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 개요
2. '대학'과 '대학교'
3. 역사
4. 현황
4.1. 한국
4.2. 외국
6. 대학에 대한 인식
7. 의의
8. 대학교 목록
9. 대학을 무대로 한 작품(대학원 포함)
10. 관련 문서


1. 개요


고등교육법 제28조(목적) 대학은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국가와 인류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심오한 학술이론과 그 응용방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국가와 인류사회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 영어: University(종합대학)/College(단과대학)
현대 각국의 교육시스템에서 가장 대표적인 고등교육기관이자[1] 모든 학문의 전당.[2] 영어로는 University 또는 College라고 쓰는데 전자는 종합대학, 후자는 단과대학이라는 의미가 강한 편이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는 Seoul National University 이지만, 서울대에 소속된 사회과학대학은 college of social science 라고 표시한다.[3]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까지는 학교 당국에서 정해준 과목을 공부하는 교육기관이지만 대학교는 자신이 해야 할 공부를 스스로 찾아서 하는 교육기관이다. 그 때문에 대학교가 여타의 학교들과 극명하게 차이 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학교는 의외로 수업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며 수업 시간도 자신이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몰지각한 대학생들은 자신이 할 공부를 찾는 방법을 몰라서 수업 시간 외에는 놀고먹는 것으로 착각했고 그 때문에 대학교가 놀자판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4]

2. '대학'과 '대학교'


과거에는 법률상 대학교와 대학의 구분이 존재했으나, 현재는 대학교와 대학의 명칭 차이는 없어졌다. 종합대학 문서 참고.

3. 역사


세계 최초의 대학이 어디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편이다. 우선, 흔히 최초의 대학으로 꼽히는 학교는 1088년 신성 로마 제국 시대에 세워진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으로 볼로냐 대학이 '서유럽' 최초의 대학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볼로냐 대학이 정말 '전세계' 최초의 대학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은데 그 후보들을 하나하나 나열해보면 이렇다.
  • 세계 최초의 '국립학교'이자 처음으로 '대학(University)'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육기관은 425년 동로마 제국에 세워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마그나우라 궁정 대학, Πανδιδακτήριον της Μαγναύρας)이다. 그 이전의 교육기관들은 성당 부속이거나 사립 교육기관이었으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고등교육기관인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을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설립하였고 그곳에서 법학, 철학, 의학, 경제학, 공학 과정 교육이 진행되었다. 이후 제국 내 다른 대도시인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에도 비슷한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학교들은 동로마 제국의 쇠망과 함께 명맥이 끊겨 현존하지는 않는다. 주로 그리스동로마 제국을 주목하는 쪽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을 최초의 대학으로 밀어주는 편이다.
  • 5~7세기에 세워진 날란다 대학이 최초라는 설도 있다. 인도의 날란다 대학은 불교학 교육과 불교 수도원 기능 외에 불교 외 종교, 철학, 문학, 수학 등 다방면에 걸친 교육을 제공하는 한편 날란대 대학의 도서관은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으로 논리학, 문학, 점성술, 천문학, 의학 등의 분야까지 풍부한 자료를 구비하여 다르마 간자(Dharmaganja, '진리의 보물'이란 뜻)라고까지 불렸다. 날란다 대학은 이후 없어졌다가 현대에 들어 다시 건립되었지만, 어디까지나 현대에 다시 세운 것이기에 밑의 알 카라윈에게 기네스북 타이틀은 빼앗겼다. 주로 인도불교계에서 이 날란다 대학을 최초의 대학으로 밀어준다.
  • 이슬람 제국 건설 후 이슬람권 곳곳에 세워진 마드라사(مدرسة)라는 이슬람 교육기관들이 최초의 대학이라는 의견도 있다. 제일 대표적인 후보는 859년 이드리시 왕조 시대에 세워진 모로코의 '알 카라윈 대학(جامعة القرويين)'으로 이쪽은 무려 현대까지 모로코 페스에 실존한다. 그래서 기네스북의 '가장 오래된현존하는 대학' 타이틀은 볼로냐 대학을 제치고 알 카라윈이 가져가게 되었다. 실제로 위에서 설명한 동로마 제국의 대학이나 날란다 대학은 역사가 끊기면서 사라져간 반면 알 카라윈을 비롯한 마드라사들은 볼로냐 대학을 비롯한 이탈리아와 유럽의 대학들에 영향을 많이 준 편이라 '최초의 대학'을 논할 때 가장 많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편이다. 위키피디아Madrasa and university도 참고해보자.

