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연대'''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
21세기
22세기
'''밀레니엄'''
제1천년기
'''제2천년기'''
제3천년기
1. 개요
2. 정치
2.1. 한국
2.2. 세계
3. 경제
3.1. 세계
3.2. 한국
4. 문화
4.1. 개괄
4.2. 음악
4.2.1. 서양 음악
4.2.2. 한국 음악
4.2.3. 일본 음악
4.2.4. 중화권 음악
4.3. 영화
4.4. 언론
4.5. 방송
4.6. 만화, 애니메이션
4.7. 스포츠
5.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6.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
7. 이 시대의 상징들
7.1. 인물
7.1.1. 정/관계
7.1.1.1. 대한민국
7.1.1.2. 해외
7.1.2. 군부
7.1.3. 재야운동가
7.1.4. 재계
7.1.5. 방송/연예계
7.1.5.1. 대한민국
7.1.6. 스포츠
7.1.6.1. 대한민국
7.2. 사회/문화
7.2.1. 대한민국
7.2.2. 세계 공통
8. 1970년대생
9. 1970년대에 들어가는 해
10. 참고/관련 문헌


1. 개요


서기 1970년~1979년까지를 이르는 연대시기. 1960년대 못지않게 경제발전이 어느 정도 발전기에 접어든 시기이기도 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1945년부터 시작되었던 냉전 체제가 계속되었던 시기였고 중동전쟁석유파동(오일쇼크)까지 겹쳤다. 그만큼 시대가 격동적이다. 하지만 데탕트 등의 긍정적인 사례도 존재했다. 아타리 2600 등의 게임기를 통해 '''본격적인 게임의 시대가 도래한 연대이다.'''
여담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피해를 입었던 상위 선진국[1]들이 전쟁의 상흔을 완벽히 씻어내고 다시 경제적 여유를 되찾은 시기이기도 하다.

