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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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히브리어: 슐로모(שלמה, /ʃlomo/)
그리스어: 솔로몬(Σολομών)
라틴어: 살로몬(Salomon)[1]
'''출신'''
유다 지파 소속
'''생몰년도'''
기원전 990년 추정 ~ 기원전 931년
'''출생지'''
이스라엘 왕국 예루살렘
'''재위년도'''
기원전 970년 ~ 기원전 931년
약 41년
'''사망지'''
이스라엘 왕국 예루살렘
'''왕릉'''
이스라엘 왕국 다윗성
'''어머니'''
밧세바
'''아버지'''
다윗
'''가족관계'''
아들: 르호보암
'''이전 국왕'''
다윗
'''다음 국왕'''
이스라엘 왕국: 여로보암 1세
유다 왕국: 르호보암
1. 개요
2. 왕이 되다
3. 솔로몬의 지혜
4. 성군이자 명군으로서의 모습
5. 그러나...
6. 평가
7. 대중 문화에서
8. 기타


1. 개요


'''야훼께서 그 날 밤 기브온에 와 있던 솔로몬의 에 나타나셨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중략)...

 

'''"그러하오니 소인에게 명석한 머리를 주시어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고 흑백을 잘 가려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감히 그 누가 당신의 이 큰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솔로몬의 청이 야훼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장수나 부귀나 원수 갚는 것을 청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옳은 것을 가려내는 머리를 달라고 하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주리라. 이제 너는 슬기롭고 명석하게 되었다. 너 같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지 않은 것, 부귀와 명예도 주리라. 네 평생에 너와 비교될 만한 왕을 보지 못할 것이다.'''

공동번역성서, 열왕기상 3장 5~13절

'''전도자[2]

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개역개정 성경, 전도서 1장 2절

성전, 지혜 등으로 성경 내에서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으며, 그 자체가 '''유대교기독교, 이슬람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지혜로운 사람의 대명사로 쓰이는 인물이다.'''[3] 그의 치세 아래 이스라엘은 최대의 번영을 구가했으나 실책도 적지 않아 쇠퇴와 분열의 징조가 보였다.
''''지혜의 왕''''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성경에 등장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의미의 예디드야(여디디야)(ידידיה, Jedidiah).
구약성경 중 시편의 시 중 상당수, 잠언 구절 중 상당수를 집필했고 코헬렛(전도서), 아가의 작자로 알려졌다.[4] 부왕이 지으려고 했으나 짓지 못한 예루살렘 성전을 완성시키기도 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수많은 잠언과 시를 남겼다고 하는데, 엄청나게 많은 시편을 남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도 시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시편 중에서 솔로몬 왕이 썼다고 명확하게 나와있는 구절은 별로 없다.

2. 왕이 되다


그 유명한 다윗 왕의 아들. 어머니는 장군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 . 시바 여왕 및 다른 여인들과도 염문을 뿌린 것으로 봐서 집안내력인 듯(…).
본래 그가 다음 왕의 자리를 이을 가능성은 희박했는데, 비록 다윗의 총애를 받는 밧세바의 소생이었지만 왕위 계승 서열은 낮았기 때문이었다.[5] 당시 다윗의 아들 중 계승 서열이 가장 높았던 이는 넷째였던 아도니야였으며(첫째 아들이었던 암논은 셋째 압살롬의 칼에 살해당했고[6], 둘째인 길르앗은 요절했으며, 압살롬은 무리하게 왕위 계승을 시도하다가 요압의 창에 살해당했다), 그의 뒤에는 이스라엘의 군대 사령관 요압과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지원하고 있었다(즉 군부와 교단의 거물들이 뒤를 봐주고 있었다는 얘기다). 특히 요압은 다윗의 전성기를 이끈 불세출의 명장이자, 부왕의 정치기반이라 할 수 있는 유다 지파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어 다윗조차 그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던 희대의 권신이었다.[7] 솔로몬을 지지하던 제사장 사독과 근위대장 브나야가 있었지만, 아도니야 쪽의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비록 사울 왕에게 일족이 학살당하기는 했어도 판관 시절부터 쭉 이어져 오고 있던 엘리 계열의 지체높은 명문 제사장 가문이었던 것[8]에 반해, 솔로몬 쪽의 사독은 아비아달만큼 그 가문의 입지가 빵빵하지 못했고, 브나야 역시 군부의 수장인 요압과 정면으로 대치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밧세바와 선지자 나탄이 다윗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다윗은 전에 밧세바와 한 약속도 있었기 때문에 사독과 브나야를 불러들인 뒤 아도니야 일파가 손을 쓸 틈도 주지 않고 직접 왕위를 넘겨줘버렸다.[9] 이로 인해 아도니야 일파는 한 순간에 역적으로 몰려서 공중분해되었다. 역사적으로 왕에게 사랑받는 아내가 기존의 후계자를 몰아내고 자기 아들을 세우려 한 경우는 많았는데, 그 시도가 성공한 예 중 하나. 만일 솔로몬이 암군이었다면 다윗은 '애처의 꾐에 홀려 띨띨한(…) 후계자를 정해 나라를 망쳤다'라는 평을 들었겠지만 솔로몬이 명군이라서 다윗의 선견지명이 발휘된 것으로 남게 되었다. 허나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국 최대 전성기를 이룩하긴 하지만 동시에 쇠퇴의 원인도 제공하기도 했다.

