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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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본토에 위치한 구 제국대학의 휘장.
1. 개요
2. 역사
2.1. 설립
2.2. 종전 이후 개편
3. 평가 및 전망
4. 상호 관계
4.1. 동문회
4.2. 정기전
5. 조선인 관련
6. 기타


1. 개요


'''제 1조''': 제국대학은 국가의 필요에 응한 학술 기예를 가르치고 또한 그 학문의 심오한 경지를 연구함을 목적으로 한다.[1]

- 메이지 19년 칙령 제3호 '''제국대학령'''(帝國大學令)

제국대학령에 의거하여 일본 제국이 설립한 9곳의 대학. 일본제국 시절의 유일한 종합 관립대학[2]들이다. 일본 제국은 제국대학령에 의해 1886~1939년간 도쿄시, 교토시, 센다이시, 후쿠오카시, 삿포로시, 조선 경성, 대만 다이호쿠주, 오사카부, 나고야시 순서로 제국대학 총 9개교를 설립하였다. 이 제국대학들의 모체는 1877년 세워진 구 도쿄대학[3]으로, 1886년 반포된 제국대학령에 따라 도쿄대학을 제국대학으로 개칭하면서 '''제국대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지역별로 제국대학들이 추가로 설립되며[4] 각 지방의 최고 학부가 되었고[5] 1897년에 교토제국대학 설치와 동시에 도쿄에 있던 제국대학은 도쿄제국대학이 되었다. 당시 제국대학은 관립전문학교, 그 중 특히 의학전문학교를 기반으로[6] 종합대학화하여 개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7]
당시 소학교(6년)-구제중학교(5년)[8]-구제고등학교(3년)의 14년에 걸친 입시경쟁에서 승리한 최고 엘리트만이 가는 학교였고, 현재에도 역시 마찬가지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당시 일본에서 '학생'이라고 불린 것은 제국대학 소속 학부생 뿐이었고[9], 이 대학들만이 학사, 박사 학위를 딸 수 있던 곳이었다[10].
2차대전 이후 기존의 제국대학령이 국립종합대학령으로 대체되면서 제도적으로 제국대학은 사라졌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후신으로 남은 본토의 7개 국립대학들을 '''구 제국대학'''(旧帝国大学)으로 지칭한다.[11]

2. 역사



2.1.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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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帝國大學
  • 1886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12] - 現 도쿄대학(東京大学)
  • 1897년: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13] - 現 교토대학(京都大学)
  • 1907년: 도호쿠제국대학(東北帝國大學)[14] - 現 도호쿠대학(東北大学)
  • 1911년: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15] - 現 규슈대학(九州大学)
  • 1918년: 홋카이도제국대학(北海道帝國大學)[16] - 現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学)
  • 1924년: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17] - 現 서울대학교(서울大學校)[18]
  • 1928년: 다이호쿠제국대학(臺北帝國大學)[19] - 現 국립타이완대학(國立臺灣大學)
  • 1931년: 오사카제국대학(大阪帝國大學)[20] - 現 오사카대학(大阪大学)
  • 1939년: 나고야제국대학(名古屋帝國大學)[21] - 現 나고야대학(名古屋大学)

2.2. 종전 이후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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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대학 및 그 후신
일본제국 패망 후 일본 내지에 위치한 도쿄, 교토, 도호쿠, 규슈, 홋카이도, 오사카, 나고야제국대학들은 1947년 미군정에 의해 제국대학령이 '''국립종합대학령'''으로 개정되면서[22] 교명에서 '''제국'''이 빠지게 된다. 이어 통합학부는 단일학부로(예컨대, 법문학부는 법학부/경제학부/문학부로, 이공학부는 이학부/공학부로) 분리되었으며, 미군정의 '고등교육기관 일원화' 방침에 따라 1948~1949년에 걸쳐 각 지방(도도부현)에 있던 고등교육기관인 구제고등학교, 구제전문학교(고등상업학교, 고등사범학교, 고등공업학교 등)들을 흡수하여 신제대학(新制大學)으로 개편되었다.
외지에 위치한 2개의 제국대학, 조선경성제국대학대만다이호쿠제국대학 또한 비슷한 변화를 거쳐 미국식 대학체제로 변화하게 된다. 경성제대는 1945년 9월 미군정청에 의해, 다이호쿠제대는 1945년 11월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접수되어 각각 경성대학국립타이완대학으로 교명을 바꾸고 통합학부를 분리학부로 독립시키며 부속전문부를 본과에 병합하고, 인근에 위치한 구제전문학교들을 흡수통합하여 미국식 대학 체제로 변화하게 되었다.
  • 경성제국대학 - 1946년 8월 22일 미군정 법령 제102호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의거하여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법문학부와 이공학부 이학계열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구성하고, 의학부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흡수해 의과대학이 되며, 이공학부 공학계열은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와 합쳐져 공과대학을 만들었다.[24] 동시에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사범대학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를 법과대학으로,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상과대학으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치과대학으로, 수원고등농림학교를 농과대학으로 흡수하고 예술대학을 신설하여 국립서울대학교로 출범
  • 다이호쿠제국대학 - 1945년 12월 15일 타이완 섬을 접수한 중화민국 정부 행정원 결의에 의해 국립타이완대학으로 개칭함과 동시에 예과를 통합하고, 단과대학을 일본식 학부(學部)에서 중국식 학원(學院)으로 변경함과 동시에 문정학부를 문학원과 법학원으로 분리. 1947년 구제전문학교인 다이호쿠고등상업학교[25]를 법학원 상학계로 흡수[26]
국립타이완대학은 자신들의 전신은 일본제국이 설립한 다이호쿠제국대학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국립타이완대학 홈페이지에서는 제국대학 당시의 일본인 총장까지 소개하고 있다.[27] 반면, 서울대학교에서는 1946년을 개교년도로 삼고, 10개 학교를 바탕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전신이 경성제국대학임을 대놓고 밝히진 않고, 경성제대는 여러 전신학교들 중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28] 다만, 그 통합된 학교 중 '''구제대학'''은 경성제국대학이 유일했고, 나머지 9개 학교는 '''단과 구제전문학교구제중학교'''[29]를 전신으로 한다. 미군정청의 '국대안' 역시 그 성안과정을 보면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경성과 수원의 전문학교들을 통폐합해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한다고 하고 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보면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의 전신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한편으로 세간에서 경성제국대학을 서울대학교의 전신으로 보는 인식도 상당히 높고, 통합 후 서울대학교가 신생 대한민국에서 최고 학부 자리를 차지하면서 경성제대 출신 동문들도 서울대 동문회에도 참가하며 서울대를 모교로 생각하고 있다.[30]
서울대학교경성제국대학 부정은 '''반일(反日)'''을 국시로 삼고 국가주의의 극치를 달리던 이승만 정부에서 제일 극심했으며[31] 이어 군부독재가 이어지면서 자유로운 학문적 논의조차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를 거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한일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2000년대부터 기존의 경성제대 부정론이 수정되기 시작했고, 경성제대를 주제로 삼은 박사논문과 여러 단행본들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이후 경성제대가 단과대학의 역사를 넘어서 종합대학 차원에서도 서울대의 전신임을 부정하던 한국의 전통적 견해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32] 2010년대에 들어서는 서울대학교의 공식 간행 校史(서울대학교 개학 120년 기념 국립서울대학교 개학 반세기사(1895~1946))에서 경성제대를 서울대의 근간을 구성한 모체로 규정하고 있다. 경성제대의 학부 중 존속기간이 가장 짧고[33] 경성공전 및 경성광전과 통합되어 서울공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큰 지분을 차지하지 못한 경성제대 이공학부 공학계열에 대해서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로서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장을 역임한 과학사학계의 원로 이성규 교수는 '''제국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이루어 놓은 성과 중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34]