2. 정치



2.1. 한국



사실상 이때부터 남북분단이 완전히 굳어졌다고 봐도 된다. 남북한에 각각 다른 정부가 수립된 뒤 태어났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상 유년기만 보낸 1940~1950년대생들이 이 시기부터 사회 주류가 되었는데 이들의 조국은 1948년에 수립된 단독 정부 대한민국이지 과거의 조선이나 식민지 한반도가 아니었다. 통일에 대한 회의론적인 입장이 증가한 것도 북한의 실상이 알려진 것과 더불어 이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는 1990년대 초반부터다.
1969년 3선 개헌 후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 신민당 후보를 꺾고 승리했으나, 박정희는 대선 과정에서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다. 중앙정보부의 노골적인 정치개입과 대내적인 금권살포에도 불구하고 40대의 젊은 야당후보 김대중에게 94만여 표의 근소한 차로 승리하지 못한 것이 한몫했다. 재선에서 이겨도 박정희는 지도력이 약해졌고, 야당과 재야세력, 사법부 등의 저항이 격렬해지자 박정희는 1971년 12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발동하고 위수령까지 내려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미 3선 개헌 후에도 박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은 학계, 종교계, 법조계까지 참여하는 범국민적인 성격으로 전환됐는데, 경제는 급속한 성장과 수출증진을 대가로 막대한 외화를 차입받으면서 외국 빚이 점차 늘고, 부실기업도 속출하여 점차 단점이 드러났다. 국제 정세도 1969년 미국 측의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 후 대변혁을 일으켜 미국과 일본이 중국과 수교를 하는 한편, 주한미군도 감축하겠다고 하자 박 정권은 안보위기를 절감하여 자주국방 노선을 수립했다. 뒤이어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했고, 유신헌법 개헌투표에 부쳐 91.5% 통과로 제3공화국 시대가 끝나고 제4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유신체제 수립 후, 박정희는 중정과 친위 군부세력을 토대로 하여 물리/제도적으로 폭압적 통치를 시작했다. 이들은 실권을 지닌 채 국회는 물론이요, 집권당과 내각마저도 전부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공작정치와 밀실정치도 만연했다. 1973년 3월에는 하나회 멤버이자 군부의 실력자이던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구속되고, 8월에는 박정희의 강력한 라이벌이던 김대중이 일본 도쿄에서 중정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기도 했다. 또 장준하도 1975년에 등산 도중 의문사했다.
이로써 유신정권은 시작부터 강력한 저항에 시달렸고, 종식 때까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해 반유신운동은 거세게 타올랐는데, 그 이전에도 전남대 <함성> 지 사건, 고려대 <민우> 지 사건, 박형규 목사의 서울 부활절 연합예배 투쟁 등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으나 10월부터 서울대 문리대를 시초로 본격적인 반유신 학생운동이 벌어졌고, 천관우, 김재준 등 지식인 15명도 투쟁에 동참했다. 뒤이어 12월 24일 장준하가 주도한 '100만인 헌법 개정 청원운동'이 일어나자,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2호'를 발동하여 장준하와 백기완 등에게 징역 15년을 때려 본보기를 보여주려 했다. 그럼에도 반유신운동이 사그라들지 않자 4월 3일에는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한 후, 중앙정보부도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을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고문 등 비인간적 가혹행위가 수반됐으며 관련자들은 사형, 무기, 20년형 등을 무더기로 선고받았다.
동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영부인 육영수가 피격당해 숨졌고, 이 과정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이 체포되어 박정희 정권은 반일시위를 하여 반유신운동을 잠재우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유신운동은 대학가 외에도 언론계, 종교계 등지에 파급됐고, 특히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운동을 벌이자 <동아일보>가 중정의 압력으로 광고를 싣지 못했다. 또 재야 및 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민주회복국민회의'가 발족됐다. 국내외적으로 압박을 받은 박 정권은 1975년 2월, 유신헌법 신임을 국민투표에 부치고 긴급조치 1/4호 위반자들을 풀어주는 유화책을 제시했다. 반면 언론자유수호운동을 주도하던 기자 백수십 명은 조선 및 동아일보로부터 해직을 당했고, 3월부터 학생운동이 다시 번지자 박정희는 긴급조치 7호를 내려 고려대에 휴교 조치를 내렸다. 뒤이어 4월 8일에 대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중 도예종 등 8명에 사형판결을 내렸고, 다음 날 새벽에 전격 사형집행했다. 뒤이어 11일에는 서울대생 김상진이 할복자살로 저항했으나 인도차이나 공산화로 인해 반유신운동은 힘을 잃었다.
전술한 인도차이나 공산화로 박 정권은 반전에 성공했는데, 몇몇 국민들이 안보 위기의식을 표하고 보수 종교/지식인이 유신체제와 적극 손을 잡은 것이다. 4월 29일에 박정희는 "1975년이 북한에서 남침을 저지르는 가장 위험한 시기"라고 하여 총화단결로 국난을 극복하자고 강조하자, 5월 들어서 서울시내 주요 대학에서 온갖 안보궐기대회가 열리고, '나라를 위한 연합기도회'도 열리는가 하면 학도호국단도 15년만에 부활했다.
동년 5월 13일에는 최종보스격인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해 반유신운동 자체가 알려지지 못하게 봉쇄했고, 7월 9일에 사회안전법, 방위세법, 민방위법 등 4대 전시입법을 만들었다. 같은 시기 중앙정보부 등은 고문을 통해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사건 등을 만들었고, 교도소도 일제 말처럼 전향을 강요했다. 또 국보법이나 반공법으로 구속됐다 석방돼도 사회안전법에 따라 보안감호소로 또 보내지거나 감시를 받았다. 1976년에는 반상회가 만들어져 사회적으로도 병영화가 진행됐고, 교수들까지 학생시위 방지에 동원됐다. 그해 판문점 도끼사건이 터지자 박정희는 반공/반북 안보의식을 강조해 위기 의식을 강조했고, 애인, 이웃, 친척이든 뭐든 간첩임을 의심하라는 살벌한 간첩 색출운동도 벌였다. 문화/예술계 역시 마찬가지여서 TV, 음악, 영화 등지에서 검열이 강화됐고, '대마초 사건'으로 가수들이 구속되는 '가요계 학살'이 벌어졌다.
야당 역시 인도차이나 사태를 기점으로 태도가 변했다. 신민당은 1975년 5월 12일 개헌운동을 멈춘다고 했고, 21일에 김영삼 총재가 박정희와 영수회담을 열었으나 그 뒤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10월 8일에 유신체제를 정면 비판한 김옥선 의원이 제명됐는데도 신민당 차원에선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다. 1976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국의 묵인 하에 깡패들이 각목을 들고 폭력사태를 벌였고, 그 속에서 이철승이 새 대표로 선출되어 '중도통합론'으로 유신체제에 야합했다. 다른 한편 박정희는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1976년 1월 '포항 석유설'을 발표하여 산유국의 꿈을 잠시나마 갖게 하고, 1977년 2월 임시 행정수도 구상을 발표하면서 투기광풍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반동적 복고주의의 일환으로 충효 및 경로사상까지 동원해 유신체제의 정신적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위와 같은 반공/안보 분위기 속에서도 반유신운동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가면극회, 문학회, 야학문제연구회 등을 중심으로 학생시위가 터졌고, 1976년 3월 1일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등을 중심으로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지만 파급이 안 됐다. 다만 1976년 10월 박동선 로비사건이 터져 대미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가 대선에서 당선하면서 박 정권에 불리한 요소가 들어섰다. 특히 카터 대통령은 '인권외교'를 내세운 뒤, 박 정권의 인권탄압에 분개하며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1977년 하반기 들어 반유신운동은 다시 불타올랐다. 서울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연행까지 감수하는 '가미카제'식 투쟁을 주로 벌여 도심지를 중심으로 유인물을 뿌렸고, 광화문 등지에선 시민들과 연합투쟁을 했다. 1978년 2월 제2차 3.1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고, 1979년 3월 1일에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 발족됐다. 거기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와 일부 개신교 목사들도 반유신투쟁에 한몫을 했고, 해직 언론인들은 조선투위 및 동아투위를 만들고 해직교수와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로 나섰다. 중정 폐지와 학원 병영화 반대 외에도 빈부격차, 민생고, 해외 의존 경제체제 등 경제/사회문제도 같이 거론됐고, 1970년대 후반부터 함평 고구마 투쟁과 동일방직 투쟁 등을 통해 노동/농민운동도 확대됐다. 같은 시기에는 몇몇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중남미에서 유행한 종속이론이나 급진 사회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념적 성향 역시 어느 정도 띠기 시작했다.
1978년 12월 12일에 열린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공화당을 1.1%를 앞지르는 이변이 생겨 박 정권에 타격을 입혔다. 특히 신민당보다 더 야당성이 강한 민주통일당의 표를 합치면 8.5%나 더 앞지른 것이다. 공화당의 패배에는 재벌 위주 정책으로 인해 생긴 빈익빈 부익부 현상, 벼농사 피해(일명 '노풍'), 경기 침체 등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도 한몫했다. 이를 계기로 김재규 중정부장과 공화당 측이 박 정권에 경제팀 교체 요청을 하여 성장 드라이브를 이어간 남덕우 경제팀이 물러났고, '안정화 정책'을 들고 나선 신현확이 새 부총리로 취임했다. 동월 27일에는 박정희가 통대선거를 통해 99.9%로 연임에 성공했지만, 정작 취임식에서는 일본의 친한파 인사를 빼곤 미국, 일본, 자유중국(대만) 등의 공식적인 축하 사절이 없었다.
1979년 5월 30일에 김영삼이 이철승을 누르고 신민당 총재직에 복귀하면서 박 정권과의 갈등은 더 극한으로 치달았고, 뒤이어 터진 8월 YH 사건과 10월 초 김영삼 총재 제명사건은 오히려 박 정권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데 윤활유 역할을 했다. 거기에 제2차 오일쇼크와 부가가치세, 인플레, 부동산 투기 등으로 민생파탄이 더해졌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동년 10월 16일부터 터진 부마 민주항쟁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항쟁이 터지자 박 정권은 위수령까지 선포하며 이를 막으려 했지만, 수습 대책을 놓고 권력층 내부에서 대립이 격화됐다. 결국 10월 26일, 김재규 중정부장이 궁정동 술자리에서 박정희와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하여 유신정권은 끝을 고했다.
6.25 전쟁의 폐허와 수난 속에서 태어났거나 그 이전에 태어났어도 이 시기 유년기를 보낸 초기 베이비부머, 즉 1940년대생과 1950년대생들이 이 연대에 들어서 '''성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때'''이기도 하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온 몸으로 겪었던 1930년대 및 그 이전 세대들 입장에서는 본격적인 해방, 전후 세대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 당시 기성세대들(1910~30년대생)의 기대가 특별히 컸던 편이었고, 이들부터 1960년대 초반생까지를 황금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2]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의 1997년 저서 <만화로 떠나는 21세기 미래여행>에 따르면 해당 세대는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회정의에 관심을 지녔으나, 권위주의 독재가 심화될 당시 이들은 나이를 점점 먹어가며 현실과 타협했다고 한다. 또 맹목적이고 절대적 가치를 지닌 이전 세대와 달리 계산적이고 물질적인 마인드를 지니기도 한다.
북한김일성 집권기였기 때문에 이 때까지도 남북이 대결관계를 보이고 있었다. 한때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과 적십자 회담을 통해 통해 남북한 UN동시가입까지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이것이 성사된 것은 20년 후인 1991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직후 1974년까지 북한에서는 주석제와 주체사상이, 남한에서는 10월 유신이 확립된다. 그리고 1976년 미군 장교들을 살해한 사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터져서 미군이 출동하고 전쟁 직전사태까지 험악해지는 등 남북관계가 격랑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김정일로의 세습(계승)이 확정된 것도 이 때다.