알 카라윈의 설립자는 파티마 알 피흐리라는 여성과 여동생 마리얌으로 둘은 튀니지의 거상이었던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후 모로코로 이주했는데 이슬람에 대한 신앙심이 매우 깊었던 자매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여러 교육기관들을 설립하는데에 힘썼고 알 카라윈도 그렇게 세워진 교육기관중 하나였다. 마드라사는 기본적으로 종교적 교육기관으로서 초기에는 이슬람에 관한 신학이나 이슬람 법률을 가르쳤지만, 후에는 종교적인 학문 외에도 문법, 약학, 수학, 천문학, 역사, 지리, 음악 등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고 특히 화학, 물리학 등 과학 교육기관으로도 유명했다. 그중에서도 알 카라윈은 여러 과학자를 비롯해 많은 위인을 배출했는데 서양에도 널리 알려진 유명인으로는 훗날 기독교로 개종한 탐험가이자 작가 레오 아프리카누스, 교황(?!) 실베스테르 2세(재위 945년~1003년, 출처) 등이 있다. [5]
사족으로 알 카라윈을 비롯한 마드라사들은 여성에게 최초로 문을 연 교육기관이기도 하다. 다만 여성이 정식 학생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그래도 '여성의 자존심'이라고 불린 파크르 운 니사등의 여성학자가 간간히 이름을 남겼다.
이렇게 세계 최초의 대학을 두고 의견이 갈리는 이유는 학문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고등교육기관은 중세 이탈리아 이전, 고대 로마고대 그리스에도 있었고 동양에서도 국학과 국자감, 성균관 등 대학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교육기관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학'의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볼로냐 대학(1088년), 알 카라윈 대학(85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425년), 날란다 대학(5~7세기경) 모두가 '세계 최초의 대학'의 후보이다.
그러나 알 카라윈 정도를 제외한 다른 고·중세 대학들은 현재까지 내려오지 않고, 학과, 박사학위를 비롯한 현재의 대학문화를 확립하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대학의 개념을 정리한 것은 볼로냐 대학이다. 정리하자면, 대학과 유사한 교육기관은 고대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있었지만 그중 현재까지 내려오는 '대학'의 개념을 규정하고 원류가 된 것은 볼로냐 대학을 비롯한 이탈리아의 대학인 것이다. 즉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이지만 현재 쓰이는 인쇄술의 직접적인 원류가 아닌것과 비슷하다. 다만 볼로냐 대학 이전의 비슷한 교육기관 중 알 카라윈 대학이 사라지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져 기네스북의 타이틀을 가져갔다고 할 수 있다.
볼로냐 대학은 1088년 개설 초기엔 신학, 법학, 의학 3개의 학부밖에 없었다. 다만 시대가 지나면서 '자유7과'라고 불리는 7개 학부가 보편적으로 정착된다. 3학 4과는 각각 문법, 논리학, 수사학산술, 기하, 음악, 천문이다. 자유7과의 확립 이후 본래 있던 3학부는 철학과 더불어 자유7과를 배우고 나서 이들을 심화해서 배우는 과목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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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대학
중세 대학에서 수여하는 학위는 이수의 정도에 따라 '바칼로레우스(baccalaureus)', '마지스터(magister)', '리첸티아 도첸디(licentia docendi, 후일 doctor, '독토르'로 간략화됨)'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이 각각 현대의 학사(bachelor's degree), 석사(master's degree), 그리고 박사(doctor's degree)에 직접적으로 해당한다. 리첸티아 도첸디는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이란 뜻인데, 따라서 이것을 따면 이론적으로는 그때부터 강의를 할 수 있었다.
중세 대학의 학위들은 관습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얻은 학위인지 명시해 주었다. 이에 따라 모든 과목을 이수한 학생에게 신학과는 Theologiae Doctor (Th.D.), 법학과는 Jurisprudentiae Doctor (J.D.), 의학과는 Medicinae Doctor (M.D.), 그리고 막내둥이 철학과는 Philosophiae Doctor (Ph.D.)를 수여하게 된다. 여기서 의학과 학위의 Doctor인 Doctor Medicinae를 줄여서 의사 선생님을 영어로 Doctor라 부른다. 사족으로 라틴어는 이론적으로는 격변화를 하기 때문에 단어 순서가 의미에 영향을 주지 않지만 단어 순서에 따라 뉘앙스가 살짝 다른데, Doctor가 뒤에 간 형태는 학위의 레벨(Doctor)을 강조하는 의미, 앞에 가면 과목을 강조하는 의미다. 선배격인 3분야는 현대로 와서도 그대로이지만, 정작 제일 늦게 추가된 철학과는 과학혁명을 거치며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수많은 과목들로 분화되어 나중에는 아예 Ph.D. 뒤에 따로 전공을 명시해주는 수준까지 왔다. 이 경우 Ph.D. in Chemistry 등과 같이 전치사 in을 사용한다.
사족으로 중세 4학부의 맏이인 신학부와 막내둥이인 철학부(현대에는 신학을 제외한 모든 인문, 사회, 과학 학문 분야 전체를 포괄)는 현대에도 전문직이라기보다는 학자의 양성에 가깝기 때문에 그 형식을 상당부분 유지해서 아직도 학사, 석사, 박사를 차례로 이수하고 수료하는 체계지만, 법학부와 의학부는 철학부나 신학부에 비해 짧은 기간, 즉 학사 학위 정도의 기간보다 살짝 긴 기간에 전문직으로서의 교육을 모두 마치면 J.D.나 M.D.를 수여한다. 한국 많은 의대에서 하는 "의사는 박사랑 동급으로 쳐 준다"는 이야기는 현대에는 인턴을 석사로 쳐주고, 레지던트를 박사로 쳐 준다고 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와전되어 있지만 사실 중세 대학의 4학부로부터 기원하는 유서 깊은(!) 인식으로, 전통이 잘 전해 내려오는 유럽 쪽에서는 의대나 법대를 졸업한 사람들은 프로필에 M.D.나 J.D.가 반드시 들어가며, 이는 Ph.D.나 Th.D.와 의전, 의례상 동등한 위상으로 취급해 주는 것이다. 만약 의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진학해 Ph.D.를 땄다면 둘을 병렬해서 M.D. Ph.D.로 적는다. 물론 현재는 의사도 학업을 지속하면 약학이나 생리학 등의 분야에서 Ph.D.를 따는 경우가 있지만.
영어단어 University의 어원은 라틴어 univers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교사와 학자의 공동체)란 라틴어에서 나왔다. 대학이 최초로 탄생한 이유는 종교, 정확히는 가톨릭사제 양성을 위해서였다. 먼저 위에서 예시로 들었던 학위들 중 최종단계에 해당하는 licentia docendi는 본디 가톨릭에서 사제 교육을 모두 수료하고 추가로 배움을 계속하여 다른 사제들을 양성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사제들에게 수여하는 면허다. 이 뜻을 직역하면 '교육 면허'쯤 된다. 사제를 양성할 교육자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교육 기관이 필요했으므로 그런 기관을 설립한 것이 바로 최초의 대학이며, 이 형태의 교육기관이 바로 현대 대학의 직접적인 조상 되시겠다. 따라서 대학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했던 학부는 신학부였다. 법학부와 의학부는 중세 사회 전반을 지배하며 사회의 유지에도 책임을 지고 있던 가톨릭 교회가 사회에 꼭 필요한 전문직들을 사제들과 함께 양성하기 위해 대학에 합류시킨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로부터 licentia docendi를 수여할 권한을 위임받은 대학들은 의학과 법학부의 학생들에게도 같은 학위를 수여하였으며 대학은 차츰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나중에는 철학부도 여기에 추가되게 된다. 가톨릭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신학이 철학적으로 정당화되는 일대 혁명이 일어남에 따라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말이 생기면서 철학을 교육할 필요성도 가톨릭 세계 내에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형태의 대학으로 최초로 인정받는 곳은 바로 볼로냐 대학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말의 의미는 '신학>철학'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중세 유럽 사회의 시녀들은 귀족 여성들을 바로 옆에서 모시는 존재들이며, 때문에 이들도 자신이 섬기는 사람과 거의 엇비슷한 수준의 신분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왕의 X싼 거 치우는 것도 귀족만 할 수 있던(...) 시대에 시녀도 하급 신분인 사람들이 채용될 리는 없었고, 그래서 이 당시의 시녀들은 주로 귀족이나 평민 부유층의 여식들이 일종의 신부수업 차 임시로 고용되어 일하는 직업이었다. 그러니까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말은 곧 '신학을 이론적으로 지탱해주고 보완해주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는 뜻이다.
이때 대학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으며, 이로 인해 일반인과의 거리는 멀어지게 되고 상아탑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 당시 전 유럽의 대학이 다 그랬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볼로냐 대학에 가서 문제없이 공부하고 대화할 수 있었고, 반대의 경우도 성립하였다. 물론 라틴어를 안 쓰면 벌을 주었다. 라틴어는 고대 로마의 공식 언어이자 그 문화와 지식의 명맥을 잇는 교회의 공식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라틴어만 할 수 있어도 성서부터 로마 시대 고문서, 로마가 지배했던 유럽 지역의 문서들을 다 읽고 쓸 수 있었기 때문. 우리나라로 치면 한문과 같은 개념이다. 한문을 쓸 수 있으면 번체자를 배운 중국이나 일본의 고급 지식인들과 대만까지 소통이 가능한 것과 같은 원리. 혹은 이공계 계통에서 알음알음 늘어가는 영어 강의를 연상해도 좋다. 캠퍼스 안에서는 쓰는 용어도 영어, 강의도 영어, 질문도 영어, 교과서도 영어, 과제 리포트도 영어, 시험도 영어라서 한국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외국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가도 큰 위화감이 없다.

