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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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문익점(文益漸)
'''본관'''
남평 문씨
'''출생'''
1329년 경상남도 산청군
'''사망'''
1398년 경상남도 산청군
'''국적'''
고려 ~ 조선
'''비고'''
사후 영의정 추존
1. 개요
2. 생애
3. 목화씨 반입 설화
3.1. 흔히 알려진 사실
3.2. '붓두껍 밀수'는 허구?
4. 문익점 통념의 형성
4.1. 도입부
4.2. 고려로 돌아오다
4.3. 목화 산업 관련 루머
4.4. 목화 도입 설화로 인해 빚어진 오해
5. 그 외
6. 후손
7. 각종 매체에서의 언급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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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말의 유학자. 하지만 학자보다는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대는 바야흐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려던 시점이었는데, 목화의 보급으로 조선의복 문화는 물론, 상거래 관행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2. 생애


원간섭기 와중인 1329년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태어났다. 이곡의 제자가 되어 이색 등과 함께 공부했고 공민왕 시대인 1360년 과거시험에 응시, 벼슬을 시작했다.
고려-몽골 전쟁 이후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고려는 공민왕 연간, 원나라가 쇠약해지자 위해 반원정책을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 본토에서 원나라를 몰아내고 한족 부흥을 내세운 홍건적이 원나라뿐 아니라 고려 영토까지 침범해 공민왕이 피난을 가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한때는 원나라와의 관계개선을 시도했다. 그런데, 원나라는 고려가 반원정책을 시작했던 것에 불만이 있었고, 원나라 말 안 듣는 공민왕 대신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의 왕으로 옹립해버린 것이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문익점과 그 일행들이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반발한 원나라 조정[1]에서 충선왕의 손자인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임명해서 군사를 주어 고려로 보냈다.[2]
이에 원나라 조정에 있던 사신들은 덕흥군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와 공민왕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로 나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차 사신단은 기황후와 원나라 황실에 설득되어서 덕흥군 지지파로 임시 조정까지 꾸리고 앉아있었고, 2차 사신단에 대해서 포섭이 이뤄졌는데 이들이 갈렸다. 이중 대부분은 1차 사신단에 합류하였다. 공민왕을 지지했던 홍순, 이자송, 황대두, 김유는 돌아왔고, 이공수는 붙잡혀 있으면서도 협력을 거부하면서 결국 덕흥군 일파의 움직임을 고려조정에 알려서 공민왕이 이를 대처하는데 최대 공로를 세웠다. 그러니 이공수를 제외한 나머지 잔류 2차 사신 일행은, 원래부터 자리잡고 있던 1차 사신 일행과 엮여 덕흥군파가 되었다. 즉 잔류했던 문익점 역시 '''덕흥군파였다'''라는 것.
고려사절요에는 덕흥군 쪽으로 분류된 자들 중 김첨수, 유인우, 강육연, 황순, 안복종, 기숙윤과 함께 문익점의 이름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공민왕과 고려의 입장에서는 역적.
아무튼 원나라가 보낸 덕흥군의 군대는 고려에 진입하다 압록강 근교에서 최영이성계에게 패배했고, 결국 원나라는 이들에 대한 송환 결정을 내린다. 어쩔 수 없이 고려로 돌아온 후 문익점은 파직되어서 시골로 내려가게 된다. 문익점은 운이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문익점의 행동은 역모죄로 몰아도 변명 여지없이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사형이나 유배가 아닌, 파직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파직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딱히 할 것도 없으니 목화 재배를 시작해 목화의 개량과 보급에 있어 일대 혁신을 가져와 민간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했다. 결국 우왕 1년에 조정으로 돌아와서 관직에 올랐다. 어디까지나 목화 보급 공로 때문이었다. 이후 다시 문익점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온건파 사대부와 함께 하느냐, 급진파 사대부와 함께 하느냐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문익점은 정몽주 등 온건파와 입장을 같이 했다.[3] 결국 급진파 사대부가 정권을 잡아 이들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였고,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문익점은 이후 조선에서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조선 건국에 반대해 초야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조선 조정에서는 후손에게 벼슬을 주고 태종 때 참지부정사(參知政府事)와 강성군(江城君)의 봉호를, 세종 때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의 봉호를 추증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여담으로 문익점의 후손은 조선 왕실과 약간 이어지는 편이다. 문익점의 딸은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인 완풍대군 이원계와 결혼하였고, 그 아들이 태종 이방원 편에 선 이천우이다. [4]

3. 목화씨 반입 설화



3.1. 흔히 알려진 사실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붓두껍[5] 속에 목화씨를 몇 알을 숨겨 가지고 왔다는 일화로 매우 유명하다. 원나라로부터 자주 독립을 꾀하는 공민왕을 옹호하다가 원나라 황제의 미움을 사서 귀양을 갔고, 그곳에서 목화를 발견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건 밀수를 했고, 온갖 고초 속에서 밀반입에 성공하여 백성을 등따시고 배부르게 사는데 공헌한 인물이라는 것이 흔히 알려진 이야기이나...