2.2. 세계



New York City 1970s Part 1 - www.NBCUniversalArchives.com
미국소련의 양강 대결이 이 연대에서도 이어졌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간신히 벗어났지만 남베트남북베트남1975년 멸망하는 등 일시적 쇠퇴를 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70년대 후반에도 오일쇼크와 경제위기, 지미 카터 시절의 이란 이슬람 혁명(호메이니 집권), 이란 대사관 사건도 미국의 영향력 쇠퇴를 우려하게 했다. 리더십 측면에서도 닉슨의 사임 이래 포드와 카터가 모두 재선에 실패했다. 영국 역시 영국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반면 소련은 오일쇼크를 바탕으로 브레즈네프 정권이 그나마 안정된 경제사정을 유지하는 등 일시적으로 호시절을 보낸다. 80년대의 서구(영미)권의 신보수(+신자유주의) 우위와 공산권 붕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달까.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에게 손을 벌리며 데탕트(화해)를 기획한다. 1971년대만(중화민국)을 상임이사국에서 축출하고 UN에 가입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처음으로 국제사회에서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이때부터 상임이사국으로 부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2년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닉슨이 중공을 방문하고, 중공과 일본 국교가 회복되었다. 여담이지만 리처드 닉슨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회복세를 나타나기는커녕 오히려 하락세를 걷고 있다.
한편 중공은 1976년 저우언라이마오쩌둥이 잇달아 죽고 화궈펑에 의해 4인방이 축출되고 덩샤오핑이 복권되면서 개방의 물결이 시작되게 된다. 대만에서는 장개석이 비슷한 시기(1975년)에 죽고 옌자간에 거쳐 아들 장징궈가 뒤를 잇는다.

