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립대학설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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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일제의 문화통치를 배경으로 국내 민족주의자들이 조선인의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실력양성운동.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1920년대 민족주의계 운동의 대표적인 주축이라 볼 수 있다.
이 대학 설립 운동은 국채보상운동과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경술국치 후 운동가들은 국채 보상 운동으로 모인 자금을 사용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경술국치로 인해 국채는 무의미하게 되었고, 그냥 두자니 모금한 자금의 액수가 너무 많았다. 그러다가 국채 보상 운동에도 참가했던 양기탁 등이 이 자금을 활용해서 조선인의 대학을 세우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1922년에 일제가 제 2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하여 조선인의 대학 교육 가능성이 조금 열린 것[1] 에 대한 자극으로, 조선 교육 협회가 주도하여 그해 6월에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이상재가 중심이 되어 조선 교육회를 모체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가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속에서 조직되었다.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3일간에 걸친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상술한 발기 취지서를 내면서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자본금 1,000만원을 3년만에 모아 법과, 경제과, 문과, 이과, 공과, 의과 등 순서대로 개설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조선 교육회부터 갖춘 치밀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국내외 대규모의 모금 운동을 벌였다. 흔히 '''한민족 1천만,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가 그것.
하지만 관동대지진, 홍수, 가뭄 등의 재앙으로 모금이 어려워졌고, 일제의 잦은 방해로 인해 계획한만큼 모금이 들어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비슷한 시기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1924년에 설립하면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실패로 끝나버렸다. 일제는 남은 잔여 세력마저도 탄압하여 민립 대학 설립의 길이 끊기고 말았다. 흔히 일제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였다고 알려져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저 우연히 시기가 맞은 것일 뿐. 경성 제국 대학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의 대학 교육을 위해, 즉 일본인만의 대학으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설립 계획이 있었다. 다만 조선인의 일부 입학[2] 을 허용하게 된 것은 민립 대학 운동의 영향이기는 했다.
경성제국대학에 조선인의 실력 양성에 도움이 되는 정치, 경제, 이공학부는 설치되지 않았으며 식민 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법학, 의학부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토의 제국 대학도 도쿄제대, 교토제대를 제외하면 경제학부를 독립시킨 곳은 한 곳도 없었으며, 정치학부는 지금도 일본에서 독립된 곳이 거의 없고, 전부 법학부에 속해 있다.[3] 오히려 식민지 거주 일본인들은 취직이 잘 되는 이과, 공과, 농과 계통의 학부 개설을 희망했으며, 총독부가 법문학부, 의학부만을 개설하자 조선인들의 환심을 얻으려 한다며 불만을 품기도 하였다. 이후 이공학부는 1941년에 설치되었다.
물산장려운동과 마찬가지로 이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사회주의자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아왔다. 이들의 논리는 바로 '미취학 아동의 교육이 급선무'라는 것인데, 당시 고등 교육까지 받을 형편이 되는 사람은 소수의 잘 사는 집안 학생으로, 그중 많은 수가 친일 성향을 띄고 있었다. 말하자면 민립 대학이든 관립 대학이든 대학의 설립이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양성할 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정 교육으로 실력 양성 운동을 하려면, 야학이나 강습소 혹은 간이 학교를 세워 대다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대중 교육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개중에 전조선 청년당 대회에서는 아예 1923년에 민립 대학 설립 운동 타도를 결의하기도 했다. 결국 사회주의자들의 이러한 비협조적 태도에 민심이 먹혀들어,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문화 통치 당시에 사회주의 계열 단체는 극렬파가 아니고선 대부분 합법이었고, 당시 일제의 민립 대학 설립 방해와 목적이 같아서 사회주의자들이 일제와 야합했다는 설이 1960년대만 해도 반공 의식 덕에 팽배했다. 물론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이 민족주의자와 대립되었을 뿐, 일제와 협조한 건 결코 아니었다. 사회주의는 일본 내에서도 처벌 대상이었다. 문화 통치 시기가 일본으로 치면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라서 물렁하게 나간 것도 있었지만, 만주사변 이후로는 그런거 없어졌다. 일본에서도 조선에서도.
1. 개요
1920년대 초, 일제의 문화통치를 배경으로 국내 민족주의자들이 조선인의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실력양성운동.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1920년대 민족주의계 운동의 대표적인 주축이라 볼 수 있다.
2. 배경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의 시초는 이미 무단 통치기에 종교계를 중심으로 민립 대학 허가 요구가 꾸준히 나온데서 비롯되었으며, 1920년 월남 이상재를 임시 석장으로 뽑아 구성된 조선 교육회는 교육에 대한 조사와 연구, 잡지 발행괴 도서관 경영 등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의 인프라를 구성함에 목표를 두었지만 당장 조선총독부에 인가를 받지 못했다. 8월달쯤에 조선 총독부에서 대학 설립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리고 1년 뒤인 1921년대에 정치성을 배제한다는 조건으로 총독부에 인가를 받아 조선 교육 협회로 개칭했고, 본격적인 실력 양성 운동에 들어가게 되었다.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와 같은 일이 모두 필요하도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한 일이 되고 가장 먼저 해결할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아니 된다. ...(중략)... 민중의 보편적인 지식은 보통 교육으로 가능하지만, 심오한 지식과 학문은 고등 교육이 아니면 불가하며, 사회 최고의 비판을 구하며 유능한 인물을 양성하려면 ...(중략)... 오늘날 조선인이 세계 문화 민족의 일원으로 남과 어깨를 견주고 우리의 생존을 유지하며 운화의 창조와 향상을 기도하려면, 대학의 설립이 아니고는 다른 방도가 없도다.
