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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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colbgcolor=white,#1f2023> 이상재(李商在)
본관
한산 이씨

계호(季皓)
아호
월남(月南)
출생
1850년 10월 26일
조선 충청도 한산군 한산면 종지리[1]
사망
1927년 3월 29일
일제 강점기 경성부 재동
1. 개요
2. 일생
3. 일화


1. 개요


대한제국미국 공사관 서기관, 개화파 정치인이며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한 계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한산(韓山),[2] 자는 계호(季皜), 호는 월남(月南). 독립운동사에 있어서는 좌우 양 진영 모두에게 인정을 받은 독립운동가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3]
엄격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충청도 출신 특유의 위트를 가지고 돌직구를 날렸던 인물로도 유명했다.

2. 일생


조선 충청도 한산군(현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출신이며 아버지는 이희택(李羲宅)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1867년 과거 시험에 낙방한 후 개화파 박정양의 식객(食客)이 됐다. 박정양보다 8살 연하의 이상재는 처음에 나라의 여러 부패 문제 등을 두고 울분을 토하다 차츰 박정양의 신문물 이야기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박정양은 1866년 과거에 합격해 막 승지일을 보고 있던 참이었는데 1880년까지 박정양의 옆에서 비서 아닌 비서로서 모시던 이상재는 박정양이 1881년 '조사 시찰단'[4]으로 도일하자 같이 일본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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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시찰단 시절 이상재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개화파들이 모두 실각했는데 김옥균의 당여인 급진 개화파들은 일소됐지만 갑신정변에 참여하지 않았던 개화당 인사들까지 모두 찍혔다. 당시 박정양은 한성부 좌윤(오늘날 서울특별시 부시장)을 거쳐 도승지(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에 올랐었는데 고종을 김옥균 파에게 일시적이나마 뺏겼던 책임을 지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고 이상재 역시 서천으로 낙향했다. 조정이 민씨 척족 등의 수구파 일색이 된 후에야 온건 개화파들이 조금씩 복귀할 수 있었다. 온건 개화파들은 구한말 국정에 참여는 했지만 청나라 양무운동 방식의 근대화를 밀어붙인 민씨 척족들과는 궤가 다르며 그들에게 눌려 있었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 공사'에 재기용되자 박정양을 따라 그도 젊은 시절 미국에 가서 공사관 2등 서기관에 올라 첫 관직 생활을 경험했다. 그러나 박정양은 청나라의 압력으로 귀국해야 했는데 조선의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막기 위해 모든 대미 접촉을 청나라를 통해 하라는 약속(영약삼단)을 깨고 박정양이 미국 대통령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 때 귀국한 이상재는 다시 실각한 박정양 옆에서 야인 생활을 버텼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가 쫓겨가고 일본에 망명 중이었던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을 등에 업고 귀국하자 박정양과 함께 조정에 복귀했다. 갑오개혁 때 이상재는 학무국장 겸 학무아문 참의로서 '신교육령'을 반포시켰으나 갑오개혁은 결국 실패한다.
1895년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러시아뤼순항과 요동 지배권을 뺏기자 고종의 마음이 러시아로 기울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급진 개화파들은 다시 일본 망명길에 올랐지만 이상재를 비롯한 온건 개화파들은 수구당과 손을 잡고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는데 힘을 보탠다. 그는 이 때 중추원 1등 의관, 의정부 총무국장 등을 지냈고 1896년 독립협회 출범 때는 물론 1898년 3월 '만민 공동회'와 10월 '관민 공동회'에 정부 측 인사로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꾀하고 있다'는 어용 단체 황국협회의 무고(익명서 사건)로 남궁억 등 16명과 함께 1898년 11월 체포되었다. 이 때 이승만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경무처와 평리원에 가서 밤샘 농성을 벌여 석방시켰다.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아들 이승인과 함께 3년형을 사는 동안 개신교개종했다. 이후 이승인이 옥 중에서 사망하는데 이 때 이승만이 준 성경을 읽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에 원한맺힌 마음을 푼다. 이승만과는 이 때부터 사제 지간이 됐다고 한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풀려나 곧바로 낙향한 그는 고향에 초갓집 교회를 열었고 '조선 기독교 청년회(YMCA)'에도 참여해 기독교 운동에 매진한다. 1905년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이 방한하자 맞이하는 자리에 함께 하면서 조선의 독립에 대해 미국에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미서전쟁의 전리품인 필리핀의 지배와 북태평양 제해권을 러시아로부터 지키기 위해 일본과 동맹한 상태였다. 을사조약을 지켜본 그는 고종의 부름을 받고 잠시 의정부 참찬을 맡지만 곧 사직하고 낙향한다. 이 때 자신의 가장 큰 지지자이자 스승이면서 선배인 박정양의 죽음을 맞아 큰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1906년 조선에 은혜를 입은 일본인 소다 가이치를 기독교인이 되도록 전도하고 소다 가이치는 훗날 조선 아이들을 돌보고 조선의 독립 운동을 도우며 미쳐가는 일본에 맞서 조국의 악행을 회개하는 진정한 크리스찬이 된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 치하가 되자 관직을 버리지 않은 자들은 과거 친일 개화파였든 수구파였든 누구든 친일파로 변질되는데 이상재는 양심 인사로서 일체의 관직을 내려놓고 은거한다. 그러면서 그는 계몽 활동에 나서 교육자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19년 3.1 운동 때 이상재는 '민족 대표 33인'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한다.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 회장이 되었고 1922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결성하여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했으며 1923년 현재의 보이스카우트 전신(前身)격인 '소년 연합 척후대'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의 사장으로 부임하였으나[5] 늘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1927년 항일 단체였던 신간회 회장에 임명되었으나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장례는 '사회장(社會葬)'으로 열렸는데 4남 중 3남이 모두 죽게 되면서[6] 유일하게 생존한 막내아들 이승준이 상주(喪主)를 맡았으며 유산으로는 미곡 27가마의 을 남겼다고 한다. 묘지는 처음엔 고향인 한산군 선여에 장지를 마련했다가, 1957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했다. 묘비는 아래에 언급할 변영로가 직접 썼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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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에 위치한 사적 제125호 종묘 바로 앞에 있는 한복 입은 동상주인공이 바로 월남 이상재다.
2011년 7월 이상재의 육성을 녹음레코드판이 독립기념관에 기증되기도 했다.# 일부분이지만, 해당 육성의 내용을 듣고자 하면 링크를 참고할 것. 2019년에 보관하고 있었던 대미 외교 문서 자료가 공개되기도 했다.링크