3. 솔로몬의 지혜


솔로몬이 정확히 어느 시대 사람인지, 어느 지역의 왕인지는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와 관련된 일화들을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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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아이를 가지고 다투는 두 여인 앞에서 아이를 반으로 나누자고 함으로써 진짜 어머니를 찾아 낸 이야기'나 악마에게 '다리를 건설해 주면 가장 먼저 건너는 것의 영혼을 네가 가져가게 해 주겠다'며 다리를 만들게 해 놓고는 '''염소'''를 가장 먼저 건너게 하고 '''"내가 언제 인간의 영혼이랬나? 난 그런 말한 적 없다."'''고 발뺌하는 등 악마마저도 지혜로 속여서 삥 뜯었다는 일화[10][11]가 유명. 솔로몬의 72 악마, 솔로몬의 반지 등은 오컬트 계에서 상당히 이름 높다. 그가 썼다는 '솔로몬의 열쇠'는 중세 마법의 교본이며 큰 열쇠와 작은 열쇠로 나뉘는데, 작은 열쇠는 흑마법 계열로 통한다. 삼각형 2개가 겹쳐진 육망성은 '솔로몬의 봉인'이다.
이슬람교코란에도 등장하며, 특히 사람과 진(마신), 모든 동물들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능력과 반지가 유명하다.[12] 아랍어로는 '''술라이만(سليمان)'''. 마찬가지로 이슬람권인 터키어로는 쉴레이만(Süleyman)이다. 버튼이 번역한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진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에는 정말 한 번도 안 빠지고 이 이름이 나온다. 특히 이슬람교의 경우, 선지자 이전의 예언자 중 하나이며, 하느님께 인정받은 왕으로서, 부친 다윗과 둘 카르나인(Dhul Qarnayn)과 함께 항상, 가장 훌륭한 세 명군 중 하나로 존경받는다.[13] 덧붙여, 이슬람교에서는 후술할 솔로몬의 타락이나 우상 숭배 같은 것은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사망 시의 묘사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서서 잠들었으며, 하느님이 그가 짚은 지팡이를 서서히 약하게 하여 천천히 잠들듯 뉘였다고 한다. 여러모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이상적인 왕" 유형의 인물로 묘사된 듯. 또 성경에서는 그냥 단역에 지나지 않는 시바의 여왕과 관련된 많은 전승이 아랍에 내려오고 있다. 또한, 같은 아브라함 계통 종교로 분류되는 바하이 교에서도 예언자로서 대우받는다.
정교회에서는 "올바른 예언자이자 왕"으로서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그 외로, 기독교권 성경 인물 중 지혜와 번영, 그리고 성전 헌당으로 가장 유명한 "왕"인 만큼, 후대의 (다분히 세속적이던) 중세 교황이나 왕들의 모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펠리페 2세는 솔로몬을 모방하여 그의 성전을 따라 스페인에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 을 만들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하기아 소피아의 헌당식에서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를 이겼노라"고 했다고. 또한,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경당의 도안(치수) 또한 솔로몬 신전의 치수를 본떴으며, 내부 프레스코에서는 르네상스식으로 해석한 성전이 그려져 있다. 그 유명한 샤를마뉴 또한 앨퀸의 기록에 따르면, 스스로를 다윗이자 솔로몬으로 여기고, 또 그러한 찬사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지배층의 인식 이외로도, 14세기의 주교 Jacobus de Teramo가 법률을 설명하기 위해 집필한 책 <Liber Belial>에서는 모세가 변호하는 예수와 악마 벨리알의 재판의 판관으로 놓여지는 등 중세 서양에서는 아버지 다윗과 함께 존경(혹은 좋은 이미지)이 대단했던 모양.
그의 지혜는 야훼에게서 받았다고 한다. 성경을 디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윗 말기에 그의 아들로서 왕위를 받게 된 솔로몬은 일천번제라는 걸 하느님께 드렸다고. 이는 ''' 1,000마리'''를 번제라는 형식의 제사로 드린 것을 말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크고 아름다워 경악할 지경인데, 문제는 번제라는 게 그냥 태우기만 해서는 안되고, 를 도살하는 방법부터 나누는 방법에까지 꽤나 품이 들어가는 제사라는 점.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게 잡은 제물이 제사 율례에 따라 제사장과 그 휘하 성직자들(레위 지파)에게 나뉘어졌음을 생각하면, 성직자들로서는 고된 일이 아니라 좋은 선물이었을지도. 애초에 레위 지파라는 거대한 지파는 성직자 계층으로 묶여 있어 재산도 없고 사회 활동이 제한된 상황이었기에, 1,000마리를 처리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다. 딸린 식솔도 많았고, 일단 제사장에게 주고 나면 제사장이 그것을 일반 백성들에게 나눠줘서 같이 먹는 것도 가능하니, 1,000마리 분량의 쇠고기 처리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솔로몬이 좋은 왕이 되길 바라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은 건지, 솔로몬이 를 1,000마리나 태운 정성이 갸륵해서인지,[14] 하느님이 솔로몬의 제사에 답하여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나라를 잘 다스리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했다.[15] 하느님은 그의 바람에 만족했고, '''지혜롭다'''고 칭찬하며 그에게 더한 지혜와 그가 바라지 않은 것도 내렸고, 솔로몬 이후로 그와 같은 지혜를 가진 자는 없을 것이라고 복을 내렸고, 덤으로 부귀영화도 같이 줬다.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는 성경의 구절을 볼 때 하느님과 만났던 것은 꿈 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솔로몬이 하느님께 부탁드린 지혜는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לֵ֤ב שֹׁמֵ֙עַ֙ 즉, 이해력이므로 지혜가 아닌 지식습득능력으로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다.[16]