중세 대학의 학생들은 대개 14~15세 때 대학에 입학하였고 그중 많은 사람들은 그전에 감독학교나 수도원에서 7, 8세 때부터 3학 4과, 즉 문법, 수학, 음학, 수사학, 논리학, 윤리학, 천문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대학원에는 법학(교회법과 민법), 의학, 신학의 세 분야가 있었고 이 대학원 졸업생들은 중세 사회에서 최고의 직업을 가지고 최고의 대우와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

당시 대학생들은 현재보다 더 나이대가 다양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최고의 개망나니이기도 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현대 대학생들이 상상하기 힘들 만큼 암기를 해야 했다. 양피지 도서가 웬만한 책1권 쓰려면 최소 수십~수백 마리의 양을 도축해야 할 만큼 매우매우 고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학생들이 지금처럼 전공교재를 개별적으로 가질 수 없었다. 또 중세 대학식으로 토론수업을 진행하려면, 학생들이 미리 수업할 부분을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다가 암기(!)해 두고 수업에 임했다. 이런 학업과 기타 사정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술 마시고 싸우는 것으로 풀다 보니, 학교 주변 주민들과 대학생들은 원수지간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파리대학 등 일부 중세대학에는 무려 치외법권(!)과 유사한 특권이 주어지기도 했었다. 이는 중세 대학이 기본적으로 황제, 교황 등 강력한 권력을 가진 세력들을 뒷배경으로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주민들 역시 잘못이 없는 게 아닌 것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바가지를 씌우려 했다. 집 주인들만 해도 집세를 학생들한테만 일반인보다 더 비싸게 받는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분노한 학생들이 집 주인들을 대상으로 시위를 하자, 겁을 먹은 집 주인들이 집세를 내리는 것으로 합의를 봐야 했다. 또한, 수시로 술먹고 패싸움하는 건 기본에, 여자 납치, 도둑질, 기물파손까지 있었고 이런 패싸움을 말리려고 수비대가 출동했다가 쌍방 간에 사상자가 대량으로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건 학교 안에서도 여전했는지 당시 대학의 학칙에는 '수업 중에 무기를 가지고 오지 말 것, 점수 가지고 선생에게 복수하지 말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빅토르 위고레 미제라블에서도 당대 대학생들을 보는 시각이 잘 드러나 있는데, 팡틴 가지고 놀다가 임신시키고 튄 그놈이 대학생이었다. 더 무서운 것은(학생들을 통제해야 하니 당연한 말이지만) 교수들도 폭력적이었다는 사실. 교수회의 중에 자기랑 문제가 있던 동료 교수 여러 명을 끔찍하게 살해했다가 최종적으로 대학에서 추방당한 교수도 있었고, 자기를 비판한 사제에게 앙심을 품고 제자들을 시켜 살인을 지시하는 교수도 있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당시 대학이란 기관이 이론상으로는 수업료만 내면 농민의 자식들도 다닐 수 있어 계급 상승이란 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와는 별개로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대학생이나 교수들이나 교회에 속하지 않은 당대 세속 지식인 사회는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나 플랑드르 일대, 라인강의 제국 자유시들 같은 특출나게 도시화가 밀집된 지방들 빼곤 기본적으로 귀족 자제들, 특히 그중에서 상속에서 비껴나가서 고급 지식이라도 배워야 했던 차남, 삼남들이 많았다. 이러다 보니 기사 계급의 다혈질적 폭력성은 대학 문화에도 그대로 반영 되었고, 근대에 진입하면서도 이러한 역사적 유산은 지금도 독일, 오스트리아 같은 중동부 유럽에는 종종 있는 대학 결투 클럽 같은 결투나 폭력적 학생운동 같은 대학 문화에 흘러 들어갔다. 게다가 사실 근대 이전 유럽 사회가 깨끗한 식수가 마련하기 힘들어 어린 아이들 부터 일상적으로 물 대신 술을 마신 것도 있고, 계급과 배경 막론하고 어쨌든 현대에선 상상도 하기 힘들만큼 폭력적이었으며, 유혈 사태에 덜 민감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
중세 대학생들은 거의 주당이어서 웬만해선 금전에 쪼달렸다. 집세와 책 대여료, 수업료가 비싼 것도 있다. 이외에도 생활비 역시 많이 들었다. 이 때문에 부모님이나 지인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방법을 설명하는 책자도 있었다고 한다. 덤으로 '어떻게 여자를 저녁 식사자리에 꼬시는가 하는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등골 브레이커는 여전하다. 당시 학생들은 가톨릭 세계의 수호자이던 교회가 후원하는 미래의 사회지도자들로서 일종의 특권계층을 형성했고, 지금으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권리를 누렸다. 대표적인 2가지가 '면책특권과 병역면제'였다. 이외에도 학생들은 자신들이 교수를 초빙하기도 하고, 수업이 맘에 안 들면 단체로 쫓아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그 당시 교수들의 급여가 학생들이 낸 수업료에서 나왔기에, 대학에서 학생들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개인/가족 단위의 기부금이 대학 운영 자금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학들은 학생들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스탠포드 대학, 하버드 대학, MIT 등. 요즈음이야 교수를 마음대로 쫓아내는 정도는 아니지만 학점 인플레가 바로 이러한 영향력이 낳은 결과이다.

볼로냐 대학의 특징은 학생이 대학 운영 전반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각 동향단은 학생장(rector)를 선출하여 조합을 대표하게 했다. 각 학생 조합은 자체 학생장의 재판권에 복종했으며 초기에는 스스로 교수를 채용하여 교수들에게 수업시간 준수나 강의의 체계성 등 상세한 규칙 조항을 준수하도록 규정했으며 그러한 조항에 입각하여 교수들의 봉급을 지불했다. 교수들은 전적으로 학생들의 수업료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에 의한 집단 수업거부는 교수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위협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

박승찬 가톨릭대 교수. 『중세 대학의 설립과 발전-학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보루-』