3. 일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겹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양기탁 선생과는 국내 애국 계몽, 실력 양성 부분에서 많이 겹친다. 1896년 이상재 선생이 독립협회에 정부측 인사로 참여시 양기탁 선생은 사회 초년이었고, 1922년 이상재 선생 말년의 민립 대학 설립 운동 시 양기탁 선생이 국채보상운동에 모인 성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승만이 옥중에서 전도한 바 있고 이승만과 사제 지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후에 이승만이 대통령 재임 때 1956년 공보처를 통해 '월남 이상재 선생 약전(略典)' 이라는 유고집을 발간했다.
이전부터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고 1920년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직접 시구자로 나서기도 했다. 남아있는 기록들 중에선 대한민국 최초의 시구라고 한다.
  • 한반도 최초의 라디오 방송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24년 조선일보의 사주가 송병준에서 신석우로 바뀌며 홍보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을 기획하면서 이뤄진 일이다.
  • 말솜씨가 뛰어났으며 당대 최고의 독설가라 할 만한 인물이자 언어유희에도 뛰어났다. 특히 개나리 이야기는 대단히 유명하다. 그와 관련한 일화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대인배의 면모가 느껴지는 일화도 많은데, 몇 가지 살펴보자면…

  •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일본의 웅변가 오자키와의 대화이다. 3.1 운동 이후 일본의 오자키가 찾아오자 이상재는 집 뒤의 소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깔아두고 그를 맞이하였다. 뒤이어 오자키가 "일본과 조선은 부부와 같은데, 남편이 좀 잘못했다고 너무 심하게 들고일어나서는 되겠느냐" 식의 말로 공격해오자 이상재는 "부부가 화합하는 것은 옳지만 정당하게 맺어진 것이 아닌 폭력으로 맺어졌으니 당연히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다"로 응답해 오자키를 벙찌게 만들었다. 이후 오자키는 돌아가면서 이상재를 조선 1의 인물이라고 추켜세웠다고 한다.