4. 성군이자 명군으로서의 모습


솔로몬의 통치하에 통일 이스라엘은 최대 번영기를 구가하였는데, 예루살렘에서는 하도 이 많아 마치 돌 같이 여기며 귀하게 보지도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공으로 받는 금만 해도 매해 666 달란트(39,960 파운드 = 약 18,000 kg)였다고(...). 금 666달란트 정도면 지금 기준으로 약 '''"1.3조 원"에 해당한다.''' 또한 시대마저 잘 만났는지, 당대 중동의 맹주 위치에 있던 이집트 제 21왕조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며 솔로몬 통치하의 이스라엘은 보다 더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7]
성전 건축을 할 당시에는 페니키아(레바논에 있던 고대 국가)의 중심이었던 티레에서 히람 왕이 보낸 기술자가 와서 도왔는데, 목재로 쓸 엄청난 양의 백향목[18]들을 벌목하여 여러 개의 뗏목으로 엮어 공수했다고 한다. 티레는 히람 시절 때 번영했는데, 솔로몬은 그와 결혼동맹을 맺고 서로 같이 무역을 하기도 하는 등 경제적 교류가 활발했다고 한다.
또한 성경의 묘사에 따르면 성전 이외에도 호화로운 궁을 건축하였으며, 전성기 이스라엘의 넓은 강역을 여러 개의 지역으로 구분하고 총독을 보내어 통치했다고 한다.[19] 또한 홍해로 통하는 에시온게벨 등 여러 곳에 항구를 지어 무역을 활성화했으며,[20] 동시에 국방에도 신경을 써 전략적 위치에 있는 므깃도 등지에 병거를 정비하고 성을 세워 일종의 요새 도시, 혹은 성새 도시로 만들었다.[21]

5. 그러나...