3. 평가 및 전망









홋카이도대학
도호쿠대학
도쿄대학
나고야대학
교토대학
오사카대학
규슈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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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세대 1.6%만이 '''구제국대학'''에 진학
일본 제국 당시 최고의 엘리트만이 가는 종합대학이었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의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국립•공립대학은 200여 개 가까이 되지만, 제국대학은 그 중에서도 최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600~700여 개가 넘는 웬만한 4년제 사립대학들은 비교조차 안 되는 수준이다. 실제로 3대 대학 랭킹이라고 불리는 ARWU, THE 세계 대학 랭킹, QS 세계 대학 랭킹을 보면 일본 순위의 1위부터 8위까지는 '''항상''' 구제국대학이 차지한다.[35]
구제국대학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특히 이공계의 경우엔 국립대학사립대학 간 가성비 차이는 넘사벽이다. 학생 한명당 할당된 1년간의 예산만 봐도 국립대(약 2020만원)와 사립대(약 160만원)는 약 '''13배 차이'''가 나는데[36], 이공계의 경우엔 사립대학의 수업료가 국립대의 3배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국립대와 사립대의 '''가성비의 차이는 약 40배'''이다.
이공계에서 특히 국립대와 사립대의 선호도의 차이가 현저한 이유는, 이공계 특성상 엄청난 재정을 투자해야 하는데,[37] 사립대학은 자신들의 이윤 창출이 제1의 목표이기 때문에 돈이 드는 이공계열 학과에 대한 투자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립대는 일반적으로 수험 과목의 수가 국립대보다 훨씬 적고, 일부 전형을 제외하면 센터시험을 보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기에, 사립대학은 편차치가 특히 심하게 높게 나오기 때문에, 소케이[38]가 도쿄대학 다음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39] 실제 전국적인 수험생들의 관점으로는 7곳의 '''제국대학'''과 도쿄공업대학 등의 최상위 국립대학들을 돌고 난 다음 순서로 취급받는다.
이 차이는 의학과로 가면 더 벌어져, 의대의 경우에는 구제국대가 거의 모든 사립대학 의학과를 압도하는 게 현실이다.[40] 그 이유는 일본의 국립대학 의학부는 한국과 비교해도 등록금이 아주 저렴할 정도이지만(1년 등록금 약 550만 원), 사립대 의대는 가장 저렴한 곳이라도 연간 학비가 한화로 환산하면 수천만 원이 넘으며, 1억이 넘는 곳도 부지기수이다. 일본의 의료 체계가 국립대를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 형태인지라 일본의 의료 소비자들도 국립대학 병원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문에 사립 의대는 의사가 자신의 병원을 물려주기 위해 그리 학업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자녀를 진학시키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일부 사립대학 의대는 연간 학비만 '''1억 원'''이 넘고, 입시 난이도도 소케이 이공학부보다도 쉬운 경우가 있다.
물론, 사립대학은 일반적으로 학생 수가 매우 많아 졸업생을 많이 배출하기 때문에 학연, 지연이 중요시되는 문과 계열에서는 힘이 밀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7곳 제국대학의 문과 정원을 전부 합한다고 해도 대표적인 사립대학인 와세다대학의 문과 정원보다도 적다. 각 대학별 문과계열 모집 정원을[41] 확인해보면 도쿄대 1,223명[42], 교토대 970명[43], 도호쿠대 700명[44], 규슈대 717명[45], 홋카이도대 625명[46], 오사카대 1,352명[47], 나고야대 545명[48] 수준이다.[49] 이에 반해서, 와세다대의 모집정원은 문과만 무려 '''6,810명'''[50]에 달해서 7개 제국대학 문과 총합을 상회하고, 심지어는 개별 학부가 각각의 제국대학의 규모를 넘어설 정도.[51][52]
역사적으로도 제국대학 자체가 의학부/이학부/공학부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1945년 패전 당시 기준으로도 도쿄제대교토제대만이 법학부/경제학부/문학부를 갖추고 있었고, 도호쿠제대[53]규슈제대[54], 경성제대[55], 다이호쿠제대[56]는 문과계열이라고는 20년대에 설치된 '법문학부'[57] 단 하나에 불과했다. 이외에 홋카이도제대오사카제대나고야제대는 패전 때까지 법문학부는 커녕 문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즉, 현재 구제국대학의 문과 학부들은 대부분 전후 신제대학이 되면서 구제고등학교를 흡수하거나[58] 관공립대학을 병합하면서[59] 만들어진 경우가 많아 비교적 역사가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격화로 중단되기 전 마지막이었던 1943년까지의 일본 제국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 실적을 보면, 도쿄제대와 교토제대가 선두를 달리는 한편, 유일한 문과계열 학부인 문정학부[60]를 통틀어 한 학년이 10~20명 수준에[61] 법학과는 존재하지 않았던 다이호쿠제대와, 아예 문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홋카이도제대에서도 고등문관시험 합격자가 있었다. 또한 사립학교들이 50년 동안 누적된 수치인데 반해서, 도호쿠제대(1926년 법문학부 1회 졸업), 규슈제대(1928년 법문학부 1회 졸업), 경성제대(1929년 법문학부 1회 졸업)는 15년 정도 동안의 합격자에 불과한 수치인데다[62], 사립대에 비해 학부의 규모 자체가 상당히 작았는데도[63] 상당수의 합격자를 배출하여 상위권에 자리하고 있다. 합격률로 따지면 문과 자체가 없는 제국대학도 최고 명문 사립대학보다 높은 수치를 보인다.
현재 일본 정부는 일본의 저출산 고령화와 국채발급과 이자지급에 쓰이는 예산이 계속하여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줄일 수 있는 연구비를 줄이고 있다.[64] 그래서 결국에 제대로 된 학문의 연구·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연구중심대학인 구제국대학에 몰릴 수밖에 없는 고로, 구제국대학의 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일본은 최근 21세기에 들어서 2019년까지 과학 분야 노벨상을 19개를 배출하여 대략 1년에 한개씩 수상하였으나[65], 그 수상자들은 모두 국립대학 출신이었고, 최종학력은 대부분이 구제국대학이었다.
여담으로 2008년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 나고야대학 출신이 있는 걸 한국의 기자가 '지방 명문'이라 칭하면서 '''어익후 지잡에서 용났네'''란 뉘앙스로 기사를 작성했는데 이건 그냥 기자의 무식함을 자랑한 케이스이다.[66] 한국은 유명 대학들은 대부분 수도권 집중이지만 일본은 각 지역별로 제국대학이 분포되어 있는 구도이다.