  • 그가 처음 박정양의 식객으로 들어갔을 때, 박정양의 집엔 이상재 이외에도 많은 식객들이 박정양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순번을 기다리다간 언제 박정양을 만나볼지 알 수가 없어 한가지 꾀를 냈는데, 그것은 바로 일부러 색이 다른 버선을 신어 눈에 띄는 행동을 해,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상재의 계획대로 짝짝이 버선을 신고 다니자 집안 하인들 사이에서 이상재는 짝짝이 버선을 신은 이상한 식객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를 들은 박정양은 그 이유를 궁금히 여겨 이상재를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그 재치에 감탄하고 그 때부터 곁에 두었다고 한다.
  • 그가 박정양의 식객으로 있을 때였다. 밥을 가져다 주는 여종에게 "생일날에 식사 한 끼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서럽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여종은 박정양의 아내에게 "어떤 식객이 그런 소리를 하더라"라고 보고를 했고 박정양의 아내는 후하게 한상 차려 줄 것을 명했다. 그리고 며칠 후 다른 여종이 들어오자 같은 소릴 해서 다시 한끼 잘 먹고, 다시 며칠 후 다른 여종에게 같은 소릴 해서 또 잘 먹었다. 이 일을 알게된 박정양이 이상재에게 "자넨 1년에 생일이 도대체 몇 번이나 되는가?"라고 묻자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라고 했다.

  • 젊은 시절, 김홍집과의 대담에서 김홍집이 "전국 민심이 흉흉하니 조선 8도를 대표해서 감사 8명을 잡아들이면 민심이 풀리지 않을까" 하고 묻자, 이에 답하길, "전국 8도에서 여덟 명까지 잡아들일 것 없고, 단 셋만 잡으면 민심이 잡힌다"라고 하니, 그 셋이 누구냐고 되묻자 "그 셋은 바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인 삼정승이다"라고 답했다. 참고로 이 말을 나누던 김홍집이 바로 당시의 영의정이었다.

