卞東允) 등 20세 전후의 청년 여러 명을 모아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학부형들의 만류로 자진 해산했다. 이후 1920년 기숙사 학생 48명으로 구성된 토론연구회를 조직한 그는 동교생 신영안, 김익조(金益祚) 등과 함께 덴노의 천장절(天長節)인 8월 30일에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문위동은 먼저 진주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동지를 모집했고, 동교생 박학두(朴學斗)와 함께 기숙사에서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3백매를 인쇄했다. 그는 8월 30일 오후 7시에 진주공원, 농업학교 앞, 재판소 앞 등 세 곳에 동지들을 규합시켜 일제히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자 했다. 거사를 이틀 앞둔 8월 28일, 동교 기숙사에서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거사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제1 보통학교, 제2 보통학교, 광림학교, 기독청년회, 청년친목회 등 학교 및 단체에 통보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기밀이 누설되면서, 그는 거사 당일인 8월 30일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후 문위동은 1920년 10월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모교로부터 퇴학당했다. 출옥 후, 그는 녹산의 강성의숙(降星義塾)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8.15 해방 후 1952년 김해읍장#과 3.1 동지회 김해 지부장을 지냈으며, 진주농업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1976년 5월 1일에 사망했고,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문위동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의안공파-해은공파 30세 위(渭) 항렬.[2] 남평 문씨 집성촌이다.[3] 남평 문씨 인터넷족보 계보도[4] 조부 문재욱(文載郁)[3]은 1896년 김해군 세무주사를 지냈으며# 1899년 중추원의관에 임명된 바 있는# 지방 유지로서 1899년 김해군 지역 사립학교 설립에 참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