3.2. '붓두껍 밀수'는 허구?


우선 이 이야기는 기초적으로 원나라목화씨를 금수물품으로 지정했다는 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실제로 원나라가 금수품목으로 지정한 품목은 무기화약 등 국방에 있어 매우 중대하거나 희소성이 높은 품목일 뿐, 남쪽에 널리고 널린 게 목화인 만큼 희소성 없는 품목을 금수품목으로 지정했을지가 의문이다. 면화가 화기나 화약의 심지를 만드는 데 쓰이기 때문에 군수품으로 간주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6] 설사 금지품목이었다 해도 당시 원나라의 상황을 보면 전혀 금수가 지켜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문익점은 다년생의 강남산이 아니라 1년생의 화북산 목화를 가져왔다는 게 주 내용.
게다가 2010년에 백제 위덕왕 시기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군 능산리 절 유적에서 목화에서 뽑은 면사(綿絲)로 짠 직물(면직물)이 발견되어, 문익점이 고려에 처음으로 목화를 들여옴으로서 면직물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통념을 반박했다. 사실 예전부터 학계는 물증만 없다 뿐이지 중국에 그 흔한 목화가 고려시대 말에서야 들어왔을 리가 없고 이미 삼국시대부터 썼을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그동안 삼국시대 면직물 증거를 찾는데 눈에 혈안이 되어있었는데 그게 발견된 것. 다만 문익점이 들여온 것은 '''동북아시아 기후에 적응한 개량종'''이었던 것으로 보이며[7], 문익점 이전에는 재배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등 '''재래종[8]의 수량이 극히 희소'''[9]했던 것으로 보이기에 그 공로가 깎인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목화 보급 100년 만에 조선 전체로 펴져나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문익점은 목화의 대중화에는 상당 부분 기여했으며,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공로다.[10]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 시대 서민은 일반적으로 흰 모시옷을 즐겨 입었음을 알 수 있는데, 겨울에는 원시 시대부터 입어 온 갖옷이나 (상류층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활발히 생산된 계(罽) 등의 모직물로 만든 옷을 갖춰 입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무명(면포)는 베나 모시에 비해 더 부드럽고 따스해서 추위를 막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특히 목화 솜으로 솜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다. '''개량종의 도입'''이 당시 한반도인의 의생활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왕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元)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盛囊以來].'''"

이 '''목화씨를 어디서''' 가져왔느냐가 관건인데, 당시 원 조정의 유배지였던 강남에서 가져왔다면 사행 중 뭔가 죄를 얻어 강남으로 유배를 가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는 얘기며, 그냥 장강 이북이라면 그냥 길거리의 흔한 목화씨를 가져온 셈이기 때문. 이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나온다.

4. 문익점 통념의 형성


이후 조선 초기의 권신 권근[11]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이 시기를 이어가면서 살에 살을 붙여서 문익점 전설을 만들어 나갔다. 몇 줄 없는 사서 기록으로 소설을 써대던 위인전 '''작가'''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문이나 가문의 문제 등이 얽혀 있었기 때문에 문익점 스토리가 사실상 조선시대에 이미 완성된 것이다.
줄거리에 들어간 세세한 에피소드는 호탄 왕국 공주의 누에알 훔치기와, 최무선의 화약 개발을 도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완성본은 이렇게 되었다.

4.1. 도입부


고려에서 사신으로 파견된 문익점은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는 문제를 접한다.(여기까지는 사실) '''공민왕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하여 3년간 강남으로 유배를 간다.