  • 어느 날 그의 며느리가 재봉틀을 도둑맞은 것을 보고 울었다. 당시 재봉틀은 그야말로 고가의 귀중품이라 도난당하기 쉬운 물품 중 하나였는데 이를 본 그가 며느리에게 한 말: "아가, 너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도 울지를 않더니만 재봉틀을 도둑맞은 걸로 우는게냐?"
  • 서양 문물이 들어와 많은 당시 조선인들이 신기해하던 와중에 비누를 전달받았는데 이상재가 칼로 비누를 반으로 잘라먹어버리자 모두들 그건 먹는게 아니고 씻는데 쓰는 비누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나도 이게 비누인 줄 아외다. 그러나 속은 더러운데 겉만 깨끗한들 무슨 소용이오? 먼저 속부터 깨끗하게 씻으려 그런 거요."
  • 역시 일본에 있을 때 한 포병 부대에서 일본인 장교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때마침 그 장교는 감기에 걸려 있었다. 그걸 보고 이상재는 이렇게 말했다. "그까짓 감기는 대포로 못 쏘아 잡습니까?"[7]
  • 박정양을 따라 미국에 갔을 때 사모관대를 그대로 착용하고 길거리를 다녔는데, 이를 본 아이들이 너무 신기했는지 몰려들어서 마구 돌을 던졌다(…). 미국 경찰들은 외국 외교관에게 위해를 끼친 죄로 아이들을 모조리 체포했는데, 이상재는 경찰서로 일부러 찾아가 선처를 부탁하여 아이들을 풀어주었고, 이에 미국 정가에서 조선에 대한 호의적인 이야기가 많이 퍼졌다. 한 역사 수필가는 미국에 가서 꼬마였던 시절 직접 이상재를 따라가며 구경했던 노파를 만났었는데, 말총 모자(Horse-tail hat)가 신기했다며 나이가 들어서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만큼 흥미진진한 구경이었다는 얘길 했다고.
  • 미국에 갔을 때 청나라 공사가 "미국 대통령에게 볼일이 있으면 무조건 청나라 공사관에 먼저 와서 보고를 하라"고 억지를 부리자 논리적으로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8]
  • 1887년 주미 조선공사관 개설 때문에 박정양, 이완용 등과 미국에 갔는데 이들을 인솔한 미국인 호러스 알렌은 12월 26일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그들은 선실 안에 틀어박혀서 모든 걸 하인이 들여보냈고, 조선 관리 복색임에도 줄담배를 피느라 담배 쩐 내, 똥냄새, 입 냄새에 특이한 음식 냄새 때문에 내가 볼 일이 있어 선실에 들어갔다가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면서, 특히 월남 이상재 선생이 많이 더티했다고.
  • 역시 미국에 갔을 때 일화인데, 미국인들이 스테이크를 대접하자 썰어달라고 하고는 젓가락을 꺼내서 집어먹었다고 한다.
  • 외국어 학교를 설립할 적에 일본이 "영어든 뭐든 외국어 교사는 무조건 일본인을 기용하라"고 억지를 부렸는데, 이상재는 "윽 자 발음도 못하는 놈들이 어디서 개소리냐?"라고 호통을 쳐서 일축했다.
  • 고종 황제에게 올라온 온갖 청탁 서류들과 뇌물들을, 고종의 면전에서 "상감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우냐!"라고 일갈하며 몽땅 난로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 3.1 운동 이후 배후 조종 혐의로 투옥되어 서슬 퍼런 일본 검사에게 심문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손바닥을 내밀더니 "손바닥을 붙여 달라"고 말했다. 검사가 긴가민가 하며 손바닥을 붙여 주자 이상재는 냉큼 손을 떼면서 일갈한다. "보시오. 억지로 붙인 건 떨어지는 게 순리라니까. 조선이랑 일본도 그래."
  • 3.1 운동에 연루되어 일본인 고문관에게 취조를 당했을 때도 그는 "옳지, 왜놈들은 제 부모도 마구 친다더라. 이 늙은이도 때려치거든 쳐 보거라"라며 고문관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는 강인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이 고문관은 자신의 노부(老父)를 생각하여 월남을 더 이상 고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 3.1 운동 이후 어찌어찌해서 출옥하게 되자 사람들이 "그간 옥중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라고 묻자 "그럼 네놈들은 바깥에서 편하게 지냈나 보지?"라고 호통치며 응수하셨다. 일제 탄압에 당하는 건 옥중이나 밖이나 다름 없다는 의미. 참으로 비범하시다.
  • 이상재의 자택을 방문한 일본 순사가 문 앞에서 "이리오너라~!"라고 말하자 이상재는 "오냐 나간다!"라고 응수. 황당해한 순사가 "어찌 반말로 답할 수 있는가?"라며 따지자 "당신이 먼저 반말로 말했으니 당연히 나도 반말로 말해야지."라고 말했다고. 저 "이리 오너라"는 양반집에 들어갈 때 문지기 역할의 하인을 부르기 위해서 쓰는 멘트였다. 그래도 양반집 출신인 이상재로서는 "이리 오너라~"는 듣기 거북했을 수 있겠다.
  • 잔인한 고문으로 악명 높았던 일본제국 경찰미와 와사부로가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9] 야인시대의 그 미와 맞다. 물론 이상재는 미와 와사부로에게 사람 좀 작작 잡아가라고 호통을 쳤다.
  • 언젠가 이상재가 연설을 하러 갔는데 조선인 순사들과 친일파들이 잔뜩 있는 것을 보고 "여기에 개나리들이 만발하였구나!"하는 말을 했는데 군중들이 웃고 난리가 났다. 어깨에 힘주며 거들먹 거리기에 나리라 불러줬지만 실상은 왜놈의 앞잡이니 개새끼나 다름없어 개나리였던 것이다. 이상재가 이를 이용하여 언어유희를 보인 것이다.[10]
