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이름'''
히브리어: דוד בן ישי (다비드 벤 이샤이)[1]
아랍어: داوود‎ (다우드)[2]
영어: David (데이비드)
'''출신'''
유다 지파 소속
'''출생지'''
가나안 베들레헴
'''재위년도'''
기원전 1010년~기원전 1003년
약 7년 (유다의 왕)
기원전 1003년~기원전 970년
약 33년 (이스라엘의 왕)
'''사망지'''
이스라엘 왕국 예루살렘
'''왕릉'''
이스라엘 왕국 다윗성
'''아버지'''
이새
'''가족관계'''
아내: 미갈, 아히노암, 아비가일, 마아가, 학깃, 밧세바 등
아들: 암논, 길르압, 압살롬, 아도니야, 솔로몬
딸: 다말
손자: 르호보암
증손자: 아비얌
고조손자: 아사
'''이전 국왕'''
사울, 이스보셋
'''다음 국왕'''
솔로몬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그에 대한 논란
2.2. 출세의 시작
2.3. 사울에게서 도망다닌 시기
2.4. 왕으로의 즉위
2.5. 압살롬의 반란 시기
2.6. 그 이후
2.7. 노년과 왕위 이양
3. 평가 및 의의
4. 다른 문학작품과의 연계성
5.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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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사울이스라엘 왕의 자리에서 파면시켰다고 해서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만 하고 있을 셈이냐?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길을 떠나거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에게로 보낸다. 그의 아들 가운데서 내가 으로 세울 사람을 하나 보아두었다.'''"

 

...(중략)...

 

'''이새가 사람을 보내어 데려온 그는 볼이 붉고 눈이 반짝이는 잘생긴 아이였다. 야훼께서 말씀을 내리셨다. "바로 이 아이다. 어서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공동번역성서, 사무엘상 16장 1~12절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이 넘치옵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공동번역성서, 시편 23편 1~6절[3]

이스라엘 왕국 제 2대 왕으로서 40년간 통치하였으며 이스라엘 왕국을 통일시키고 오랜시간 평화를 이룩한 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다. 목동, 음악가, 시인, 군인, 정치가, 예언자, 왕이였으며 유대교의 토대를 다지고 종교적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통합시키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또한 성서에서도 다윗의 왕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가 출현할 것이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야훼의 신임을 받은 왕이다.[4] 다만 밧세바라는 여자 문제로 말년은 쓸쓸하고 후세는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5]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그에 대한 논란


이스라엘 12지파 중 '''유다 지파''' 소속이며, '''어린 시절에는 양치기''' 일을 했다. 그가 성장하던 시기는 이스라엘이 부족들의 집합에서 왕조 국가로 바뀌는 시점이었으나, 초대 왕이었던 벤야민 지파의 사울은 히브리 율법과 예언자들의 조언을 무시하면서 종교 세력과 마찰을 빚은 데다가,[6] 새로이 나타난 해양 민족 필리스티아(불레셋)와의 싸움에도 패하여 인망을 잃었으며, 여러 가지 안 좋은 상황에 마음의 병까지 앓고 있어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중 권위가 있었던 '''예언자 사무엘에 의해''' 일개 양치기 소년이었던 다윗이 '''차기 국왕으로 선택'''되었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아래의 논란을 읽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사실들이 있다. 먼저 고대에는 남성 성인만이 사회적 활동을 하고 사회적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집안에서 재산과 가족에 대한 가장의 권위는 '''절대적'''[7]이었다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에 대한 처분[8]도 가장의 권한이었다. 셋째로 장남은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이 될 사람으로 집안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사무엘이 아들들을 데려오라고 했을 때 성인이 아닌 다윗을 뺀 것이나, 아버지가 안계신 자리에서 장남이 '어린아이'[9]인 다윗이 맡겨진 일을 두고 놀러 온 것에 대해 혼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무엘의 명령에 거스르는 이새의 태도 또한 후대의 포도원을 달라는 이스라엘 왕 아합의 명을 거스르는 나봇의 태도로 볼 때 특이할 점이 없었다. 고대사회를 현대적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혼동들이다.
다음은 다윗이 이새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들이다.
  • 1. 콩가루 같은 다윗 집안
  • 2. 사무엘이 아버지 이사이에게 "네 아들 다 데려와라" 라고 했을 때 형들과 달리 다윗은 양을 치며 그대로 외면되어 있었고
  • 3. 맏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하는 말에서 정상적인 형제 관계라고 볼 수 없는 서술(사무엘상 17:28)[10]
  • 4. 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야훼께서는 나를 거두어주실 것입니다.(시편 27:10, 공동번역성서) 라는 다윗의 서술 존재와
  • 5. 다윗의 여색과 자녀 양육이 있다.
첫 번째의 근거는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가족들에 대한 설명이다. 사무엘하 17장 25절에서 ''''스루야의 아들'''' 이라는 서술이다.

압살롬은 요압 대신 아마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그 아버지의 이름은 이드라였다. 그런데 그는 요압과 이종간으로 그 이모의 이름은 스루야였고,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가일이었으며 외조부의 이름은 나하스였다.

사무엘하 17:25 (공동번역 성서)

성경에서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족보는 '아버지의 자녀'[11] 또는 '가문의 유력한 사람의 형제'[12]로 서술을 한다. 다윗의 형제들은 다 ''''이새의 아들'''' 이라고 서술하는 데 비해 요압, 아비새, 아사헬, 아마사 같은 다윗의 조카들은 아버지가 아닌 이새의 딸 '스루야'의 기준으로 서술되어 있고 스루야를 ''''이새의 딸''''이 아닌 ''''나하스의 딸''''[13]로 서술하고 있다. 이로 가정할 수 있는 사실은 스루야는 이새의 피를 잇지 않았고, 이새는 나하스의 아내였던 여자를 데리고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요약하자면 나하스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이새의 아들들'''을 낳지 않았고, 이새의 아내는 최소 둘 이상이었으며, 이후 스루야의 가계 인물들에 관한 서술로 보아 스루야를 위시한 영향력이 최소 다윗의 대부터 크게는 많은 유다인에게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무엘의 명령을 거역하는 이새의 태도. 이스라엘 부족 연맹의 영도자가 한낱 깡촌의 지방 유지를 방문한 상황에서 사무엘의 권위를 거스르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내아들 다윗을 부르지 않은 이새의 태도를 보면 다윗을 크게 신경쓰지 않은 느낌이다. 이를 토대로 보면 이새는 다윗이 자기 아들이라는 인식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으로 사무엘 호출 문제는 전통적인 유목이나 농경사회에서 성인식[14]를 치르지 않은 소년의 사회적인 위치는 매우 낮은 게 보통이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통상의 막내자식이면, 그것도 성인 의식을 거치기 전이라면 대개 집 부근에서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위치이고, 베들레헴이 비록 깡촌이라고는 하나 이새는 그 지방의 유지이고 보아스[15] 때부터 물려받은 그런 재력이면 차라리 농사일을 시킬지언정 굳이 막내아들을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상대적으로 천시나 받는 양치기로 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근거로는 골리앗을 상대할 무렵, 전쟁에 나간 세 형을 방문했을 때, 다윗의 의분을 듣고 엘리압이 다윗을 대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다. 다윗을 대하는 태도가 친형제라고 보기에 너무 강경하다는 점이다.

다윗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큰 형 엘리압이 엿듣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가 무엇을 하겠다고 여기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양 새끼는 누구한테 맡겼지? 이 건방진 못된 녀석, 네가 싸움 구경하러 온 걸 모를 줄 아느냐?"

사무엘상 17:28 (공동번역 성서)

공동번역성경의 어감으로는 나이 든 맏형이 아직 철부지 꼬마같은 동생을 단순히 나무라는 식의 다소 완곡한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원문의 뉘앙스를 그대로 옮기기는 어렵다는 점은 감안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사무엘상 17:28 (개역개정판)

개역개정판에서는 정말 서출에게나 할 만한 독설을 퍼붓는다. 이를 토대로 한 근거에 대반 반박 역시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 다윗의 현 상황을 서술하는 구절과 비교, 분석해보면 명확해질 것이다.
골리앗이 참전한 전쟁 이전에 사울이 다윗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면 당시 다윗은 생각보다 유명인이었다. 사울의 악사 겸 무기 관리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의 천거로 들어갔기 때문이다.[16][17] 이 배경을 가지고 보게 되면, 어느 정도의 공신력이 이미 다윗에게 있었음에도 다윗을 걱정한다기보다 무시하고 있는 뉘앙스가 충분히 공동번역에서도 묻어난다. 그런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전쟁 중에 진지로 몸소 찾아온 동생에게 형이란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다는 말이 그렇다면 집안에서 다윗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대략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고 시편에서의 다윗의 심경 서술이 있다.

"이 몸은 죄 중에 태어났고,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습니다."

시편 51:5 (공동번역 성서)

이 구절이 태어나기 전부터 짊어지게 되는 원죄를 의미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해석에 따라서는 다윗의 어머니가 이새의 정실부인이 아니었고 이새와의 불륜을 통해 다윗을 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야훼께서는 나를 거두어주실 것입니다."