4. 상호 관계


예전에는 제국대학 학생들은 자부심이 강해서 자기네 학교 아니면 다 깔보면서도, 위에 나온 7+2에 속하면 한 수 높게 봐주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서로 간에는 당연히 친한 척을 하지만 다 라이벌 관계. 특히 도쿄대학교토대학간의 라이벌 관계는 옛날부터 꽤 유명하다. 교토대는 자유롭게 사고하고 토론하는 것을 중시하는 학풍을 자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도쿄대를 '암기 위주에 교양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녀석들'이라고 까기도 하였다. 도쿄대는 교토대를 빨갱이에다가 전통 좋아하고 자빠지는 비현실적인 놈들... 정도로 생각해 주었다고. 물론 이건 옛날 쌍팔년도 시절이나 학회에서의 얘기고 요즘와서 이렇게 생각하는 학생은 당연히 없으며, 오히려 거리가 거리임에도 대학 간의 친목교류도 활발하다.
  • 학생들 차원뿐만 아니라 대학 차원에서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사례들도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현재 일본 국립대학의 최고 직위(한국의 총장)는 법적으로 학장(学長)이라고 부르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오직 이 7곳의 구제국대학만은 특별하게 총장(総長)이라고 일관되게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2차대전 이전에는 제국대학만이 유일하게 여러 개의 학부를 가지고 있는 종합대학이었기 때문이다. 패전 후에 여러 국립대학(그 당시에는 관립대학)이 통합되면서 종합대학으로 바뀐 것. 지금도 제국대학들이 대학 최고 직위를 학장이 아닌 총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그 당시 유일한 국립 종합대학들으로서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서울대학교의 경우에도 이런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있다. 해방 후 당시에는, 사범대학은 '사범대학신문', 농과대학은 '농대신문' 등, 자신의 단과대학 소속을 이름에 넣어서 단과대학 별로 따로 기관지를 발행했다. 하지만, 1947년 7월 1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회 문화부에서 창간한 학보의 제호는 그냥 '대학신문'이었다.[67] 유독 문리과대학이 '대학신문'이라 한 것은 구제전문학교구제중학교와 통합된 다른 단과대학들(법대, 공대 등)과는 달리, 문리과대학은 온전히 일제시대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의 문학부와 이학부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적통[68]에서 기인한 자부심이었던 것이다.[69]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들은 지금도 끈끈한 결속력이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구제국대학의 종합적인 동창회 모임인 '''학사회'''가 존재한다. 또한 구제국대학이 모여 매년 '''전국7대학종합체육대회'''라는 대학교 정기전을 개최하며, 2019년 기준 58회를 맞이했다. 약 30~40종목의 경기를 치러 점수를 합산하여 순위가 매겨지며, 매년 돌아가면서 대회를 주관하게 된다. '''구제전 수학부문(旧帝戦数学部門)'''이라는 것도 있는데, 각 구제국대학들의 캠퍼스에 3문의 수학 문제가 게시되어 있는 상자를 설치하고 그것을 가장 빨리 푸는 대학이 승리하는 싸움. 문제를 다 풀면 상자 안에 있는 전리품을 참가상으로서 얻을 수 있고, 우승자에게는 수학제전[70]에 참가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 또한, 일본의 학회나 연구, 학술회 등 역시 이들 구제국대학 출신들이 휘어잡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72] 물론 자기네끼리도 파벌이 복잡해서 암투와 냉전을 벌이지만, 문제는 사립대학 출신들은 아예 낄 틈도 안 준다는 점.[73] 재미있는 점은, 국제학회 등에서 일본사립대 학자들은 왕따시키면서도 서울대학교 출신이나 국립타이완대학 출신은 같은 제국대학 출신이라고 은근히 우대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국제학회 등에서 한일 학자들이 모이면 토다이, 쿄다이 출신의 나이 많은 할아버지급 일본 교수들은 사립대는 무시해도, 국립타이완대학이나 서울대학교 교수들에게 조다이(城大) 드립을 치며 같은 제국대학이라고 은근히 대우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일본의 젊은 교수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한다.
  • 실제로, 1990년대 중반부터 서울대학교가 국제화를 추진할 때 해외 대학 중 최초로[74] 1995년 10월 도쿄대학와 학생교류협정(교환학생 협정)을 체결하고[75] 이를 시작으로 교토대 등 제국대학들과도 협정을 체결하고 협력 단계를 심화시켜왔고, 홋카이도대[76]와는 학술 심포지엄을 매년 번갈아 개최하고 있기도 하는 등, 특히 구제국대학들과는 현재 활발한 학술 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일본 뿐만 아니라 경성제국대학과 함께 또 하나의 제국대학이었던 국립타이완대학과 서울대의 관계 역시 긴밀한데, 서울대가 본격적으로 국제화를 표방하기 전부터 협력을 이어오다 1998년 6월 24일에는 대학교 차원에서 협력양해각서, 일반 교류와 교환학생 상호파견까지 포함한 최고 수준의 전면적 파트너쉽을 맺었다. 1990년대~2000년대 초중반까지 상호 교환학생 파견교가 손에 꼽던 서울대학교 학생들에게 舊제국대학들은 괜찮은 학교들 중 거의 유일한 선택지나 다름없었다.

4.1. 동문회


'''学士会がくしかい'''
'''학사회'''
'''Gakusik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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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1886년 7월
'''분류'''
일반사단법인
'''대표 위치'''
도쿄도 치요다구 칸다니시키초
'''홈페이지'''
학사회 링크
학사회관 링크

구제국대학 출신자들의 종합적인 동문회 모임인 '''학사회'''(学士会)가 존재한다. 이름이 '학사'회인 이유는 당시 학위를 부여할 수 있는 교육기관은 원칙적으로 제국대학들에만 한정되었기 때문이다.[77] 지금도 여전히 학사회 규정에는 경성제국대학다이호쿠제국대학 출신자도 회원 자격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78]
학사회의 학사회관(学士会館) 건물은 1928년에 건설되었으며, 현재 유형문화재에 지정되어 있다. 내부에는 숙박시설, 레스토랑, 회의실, 연회장, 미용실, 사진관, 결혼식장 등의 시설이 있으며, 일반인들도 이용이 가능하다.
1887년부터 매달 발간하고 있는 학사회회보(學士會会報)[79]를 비롯하여, 선학방문, NU7, 메일 매거진 등을 발행하고 있다. 2005년부터는 전국7대학종합체육대회에도 협찬하고 있으며, 매년 7천만원 이상의 협찬금을 지출하며 우승 대학에는 학사회 트로피를 증정하고 있다.
학사회 회원만 발급받을 수 있는 신용카드도 있다. 사진 참조. 다이너스 클럽시티카드로 발급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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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정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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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식의 모습[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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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대전 글라이더 경기
홈페이지 링크
일본 본토 7개의 제국대학이 모여 매년 '''전국7대학종합체육대회'''(全国七大学総合体育大会)라는 대학교 정기전을 실시한다. 줄여서 '''칠대전'''(七大戦)으로 부르기도 하며, 2019년 기준 58회를 맞이했다.
대회는 약 30~40종목의 경기를 치러 점수를 합산하여 순위가 매겨지며, 7개 대학이 매년 돌아가면서 대회를 주관하게 된다.[81] 종목은 일정하진 않지만, 주로 아래와 같은 항목을 두고 겨룬다.

