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나쎄(유다)

 


1. 개요
2. 즉위 이전
3. 즉위와 치적
4. 평가
5. 여담
6. 참고 문헌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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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원전 687~643. 성경의 등장인물로 남유다의 14대 왕.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모든 왕을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44년)였다.''' 성경에서는 므나쎄의 죄 때문에 야웨가 유다를 멸망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하면서 평생까임권에 당첨된 왕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시대의 흐름과 냉혹한 현실을 냉철하게 받아들이고 순응하여 피폐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세운 중흥군주'''로 평가받는다. 애초에 성경의 역사관(신명기적 사관)은 세속적으로 어떤 업적이나 치적을 남겼느냐보다, 얼마나 야웨를 충실히 섬겼느냐를 기준으로 삼아 그 왕의 치세를 평가한다. 따라서 실제로는 훌륭한 통치를 했던 왕이라 해도 야웨에게 순종하지 않았다면 악한 왕으로 낙인을 찍어 치적을 잘 묘사하지 않는다.[1]

2. 즉위 이전


아버지는 히즈키야였으며 할아버지는 암군 아하스였다. 아하스 시절에 유다 왕국은 북이스라엘과 아람-다마스쿠스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당시 중동의 패권국이었던 신아시리아 제국에게 신종하여 속국이 되었다. 그 대가로 주권은 제한되었지만 유다는 아시리아 제국에 편입되어 안전과 무역 확대와 같은 번영을 누렸다.
아버지 히즈키야의 재위 시절에는 형제 국가였던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게 완전히 멸망했고, 그 유민들이 유다로 대거 이주하면서 왕국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경제적 번영은 왕권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나라가 부강해지고 북이스라엘의 유민들이 몰려오면서, 당시 유다 전역에 만연해 있던 혼교주의[2]를 대신하여 야웨만을 섬겨야 한다는 일신주의와, 북이스라엘의 고토를 회복해 다윗솔로몬의 영광을 재현해야 한다는 민족주의가 격렬하게 타올랐다.
므나쎄의 아버지 히즈키야는 이러한 민족주의, 일신주의적 열망에 심취해 있었거나, 최소한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산당[3]에서의 제사를 금지시키고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종교적인 권위를 강화하는 한편, 아시리아가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반란에 휘말리자 이에 편승하여 아시리아의 종주권을 거부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큰 실수였는데, 아직 아시리아가 망할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시리아는 바빌로니아를 평정한 뒤 다른 반란세력들을 모두 때려잡고 유다 역시 다시 굴복시켰다. 이 과정에서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의 무자비한 약탈과 살육 아래 놓여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4] 결국 아시리아에게 개긴다는 히즈키야의 패기는 만용으로 드러났다. 왕국은 간신히 멸망을 면했지만, 왕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피폐해진 국토를 재건하는 무거운 짐이 남았다.

3. 즉위와 치적


히즈키야는 기원전 68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폐허가 된 왕국을 재건할 막중한 임무는 므나쎄에게 지워졌다. 즉위 후 므나쎄가 실시한 정책은 북왕국 고토를 되찾고 독립을 꿈꾸던 아버지의 정책과 180도 달랐다. 즉 '''아시리아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제국에 철저히 순종, 협력하여 떡고물을 얻어먹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매우 현실적인 정책이었다. 당시 아시리아는 센나케리브(성경에서는 산헤립이라고 나온다)-에사르하돈-아슈르바니팔로 이어지는 명군 라인이 이룩한 최후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출토된 아시리아의 기록에 므낫세는 아시리아의 왕을 도와 제국의 수도 니네베의 토목공사에 필요한 건축 자재들을 공급했던 속국 군주들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며, 충실히 공물을 바치고, 아시리아의 이집트 정벌에도 종군하는 등 철저한 친 아시리아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충성에 대해 아시리아 역시 확실히 보답했다. 아시리아는 유다가 바치는 공물의 양을 경감해 주었고, 이전과 같이 유다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바쳐야 하는 공물의 양이 줄고 평화가 찾아오자 국가 재건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파괴된 촌락과 도시들이 복구되는 한편 황무지 역시 개간되어 점차 경제는 회복되었다.
무엇보다도 므낫세의 친 아시리아 정책이 가져온 성과는 무역의 확대였다. 유다는 동지중해 페니키아 지역과 아라비아를 잇는 아시리아 제국 내의 무역로에서 중개지 역할을 도맡으며 번성하였다. 특히나 이 무역로의 가장 핵심적인 상품인 올리브유의 생산과 거래에서 유다의 역할은 매우 큰 것이었다. 올리브유의 주요 생산지였던 필리스틴(블레셋)의 도시 에크론에서는 유대인들의 제단이 발굴되었고, 예루살렘에서는 아랍 무역상들이 방문했음을 입증하는 고대 아랍어가 적힌 토기가 발굴되는 등,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 유다가 지중해-아라비아로 이어지는 올리브유 교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음을 증명하는 유물들이 많다.[5] 또 운 좋게도 므나쎄의 치세는 아시리아 명군 라인이 건재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44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아시리아 제국의 비호 아래에서 전란 걱정할 이유 없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경제 회복과 항구적인 평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그러나 철저한 친 아시리아 정책은 일신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의 엄청난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열왕기하에는 므나쎄가 성전에서 가나안의 토착신들 뿐 아니라 아시리아의 신앙인 일월성신(해와 달과 별들)을 섬겼다고 하는데, 이는 아시리아를 받들면서 그들이 섬기는 신들 역시 받들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속국의 왕이 대국의 신앙을 따르며 비위를 맞추는 건 고대에 흔히 있는 일이기는 했으나 야웨만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신주의자들에게 이러한 므나쎄의 정책은 종교적인 타락에 불과하였다. 또한 잃어버린 고토와 동족들을 회복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자들에게도,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철천지 원수 아시리아를 주인으로 떠받드는 므나쎄는 그야말로 매국노요 적국의 앞잡이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므나쎄를 위대한 아버지의 길에서 벗어난 배신자로 규정했다. 열왕기하 중 므나쎄 파트에서 므나쎄의 치세에 유혈이 낭자했다고 표현하는 것은[6] 이러한 일신주의, 민족주의자들이 므나쎄에 대항하여 싸운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히즈키야의 반 아시리아, 일신주의 정책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했던 유명한 예언자 이사야 역시 전승에 따르면 므나쎄 시대에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므나쎄는 기원전 643년에 죽고, 왕위는 아들 아몬이 계승했다.