ㅡ조선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의 발기 취지서(1923년)
이 대학 설립 운동은 국채보상운동과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경술국치 후 운동가들은 국채 보상 운동으로 모인 자금을 사용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경술국치로 인해 국채는 무의미하게 되었고, 그냥 두자니 모금한 자금의 액수가 너무 많았다. 그러다가 국채 보상 운동에도 참가했던 양기탁 등이 이 자금을 활용해서 조선인의 대학을 세우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1922년에 일제가 제 2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하여 조선인의 대학 교육 가능성이 조금 열린 것[1] 에 대한 자극으로, 조선 교육 협회가 주도하여 그해 6월에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이상재가 중심이 되어 조선 교육회를 모체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가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속에서 조직되었다.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3일간에 걸친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상술한 발기 취지서를 내면서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자본금 1,000만원을 3년만에 모아 법과, 경제과, 문과, 이과, 공과, 의과 등 순서대로 개설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조선 교육회부터 갖춘 치밀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국내외 대규모의 모금 운동을 벌였다. 흔히 '''한민족 1천만,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가 그것.
하지만 관동대지진, 홍수, 가뭄 등의 재앙으로 모금이 어려워졌고, 일제의 잦은 방해로 인해 계획한만큼 모금이 들어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비슷한 시기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1924년에 설립하면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실패로 끝나버렸다. 일제는 남은 잔여 세력마저도 탄압하여 민립 대학 설립의 길이 끊기고 말았다. 흔히 일제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였다고 알려져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저 우연히 시기가 맞은 것일 뿐. 경성 제국 대학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의 대학 교육을 위해, 즉 일본인만의 대학으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설립 계획이 있었다. 다만 조선인의 일부 입학[2] 을 허용하게 된 것은 민립 대학 운동의 영향이기는 했다.
경성제국대학에 조선인의 실력 양성에 도움이 되는 정치, 경제, 이공학부는 설치되지 않았으며 식민 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법학, 의학부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토의 제국 대학도 도쿄제대, 교토제대를 제외하면 경제학부를 독립시킨 곳은 한 곳도 없었으며, 정치학부는 지금도 일본에서 독립된 곳이 거의 없고, 전부 법학부에 속해 있다.[3] 오히려 식민지 거주 일본인들은 취직이 잘 되는 이과, 공과, 농과 계통의 학부 개설을 희망했으며, 총독부가 법문학부, 의학부만을 개설하자 조선인들의 환심을 얻으려 한다며 불만을 품기도 하였다. 이후 이공학부는 1941년에 설치되었다.
3. 한계
물산장려운동과 마찬가지로 이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사회주의자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아왔다. 이들의 논리는 바로 '미취학 아동의 교육이 급선무'라는 것인데, 당시 고등 교육까지 받을 형편이 되는 사람은 소수의 잘 사는 집안 학생으로, 그중 많은 수가 친일 성향을 띄고 있었다. 말하자면 민립 대학이든 관립 대학이든 대학의 설립이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양성할 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정 교육으로 실력 양성 운동을 하려면, 야학이나 강습소 혹은 간이 학교를 세워 대다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대중 교육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개중에 전조선 청년당 대회에서는 아예 1923년에 민립 대학 설립 운동 타도를 결의하기도 했다. 결국 사회주의자들의 이러한 비협조적 태도에 민심이 먹혀들어,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문화 통치 당시에 사회주의 계열 단체는 극렬파가 아니고선 대부분 합법이었고, 당시 일제의 민립 대학 설립 방해와 목적이 같아서 사회주의자들이 일제와 야합했다는 설이 1960년대만 해도 반공 의식 덕에 팽배했다. 물론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이 민족주의자와 대립되었을 뿐, 일제와 협조한 건 결코 아니었다. 사회주의는 일본 내에서도 처벌 대상이었다. 문화 통치 시기가 일본으로 치면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라서 물렁하게 나간 것도 있었지만, 만주사변 이후로는 그런거 없어졌다. 일본에서도 조선에서도.
4. 같이보기
[1] 일본의 학제는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 고등학교 3년을 마치고 난 후에 대학(정확히는 제국대학)에 입학 가능했는데 조선의 학제는 보통학교 5년, 고등 보통학교 4년이라서 어차피 대학이 없기도 했지만 고보 졸업 후에는 대학은커녕 전문 학교도 갈 수 없었다.(사실 전문 학교도 조선에는 없었다.) 따라서 대학에 가려면 일본에서 중학교부터 다시 다녀야 했는데 사상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어려운 일이라서 친일 고관 대작들 말고는 상당히 힘들었다. 이것이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으로 바뀌어서 적어도 학제만으로는 소학교 = 보통학교, 중학교 = 고등 보통학교가 되어 고보 졸업 후 최소한 전문 학교라도 갈 수 있었다.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이 전문 학교 인가를 받은 것도 이 무렵이다. 그전에는 전문 학교도 아니었다.) 물론 조선에는 고등학교#s-2.1가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조선의 학제만으로는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대학에 가려면 일본에서 고등학교#s-2.1에 들어가던가 아니면 대학 예과에 진학하던가. 경성제국대학에 예과가 있었던 이유가 이것이다. 참고로 이 주석에서 말하는 고등학교는 구제 고등학교다. 항목 참조.[2] 암묵적으로 대략 조선인 1/3, 재조선 일본인 1/3, 본토 일본인 1/3의 비율[3] 1930년대 들어서 도호쿠제대의 경우, 법문학부에서 경제학사를 수여할 수 있도록 학칙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경성제대 역시 비록 경제학사 학위를 수여하지는 않았으나 법학과 내에 경제학 중심 이수 과정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