시편 27:10 (공동번역 성서)

확실히 이것 하나만 보고 다윗이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았다는 서술이라기엔 비약이라는 의견이 있으니 이 부분은 뉘앙스와 번역의 차이로 생길 수 있는 소지가 있음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문제는 다윗의 삶에 대한 서술에서 실제로 그러했던 뉘앙스가 강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다윗의 삶에서 나타난 심리학적인 분석. 많은 발달심리학자들은 어린 시절에서의 경험이 성인이 되어서도 큰 영향을 주며, 그러한 성향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부모가 되어서 자녀에게 그대로 대물림한다고 이야기한다. 가정에서 어머니의 부재는 남아의 성장 과정에서 이성에 대한 경험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나중에는 성적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을 높인다. 그리고 위축되고 고립된 환경은 의존적, 내성적인 성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고, 자녀교육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대물림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서술은 없지만 다윗은 최소 아내 5명에 후궁 10명에 동녀 1명을 두었다. 왕이 되면 일부다처와 축첩이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다윗이 밧세바와의 불륜을 저질렀을 때, 그 남편은 자신의 37충복 중 하나인 우리아였다. 다윗과 우리아의 관계가 멀지 않았고, 추측상 우리아-밧세바 부부가 신혼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그리고 일평생 다윗은 내성적인 성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평생을 유다와 기타 이스라엘 지파들의 눈치를 보았고, 요압에게 일평생 휘둘렸으며 말년에는 아들 솔로몬에게 의존하며 복수를 부탁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식 교육에 있어서는 방임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압살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는 다윗의 어린 시절 가정 환경과 심리학 이론을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딱히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런 다윗이지만 흥미로운 기술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사자에게서[18] 들을 지키곤 했다. 현대 사회에서 양치기는 언뜻 생각하기에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이미지이지만, 고대 사회에서 '''양치기매우 힘들고 고되고 목숨마저 위태로운 직업'''이었다. 양들을 데리고 산과 언덕을 돌아 다니느라 운동량이 격하게 많았고, 성경의 언급에 의하면 산과 들에 맛있는 양을 노리는 '''맹수'''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고대의 양치기는 매우 건장하고 강인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 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다윗의 이미지는 작고 나약한 소년이 아니라 야생에서 단련된 '''강인하고 굳센 청년'''이었을 듯하다.[19] 그렇다고 해서 꼭 헬스 트레이너마냥 우락부락하고 거대한 남성의 이미지를 생각할 것만도 아니다. 단련되었다고 해도 마초화랑, 악진, 잔 다르크 등의 예를 생각해 보자. 게다가 실제로 그의 용모는 "혈색이 붉고 눈이 반짝이는 잘생긴 아이였다."[20]고 묘사되는데, 그 미모 덕에 사울 왕의 시종이 된다.
그리고 양치기 일을 하면서 꽤나 슬링을 잘 사용했던 것 같다. 양치기들이 슬링을 사용하는 묘기를 보이는 동영상을 보노라면 다윗의 이야기는 마냥 허풍은 아닌 듯.
  • 다윗의 출생에 대한 논란에 반대되는 근거는 이렇다.
    • 1. 먼저 장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삼상15장28절의 사무엘이 사울왕의 왕권이 상실되었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새로운 왕을 세우리라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퍼졌다는 것이다. ( 사무엘이 베들레헴을 방문했을 때, 두려움에 떨었던 장로들) 즉 어쩌면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와서 자신들을 불렀을 때, 자기 아들들 중 장자 엘리압을 가장 유력한 차기 왕후보로 보았을 수도 있으며, 엘리압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선지자 사무엘도 엘리압을 보고 삼상16장6절...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라고 오해하기도 할 정도...)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들에서 양이나 치던 막내아들 다윗에게 하느님의 왕의 계시(기름부음)를 받자 놀랐을 것이고. 집에서 가장 존귀한 자로 여겨졌을 엘리압의 권위가 깎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즉 다윗이 왕이란 신분으로 생각하면 엘리압은 큰 형이지만 다윗의 종이 된다는 뜻이다. 이는 엘리압이 아직 왕권을 확립하지 못한 양치기 동생을 볼 때마다 심기가 불편했을지도 모르며, 이 사건을 통해서 엘리압이 다윗에 대한 편견으로 '교만'함을 꼬집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다윗이 양치기로 있었을 이유는 이스라엘의 재산분배 제도에 있다. 성경 사무엘상에서는 다윗이 엘라골짜기로 형들의 안부를 물으러 갈 때, 양치는 자들에게 맡겼다고 나와있다. 이스라엘은 장자가 2배의 몫을 취하고 나머지 형제들이 나눠 분배받는 재산 분할 제도가 있었다.
이새의 아들들이 다윗까지 합쳐서 8명이었고 '스루야의 아들들'인 다윗의 조카이자 부하들이 다윗보다 더 많은 나이대이거나 비슷한 나이대임을 생각했을 때,(요압, 아비새, 아사헬) 다윗의 형들과 다윗의 나이차가 꽤 났다는 것과, 이미 가정을 꾸릴 정도로 장성한 형들은 어느 정도 재산을 분배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다윗이 자신의 분깃을 얻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이새의 할아버지인 보아스는 큰 부자였고 토지 즉, 농경을 하였다. 다윗이 농사일이 아니라 양을 쳤다는 것은, 토지를 분배받지 못했기에 축산을 분깃으로 삼았을 수도 있다.)
  • 2. 시편27편을 통한 다윗이 이새의 다른 부인을 통한 자식이라는 주장이 아닌 것에 대한 근거는 이렇다. 시편27편에는 (2절)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절)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라는 표현을 통해서 다윗이 이 시편을 지었을 때의 상황이, 사울 왕에게 쫒기는 시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사울에게 쫒기는 당시,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은 아무런 사정도 모른채, 급히 도망쳐와 배고픈 다윗에게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하느님께 드린 후에 물려진 빵)을 주어 먹게하고, 다윗이 잡았던 골리앗의 검(당시에 동기, 금속제 병기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즉 무기를 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울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사건이 있음을 통해서 다윗이 성읍이나 마을에 거주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생기는데, 즉 이때 다윗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기위해선 사울에게 밀고하거나 모른척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배경이 있어서 다윗의 친족이나, 부모님조차 다윗을 모른척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나중에 가족들이나 도망쳐온 사람들이 다윗에게 찾아오지만, 이 후의 일이고 다윗이 도망자로 지냈던 세월이 7년이 넘는 것을 상정한다면 족히 몇년간은 의절당했을 수도 있다.)즉 이런 상황배경에서 지었던 시편이기에 이 구절이 다윗의 서자출생을 암시하는 자료로는 매우 근거가 들어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3. 그리고 골리앗을 다윗이 죽이지 않았다는 오해(?)에 대한 근거로는 일련의 사건들과 인과관계를 조금만 알면 알 수가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침을 통해서 일개 악사였던 다윗이 사울과 그의 신하들의 눈에 들었고,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로다'라는 여인들의 노래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사울이 다윗을 결정적으로 시기하게 되었다.(즉 사무엘을 통해 사울의 왕권 상실과 이웃에게 왕권이 갈 것이라는 이 예언이 확실하게 사울에게 각인되는 사건이었다.)
또한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의 수하로 있을 때,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시에 동족을 칠 위기에 처한 다윗을 구하는 하느님의 은혜가.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로다'라는 것을 가드 장수들이 친히 춤으로 묘사함을 봤을 때, 골리앗과 다윗이 싸웠던 사건은 블레셋에서도 큰 사건이었고 동일하게 파악했다는 것이다.
또한 다윗이 사용한 무릿매는 실제로 고대에서는 강력한 무기였다.(숙련자가 가공된 탄환. 납탄이나 돌 등을 사용했을 때 최대 사거리는 200~400m... 또한 투구를 관통한 사례도 있다고...) 성경에서도 다윗이 물가에서 돌을 골랐다는 표현이 있으며, 또 물매질 하여 돌로 골리앗을 사살했다기 보다는 정확하게 하자면, 물매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다윗의 손에 칼(금속 병기)이 없었기에 골리앗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베었다고 나와있다.
또한 다윗이 나오는 성경 시대에는 대표적으로 5명의 거인 골리앗과 그의 가족들이 나오는데, 이 모든 거인이 다윗의 손과 다윗의 부하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숫자 5는 연합국이었던 블레셋(가사, 가드, 아스돗, 에글론, 아스글론)을 나타내는 상징수이기도 하며 금속병기를 가진 강대한 해상전투민족(바이킹과 비슷한?)을 완전히 제압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지, 다윗의 부하들이 골리앗을 잡았다는 표현은 그 어느 구절에도 없다.

2.2. 출세의 시작


키노르[21] 연주와 노래에 능했으며, 그 실력이 왕실까지 알려져 사울 왕의 전속 악사 겸 가수로서 궁정에 발을 디딘다. 그러다 블레셋(필리스티아)의 '''거인 전사 골리앗과의 싸움'''에 뛰어들어 투석구로 돌을 날려 이마 정중앙을 맞춘 다음 그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벰으로써 가수가 아닌 영웅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골리앗을 죽인 것이 다윗이 맞느냐 하는 것은 성경 내부의 구절들의 상호모순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사무엘기 상권 17장 49절~50절을 보면 분명 이새의 아들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였다는 설도 있다. 죽은 사람은 하나인데 죽인 사람이 둘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합리화하기 위해 후대에 기술된 역대기 상권 20장 5절에는 베들레헴 야이르의 아들 엘하난이 죽인 것은 골리앗의 동생 라흐미였다면서 뜬금없이 골리앗의 동생을 출현시킨다. 골리앗의 죽음과 그를 죽인 이에 대한 전공 자체에 대한 서로 다른 3가지 구절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엘하난 항목 참조.
어쨌든 이후로도 다윗이 이스라엘군의 장군으로 공을 세워 나가자 그를 칭송하는 열기가 높아졌고 사울 이상으로 인기를 끌자,[22] '''질투와 왕위에 대한 불안감을 가진 사울'''이 공주와의 결혼을 빌미로 그를 위험 지역에 보냈지만 오히려 요구한 공보다 더 '''큰 공을 세워 왕의 사위가 되었다.''' 이 시기에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s-2.1과 매우 친한 사이'''가 된다.[23]
그 사이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에게 반했고,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결혼지참금으로 '''블레셋 사람의 포피(혹은 이마껍질) 100개'''를 요구하자 다윗은 부하들과 함께 200개를 까다(…) 바치면서 미갈을 얻는다.

