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호쿠대학
[clearfix]
1. 개요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에 위치한 명문 국립대학이며, 1907년에 3번째로 발족된 제국대학이다. 대학의 약칭은 딱히 없어서 그냥 그대로 도호쿠('''Practice-Oriented Research and Education.'''
実学尊重の精神 (실학존중의 정신)
대학 로고는 2007년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 제정된 것으로, 심볼에 그려져 있는 식물은 커피나 아카시아가 아니라 하기(萩)라는 이름의 센다이시에서 자생하는 싸리나무의 일종이다. 3개의 가지는 각각 창조성, 국제성, 전통을 의미한다고 한다.
2. 평가
역사적으로 최고의 위상을 자랑하는 일본의 구 제국대학 중 하나로, 모든 학술 분야에서 전국 3~7위를 유지하고 있다. 다른 구 제국대학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도호쿠대학 역시 자연과학계열 및 공과대학 중심이다. 한편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이후 일본 정부는 재해 복구 및 부흥 목적으로 도호쿠 지역에 지원을 늘렸는데, 그 덕분인지 정부 연구 보조비가 증가하였고 2012년에는 재해연구를 위한 재해과학국제연구소(IRIDeS)도 설립되었다. 2017년 기준 연구비 99억 7000만 엔 2017년 대학별 연구비 순위에 달하며, 이는 일본 4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국제적 기관의 평가로는 2020년 QS 세계 대학 랭킹에서 82위(일본 랭킹 5위), 2019년 THE 일본 대학 랭킹에서 3위[3] ARWU(세계 대학 학술 평가) 2020년에서는 151-200위(일본 5-7위)를 기록했다. 도호쿠대학에서 가장 밀어 주는 재료공학 분야 중 야금학은 최상위권으로, 2020년 ARWU 기준 세계 7위를 기록하고 있다.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 중 유일하게 학사 학위만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고이치 등 연구대학 답게 학계에 진출하여 있는 동문이 상당히 많다. 또한 도호쿠대학은 일본의 슈퍼글로벌대학으로 지정되어 있어 학부/연구과를 졸업하면 일본 고도인재 외국인 대상 포인트 우대제도 신청 시 가산점 10점을 받을 수 있다.[4]
3. 역사
- 1817년: 센다이번 의학교(仙台藩醫學校)가 센다이번에서 번사 자제들을 교육하던 번교인 ‘요켄도’(養賢堂)[5] 로부터 분리
- 1822년: 센다이번 의학교에 난과(蘭科)를 설치해 네덜란드 의학을 교육
- 1869년: 센다이번 의학교가 시약소(施藥所)로 개칭
- 1872년: 개척사(開拓使) 仮學校 설치, 센다이번이 미야기현으로 개칭된 데 따라 센다이번 시약소를 모체로 미야기현 현립의학소 설치 후 공립병원 부속학사로 개칭
- 1873년: 공립병원 부속학사가 공립의숙으로 개칭했다가 해산하여 1872년 설립된 공립병원 부속숙사와 통합
- 1879년: 공립병원이 센다이공립병원, 미야기병원으로 개칭함에 따라 공립병원 부속숙사가 미야기병원 부속의학교로 개편
- 1880년: 미야기병원 부속의학교가 미야기의학교로 개칭
- 1887년: 미야기의학교를 모체로 제2고등중학교 의학부를 설치
- 1894년: 학제개혁으로 제2고등중학교가 제2고등학교로 개칭
- 1900년: 제14회 제국의회에서 ‘규슈도호쿠제국대학설치건의안(九州東北帝国大学設置建議案)’ 결의했으나, 정부는 재정 문제로 거부
- 1901년: 고등학교령의 개정에 따라 구제고등학교의 대학예과(고등과)를 제외한 의학부, 공학부 등 본과가 독립하게 됨에 따라 제2고등학교 의학부를 모체로 센다이의학전문학교 설립