허나 이런 영광과 풍요를 구가했던 그도, 늙으면서 몸은 삭아갔고, 나이 먹으면서 처첩들로 만족하면서 그의 노년기 이후로 조금씩 지혜도 쇠락해간다. 결국 젊은 들이 그에게 강한 힘을 행사[22], 그가 젊을 때 강성했던 나라는 노년기부터 조금씩 쇠락해간다.
하느님의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은 솔로몬이 말년에 왜 그렇게 타락하고 다른 신을 섬기게 되었는지에 대해, 성경에서는 자세하고도 분명(?)하게 나온다.[23] 여자 때문이라고. 너무나 많은 이교도 여자들을 첩으로 두게 되어서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길로부터 멀어졌다고 한다.[24] 일찍이 모세의 율법에서도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금하고 있다.[25][26][27] 솔로몬의 이러한 행적은 훗날 예언서 화자들에 의해 죄를 지은 자로서 부각되고 만다.
그래도 결국 말년에 잠언과 전도서 등을 쓰며 회개하는 모습을 보인다. 야훼 하느님은 솔로몬에게 '너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두 개의 나라로 갈라질 것인데, 너희 아버지 다윗을 생각해서라도 지금 당장은 아니고 네가 죽고 난 후 너의 아들이 왕위에 즉위할 때 갈라질 것' 이라고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에 후술한다. 이건 하느님이 다윗 생전에 다윗에게 자손들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사고는 많이 쳤어도 하느님만을 섬겼기 때문. 그리고 결국 그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르호보암 즉위 직후 이스라엘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갈라진다. [28]
신명기 17:16-17에도 왕이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고(백성을 애굽의 길로 인도할 것),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마음이 미혹됨), 은금(스스로를 위함)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열왕기상엔 은을 돌같이 할 정도로 과도한 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병거가 1,400대, 마병이 12,000명에 왕후가 칠백, 후궁이 삼백이라할 정도로 많이 두었다. 신명기에서 왕이 된 자가 하지 말아야 할 모든 계명을 어긴 셈이다. 이후 이교도 여성의 문물로 인한 우상숭배로 인해 계명을 어긴 댓가로 나라를 빼앗아 신하에게 줄 것이 예언된다. 다만 아비인 다윗을 생각해서 솔로몬 대엔 하지 않고 그 아들대에 나라를 빼앗길 것이라 한다.이건 르호보암 입장에서 할아버지 되는 다윗이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하였고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탐하는 죄를 지었으나 이내 회개하고 바른길을 따르며 일생을 살았던 영향인 것이다.
결국 솔로몬은 말년에 전도서를 쓰면서, 일생 동안 엄청난 지혜와 많은 부로 온갖 것을 다 해보고도 '''모든 것이 헛되더라'''라는 명언을 남기며 '''그러니 너는 젊었을 때 네 하느님을 찾으라'''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분열과 몰락의 징조는 그의 치세 중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솔로몬 치세에 이미 남쪽 에돔의 하닷과 북쪽 아람의 르손이 거병하여 다윗이 이루어놓은 강역의 절반이 날아간 상태였다. 이들은 본래 다윗에게 나라가 망하고 쫓겨다니던 인물이었는데 다윗이 죽고 요압까지 숙청당해 이스라엘에 이렇다할 군지휘관이 없어진 상황을 틈타 다시 돌아와 나라를 다시 일으킨 것이다. 이로인해 솔로몬 치세에 사울왕 시절의 이스라엘 본연의 영토밖에 남지않은 상태였고 남북으로 지속적으로 공격당해 국가가 지속적으로 쇠퇴하던 상태였다. 고대에는 군사적 실적이 정권의 존속에 차지하는 비중에 절대적이었던 만큼 이스라엘 몰락에 요압 숙청으로 인한 군사력 저하도 큰 요인이었다. 국방부터 무너지던 상태였기에 이스라엘 내부의 동요도 커질 수 밖에 없어 각 지파들이 솔로몬 왕가의 지배력에 의심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셰숑크 1세[29]가 제 22왕조를 열면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며, 그의 사후 왕위를 이은 르호보암은 폭군으로 묘사된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집트에서 귀국한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백성들이 "솔로몬 부왕께선 너무 가혹하셨는데 르호보암 왕께서 저희 세금과 노역 좀 줄여 주세요"라고 한 걸 보면 솔로몬은 의외로 백성들을 꽤 쥐어짰던 듯(...).[30] 물론 르호보암은 "내 새끼손가락은 울 아버지 허리보다 굵고, 울 아버지가 너희를 채찍으로 다스렸으니 난 전갈로 너희를 다스리겠다"[31]며 깔끔하게 묵살했고(…)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이에 반발하여 독자적인 나라를 세워 버린다.[32] 이후의 이스라엘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남(南) 유다 왕국과 에브라임 지파를 필두로 한 10지파의 북(北) 이스라엘로 갈라지게 되었으며,[33] 각각 바빌로니아아시리아에 정복당하기 전까지[34] 한번도 다시 통일되지 못하였다.

