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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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74년 ~ 기원전 853년
1. 개요
성경의 등장인물로 북이스라엘의 7번째 왕이자, 오므리 왕조의 2번째 왕이다. 부친인 오므리 왕이 세멜에게 사마리아를 사기 전에 태어났으므로 디르사 출생.유다 왕 아사 제 38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라 사마리아에서 22년 간 다스렸다.
그런데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이스라엘의 어느 선왕{先王}보다도 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였다.
2. 왕위에 오르다
선대 왕이었던 오므리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왕위에 올랐으며, 아내는 페니키아(개역한글판 기준으로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 열왕기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이스라엘 왕이며, 동시에 구약 내내 '''가장 비중있게 까이는 북이스라엘 왕'''이기도 하다. 실제로 열왕기상 중반부 이후부터는 아합과 엘리야의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열왕기상 17장 28절에 최초로 등장하면서[1] 사악한 왕인 오므리 이상으로 사악한 악의 덩어리라며 아내인 이세벨과 세트로 까이는 왕이지만, 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부왕인 오므리의 뒤를 이어 막장이었던 북이스라엘을 안정화시키는 데 공을 들인 나름 능력있는 군주이기도 했다.
성경의 내용만 봐서는 이게 무슨 말인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부왕인 오므리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까지만 해도 북이스라엘 왕가는 2대 이상을 넘어간 일이 없었다.[2][3] 조금만 힘 좀 쓴다 싶으면 곧바로 왕을 끌어내리고 자기가 왕을 해먹던 막장이 바로 이 시절[4] 이었고, 이 왕좌의 게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인물이 바로 아합의 부친인 오므리였다. 그리고 오므리는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천도한 이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왕권과 내치를 굳건히 하였으며,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 역시 이 당시에 이뤄진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이 당시 북이스라엘은 '''오므리의 땅'''이라는 별호로 불릴 정도로 그의 치세가 한 왕조의 창업 군주로서 성공적이라는 걸 유추할 수 있는 기록도 남아있다.
아합은 이러한 부친의 정책을 계승하여 북이스라엘을 최대한 안정화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종교집단, 즉 예언자(선지자)들의 대한 견제로 시돈(페니키아)의 공주이자 아내 이세벨에게 종교 권한을 일임하여 바알(멜카르트) 숭배를 추진했다.[5] 적대관계였던 남유다도 압도적인 국력을 바탕으로 사실상 속국화했고 딸 아달리야를 시집보내 결혼동맹을 맺었다. 또한 아람, 남유다, 에돔, 모압 등 주변국들과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막 레반트 지방으로 팽창해오던 아시리아를 막아내기 위한 동맹체제를 구축했고, 기원전 853년 시리아에서 벌어진 '''카르카르 전투'''에서 아시리아 왕 살마네셰르 3세가 친정한 6만 군사를 30개국 연합군 3만 5천 명의 군사로 격파, '''아시리아의 레반트 진출을 한 세기 늦추는''' 큰 공훈을 세웠다.참조
하지만 바알 숭배 추진 때문에 아합은 당대 예언자들의 대표인 디셉 사람 엘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에겐 악의 축과도 같은 인물이었고, 이들이 아합의 업적은 빼고 악행만 써서 남긴 글의 내용이 후세의 가장 거대한 종교의 경전으로 전해지는 바람에 후세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 어차피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옥에 가두고 재산을 빼앗는 등 잘못된 행위도 많이 저지른지라 백성들에게 인자하고 선한 왕은 아니었다고 평가받고 있지만.[6]
3. 엘리야와의 대결
여기서부터는 대부분 구약성경 열왕기상에서 발췌된 부분이다.
아합 왕의 바알 숭배를 두고 디셉 사람 엘리야는 왕의 앞에 나아가 가뭄이 들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에 아합과 이세벨은 들은 척도 안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벌어지자 오히려 이세벨은 '이게 다 저 놈이 바알을 노하게 해서 그런 거다!'라며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하였다.[7] 결국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마수를 피해 숨어 사는 처지가 되었다.길르앗의 티스베에 살고 있던 티스베 사람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비는 물론 이슬도 한 방울 이 땅에 내리지 않을 것이오."