5. 조선인 관련


모든 제국대학은 원칙적으로 구제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혹은 그 제국대학에 부속되어 있는 예과를 졸업해야 입학이 가능했다. 이 당시의 고등학교(구제)는 현재 대학 교양과정 레벨을 가르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독일계 학교인 김나지움 혹은 영국계 학교의 식스폼 과정에 해당하는 가까운 엘리트 양성 기관이었다.[83]
그런데 한반도에는 실업학교나 고등보통학교[84], 혹은 구제고등여학교구제중학교[85]까지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예과를 갖추고 있는 경성제국대학 이외의 제국대학에 바로 진학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가지 못한 조선인 학생들은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나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와 같은 구제전문학교를 다녔고, 정 대학을 가고 싶다면 일본 본토의 와세다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과 같은 사립 구제대학[86]을 다녔다.[87]
본토의 제국대학에 입학하는 극소수의 엘리트 조선인 학생들은 구제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국대학 본과에 바로 입학하는 과정을 밟거나[88], 일본 본토의 구제고등학교를 통해서 제국대학으로 진학하였다고 한다. 대다수가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조선인에게 입학허가를 비교적 후하게 내주었던 마쓰야마(松山, 송산)고등학교(現 에히메대학)로 진학한 다음 제국대학으로 진학하였다고 한다.
구제고등학교와 제국대학 테크를 밟은 사람들의 예시로는 다음과 같다. 그 외의 출신자는 구제고등학교 항목 참조.
한편, 당시 조선인 출신으로 제국대학 교수까지 한 케이스도 있었다.[90]
  • 이태규(李泰圭)는 경성고등보통학교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거쳐 교토제국대학의 이학부 화학과를 졸업하였다(이학박사). 1937년에 교토제국대학 조교수[91], 1943년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태규는 교토제국대학 교수 경력 때문에 해방 이후 국대안 파동 당시 좌익 계열 학생들에게 친일부역자로 낙인찍혀 숱한 테러를 받기도 했다.
  • 마쓰야마고등학교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공학부 화학공학과를 전공한 리승기(李升基)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를 지냈다. 리승기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제2대 학장을 지내다가, 6.25월북하여 자신이 1939년에 개발한 비날론을 공업화했다.
  • 임호식(林浩植)은 양정고등보통학교, 수원고등농림학교를 거쳐 홋카이도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홋카이도제국대학 조수를 거쳐 1935년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조선인 최초의 농학 박사로도 알려져 있다.
  • 윤일선(尹日善)은 경성중학교제6고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부수 및 조수를 거쳐 1928년 조교수에 임명되었다.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며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 고영순(高永珣)은 부립 오사카의과대학(오사카제국대학의 전신)을 나왔다. 1928년 12월 24일 경성제국대학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이틀 만에 사표를 내고 서울 정동에서 내과의원을 개업하였다. 임명재[92], 심호섭[93]과 함께 당대 3대 내과 의사로 손꼽혔다.
  • 김종원(金鍾遠)은 마쓰야마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하였다. 그 후 규슈제국대학 공학부 지질학교실에서 연구생 생활을 하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강사를 거쳐 1945년 7월 13일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해방을 맞게 된다.
이 당시 대학생의 대부분은 남학생이었으나, 이 코스를 밟은 여학생도 있었다. 이회창자유선진당 대표위원의 막내이모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과학자김삼순이 그러한데, 김삼순은 도쿄고등여자사범학교(現 오차노미즈여자대학)[94]를 졸업한 다음 홋카이도제국대학에서 이학부를 졸업하였다.
민족시인으로 유명한 윤동주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국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릿쿄대학에 입학하였다고 한다.[95] 특히 동갑내기 사촌이었던 송몽규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친척들의 비교대상이 되어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96]

6. 기타


  • 일본제국 시절, 제국대학 출신은 같은 일을 해도 봉급을 더 받는 등의 우선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등문관시험 준비를 위해 경기도청 고원으로 있었던 경성제국대학 졸업생 김영재는 65원의 월급을 받았다. 구제중학교 졸업자는 30원, 구제전문학교 졸업자는 40원, 일본 사립대학의 졸업자는 45원의 임금을 받은 데 반해 제국대학 졸업생은 65원의 최고 수준 봉급이 주어졌던 것이다.[97] 또한, 전쟁 전 미쓰이, 스미토모, 미쓰비시 등 재벌계 대기업의 평균 초봉은 제국대학상대는 80엔, 고등상업학교소케이는 70엔, 그외 사립대학은 60엔이었다고 한다.[98]
>(제국대학의) 문학부 졸업자에게는 무시험검정에 의해 소학교에서 대학까지 어느 곳에서든 교원이 될 수 있는 자격증을 줬다. 민간기업에서도 제국대학 출신자에게는 동일한 노동을 하는 사립대학 출신자보다 봉급을 더 주는 것이 관례였다. 국가는 제국대학 출신자에게 각종 특혜를 주고, 제국대학 출신자는 국가의 충직한 신민이 되는 완벽한 공생관계였다.
>
>- 신동아, 2005년 12월호 <경성제국대학 입시 대소동> 中.
>메이지 말기의 관립/사립학교 문과 졸업생의 초봉 격차를 "제국대학 100엔에 대해서 히토츠바시[99] 60~70엔, 게이오 50~60엔, 와세다는 30~40엔을 동등한 것"으로 본다.
>
> 오자키 모리테루[100] 일본취직사(日本就職史) 中.
>사립대학이 정식 구제대학으로 승격한 다이쇼 시대 이후에도 엄연한 급여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다이쇼 버블 시대의 닛폰유센(日本郵船)에서는 제국대학, 상과대학(히토쓰바시대학) 졸업생의 초봉은 80엔, 와세다·게이오와 지방고등상업학교가 60~65엔, 소케이를 제외한 사립대학이 50~55엔이었다. 대체로 제국대학-관립상대-소케이-기타사립대학이라는 순서로 평가받으면서 사립대학 출신은 기업에 취직하더라도 차별 대우를 감수해야 했다.
>
>- 주모쿠 고사이(寿木孝哉) 취직전술(就職戦術) 中.[101]
  • 일본제국 시절 만주국의 최고학부인 건국대학도 제국대학에 (어디까지나)버금가는 수준이라고 보았다고 한다.[102] 당연히 네임밸류는 제국대학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학비 무료에 관료 임용까지 보장한다는 특전, 그리고 징병 징용대상에서 면제된다는 점 때문에 일본과 그 식민지 지역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진학을 희망할 정도였다.[103] 하지만 건국대학이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최고학부이다 보니. 일본제국 본토에선 그저 깨갱해야 했다. 입학도 제국대학과 달리 중등학교 졸업 후 바로 입학할 수 있었다.[104] 그래도 그나마 전쟁 당시에는 위세를 부릴 수 있었으나, 광복 이후에는 제국대학 출신들 특히 숫적으로 가장 많았던 경성제대 파벌에 밀려 지내야 했다.
  • 2차대전 패전 후 기존의 학제를 개편하는 과정에 미군정 GHQ CIE[105]는 1947년 기존 내지의 제국대학 7곳에 더해 호쿠리쿠, 주고쿠, 시코쿠 등지에 3곳을 신설한 국립종합대학 10개교만 국립(관립)으로 두고, 나머지 관립대학 및 관립전문학교 등 고등교육기관은 전부 지방 도도부현 소관으로 이관하여 공립학교로 삼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한다. 가나자와대학 50주년 기념페이지 참조.
  • 전후에는 이 10개 국립종합대학안과 별개로 여자교육의 진흥을 위해 수도권과 간사이 지방에 여자제국대학을 설립하는 구상이 제시된 적도 있다고 한다.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여자제국대학으로 격상시키는 방안이 검토되었으며, 역시 여자고등사범학교로 긴키지방의 유력한 유일 후보였던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는 이에 호응해 나라여자제국대학 승격 운동을 전개했으나 역시 실패. 제국대학으로 승격되지 못한 두 여자고등사범학교는 각각 오차노미즈여자대학나라여자대학이라는 두 국립 여대로 승격하였다.
  • 제정 러시아에도 제국대학이 있었다. 1917년 당시 모스크바(1755년), 유리예프(1799년), , 하리코프(1833년), 카잔(18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1819년), 알렉산드롭스키(1827년 헬싱키), 성 블라디미르(1834년 키예프), 노보로시스키(1865년 오데사), 바르샤바(1869년)[106], 톰스크(1878년), 니콜라옙스크(1909년 사라토프) 11개교가 있었다. (()안은 개교연도)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제국대학 출신자는 블라디미르 레닌일 것이다(카잔제국대학 중퇴).
  • 하나 합격하기도 어려운 제국대학을 무려 4개나 합격한 굇수가 있다. 이 사람의 정체는 일본의 유명 학원강사였던 야스모토 하지메. #
  • 요런 영상도 있다. 일본 국내의 7개 구제대를 나름 멋지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 대학들을 노리는 일본의 수험생들의 심정도 나타내고 있다.
  • 관련 문헌
제국대학 - 아마노 이쿠오 저 / 박광현·정종현 역. 산처럼. 2017.