6. 평가


여러모로 '''공과 과가 명확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만든 결과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하느님이 주신 지혜와 아버지 다윗이 물려준 탄탄한 국가를 나름 잘 유지하다가 끝에 가서 사치와 향락으로 망쳐버린 원흉. 즉 솔로몬 시대의 번영은 '''"속빈 강정"'''이였던 셈이다.[35] 그는 분명히 명군의 자질이 있었고 즉위 이후에도 하느님에게 받은 지혜로 나라를 성실히 이끌어갔다. 그의 통치기는 이스라엘의 절정기였으며 은이 바닥에 굴러다닐 정도로 부강했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도 위상이 높아져서 이집트 제 21왕조와 결혼동맹을 맺고 주변국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입지를 굳혀나갔다. 또한 국방과 행정에도 신경을 써서 군사력을 보강하고 지방에 총독을 파견하는 등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전제 왕권을 구축해나갔다.[36] 문제는 그가 '''이렇게 만든 결과물을 가지고 축첩질을 일삼으며 놀아재꼈다는 것.'''[37][38]
사실 그의 치세는 겉으로는 부강해 보였으나 속은 썩어가는 '''기아의 성세, 속빈 강정이였다.''' 앞서 언급된 신명기 17:16-17은 너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두개의 나라로 갈라질 것이나 다만 너의 아버지 다윗을 생각해서 네가 아닌 너의 아들 대에 갈라지리라고 언급한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 시대의 번영은 솔로몬이 단독으로 만든 결과가 아니라 아버지 다윗이 하느님과 함께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인 것.[39] 즉 다윗 대에 다져진 것을 바탕으로 솔로몬 대에 전성기를 누린 것이 맞다. 물론 솔로몬이 못하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고 명군의 자질은 분명히 드러났으나 아버지 다윗에 비하면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더욱히 그가 막대한 조공을 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축첩질에 골몰하면서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선민[40]으로서의 본질을 스스로 버리게 되었고 예전의 보여왔던 지혜와 명군으로서의 자질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그의 만행을 보다 못한 하느님은 그를 꾸짖으며 이스라엘의 멸망과 분열을 계시하셨으며 결국 그 말대로 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된다. 물론 그도 사태를 파악할 총기 정도는 남았는지 말년에 전도서를 쓰면서 회개하긴 했지만 그가 자행했던 엄청난 트롤링은 결국 이스라엘이 다시 분열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솔로몬의 타락에 대한 열왕기의 기록의 비판적 평가에 대해서는 견해 차가 있을 수 있다.''' 왕실 역사가들의 사관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역대기와는 달리 열왕기에는 예언자들의 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예언자들의 사관은 아무래도 왕실 역사가들에 비해서는 왕국에 대해 비판적일 것이다. 가령 역시 예언자들의 사관이 반영되었을 사무엘서에서는 왕정 자체가 신정이 아니기에 신의 뜻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면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솔로몬의 정책들에 대해서도 열왕기는 비판적인 관점을 우선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솔로몬이 궁궐을 건축하고 사치와 호화를 누렸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왕실이 정당한 부와 영광을 누리고 드러내는 것을 공연히 문제삼는다고 항변할 수 있다.
외국 여인들을 첩실로 삼았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이는 외교의 일환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왕족과 귀족의 여인들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은 가장 확실한 동맹의 방법이자 효율적인 외교 전략이다. 순혈주의적인 예언자 전통의 관점에서는 문제이겠지만,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불가피한 외교적 선택이다.[41]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왕 다윗도 암몬 왕의 딸이나 헷 사람의 아내 등 외국의 여인들과 결혼하였음은 마찬가지인데, 솔로몬만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부당하다. 하지만 혼인동맹이 확실한 외교적인 안전장치가 되지 않는다는 사례는 역사상 무수히 많고 솔로몬 또한 이집트 파라오의 딸과 결혼한것이 이집트의 왕조교체로 인해 의미가 없는 일이 되어 이집트의 반이스라엘 정책을 막지 못해 이집트가 여로보암의 망명을 받아주고 르호보암 치세때 예루살렘을 침공해오는 지경에 이르렀다.[42]
솔로몬이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을 위해 신전을 건축했다고 비판을 받지만, 솔로몬이 신앙을 버렸다기 보다는 다른 종교를 관용하는 정책을 채택한 것이 배타주의적 예언자들에게 그렇게 인식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예언자들의 입장에서는 솔로몬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관용하는 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장려하는 것'과 진배 없고, 나아가 그 스스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도 진배 없다고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교류하는 중심지인 수도의 나라를 통치하는 왕으로서는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하고 존중하는 정책을 채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람 장군 나아만이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왕이 우상에 절을 할 때 어쩔 수 없이 그 옆에서 부축하는 일을 예언자 엘리사가 허용했던 취지를 고려하여 솔로몬의 행적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걸 고려해도 솔로몬이 도를 많이 넘은 것은 맞다. 교류나 외교적 차원에서의 혼인은 그렇다 쳐도, 문제는 지나치게 방탕했다. 교류를 해도 지킬 건 지켜야 되는데, 왕이 앞장서서 놀아재끼고 있으니 나라가 망하는 건 당연하다. 결국 솔로몬은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하는 데 일조하게 되었다.[43]
정리하자면 여러모로 후대의 군주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만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명군의 모습과 암군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입체적인 인물이기 때문. 사실 군주의 자리가 여러모로 초심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은 맞다. 전세계 어느나라를 봐도 군주가 초심을 잃고 타락한 사례는 많고 대놓고 십전노인, 신선이라고 자처한 건륭제 같은 사람도 있었으니 솔로몬 정도면 그나마 얌전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솔로몬을 통해 성경이 후대에게 말하고 싶은 바는 바로 겸양과 자아성찰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4] 솔로몬이 재위 초반에는 지혜를 구하며 근면하게 제국을 통치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이후에 자신의 욕심을 앞세워 다른 나라를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하면서부터 안에서부터 서서히 곪아갔던 것은 지도자 한 사람의 교만과 타락이 얼마나 큰 재앙으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45] 이는 역사가들이 과거에 나라를 크고 아름답게 만든 군주를 이상적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내치와 경제력을 안정시킨 군주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시각과도 일치한다. 즉 솔로몬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놀아재꼈다"'''라는 측면보다는 나라를 크고 넓게 만들 능력은 있었으나 커진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었다고 보는 관점이 옳은 관점일 것이다.