포르투갈에서는 철권 독재 정치를 펼친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전 총리가 1970년 사망하고 1974년 모잠비크, 앙골라, 기니비사우 등 아프리카 식민지 전쟁에 참전했던 군부내 소장파 장교들을 중심으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 살라자르의 뒤를 이어 독재정치를 펼치던 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가 축출되면서 오랜 극우 독재정권이 붕괴되었고 포르투갈의 이웃나라 스페인 역시 이듬해인 1975년 스페인 내전을 통해 집권한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죽고 프랑코 사후 후안 카를로스가 국왕이 되어 왕정이 부활하면서 남유럽의 독재체제가 종식되었다.
반면 칠레,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페루 등 중남미 국가들에서는 군부 쿠데타와 군부 독재와 같은 군부의 정치 개입이 가중화되었고 브라질은 군정이 계속되었다.

1972년 당시 옛 서독에서 열렸던 1972 뮌헨 올림픽이스라엘 선수들을 노렸던 범죄사건 '''검은 구월단 사건'''이 터져서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이는 여러 차례의 중동전쟁으로 표면화 되고, 이는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이어진다.
또한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캐나다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을 고수하여 논란을 일으켰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친선경기를 벌였던 뉴질랜드의 참가를 허용하자 이에 범아프리카 국가들이 반발하여 불참하는 등 정치적 성향을 거부하고 있던 올림픽 정신이 정치색깔과 인종차별 색깔 등으로 물들게 되는 계기를 낳기도 하였다.
1979년에는 소련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그리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판 베트남 전쟁이 된다. 아프가니스탄 역시 헬게이트에 빠진다.

Japan in the seventies (2) 70年代の日本
일본에서는 1960년대에 이어서 좌파 투쟁이 치열했으나 70년대 일본의 좌파 운동은 내분으로 인해 구심점을 잃고, 그 가운데 적군파처럼 과격한 무장 투쟁으로 대중들의 호응을 스스로 버리고 만다. 한편 경제적으로 안정세를 유지하면서 일본 국민들은 좌파 사회운동 등 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돈벌이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집권 후 '일본열도 개조론'이 나오기까지 했다. 경제도 저성장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정치도 우익 일변도인 오늘날의 일본을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라고 할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공산당이 전성기를 맞고 자민당이 록히드 사건과 오일쇼크로 정권유지에 어려움을 겪었을 때가 이 시기였다. 하지만 분열과 오히라 마사요시의 죽음으로 정권을 계속 유지했다. 전술한 록히드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쉬쉬했던 정경유착이 폭로되어 국민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정경유착 근절' 이야기가 호응을 얻었으나, 정경유착은 점차 규모가 커져갔다.
나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던 시기이지만 석유파동을 이겨내고 경제가 좋아져 이떄를 기점으로 일본은 현재와 같아진다.

3. 경제



3.1. 세계



3.2. 한국



한강의 기적의 절정기로, 한강의 기적의 80%가 이 시기에 이루어진 초고성장 시대였다. 1960년대경공업 위주에서 중공업 육성 정책으로 점차 변화가 되어갔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를 겪어온 1910년대~1950년대 초반년생들 기성세대들이나 경제계 등에서는 이 때를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자 태동의 시기라고 평가한다. 또한 경제계 거물인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등의 경제적 활약이 돋보였던 시기여서 이들의 존재가 두드러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외채가 급증하고 물가 상승으로 물가 성장이 60년대에 비해 둔화되는 효과를 보였다.
실제로도 당시 GDP는 연간 7~8% 이상씩 성장했으며 잘나가는 해에는 12%까지도 성장했다. 당시 2,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국민들의 노력 등에 의한 영향력이 컸다. 지금은 사망해서 몇분 남지 않은 당시 기성 세대였던 1900~1930년대생들의 집단주의적 특성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라고, GDP라는 국가 규모의 지표는 급격하게 발전 중이었으나 군부독재의 한계로 저임금 정책, 노동인권 탄압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1970년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이 일어난 해였고 이 사건 직후 본격적으로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학생들과의 연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때의 고착화된 노동인권적 가치가 현대까지도 '열정페이'로 대변되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73년에는 식량에서도 식량 자급 자족율이 100%를 넘어서 식량에서도 근대화를 일으켰으며, 북한과 1인당 국민 소득도 2배 이상으로 따돌렸다. 1960년대 중반만해도 한국보다 잘 살던 북한이었는데, 1973년에 1인당 국민 소득에서 이미 한국과는 비교할 가치가 없는 상대로 된 것이다. 1974년에 세계 펑균 1인당 국민소득을 추월했고, 1976년 세계 19위권의 무역국이 되었으며, 78년에는 17위까지 올라가 세계속의 한국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이로 인해 1인당 국민소득은 일시적으로 1700달러 후반대를 기록했으나, 2차 오일쇼크로 1700달러 초반대까지 떨어졌다. 한강의 기적 문서 참조. 중화학 중복 투자와 8.3 사채 동결 조치 등의 정부주도적인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이 국가 부도 위기 등을 야기하며 큰 한계를 보였지만, 결국 부가세 문제와 함께 신민당이 득표 1당이 되고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만다.
당시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 지원과 원자력 발전 정책으로 인해 1978년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상업운전을 했다. KAIST의 성립 등 과학기술, 공업의 집중 투자가 두드러지던 시기였다. 또한 컴퓨터와 금융권 전자화가 진행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4. 문화