열왕기상 17:1 (공동번역성서)
가뭄이 지속되자, 아합은 궁내대신 오바드야(오바댜)[8] 와 함께 말먹이풀을 찾아 궁을 나섰는데, 마침 아합과 따로 움직이던 오바드야가 엘리야를 만났다. 오바드야는 엘리야에게 필시 왕이 댁을 죽이려고 길길이 날뛸 테니 빨리 도망가라고 말했지만, 엘리야는 걱정 말고 아합을 나에게 데려오라고 했으며, 아합은 오바드야가 예상한 대로 '''"네놈이 바로 이스라엘에 저주를 내린 악의 축이로구나!’'''하며 엘리야를 잡아죽이려 했다.
하지만 엘리야는 비범하게도 오히려 '''"이스라엘을 파탄낸 악의 축은 내가 아니고 당신과 당신의 왕조이다!"'''라며 되받아치고 당신 아내를 따르는 바알과 아세라의 사제들과 가르멜(갈멜) 산에서 한 판 붙자고 결투를 신청했다.
결투 방식은 각자의 제단에 각을 뜬 송아지를 놓고 먼저 불이 붙는 쪽이 승리하는 것이었는데, 첫 턴에 바알의 사제들이 한아름 댄스를 추면서 그들의 신인 바알의 이름을 불렀지만 반나절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에 엘리야가 "이야, 욕본다. 좀 큰 소리로 불러보지 그러셔. 자네들 신께서 지금 마실 나갔든가, 아님 졸고 있는 거 아녀?"라고 이들을 디스하자 이번엔 오기가 생겼는지 아예 각종 흉기로 자신들의 몸을 자해하면서[9] 더 큰 소리로 허공에 외쳤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효과는 전혀 없었다.
이윽고 엘리야의 차례가 왔다. 엘리야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돌로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세우고 제단 주위에 약 15L 용량의 도랑을 만들었다. 그리고 난 후에 사람을 시켜 통 넷에 물을 채워 제물 위에 세번 부으라고 했더니, 물이 제단에 흐르고 도랑에 물이 가득 찼다. 마침내 저녁 제사 드릴 시간이 되자 그는 나아가서 기도를 드렸다. 제단에 부은 물 때문에 불이 도저히 붙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야가 기도를 드리자 단번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물과 돌을 불태우고 제단과 도랑의 물까지 모조리 증발시켜 버렸다.[10] 그러자 이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보고 엎드려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찬양했다. 이 대결에서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아합 왕은 크게 놀랐는지 직후 엘리야가 군중들을 동원해 바알의 사제들을 모조리 도륙내는 광경을 보면서도 말 한마디도 못하고 있다가 엘리야가 다독이자 그제서야 돌아갈 정도의 추태를 보였다. 그 후 엘리야는 큰 비가 내릴 것을 예언하고, 아합은 마차를 타고 이스라엘로 돌아갔다. 이를 기념하여 현재 갈멜 산에는 엘리야가 불칼을 들고 바알의 제사장을 도륙하는 석상이 세워져 있다.
이렇게 남편인 아합이 제대로 이미지를 구겨버리자 분노한 이세벨은 어떻게든 엘리야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이스라엘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엘리야는 더욱 더 깊이 숨어버렸다. 덕분에 아합은 잠시 구겼던 체통을 어느 정도 되찾았는지 다시 이세벨에게 종교 활동을 위임하고 기존의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고고학자들은 이때의 바알 신이 고대 가나안에서부터 숭배되던 바알-하다드 신이 아니라 페니키아의 바알-멜카르트 신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세벨은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당시 페니키아는 바알-멜카르트와 아세라 같은 메소포타미아 계통의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고, 이세벨이 오므리 왕가에 시집오면서 북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외래 종교인 페니키아의 종교를 도입하여, 수백 년간 이스라엘에서 자리잡아 온 기성 종교인 야훼 숭배자들과 예언자들이 반발했다는 것.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고대 가나안에서 농경의 신으로 숭배되던 바알-하다드 신은 이 시대까지도 시골에서 야훼 신앙과 함께 숭배되었다고 추정되는데, 열왕기서가 후대에 쓰여진 것을 생각한다면 후대 성경 필경사들이 구별을 못하고 하나로 묶어서 서술했을 수도 있다.