이밖에도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교수에게 많은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법학과의 경우 간혹 저술 계획에 관해 묻는 경우가 있어 실제로 어느 교수는 자신이 서술한 책의 서문에 '시민법 교수인 누구누구는 학생들의 희망과 요구에 부응하고자 특별히 이 책을 쓴다'라는 책의 서술 목적을 분명히 밝혀 두었다.
또한 수업 역시 실습에 가까운 위주로 진행되어 법학과의 경우 일반적으로 두 명의 학생이나 두 조의 학생이 상호변론을 하거나 한 학생이 문제를 제기하면 반대 혹은 찬성의 논거를 들어 자신을 변호하는 형식을 취하기도 했는데, 교수가 재판관의 역할을 해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밖에도 교수들 사이에 법률문제를 놓고 광장에서 변론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때는 학생들도 참석해 변론을 통해 논리력과 언어수사력을 키울 수 있으며, 이는 법학을 가르칠 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대학과 달리 중세 유럽의 대학들은 학교 건물이 없었다는 점으로 이는 당시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 역시 마찬가지로 이때는 교수가 살고 있는 가정집이나 교회에 붙어 있는 부속 건물 등에서 수업을 해야 했는데, 교수 하나가 학생을 가르치는 글방과 같은 형식으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학생 수는 교수의 인지도에 따라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500명으로 천차만별이었으며, 시험은 성당의 사교관이나 사제관에서 치워졌고, 중세 시대 이후에 점차 제대로 된 대학 건물들이 세워지긴 했지만 20세기까지 가정집에서 수업하는 곳이 많았다.
한자 문화권에서 서양의 'University'에 대응되는 뜻으로 '대학(大學)'이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곳은 일본이며, 시초는 당시에는 도쿄대학이다. 중국에서는 현재의 베이징대학에 해당하는 경사학당(京師學堂)이 일본의 역어를 수용함으로써 지금처럼 바뀌었고, 따라서 일본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4년제 고등 교육 기관은 대학이라고 통용된다. 한국에서는 4년제 대학과 2·3년제 전문대학으로 구분한다.

4. 현황


20세기 이후로 형성된 대학의 면모를 다루는 문단이다. 특히 지방의 일부 부실한 학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지잡대 문서를 참조할 것.
일부 학교에 있는 인터넷 시설들, 예를 들면 컴퓨터 인터넷이나 무선랜 인터넷은 게임 사이트 접속을 할 수 없게 차단 장치가 설정되어 있하지만 몇몇 학생들이 그 차단 장치를 뚫어버리곤 하며 학생들이 쓰는 일반 컴퓨터가 주로 당한다. 예로 들면 VPN을 쓰거나...학교의 학생 정책에 따라, 그리고 학교의 예산 수준[6]에 따라 이 정책은 아주 다르다. 학생의 자기통제력을 믿는 대학교는 학생들의 스트레스 발산 도구로서의 게임을 인정하고, 학생을 통제하는 것을 선호하는 대학교는 막는다.
일부 학교들은 특정 시설들을 관리를 잘 안 하는 문제점이 자주 발생한다. 주로 학생들이 사용하는 일반 컴퓨터와 과사무실에서만 사용하는 시설들을 관리 안 하는 경우가 많다.
요약하면 현재의 대학은 사실상 취업사관학교가 되었고, 학문을 가르친다는 본연의 기능은 대학원(중에서도 사실상 박사과정)으로 옮겨갔다.
2021년 전국의 대학 수는 전문대학 135개 대학 202개[7]를 합쳐 총 '337개'[8]이다. 2011년에는 전문대학 147개 대학 207개로 총 354개였다. 2011년보다 17개의 대학들이 줄었다. 앞으로도 전국에 있는 대학 수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저출산 현상 등으로 인해 부실대학들을 폐교하는 등 더 많은 수준 미달의 대학들이 줄 것으로 예상된다.