2.3. 사울에게서 도망다닌 시기


[image]
사울은 사위인 다윗 암살에 대해 과도한 집착증을 가졌다.
사울은 위 그림처럼 실제로 다윗에게 창을(!) 날린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더 문제가 되어 결국 그가 왕위를 노릴 것이라는 불안감과 질투에 '''사울은 다윗의 암살을 시도'''하고, 사울의 딸 미갈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도움으로 여기서 도망친 다윗은 사울 반대파를 규합하여 '''여기저기 도망다녔다.''' 이때 사울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해 죽일 기회가 2차례 있었으나 '''"하느님께서 세우신 자를 내가 죽일 수 없다"'''고 하며 각각 옷자락, 물병, 창만을 가지고 돌아간다.[24][25] 이것을 증거로 사울에게 "당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 하자 사울이 감복하여 돌아가는 일도 있었으나, 여전히 사울과의 관계는 앙숙. 이후 아예 유대 땅을 떠나 필리스티아와 아말렉 등이 맞닿아 있는 국경 지대에서 일종의 용병으로 지내게 된다.
이때 자기를 푸대접한 나발이라는 사람을 죽이려 하다가[26][27][28] 다행히도 그의 아내인 아비가일의 빠른 대응과 설득으로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29] 한편, 나발은 자기 집에서 주지육림을 벌이며 먹고 마시던 중, 자신에게 쳐들어 오던 다윗을 부인이 말렸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심장발작이 일어나다가 열흘쯤 뒤 하느님이 그의 숨통을 끊었다. 이에 다윗은 과부가 된 아비가일을 데려다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첫 부인이었던 미갈은 왕궁에서 다윗을 도망시킨 후 사울에 의해 다른 남자와 재혼한다.
이후 다윗은 적국 블레셋에 피신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도 죽을 뻔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피신 당시 다윗은 블레셋의 영웅이었던 골리앗을 죽일 때 썼던 칼을 차고 있었는데, 이것이 블레셋인들의 어그로를 끌어 신하들 앞에 끌려가게 된 것. 이 때 다윗은 수염에 침을 흘리고 미친 척을 하고, 아기스 왕은 "나한테 미친 놈이 모자라서 이런 놈을 데려왔냐?"며[30] 역정을 내며 쫓아내 다윗은 목숨을 건진다. 필리스티아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 잠시 신변을 맡기고, 국경지대에 위치한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받게 되어 가족 및 가신들, 휘하 용병단을 이끌고 이주한다. 이후 블레셋과 사울 왕가의 전쟁에 참전할 상황에 처했다. 식객 신세인 다윗은 거절할 수 없어 반쯤 끌려가 동족상잔의 비극을 벌일 뻔 했으나[31] 다윗을 경계하던 필리스티아의 신하들이 이스라엘과의 양동작전을 이유로 크게 반대하여 다윗의 참전은 없던 일이 된다. 그때만을 기다리던 다윗은 그 길로 블레셋을 빠져나와 시글락으로 향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동족상잔의 침극을 피하게 하셨다"라며 찬송한다. 그러나 와보니 시글락은 이미 폐허가 되어 가족들이 납치된 상태였고, 가족을 잃었다는 현실에 절망한 부하들에게 돌로 맞아죽을 뻔했지만,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버려진 이집트인 노예의 안내를 받아 납치된 사람들을 구하러 출격해 유다 백성들을 도와주었다. 이윽고 침입자들과 싸우고 이긴 뒤에 전리품을 나눠주는 행동을 함으로써 결국 엄청난 유다인들의 지지 속에서 시글락 및 주변 필리스티아 주변의 땅을 가지고 유다로 귀환한다.
상황을 수습하던 중 한 패잔병에게 사울 왕과 요나단을 포함한 세 아들들이 블레셋에게 패배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사울과 요나단을 추모하는 시를 짓는다. 그 소식을 전한 병사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고 질문에 병사가 사울 왕이 블레셋 놈들에게 죽느니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길래 그 말대로 했다고 대답하자 다윗 왕은 하느님의 사람을 죽였다며 그 병사를 처형한다.[32][33] 결국 다윗은 전사한 사울과 요나단을 추모하고, 유다 지파의 왕으로 등극한다.

2.4. 왕으로의 즉위


사울 왕이 필리스티아와의 전쟁에 패하여 아들들과 함께 전사하자, 유다로 복귀하여 헤브론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반면 사울의 마지막 남은 아들인 이스보셋[34] 역시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어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내전 상태가 되나, 다윗을 지지하는 유다 지파의 인구가 많고 다윗 자신의 명성이 높아서 점차 사울 왕가 지지세력은 힘이 약해지면서[35] 결국 이스보셋의 측근 아브넬의 전향 및 암살, 이스보셋의 암살로 완전히 붕괴하고 만다.[36][37][38] 성궤를 다윗 성으로 가져온 뒤 기쁨에 겨워 춤추다 맨몸을 노출시켰다는 사건의 후일담대로, 다윗은 자신의 전처이자 사울의 딸인 미갈과 동침하지 않음으로써 '''사울의 피를 받은 아이가 왕가에 후계자로 들어오는 걸 원천적으로 막았다.'''
참고로 이 미갈과의 관계는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사건이다. 원래 미갈은 그 오빠인 요나단과 마찬가지로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부왕 사울의 살해 위협에서 다윗을 도망치게 하기 위해 자기 자신까지 위험할 수 있는 일들을 벌였다. 다윗 또한 그녀를 얻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를 벌여서 사울에게 포피를 바쳤었고, 그래서 자신이 그녀의 정당한 남편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왕위에 앉자마자 미갈은 자신의 사람이라고 확증하며 왕궁으로 불러들인다. 문제는 사울 왕이 다윗이 미갈과 헤어진 이후에 그녀를 개가시켰다는 것. 다윗은 도망치던 당시 미갈을 데리고 도망치는 대신에 혼자서만 도망쳤으며 이후 두 사람의 연락은 두절되었다. 미갈이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한 건 사실이지만 10년 가까운 도피생활 동안 남이나 다름없게 되었고 그 사이 다윗은 새로운 아내를 두 명 이상 맞아들였으며, 그 소식을 미갈이 접하지 못했을 리도 없었다. 부왕의 명령으로 그녀 또한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된 상황이었는데 문제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남편을 죽이려 한 아버지에게 있다 할지라도, 그녀는 전 남편의 명령으로 다시금 후궁으로 불러들여가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미갈이 다윗의 궁으로 가는 길목까지 그녀의 현 남편은 울면서 따라오다가 다윗의 신하가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게 하자 결국 되돌아갔다는 기록이 성경에 분명하게 있으며, 이는 미갈과 그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음을 추측케 한다. 그런데 미갈이 돌아온 왕성에서 그녀의 신분은 폐출된 것이나 다름없는 전 왕의 딸이자, 다윗의 다른 왕비와 후궁들보다 아래가 되었으며, 그녀를 다시 데려오도록 명한 현 남편 또한 그녀에게만 충실한 그때의 인물은 아니었다. 즉 다윗과 미갈이 헤어진 이후로 그들 각자가 겪어온 삶의 길이 있었고, 미갈의 입장에서는 다윗에게 예전처럼 사랑으로 반응할 수 있는 심적인 힘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을 수도 있다.
통합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여부스 인의 영토였던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다윗성을 쌓고 지방을 전전하던 성궤를 옮겨와 정치적, 종교적인 수도로 만든다. 또한 필리스티아 등 주변 민족들을 여러 차례 격파하여 복속시키기에 이른다. 그렇게 다윗의 통치로 통합 이스라엘 왕국은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얼마 가지 못한다. 동쪽 암몬에서 새 왕인 하눈이 즉위하자 다윗이 선왕 나하스를 조문하기 위해 사신들을 보냈는데, "조문하러 온 게 아니라 정탐하러 온 거다"라는 휘하 관리들의 말을 믿어버린 하눈이 사신들을 잡아 '''수염을 반이나 깎아버리고 바지의 엉덩이 부분을 도려내 돌려보낸 것이다.'''[39] 거기에 모자라 약 3만 3천여 기의 군사를 출동시켰다는 전갈이 오자 분노한 다윗은 돌아온 사신들을 여리고로 보내 수염이 다시 자랄 때까지 은둔하게 한 뒤 요압과 아비새에게 정예군사들을 붙여 암몬 족을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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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에서 부하들도 성궤도 그 전쟁터에서 암몬과 싸우고 있던 어느 날, 늘어지게 낮잠자고 일어나서 궁 위 옥상에서 산책을 하던 다윗은[40] 자기 집 마당에서 목욕하던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 한 눈에 반하여 그녀를 궁으로 데려와서 NTR을 시행했고 그녀의 남편이자 자기에게 충성하던 군인 우리야를 모략으로 전사하게 한 사건'''을 일으킨다.
정확히는 자신과의 불륜으로 밧세바가 임신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야에게 이실직고하는 대신에, 그를 전쟁터에서 불려들여 아내와 동침하게 해서 불륜을 감추려고 하는 꾀를 쓴다. 그렇지만 충직한 군인 우리야는 '하느님이 세우신 우리 왕 다윗과, 그 왕의 종인 제가 왕의 군인이자 저의 전우들이 전쟁터에서 구르고 있는데 혼자서 편안히 아내와 함께 휴가를 보낼 수 없습니다'라며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41]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야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했는데도 우리야가 집에 돌아가지 않고 병사들과 같은 막사에서 잤다. 꾀에 걸려들지 않는 우리야를 전전긍긍하던 다윗은 결국 우리야 본인의 손을 거쳐 전장에 있던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 이 편지를 가지고 온 우리야를 가장 위험한 전장의 선두에 세우라 명령하여, 그 충직한 신하이자 장수인 그를 대적자의 손을 빌어 끝내 살해하는 데 성공한다. 이에 남편의 죽음을 듣고 흐느껴 울던 밧세바를 그 상이 끝나자마자 왕궁으로 데려오게 한 것은 덤.
이러한 다윗의 행위를 더 말이 필요 없는 범죄로 본 '''하느님은 예언자 나단을 보내 다윗을 제대로 꾸짖었다.'''[42] 나단은 다윗에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날 손님이 오자 부자가 자기의 넘쳐나는 대신 가난한 사람의 하나뿐이자 그가 사랑하는 딸같은 어린 암양을 잡아다가 자기 손님에게 대접했다'는 비유를 들려주었고, 이야기를 듣던 다윗은 길길이 화를 내며 그 일을 행한 사람에게 4배를 배상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나단은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며 일침을 놓고, 우리야를 속이고 그 아내를 빼앗고 결국에는 그를 죽이기까지 한 이 죄를 묵과하지 않으신다고 천명한다. 또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일로 태어난 아이가 죽을 것이며 '''칼이 다윗의 집안에서 떠나지 않을 것[43]'''이라는 저주를 전했다. 여기에 더해 다윗의 처들이 NTR 당할 것인데 너는 비밀스럽게 했지만 는 백주(대낮)에 할 것이라는 무서운 예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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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그제서야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쳤지만, 예언대로 다윗은 죽지 않지만 밧세바가 출산한 아기가 큰 병에 걸리고 만다. 그 아이를 위해 침식을 금하고 하느님께 기도했음에도 결국 그 아이는 하느님 품으로 가 버렸고, 그 말을 전해듣고 다윗은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인 뒤 목욕하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왕이 그 비보를 듣고 더 심하게 망가질까봐 전전긍긍하던 신하들은 이를 보고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다윗은 아기가 죽기 전에는 이렇게 열심히 간구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이를 살려주실까 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대답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행하리라는 것을 받아들인 상태인 것. 그리고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와 동침한다. 그 후 다윗은 '''밧세바에게 다른 아들을 얻는데 그가 바로 솔로몬'''이다. 솔로몬도 초기엔 아버지처럼 정치를 잘했지만 말년에는 각종 우상숭배와 색욕 등으로 인해 이스라엘 왕국을 말아먹었고, 그 아들 르호보암 대에 가서는 나라가 두동강이 난다. 선지자 나단의 예언 후로 그 즉시 다윗의 가정은 그야말로 피와 칼이 끊이지 않는데다가, 나중에는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대낮에 왕궁 옥상에서 다윗의 첩들까지 NTR했으니 '''결국 예언대로 된 셈.'''
그 동안 통합 이스라엘은 점점 혼란에 빠져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게 된다.