또 아합 왕이 이세벨에 비해 성경에서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써진 적도 있다는 것과 아합 왕이 페니키아의 신들을 믿는 것을 지원해주기는 해도 야훼 숭배자들을 몰살시키려 하거나 한 적이 없었던 것을 생각해서 당시 아합 왕은 단순히 야훼 믿을 사람은 야훼 믿고, 페니키아 신들을 믿을 사람은 페니키아 신들 믿으라는 의미에서 새로 신전을 지어 준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하느님이 땅을 메마르게 한다고 하자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과 엘리야의 대결 조건을 받아들인 것도 그렇고 그냥 아합 왕은 페니키아의 공주인 이세벨의 눈치를 봐서 편의를 봐주려다 이게 야훼 숭배자들의 속을 긁어버려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
엘리야를 잡아 족치려 하기도 했지만 한 나라의 왕으로서 자기 나라를 메마르게 하겠다 예언한 자를 그냥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엘리야를 만났을 당시 죽이기 전에 상황을 따지고 해결 방안이 있다고 하자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엘리야가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힘을 보이자 그를 손대기 꺼려하기도 했다.[11] 이 때문에 고고학자들 중에서는 성경 내용과 달리 아합 왕 본인은 야훼 신을 숭배하면서 이세벨의 신앙을 존중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하는 사람도 있다.
4. 아람#s-2.1과의 전쟁
아람-다마스쿠스 왕 벤하닷 2세 하다드제르가 휘하의 32명의 왕들과 함께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아합에게 ‘네 전 재산과 네 아내들과 네 예쁜 딸들 다 내놔!’라고 강요하자, 아합은 다 들어줄 테니 군대를 물리라고 요청했다. 예상보다 쉽게 아합이 굴복하자, 벤하닷은 한술 더 떠서 ‘나한테 들어주는 거 내 부하들한테도 똑같이 해야 하는데?’라고 요구 조건의 강도를 더 높였다. 그러자 아합은 신하들을 불러모아 '얘네들이 지금 우릴 다 벗겨 먹겠다는데 어쩌지?'라고 물었고 신하들은 ‘이게 뭔 개소리야!?’라며 죽기 살기로 싸우자고 외쳤다.
아합 역시 마찬가지로 화가 단단히 났던지라 곧바로 벤하닷에게 ‘오냐 한 판 붙자!’라며 최후통첩을 날렸고,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벤하닷은 '오늘은 한 탕 마시고 내일 저것들 다 쓸어버리자'며 부하들과 거하게 술판을 벌이다가 아합이 조직한 특수부대의 야습[12] 에 제대로 걸려서 떡이 되어 측근들과 함께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갔다.
한편 전쟁에서 승리한 아합은 ‘저것들 다시 쳐들어 올 거 뻔하니 대비하십시오’라는 하느님의 예언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군을 재정비하였다. 이윽고 정말로 도망쳤던 벤하닷이 전력을 끌어모아 아벡 평원으로 진군해왔는데, 당시 아람인들은 벤하닷에게 ‘쟤네들이 믿는 하느님은 산의 신[13] 이니 산에서 싸우면 우리가 불리함. 그러니까 평지에서 싸우면 우리가 쟤네들 개 쳐바를 수 있소이다!’라는 이유를 대며 평지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낸 아합의 북이스라엘군은 아벡에서 아람 보병 10만을 몰살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고[14] 벤하닷은 측근들과 골방에서 덜덜 떠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결국 벤하닷은 아합 앞에 엎드려서, 빼앗은 영토를 모조리 뱉어내고 다마스쿠스(다메섹)에 아합 왕의 이름을 딴 고속도로를 까는 조건으로 살려달라며 항복했고, 이를 수락한 아합은 벤하닷을 살려서 돌려보내주었다.