[1] 第一條(だいいちじょう 帝國大學(ていこくだいがく國家(こっか須要(しゅよう(おうスル學術技藝(がくじゅつぎげい敎授(きょうじゅ(および(その蘊奧(うんのう攷究(こうきゅうスルヲ(もっ目的(もくてきトス[2] 제국대학은 설립/운영 주체에 따른 분류상으로 '''관립'''(국립)대학이나, 대학령에 의거 설립된 다른 모든 구제대학과 달리 별도 법령인 제국대학령에 근거 설립되었다. 한편, 당시 유일한 종합대학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한 대학측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사례도 있는데, 이는 하단의 '상호 관계' 문단 참조.[3] 최초의 관립대학. 참고로 이 '''구제 도쿄대학'''(1877~1886)은 현재의 '''신제 도쿄대학'''과는 제도가 다름.[4] 대부분의 제국대학들은 전신교(前身校)에서부터 승격한 것이다. 당시 제국대학보다는 일반 관립대학이, 일반 관립대학 보다는 사립 구제대학이, 사립 구제대학보단 구제전문학교의 격이 낮다고 보았다.[5] 간토지방 최고 학부이자 전일본의 수위 학부인 도쿄제대를 정점으로, 긴키지방 교토제대, 도호쿠지방 도호쿠제대, 규슈지방 규슈제대, 홋카이도지방 홋카이도제대, 조선 경성제대, 대만 다이호쿠제대, 긴키지방 제2학부 오사카제대, 추부지방 나고야제대 등이 제국대학 시스템을 구성했다. 바이두백과 참조.[6] 부속병원과 교수 의료진이 필요한 의학부 설치에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었기 때문에 보통 부속병원이 있는 의학전문학교를 활용[7] 도쿄제국대학('의학교'+개성학교), 교토제국대학('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 도호쿠제국대학('센다이의학전문학교'+이학부), 규슈제국대학('후쿠오카의학교'), 홋카이도제국대학('삿포로농학교'), 경성제국대학(경성의학전문학교의 교수진과 물적 자산 활용. 도쿄대학 문학부 대학원 인문사회연구계에서는 경성의전을 경성제대 의학부의 사실상의 전신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京城帝大医学部は法文学部とは異なり事実上の前身となる機関(朝鮮総督府医院・京城医学専門学校)を持ったが" 출처), 다이호쿠제국대학('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개교 후 9년차였던 1936년에 대만총독부병원과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를 부속병원과 부속의학전문부로 흡수해 의학부를 만들었다). 오사카제국대학('오사카의학전문학교'→오사카의과대학), 나고야제국대학(아이치의학전문학교아이치현립의과대학관립아이치의과대학의 승격 테크를 밟고 제국대학으로 설립)[8] 오늘날의 중학교(전기중등교육)와 고등학교(후기중등교육)를 합쳐놓은 학교이다. 대한민국 역시 1950년까지는 구제중학교 시스템을 이어받아 중학교가 5~6년제였다.[9] 당시 구제전문학교나 다른 구제대학의 재학생은 '생도(生徒)'라고 불렀다고 한다. 원래 제국대학 본과에 진학하기 전 단계인 구제고등학교 재학생의 호칭이 '생도'였는데, 전문학교나 사립대학은 구제고등학교에 비해서도 낮은 취급을 받았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10] 1920년대 이후로는 다른 교육기관들도 구제대학으로 승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학위 수여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한편, 제국대학령 제3조에는 제국대학에 대학원을 둔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석사 학위가 없었고,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학사 학위를 받고 대학에 남아 박사 과정에 등록해야 했는데, 이러한 과정에 등록 중인 사람을 연구생이라 불렀다.[11] 일본 본토 7곳 제국대학의 약칭은 '''구제대'''(旧帝大(きゅうていだい), 혹은 '''칠제대'''(七帝大(ななていだい).[12] 약칭 토다이(東大、とうだい).[13] 약칭 쿄다이(京大、きょうだい).[14] 약칭 호쿠다이(北大、ほくだい). 다만 이것은 당대의 약칭으로, 후에는 이 약칭을 홋카이도대학이 가져가서 현재는 약칭이 따로 없이 토호쿠다이(東北大、とうほくだい)라고 불리고 있다.[15] 약칭 큐다이(九大、きゅうだい).[16] 약칭 카이다이(海大、かいだい). 다만 현재는 관용적으로 호쿠다이(北大、ほくだい)라고 불리고 있다.[17] 약칭 죠다이(城大、じょうだい). 교토제국대학 약칭 경대(京大)와 중복되어 성대(城大)로 불렸다. 해방되자마자 경성대학, 약칭 경대(京大)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성대라는 약칭과 한동안 혼용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경성대학의 명칭 변경을 다룬 논문도 있다. 한편, 경성(京城、けいじょう)은 게이조(케이죠)로 읽힌다.[18] 법제상으로 서울대학교는 경성제국대학 및 10개의 구제전문학교 및 사범학교(구제중학교 위치 상당.)와 함께 폐교 후 통합 재구성하여 국립서울대학교가 되었다.[19] 약칭 타이다이(臺大、たいだい).[20] 약칭 한다이(阪大、はんだい).[21] 약칭 메이다이(名大、めいだい).[22] 이에 앞서 1947년 5월 3일에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어 정식 국명이 일본국(日本國, Japan)이 되었다.[23] 본래 출발이 홋카이도제국대학의 전신인 삿포로농학교 수산학부로, 1935년 홋카이도제국대학 부속 수산전문부에서 하코다테고등수산학교로 분리독립했다가 1944년 하코다테수산전문학교로 개칭한 후 1949년 다시 홋카이도대학으로 합병된 현재 홋카이도대학 수산학부[24] 현재 서울대학교의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의과대학, 간호대학, 법과대학의 모체가 되었다.[25] 1919년 대만총독부 고등상업학교로 설립, 1926년 다이호쿠고등상업학교를 거쳐 1944년 다이호쿠경제전문학교로 개편(동년 조선의 경성고등상업학교도 경성경제전문학교로 개편). 1945년 중화민국에 접수되어 1946년 대만성립법상학원으로 개칭되어있던 상황[26] 대만의학전문학교는 1936년에 이미 다이호쿠제국대학 의학부를 창설할 때 부속 의학전문부로 흡수된 상태였고, 공업전문학교농림전문학교(원래 다이호쿠제국대학 캠퍼스 자리에 1919년 먼저 개교했던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臺北高等農林學校)였으나, 제국대학 설립의 모체가 되어 흡수당했다가 1943년에 타이중으로 독립해 나감)는 각각 타이난타이중에 위치해 있어서 개별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이외에 대만 유일의 구제고등학교#s-3.4인 다이호쿠고등학교는 다이호쿠제국대학 캠퍼스 바로 근처에 위치해 있었으나, 시급한 중등교원 양성을 위해 국립대만사범대학으로 별도 승격되었다.[27] 이는 35년간 일제통치를 겪은 조선 보다 일본의 지배기간이 50년으로 상대적으로 길었고, 35년 내내 재정독립을 달성하지 못하고 일본의 지원금에 의존했던 조선총독부와 달리 1900년대 초반에 쌀, 차 재배 수출 및 설탕 제당산업 등 경제발전으로 흑자재정을 실현한 대만총독부의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통치를 받은 탓에 대만일치시기에 대해 전면 부정만 하지는 않게 된 대만의 일본관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패전 후 타이완 섬을 접수한 중화민국의 대만인 탄압과 2.28사건 역시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28] 불과 얼마 전까지 서울대학교에서는 구제전문학교와 섞인 단과대학들이 경성제국대학 대신 다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그쪽을 강조하는 실정이었다. 