2.5. 압살롬의 반란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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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드 시몬의 <암논의 암살>
혼란의 절정은 아들인 압살롬의 반란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다윗의 큰아들 암논이 배다른 누이인 다말강간하고, 이에 격분한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것이었다.[44] 다윗은 충격을 심하게 받았지만 일단 암논의 잘못이 원인이기도 하니 압살롬에게 "네가 암논 죽인거 눈 감아줄 테니 너도 이쯤 하고 그만두거라" 하면서 용서하고 대충 넘어가려고 했으나[45] , 여동생의 일로 화가 난 데다 범인인 암논을 처벌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긴 것에 진심으로 폭발한 압살롬은 암논 살해 이후 외할아버지인 그술왕에게 도망가 있었지만, 여차저차해서 본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부왕에 대한 불만이 해소되지 않는다. 이후 본인이 아버지보다 더 나은 왕이 될 자신감이 넘쳤던 그는 여론을 조작하여 반(反) 다윗 세력을 형성하고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까지 점령한다. 그리고 다윗이 예루살렘 궁을 지키게 하려고 남겨둔 후궁들을 강간했는데[46], 당시 근동 지방의 관례에는 전왕의 후궁들을 취하는 것이 왕권의 완전한 계승을 의미했다.[47]

'''야훼여! 나를 괴롭히는 자 왜 이리 많사옵니까? 나를 넘어뜨리려는 자 왜 이리 많사옵니까?'''

'''너 따위는 하늘마저 버렸다고 빈정대는 자 또한 왜 이리도 많사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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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1~2절(공동번역 성서) 예루살렘을 나서면서

그 사이 다윗은 일단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정적들에게 여러 차례 모욕을 당하게 된다.[48]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 후새라는 친구이자 신하를 예루살렘에 남겨뒀는데, 후새는 압살롬에게 칭찬일색을 늘어놓아 압살롬의 환심을 사고, 압살롬의 측근이자 책사였던 아히도벨[49]이 "소수 정예를 결성해 빠르게 다윗을 쫓아가 잡겠다"는 작전을 제안하자, "지금 다윗은 머리 꼭지가 돌 대로 돌아 잘못 건드렸다간 뒤집어질 대로 뒤집어질 거다"라고 반박하며 이스라엘의 전 병력을 규합해 다윗을 몰살시키라는 작전을 제안한다. 압살롬은 후새의 작전을 채택했지만 '''사실 이것은 다윗과 후새가 짠 고도의 낚시로...''' 당시 이스라엘은 병력이 수도 예루살렘에 집결해 있는 것이 아니라 12지파 지방에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모으려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다. 더구나 예루살렘까지 거리가 똑같지도 않은 무려 12지방에 떨어져 있는 군단이 하루아침에 떡하니 동시에 모이는 것도 불가능하니 한마디로 '''다윗이 피신하여 자기 군대를 재편성 할 시간을 벌어준 것이었다.''' 이후 마하나임에서 근왕세력을 결성한 다윗의 반격으로 결국 압살롬은 패배하고 도망치다가 말을 달려 도망치던 도중 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렸으며, 결국 요압에게 붙잡혀 생을 마감한다.[50] 자식을 죽일 마음이 없었던 다윗은 압살롬을 척살한 사령관 요압을 책망하면서[51]그와 사이가 멀어졌다[52] 다만 이건 단순히 괘씸죄를 가지고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 요압의 개인적인 판단이 어떠하였든 왕인 다윗의 명령은 일단 압살롬을 생포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요압이 왕명을 어긴 것이고, 요압이 왕명을 어긴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53][54][55][56] 자세한 것은 압살롬요압 항목 참고. 이것이 아도니야-솔로몬의 분쟁의 한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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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했듯 압살롬은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아등바등하던 사이 요압의 손에 사망했다.

2.6.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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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실시한 인구 조사를 묘사한 그림.
다윗은 야훼가 그렇게 하게끔 불어넣어준 마음에 따라 인구 조사를 한다. 성경에 왜 인구조사가 죄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인구조사라는 행위 자체가 야훼를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힘(군사력)을 더 믿는다는 의미이므로 불순종과 교만이라는 두 가지 죄목에 해당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57]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에서 악당으로 묘사되는 요압마저도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하여 말렸는데 다윗이 오히려 강행했다는 점이다[58]. 어쨌든 양심에 찔린 다윗은 야단맞기도 전에 잘못했다고 신에게 용서를 구한다.[59] 이 때 야훼는 7년 가뭄, 적군이 침공해서 3달 동안 개고생, 3일 동안 전염병, 이 셋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고 다윗은 '적군보단 당신께 혼나는 게 그나마 나을 것 같다'는 말로 전염병 페널티를 골랐음을 우회적으로 말한다.[60] 그렇게 전염병으로 7만 명의 백성이 죽고,[61]다윗이 번제와 친교제를 드린 장소에 훗날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다.
사울을 처음으로 세우려고 할 때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한 말을 생각하면, 사실상 기록의 버릇이기보다 기록된 시기와 의도에 대한 차이이다. 사무엘기의 저자는 왕이 중앙집권을 할 때 백성들의 저항에 대한 당시의 생각을 잘 대변하고 있었고, '손해가 무척 나는 일이었지만 신의 뜻(혹은 왕의 뜻)을 대변한 일이었다'는 당시의 '''공식 기록'''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무엘기는 의외로 동시대의 궁중비사에 박식하기 때문에 궁중 근무 선지자나 내관급의 신하가 서술했거나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62]
하지만 역대기 상하권은 이스라엘이 초유의 쇠퇴와 멸망을 겪은 '''후'''에 기록된 것임을 생각하면, 우리 조상들이 이런 죄를 저질러 하느님께 벌을 받아 망했다는 기록의 의도가 짙다. 즉 '''초심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유혹에 빠져 멸망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의 의미에서 과거의 문제되었던 사건을 '사탄의 유혹'으로 밀었던 냄새가 난다. 실지로 역대기 상하권이 구약의 동시대를 다룬 다른 사건에 비해서 다른 시각을 가진 경우가 무척 많다.
그래서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위의 두 내용은 서로 커버가 가능하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사탄이 주로 쓰는 전략은 백성들이 죄를 짓도록 유도하여 야훼를 격노하게 하고, 야훼는 곧 이스라엘에게 항상 걸어놓는 가호를 거두는 것이다. 가호가 거둬지면 사탄은 합법적으로 악을 허용하여 땅을 망가뜨리거나 사람들을 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상태에서 회개하면 다시 야훼의 은총이 내려 사탄의 행동이 멈추고, 파괴된 땅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를 해석하면 백성의 죄로 야훼의 가드가 풀렸고, 사탄이 다윗을 충동질해서 인구조사가 시행되었다는 것이다.[63]

