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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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일어났던 희대의 엽색사건.
박동명은 1973년, 시온사업을 운영하던 박태선[1] 의 아들이다. 태광산업의 젊은 사장이던 30대 초반 시절 박동명은 외화밀반출 혐의로[2] 그의 자택에서 구속되었다. 검거 당시 현장에 신인여배우 강경희가 함께 있다 발각되었는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의 집에는 그가 만났던 여배우의 목록이 무더기로 쓰여 있었다. 그가 만난 여배우가 누군지 캐내고 싶어하는 기자들의 호기심으로 수많은 여배우들이 박동명의 애인으로 거론되었다.
천부교 문서에도 나오듯, 자가용을 굴린다는 것조차 사치로 통하던 당시 한국에서 외제차를 여럿 굴리고 다녔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같은 데까지 가서 유흥을 즐기고 옴은 기본이었다.
연예계에 끼친 파장이 상당했다. 유명 여배우 양정화를 몰락시키고 2세대 트로이카 '''정윤희''', 장미희를 대스타로 만드는 데 아주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방송체계에도 큰 영향을 끼쳐 김자옥의 인기를 수년간 연장시켜줬다.
당시 수많은 연예인들이 박동명의 여자로 거론되었는데 그 중에는 1960년대 최고 미녀 김지미도 있었다. 여론은 김지미에게 '''"당신도 박동명과 놀았느냐?"'''라며 추궁했지만, 김지미는 '''"내가 왜 그런 망나니랑 놀아나느냐?"'''라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당시 명보극장 사장 아들과 결혼할 예정이었던 최정민도 의심을 받았다. 최정민은 결백을 증명하고자 음독까지 시도를 하였으나 결국 파혼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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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사건으로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여배우는 바로 양정화. 드라마와 영화를 오고가며 사실상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배우였지만, 박동명의 애인으로 지목되며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고 모든 방송계약이 파기되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MBC 전속이었던 양정화를 TBC가 데려가려고 하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어 모기업인 중앙일보를 통해 복수했다는 것이 정설. 양정화는 소송을 걸어 중앙일보를 상대로 승소했으나 사건 이후 연예계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은퇴했다.
당시 청춘극장에 출연 예정이었던 강경희도 여기에 연루되어 주연을 맡을 수 없었다. 강경희 자리에 들어온 여배우가 바로 '''정윤희'''. 당시 정윤희는 데뷔작 '욕망'의 흥행 실패로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무명 여배우였으나 이 영화의 출연으로 재도약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런 것이 청춘극장은 이전의 스타였던 김지미, 윤정희가 주연이었던 영화였던지라 시사성이 엄청났다. 비록 영화는 실패했지만 대중들에게 이 영화의 출연으로 정윤희를 각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윤희는 이 영화에 출연한 후 TBC에게 주목을 받아 발탁되어 쇼쇼쇼에 출연했다. 당시 해태제과의 모델이었던 양정화가 몰락한 후 그 자리를 대신해 해태제과의 전속모델 자리를 쥐어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렇지만 양정화는 박동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양정화가 적극적으로 소명하고[3] 여론도 다시 우호적으로 돌아와 수많은 작품 제의를 받았다. 그 중의 하나가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 처음에 양정화에게 주연 자리를 주려 했지만 이미 이 사건으로 연예계에 환멸을 느끼고 은퇴를 마음먹었기 때문에 양정화는 출연을 고사했다. 이 자리를 차지한 여배우가 TBC 출신 장미희였다. 결국, 영화는 엄청나게 대박을 터뜨리면서 성공가도를 달렸으며 장미희는 이후 전두환 스캔들이 터지고도 인기를 구가하는 연예인이 된다.
또한, 이 사건은 영화계를 겨낭해서 터졌기 때문에 수많은 영화배우들이 몰락하였다. 그래서 드라마 배우들이 영화계에 진출했으며 그 중에 하나는 안방극장의 트로이카인 김자옥도 있었다. 김자옥은 O양의 아파트 등의 흥행작을 내며 2세대 트로이카가 연예계를 휩쓸던 시절에도 살아남은 배우가 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당시 별개의 분야로 엄격하게 구분이 되었던 영화계와 드라마계를 하나로 묶는 기여를 하였다. 이후로는 영화배우도 드라마에 출연하고 드라마 배우도 영화에 자유롭게 출연했다. 김자옥의 연속극 활동도 이 사건으로 인해 수혜를 입었는데, 당시 MBC를 이끌어가던 쌍두마차 여배우가 양정화, 김자옥이었지만 양정화의 은퇴로 김자옥은 MBC의 원탑 배우가 될 수 있었다.
