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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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메르와 아카드의 뒤를 이어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 유역에 존재한 고대 국가. '바빌로니아(Βαβυλωνία, Babylonia)'라는 국가명은 수도였던 바빌리(바빌론)에 접미사를 붙여 그리스-라틴식으로 부른 것이다. 바빌론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을 기원전 23세기 아카드의 점토판에서 찾을 수 있을 만큼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이후 신바빌로니아 왕국이 페르시아에게 멸망한 기원전 6세기 경까지 이어진다.
유적으로는 바빌론의 문, 바빌론의 공중정원, 바벨탑이 유명하다.
2. 고대 바빌로니아
기원전 2000년대 수메르 족과 아카드 족의 여러 도시들이 한창 이전투구를 벌이던 시절, 이들과 다른 셈 족의 일파인 북서 셈어파 언어를 사용하던 아모리인은 바빌론을 세우고 메소포타미아의 정치, 상업의 최대 중심지로 만들었다. 바빌로니아의 아모리 족은 본래 자신들의 언어인 아모리어 대신 현지 언어인 아카드어를 더 많이 사용했고 남부 지역을 기반으로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후 도시국가 바빌론이 영역 국가 바빌로니아로 확장되어 갔다.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함무라비(Hammurabi) 시대에 이신, 우루크, 라르사 등의 수메르 도시국가와 마리 왕국 및 엘람까지 무너뜨렸다. 마침내 전 메소포타미아를 석권하여 서쪽으로는 지중해까지 닿는 대국이 되었다. 이후 명군들의 치세가 계속되면서 바빌론은 거의 역사상 최초로 ''''세계의 수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약 300년간을 고(古)바빌로니아 시대로 분류한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왕을 마르두크(Marduk) 신의 대행자로 믿었고 모든 왕들은 '신성한 도시'인 바빌론에서 왕권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료 제도와 세금 제도, 중앙 정부 체계를 갖추었다. 신성화된 도시 바빌론의 이미지는 그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었다.
문화 쪽에서도 후대에 영향을 끼친 것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엘람 인을 추방한 후 왕국을 안정시킨 뒤 함무라비의 지시로 법전을 만든 것이다. 이는 함무라비 법전으로 불리며 체계적인 성문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함무라비 법전의 사본이 수사(Susa)에서 1901년에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프랑스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삼수일루나(Samsu-iluna) 시대부터 점차 분열이 시작되어 엘람 등지가 떨어져 나갔다. 결정적으로 BC 1531년 삼수디타나(Samsu-ditāna) 왕 때 히타이트의 침략을 받아 아모리 인의 왕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아모리 왕조는 사라졌지만, 이후에도 바빌로니아는 부활해서 카시트인, 엘람 인들의 왕조가 이어지다가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3. 신바빌로니아
4. 기타
- 남성이 돈을 주고 여성과 결혼할 수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결혼을 희망하는 여성이 경매 시장에 나가면 남성이 값을 불렀을 때 가장 높은 값을 부른 남자를 여성이 선택할 수 있었다. 여성이라고 반드시 경매 시장에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희망자들이 자발적으로 신청하면 나가는 방식이었으며, 값을 높게 불러도 남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인신매매와는 다르다. 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이 시대에 자유연애로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자유연애는 근대에 들어서야 등장한 개념이며 근대 이전 결혼이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자 상속권의 배분이었으므로 중매 결혼이 대부분이었다. 경매혼 시장은 어떤 관점에서는 중매보다도 더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서로 협상할 수 있으므로 사실상 현재의 결혼정보회사와 비슷한 셈이다. 또한 남편과 아내 양측 모두 합의 하에 이혼이 가능했고, 몇 가지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일방적으로 결혼을 무효로 돌릴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남편의 외도가 심하거나, 아내를 멸시하고 폭력을 사용하는 등의 이혼 조건이 충족되면 법에 따라 일방적으로 결혼을 무효로 돌리고 다른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