- 1902년: 제국의회에서 재차 도호쿠지방에 제국대학을 설치할 것을 건의
- 1906년: 삿포로농학교를 제국대학 농과대학으로 승격시키고, 이공과대학과 대학예과을 두어 홋카이도제국대학을 설립하는 방안이 추진되자 도호쿠 지역구 의원들이 반발하여 이과대학은 센다이에 두는 절충안을 건의[6]
- 1907년: 센다이고등공업학교가 설립되었고, 제국대학을 제외하고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이었던 삿포로농학교를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으로 승격시키면서 도호쿠제국대학을 설립[7]
- 1911년: 도호쿠제국대학 이과대학 설치[8]
- 1912년: 센다이의학전문학교를 부속의학전문부로, 센다이고등공업학교를 부속공학전문부로 흡수
- 1913년: 도호쿠제국대학 이과대학 개학식 거행
- 1915년: 도호쿠제국대학 부속의학전문부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고 도호쿠제국대학 의과대학 설치
- 1918년: 부속의학전문부 마지막 입학생이 졸업함과 동시에 부속의학전문부를 폐지. 대학령 공포에 따라 센다이와 삿포로로 나뉘어있는 도호쿠제국대학 분과대학과 전문부를 도시별로 분립시키게 되어 삿포로의 농과대학에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독립
- 1919년: 제국대학령 개정에 따라 분과대학 체제를 학부제로 개편하며 공학부를 설치하자, 의학전문부처럼 폐지될 것을 우려한 공학전문부에서 존속운동을 전개하였고 기존 센다이고등공업학교의 부지 등을 도호쿠제국대학으로 넘기는 대신에 부속공학전문부는 센다이고등공업학교로 재독립[9]
- 1922년: 법문학부 설치[10]
- 1923년: 법문학부 제1회 신입생 입학
- 1947년: 제국대학령이 국립종합대학령으로 개정됨에 따라 도호쿠제국대학이 도호쿠대학으로 개칭
- 1949년: 학제개혁에 따라 센다이 소재의 관립고등교육기관을 통합. 제2고등학교를 모체로 교양학부를, 미야기사범학교와 미야기청년사범학교를 모체로 교육학부를 만들었고 센다이공업전문학교는 공학부로, 미야기현여자전문학교는 농학부 가정학과로 흡수 통합
- 1965년: 국립학교설치법 개정에 따라 교육학부의 교원양성계통을 미야기교육대학으로 분리
- 1967년: 교육학부 부속 중학교, 소학교, 유치원을 미야기교육대학으로 이관
- 1994년: 대학원 중점화[11] 개시
- 2004년: 법인화로 국립대학법인 개편. 법학전문대학원, 공공정책대학원, 회계대학원 3개 전문대학원 체제 구축
-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발생으로 아오바야마 캠퍼스 등에 피해[12]
- 2012년: ‘재해과학국제연구소’(IRIDeS) 설립
4. 조직
5. 캠퍼스
- 카타히라 캠퍼스 : 센다이시 지하철 난보쿠선 이츠츠바시역
- 카와우치 캠퍼스 : 센다이시 지하철 도자이선 카와우치역
- 아오바야마 캠퍼스 : 센다이시 지하철 도자이선 아오바야마역
- 세이료 캠퍼스 : 센다이시 지하철 난보쿠선 키타요반쵸역
캠퍼스는 모두 4개가 있다. 카타히라[13] , 카와우치[14] , 아오바야마[15] , 세이료[16] 가 그것으로, 본부는 카타히라 캠퍼스에 두고 있다. 이 중 카와우치 캠퍼스와 아오바야마 캠퍼스는 근처에 드디어 2015년 12월에 센다이시 지하철 도자이선이 개통되었다.
학년에 따른 캠퍼스의 이동은 전공에 따라 각각 다르다. 1학년은 대부분 카와우치 캠퍼스에서 교양 수업과 기본 수업들이 진행되며, 이후 이공계 전공들은 주로 아오바야마 캠퍼스로 이동해서 수업을 듣는다. 재료공학과의 일부 학생들은 카타히라 캠퍼스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는 듯. 이외의 문과 계통 전공은 계속 카와우치 캠퍼스에서 수업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의과 및 치의과는 끝까지 세이료 캠퍼스에서 진행된다.