4.1. 개괄


1970년대 문화를 포괄하는 단어는 '청년문화'인데, 1960년대 말 68혁명으로 형성된 저항주의적 청년문화는 1970년을 전후하여 한국에도 파급됐는데, 밥 딜런이나 존 바예즈 등 반전 포크송 가수들의 노래가 인기를 끈 것이었다. 특히 존 바예즈의 <Banks of the Ohio>가 번안곡 <내 고향 충청도>가 된 것처럼 번안 포크송도 유행했다. 거기에 청바지와 생맥주까지 인기를 끌면서 '통블생(통기타, 블루진(청바지), 생맥주)'이란 신조어를 낳아 청년문화가 형성됐고, 이미 1967년에 윤복희가 퍼뜨린 미니스커트도 불티나게 유행했다.
이 시기의 청년문화는 기성세대의 왜색 대중문화에 식상해진 청년이나 청소년에게 호소력이 있었지만, 서구권 청년문화와 달리 한국의 청년문화는 대항/비판문화라기보다 독점자본에 의한 부르주아 삘이 나는 대중문화와 혼재돼 있었다. 당시에 맥주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만 마실 수 있는 비싼 술이었고, 아무리 운동권들이 밥 딜런의 노래나 양희은의 <아침이슬>, 김민기의 <친구>를 부른다 해도 주류 대학사회나 일부 운동권에선 통블생 자체를 '향락주의적 문화'라 하거나, 외국 문화를 추종하는 딴따라가 어떻게 우리의 우상이 되느냐고 부정적으로 봤으며 진정한 목소리는 공동체 정신과 민중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또 서양 저항문화의 표피만 따왔다는 지적도 있으며 운동권 입장에선 절대악인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데엔 통블생이 방해 요소라고도 했다. 다른 한편 요정정치와 정인숙 사건으로 대표되는 박 정권의 색정/향락문화의 일환으로 조장된다는 쪽도 있다.
유신체제 내내 청년문화는 극심한 탄압을 받아왔다. 경찰은 통기타를 빼앗거나 가위를 들고 장발을 단속하는가 하면, 미니스커트에도 자를 들이댔다. 특히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군국주의적 사고관을 지닌 박정희는 장발과 같은 자유로운 대중문화 자체에 혐오감을 표했는데, 1973년 개정 경범죄처벌법 시행 후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을 합법화했고, 박정희가 TV를 보다 손가락 한번 가리키면 장발 방송인이 출연금지될 정도로 공포분위기가 조성됐다. 또 경찰은 시내 곳곳에 가위를 들고 상주하며 각 접객업소에 장발자의 출입을 금지하는 푯말을 붙여놓고, 공항 측은 외국인 장발족의 입국을 막았다. 1975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윤리위원회가 '공연예술 정화대책'을 발표한 후 무더기로 금지곡이 양산됐고, '대마초 파동'으로 포크송과 록 음악도 고사 직전의 타격을 받았다. 박 정권은 문화검열 기준으로 국론 분열 및 민족 주체성 저해, 퇴폐성을 내세워 엄숙주의를 견지했으나, 기생관광 같은 향락문화는 장려하는 내로남불스런 모습을 보였다. 박 정권의 가요대학살로 포크송 대신 트로트가 다시 장악했으나, 청년들의 새 문화에 대한 열망은 더욱 높아져 '하이틴 영화'와 '그룹사운드' 같은 새로운 대중문화가 나왔다.

4.2. 음악



4.2.1. 서양 음악


비틀즈1970년 해체하게 되면서 영미권 팝음악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비틀즈와 함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주도한 롤링 스톤즈더 후는 1960년대에 이어 큰 인기를 기록하게 되고, 핑크 플로이드 역시 1970년대 들어 음악이 성숙하면서 <The Dark Side of the Moon>이나 <The Wall>같은 역작을 탄생시켜냈다.
1960년대 말에 데뷔한 레드 제플린이 1970년대의 슈퍼 밴드로 부상하게 되고, 프로그레시브 록하드록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이기도 하다. 블랙 사바스딥퍼플과 같은 밴드들이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한편 1970년대 후반이 되면 실질적으로 AC/DC를 필두로 한 하드 록과 함께 록의 큰 흐름을 양분하는 펑크 록섹스 피스톨즈 등에 의하여 화려하게 등장한다. 엘튼 존, ABBA 같은 싱어송라이터와 그룹도 커다란 인기를 끌었으며 1970년대 말에는 빌리지 피플YMCA(노래)같은 디스코가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일렉트로니카가 처음 등장한 것이 이 시대다.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등의 전자음악을 실험한 현대 클래식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아 크라프트베르크 등의 테크노의 조상 뻘 되는 크라우트록 그룹들이 등장하였으며,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앰비언트가 태동하게 된다. 여러모로 다양한 장르가 가장 많이 시도되고 탄생한 시기이다.
차트에서는 '''가족밴드'''가 말 그대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1970년대 초에는 카펜터즈와 잭슨5, 1970년대 말에는 비 지스&앤디 깁이 차트를 작살냈다.[3] 각 밴드가 추구한 음악은 소프트 팝-펑키 흑인음악-디스코로 달랐지만 어쨌든 이 기간동안 다른 시기에 비해 가족밴드가 훨씬 흥했다.