4.1. 한국


삼국시대 이래로 국학, 태학, 국자감과 같은 고등교육 기관들이 국가의 주도로 운영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과거 시험이 도입되면서 성균관이 대학교 역할을 했지만 사실 성균관에 입학할려면 과거에 급제해야되는 만큼 현대 기준으로 보았을때 대학원에 더 가까웠다고 할수있다. 1:1로 매치하기는 쉽지 않은것. 어쨌든 구한말까지도 성균관이 최고 고등교육기관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일제강점기 들면서 성균관의 지위는 격하되었고 상당기간 동안 조선내에서 제대로 된 종합대학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구제전문학교라는 고등교육기관이 있었지만 대학의 지위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민립대학설립운동이 펼쳐졌지만 이는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고, 일제의 주도하에 한반도 최초의 제도적인 대학[9]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어서 광복 직전까지 유일한 대학의 자리를 차지했다. 대학교가 하나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 만큼 대학의 문턱이 너무나도 높았다는 얘기였고[10], 때문에 조선인들이 경성제국대학에 들어가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일본 본토의 사립대학에 진학하는 조선인도 많았다.
해방 이후로 구제전문학교들이 대학교로 승격하고, 경성제대 해체 후 재 설립 과정을 거쳐 서울대학교가 되는 등 종합대학교의 수가 급속히 증가하여 대학교육은 이전보다 양적인 부분에 있어서 크게 성장했지만 곧이어 분단과 전쟁의 타격으로 인해 1950년대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도 전쟁 중에도 열악하게나마 전시연합대학으로 임시수도 부산에서 수업을 이어가고, 경성에만 대학이 있던 일제강점기와 달리 전국 주요 도시에 거점 국립대와 명문 사학이 자리잡으며 문맹퇴치 운동 등 교육열이 강하게 불어온 덕택에 대학생들이 매년 급속하게 늘어나며 대학교육은 빠르게 성장해나갔다.
그러나 대학이 성장한다 한들 이때까지도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해방 이후와 1950년대에 초등교육의 대중화가 간신히 이루어졌고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뒤인 1970년대가 되어서야 중등교육이 보편화 되었다. 그래서 대학진학률이 매년 늘어나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전체 학생가운데서 소수에 불과했고,[11] 이러한 상황은 1990년대 초중반까지도 이어져서 대학 졸업장이 곧 지적 혹은 사회적 엘리트의 인증과 동일시되기도 했다.[12] 이 때문에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가난한 농촌에서는 단지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농사에 필수적인 소까지 팔아 가면서 학비를 대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리하여 대학은 상아탑의 현지화 버전인 우골(牛骨)탑이라는 씁쓸한 별명까지 붙었다. 1960년대 초반에 대학교 교복이 없어졌다.
하지만 1990년대 김영삼 정부에 이르러 대학설립준칙주의에 의해 대학 정원 자율화와 대학설립 규제 완화가 진행됐는데, 이로 인해 대학의 숫자는 넘쳐날 수준으로 늘어나고 대학생의 숫자는 몇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질 좋은 일자리의 숫자는 이에 수반해 증가하지 않은 탓에 취업률은 점점 떨어져갔다. 그렇지만 여전히 대학에 다녀야 상대적으로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나 현실은 강했고, 이 같은 풍조가 결국 학력 인플레를 일으켜서 고등학생 84%가 대학에 들어가는 상황까지 이른다. 이제 대학교 자체가 통과의례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그저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심지어 대졸자 5명 중 1명은 고졸자 평균 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종합하자면, 2018년 기준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대학 졸업장 자체는 거의 의미가 없는 상황이며, 어느 대학의 졸업장인가가 중요한 상황이다. 상위권 대학 졸업장은 현재에도 가치가 있지만 하위권 대학 졸업장은 거의 대졸 인증 이상의 의미는 없는 상황. 다만 진로에 따라 학사 학위 혹은 학점 이수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하위권일지언정 의미가 있기는 하다. 예를 들면 3사관학교로 편입하려는 사람들은 학벌이 의미가 없다. 좋은 학벌이면 애초에 ROTC나 학사장교로 빠진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70.4%로 떨어졌다. 다만 대학 진학을 선택하지 않은 30% 정도의 학생들이 정말 고졸 취업을 원하는지 아니면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는지는 의문. 진학률이 낮아졌다고 고졸 학생들이 모두 고졸로 취업하는 건 아니다.
물론 각 군 사관학교로 가면 평생 직업군인, 그것도 고급장교로서 보장이 되어 있지만 군장학생은 현시창. 최하 6년은 군복무해야 하는데 이 기간을 다 채우고 전역하면 기본 30살이 넘어간다. 문제는 이런 식이면 당연히 군 장교의 질적저하가 심각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악순환, 결국 학자금 대출을 받아 등록금을 내고, 취업하기 전부터 빚더미에 짓눌리게 되는 것이 대부분의 현실.
이런 상황에서 대학 평가를 통해 부실대학을 가려내어 지원을 끊고 폐교를 유도하거나 극단적으로는 강제적으로라도 폐교를 실시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조차도 지역 경제에 끼치는 영향 등 복합적인 문제로 인해 쉽사리 손을 대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대학에 대한 수요가 너무 높아서 등록금은 제멋대로 올라가고, 올라가도 수요가 여전하니까 더 올라가고, 그 중에서도 잘 나가는 대학은 더 올리고, 그러니까 다른 대학들도 덩달아서 올리고, 그것 때문에 대학 차리면 돈 좀 된다고 생각하는 토호(土豪)들이 마구잡이로 대학을 신설하고, 정부는 정부대로 대학 설립인가를 너무 쉽게 내줘서 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그 토호들도 등록금 인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2021학년도 수능부터는 대학입학가능자원이 대학 정원보다 더 적어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게다가 2021년에는 8만 명, 2023년이 되면 대학에 사람이 10만 명이 부족해진다고 한다. 하위권 대학들의 대거 통폐합•폐교 사태가 줄을 이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의 출생률은 해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계속 적어지고 있는 추세인데[13] 이렇게 된다면 출생률이 높아진다고 해도 20년간의 시차가 있기 때문에 전국에 있는 부실대학 등의 수준 미달의 대학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존폐 위기에 시달리게 될 것으로 추측된다.
게다가 사립대학의 등록금은 가히 살인적인데, 국립대학은 보통 등록금이 학기당 100~250만 원 정도로 그치는 반면 사립대학은 평균적으로 450~550만 원 정도의 등록금이 형성되어 있다. 쓰레기 같은 지잡대 중에는 심지어 자기 학교법인 및 학교법인 이사진들 배를 채우기 위해서 학기당 700 이상 부르는 곳도 있다. 국내 대학들의 경우 등록금으로 받아 먹는 건 엄청난 반면, 챙겨주는 건 그다지 많지 않다. 그나마 국공립대학은 받아 먹는 것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래서 의무교육을 받을 때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라는 걸 배우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각 대학의 학교법인 이사장들이 많이 받아 쳐먹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그것도 모자라서 아주 밑도 끝도 없는 인상으로 자기들 욕심이나 채워 먹으려 하고 있다. 집안에 돈이 남아 돌아서 등록금이 비싸든 말든, 등록금을 올리든 말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모르겠는데, 꼭 저소득층이 아니라도 이 정도의 비싼 등록금은 가계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일부 고등학생들은 아예 각종 사관학교처럼 국비로 학업을 이수할 수 있는 특수목적 대학에 지원하기도 한다. 심지어 일반대학에 진학하더라도 등록금 문제를 고민하다가 결국 군장학생을 지원하는 학생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그리고 정치권은 등록금 문제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소위 반값등록금 등의 공약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공약은 당선되고 나면 나몰라라 한다.
이처럼 수급의 현저한 불균형으로 말미암은 대한민국 대학의 질적 수준 저하 현상은 심각할 대로 심각해진 상황이고, 그리하여 대한민국에서 대학이 신성한 학문의 중심지라는 말은 이미 옛말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대학이 너무 많아짐에 따라 너무 대학 진학률이 높아져서 사실상 상위권 대학의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지적 능력이 고졸과 차이가 없어지면서 대학의 의미가 퇴색된 것이다.
사실 대학의 다수를 차지하는 대학같지도 않은 지잡대들이 자진 혹은 정부 차원에서 폐교시키거나 해서 대학진학률을 대폭 낮춰야 한다는 여론도 많은 편이다. 지금의 대학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학이 너무 많아지고 사회 분위기가 개나소나 대학 가는 분위기라서 공부에 재능이 없는 다수의 학생들까지 무비판적으로 대학 진학을 하고 있는데, 지방의 하위권 대학에 진학해봤자 등록금과 시간만 낭비하는 인생적 비효율과 대졸이라는 이유로 눈만 높아져서 사무직만을 선호하고 이로 인해서 단순 노동시장 공급이 정체되는 노동시장 구조가 왜곡되는 사회적 비효율의 문제가 된다고 한다. 대학의 과잉 진학률은 상당한 국가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막상 강제로 대학 정원을 제한시키고 축소시키자니 바라던 대로 고졸 노동자 수가 늘어나고 사회생활 시작 평균 연령이 낮아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대학생과 대학의 과잉 진학보다도 더 비생산적이고 국가적 차원의 문제가 되는 고시낭인의 대량 양산 시나리오가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게 문제고, 그래서 아직 미적대는 부분도 있다. 실제 공무원 시험에서 어떤 꼴이 났는지 보면... 그 실태를 그대로 수능시험으로 옮기는 꼴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의 근본적인 이유는 직업 환경에서 한국사회는 생산직 근무환경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고졸로 취업하면 대다수의 경우 연봉도 대졸에 비해 심히 낮은 것이 일반적이다. 고로 고졸 취업으로 경력을 쌓거나 혹은 기술을 배운다는 선택을 하는 것이 대한민국에서는 상당히 불리하다는 것. 애초에 임금, 복리후생, 사회적 위치 자체가 대한민국에서 고졸은 심히 낮다. 해외 국가라고 해서 고졸과 대졸이 동일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해외에서는 최소한 고졸도 열심히 노력한다면 대졸과 대우나 임금 등의 면에서 일정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다. 반면 국내에서 고졸로 성공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괜히 뉴스나 신문, 방송 프로그램에서 고졸 성공신화 등의 제목으로 성공한 고졸들을 언론에 등장시키겠는가?
정부에서는 자꾸 대학 외에 다른 길도 있다고는 하지만 다른 길이 대학에 비해 상당한 차이로 노동환경[14]/복리후생/고용안정성[15]/평균임금에 있어 불리하기 때문에 대학 진학률이 매우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16] 대학은 사회에서 연구, 교육, 사회봉사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그리고 이 여러 활동 중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연구이다. 이것이 훼손되면 대학의 존재 이유가 흔들리는 일이 되기에, 이 '대학으로서의 주 정체성'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졸업의 요건은 다른 국가에 비해 널널한 편이다. 예전에는 논문 제출이 필수였던 경우가 많았지만 사실 학사 학위를 위해서는 논문이 의무라는 조항은 아무 데도 없다. 게다가 학부 수준에서는 교과서나 인터넷에서 주워다 적당히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논문 제출이 학생도, 교수도 남는 것 없이 엄청 귀찮은 일이 되어 버린 것. 그리고 갈수록 학문보다는 취업을 중시하는 분위기 때문에 최근에는 대부분의 학교가 어학성적 및 인증제 같은 걸로 대체하는 편. 특히 인문대에서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졸업요건을 채웠다고 쳐주는 학교가 많다. 학부생 졸업 논문 내용이 허접하고, 연구 실력이 떨어지는 학생은 연구+수업+시험채점에 교수들이 정신이 없기 때문에, 유급시키고 다시 논문을 쓰게 하기보다는 졸업을 시킨다. 반대로 졸업 논문을 잘 썼다면 당연히 반려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에 A로 졸업시키고 대학원 진학을 권유한다. 즉, '진짜 이건 대학생 수준이 아니다'싶은 논문이 아니라면,[17] 혹은 아주 아무것도 쓰지 않은게 아니라면, 졸업은 시킨다는 것이다. 한국은 교수 1인당 학생 수가 많은 편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졸업 논문을 심사하는 학교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대학을 4년 만에 졸업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노력이 필요하다. 휴학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고, 낙제, 재수강도 최소화가 필요하고, 수강신청도 최대한 잘 해야 된다. 특히 남성의 경우는 군대 입영이 있기 때문에 입영 시기와 복학 시기를 잘 조율해야 한다. 물론 정확히 4년만에 졸업하고 싶다면 병역유예를 해서 졸업하고 갔다오면 되긴 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생이 교복을 입었다고 한다.