가령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경우 경성제대 의학부가 본과가 되고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전문부(구제전문학교에 해당)로 흡수하여 폐지했음에도, 경성의전을 강조하며 경성의전의 전신인 대한의원(1907)과 관립의학교를 넘어서 학교의 기원을 '관립(국립)' 병원이라는 것을 명목으로 제중원까지 무리해서 소급하다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과 충돌하기도 했다.[29] 일제강점기의 학제에서 초등교원을 양성하는 사범학교는 당시 중등학교 급이었다. 경성사범학교는 전문학교급 승격이 해방 직전인 1943년이어서 아직까지 전문학교라는 인식이 미약하고 중학교(구제)급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경성제대 예과를 졸업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와 이공학부 이학계열 출신들로만 구성된 문리과대학에서는 서울대학교 초창기 경성사범학교에서 비롯된 사범대학을 철폐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30] 다만, 통합 당시 원래 경성제국대학 출신자들은 서울대학교를 모교로 인정하는 것에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일례로,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로 이관될 당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제1류 법학전공, 제2류 정치학전공, 제3류 경제학전공) 학생들은 경성법학전문학교와 섞이는 것은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격렬히 반대하면서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심으로 설립된 서울대 법과대학 소속으로의 학적 변경을 거부하고, 경성제국대학의 정통 계승이라 여겨지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소속의 정치학과로 끝까지 남았다. 이 때문에 서울대학교에는 정치학과가 법과대학이 아니라 문리과대학에 소속되어 있었고, 1950년대에는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서 오히려 법과대학보다도 더 많은 사법고시 합격자가 쏟아져 나왔다. 다른 전문학교와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후신으로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은 서울대 중의 진짜 서울대로 인정받았다고 한다(출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육십년사). 서울상대 총동창회 회보인 향상의탑 제165호(2018.12)에 실린 정기준 명예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1943년 10월 경성제대 입학생인 조영휘, 서우택, 송겸호, 최형규 등 4명만이 경성경제전문학교의 후신으로만 여겨지는 서울대 상과대학의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였으며 1945년 4월 경성제대 최후 입학기수인 조철 역시 서울상대 제2회 졸업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방 이후 국대안 시행 이전까지 경성대학으로 입학한 학생들 중에서도 17명만이 상과대학 소속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다.[31] 경성제대 등 제국대학 출신이었던 서울대 및 주요대학 국문학과/국사학과 교수들은 역시 제국대학 동문들이던 일본의 한국학 연구자들과 매년 교류 세미나를 이어왔는데, 당연히 일제시대부터 써왔던 일본어로 소통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모여서 세미나를 진행하던 어느날 갑자기 한국인 교수들은 '''한국''' 연구회니 모든 소통은 한국어로 이뤄져야한다고 주장하며 한국어로 발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에 일본인 교수들이 벙 쪘다고 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32] 서울대학교에서도 2008년 서울대학교총동창회 회원 33만 명의 이름으로 ‘서울대 개교 원년 찾기’ 운동이 시작되어 1946년 국대안으로 개교했다는 기존 설명을 수정하여 '개학' 연도를 경성제대 및 여러 전문학교를 포함하여 가장 빠른 1895년으로 수정한 바 있다.[33] 법문학부 의학부 20년, 이공학부 '''5년'''[34] 이성규 교수는 조선반도의 유일한 대학으로 군림한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 관한 국내 사학계의 서술의 비중과 평가가 과소하다고 비판하며, 경성제대 이공학부의 조선인 졸업자 수가 ‘37명에 불과’하다는 설명을 까고 ‘37명이나 된다’고 규정했다. 경성제대 이공학부는 식민지과학기술의 전당이었으며, 나아가서 해방 후에 신생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에 이들 경성제대 졸업생들이 지대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하며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를 '제국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이루어놓은 성과 중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규정한다(교수신문 2005년 5월 7일자 참조). 이성규 교수의 논문 이공학부를 중심으로 본 경성제국대학의 식민사적 의미를 참조.[35] 7곳의 구제국대학에 도쿄공업대학이 껴서 대략 1~8위를 차지하고 있고, 쓰쿠바대학도 그 뒤를 쫓고 있으며, NAISTJAIST이화학연구소도 일부 연구 분야에서 상당한 실적을 보여주고 있다.[36] 국립대학의 경우 1년간 학생 한명당 공재정지출은 202만엔, 사립대학은 16만엔. 출처 참조.[37] 일본 국립대학의 이공계 분야는 일본 정부 지원금을 엄청 받고 있고 일본의 연구 거점기관이기도 하기 때문에, 정부주도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있는 반면, 사립대학은 연구 규모로도 재정으로도 뒤쳐질 수밖에 없다.[38] 와세다대학게이오기주쿠대학을 일컫는 용어.[39] 많은 한국인들이 위와 같이 착각하는 이유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이병철, 신익희, 이광수, 송진우, 양주동, 김성수 등 많은 유명인물을 배출한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추측된다. 그 당시 와세다대학에 조선인이 상당히 많았던 이유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구제고등학교의 졸업장이 필요했는데, 당시 조선에는 구제고등학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조선인들은 와세다대학이나 게이오기주쿠대학과 같은 사립대학에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혀 다른 일본의 대학서열화를 한국에 억지로 끼워맞추기 위해 수도에 있는 국립대, 그 다음 라이벌 관계인 두 사립대라는 도식을 그대로 대입해 버렸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도 도쿄대와 소케이를 그냥 한국의 스카이에 대입해 버리는 우를 범한다.