2.7. 노년과 왕위 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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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나이가 들어 병석에 눕게 되자[64] 아들인 아도니야[65]가 요압의 후원을 받아 다른 자식들, 특히 솔로몬을 제치고 왕이 되기 위해 멋대로 대관식을 거행해 버렸다. 그 소식을 들은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와 선지자 나단이 아비삭의 인간난로 버프를 받던(…) 다윗에게 가 솔로몬을 왕위에 앉게 해 달라 주청해서 결국 아도니야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다윗의 후계는 솔로몬이 되었다.
다윗의 퇴위와 죽음 이후, 솔로몬은 아버지가 여러 가지 문제로 살려두었던 정적들과 형제인 아도니야, 그를 후원한 요압을 처단했다. 아도니야는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당시에 목숨은 건졌으나, 다윗 말년에 그의 침대 시중을 든 처녀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하는[66] 등 왕위에 대한 욕심을 은근히 드러내다가 처형당했다.
다만, 사독과 함께 공동 대제사장을 맡은 아비아달은 죽이지는 않고 그저 파면하여 고향인 아나돗으로 보내버렸다.
이에 대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종교계의 거물이라[67] 손을 대기 어려웠고, 부왕과 오랫동안 환난을 함께 해왔으며, 무엇보다도 그 원인이 다윗이 젊었을 때 저지른 과오의 대한 책임도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책임 사유는 다음과 같다. 예전에 사울 왕을 피해 도망가던 다윗은 도중에 아비아달의 아버지인 제사장 아히멜렉과 만나면서 "나 왕한테 받은 비밀 임무 수행 중인데 먹을 거랑 쓸 만한 무기 좀 없느냐"이라고 거짓을 말했고, 이를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인 아히멜렉은 떡과 골리앗의 칼을 주어 보냈었다. 이 때, 사울의 목자장이던 에돔인 도엑이 이를 보고 사울에게 밀고했고, 사울 왕의 분노를 사게 된 아히멜렉의 가문은 아들 아비아달을 제외하고 몰살당했다. 가까스로 도망간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그는 이후 다윗에게 의탁했던 것이다. 참고로 아비아달은 사무엘기에 나오는 대제사장 엘리의 현손으로, 사무엘이 어렸을 당시 아비아달의 고조할아버지인 엘리는 자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악행 때문에 대제사장직에서 박탈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바가 있었다. 현손대인 아비아달 때 그 예언이 성취되어, 아비아달의 가문은 다시는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제사장의 후예 두 계열 중 하나인 이다말 계열은 완전히 끊기고, 엘르아살 계열의 사독 가문만이 대제사장직을 이어가게 된다. 사무엘 유년 당시의 예언이 이런 식으로 성취된 것이다.
그 뒤 다윗이 이룩한 통합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대에 분열하면서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으로 갈라지게 된다.

3. 평가 및 의의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사도행전 13:22)'''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유다의 왕들의 기준

사실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가져온 왕이라서 주인공 보정으로 넘어가는 일이 있지만 솔로몬~르호보암 연대에 있었던 '''외국인과의 우호 관계 및 우상숭배'''가 이 시대에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암논의 강간 범죄 때 그의 죄를 처벌하지도, 왕족 자리에서 폐하지도 않은 점, 그리고 암논을 살해한 압살롬이 외가 왕국으로 도망간 점은 모두 왕자의 외가쪽, 즉 정략결혼의 세력 분배에 따른 문제일 가능성이 있다.
어찌 됐든 그는 이스라엘-유대의 가장 중요한 영웅이자 왕으로서 그와 관련된 성경 기록도 많으며, 기독교에 의하면 그의 혈통이 '왕중왕'인 예수로 전해져 그의 왕가는 영원히 이스라엘의 왕가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자식 농사는 여러모로 썩 좋은 경우가 거의 없다. 언급되는 자식들 중에서 장자인 암논은 이복누이를 강간했고, 압살롬은 왕위를 계승하려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아도니야 역시 멋대로 대관식을 치르다가 용서 받았음에도 정신 못 차리고 부왕의 첩을 탐내는 등 인간성에 문제가 많은 이들이었다. 거기다 그나마 나아 보이는 솔로몬조차도 말년에 하는 짓거리를 봐선…
다윗은 여러모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예루살렘을 건설하여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치열하게 싸울 성지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그다. 물론 사울 때부터 그 단초를 보이긴 했으나, 이스라엘이 다윗 아래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나라 꼴을 갖추고 복잡한 중동 정세에서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이스라엘과 훗날의 팔레스타인 지역 국가들에겐 재앙이 되기도 했으니, 다윗 왕 시대에 군사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해서 여러 강적들을 두들겨 준 것은 좋았으나, 아람#s-2.1아시리아의 발목을 열심히 잡아주던 이 중요한 시기에 하필이면 다윗 왕에게 일격을 당해서 아시리아의 급성장을 허용하고야 말았다. 덕분에 여유롭게 성장한 아시리아는 그때까지 대여섯 차례에 걸쳐 지배와 종속, 정복 관계를 뒤바꾸던 바빌로니아를 끝내 굴복시키고 메소포타미아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한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나중에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패망한 걸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의 융성기를 연 성군이 동시에 패망까지 준비한 셈이니 그야말로 아이러니. 하지만 이 책임을 모두 다윗에게만 전가할 수는 없고, 아람의 약화는 후일 북이스라엘과의 잦은 싸움도 한몫 했다고 봐야 한다.
후대에는 굴욕을 많이 당했다. 하스몬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 왕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7세가 쳐들어오자 그와 협상을 하기 위해 '''다윗 왕의 능을 털어서''' 은 3,000 탈란트를 마련해 뇌물로 주고 포위를 풀 수 있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예루살렘이 그간 수많은 침공과 점령, 파괴를 겪었는데 다윗 왕의 능에서 은 3,000 달란트라는 거금이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 시대로부터 불과 100년 이후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기록했으니 무조건 신빙성이 없다고 하기도 힘들다.[68]
현재 예루살렘에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했다는 마르코의 다락방 기념교회 밑 지하에 다윗 왕의 무덤이라는 것이 전한다. 물론 이 무덤은 진짜 다윗 왕의 무덤은 아니고 십자군 시대에 예루살렘 왕국에서 마르코의 다락방 기념교회 밑에 다윗 왕을 기념하는 무덤을 세웠을 뿐이다. 이 무덤은 유대인들의 성지가 되었다. 또한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두 신자가 함께 예배를 올리는 몇 안되는 곳이다.
근데 다윗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나라가 안 망한 게 신기할 정도로 그의 치세 때 국가 막장 테크가 연속으로 터졌다.
  • 왕은 되었지만 왕 되자마자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이스보셋)[69]
  • 이를 어찌어찌 합쳐놨더니 옆나라가 2번이나 쳐들어오고
  • 이를 또 무찔렀더니 이번에는 먼 이웃나라가 시비를 걸어서 쳐들어가 박살을 내놓고
  • 그 중간에 NTR을 저질러서 그 할애비인 유능한 신하[70]가 사표를 내버렸고
  • 이제 좀 조용해지나 싶었더니 방목해서 키운 큰아들이 배다른 여동생을 강간하고 그 배다른 여동생의 오빠가 빡쳐서 그 큰아들을 살해했으며
  • 그 동생내미를 용서했더니 더 삐딱선을 타서 반란 일으켜 내전으로 번지고(여기에 아히도벨이 합류해서 진짜로 망했어요 직전까지 갈 뻔했다)
  • 이 반란을 어찌어찌 막았더니, 어떤 양아치 하나(세바)가 반란 또 일으키고
  • 또 정리하고 나니 역병 돌아 사람들 떼죽음 당하고(인구조사 사건)
  • 말년에는 부하들한테 전쟁터에서 짐짝 취급 받았으며
  • 후계자를 정해놓기만 하고 공표하지 않는 바람에 또 다른 욕심쟁이 아들내미(아도니야)가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는 등.(열왕기 초반 참조)
다름이 아니라 다윗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지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 그에게는 허락치 아니하시고 그의 아들에게 성전건축을 하게 하시고 대신 다윗이 시키지도 않은 성전을 세우고 싶어하는 마음을 기특하게 여겨 다윗 왕조는 최소한 망하지는 않게 하신다는 약속이 있었다.[71]
거의 평생을 전쟁 속에서 살았는데, 이 때문인지 군부와 각 지파의 입김이 상당히 셌던 모양. 그러나 전쟁 영웅이었던 다윗의 지속적인 왕권 강화 덕분에 후계자인 솔로몬의 치세 동안 각 지파의 수장과 선지자들이 솔로몬에게 감히 대들지 못하였다.

4. 다른 문학작품과의 연계성


다윗의 이미지와 에피소드는 이후 아서 왕이나 카롤루스 대제중세 기사도 문학에 등장하는 위대한 왕의 이미지와 에피소드에 차용되기도 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미쳤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아도니야와 요압을 처리하는 것을 명시한 부분은 마리오 푸조의 대부에서 그대로 패러디된다. 성경을 좀 읽으신 분들에게는 유쾌한 장면(…).
80년대 KBS에서 방영된 영화판에서는 금발의 다윗이 나온다. 저예산을 자랑하는 안습한 수준이지만 의외로 성경에 충실하고 자잘한 이야기들, 이를테면 다윗을 숨겨주었다고 성직자들을 도륙하는 사울의 모습이나 용병 생활을 하는 다윗도 묘사한다. 문제는 성우 이정구가 소년 다윗도 더빙했다는 것(…).
1985년 리처드 기어가 나온 영화 'King David'는 압살롬과 다말 스토리까지 그렸는데 '''고고학적인 고증이 정확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아래에 언급된 코딱지만한 흙벽돌 왕궁이라든지… [72] 영화 자체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고증의 정확함 덕분에 지금도 유튜브에 king david richard gere 라고 치면 이 영화의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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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갈과 결혼하는 다윗(리차드 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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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밧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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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김청기 감독이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바 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영화 벤허의 포스터와 판박이다.
Fate 시리즈에는 서번트로 등장. 항목 참조.