7. 대중 문화에서



8. 기타


또한, 아버지 다윗과 달리, 성경 이외의 기록으로 생존이 확인되지 않은 인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시기에 번영했을 광산(부)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 왕이 있다는 것은 타 기록이나 연구에도 존재하나, 그의 이름이 "솔로몬 혹은 여디디야"란 건 남아있지 않다고. 원래 팔레스타인 자체가 기록이 적은 편이고 특히 솔로몬 시대의 기록은 발견된 양이 적어 연구가 쉽지 않다. 다윗 왕가의 실존은 텔 단 비문 발견으로 증명됐고 그로 인해 최소주의자든 최대주의자든 솔로몬이라는 인물 자체는 존재했겠지만 성경에 나온 부에 대한 묘사는 과장됐을 것이라 본다. 솔로몬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적어도 간접적인 증거는 존재하므로 학계에선 솔로몬의 부와 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Shalom과 같은 어원을 두는, '평화'라는 의미라고 한다. 예루살렘의 '살렘' 또한 같은 어원이다.[2] 솔로몬을 일컫는다.[3] 예를 들면, 솔로몬의 심판이란 표현은 굉장히 흔하게 쓰이며 명판결이란 의미로 이해될 것이다. 솔로몬의 선택이라는 방송 프로그램과 아이의 생모를 밝히는 송사는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4] 다만 코헬렛과 아가는 어휘의 특성상 훨씬 후대의 누군가가 솔로몬의 이름을 빌려서 지었다는 게 정설이다.[5] 태어난 순서에 따르면 낮지만, 성경 속 인물들 사이의 계승 관계를 보면 태어난 순서가 전부는 아니다.[6] 권력다툼의 요소가 아예 없다고 할 순 없겠으나 애초에 암논이 살해당할 만한 짓을 했다. 압살롬 문서 참조.[7]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된 후, 다윗은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함부로 압살롬을 죽인 요압을 군대 사령관 직에서 쫓아내고 반란군의 사령관이었던 아마사를 대신 기용했지만, 요압은 오히려 아마사를 살해하고 자신의 지위를 되찾았다. 요압 문서 참조.[8] 다만 엘리 계열은 이전에 지위를 이용하여 방약무도한 짓들을 하였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다.[9] 다만 이전부터 솔로몬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도니야 일파의 행위가 반역일 수 있다.[10] '악마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다리는 사실 고대 로마인들이 만든 것이었으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중세가 되면서 그 사실을 잊어버린 중세 서유럽인들이 "이렇게 대단한 다리를 인간이 만들 수 있을 리 없다. 악마가 만든 게 틀림없어!"라면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The Devil's Bridge라고 검색해 보면 아름다운 다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11] 이후 사바트 같은 데 나오는 하급 악마들은 주로 '''염소''' 모습으로 나타난다.[12] 천일야화 등에 등장하는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진"과도 연관이 있다. 그를 그 램프(혹은 호리병)에 가둔 것이 솔로몬 왕. 이를 포함한 수많은 전설에서, 묘하게도 소원을 들어주거나, 조언을 주는 역할로 묘사된다.[13]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Solomon 문서.[14] 제사 규례에 따르면 재산 형편에 따라 적절한 축생으로 드릴 수 있었다. 를 도저히 못 드리겠으면 으로, 양조차 안되면 비둘기로 드리라고 되어 있다. 비둘기마저 안 되면 곡물로 드릴 수도 있다고. 그런데도 소 1000마리나 바친건 엄청난 정성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15] 전자는 누구나 수긍하겠지만 후자에는 조금 의아할 수도 있을텐데 사실 구약에서의 관점을 보면 후자는 매우 중요하다. 솔로몬이 말한 선악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뜻하는게 아니라 야훼를 잘 섬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 구약, 신약, 쿠란 가리지 않고 아브라함 계통 종교는 하나같이 야훼/하나님/알라가 최고존엄이기에 그를 잘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애초에 이 계통 종교에서는 일어났던 모든 일은 그냥 신의 뜻대로 된 일이다.) 예시로 후세의 연구로는 괜히 아시리아에게 시비걸었다가 남유다 전체가 초토화되게 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히즈키야는 야훼를 잘 모셨다는 이유만으로 선하다고 평가받은 반면 그 나라를 되살리고 남유다에 중흥기를 가져온 므나쎄는 아시리아에 굽실거리고 그들의 신을 받아들였다며 악하다고 평가받는다. 또 성경에서 최초의 남녀인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이 직접 창조한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먹어 죄악을 저질렀고 이스라엘, 유다 가리지 않고 최고의 평가를 받는 그 다윗마저 소소한 잘못을 저지르고 그 후손은 또 악하다는 평을 받는 왕이 여럿 나왔고 북이스라엘은 아얘 모든 왕이 악하다고 평가받으며 심지어 애훠로부터 직접 지혜까지 받은 솔로몬조차 말년에는 잘못을 저질렀으며 남유다의 멸망은 므나쎄의 악 때문이며 여로보암 왕가, 바아사 왕가, 오므리 왕조의 비참한 몰락도 다 악 때문이라고 서술된 것을 보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는 구약에서는 정말 중요한 것이다. 