일본의 대학 서열화를 보면 알겠지만 한국이랑 전혀 다르다. 오히려 일본하고 미국하고 유사한 부분이 많으며 한국처럼 대학 앞글자 따와서 순서대로 나열하는 식의 서열화는 없다.[40] 물론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 준텐도대학 의학부, 도쿄지케이카이의과대학 등 명성이 높은 사립 의대도 존재한다. 이 사립 의대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학비가 비교적 싸다는 것. 그러나 사립 최고 의대인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 역시 구제국대에는 밀리고, 나머지 사립의대들은 관립의과대학이었던 구6의대에 뒤진다.[41] 고등학교 이과생에 할당된 문과 학부의 모집 정원까지 전부 포함해서[42] 링크 참고. 문과1류 401명, 문과2류 353명, 문과3류 469명.[43] 링크 참고. 종합인간학부 120명, 문학부 220명, 교육학부 60명, 법학부 330명, 경제학부 240명. 교토대 자료 참고[44] 링크 참고. 문학부 210명, 교육학부 70명, 법학부 160명, 경제학부 260명. 도호쿠대학 자료 참고.[45] 링크 참고. 공창학부 105명, 문학부 151명, 교육학부 46명, 법학부 189명, 경제학부 226명. 규슈대학 자료 참고.[46] 링크 참고. 문학부 185명, 교육학부 50명, 법학부 200명, 경제학부 190명. 홋카이도대학 자료 참고.[47] 링크 참고. 2007년 오사카외국어대학을 흡수 합병하면서 외국어문학부로 별도 편제된 덕분에 오사카대학은 현재 최대 규모의 학부를 가진 국립대학이 되었다. 문학부 165명, 법학부 250명, 경제학부 220명, 인간과학부 137명 등 기존 오사카대학 772명과 외국어문학부 580명. 오사카대학 자료 참고.[48] 링크 참고. 문학부 125명, 교육학부 65명, 법학부 150명, 경제학부 205명. 나고야대학 자료 참고.[49] 참고로, 서울대 문과(인문대, 사회대, 경영대, 사범대, 자유전공학부) 정원은 1,200명대, 대만대 문과(문학원, 사회과학원, 법률학원, 관리학원)는 약 1430명이다.[50] 링크 참고. 문학부 660명, 교육학부 960명, 국제교양학부 600명, 문화구상학부 860명, 사회과학부 630명, 법학부 740명, 정치경제학부 900명, 상학부 900명, 인간과학부 560명[51] 와세다대학 이공계는 다 합쳐야 1,700명 수준인데, 이과는 투자비용이 많이 들어서 사립학교로서 감당하기 어려우니 문과에만 집중하는 전략이다. 정원 전체에서 문과계가 80% 이상을 차지한다. 반면 제국대학들은 2,000~3,000명 정원 중 문과는 1/3 이하일 정도로 문과의 비중이 적다.[52] 게이오기주쿠대학도 '''4,625명'''(문학부 800명, 법학부 1,200명, 종합정책학부 425명, 경제학부 1,200명, 상학부 1,000명)에 달하는데, 결국 소케이의 문과 정원은 모든 구제국대학은 물론이고, 기타 중상위권 국공립 대학들의 문과 정원까지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라는 것.[53] 1907년 개교, 1922년 8월 법문학부 설치, 1923년 법문학부 제1회 입학[54] 1911년 개교, 1924년 9월 법문학부 설치, 1925년 법문학부 제1회 입학[55] 1924년 예과 개교, 1926년 법문학부 설치[56] 1928년 개교 및 문정학부 설치[57] 다이호쿠제국대학의 경우는 법학과가 없이 '문정학부'였다.[58] 제국대학에 흡수된 구제고등학교 고등과(대학예과)는 주로 교양학부가 되었다. 홋카이도대학홋카이도제대 예과를 교양학부로 개편하고 법문학부를 신규설치했고, 오사카대학도 구제고등학교인 오사카고등학교나니와고등학교를 흡수해 교양학부로 삼고 법문학부를 신설했다. 나고야대학제8고등학교를 교양부로 개편했다. 기타 문과 학부가 존재하고 있었던 제국대학들도 마찬가지.[59] 나고야대학은 1948년 나고야경제전문학교와 오카자키고등사범학교를 흡수해 법경학부와 교육학부의 모체로 삼았고, 오사카대학은 2007년 오사카외국어대학을 외국어문학부로 흡수함.[60] 철학과, 사학과, 문학과, 정학과(政學科)로 구성[61] 1930년 제1회 졸업생 14명부터 1943년 제14회 졸업생 32명까지 총 324명으로 연평균 23명의 졸업생 배출. 논문 20페이지 참고.[62] 당시 평균수험기간이 졸업 이후 5년 정도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63] 모집정원 도호쿠제대 법문학부 300명과 규슈제대 법문학부 200명 중 법학과의 정원은 1/4~1/3에 불과했고, 경성제대의 경우는 법문학부 80명의 절반인 40명뿐이었다.[64] 국립대학 연구비 삭감 2017년 대학별 연구비 순위 교차검증자료[65] 21세기 이후 전세계적으로 보면 미국에 이어 두번째. 참고로 2019년 기준 전부 28명의 일본인이 노벨상을 수상했다.[66] 그리고 2014년에 반복되었다.# 다만 기사에 나온 도쿠시마대학은 제국대학이 아닌 점에 유의.[67]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대학신문'은 1947년 9월 제3호까지만 발행되었다. 1948년 3월 1일에는 서울대 전체 학보인 '서울대학신문'이 창간되어 1950년 5월까지 발행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제17호를 마지막으로 정지되었다. 그리고 현재 발행되는 '대학신문'은 1952년 2월 4일 전시연합대학 시절에 탄생한 것이 이어내려온 것이다. 전쟁으로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서울대 학보의 명칭은 그대로 '서울대학신문'이 되었을 것이다.[68] 의학부도 의예과를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그대로 활용하면서 의과대학이 아닌 문리과대학 소속으로 두었음. 2012년 3월에 자연과학대학에서 의과대학으로 소속변경[69] 사실 제호나 명칭을 보통명사로 퉁치는 명칭부심은 최초, 최고의 위상이 확고한 경우에 종종 드러나기도 한다. 세계 최초의 일간신문 이름은 그냥 "TIMES"이고 세계 최초인 잉글랜드 축구협회 명칭은 그냥 "FA". 밑에서 서술할 제국대학의 종합적인 동창회인 '학사'회 역시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가 위치해있던 동숭동과 의학부가 있던 연건동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명칭 역시 '대학로'인 것도 대표적인 예.[70] 2회차 기준 수학제전 MATH POWER 2018 참가 티켓이 주어졌다.[71] 특히 이공계열. 그래도 문과에서는 소케이구 3상대였던 히토쓰바시대학, 고베대학, 오사카시립대학. 문리과대학쓰쿠바대학, 히로시마대학 등이 끼어있다.[72] 학부별 출신대학 점유율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제국대학 출신들이다.[71][73]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사립대 출신 학자 중 출중한 사람들은 해외로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가 많이 보이는 데 반해서, 구 제국대 출신들은 일본 내에서만 지지고 볶는 경향이 있다.[74] 단과대학 수준까지 포함하면 1987년 7월 15일 서울대 농대가 규슈대학 농학부와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한 것이 최초[75] 이는 교환학생 파견 협정으로, 도쿄대학과의 '학술교류협정' 체결은 1990년. 