5. 그 외


솔로몬과 함께 시편의 주요 저자로서 유명하다.[73]
그가 살았던 삶이 참 굴곡이 심하고 고달팠던지라, 시편에는 그의 절절한 사연이 많이 묻어나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자신을 도와달라며 간구하는 모습들이 서양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문화권에 큰 영향을 주었고, 시편의 유명한 여러 구절들은 서양은 물론 전세계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많이 사랑받으며 기억되고 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등장하는 잭슨 이병은 적을 저격하기 전에 성경 구절을 읊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데, 그 읊는 구절이 바로 다윗의 시편이다.
다윗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다"'''는 묘사가 있다. 여기에서 '붉다', '아름답다'는 말이 보통 여자의 외모를 칭찬할 때 쓰는 말인 걸 생각하면, 현대 기준으로 미소년에 가까운 외모였을 듯. 다만 요새야 미소년이란 명칭이 자랑일지 몰라도 '''저 시대에는 우락부락한 마초가 남성미의 표본'''이었기에, '''남자가 예쁘다는 것은 곧 놀림거리였다.'''[74] 이 묘사는 골리앗이 다윗을 보고 업신여길 때도 나오는데 현대식으로 바꾸면 '계집애처럼 생긴 녀석이 맞짱 뜨자고 하다니 가소로운 것' 정도가 된다.
그 밖에도 잠입이나 은신에 재능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일화가 몇 개 있는데, 사울에게 쫓기고 있을 때 그가 잠든 진영으로 잠입해서 망토를 조금 자르고 창과 물병을 가져가 자신은 왕위를 노릴 의도가 없음을 보여준 일화[75]와, 전쟁에서 패해 쫓기고 있을 때 은신한 곳 입구에서 거미가 거미줄을 치자 추적병들이 인기척도 못느끼고 그냥 거미가 거미줄 친 거 보니 아무도 없을 거다며 그냥 가버린 것,[76] 적장의 침소에 침입해 칼을 훔쳐 피 안흘리고 싸움을 끝낸 일화가 있다.[77] 세번째의 경우 적장이 칼을 깔고 자고 있어 포기하려다 모기가 적장을 물어 적장이 몸을 움직여서 빼앗긴 했지만, 그 때까지 경비병들에게 전혀 들키지 않고 침투한 것만 보면…. [78]
현대에는 그가 조울증을 앓고 있었건 게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조증 특유의 과장된 자신과 돌출 행동을 보이다가도 '눈물로 밥을 해 먹는다'[79]는 등 우울증 증세에 해당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가 다재다능한 행적 이면에 예민한 감정선으로 고생한 것만은 확실하다.
2005년 다윗왕의 궁궐이라는 곳이 발견되었다.[80] 예루살렘 성의 동쪽에서 발굴이 된, 다윗의 궁으로 추정되는 궁궐은 일명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Large Stone Structure 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구조물을 발굴한 고고학자 에일랏 마자르(Eilat Mazar)에 의하면 현재까지 발굴된 이 건물의 벽의 한 변은 약 2.5~3m 두께로 동서로 30m에 이른다. 이미 예루살렘은 이 잡 듯 다 뒤져서 평면적으로는 더 다른 건물터가 나올 데도 없다. 지형상 홍수나 산사태, 습지 등 건물을 삼킬 정도의 지질이나 자연 재해가 있지도 않고 나무로 궁을 지었다면 방화로 인한 인멸도 있겠지만 그 동네는 석조 건물 위주라 기초도 찾을 수 없다면 그냥 다른 건물 터가 없는 거다(…). 소소한 유물 정도는 앞으로도 더 나오겠지만 더 이상의 대형 구조물들의 터는 찾기가 어렵다고 봐야 한다. 물론 수천 년 간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고 고고학자들이 뭣 모르고 상부 건물을 날려 버린 경우에는 건축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바닥을 찾기가 힘들 수는 있다. 그렇기에 발굴된 결과를 볼 때 연대의 논란이 있지만 고고학자 에일라트 마자르에 의하면 그 건물과 연결이 되었다고 주장이 되는 높이 18m 정도의 Stepped Stone Structure와 같은 거대한 석조 건축물도 있기 때문에 다윗의 궁전이 없없다고도 그렇다고 해서 얼마 만큼의 규모로 건축이 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단정을 짓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아무튼 책임자 에일랏 마자르를 포함을 한 발굴 팀들은 다윗왕이 건설을 한 예루살렘 성이라고 하지만 일단 10헥타르 정도의 최대 4천 명 정도 거주를 하는 지역으로 흔히 이야기를 하는 촌락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베를린의 이집트 전문학자 롤프 크라우스(Rolf Krauss)는 다윗의 궁궐 터에 대해 "지방 둥우리"라고도 일컫고 있다. 이 유적의 경우 부족 국가설을 주장하는 사학자들에 의해 신빙성이 더해지고 있는데 즉, 추장의 저택 정도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가능한 규모라는 것(…) 하지만, 최근의 고고학적 결과로는 성서의 사아라임으로 확인이 된 곳이 고고학자 요세프 가르핑켈(Yosef Garfinkel)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는데, 발굴이 된 유적과 그 곳에서 발견이 된 유물이 해석되면서 기원전 10세기 경 다윗의 유다 왕국이 어느 정도 중앙집권화된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열왕기상 10장에 의하면 다윗의 도읍에는 "은이 돌과 같이 많았다"고 하며, 다윗의 궁궐의 찬란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실제로 발굴되어 이스라엘 정부에서 공인하고 지키고 있는 다윗의 궁궐 터의 규모 자체가 애초에 그 찬란하던 나라의 흔적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것이다.
다윗의 막장CCM 그룹 '다윗의 장막'을 패러디한 그룹명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미켈란젤로가 만든 누드 조각상 다비드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가 인간에 대한 탐구 때문에 누드로 표현한 것이지 실제의 다윗은 사람들 앞에서 누드로 다니진 않았다.
서양권 인명 중 데이비드, 다비드라는 이름이 이 사람으로부터 유래된 이름이다.
[1] '이새(가톨릭에서의 표기는 이사이)의 아들 다윗'이라는 의미이다.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w발음이 v발음이므로 다비드(Davīd)에 가까우나, 고대 히브리어로는 다위드(Dāwīḏ)에 가까웠기 때문에 '다윗'으로 음역되었다.[2] داوود(Dāwūd)와 발음이 유사한 داود(Dāwūd)로 표기하기도 한다. 실수로 구글에 دود(dūd)라고 치면 식욕 뚝 떨어지는 사진이 뜨니 주의할 것.[3] 말년의 다윗이 야훼를 찬양하기 위해 지은 노래로 알려져 있다.[4] 마태오 복음서 1, 9, 21 장 시편 132편 등[5] 사무엘하 12장 10절[6] 성경의 표현으로는 "하느님께 버림받았다". 사무엘이 집전해야 할 제사를 사울이 먼저 집전해버린 것이 문제이기도 했으며, 왕위에 오르면서 본래의 성정을 잃고 오만해지고 방탕해졌다고.[7] 이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계명과, '''부모를 경외하라'''는 레위기 19장 3절에서 유추가 가능하다.[8] 매매, 인신공양 등[9] 성인이 아니라는 의미이다.[10] 다윗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큰형 엘리압이 엿듣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가 무엇을 하겠다고 여기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양 새끼는 누구한테 맡겼지? 이 건방진 못된 녀석, 네가 싸움 구경하러 온 걸 모를 줄 아느냐?" (사무엘상 17:28, 공동번역성서)[11] 예)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12] 예)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13] 이에 관해서는, 이스라엘에서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맞아들여야하는 풍습이 있었다.(과부의 부양과 가계유지를 위해) 거기다 그 경우에는 그 아내와 관계를 가져 아이를 가져도-후계자 문제로 자신의 아이가 아닌 형제의 아이가 되는 풍습이 있었다. 창세기나 마태복음에서 확인 가능하다.[14] 특정한 관습이라던지 결혼과 같은 통과의례[15] 룻기의 인물로 이새의 할아버지이자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룻기 서술에 의하면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거부였다고 한다.[16] 시중들던 한 젊은이가 말하였다. "소인이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한 아들을 알고 있는데 그는 수금을 잘 탈 뿐만 아니라 씩씩하고 날랜 용사로서 말도 잘하고 풍채도 좋은 데다 야훼께서 함께 해주시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6:18, 공동번역성서)[17] 이리하여 다윗은 사울을 찾아와 그를 시중들게 되었는데 사울은 다윗을 몹시 사랑하여 그를 자기의 무기 당번으로 삼았다. (사무엘상 16:21, 공동번역성서)[18] 사무엘기 상권 17장 34~37절에 있는 내용은 자기 PR. 문맥의 의미도 하느님께서 지켜주신 거지 때려잡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자슬링이나 나무 작대기는커녕 소총으로도 잡기 힘들다. 성경에 나오는 표현도 막 때려잡고 무쌍 찍는 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아줌마처럼 을 물어갈 때 쳐서 빼오는 수준.[19] 실례로 로마 제국에서 검투사반란을 일으켰던 스파르타쿠스도 이탈리아 남부 일대를 휩쓸면서 그곳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자신의 군대로 적극 편입시켰다. 