그러나 이런 아합의 결정은 예언자들의 불만을 야기했는데, 한 예언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부상당한 병사로 변장[15] 하고 아합이 지나갈 때에 그를 불러세워서 ‘내가 전장에서 포로를 대신 맡고 있었소. 그런데 제대로 못 지키면 내가 목숨을 바치든가 은 달란트를 바쳐야 하는데 내가 볼일 보는 사이 놓쳐버렸는데 어떡합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아합이 ‘야 이놈아, 네가 뻘짓해서 놓쳤으니 네가 책임져야지’라고 대답하자마자, 예언자는 너 잘 걸렸다 라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너도 하느님께서 맡긴 벤하닷 목숨을 놓쳤으니 니 목숨으로 대신해야 할 것이야!"'''라고 쓴소리를 퍼부었다.
얼핏 보면 적당히 전쟁을 정리한[16] 아합의 결정을 우유부단하다면서 까는 예언자가 전쟁광스러워 보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 벤하닷은 약속과 달리 빼앗은 영토들을 내놓지 않고 버텼기에 결국 아합은 직접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시리아와 다시 전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그 전쟁에서 정말 자신의 목숨으로 벤하닷의 목숨을 대신하고 말았다.
5.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다
시리아와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후, 아합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자네 포도원이 내 궁이랑 가까운데, 나한테 그걸 팔게. 원한다면 더 좋은 포도원을 주고 돈도 달라는 대로 다 줄 테니’라며 후한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포도원 주인인 나봇은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는 것을 하느님께서 금하실 것이라 하여 거절했는데, 여기에는 역사적, 종교적인 배경이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당시 땅을 각 지파에게 배분하였고, 각 지파들은 또 각 사람들에게 땅을 배분해 주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소유한 토지를 하느님께서 직접 준 땅으로 여겨 함부로 팔거나 양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알을 숭배하던 아합은 그저 심통만 났던지, 침대에 틀어박혀서 식사조차 하지 않고 앓아누웠다.
이걸 본 이세벨이 뭔 일 있냐고 남편에게 묻자, 아합은 나봇의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이세벨은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러냐, 걱정말고 밥이나 먹으라"면서 "곧 당신에게 나봇의 포도원을 선물로 드리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이세벨은 곧바로 나봇이 사는 지역의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재판을 통해 나봇을 죽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귀족들은 그 지시에 따라 백성들을 불러 모아놓고 나봇을 세워 재판을 벌였는데, 죄목은 하느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것. 장로와 귀족들은 이세벨의 지시를 받고 불량배 2명을 증인으로 세워 거짓 증언을 하게 했다. 결국 나봇은 군중들에게 붙잡혀 돌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죄인의 재산은 즉각 왕에게 귀속되는 법에 따라 나봇의 포도원 역시 아합에게로 넘어갔다.
아합은 희희낙락하면서 나봇의 포도원을 보러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숙적이나 다름없던 예언자 엘리야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아합에게 '너랑 아내 이세벨은 개의 먹이가 될 것이고 니네 집안은 폭삭 망할 것이다!'이라고 예언하자 아합은 내가 한 게 아니고 다 내 마누라가 시켜서 한 거라며 싹싹 빌었고, 엘리야는 재앙이 "너의 아들 대에 재앙이 찾아올 것"이라면서 집행유예 예언을 했다.
6. 길르앗 라못에서의 전사
시리아(아람)와의 전쟁 이후 3년 뒤, 여전히 시리아가 영토를 돌려주지 않자 마침 친선 차 방문했던 유다 왕 여호사밧[17] 과 함께 공동 전선을 펴서 길르앗 라못을 침공할 계획을 짰다. 이때 여호사밧은 선지자들의 조언을 한 번 들어보자고 아합에게 조언했는데 아합은 예언자 4백 명을 불러 모아다가 길르앗 라못에 대한 침공 여부를 물었다. 대답은 '''YES'''.