서울대학교 60년사 (제3부 교육, 제4장 장학 제도와 학생 교류 확대) 참고. 현재는 관악캠퍼스에 동경대 사무소를, 동경대 캠퍼스에 서울대 사무소를 두고 있기도 하다. 참고 링크[76] 홋카이도대학 공학부 건물 내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일본 오피스가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77] 당시 삿포로농학교(일본 최초의 학위 부여 기관)만은 예외로 가입이 가능했지만 후에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으로 승격되고 곧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개편된다.[78] 사실 제호나 명칭을 이런 식으로 보통명사로 퉁치는 명칭부심은 최초, 최고의 위상이 확고한 경우에 종종 드러나기도 한다. 세계 최초의 일간신문 이름은 그냥 "TIMES"이고 세계 최초인 잉글랜드 축구협회 명칭은 그냥 "FA". 이외에도 세계 최초의 영국학회는 국적을 적지않는 곳이 많은데, 예를 들어 영국 물리학회는 Physical Society→Institute of Physics이고 화학회는 Chemical Society→Royal Society of Chemistry이다. 위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제보가 그냥 '대학신문'인 것도 대표적인 예.[79] 會와 会는 구자체 신자체의 차이일 뿐 글자는 같은 '모일 회' 글자이다. '학사회' 부분만 구자체로 쓴 이유는 역사성, 정통성 강조 및 학회 예우 때문이다. 다른 예로 국학원대학(國學院大學)은 모든 한자를 구자체로 쓰고, 게이오기주쿠대학의 '게이오'가 연호에서 따와서 이 부분은 여전히 구자체를 원칙으로 하는 등 구자체는 이러한 정통성 강조와 예우의 목적으로 여전히 쓰인다.[80] 총장들이 모여서 카가미비라키(鏡開き)를 시연하고 있다. 행사가 탈 없이 진행되기를 기원하는 일본의 전통 풍습 중 하나.[81] 홋카이도 - 규슈 - 오사카 - 교토 - 도호쿠 - 도쿄 - 나고야 순서.[82] 전국7대학체육대회에서 하는 유도는 오늘날의 강도관 유도와는 규칙이 좀 다른 구석이 있는데, 스스로 누우며 그라운드 공방에 진입하는 행위에 대한 벌칙이 없으며, 스탠딩 선언을 받기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강도관 유도보다는 어려운 편이다. 강도관이 이런 저런 수정을 가하기 전의 초창기 유도의 형태와 가장 흡사하며, 오히려 브라질리언 주짓수와 더 비슷하다.[83] 구제고등학교를 일단 합격하면 대학 진학은 쉬웠다. 그래서 언제나 고등학교 입시가 입시생과 부모들의 관심사였고 고등학교 재학생들의 프라이드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고 전해진다. 이런 구제고등학교의 전설적인 엘리트주의에 관해서는 일본에 많은 문학, 예술작품이 있다. 심지어 도쿄 소재의 제1고등학교는 그 당시 도쿄제국대학 자체보다 더 유명했다고 한다.[84] 예컨대 마산여고는 마산여자상업학교, 광주일고는 광주고등보통학교, 경복고등학교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성제2고보, 경복중학교를 거쳐 경복 중, 고로 분리되었다.) 고등보통학교구제중학교(5년제)로 인정된 것은 1938년부터.[85] 당시의 중학교는 5년제로서 현재의 중학교+고등학교와 같은 레벨의 학교였다.[86] 일본의 학교교육법(1947년)이 시행되기 이전의 제도에 의거하여 설립된 일본제국의 모든 대학을 지칭하는 말.[87] 일부 사립대학에서는 예과를 별도로 운영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은 학생들을 받아서 가르쳐 본과로 진입시키곤 했다.[88] 이를 방계입학이라고 한다. 이들은 구제고등학교예과 출신과는 달리, '선과생'이라고 하여 편입생 취급을 받았으며 졸업 자격은 획득할 수 있었지만 학력 평가를 포함한 별도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으며 고등학교/예과 출신과 같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89] 정확히 말하면 원래 구마모토의과대학에 입학하였지만, 재학 중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편입하였다가, 법문학부 정치학과로 전과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90] 당시 제국대학의 교원은 주임교수-조교수-강사-조수-부수 순으로 보직이 정해져 있었다.[91] 도중 경성제국대학에서 이공학부 화학과 교수로 초청받았으나 교토제국대학에 재직 상태였기 때문에 응할 수 없었다.[92]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홋카이도대학 의학박사[93] 총독부의학전문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의학박사. 경성의학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초대 학장, 대한의사협회 초대 회장 역임.[94] 구제전문학교 과정. 단, 당시 고등사범학교구제전문학교 중에서도 우월한 지위였다.[95] 후에 도시샤대학으로 편입.[96] 영화 동주에서도 이런 상황이 묘사된다. 함께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송몽규만 합격하자, 윤동주가 태연한 척 하려고 애쓰며 송몽규를 축하해주고 송몽규도 난처해한다. 그리고 그 소식을 편지로 접한 윤동주의 아버지도 실망한다.[97] 출처 : 김두식, 「법률가들」, 창비, 2018. p.49[98] 출처: 早稲田と慶応 名門私大の栄光と影 - 橘木 俊詔 (著)[99] 당시 도쿄고등상업학교[100] 尾崎盛光. 전후 도쿄대학 문학부 사무장을 지냈다.[101] 웹사이트 출서 反東大の思想史 참고.[102] 만주 건국대학 출신인 강영훈은 당시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건국대학에 동시에 합격했으나 만주 건대에 진학했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103] 건국대학이 설립된 1930년대 말의 동아시아 지역의 엄혹한 경제 상황을 보면 건국대학의 인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군수전시총동원 체제로 개박살난 민생 상황에서 네임밸류를 얻고자 하는 것은 당시 용어로 유한계급이 아닌 이상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실제로 당시 대학 학비는 월간 수입이 40원 이상인 가정(신입 은행원 월급이 25~30원하던 시절)에서나 어느 정도 부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학비도 입학만하면 무료에 졸업하면 취직이 보장된 대학이니 인기가 상당했던 것이다. 제국대학의 경우도 대학생들 중 가장 늦게까지 징병이 면제되긴 했으나 전쟁 말기로 가면 문학부-의학부 순서로 학병 징집되었다. 그러나 군수와 직결된 분야인 공학부는 끝까지 징병이 이뤄지지 않아서 공학부 인기가 의학부 보다도 높았다고.[104] 전기/후기 과정으로 나누어져 전기가 대학예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고 후기가 본과 과정을 담당.[105] 문교부에 해당[106] 참고로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은 1816년을 개교연도로 잡고 있는데, 이는 제정 러시아의 괴뢰국인 폴란드 입헌왕국의 왕립대학으로서의 창건 년도다. 폴란드가 완전히 러시아 제국 직할지가 되면서 제국대학으로 승격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