  • 조상이 반역자라고 쓸 수는 없었기 때문에 문익점은 충신으로 변경된다. 후손들이 쓴 책 '사실본기'에서는 이 과정에 황제와 맞짱을 뜨는(...) 장면을 추가해버린다. 정사인 고려사절요에는 자기 조상이 역적으로 되어 있으니 임팩트로 엎어버리려고 한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서장관 문익점이 원나라 황제하고 맞짱뜨면서 설전 벌이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200% 구라. 오히려 덕흥군의 파였다. 사실 조선에서 떠받드는 명나라 황제가 아니라 이미 망한 원나라의 몽골족 오랑캐 황제이므로 역사 왜곡의 부담도 훨씬 덜했을 듯.
  • 이 시기 강남은 홍건적이 득세하고 한족이 난리를 치던 상황이라서 원나라 조정의 힘이 미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덕흥군과 함께 원나라 궁궐에서 고려 조정을 꾸리고 있던 상황의 문익점이 강남으로 여행을 떠날 일 따위는 더더욱 없었다. 이런 신화는 목화는 본래 강남산이라는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권근이 처음 언급할 때는 그냥 '강남에 가서 가져왔다' 였는데, 그걸 남효온이 쓴 책에서는 강남에 유배간 것으로 고쳐버렸다.[12] 그리고...

4.2. 고려로 돌아오다


그리고 유배 기간 동안 농민들이 무명옷을 입는 것을 보고 이를 가져가려고 하지만, 목화는 금수품목이었다.

  • 원나라의 금수 품목은 지도화약 뿐이었다. 이 2가지는 군사 필수품이기 때문에 무조건 국외 반출 금지품목이다.

때문에 붓두껍에 숨겨서 가지고 왔다.

  • 이것도 처음에는 그냥 가지고 왔다였다가 주머니, 붓대 등 여러차례 변화를 거쳤다. 그 최종본이 붓두껍. 굳이 '붓두껍'이라는 아이템이 된 것은 선비문인을 상징하는 이 문익점의 이미지에 적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사실 '반출을 금지하는 직물의 씨앗을 몰래 가지고 나간다'는 이야기는 다른 나라에도 있는데, 이 경우 주된 소재는 비단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중국의 공주가 서역의 '호탄 왕국'에 시집을 가면서 "서역에는 비단이 나지 않으니 이대로 가면 당신이 좋아하는 비단옷을 입을 수 없다"는 왕자의 꼬드김에 넘어가 누에나방의 알을 왕관 속에 숨겨서 몰래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다. 비단은 중국에서 수출품으로써 중요하게 여겨지던 물자였으므로 실제로 금수 조치가 내려졌으며, 호탄 왕국은 서역에서 최초로 비단 생산이 시작된 나라이므로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다.기사기사 이 '왕관에 숨긴 중국 공주의 누에알'이라는 오래된 소재를 '붓두껍에 숨긴 문익점의 목화씨' 이야기에 만드는데 참조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낙향했다.

  • 이 부분도 앞서 설명한 이유로 거짓. 이것을 고려 멸망과 엮기도 하는데,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

4.3. 목화 산업 관련 루머


목화씨를 심은 것이 문익점의 밭에서는 전멸하고 장인 정천익의 밭에서 겨우 겨우 몇 포기 살려내었다.

  • 이 부분은 사실 확인이 안된다. 이후 과정도 당연히 마찬가지. 이와 관련된 것은 모조리 소설로 일관된 관련 글들에서 퍼져나간 이야기들로 이런 것들은 역사서에 남지 않는다. 문익점이 버려둔 목화를 정천익이 길렀다며 진짜 위인은 정천익이라고 정씨 후손들이 클레임을 거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지만 면에서 씨앗을 제거하여 실을 뽑는 기술이 없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중국 승려가 목화를 보고 반가워하는 것을 보고, 문익점과 정천익이 국가 기밀이라고 알려줄 수 없다는 승려를 어르고 달래서 결국 씨아와 물레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 이 부분은 200% 거짓말이다. 목화에서 씨를 빼내고 나머지 원면으로 실 뽑는다는 게 고난도의 기술일지는 몰라도 국가 기밀일 수는 없다. 이게 사실이면 원나라에서 길쌈하던 여자들은 모조리 국가 기밀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중국에서 농경 발전을 위해 만들어 유통시켰던 농서들은 목화 가공 관련 정보도 실려 있는 경우가 많으니 원나라는 1급 기밀 정보를 민생을 위해 기밀해제한 나라가 된다.
  • 이 부분은 최무선화약 개발 일화를 참조한 것이 아닌가 싶으며 재탕이라는 느낌이 너무 강하다. 화약은 분명히 금수품이었다.