하지만 여호사밧이 혹시 결석한 예언자 없냐고 재차 아합에게 묻자, 아합은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걔는 맨날 부정적인 말만 골라서 하는 인간이라 일부러 뺐다'고 실토한다. 여호사밧은 그런 말 말고 걔한테도 한번 조언을 들어보자며 그를 불렀고, 이렇게 해서 찾아온 미가야는 처음엔 심드렁하게 400명의 예언자와 같은 소리를 했지만[18] 구라치지 말고 제대로 말하라는 아합의 다그침에 '''"그곳에 가면 죽을 것이고, 선지자들이 왕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다."'''이라면서 아합은 물론 그 자리에 모인 다른 선지자들까지 디스하였다 [19] . 그러자 예언자 중 한 명인 시드기야는 화를 내며 "하느님의 영이 언제 날 떠나서 너한테 갔느냐?" 라며 미가야의 뺨을 쳤고, 미가야는 짧게 "네가 골방에 처박혀 덜덜 떨며 숨어지내게 되는 그날 알게 될 거다."라고 경고한다. 아합은 미가야를 끌고 가 ‘내가 승전보를 울리며 돌아올 때까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둬놓아라.’라고 명령을 내린 뒤 여호사밧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미가야는 끌려가기 직전에 아합에게 "그대가 살아 돌아올 거라면 하느님이 이런 예언을 내게 주셨겠는가?"라며 확인사살을 했다.
전투에 들어가기 앞서,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난 변장하고 참가한다" 말해놓은 뒤 자신은 마부로 변장하여 전투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적들이 여호사밧을 이스라엘 왕이라 생각하고 공격했다가 ‘어, 얘는 이스라엘 왕이 아니네?’하며 몇 번 착각을 일으켰고 정작 변장한 아합은 몰라보았다. 이때 여호사밧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되었다.[20] 그런데 전투 도중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 하나가 아합의 어깻죽지를 뚫었고, 아합은 화살을 맞은 채로 시리아인들과 싸우다가 이날 저녁에 전사하는데,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병거 바닥에 고일 정도였다고 한다.
아합의 시신은 사마리아에서 장례가 치러졌고, 그가 타고 있던 병거는 사마리아 연못에서 씻겨졌는데 이때 병거에서 흘러나온 그의 피를 개들이 핥았다.[21] 성경에 따르면 이는 위에 적힌 나봇의 포도원 강탈사건 직후 엘리야가 아합에게 내린 저주가 실현된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아내 이세벨에게 내린 저주는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뜯어먹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는데 이 또한 예후가 이세벨을 살해한 직후 그대로 실현되었다. 두개골과 발과 손바닥을 빼고 모조리 먹어치워 남아있는 게 없었다고...
덤으로 유다 왕 여호사밧도 이 패전에서 군사력을 모조리, 그것도 초대형 스케일로 날려먹었고 그 이후 유다는 약소국으로 전락한다.[22]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남유다 왕국이 사실상 북이스라엘 왕국의 속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성서에서 대등한 동맹관계처럼 묘사된 것과 달리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복종해야 하는 제후였고, 아합이 군사를 보내라고 해서 군사를 이끌고 갔던 거라는 것.
7. 그 이후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가 오므리 왕조의 3대 왕으로 즉위했는데, 이 녀석은 뭔가 제대로 한 일도 없이 옥상에서 떨어져(...) 끙끙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동생 여호람(혹은 요람)이 다음 왕으로 즉위하였다. 한편 영원한 숙적 엘리야는 수제자인 엘리사의 앞에서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하였고, 이후 엘리사는 장군 예후를 사주하여 북이스라엘 왕 여호람과 남유다 왕 아하시야[23] 를 비롯한 이세벨과 오므리 왕가를 모조리 도륙낸다.
8. 평가
성격 문제나 신앙 문제는 차치하고서 단순히 한 나라의 군주로서의 치적만 놓고 본다면 유능한 편이다.