5.1. 카타히라(片平) 캠퍼스
본부와 총장실 등이 존재하는 명목상의 메인 캠퍼스이다. 가장 시내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센다이 역까지 걸어서 15분에서 20분 정도면 이동할 수 있는 등 접근성이 뛰어나서 번화가와 가깝다. 하지만 대학 연구소와 대학원들만 있어 학부생이 올 일은 거의 없다.
- 대학원 및 연구소
화학공학 대학원, 재료 대학원, 전기전자 대학원, 법학 대학원, 금속재료 연구소, 다원물질과학 연구소, 전기통신 연구소, 유체과학 연구소
5.2. 카와우치(川内) 캠퍼스
카와우치 북(北), 카와우치 남(南) 캠퍼스로 나뉘어져 있지만, 길을 중심으로 형식상으로 나눈 것이기에 매우 가깝고 학생들간의 교류도 많다. 교양학 캠퍼스이기 때문에 센다이 시내에 흩어져 있는 도호쿠 대학의 학생들이 몰려오므로 유동인구가 상당히 많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센다이 도심지와는 가까운 편이다. 2016년 즈음 개통한 도자이선 카와우치역에서 전철로 센다이역에서 15분 이내라 교통도 편리한 편이다. 이 역 앞에 학교 이름이 옛스럽게 써져 있는 시계탑이 최근에 생겨났다. 대부분의 부 활동을 위한 건물도 이곳에 있으며, 각종 체육계 편의시설[17] 과 식당도 4곳[18] 이 존재하는 상당히 큰 캠퍼스이다.
보통 북쪽 캠퍼스에서는 교양수업이나 1학년 학부생들을 위한 수업을 하고 남쪽 캠퍼스는 경제학부나 문학부 등의 문과계열 대학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중앙 도서관도 카와우치 캠퍼스에 존재하며, 아오바야마나 세이료 캠퍼스의 도서관과는 달리 비교적 다양한 종류의 책과, 비 전공 서적류의 책들이 주류라 할 수 있겠다. 학교 행사를 위한 대강당은 하기 홀(萩ホール)이 차도를 중앙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남쪽 캠퍼스 건물 주위에는 나무와 숲이 잘 남아 있어서 가을에는 단풍이 예쁘게 물든 것을 볼 수 있다. 문학부 및 법학부 건물들 에서는 센다이번 시절의 성채가 보이며, 이 주위에서 벚꽃이 많이 피는 탓에 봄에 꽃놀이하는 학생들이 많이 보인다.
이공계열 및 농학부 학생들은 보통 이곳에서 1학년~2학년 초입을 아오바야마 캠퍼스로 올라가기 전까지 보내게 되며, 1학년에 반드시 이수해야 할 실험 과목이 수행되는 학생 실험동이 북쪽 캠퍼스에 존재한다. 이외에도 수업시간이 아니라면 학생들이 자유로이 인쇄물을 출력할 수 있는 컴퓨터실이 있는 곳도 있으니 마음껏 사용하도록 하자.
5.3. 아오바야마(青葉山) 캠퍼스
완공된 지 다른 캠퍼스에 비해 얼마 되지 않았다. 도호쿠대학 자체가 이과계 성향이 강한 학교라 이·농·공·약학부 건물이 위치하는 사실상 제일 큰 캠퍼스라 다른 곳보다 유동인구는 매우 적지만, 대신 상주인구는 매우 많다. 아오바야마 캠퍼스는 말 그대로 산 위에 있어 총 학생수의 무려 절반 이상이 이·공·농·약학부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통학이 매우 불편했으나, 현재는 도자이선의 개통으로 많은 학생들이 지하철로 통학하고 있다. 도자이선 개통이후 산조마치 쪽에 있는 기숙사로 통근하던 버스가 사라지고 아침 한정 유료 City bus가 다니고 있다. 특이하게도 아오바야마 캠퍼스에는 이(理)과 계열용과 공(工)과 계열용, 두 곳의 대형 도서관이 따로 존재한다.