4.2.2. 한국 음악


한국에서는 소위 7080 세대들의 노래가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였던 시기이기도 했다. 1970년대 가요계의 아이콘이었던 나훈아-남진라이벌 투톱 체제와 하춘화 등의 트로트 가수들이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또한 세시봉으로 대표되는 송창식, 양희은, 김민기와 같은 초창기 포크가수들이 등장하여 한국 음악 장르를 더 확장시키는 것에 기여했다. 가왕 조용필이 이 시기에 신인으로 데뷔하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크게 히트시켰다.
한편, 한국에서도 신중현에 의해 록 음악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음악을 한 것으로 칭송받는 산울림이 전설로 남은 초기작들을 발매하였다. 또한 70년대 후반에 들어서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등이 개최되어 한국 밴드음악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반면 대마초 파동과 금지곡 지정 등 흑역사가 많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4.2.3. 일본 음악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1970년대는 '아이돌 시대의 개막'이라 할 수 있다. 70년대 초중반은 3인조 걸그룹 '캔디즈'[4]의 시대라고 볼 수 있는데, 1973년 결성부터 1978년 고라쿠엔 고별공연 때까지 신인류 세대들의 박수를 받았다. 70년대 후반에는 '핑크레이디'가 <UFO>란 곡으로 오타쿠 세대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솔로 아이돌 중에서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아이돌을 초월한 가창력과 스타성으로 독보적인 스타로 군림했다가 1980년 배우 미우라 토모카즈와의 결혼과 동시에 은퇴했다.
남자 가수 중에서는 '쥬리(ジュリー)'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사와다 켄지가 치고 올라갔고, 사이죠 히데키, 고 히로미, 노구치 고로가 '신 고산케(新御三家)'를 형성하며 여성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마츠토야 유미, 나카지마 미유키 등 소위 뉴뮤직 세대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4.2.4. 중화권 음악


중화민국에서는 외성인 문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등려군이 가수로서 주가를 올려가고 있었다.

4.3. 영화


현재의 미국 영화를 완성한 시기이다. 그 전까지 1960년대에 남았던 검열이 이 때에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기도 한다. 바로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가 크게 형성하였다. 이 운동이 현재까지 미국 영화들을 질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공을 세울 뿐만 아니라 훗날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대항할 수 있는 조류를 남긴 것이다.
1960년대 내내 쇠퇴해있던 말론 브란도대부를 통해 재기하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를 비롯한 당대 신진 감독들과 협력하여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으며 그의 연기적인 후예격이라 할 수 있는 리얼리즘 연기를 크게 지향한 성격파&연기파 배우들이 데뷔하거나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여 무수히 많은 걸작들을 배출한 중요 시기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가 있으며 데뷔는 1960년대지만 본격적인 커리어 무브를 시작한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만도 존재한다. 여배우로선 현존 최고의 여배우라는 명성을 가진 메릴 스트립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를 필두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다. 1977년 <스타워즈>가 개봉하면서 20세기 가장 히트한 영화 시리즈의 시작을 알렸다. 마틴 스콜세지의 작품들로 대표되는 사회풍자적이면서 굉장히 리얼한 묘사를 살린 신세대 누아르 영화들도 이 시기에 대거 출현하였다.