아합은 건국 이래 내란과 반역이 끊이지 않았던 북이스라엘 왕국 역사를 통틀어 안정된 치세와 강력한 왕권을 누린 얼마 안 되는 군주 가운데 하나였다. 외교적으로는 북쪽의 페니키아와 남쪽의 유다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어 국제관계를 안정시키고 무역으로 왕국의 부를 축적했다. 나중에 예후가 오므리 왕가를 도륙하는 과정에서 이 동맹관계도 자동 파기되긴 하지만.
군사적으로는 오므리가 복속시킨 모압에 대한 지배를 계속 이어나가는 동시에 시리아(아람)와 아시리아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아합 통치기까지 북이스라엘에 복속되어 있던 모압은 아합 사후 그의 아들인 요람 왕 시기에 이스라엘에게서 독립하고 이웃 왕국인 에돔은 여호사밧 통치기까지 남유다에 복속되어 있다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시기에 반기를 들어 역시 독립한다.
성경에서도 선지자 탄압은 시돈의 공주 이세벨이 주도했지 아합은 엘리야와 토속신앙을 두려워했다는 묘사가 있다. 이세벨을 말리지는 못했지만 당시 지중해와 서아시아의 뉴욕으로 불릴 정도의 엄청난 부를 소유한 시돈의 공주를 막 대했다가는 국제문제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공처가 기질은 어쩔 수 없었다. 신학자들도 부유한 나라인 시돈 공주라서 마음대로 못했다고 여길 정도.
여자를 많이 밝혀서 자식과 손자가 70명이라는 말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훗날 자식 중 아들 아하시야와 요람(여호람)은 북이스라엘 왕, 외손자인 아하시야는 남유다 왕, 딸 아달리야는 남유다 여왕이 되었다. 다만 나중에 이 후손들은 북이스라엘 장군 예후가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죄다...
참고로 이세벨 왕후는 카르타고를 건설한 디도 여왕의 왕고모라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다.
9. 창작물에 준 영향
모비 딕의 등장인물인 에이허브 선장의 이름은 이 사람에게서 따왔다. 보다시피 기독교 문화권에선 악역인데도 이 이름을 붙인 이유는 에이허브 선장의 부모가 무식해서다.
메탈기어 솔리드 V 더 팬텀 페인의 주인공 빅보스(베놈 스네이크)가 전작에서의 사건 이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병원에서 깨어난 직후 의사에게서 받는 가명이 에이허브인데, 이는 아합의 영어명이다. 물론 역사속의 아합에서 따온 것은 아니고, 모비 딕의 에이허브에게서 따온 것이다.
폴아웃4의 DLC Automatron의 중간보스 포지션인 센트리봇 AHAB이 아합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는데, 아합의 부인이던 이세벨에게서 유래된 지제벨의 뒤에 AHAB이 마치 왕처럼 떡하니 서있기 때문. 여담으로 성경에서 무지하게 까이는 아합이 실제로는 나름 유능한 왕이었던 것처럼, AHAB도 '''평범한 오브젝트나 장식품같아보이지만, 실제론 무지막지하게 강하다.'''