4.2. 외국


미국에서의 수능격인 SAT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면 갑자기 힘들어진다. 아이비 리그 같은 최상위권에서, 건들거리면서 살면 끝장이다. 들어가면 급격히 빡세지기 시작한다. 하버드 같은 경우, 붕붕드링크를 먹어 가면서 공부하는 것이 일상이라고. 일반적인 학부 중심의 대학은 평균적으로 교수 대 학생 비율이 많아야 1:10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국내에서 공부해서 해외 대학으로 유학 가는 경우, 학점 따기가 매우 어렵기에 처음에는 상당히 고생한다. 즉, 대한민국을 제외한 대부분 나라에서는 졸업이 매우 어렵다. 학사경고만 요리조리 피하면서 공부하는 대한민국과 너무나 다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주립대에 해당하는 얘기고, 하버드, 예일 같은 명문 사립대 같은 경우는 웬만하면 다 졸업시킨다. 오히려 아이비 리그 및 명문 대학의 학점 인플레이션 현상이 심각해서 기사에 다뤄진다.(프린스턴, UChicago는 예외. 이 둘은 학점을 짜게 주기로 유명하다.)[18] 미국의 명문 사립학교도 일종의 기업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비싼 등록금 내고 다니는 학생들 졸업시켜 준다. 이들 대학의 기업화가 어느 정도냐면 가족 중에 졸업생이 있는 경우 해당 학생에게 입학 특혜를 주는 레거시(Legacy)라는 전형이 있을 정도.(이 방법으로 조지 H. W. 부시는 텍사스 주립대에 떨어졌으면서도 예일대에 입학했다. 물론 무사히 잘 졸업했다.) 평균 등록금 수준은 세계적으로 가장 비싼데 미국의 대학진학률은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매년 상승세에 있고 외국으로부터 수많은 유학생들이 몰려들다보니 등록금이 떨어질 줄 모른다. 그러다 보니 대학생들이 졸업 후에도 빚덩이에 오르는 경우가 많아서 미국 내에서도 심각한 사회이슈로 떠올랐다.[19]
유럽 대륙에서는 "교육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모토 아래 대학 등록금이 공짜인 나라가 상당히 많다. 무상교육 대표주자인 프랑스는 바칼로레아라는 대학 입학 시험에 붙으면, 본인이 바라는 학과를 다닐 수 있다. 물론 일반 대학만 다닐 수 있다. 모든 대학에서는 진급시험을 쳐서, 재학생들을 무척이나 많이 내쫓는다. 그래서 프랑스 대학은 '웃고 들어가서 울고 나온다.'는 소리도 떠돈다. 진급시험은 1, 2학년 때 세 번 치르며, 모두 불합격되면 프랑스 내 모든 대학에서 자신이 재학했던 학과로 재입학이 영원히 불가능해진다.
다만 그랑제콜일 때는 상황이 좀 다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일부 고등학교에 부설된 그랑제콜 준비반(프레파(prépa))에 들어가서 2년간 더 공부하고, 그랑제콜 시험을 치를 수 있다. 그랑제콜 입시에는 재수, 삼수가 넘쳐난다. 그리고 그랑제콜 입시에 실패하면, 일반 대학 3학년으로 편입학할 수 있다. 프레파가 일반 대학 1~2학년과 맞먹는 수준이라서 이렇다. 그랑제콜 입시는 무척이나 어렵지만, 그 대가는 아주 확실하다.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에 합격한 뒤 학사, 석사 과정을 거쳐 국립행정학교(ENA)에 합격하면 대학 입학만으로도 한국에서 고등고시 패스 수준의 혜택이 주어지고, 이공과대학(Ecole Polytechnique)이나 고등사범학교(ENS)에 입학하면 월 수십만 원에서 백만 원대에 이르는 월급을 준다. 이런 지경이니 프랑스에서 대학생은 진짜 엘리트로 대접받는다. 조금이라도 뒤떨어지는 모습이 보이면 학생들을 가차없이 탈락시키기 때문이다.
스웨덴이 대학교가 의무교육이라는 설이 있는데, 근거없는 낭설이다. 수업료만 없고 다른 것은 다 돈을 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또한 대학과정을 무상으로 지원한다. 하지만 대학 진학률은 10% 대에 그칠 정도로 저조하다.
독일 등 일부 북유럽 국가에 한해서는 대학서열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특별한 이유[20]가 없는 한 될 수 있으면 싸고 가까운 곳을 가는 것이 좋다'라는 생각이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편이다. 게다가 독일은 중학교에서 이미 실업계(하우프트슐레, 레알슐레), 인문계(김나지움)로 나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통합되어 있는 시스템이라서 그렇다. 레알슐레에서 김나지움으로, 하우프트슐레에서 레알슐레로 올라가고 싶으면 시험을 쳐서 한 단계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김나지움 과정에 입학한 학생들은 종합 대학과 전문 대학 둘 중 하나에 입학할 수 있다. 종합 대학은 일반적으로 이론을 중심으로 배우며 대학원 과정까지 준비하는 이들이 많고 대학을 졸업하면 주로 학계에서 일하게 된다. 독일에서는 박사를 딴 사람을 부를 때는, 이름 앞에 반드시 박사라는 호칭을 붙여야 되므로 확실한 엘리트 계층이라고 볼 수 있다. 전문 대학은 실기를 중심으로 해당 분야의 전문인을 육성하는 대학이며 음악 대학과 의학 대학이 유명하다. 실업계는 그나마 공부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레알슐레'와 "100의 10%는 얼마인가?"의 문제도 못 푸는 아예 막장들이 가는 '하우프트슐레'의 2단계로 나뉜다. 자세한 것은 독일 문서를 참조.
서유럽에서 유학하고 온 아무개 여대 법학과 교수의 말에 따르면 그런 이유로 서유럽, 북유럽에서 소위 '평등교육'을 지향한다는 한국의 인식과는 달리 고졸과 대졸의 사회적 대우 차이가 확실하고 대학에 가지 못한 고졸의 열등감, 자세히는 패배자 정서나 허무주의 정서에 가까운 것 또한 상당하다고. 엘리트가 될 싹수가 안 보이면 일치감치 포기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라 열등감을 드러내지 못할 뿐이라고 한다. 즉, "뼈 빠지게 내는 세금으로 공부하는 거니까, 할 거면 철저하게 하고 그 정도도 못하면 대학 생활하지 말고 돈이나 벌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깔려있다.
반면에 이런 유럽 내륙의 경향과 전형적으로 대조되는 대학 문화를 형성한 곳이 있는데, 바로 영국과 그 후예인 미국. 등록금도 비싸며, 철저하게 대학을 서열화한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대학이 변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 이전부터 그래왔다. 영·미 학제의 영향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는데, 이미 그 이전에도 일제의 영향으로 한국(식민지 조선)에 대학 서열체계는 존재했다. 일본의 경우 근대화 과정에서 성립된 학제는 영국에 비해서 대학이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엘리트를 양성하는 기관이라는 생각이나, 국립 최고학부의 존재 등은 독일이나 프랑스 고등교육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제국대학의 경우, 그랑제꼴과 그 성립 취지와 학사 운영이 굉장히 유사하다. 부속 중학교-부속 고등학교-대학 순으로 이어지는 일관제(중고일관교) 시스템을 여러 대학에서 운용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
사립학교의 경우 비영리법인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사업체이기 때문에 적자가 나면 유지가 어렵다. 일본의 경우 학령인구가 급속하게 감소한 탓에 많은 대학들이 문을 닫거나 경쟁력 있는 대학들에 흡수되는 한편, 유학생의 수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부실대학 선정, 망해가는 대학의 흡수를 통한 사립 명문대들의 거대화 등 학령인구 감소에 대한 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집트의 경우에는 절대평가를 통해서 대학 입시를 뽑는다. 그래서 만점에서 점수를 얼마나 받느냐가 중요하다.[21] 1학년 때는 학부[22]를 선택해서 간 후에 전체적으로 학과에 대해서 맛을 보고 나서 2학년 때 전공 학과를 결정해서 들어간다. 또한 각 학년당 일정 이상의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낙제로 같은 학년을 계속 다녀야한다. 즉, 공부 안 하면 평생 1학년을 다니면서 졸업을 못한다는 얘기이다.
아르헨티나의 경우는 대학교가 되려 학업량이 살인적인 수준이다. 그래서 대학은 공짜에 지원자는 어지간하면 합격이라서 입학은 웃으면서 하지만 졸업은 울면서 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다. 4년제인데 7년 만에 졸업하면 우수한 축에 들어가는 것이고 보통 10년 정도는 걸린다.