목동 생활에 익숙하던 그들이 척후 또는 기병으로 매우 쓸모가 있었기 때문.[20] 사무엘상 16장 12절[21] 구약시대에 히브리인들이 사용한 현악기. 이스라엘 밖에서는 워낙 생소한 악기인지라 서양권에선 리라(악기)로, 한국에선 수금(手琴)이나 비파로 번역했다.[22] 성경에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고 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이다"라는 노래가 민간에 떠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23] 요나단이 미갈의 남자 형제(오빠인지 남동생인지는 불명)이기 때문에 고로 그가 다윗에게 있어서 처남이 되는 것이다.[24] 다윗이 숨어있는 엔게디 황야까지 쫓아온 사울이 굴에 들어가 볼일을 보고 있을 때 그 안에 숨어있던 다윗이 몰래 뒤로 다가가 옷자락을 베어 가져왔고, 후에 사울이 다시 십 광야로 쫓아왔을 때 아비새와 함께 야밤에 사울의 진영으로 침투해 자고 있는 사울의 침대 옆에 세워진 창과 물병을 챙겨갔다.[25] 물병과 창을 챙겨 나와 거리를 벌리고 진영을 향해 소리를 질러 사령관 아브넬에게 "다윗이 니 주군 얼굴까지 보고 갔는데 너는 왕 안지키고 뭐하고있었냐"라며 아브넬을 질책하고 이어 사울을 불러서는 자신이 왕의 적이 아님을 밝히고 그의 시종을 보내도록 부탁하여 창과 물병을 돌려주었다.[26] 다윗은 나발의 양들과 양치기들을 보호해 준 적이 있어서 나발과도 연이 좀 있다. 그런데 이후에 다윗의 식량이 떨어졌는데, 마침 나발이 양털 깎는 행사(농경사회로 치면 가을걷이 축제)를 열자 식량을 요구했지만 문전박대를 하였다. 사실 나발은 친사울파였다. 사울이 당시 크게 아말렉을 한 번 싹 쓸어주었으니(사울 왕의 기념비까지 있다.) 사울에게 호의적일 수밖에.[27] 나발이 사는 지역은 블레셋과 아말렉 등에 의한 잦은 약탈이 일어나던 장소였다. 다윗 자신 역시 소년 시절 목동이었다 보니 다윗이 나발의 가축을 돌보는 이들을 친절하게 지켜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랬는데 나발한테 푸대접을 받았으니 다윗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름 배신감을 느꼈던 듯. 나발의 종들조차 다윗이 빡돌았다는 자기 주인의 말을 듣고 '''자기 주인이 이름값대로 하는 멍청한 놈'''이라며 혀를 차며 깔 정도면 말 다했다. 예를 들면 "병진"이라는 이름답게 병진짓한다. 이런 식으로...[28] 여기에 더해서 하다못해 난색을 표하거나 도와드렸다가 사울왕께 엿 된다는 식으로 피치 못할 곤란함을 표현한 것도 아니고, '근래 들어 억지로 제 주인을 떠나는 종들이 많도다'라고, 대놓고 사울왕을 배신한 반역자 취급을 하면서 '다윗은 누구고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고 비웃었다. 이건 정말 다윗이 누군지 몰라서가 아니라 "넌 어차피 사울왕을 배신한 듣보잡 반역자 새끼잖아 ㅋㅋㅋ" 하고 조롱한 거다. 완곡히 거절한 것도 아니고 대놓고 어그로를 끌면서 도발한 것.[29] 이는 엄청 잘한 일인데, 만약 다윗이 직접 나발을 죽였다면 왕이 된 이후에 죽인 죄책감이 아직도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왕이 된 후에도 민심 수습도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30] 이 대목에 대해 탈무드의 다윗 왕 이야기에서는 아기스 왕의 공주가 미치광이였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고 전한다.[31] 다윗이 블레셋으로 몸을 맡긴 건 단지 변덕스러운 사울이 죽이려들자 피하기 위함이었지, 적국의 힘을 빌려서 사울을 죽이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사울이 신께 기름부은 자라는 것을 강조하며 죽이려는 것을 꺼려했다.[32] 사실 사울이 죽기 전에 옆에 있던 부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한 건 맞다. 하지만 그 부하는 다윗에게 보고한 아말렉 병사가 아닌 별개의 인물이었다. 그 다른 부하가 왕을 죽이기 주저하자 사울 본인이 칼에 엎드려져 스스로 자살한 것이다. 옆에 있던 그 부하도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다. 다윗에게 보고한 병사는 다윗의 적이었던 사울을 죽였다고 둘러대면 상을 받을 거라 생각하고 그의 왕관과 고리를 가로채 거짓보고한 것이다.[33] 쓸데없는 공명심에 눈이 멀었다가 명을 재촉한 이 병사는 아말렉 출신으로 다윗에게 거짓 보고를 하고 결국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과거에 아말렉 민족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을 적대한것과 그 이후로 사울 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적대해온 것에 대한 저주의 결과로도 해석되기도 한다.[34] 이스보셋(Ish-bosheth, איש בושת)의 본명은 에스바알(Eshbaal, אשבעל)인데, 이름에 바알(Baal)이 들어가는 구절에 대해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의미의 '보셋(bosheth, בושת)'으로 고친 후대 기록자들의 가필이다. 바알중동 지방의 토착신 중 하나인데, 이스라엘 민족이 곧잘 하느님 대신 섬기곤 해서 하느님의 분노를 사곤 했다. 마찬가지로 사무엘기의 인물 므비보셋(Mephibosheth, מפיבושת)의 본명도 므립바알(Merib-baal, מריב בעל)이다. 다만 이 점에 대해서 사울 시기에는 '바알'이 '엘'과 같이 단순히 '신'이라는 일반 명사로서 하느님을 지칭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울이 하느님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하긴 했어도 배교한 적은 없기 때문.[35] 이스보셋이 왕이 될 당시 나이가 40이라고 쓰여 있으나, 앞뒤 부분에서 계산해 보면 어린 애였다. 따라서 사울과 자기 형 3명이 참전했던 필리스티아와의 전쟁 당시에 참전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울의 측근이었던 아브넬이 사울의 첩 리스바를 취하는 것에 한 마디를 했지만, 아브넬의 권세에 밀려 데꿀멍하고 살았다. 한마디로 이스보셋은 허수아비 왕이었다.[36] 다만 이스보셋의 치세가 몇 년에 불과한데 비해 다윗의 유다 한정 치세가 이보다 더 길다는 점에서 이스보셋 사후에도 다윗 반대 세력이 한동안 강력했을 가능성이 있다.[37] 실제로 압살롬의 반란 동안에 다윗을 저주했다는 게라의 아들 시므이, 같은 반란이 끝난 직후에 일어난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반란이라던가...그런 사건이 많았음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38] 덧붙여서 이 게라의 아들 시므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는 모두 사울과 같은 베냐민 지파 족속이다. 시므이 같은 경우는 다윗이 말년에도 위협요소라고 여겼는지, 아들 솔로몬에게 친히 알아서 '죽이라고' 유언에 포함시킬 정도였다.[39] 당시 수염은 인품이 높음을 뜻함과 동시에 자유로움을 의미하는 요소였기 때문에 이것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엄청난 모독이였다. 당장 고려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정중부의 수염을 불로 지지자 김돈중이 정중부에게 개떡이 되도록 맞은거나, 18세기 표트르 대제 시절 러시아 제국에서도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 귀족들에게 유럽 귀족들처럼 면도를 하라고 명령하자 귀족들이 들고일어난걸 보면 알 수 있다.[40] 이 전쟁은 1년 넘게 이어져 원래 전통대로면 왕도 출전을 해야 하는데도 '''전쟁에 참가하지도 않고 낮잠만 퍼 잔 것이다.''' 일부는 다윗이 간음죄를 진 것은 이렇게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반나절 넘게 낮잠을 자는 나태함의 후폭풍이라고도 해석한다.[41] 사실 정상적인 마인드를 가진 군인이라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현대 군대도 훈련 기간만 해도 휴가를 제한한다. 하물며, 고대 사회에서 그것도 '''전쟁 중에''' 부하하고 상관이 전장에서 구르고 있는 와중에 자기한테만 특별 휴가를 준다? 이를 낼름 받아 먹는 것이 더 이상하다.[42] 간음, 중상모략, 불륜 등 '십계명? 그거 먹는 건가요?' 수준의 짓거리를 저질렀으니 하느님의 분노를 안살래야 안살수가 없다.[43] 참고로 이후 다윗의 집안에서는 정말 바람잘 날이 끊이지 않았다.[44] 자세한 전말은 이렇다. 다말은 이복오빠 암논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오빠에게 간호를 하러 왔는데 이는 평소 다말을 눈독들이던 암논이 사촌과 함께 부린 잔꾀였고 기겁한 다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엄청난 완력으로 다말을 강간한 뒤 관심이 식자(자세히 말하면 다말에게 품은 욕정이 충족되자 식어버린것) 다말을 달래주고 보상하긴 커녕 오히려 더욱 난폭하게 내쫓은 것이었다. 경악한 다말은 강간 이전에도 이렇게 하면 오빠에게만 손해라며 화를 내면서 항변했지만 묵살 당한것도 모자라 이번에 하는 암논의 행동은 죄악이라고 엄청나게 화를 내며 항변했으나 암논이 끝내 반성하지 않고 보상조차 하지 않고 난폭하게 내쫓아내 버리자(강간당한 여인이 처녀일 경우 은 50세겔로 배상하거나 아내로 맞이하거나 해서 수치를 없애주어야 했고, 또는 강간범을 돌로 쳐 죽이라고 법에 명시되어 있지만 애초부터 암논은 본인이 죽임당할 생각도 또 자신의 잘못을 책임질 생각조차 없었던 개차반이었다.) 결국 다말은 슬피 울며 돌아왔고, 동복오빠였던 압살롬은 여동생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권력다툼에서 정적을 공격할 꼬투리이자 본인의 복수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45] 사실 이건 다윗의 후속처리도 문제였다. 아무리 자신의 아들이었어도 이런 사건을 일으킨 암논에 대한 징벌은 반드시 이뤄져야 했다. 