[1] 여로보암 1세 이후의 왕들 중 바알을 숭배하거나 암군이었던 왕들은 대부분 앞에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라는 말이 붙었는데, 아합의 경우에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악행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이전의 선왕들이 벌인 일보다도 훨씬 악한 짓을 저지른 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2] 그리고 4대를 지속한 오므리 왕조와 5대를 지속한 예후 왕조 외에 2대 이상을 넘긴 북이스라엘 왕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3] 심지어 오므리의 전대였던 시므리는 즉위 '''7일'''만에 오므리에게 살해당한 왕이었다.[4] 그리고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가 끝난 이후 이 막장 상황은 다시 시작되어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된다.[5] 이는 과거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 1세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금송아지 숭배를 추진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추정된다.[6] 애초에 우상 숭배의 죄로 가뭄이 올 걸 들었으면서도 아무런 대책을 안 세워놓은 걸 보면 백성들의 반응이 어땠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7]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세벨은 야훼(개역개정판에서는 여호와)의 선지자(예언자)들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했다'''.[8] 이제벨(이세벨)이 예언자들을 학살할 때 그중 100명씩을 빼내 몰래 숨기고 쉴 곳과 양식을 제공한 인물로, 이제벨의 종교 정책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던 고위층 인사였다.[9] 바알 신앙에서 사제들이 바알에게 크게 기도드리는 방식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는 우가리트 신화에서 엘이 바알을 부활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에 큰 상처를 내었기 때문이다.[10] 훗날 느헤미야가 이 기적을 재현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우물에서 길어온 건 물이 아니라 나프타였다.[11] 엘리야의 목숨을 노린 건 주로 이세벨이었다.[12] 이 야습에서 하느님의 예언자들 역시 어느 정도 아합 왕을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소에는 으르렁거리던 처지였지만 국가 위기 때는 최소한 힘을 합칠 정도의 관계는 유지하고 있던 모양. 실제로 이들 뿐만 아니라 엘리야의 수제자인 엘리사 역시 오므리 왕가를 극도로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과 아람과의 전쟁에서 북이스라엘을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했다.[13] 모세는 십계명을 시나이 산에서 받았으며,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중앙 산지에 위치해 있다.[14] 여기에 추가로 전투에서 살아남아 도망치던 아람군 패잔병 중 2만 7천 명이 무너지는 아벡 성읍에 깔려 죽었다.[15] 주도면밀하게도 자기 친구더러 자기를 겁나게 패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첫 번째 친구는 내가 어떻게 친구를 패냐고 거절했다가 사자 밥이 되었고(...) 2번째 친구는 씁 어쩔 수 없지라며 선지자를 애정을 담아 존나 패버렸다(...).[16] 실제로 당시 시리아는 아시리아를 견제하고 있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시리아와 전투를 벌이게 됐는데, 아시리아의 살마네셰르 3세가 남진정책을 펼치자 아합이 시리아의 벤하닷 2세 및 다른 동맹국들과 연합을 결성, 카르카르 전투에서 아시리아의 대군을 막는데 성공하였다. 아시리아의 기록에도 이때의 패배에 대해 "적장 '아하부' 때문에 우리가 패배했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아합의 역할이 컸으나, 성경에는 이 일이 누락되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시리아와의 잦은 전쟁에서 야기된 국력 약화로 아시리아의 성장을 막지 못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17] 남유다의 4대 왕으로, 야훼 신앙에 헌신적이었지만 현실주의자였던지 오므리 왕가와 잦은 친교를 맺고 군사 활동도 종종 함께 했다(이것 때문에 함께 참전한 길르앗 라못에서 군사력을 모조리 날려먹어버린 건 덤). 심지어 며느리로 아합의 딸을 맞아들이는데, 이 딸이 바로 훗날 남유다의 6대 왕인 아하시야의 어머니이자 훗날 자신이 여왕이 되겠다고 다윗 왕가를 몰살시키려 했던 아달랴 여왕. 참고로 아달랴는 재위 6년 만에 여호야다 사제가 주도한 혁명으로 폐위되어 칼에 맞아 죽고, 유일하게 몸을 피해 살아남았던 다윗 왕가의 핏줄 요아스가 새롭게 왕위에 등극한다.[18] 그도 그럴게 자기말을 안 들을 것이 뻔한데 수고스럽게 바른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19] 어떻게 보면 당신이 놓아준 벤하닷의 목숨값으로 죽어야 할 아합에게 한 번이라도 기회를 주려 한 것일지도?[20] 대하 18:31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 적들을 감동시켜서 여호사밧을 떠나가게 하셨다.[21] 게다가 그 연못은 이전부터 창녀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다.[22] 물론 역대기의 기록에 따르면 절반만 날려먹고, 그 다음 아들대에 에돔의 반란 때문에 나머지 절반을 날려먹었다(...). 이후 중흥기가 여러 번 왔지만 이때만큼의 국력을 유다는 결국 회복하지 못한 채 이집트와 아시리아, 그리고 신바빌로니아에게 휘둘리다 결국 멸망한다.[23] 두 사람 모두 아합 왕과 이세벨의 혈족들이었다. 즉, 이 당시에는 사실상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오므리 왕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