  • 친일파 인사들을 보고는[11] "이제 그만 동경에나 가서 사시지요"라고 말했다. 그 사람이 어째서냐고 묻자, "대감이 조선에 살아서 조선이 망했으니, 일본에 가서 살면 일본이 망할 것 아니오?"라고 일침을 날렸다.
  • 문학가 변영로가 젊은 시절에 학교 수업을 제끼고(…) 종로에 놀러나갔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변정상 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변정상은 변영로의 부친인데 아버지 이름을 불러서 놀란 변영로가 뒤를 돌아보니 이상재가 웃으며 서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불렀던 게 불쾌해진 변영로가 이상재에게 "선생님. 노망이 나셨습니까? 아버지와 아들도 구별 못하시다뇨. 또 아무리 제 아버지와 친하시다고 하지만 길에서 남의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십니까?"[12]라며 따지자 이상재 왈, "이놈아! 네가 변정상의 씨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그 뒤의 말 역시 압권, "그럼 너는 대관절 누구의 씨더냐? 그것부터 말해보아라!" 사실 이건 섹드립으로 볼 수도 있는데, 옛말에 정자를 "씨"라고 많이 불렀기 때문.[13]
  • 빚과 가난으로 힘들어 하던 이상재에게 누군가 땔감이나 하라고 두북한 돈 봉투를 내밀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에 온 한 학생이 빈곤을 호소하자 냉큼 봉투째 들려 보내고는 "그러시면 어떡하냐"고 힐난하는 사람에게 "내 형편을 아는 놈이 또 갖다 주겠지?" 하며 송아지 눈을 떠서 끝내 주머니를 털게 만들었다고.
  • 말년에 자신을 소개할 때에도 "청년 이상재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으며 청년들과도 허물 없이 담소하는 것을 즐겼다. 이를 두고 주변에서 그렇게 젊은이들에게 허물없이 대하면 선생을 너무 만만하게 보지 않겠냐고 염려하자, 선생은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젊은이들에게 노인이 되라고 할 수는 없잖나? 내가 청년이 되어야 청년이 (더) 청년 노릇을 하는 것일세"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4]
  • 사망 하루 전 두 제자가 문병을 오자 그 제자들에 남긴 말도 참 비범하다. "네 이놈들. 너희 나 뒈졌나 안 뒈졌나 보러 왔지?!" 하고 구석으로 돌아 누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평생 개인적인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온 그였기에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1]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2] 17세손 '재(在)'자 항렬.[3] 일제강점기 시기인 192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 개량주의', '자치론' 떡밥이 나돌면서 주요 독립 운동 세력들 간 좌우파가 심하게 갈라지고 충돌할 때 유일하게 양쪽에서 모두 믿을 수 있다고 제시한 인물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좌우를 중재해 하나로 만들었던 인물이었는데 1924년 조선일보를 인수한 이후 사장으로 추대되었던 것과 1927년 좌우익 연합 단체인 신간회 결성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4] 보수층 반발을 우려해 당시에는 '신사 유람단'이라는 명칭 사용.[5] 때문에 조선일보에서는 이 점을 강조하며 조선일보를 홍보하고 있는데 친일 언론으로 변질된 것은 숨긴다.[6] 이승륜, 이승인, 이승윤, 이승준의 4남을 낳았으며 1870년생인 장남 이승륜은 1895년에 사망하고 1872년생인 차남 이승인은 1908년에 사망하였으며 1885년생인 3남 이승윤은 1912년에 사망했다. 1887년생인 막내아들 이승준은 사망년도가 불명이다.[7] 러일전쟁을 비꼬아 말한것[8] 웃기게도 강화도 조약 체결 전 일본은 청나라에 이 일을 슬쩍 떠보았는데 청나라의 총리 아문은(지금의 외교 통상부 쯤에 해당된다.) "조선이 우리의 조공국이나 내정과 외교는 자유다."라고 대답했다.[9] 어떻게 보면 이상한 게 아니다. 상대를 적절히 존대해 주면서 인간적으로 친근하게 대하면 수사 대상에게 보다 더 접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미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립 운동가를 수사하려던 경찰이란 뜻.[10] 하지만 이는 판본의 차이고 실제로는 순사들만 나온다. 이때 순사들은 영문도 모른채 군중들이 웃으니까 따라 웃었다고 한다.[11] 야사에 따라 이완용이나 송병준으로 바뀌기도 한다.[12] 당시만 해도 조선 시대의 예법이 좀 남아 있어서,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현대에 조차도 격식차려 부를 때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데 조선이 갓 망한 상태에서야 어련하겠는가.[13] 100년이 훌쩍 지난 한참 후의 일이지만 유럽에서 팔고 있는 기아 씨드는 C'eed로 표기하는데, 이거 역시 Seed라고 표기하면 같은 이유로 "정자"로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14] 틀딱충 문서에서 관련 어록에도 등재되어 있는 명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