작게는 왕조를, 크게는 나라를 보존하는 것과 직결된 것이니까[16] 일부 목사들이 원문으로는 "듣는 마음"이라고 혹은 "경청"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조어법상 불가능하다. 현대 히브리어에서 שֹׁמֵ֙עַ֙가 "소리"의 뜻을 가지긴 하지만, 이 경우에는 לֵ֤ב와의 결합이 불가능하다.[17] 일례로, 이집트 왕조로선 비교적 드물게도 파라오의 딸이 솔로몬에게 시집온 것과 그 외 중동의 여러 중소규모 왕국과 세력에서 그에게 딸을 바쳐, 소위 말하는 300명의 아내와 700명의 처첩을 가지게 된 것을 들 수 있을 듯. 당시 이집트 왕조는 근친혼으로 유명한 왕조였고, 때문에 다른 나라에 왕족을 보내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았는데도 이게 가능했다는 것이 놀랍다.[18] 지금도 레바논은 백향목 명산지다.[19] 성경의 묘사에는 전성기의 이스라엘 강역이 시나이 반도부터 요르단 강 동편, 페니키아, 그리고 키프로스 섬과 시리아, 먼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라고 나와있으나, 이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 성경에서 솔로몬 시대 이스라엘의 최대 영토 확장의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은 선왕 다윗인데, 이 당시에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딥사, 가나안 남쪽 부근의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펼쳐졌던 이스라엘 바깥쪽의 세력도는 완전한 정복이 아니라 조공을 받는 것을 조건으로 화친을 맺은 '''이스라엘의 제후국'''의 개념에 더 가까웠을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20] 지중해-근동을 넘어 인도와도 교역을 했다는 말도 있다.[21] 참고로 이 므깃도(Meggido)라는 도시는 그 유명한 아마겟돈이라는 말의 원형이라고 한다. 정확히는 하르마겟돈.[22] 성경에서는 들이 섬기던 이방 우상들을 솔로몬이 섬기기 시작했다고 나온다[23] 북이스라엘 입장에서 쓰여진 열왕기에서는 자세히 나온다. 하지만 남유다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대기에서는 생략되어있다. 북이스라엘 자체가 솔로몬의 실정에 반발해서 독립한 나라이기에 그런듯.[24] 이를 우상 숭배가 아니라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인 일종의 다문화 현상으로 보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25] 민수기에서 발람이 이스라엘이 죄를 짓게 하기 위해 발락에게 첫 번째로 조언했던 것도 모압인과의 혼인이었다.[26] 모세도 이방여인과 혼인하여 형인 아론과 누나인 미리암에게 책망을 받는다.[27] 오늘날에도 개신교인 가정에서는 특히 딸은 비개신교인 가정의 아들(특히 장남)에게 시집보내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하다. 가장 큰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제사 문제 때문이다.[28]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북쪽 왕국이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였다.[29] 개역개정판 성경 기준으로 '시삭'.[30] 건축사업에는 이방인들이 동원되어 사역을 하였는데 문제는 워낙 넘쳐나는 금과 은으로 성경학자들 사이에선 마치 아즈텍의 금과 은으로 엄청난 인플레를 맞이한 스페인과 같이 이스라엘도 심각한 인플레를 맞이한건 아닐까 추측한다. 단, 저 징징댐에 대해서는 다윗 대까지 세력이 강했던 각 지파의 수장들이 그간 솔로몬의 강력한 왕권에 억눌려 있다가 반발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 또한 상당하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과 '''세력을 유지하려는 귀족(혹은 지방 호족)'''들의 대립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냥 심플하게 말년의 솔로몬을 두고 가혹했다고 지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31] 처음에는 나이든 신하들한테 조언을 구했을 땐 백성들의 세금과 노역을 좀 풀어주면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답변이 나왔는데, 젊은 르호보함은 그게 별로 마음에 안들었는지 같이 자란 청년들한테 조언을 구했고 저 따위 답변이 나왔다.[32] 이미 부왕 다윗부터가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 추대되어 7년간의 내전 끝에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될 수 있었고 압살롬의 반란 진압 이후 과정에서 북쪽 지파들이 유다를 상대로 항의하는 사건이 있는 등(사무엘하 19장 후반) 통일 왕국 자체가 애초에 불안정했다. 결국 터질 일이 터진 것.[33] 르호보암계의 남유다가 왕의 혈통만큼은 잘 이어나갔던 데 반해, 여로보암이 세운 북이스라엘은 왕통이 몇 번이나 바뀌는 등 바람 잘 날 없었다(…). [34] 시기상으로는 아시리아의 북이스라엘 정복이 먼저다.[35] 이는 먼 훗날 전세계 최강의 절대군주로 평가받던 건륭제에 대한 평가와 유사하다. 