4. 평가


'''정치적인 식견과 치적만을 따지자면 충분히 명군으로 꼽힐 수 있는 왕이었다.''' 잘못된 외교적 상황 판단으로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비판이 가능한 아버지 히즈키야와는 달리, 므나쎄는 철저히 현실적인 인물이었으며 아시리아의 흥성이 지속될 것임을 꿰뚫어보았다. 이러한 현실 감각에 기반한 외교적 판단을 바탕으로 므나쎄는 약소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강대국의 패권을 인정하고 그 아래에서 실익을 챙기는 것)을 했고, 히즈키야 시대의 전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복구하며, 오랜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신학자 에른스트 크나우프(Ernst Knauf)는 아예 대놓고 '''"좋은 왕이 그의 시대에 백성들에게 평화의 안전, 번영을 가져오는 왕이라면, 므나쎄는 유다의 가장 훌륭한 왕 두 사람 중 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7]
그러나 '''성경에서는 얄짤없이 악한 왕으로 단죄된다'''. 우선 므나쎄의 친 아시리아 정책으로 우상 숭배가 만연하여 야웨 일신주의가 흔들렸고, 민족의 고토를 회복하는 일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비슷한 이유로 까이는 북이스라엘의 왕들이야 워낙 근본부터 그런 놈들이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이건 아예 야웨가 직접 축복을 주었다는 '''다윗 왕조의 왕'''이 그랬으니... 그러다 보니 남유다가 멸망한 뒤 후대 사람들에 의해 "이놈이 야웨 하느님 안 믿어서 결국 하느님께서 폭발한 것임! 결국 이놈이 멸망의 원흉임!"이라고 까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열왕기서에는 모든 업적을 다 잘라버리고 나쁜 왕으로만 기록되어 있지만, 44년 간 유다를 다스렸다는 기록도 남긴다. 이게 특이사항인 것이, 성경에는 왕이 하느님을 잘 섬겨야 오랫동안 즉위를 누릴 수 있다고 나온다. 그런데 므나쎄는 긴 치세를 누렸다고 적은 것은 그가 신앙과는 별개로 나라를 잘 이끌었던 왕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8] 역대기에는 시련을 겪고 하느님께 회개해서 남은 치세를 누리다가 갔다.[9]
후대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이후 아시리아가 빠르게 쇠퇴하면서 므나쎄의 손자 요시야[10] 치하의 남유다가 독립을 달성하고 지역 패권국 노릇을 해보려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므나쎄가 재건해준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가장 선한 왕 중 하나로 띄워주는 요시야가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악한 왕으로 낙인 찍힌 므나쎄였던 셈.

5. 여담


역대하에서도 야웨를 섬기지 않는 폭군으로 나온다. 그러나 끝까지 악인으로 묘사되는 열왕기와는 달리, 여기서는 모종의 이유로 아시리아에게 잡혀간 뒤 회개하여 그 뒤부터 야웨를 섬겼다고 한다.[11] '''분열왕국의 왕들 중 유일하게 갱생한 왕이다.''' 정작 아시리아의 기록에는 므나쎄를 포박해서 잡아갔다는 내용이 없으며, 역대기는 대체로 열왕기보다 후대에 작성된 사료라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일화로 여겨진다. 다만 잡혀가지는 않더라도 치세 도중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 조공을 바치러 간 기록은 있는데 그걸 곡해한 것으로 보인다.
열왕기하의 기록에 따르면 자식을 몰렉에게 인신공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6. 참고 문헌


