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수
1. 연백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기수
박기수는 황해도 연백군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언제 태어났으며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이전에 행적이 어땠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1920년 5월 만주 유하현에 본부를 두고 있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했고 관전현에서 대한독립단 총장 양기하로부터 황해도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자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그는 6월 19일 황해도 박천군으로 이동한 뒤 이곳에서 박중서(朴重緖)와 변춘식(邊春植)을 입단시켰다.
1920년 8월 7일, 박기수는 황해도 대동군 용산면에서 원장 경찰관주재소 순사 모리모토 슌페이(森本春平)가 자신을 검문하자 이지표(李芝杓) 등과 함께 그를 사살했다. 그리고 황해도 장연군 출신 이명서(李明瑞)과 김정욱(金貞郁), 해주군 출신의 민양기, 연백군 출신의 변춘식(邊春植), 이근영(李根永), 주의환(朱義煥), 원사현, 박중서(朴重緖)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고 친일파를 숙청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먼저 8월 15일 밤에 친일군수 최병혁(崔丙赫)을 처단했으며, 이후 송화, 장연 등을 거쳐 8월 24일에 해주군으로 가서 황해도 지단의 이성룡(李成龍)을 만나 독립운동의 전개 및 군자금 모집에 대하여 협의했다.
1920년 9월 10일, 박기수는 독립단 대원들과 함께 신천군 초리면 도명리에 있는 구월산으로 가서 유격전을 전개해 일제를 교란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이 그들의 위치를 알아채고 습격을 가해오자, 그는 대원들과 함께 일본 경찰을 상대로 총격전을 벌이다가 결국 동지 이지표, 원사현, 주의환, 이근영 등과 함께 사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기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구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기수
박기성은 1892년경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이주했고, 1919년 4월에 이상룡 등이 유하현 고산자에서 조직한 한인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해 한족회의 지부인 구청년회(區靑年會) 회장 및 검찰(檢察)로 활동했다. 그러나 1920년 11월 6일 유하현 청령자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다음날 즉결 처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기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대구광역시 출신 독립운동가, 박기수
박기수는 1924년 6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가서 대판부립공과학교(大阪府立工科學校)에 야간부 학생으로 재학하다가 1939년 3월 한인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다가올 조국의 독립에 대비해 항일 투쟁을 벌일 것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1941년 4월 김태길(金泰吉), 김택환(金宅煥) 등의 동지와 함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형무소로 이감되는 도중에 탈출해 중국으로 망명했고, 이후 충칭으로 이동했다.
박기수는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비밀리에 조선으로 잠입해 경상북도에 독립당(獨立黨)을 조직해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했다. 그러나 1944년 8월 23일 경북 영천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언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가 8.15 광복으로 출옥한 그는 이후 서울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1987년 12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기수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