1. 개요
1970년대에 일어났던 희대의 엽색사건.
2. 상세
박동명은 1973년, 시온사업을 운영하던 박태선[1] 의 아들이다. 태광산업의 젊은 사장이던 30대 초반 시절 박동명은 외화밀반출 혐의로[2] 그의 자택에서 구속되었다. 검거 당시 현장에 신인여배우 강경희가 함께 있다 발각되었는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의 집에는 그가 만났던 여배우의 목록이 무더기로 쓰여 있었다. 그가 만난 여배우가 누군지 캐내고 싶어하는 기자들의 호기심으로 수많은 여배우들이 박동명의 애인으로 거론되었다.
3. 박동명의 사치
천부교 문서에도 나오듯, 자가용을 굴린다는 것조차 사치로 통하던 당시 한국에서 외제차를 여럿 굴리고 다녔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같은 데까지 가서 유흥을 즐기고 옴은 기본이었다.
4. 후폭풍
연예계에 끼친 파장이 상당했다. 유명 여배우 양정화를 몰락시키고 2세대 트로이카 '''정윤희''', 장미희를 대스타로 만드는 데 아주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방송체계에도 큰 영향을 끼쳐 김자옥의 인기를 수년간 연장시켜줬다.
당시 수많은 연예인들이 박동명의 여자로 거론되었는데 그 중에는 1960년대 최고 미녀 김지미도 있었다. 여론은 김지미에게 '''"당신도 박동명과 놀았느냐?"'''라며 추궁했지만, 김지미는 '''"내가 왜 그런 망나니랑 놀아나느냐?"'''라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당시 명보극장 사장 아들과 결혼할 예정이었던 최정민도 의심을 받았다. 최정민은 결백을 증명하고자 음독까지 시도를 하였으나 결국 파혼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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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사건으로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여배우는 바로 양정화. 드라마와 영화를 오고가며 사실상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배우였지만, 박동명의 애인으로 지목되며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고 모든 방송계약이 파기되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MBC 전속이었던 양정화를 TBC가 데려가려고 하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어 모기업인 중앙일보를 통해 복수했다는 것이 정설. 양정화는 소송을 걸어 중앙일보를 상대로 승소했으나 사건 이후 연예계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은퇴했다.
당시 청춘극장에 출연 예정이었던 강경희도 여기에 연루되어 주연을 맡을 수 없었다. 강경희 자리에 들어온 여배우가 바로 '''정윤희'''. 당시 정윤희는 데뷔작 '욕망'의 흥행 실패로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무명 여배우였으나 이 영화의 출연으로 재도약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런 것이 청춘극장은 이전의 스타였던 김지미, 윤정희가 주연이었던 영화였던지라 시사성이 엄청났다. 비록 영화는 실패했지만 대중들에게 이 영화의 출연으로 정윤희를 각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윤희는 이 영화에 출연한 후 TBC에게 주목을 받아 발탁되어 쇼쇼쇼에 출연했다. 당시 해태제과의 모델이었던 양정화가 몰락한 후 그 자리를 대신해 해태제과의 전속모델 자리를 쥐어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렇지만 양정화는 박동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양정화가 적극적으로 소명하고[3] 여론도 다시 우호적으로 돌아와 수많은 작품 제의를 받았다. 그 중의 하나가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 처음에 양정화에게 주연 자리를 주려 했지만 이미 이 사건으로 연예계에 환멸을 느끼고 은퇴를 마음먹었기 때문에 양정화는 출연을 고사했다. 이 자리를 차지한 여배우가 TBC 출신 장미희였다. 결국, 영화는 엄청나게 대박을 터뜨리면서 성공가도를 달렸으며 장미희는 이후 전두환 스캔들이 터지고도 인기를 구가하는 연예인이 된다.
또한, 이 사건은 영화계를 겨낭해서 터졌기 때문에 수많은 영화배우들이 몰락하였다. 그래서 드라마 배우들이 영화계에 진출했으며 그 중에 하나는 안방극장의 트로이카인 김자옥도 있었다. 김자옥은 O양의 아파트 등의 흥행작을 내며 2세대 트로이카가 연예계를 휩쓸던 시절에도 살아남은 배우가 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당시 별개의 분야로 엄격하게 구분이 되었던 영화계와 드라마계를 하나로 묶는 기여를 하였다. 이후로는 영화배우도 드라마에 출연하고 드라마 배우도 영화에 자유롭게 출연했다. 김자옥의 연속극 활동도 이 사건으로 인해 수혜를 입었는데, 당시 MBC를 이끌어가던 쌍두마차 여배우가 양정화, 김자옥이었지만 양정화의 은퇴로 김자옥은 MBC의 원탑 배우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