이후 이걸 문익점의 후손들이 개량했는데, 특히 목화씨에서 실을 뽑아내는 방적기를 만든 사람이 문익점의 아들 문래라서 물레라고 하고, 실로 천을 짜는 방직기를 개량한 것이 문래의 동생 문영이라서 솜으로 짠 옷감을 무명이라고 한다.

  • 민간어원이다. 물레의 원형은 김해시에서 출토된 가야 토기까지 올라가고, 문익점의 후손들이 손을 댄 것은 씨아 정도였다. 무명은 목면(木綿)을 중국어로 발음한 무몐을 음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문익점의 아들들은 중자 돌림으로 중용, 중성, 중실, 중진, 중계 5명[13]이다.
  • 문익점의 아들이 아니라 문익점의 손자 래萊, 영英, 종萗, 평苹, 자蔗(중실의 자 5명)의 대에서 제작된 것이다. 문래를 물레라 부르고 문영을 문영의 베라 하여 무명베라 불렀다. 한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하는 말도 무명베로 흰옷을 지어입기 시작한 후의 일이기도 하니 문영의 발명은 대단한 것이라 볼 수 있다.

4.4. 목화 도입 설화로 인해 빚어진 오해


앞서 지적된 밀수 루머로 인해, 후세에는 비꼬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트렌드를 잘 포착해 성공한 사람을 가리켜 문익점이라고 비하하는 식.
그러나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것과 이를 대중적으로 성공시키는 것은 별개 문제다. 문익점이 공을 인정받은 것은 개량종 목화씨 재배를 성공시키고 이를 대중화하여 백성들의 삶의 질을 개선시켰기 때문이다.
만약 문익점보다 먼저 목화씨를 들여온 사람이 있었다 해도, 재배를 할 줄 몰라 죽여 버렸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농사가 본업이 아니었던 사람이, '''파직을 기회로 삼아 농사로 대박을 쳤다'''는 점[14]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인데, 지나치게 최초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진 나머지, 재배 과정의 노력은 무시되어 버렸고, 억울하게 산업 스파이 이미지를 갖게 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5.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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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카씨를 밀반입해 한국 사람들이 모카라떼(...)의 달콤함을 즐길 수 있게 해준 위인이라는 개드립도 있다. 사실 원문을 보면 저 글 바로 아래 '지금 헷갈리는 사람 우리랑 동급^^'이라고 적혀 있어서 몰라서 저렇게 쓴 게 아니라 농담한 거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잘리고 나머지만 돌아다니고 있다. 한국에 양탕국(가배)이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 고종 때였다. 이 드립은 별에서 온 그대 1화에서도 천송이가 SNS에 올리면서 무식 인증을 한 바 있다.
문익점의 전설은 태조 이성계가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았다는 두문동 72현 전설에서 이들이 유일하게 내보낸 생존자가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라는 전설[15]조사의의 난이 각색되어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함흥차사의 전설, 양녕대군이 호쾌한 대인배였다는 전설과 더불어서 여말선초 4대 구라 전설로 남았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에 목화 시배지와 문익점 선생 생가라는 유적이 있다. 다만 이상하게도 문익점을 모신 사당인 문익점부조묘는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다. 이는 문씨 본가가 전남 보성군에 있기 때문이라 그런것이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의 '문래동(文來洞)'은 '문익점이 왔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라는 속설도 있다.[16] 문래동은 일제강점기 당시 면직물 공장이 많아 사옥정(絲屋町, 이토야마치)이라고도 불리던 곳이기에, 해방 뒤 이름을 되찾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야기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이규보토실을 허물어 버린 설과 비교하면 묘하다. 둘다 고려시대 사람인데 한 사람은 추우면 가죽옷을 입으면 되지! 하던 양반이라...
가끔식 후손인 이름이 비슷한 목사와 이름이 헷갈릴 때도 있다.