4.4. 언론


박 정권의 언론통제 정책은 1969년 3선 개헌과 1971년 7대 대선을 계기로 강화되어 이듬해 유신체제 수립부터 보도통제가 일상화됐다. 이에 기자들이 반발하여 1971년 <동아일보> 등 14개 언론사의 언론자유선언을 비롯, 1973년 <경향신문> 등 10개 신문/방송사들의 언론자유선언을 거쳐 1974년에 본격적인 언론자유수호운동이 시작됐다.
언론자유수호운동의 계기는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에 따른 개헌운동 보도금지, 10월 19일 월남전의 진상을 보도금지토록 하는 '협조요청'에서 비롯됐다. 이에 동월 23일 <동아일보> 편집국장 청암 송건호 등 간부 3명이 서울농대생들의 학생시위를 보도하다 정보기관에 붙잡혔고, <한국일보>도 월남전 관련 기사 때문에 장강재 사장과 간부 3명이 중정으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이에 동아-한국 2개 신문 기자들이 농성을 벌였다.
24일에는 <동아일보> 편집국과 방송국, 출판국 등 기자 200여명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 후, 11월 7일까지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 35개 언론사 기자들이 이 선언에 동참했다. <동아일보>는 각 부별로 선출된 대표들을 통해 '자유언론 실천 특별위원회'를 꾸리고 <알림>이란 소식지를 제작/배포했으며, 기독교방송과 <중앙일보>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이 운동이 확산됨과 동시에 <동아일보> 측이 보도금지 요청까지 어겨가며 반정부 시위/집회, 기도회 등의 투쟁상황을 보도하자 정권은 각 기업체와 기관 등 광고주들로 하여금 <동아일보>랑 계약을 해지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결국 <동아일보>는 1974년 12월 16일부터 4년간이나 광고가 못 실리는 이른바 '광고탄압'을 겪었고, 특히 12월 26일자는 3면이 백지로 나온 건 물론이요 1975년 1월 25일에는 신문광고의 98%가, 2월 8일엔 방송광고까지 92%나 각각 떨어져 나갔다.
이에 1974년 12월 28일에 한국기자협회가 성명을 발표하며 '정부의 박해 중지, 동아일보 구독운동 전개, 광고해약 회사 불매운동, 동아일보 해약광고를 게재한 신문 불매' 등의 행동강령을 제시하고 시민들의 참여와 동참을 호소했다. 이에 호응하여 시민들과 민주단체에서 격려광고를 내고, 국제 언론단체들도 항의서한을 보내 엄중히 항의했지만, 이에 불구하고 <동아일보> 측은 권력 앞에 굴복했다. 동아 측은 1975년 3월 8일 심의실 등 4개 부서를 폐지하고 소속 기자 및 사원을 해직했고, 해고에 반발하며 농성하던 기자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언론사가 권력에 굴복하며 대량으로 언론인을 해직했다는 건 일제 시기에도 없던 유례 없는 사례였다.
이 운동으로 <동아일보> 및 동아방송,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에서 해직된 기자는 146명이며, 이들은 해직 후에도 언론 자유와 복직을 위해 줄기차게 투쟁했다. 언론자유수호운동은 실패했지만 언론인들이 민주세력과 연계해 반유신 투쟁에 나서는 밑거름이었다.
다만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권력과 언론사주의 관계인데,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에서 보듯 정부의 언론탄압에 사주가 가세함으로써 권언유착이 형성된 것이다. 이건 언론사가 사회적 역할이나 사명보다 이윤 및 상업성을 추구하는 기업의 속성을 보여준 것이다. 박 정권은 양심적인 기자를 탄압하는 강경책과 돈만 버는 언론사엔 특혜를 해 주는 이른바 '당근과 채찍' 작전으로 일관한 것이다. 이 정책은 1980년대 5공 ~ 노태우 정권 시기 들어서 더욱 심화됐는데, 언론사가 재벌화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4.5. 방송