건륭제 역시 측근비리를 눈감아주고 자신 역시 생일에 금불상 3만개를 선물받는 등 재산 모으기에 골몰하며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폐단들은 고스란히 후대에 커다란 재앙이 된다.[36] 성경만 봐서는 이해가 안될 수 있지만 역사책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군사력 보강과 지방관 파견은 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해가 안된다면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제일 먼저 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자.[37] 여러모로 천보 연간의 당현종이나 건륭제에 비견되는 가장 큰 부분이다. 솔로몬이 이민족 여자와 놀아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당현종도 아들들의 첩실을 빼앗고 양귀비와 양국충에게 놀아났고 건륭제는 여색에 빠지진 않았으나 재산모으기에 골몰하고 아부하는 이들을 가까이하면서 '''니오후루 허션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38] 건륭제 사후 그 아들인 가경제가 허션을 숙청하고 그의 재산을 조사해보니 청나라의 15년치 재산에 맞먹었다고 한다. 사실 건륭제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무리한 대외원정이나 지식인 탄압이 아니라 말년에 재산모으기에 골몰하면서 일부 총신들의 비리를 눈감아주어 엄청난 폐단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아들인 가경제도 그대로 본받아 허션의 몰수한 재산을 그대로 내탕금에 집어 넣어서 "허션이 넘어지니 가경이 배부르다"라는 속담까지 만들어지게 되었다. 여러모로 솔로몬과 솔로몬 사후의 아들들과 비견되는 부분이다.[39] 한 국가가 결정한 정책이 결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비슷하게 청나라는 강희제 때부터 다져온 기반을 바탕으로 건륭제 때 절정을 누렸으며, 프랑스의 절대 군주 루이 14세 역시 할아버지 때 부터 닦아온 기반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리고 위의 두 사람은 본인들의 물욕과 과시욕으로 나라를 말아먹는데 일조했다.[40] 선택된 백성, 즉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성도라는 의미. 이스라엘은 이전부터 선민이라는 것으로 세상과 자신들을 구분지으며 세상과는 다른 존재임을 의식하고 있었다.[41] 특히 호족 중심의 연맹왕국이나 유목 국가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정주 민족과의 동맹을 통해 안정적으로 물자를 공급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인데 이스라엘과 비슷한 유목국가인 청나라나 오스만제국도 안정적인 정통성 확보를 위해 몽골(청-청의 황제는 몽골 귀족과의 통혼을 통해 몽골 카간자리도 대대손손 해먹었다.), 아랍인(오스만) 등 다 다른 민족과의 통혼은 흔한 일이였다.[42] 위에 사례로 나온 청나라오스만 제국의 경우만 봐도 답이 나오는데 청나라를 세운 건주여진의 경우 자신들의 풍습을 한족들에게 강요하고 기록 말살까지 자행했음에도 결국은 한족에 대부분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어버렸고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이슬람을 받아들인 시점부터 아랍인과 서서히 동화되었다. 반면 같은 유목제국임에도 다른 피지배민족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던 몽골인들은 비록 분열되긴 했지만 자신의 언어와 풍습을 현대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결국 당장의 국가 발전에는 혼인동맹이나 융화정책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민족의 정체성 측면에서 보면 손해가 맞다. 즉 국가가 아닌 민족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성경의 관점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셈이다.[43] 사실 솔로몬 정도면 그나마도 운 좋은 사례이다. 당장에 본인의 대에 반란이 일어나 말년을 반 유폐상태로 보냈던 당현종이나 무리한 대외원정으로 인한 반란으로 살해당한 수양제, 사후 2대만에 혁명으로 왕조가 단절된 루이 14세같은 사례도 있다.[44] 이쪽에 비견되는 자세가 바로 백성들이 여유있는 삶을 누리도록 한 앙리 4세나 하늘을 섬기는 신하를 자처했던 강희제, 워커홀릭 수준으로 관리들을 잡아대고 관리, 신사층이 비리를 저질러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을 경계하며 근면하게 제국을 통치한 옹정제의 통치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5] 사실 영토가 넓어지고 인구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통치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왜 오스만 터키가 공중분해되었고 중국이 왜 지금까지도 일대일로라는 이름으로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애초에 솔로몬이 정복했던 지역은 '''지금도 유엔이나 나토조차 개입하기 꺼려하는 화약고이자 국제분쟁지역으로 악명이 자자한 곳이다.''' 그런데 이런 곳을 무력으로 정복해서 한 나라로 묶는다? 솔로몬이 아니라 다른 누가 온들 개판이 될 것이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