현재 계속해서 새로운 건물 및 연구소가 들어서고 있는 중인데, 새로운 계획이 꾸준히 잡히고 있다. 특히 최근 아오바야마 캠퍼스로 이전한 농학부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건물이 새 것이다. 식당을 포함해서 연구동이나 온실 등도 새로 들어섰다.
아오바야마 캠퍼스 일대 야산은 시에서 지정한 자연보호 구역이라 공기가 아주 맑다. 이곳을 설명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서에서 '''주위에 녹지가 잘 조성되어 있어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데, 주위에 정말 아무것도 없다. 편의점 3개에 식당이 4개 정도 있는데, 식당은 물론 로손 편의점은 일찍 닫는 관계로 외식이라도 하려고 하면 큰맘 먹고 산을 내려와야 한다. 또한, 자연환경이 너무 좋은 나머지 야생동물이 참 많이 살고 있다. 고양이는 기본이고 사슴, 오소리, 너구리는 자주 출몰하며 가끔 멧돼지가 뛰어다닌다. 문제는 무려 '''곰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곰이 캠퍼스 인근에 출몰할 경우 그 즉시 야간에 도로 이외의 길 출입을 자제하라는 공문이 붙고 일부 통학로에는 전기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19]
아오바야마 캠퍼스 옆에는 미야기교육대학이 있다.
- 대학원
이학연구과, 약학연구과, 공학연구과, 농학연구과, 환경과학연구과, 정보과학연구과, 생명과학연구과
- 학부
이학부, 약학부, 공학부, 농학부
- 부속시설
정보시너지센터, 미래과학공동연구센터 등
5.4. 세이료(星陵) 캠퍼스
의대 및 관련 계열이 밀집되어 있는 캠퍼스이다. 타과 학생들이 갈 일은 그다지 없다.
- 대학원 : 의학계연구과, 치의학연구과
- 학부 : 의학부, 치의학부
- 부속시설 : 도호쿠대학병원, 가령의학연구소, 치의학부부속치과기공사학교
6. 국제 교류
현재 학술교류협정을 맺은 한국 대학은 다음과 같다.
7. 유명 동문
- 계응상 - 북한의 농학자.
- 고이케 아키라 - 의학부 - 일본 공산당 참의원.
- 김기림 - 영문학과 - 시인. 2018년 11월에 카타히라캠퍼스에 김기림 시비가 세워졌다. #
- 니시무라 에이이치 - 공학부 - 자유민주당 부총재.
- 다나카 고이치 - 공학부 - 2002년 노벨 화학상(과학분야 수상자 중 학사 출신 유일)
- 데라시마 다이조 - 졸업 후에 자위대에 입대하여 합참의장에 해당하는 통합막료장을 지냈다.
- 루쉰 - 아큐정전으로 유명한 그 사람 맞다.
- 모리 마사코 - 일본 법무대신
- 문승국 - 도시계획학 석사 - 서울특별시 행정2부시장.
- 시모쿠라 바이오 - 문학부 - 시나리오 라이터.
- 신태식 - 계명대학교 창립자.
- 염한웅 - 이학 박사 - 대한민국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 오다 카즈마사 - 싱어송라이터.
- 에다노 유키오 - 법학부 - 일본의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의 대표이다.
- 엔도 아키라 - 농학부 - 농예화학자. 래스커상(래스커-드베이키 임상 의학 연구상) 수상.
- 이사카 코타로 - 소설가.
- 이해익 - 법문학부 - 대한민국 농림부장관.
- 인태식 - 법문학부 - 대한민국 재무부장관.
- 최병우 - 법문학부 - 언론인.
- 카와시마 류타 - 의학부 - 의사.
- 타카야나기 마사노부 -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영화 촬영 감독. 대표작으로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스포트라이트.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8. 기타
- 도호쿠대학의 동문회인 슈유카이에 가입하면 센다이시내 특급호텔 및 긴자 라이온 호프 할인혜택이 있다.