5. 대학에 대한 논쟁



6. 대학에 대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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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는 고급 인력의 공급 자체가 많지 않아서 대학을 졸업하는 개인=중산층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사업가를 비롯한 상류층의 경우에는 대물림이 되거나 대학 졸업 여부와는 상관 없이 자수성가를 하는 케이스가 일반적이었고 현재도 그런 상황이라 대학을 졸업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와 같은 문제는 기술적으로 특화된 교육을 받는 노동자와도 연관성이 적어 사실상 중산층에 국한된 현상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신자유주의가 활성화 됨에 따라 법인 설립에 대한 규제가 느슨해지고 그 결과 중산층이 되고자 하는 신분상승 욕구를 가진 개인들에게도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우후죽순처럼 대학이 생겨났고, 그 결과 대학에서 통용시키는 지식과 담론이 예전만큼의 권위를 가지기는 어려운 상황까지 오게 되고 말았다.
전문가에 대한 불신이나 안정적이라고 여겨졌던 중산층으로서의 삶이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데에 대한 불만은 서구권에서도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최근에 와서는 서구권을 비롯한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학 교육보다 이미 그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축적해 놓은 인프라와 연결된 직업 교육이나 사라질 이유가 없는 지역 사회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교육 체계로 중산층의 선호도가 옮겨가고 있는 상황. 여기에 고질적인 파벌싸움이 생산적인 경쟁이 아니라 제로섬 게임화 하고 있는 것도 한몫 하고 있다.
다만 과거 대학이 적었을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만 대학에 갔지만 현재에는 공부를 안 한 사람은 대학엔 용케 가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저평가를 받게 되므로(학벌이나 학점 등) 상대적 교육수준이 사회계층에 미치는 영향력 자체가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다만 대학 내의 평가가 얼마나 공정한지, 대학에 들어간 후의 발전 또는 퇴보를 제대로 고려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지표가 존재하는지는 의문.

7. 의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기술, 이른바 스콜라쉽이 그 사회 안에서 축적한 지식에 기반하고 있는 만큼 그런 상황에서도 대학은 여전히 본원의 기능을 나름대로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오해하기 쉬운 것은 대학이 지식과 관점에 있어서는 그 사회 안에서 가장 앞서갈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사실 그렇다면 대학을 선호하는 것은 중산층이 아니라 상류층이 되어야 하지만 상류층에게 대학은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대학은 그 사회에서 선행적으로 축적한 기술이나 관점을 차용해서 사용할 수 있으며, 반대로 대학에서 개인이 연구한 성과가 기업으로 이전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학이나 사회 어느 쪽도 반드시 한쪽만이 앞서가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대학만큼이나 그 사회에서 먼저 발견된, 특히 기업에서 연구를 통해 밝혀낸 성과 또한 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학에서 양성하는 전문가와 기업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에 그 구분 지점이 그렇게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최근에 와서는 시민 사회의 취미 영역 안에서도 개인들의 전문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진 결과로 체계화되어 있는 대학으로서는 상대적으로 유연성이 떨어질 수 있는 부분에서의 활약이 있기도 하다.
문제는 대학 바깥에서 축적된 지식이 대학 내로 이식되는 과정이 직결적으로 이어져있지는 않다는 것인데, 그런 이유로 최근에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세미나가 대학에서 제공하는 지식을 어느 정도 커버하고 있는 상황. 이 와중에 대학은 이를 되려 쫓아가기 위해 커리큘럼을 개편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실은 신자유주의적 대학 개혁의 핵심적인 동기가 되었다.