게다가 이복동생이었도 이는 엄연하게 근친상간이라 하느님도 금지한 법령이었다. 그럼에도 다윗은 부정에 못이겨 그냥 유야무야 넘어간 것이다.[46] 이 아이디어는 자신의 아버지 다윗의 모사 중 한명으로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에 전향한 아히도벨이 낸것이다.[47] 앞에서 말한 저주의 예언의 실현이라고 한다. 진짜로 휘장만 쳐놓은 침대를 거리에 내놓고 백주 대낮에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강간했다고 한다...[48] 대표적인 것이 사울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시므이라는 자에게 짱돌을 맞을 뻔한 것.[49] 다윗의 최측근이었는데도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 편에 붙었는데 사실 그는 '''밧세바의 외할아버지'''였다. 자신의 책략이 채택되지 않자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집으로 돌아가 자살한다.[50] 손에 단창 셋을 쥐고 가서 압살롬의 심장을 찌른 다음 부하 열 명과 함께 압살롬을 에워싼 채로 죽였다.[51] 책망한 적은 없다. 단지 출정하기 전 압살롬에 자비를 베풀라는 부탁은 한적이 있지만.[52] 게다가 이 당시 압살롬의 죽음을 지나치고 적나라하게 애통해 해서 다윗편의 군대들이 분명 승리했으면서도 분위기는 그야말로 패잔병들의 그것과 같았다. 결국 요압의 직언을 통해 정신차리긴 했지만 여기서 다윗이 두번째 병크를 저질렀는데 바로 반란군의 수장이었던 아마샤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해버렸던 것. 이는 자신을 위해 목숨걸고 싸운 병사들과 장교들의 노고를 헛된 것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혈육의 정도 중요하지만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하는데. 단지 자신의 아들을 죽인 괘씸죄 때문에 사후처분을 그릇되게 한게 문제다.[53]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통합 이스라엘 왕위를 다투던 시기에 투항해왔던 이스보셋 군대의 사령관 아브넬을 암살한 것이 있다. 물론 아브넬이 헬갓핫수림에서 요압의 막내 동생이었던 아사헬을 사살한 원한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엄연히 군부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보전하기 위해 적진에서 투항해 온, 그래서 왕이 중용하기로 마음 먹은 자를 자신이 개인적 원한을 빙자해 멋대로 죽인 것이다.[54] 실제로 다윗은 이 암살 사건의 소식을 듣자마자 공식적으로 요압을 저주하여 아브넬 암살 사건과 자신이 아무 관련이 없음을 증명해야 했다. 이렇게 말하면 별로 감이 안 올지도 모르지만, 이스보셋의 실질적 비선실세나 마찬가지였던 아브넬을 포섭함으로서 내전을 조기 종결시킬 기회를 잡은 다윗 왕이 요압의 독단적 행동에 빅엿을 먹은 것이다.[55] 거기다가 요압은 이 사건으로 인한 처벌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런데도 요압은 왕명을 무시하고 압살롬을 죽였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왕이 사령관으로 임명한 아마사를 또 죽인 것이다![56] 이 때문에 현대의 연구자들 중 다수는 요압이 다윗 왕의 '신하'라기보다는 거의 러닝메이트에 가까운, 왕권을 위협할만한 실권을 가진 권력자였다고 보고 있다. [57] 혹자는 출애굽기를 들어 인구조사를 할 때에는 각종 성스러운 규정을 지켜야 하는데 다윗이 그런 것을 모르고 그냥 인구조사를 강행시킨 결과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죄를 범해서 그런 것이라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58] 게다가 요압도 그런 다윗에 짜증이 나서 일부 지역의 인구조사는 생략해버렸다.[59] 해당 내용에 대해 사무엘기 하권 24장 1절에는 '야훼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떤 죄로 인해 진노를 내리실 일이 있어 다윗에게 이스라엘 유다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역대기 상권 21장 1절에는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했다'고 되어있어서 문제가 된다. 전자는 일견 '이건 야훼가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후자는 '이건 사탄이 한 것'이 되어 상호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 전반에 따른 가르침은 야훼가 징계의 의미로 사탄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탄은 결국은 하느님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에 그때그때 허락된 이상의 악행을 할 수 없으며(욥기 참조), 이 경우는 하느님이 그 제어를 어느정도 풀어서 사탄이 다윗을 격동시키는 것을 묵인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60] 가뭄 7년도 적군 침공과 그다지 다를게 없다. 국력이 쇠해지기 딱 좋으니까[61] 실제로도 다윗은 하느님에게 죄는 내가 지었는데 왜 백성이 고통받아야 하냐며 자기와 자기의 가문을 벌해달라고 기도한다.[62] 심지어는 사무엘의 사망 소식도 기록된 것이 사무엘기다. 이 경우 사무엘 사후의 사무엘기는 사무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작성했다고 생각 할 수 밖에 없는 것도 하나의 근거.[63] 그리고 실제로 이 악순환이 계-속 반복 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판관기다.[64] 열왕기 상권 첫머리에는 왕의 침대를 데우기 위해 수넴 여자 아비삭이라는 젊은 처녀가 그와 함께 잤으나 성관계는 하지 않았다고 나오는데, 당시 중동 지역에는 늙어 죽어가는 권력자의 몸을 낫게 하려고 순결한 처녀의 몸으로 덥히는 관습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그 처녀와 잠자리를 가지라는 말이다. [65] 아도니야가 계승권에서는 더 우위에 있다.[66] 당대엔 왕만이 선왕의 후궁을 가질 수 있었다.[67] 초기 이스라엘의 왕권은 종교적 권위에 크게 의지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사제를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교단의 대표이자 킹메이커였던 사무엘과 틀어지면서 똥망 테크를 타기 시작한 것만 봐도…….[68] 요한 힐카누스가 턴 무덤이 다윗 왕의 무덤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무덤 도굴로 자금을 마련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그리고 예수 관련 구절로 신뢰성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있지만 예수에 대한 구절은 후대 익명의 기독교인이 부분가필한 것으로 거의 확정되었으므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보기는 힘들다.[69] 사실 엄연히 따지면 이 당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유다의 왕이 되었다. 게다가 정통성으로만 보면 오히려 전 왕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있었으니 사실상 다윗의 유다 왕 등극은 내란죄에 해당된다. 하지만 결국 이스보셋의 2인자이자 사울의 삼촌인 아브넬이 다윗에게 귀순하면서 다윗에게 나머지 지파들이 힘을 주기 시작한다.[70] 그것도 당대 이스라엘 최고의 지략가 아히도벨. 정 이해가 안간다면 삼국지의 제갈량을 아히도벨에, 다윗을 유비에 놓아보면 된다.[71] 그런데 사실 솔로몬이 성전 건축하는데 썼던 재원과 시간을 보면, 위와 같은 시기에 성전을 건축하는 건 거의 나라기둥을 뽑는 일이 아니었을까도 싶다.[72] 그 때문인지 다윗이 죽는 결말부에서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신의 뜻이 아니라 네 뜻을 따라라"라고 유언하는 장면이 있다. [73] 다만 현대에는 다윗이 직접 지은 것도 있지만 다윗에게 바치는 노래 같은 것까지 전부 '다윗의 노래'로 뭉뚱그려 묶었다는 게 의견이 많다.[74] 굳이 저 시대까지 갈 필요도 없이, 현대에도 5-60대 이상의 남자 앞에서 예쁘다고 말하는 것은 모욕으로 오해당할 소지가 크다.[75] 이때 사울 옆에서 같이 자던 사울의 조카 아브넬에게 "넌 장수 자격도 없다"고 디스한 건 덤.[76] 여기에는 다윗은 평소 거미를 싫어했고 때문에 다윗이 쫓기다 동굴에 이르렀을 때 거미가 있는걸 보고 싫어서 안 들어가려다가 너무 몰려서 할 수 없이 들어갔는데 뒤이어 온 추적병들은 동굴의 거미를 보고는 다윗은 거미를 싫어한다고 했으니 여기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겨 돌아갔다고 살이 붙여지기도 한다.[77] 뒤의 두 일화는 탈무드에서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며 보여준 3가지 일화들이다. 다른 하나는 미친 사람인데, 다윗이 위험한 상황에서 미친 사람 흉내를 내자 아무도 그를 못알아보고 그냥 가버린 경우도 있었다.;;[78] 물론 메탈기어 드립은 농담이지만 솔리드 스네이크의 본명인 '데이빗'은 바로 다윗 왕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게다가 메탈기어 솔리드 V 더 팬텀 페인에 어린 시절의 리퀴드 스네이크로 보이는 '일라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 이름은 다윗의 형인 엘리압에게서 유래된 것이다.[79] 시편 80:5. 시편에는 다윗의 울적한 감정선이 잘 드러난다.[80] https://web.archive.org/web/20070120125149/http://www.momentmag.com/olam/Apr06/MOM-2006-04_maz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