6. 후손


문재인 대통령문무일 검찰총장, 문희상 국회의장의 직계 조상이다.
대부분의 문씨가 남평 문씨이기 때문에[17] 우리가 아는 모든 문씨들이 다 문익점의 후손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남평 문씨 내에서도 문익점의 후손이 아닌 파들이 있으므로 전부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18] 단, '''대부분의''' 남평 문씨들이 문익점의 후손인 것은 사실이다.[19]

7. 각종 매체에서의 언급



8. 관련 문서



[1] 이라기보다는 당시 원나라 황실의 주축이었던 기황후의 불만이었다. 공민왕은 반원자주정책 과정에서 부원배인 기철 등을 제거하는데, 이게 기황후의 일가인 것이다. 기황후는 자기 친정을 박살낸 것에 불만을 품고 공민왕을 적대한 것이다. 사실 원나라 입장에서는 당장 홍건적 처리가 더 큰 국가적 문제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기황후의 이런 행동은 그야말로 답이 없다.[2] 중국 왕조와 한반도 왕조가 대립할 때 중국말 잘 듣는 인사를 명목상의 왕으로 책봉해 보내서 내분이 일어나도록 유도하는 사례는 이전에도 종종 있었다. 나당전쟁 당시 문무왕 대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책봉해 보낸 것이 그 예다.[3] 나중에 언급되겠지만 이는 문익점이 목은 이색의 문하였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생전에는 몰라도 사후에는 크게 이롭게 작용했다. 이 온건파 사대부가 후일의 사림파가 되고 결국 사림파가 조선 중기 이후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문익점은 그야말로 폭 넓은 인맥을 갖추게 되었고, 이는 문익점 신화의 완성에 크게 공헌했다.[4] 그렇지만 문익점과 완풍대군과 나이차는 1살차이여서 나이뻘로는 친구사이나 다름없는데 장인 사위 부르는게 영...[5] '촉에 끼워 두는 뚜껑'[6] 일본전국시대조총이 빠른 속도로 보급된 것도 조선을 통해 들어온 면화가 심지를 만드는 데 요긴하게 쓰였기 때문이다.[7] 목화의 원산지는 인도인지라 사철 온난한 열대 기후에서 잘 자라는 관계로 한국에서는 잘 자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8] 상명대학교 박선희 교수는 이를 초면(草綿)이라고 하는 아프리카 종으로 본다. 위의 링크 참조.[9] 일부 상류층의 기호를 위한 것으로 '추정'[10] 자동차의 대량생산을 이룬 헨리 포드의 명성이 자동차를 발명한 사람들보다 높으면 높았지 낮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11] 왜 권근이 언급되느냐 하면, 권근과 문익점은 목은 이색(고려)의 제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문익점이 온건파 사대부와 길을 같이했지만, 이처럼 조선 초기 세력 사이에도 인맥이 분명히 존재했다.[12] 생육신 중 한명인 그 남효온이 맞다. 다만 사육신에 대한 전기 소설인 '육신전'도 그렇고, 남효온도 같은 생육신인 김시습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달인이었다. 남효온이 문익점을 띄워준 것은 앞서 언급한 온건파 사대부의 계보 때문이다.[13] 고려사에는 5명으로 나오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문익점의 졸기에는 자식은 셋이라고 하면서 중용, 중실, 중계만 실어놨다. 아마 그 사이에 중성과 중진은 사망한 듯. 당시 문익점이 70살에 가깝게 장수 해서 그럴 수도 있다. 다만 족보상에 다섯 아들의 후손인 종파가 모두 있다.[14] 요즘으로 치면, 임명직 공무원이 줄을 잘못 서서 일찍 짤리고 난 후, 해외 농산물 재배에 성공하고 이것이 대중화되어 농가 소득이 증대한 것과 비슷할 것이다.[15] 이건 4개나 걸려 있다. 두문동 72현(두문불출), 한식의 유래인 불지르기 설화의 재활용, 황희의 출신성향, 그리고 청백리 황희까지.[16]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文來)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이야기까지 있다.[17] 문씨의 96%나 된다. 그마저도 나머지 4%는 남평문씨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 다른 지역에서 집성촌을 이루면서 형성된 것이라(계파가 다른 감천 문씨, 정선 문씨도 있지만 다 합쳐서 1000명 겨우 넘는 정도이다.) 실질적으로 문씨는 전원이 먼 친척 관계에 있다.[18] 남평 문씨 문중에서는 종파를 10개로 분류한다. 그 중 문익점계가 아닌 파는, 문익점의 형 문익겸을 파조로 하는 충혜공파, 7대조 문극겸의 손자 문착에서 갈라진 남제공파 및 문익점의 9촌 숙부 문구를 파조로 하는 감천군파, 그리고 6대조 문후식의 동생 문유필의 후손에서 갈라진 충익공파와 판도판서공파가 있다.[19] 문익점의 후손인 파는 헌납공파, 순질공파, 의안공파, 시중공파, 성숙공파이다. 이 파들을 충선공파(문익점의 시호)로 묶어서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