Finkelstein, Israel and Silberman, Neil A. The Bible Unearthed: Archaeology’s New Vision of Ancient Israel and the Origin of Its Sacred Texts. New York: Free Press, 2001. p243-250
Gallagher, William R. Sennacherib’s Campaign to Judah: New Studies. Leiden, Bostom: 1999.
Grabbe, Lester. “The Kingdom of Judah from Sennacherib’s Invasion to the Fall of Jerusalem.” Good Kings and Bad Kings. Kings and Bad Kings. Edited by Lester Grabbe, 2005.
Knauf, Ernst A. “The Glorious Days of Manasseh.” Good Kings and Bad Kings. Edited by Lester Grabbe, 2005
van Keulen, P. S. F. Manasseh through the eyes of the Deuteronomists : the Manasseh account (2 Kings 21:1-18) and the final chapters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Leiden ; New York: E.J. Brill, 1996.
[1] 북이스라엘 왕국의 최전성기를 구축한 오므리아합, 그리고 최후의 중흥군주인 여로보암 2세를 야웨를 잘 섬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악한 왕으로 까는 것이 좋은 예다.[2] 가나안의 토착신과 야웨를 함께 섬기는 행위를 이야기한다. 최근의 연구를 보면 아예 초기 유대교는 야웨를 주신으로 섬기는 다신교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대놓고 '''야웨의 아내 아세라(본래는 엘의 아내)'''라는 글귀가 적힌 유물이 발굴되기도 하고.[3] 지방에서 각기 지방신을 섬기는 사당.[4] 성경에서는 열왕기하나 역대기하 모두 아시리아의 18만 대군이 야웨가 보낸 천사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몰살당하고 히즈키야가 승리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역사적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엄청난 공물과 영토를 할양하고 전 국토가 약탈과 살육으로 쑥대밭이 난 뒤에야 겨우 멸망을 면했다고 한다. 사실 멸망을 면한 것만 해도 매우 운이 좋은 케이스인데, 아시리아는 반란을 일으키는 속국에게 잔혹하기로 유명했다. 북이스라엘도 히즈키야와 정확히 같은 테크를 타서 멸망했다. 이러한 주장에 일부에서 반론을 제기하기는 하지만, 히즈키야가 항복을 했냐 안했냐의 문제일 뿐 학계의 정설은 예루살렘을 제외한 나머지 유다 전역은 아시리아의 약탈과 살육으로 폐허가 되었다는 것이다.[5] 심지어 일부 학자들은 므나쎄의 왕비가 아랍인이었을 것이라는 가설도 제기한다.[6] 므나쎄는 나의 눈에 거슬리는 그 못할 짓을 하도록 이끌어 유다 백성을 죄에 빠뜨린데다가, 무죄한 사람의 피마저 흘려 온 예루살렘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열왕기하 21장 16절, 공동번역성서)[7] 다른 한 명은 헤롯 대왕이다![8] 사실 재위기간이 길다고 마냥 명군인 것은 아니다. 그래도 어쩄거나 많은 업적을 남기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불가피하고 그러려면 재위기간이 길어야 한다.[9] 참고로 흥미롭게도 므나쎄의 아버지인 히즈키야도 손자인 요시야도 야훼 신앙 진흥에 힘썼다. 특히 요시야의 경우, 성경에서는 남유다 최후의 선한 왕이자 다윗과 같다고 평가받으며 심지어 선조 대대로 야훼를 제대로 안 믿은 왕이 대차게 까이는건 물론이고 아무리 야훼를 깊이 믿어도 야훼의 뜻에 거슬리는 일을 하면 까이는 반면 요시야만큼은 아무런 비판이 없고 오히려 므나쎄의 행적으로 인해 야훼가 멸망시키려던 유다 왕국을 적어도 요시야 대에는 멸망시키지 않으려고 한 것이 요시야 덕이라고 할 정도[10] 처음부터 악을 행하다가 나중에 하나님께 회개하고 개심한 할아버지와는 정반대로 이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와 더불어 성경에서 남유다 최후의 선한 왕으로, 야웨를 매우 신실하게 섬기던 왕으로 평가된다. 성전에서 율법서(신명기의 원형으로 추정된다)를 찾아내(실제로는 이 시기에 편찬한 후 모세가 쓴 책을 이제야 찾아냈다는 명분으로 공표했을 것으로 본다) 종교 개혁을 이끌었고, 아시리아가 빠르게 국가 멸망 테크에 접어들면서 독립도 이루고 영토도 확장해보고 하다가, 아시리아를 대신해 중동 패권국으로 떠오르던 이집트에게 관광당하고 어이없이 사망하는, 증조부 히즈키야와 거의 비슷한 테크를 타고 유다 멸망의 단초를 열었다. 다만 이집트보다는 신바빌로니아에 붙는 게 국가 보존에 더 좋을 것이다라는 외교적 판단으로 행한 행동이며 결과론적으로 친 이집트 왕이 즉위해서 멸망한 유다의 역사를 보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집트를 막을 대책에 대하여 전무했다는 점은 있다. 아무튼 핑켈슈타인 같은 학자들은 아예 요시야 시대가 현재 유대교의 기틀이 잡히는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11] 므나쎄가 회개하면서 기도했다는 기도문인 므나쎄의 기도 문헌도 있다.(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