8. 대학교 목록




9. 대학을 무대로 한 작품(대학원 포함)



10. 관련 문서


[1] 고등교육기관인데 왜 고등학교가 안 들어가냐라고 오해를 하는 경우도 많은데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함께 중등교육기관이다. 덤으로 초등학교는 초등교육기관.[2]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 바로 대학이다. 일례로 대학에는 수많은 학과가 가득하다.[3] 다만 실생활에서는 종합대학/단과대학 모두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대학'이라고 하듯이 college라고 통용된다. 예컨데 "My son went off to college"라고 했다고 해서 꼭 아들이 단과대학에 갔다는 얘기가 아니다. 스탠포드나 UCLA 등 종합대학에 간 경우에도 일상생활에서 university/college를 혼용하며, 구어체에서는 university student란 표현보다 college student란 표현을 압도적으로 많이 쓴다. 사실 이 부분은 영어를 일상생활에서 써봐야 정확히 와닿겠지만 college란 단어 자체가 반드시 단과대학을 의미하기보단 그냥 '대학'에 가까운 느낌이다. 예를 들어 대학농구란 식의 표현을 할 때 간단히 college ball라고 한다.[4] 입시위주 교육의 폐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켜서 하는 공부'에 익숙해진 학생들이 대학에 가고, 시키는 사람이 없다 보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방황에 빠진 것이다. 이런 학생들을 노린 일부 지방대에서는 '취업사관학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학과별로 추천 진로를 정해 타이트한 진로별 교육과정을 시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대학들은 인근에 있는 타 대학보다 인기가 높은 것이 일반적인데, 일부 상위권을 제외한 오늘날 한국 대학생들이 얼마나 타성에 찌들어있는지 보여준다.[5] 이상할 건 없는게, 유럽기독교 국가들과 중동이슬람 국가들 간의 학술 교류는 매우 흔해서, 많은 유럽인 학생들이 아랍어를 공부해서 중동의 마드라사로 유학을 가는 일이 흔했고, 중동권의 학자들도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해 조언을 듣고자 동로마 제국 출신의 학자들을 초청하곤 했다. 실베스테르 2세의 본명은 제르베르 도리악으로 어려서 수도원에 들어가 비크의 주교였던 아토의 제자가 되었다가 아토가 레콘키스타 전쟁 중 후우마이야 왕조코르도바에 사절로 보내지면서 코르도바에 따라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이슬람 궁전과 과학, 문학에 관심이 많은 이슬람 군주들에게 매료되었고 본인 역시 수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을 열심히 공부했다. 실제로 실베스테르 2세는 그리스-로마와 아랍의 수학과 천문학을 장려하고, 서유럽에 주판과 혼천의같은 도구들은 물론 아라비아 숫자, 십진법을 도입하는등 역대 교황중 유럽의 과학 및 수학의 발전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교황중 한사람으로 평가받는다.[6] 게임 클라이언트 다운로드 등의 트래픽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7] 교육대학산업대학, 분교 포함.[8]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YL21181[9] 여기서 말하는 대학은 제도(制度)상의 진짜 대학(大學)을 말한다. 강습소, 의숙, 학원, 전문학교 등을 전신으로 한다며 오랜 역사가 있다고 주장하는 곳은 얼마든지 있지만, 실제 법령을 기반으로 대학원 등의 연구과를 두고, 학사, 박사 등의 학위를 부여받을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 즉 대학(大學)은 한반도에서 경성제국대학이 최초이다.[10] 그나마도 일본인 학생들의 티오가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11] 게다가 이 시기에는 아직 남존여비 분위기가 강해서,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이 남학생에 비해 상당히 낮았다. 1980년대 당시 경영학과, 행정학과, 공과대학의 학과 같은 곳에 여학생이 사실상 전무했던 것도 그 이유. 그나마 딸을 대학에 보내더라도, 남녀공학보다는 여대를 선호했다. 당시 이화여대숙명여대의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12] 흔히 386세대가 대학 쉽게 가면서 꿀을 빨았다는 얘기도 그 세대 내에서 최소 상위 20%, 즉 2010년대로 치면 최소 지거국은 간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일로, 애초에 386세대들이 대학에 졸업하면 대기업에 쉽게 취직할수있었고 공무원 취직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었던것도 대졸자들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13] 2013, 14, 15, 16년 출생아는 겨우 40만 명대, 한술 더 떠서 17년, 18년 출생아는 30만 명대이며, 19년 출생아도 30만 명 턱걸이 수준이다. 그래도 2001년 이전까지는 계속 60만 명 이상을 유지했는데 최근엔 출생아 수가 저렇다.[14] 아직도 평균 근로시간은 생산직이 눈에 띄게 더 긴 편이며, 그렇다고 일부 대기업 공장이나 사실상 전문직으로 취급해야 하는 최고위급 엔지니어를 제외하면 사무직에 비해 그렇게 페이가 쎄지도 않다. 주52시간 제한도 일부 예외직종이라 해서 생산직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경우도 있고. 또한 안전 문제도 심각하다. 한국의 산업안전 실태나 산재발생율을 따지면 OECD 평균을 한참 뚫어버린다. 우스갯소리로 공장 가서 1년 일하면 동료 중 절반이 산재처리 후 해고되어 물갈이된다는 낭설과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접합/봉합 시술/수술 관련한 의학기술이 뛰어난 편인 이유가 60년대부터 지금까지 워낙 많은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손가락을 잘라먹어서라는 낭설이 있을까.[15] 여기에는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의 영향도 포함된다.[16] 쉽게 비유하자면, 잘 닦인 왕복 16차선 포장도로가 갑자기 왕복 8차선 포장도로로 줄어들고 나머지 8차선은 비포장도로가 된다면 당연히 트래픽은 왕복 8차선 도로로 몰리기 마련이다. 8차선 도로를 6, 4차선으로 줄인다고 해도 여전히 사회적 시스템으로는 인생 초반부의 여러 길 중에서 주간선이 될 수밖에 없는 대학 진학으로 트래픽이 쏠릴 수밖에는 없다.[17] 인용처가 네이버 지식인이라든가, 인용 형식이 엉망이고, 잘못 인용했다거나, 위키피디아에서 그냥 베낀 수준이 아닌 이상에야... 물론 이렇게 써도 귀찮다고 통과시키는 대학도 있다.[18] 평가 자체가 후해진것도 있지만, 심지어 학기가 꽤 진행되었음에도 특별한 제한이나 페널티 없이 수강을 취소할 수 있는 시스템의 여파도 크다- 요컨데, 해당 과목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은 일찌감치 알아서 포기하기에 정말로 꽤 잘하는 학생들만 남는 것.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떨어져나가면 나머지는 당연히 좋은 점수를 받는다. 웬만한 이과계의 경우 아무리 명문대라도 수강 취소 시스템이 무자비한 곳들은 평균 학점이 영 좋지 않은 편이다.[19] 20세기 초가 배경인 소설 《음향과 분노》에서도 변호사(!) 아버지가 하버드에 들어간 아들의 등록금을 대려고 농지를 파는 묘사가 나온다.[20] 본인이 원하는 학과가 집 주변 대학들엔 없다든가.[21] 낙제 기준은 50점. 그래서 그 이하로 받는다면 이집트인들은 그 수업에 낙제 했다고 생각한다. 상대평가가 없으니 전체 평균이 50점대 이하의 어려운 시험이었다고 해도 이해를 잘 못한다. 입학하고 나면 자유선택학부 시스템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22] 학과가 아니다! 인문학부 사회학부 할 때 그 학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