- 일본 대학 최초로 여자 신입생을 받은 대학[20] 으로, 1913년 일본 최초로 여대생이 탄생하였고 남녀공학을 실시한 대학으로도 알려져 있다. 3명의 여학생이 최초로 입학했으며, 그 중 한 명인 구로다 치카[21] 는 화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일본에서는 이 세 여학생의 합격을 발표한 8월 16일을 여대생의 날로 기리고 있다.
- 일본 내에서 6번째로 면적이 넓은 학교이다.[22] 공식적인 센다이 내 학교 부지는 101 ha로, 바로 위인 오사카대학(104 ha)과 히로시마대학(107 ha)에 근소히 차이나는 정도이며, 서울대학교가 실질적으로 100ha가 약간 안 되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넓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도호쿠대와 서울대는 학교가 문과 이과 불문하고 산 밑에 있고 의대는 도심에 있다는 점이 굉장히 유사하다.
- 보통 일본 수험생들은 압도적으로 점수가 높거나 도시로 일부러 나가고자 하지 않는 한 자기가 살던 지방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른 대학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그 학교 주변 지역 출신이 상당히 많은 반면, 도호쿠대학은 센다이시 출신 학생이 상대적으로 적다.[23] 홋카이도에서 시작해서 간토 지방[24] , 중부 지방, 간사이 지방, 규슈는 물론, 오키나와[25] 출신까지 한 클래스에서 볼 수 있을 정도다. 즉, 원래 살던 친가에서 가까운 대학에서 두고 멀리까지 오는 학생들이 꽤나 많은데, 일본에서도 점차 학벌 경쟁이 심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있었기에 한때 입결이 떨어지기도 했었고, 지금도 방사능 유출을 걱정하는 학생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센다이시내와 각 캠퍼스에서 방사선 선량 측정을 해보면 100nSv/h 내외로 서울(130nSv/h)보다도 낮게 나온다고 한다.[26] 센다이가 속한 미야기현과 원전사고가 있었던 후쿠시마 현이 접하고 있고, 센다이가 일본의 도호쿠지방의 거점도시로서 도호쿠 지역 전반에 대한 대표성을 띠고 있어서[27]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의 피해상황에 관한 부분도 과하게 대표되는 경향이 있다.[28] 폭발사고가 있었던 후쿠시마제일원전은 후쿠시마현의 남부 해안가에 있다. 센다이시와 후쿠시마 제1발전소와의 거리는 약 120km 정도.
9. 둘러보기
[1] 도호쿠 제국대학 설립 당시 대학의 문서기호로 '호쿠다이(北大 )''가 사용되었지만, 이 약칭은 이제 홋카이도대학을 지칭하는 약칭이 되어 도호쿠대학의 약칭으로는 쓰이지 않는다.[2] 동(東)은 도쿄대학이, 북(北)은 홋카이도대학이 사용하니 마작 패의 동과 북의 독음을 가져온 별칭(겸 비칭)이다. 톤페다이는 둥베이(東北)라는 중국어 발음이 변한 것.[3] 2020년 THE Japanese University ranking(일본 대학 순위)에서 도쿄대, 교토대를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4] 즉, 해당 대학 졸업시 어지간하면 요건 점수 70점을 바로 채우게 되어 있어서 일본 영주권이 빠른 시간으로 나온다.[5] 1736년 설립된 센다이번의 번교 ‘요켄도’(養賢堂)는 1760년에 의학 교육을 시작[6] 이후 제국대학 설립을 위해 그 모체가 될 센다이에 센다이의학전문학교, 센다이고등공업학교 설립이 신속하게 추진된다.[7] 도호쿠제국대학이 명목상 설립된 시기는 1907년이지만, 사실 이 당시에는 도호쿠의 센다이시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었고, 도호쿠제국대학에는 삿포로농학교 외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1911년에 본격적으로 센다이시에 도호쿠제국대학의 캠퍼스를 조성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사토 쇼스케 삿포로농학교장이 도호쿠제국대학 총장의 직무를 수행했다. 그 후 삿포로농학교가 다시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이관됨에 따라 사토 교장은 홋카이도제국대학의 초대 총장까지 지내게 된다. 즉, 1907년 당시에는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으로 승격함에 따라 도호쿠제국대학이 된 삿포로농학교의 시설만이 홋카이도에 위치해 있었다.[8] 개학은 1913년.[9] 이후 센다이공업전문학교로 개칭. 유사 사례로 다이호쿠제국대학의 모체가 되었다가 다시 독립해나간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臺北高等農林學校)를 참조.[10] 문과 계열이 설치된 것은 도쿄, 교토에 이어 세 번째로 일본제국의 9개 제국대학 중 도쿄, 교토와 도호쿠, 규슈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수도였던 경성, 대만총독부의 수도였던 다이호쿠 등 6곳에만 문과 계열 학부가 설치되어있었고 기타 홋카이도, 오사카, 나고야는 1945년 종전 당시까지 문과 계열 자체가 없었다. 다만 법학부, 경제학부, 문학부 등의 분과 학부가 성립된 곳은 도쿄와 교토 두 곳에 불과했으며 도호쿠와 규슈 및 조선 경성은 ‘법문학부’(法文學部), 대만 다이호쿠는 ‘문정학부’(文政學部)라는 단일학부로 그쳤다.[11] 연구중심대학[12] 아오바야마 캠퍼스도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에서 100 km 거리에 있기 때문에 당시 세슘 및 스트론튬 낙진 피해를 입었다.[13] 재료 연구소 중심.[14] 남·북으로 나뉘며 남쪽은 문과 계열, 북쪽은 서클과 외국어 등의 공통교육.[15] 이과 계열(이, 공, 농, 약학부)[16] 의·치학부와 대학병원.[17] 수영장, 테니스 코트 등[18] 키타 캠퍼스에 3곳, 미나미 캠퍼스의 문학부 식당이 1곳[19] 그런데 이 통학로는 비나 눈이 오면 매번 토사로 길이 막혀서 다닐 일이 별로 없다.[20] 오차노미즈여자대학, 쓰다주쿠대학, 니혼(日本)여대 등의 여자대학들은 당시 대학이 아니었다.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은 여자고등사범학교, 나머지 두 학교는 구제전문학교였다. 구제대학 항목 참조.[21] 이후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現 오차노미즈여자대학)에 재직. 참고로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는 당시 첫 여성 제국대학 입학자였던 구로다 치카뿐만 아니라 일본의 첫 여성 박사였던 야스이 코노가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22] 실제로 면적 순위 상위권에는 다 구제국대학이 포함되어 있다.[23] 오사카대학이나 홋카이도대학에서도 이런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24] 간토 지방에서는 도호쿠 신칸센 연선인 사이타마, 도치기와 이바라키에서 많이 온다.[25] 오키나와는 항공기 접근성이 좋은 편이라 오키나와를 제외한 타대학 진학자의 지역 편중이 덜한 편.[26] 이는 이농공계열 학부의 필수이수과목인 자연과학실험종합의 하나의 실험으로써 학교 주위의 방사능을 직접 측정해 볼 기회가 있는데, 선배들의 역대 실험 결과를 확인해 보면 2013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중이며, 2018년에는 완전히 정상 이하로 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27] 참고로 도호쿠지방을 이루는 6현(미야기현, 이와테현, 야마가타현, 아키타현, 후쿠시마현, 아오모리현)들의 넓이를 모두 더하면 남한의 넓이보다 조금 작은 정도로 굉장히 넓은 권역을 의미한다. 후쿠시마현의 경우 일본 47개 도도부현 중 홋카이도와 이와테현 다음으로 넓고, 우리나라의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합한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28] 실제로 동일본 대지진 당시, 센다이시의 주민들은 지진에 의한 수 일간의 정전 때문에 텔레비전을 보지 못해서 해안도시들에 쓰나미가 왔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그냥 큰 지진이 왔구나 라고 놀랜 정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