1969년 KBS, TBC, MBC 3사 체제가 확립되면서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가 개막했다. TV가 널리 보급되어 라디오의 지위를 추월한 것도 이 시기였다. 흑백 텔레비전은 대중문화 전파의 첨병 역할을 했는데, 1960년대만 해도 극소수에 불과한 TV 수상기의 보급은 1970년대에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1967~68년 당시 10만대밖에 안 된 TV는 1972년 100만대, 1975년 200만대, 1978년 400만대, 1980년 660만대로 각각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TV의 광속보급은 전자산업을 육성하려는 정부의 경제정책과 소득수준 향상에 따른 대중의 여가생활 및 오락에 대한 요구가 결합됐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를 풍미한 흑백 TV는 국민들의 관심과 여가를 묶어 놓은 오락매체로서 정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대중문화의 총아가 됐다.
TV는 대중들 입장에선 신문이나 대한뉴스보다 빠른 정보전달 매체이자 사회생활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오락매체로서 사회/문화생활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나, 한편으로는 대중조작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정부나 자본이 방송매체를 장악하면 자신들의 주장과 이해를 대중들에게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특성을 지니는데, 1970년대 방송매체는 후자가 더 강해 정부의 정책 홍보수단이자 기업들의 선전장이 됐다.
정부는 신문과 마찬가지로 방송도 더 엄격히 통제와 규제를 가했는데, 방송은 방송법과 전파관리법, 공연법 등 법적인 통제를 받았으나 인사관리 및 프로그램 편성에 대한 문공부 지침, 기관원 상주 등과 같은 직접적 규제가 강했다. 정부는 KBS-TV의 <총리와의 대화>나 <정부와의 대화> 같은 정책홍보 프로그램이나 '목적극'이라 하는 반공/경제성장 드라마 등을 만들도록 하여 시청자들에게 반공/반북의식과 성장제일주의를 세뇌시키도록 했다. 이 시기를 빛낸 반공드라마론 KBS-TV의 <실화극장>과 <조총련>, <전우>, TBC-TV의 <추적>, MBC-TV의 <113 수사본부> 등이 있다.
또 1976년 4월 문공부가 '가족시간대 프로그램 제작/편성지침'을 통해 '민족사관 정립극'을 편성토록 했고, 1978년 '프로그램지침'을 통해 사극 중심의 '민족사관 정립극'을 새마을운동과 반공을 소재로 한 현대극으로 바꾸도록 했다. 대표적인 민족사관 정립극으론 TBC의 <풍운백년>과 <젊은 그들>, MBC의 <예성강>, <사미인곡> 등이 있다.
다른 한편 1973년 12월 에너지 절약 명분으로 아침방송이 폐지되고,[5] 1976년 4월에는 '가족시간대 프로그램 제작/편성지침'[6]과 외래어 사용 금지 지침[7]이 각 방송사에 내려졌다. 이때 종합뉴스 시간대가 밤 9시로 정해지면서 '''뉴스는 9시'''라는 인식이 201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다.[8]
방송사들은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음에도 기본적으로는 철저히 상업성의 논리를 따랐는데, 이는 광고 때문이다. 광고료는 방송사의 주 수입원이라 이들은 한결같이 높은 광고수입을 보장받는 시청률 경쟁과 대중의 감각적 요구, 저속한 취미에 영합하는 프로그램의 양산에 매달렸다. 교양프로는 새마을 운동이나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등의 계몽적인 목적 외엔 맘대로 만들 수 없었고, 사회 고발프로나 토론, 질 좋은 문화예술 프로그램은 아예 꿈도 못 꿨다. 그렇다 보니 코미디, 쇼, 일일연속극, 가요프로 등 오락프로가 전부였다.
70년대 최고의 TV 컨텐츠는 드라마였다. 당시 뉴스는 정권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코미디는 툭하면 저질 시비에 시달렸으니 방송사 입장에선 무난하면서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드라마를 선호할 수 밖에 없었다.[9] 1970년 TBC 일일연속극 아씨가 대히트하면서 각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연속극을 편성했고 하루에 방송사당 4~5편의 드라마가 편성되기도 했다. <아빠>와 <갈대>, <안녕>, <여로> 등 멜로드라마도 양산됐다.
70년대에는 탤런트 전속제가 매우 강하게 적용되었다. 김자옥처럼 KBSMBC를 넘나들며 출연하는 경우나 박근형, 김영애처럼 잠깐의 휴식기를 가진 뒤 다른 방송사로 컴백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배우들은 보통 한 방송사와 전속 출연 계약을 맺고 해당 방송사의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했다. 70년대 충무로 트로이카로 불리던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도 모두 TBC 동양방송 전속 탤런트로 활동했다. 이러다 보니 각 방송사의 간판 배우들이 연달아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 일례로 당시 MBC 전속 탤런트였던 최불암김혜자는 70년대에 이미 십 여편의 드라마에서 부부 역할로 출연하였으며,[10] 심지어 어린이 드라마도 같은 아역배우들이 주연과 조연을 번갈아가며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코미디에서는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송해, 이기동 등 1세대 코미디언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고 극후반이긴 하지만 이주일도 이 연대에 처음 TV에 등장했다. 또 TBC 쇼쇼쇼 1대 MC 곽규석[11]의 후임으로 허참이 등장하고 KBS의 김동건, TBC의 황인용, MBC의 변웅전, 차인태 등 명아나운서들이 활약한 시대이기도 했다.
동쪽의 섬나라 일본에선 코미디 그룹 더 드리프터즈가 전국을 들썩이게 만든 최고의 전성시대다. 특히 토요일 밤 8시 일본 TBS에서 방송한 "8시라구! 전원집합(8時だヨ!全員集合)"은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일본 예능 역대 최고 시청률 '''50.5%'''를 기록하며 "괴물 프로그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도쿄발 버라이어티 방송이 전국을 장악했던 시대이기도 하며 이것을 주도했던 것이 바로 도리후.
서쪽의 섬나라 영국에선 몬티 파이선이 시대를 초월한 병맛개그를 시전하고 있었다.

4.6. 만화, 애니메이션


한국 만화계는 도서윤리위에 의한 사전심의제 확립과 1972년 정병섭군 자살 사건, 합동출판사의 독과점 등으로 위축되었고, 이에 따라 소재 범위가 제한되어 코믹과 해학 위주의 명랑만화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며 어린이들의 접근경로도 만화방 중심에서 아동잡지 쪽으로 점차 이행되어갔다. 성인만화 역시 고우영, 강철수 등이 스포츠신문과 주간잡지 등지에서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반짝했던 한국 애니메이션은 1970년대 초반 침체기를 겪다가 해외 애니 하청제작에 하나 둘 뛰어들어 외화를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반면 토종 애니계는 1976년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 V>로 최초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똘이장군> 등이 히트하면서 한국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시대가 열렸다.
일본 애니업계에선 1970년대 초반 들어 애니 제작인력이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바뀌고, 1972년 토에이 동화 지명해고 및 파업과 1973년 무시 프로덕션 파산 등 악재가 겹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공투 등 사회주의 운동의 약화로 아웃사이더 트렌드도 빛을 잃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1972년 마징가 Z의 히트로 거대로봇물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세로 자리잡았고, 토에이 동화도 해외판매 및 하청제작 발주를 받아들이기 시작해 일본 애니계의 큰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만화가 요시다 타츠오가 이끈 타츠노코 프로덕션도 1970년 <해치의 모험>, 1972년 <독수리 오형제>, 1977년 <얏타맨> 등을 잇따라 내놓으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소녀물 쪽에선 <인어공주 나나(1970)>, <에이스를 노려라(1973)>, <큐티 하니(1973)>, <유리가면(1975)>, <캔디 캔디(1976)>, <베르사유의 장미(1979)> 등이 인기를 끌었고,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나 <플란다스의 개>, <만화 일본 옛날이야기> 등 명작동화 애니메이션도 인기를 구가했다. 이 시기를 대표한 제작자로는 나가이 고, 데자키 오사무, 나가하마 다다오, 린타로 등이 있다.
한편 1974년 <우주전함 야마토>가 상업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매니아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애니메이션이 더 이상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는 곧 <캡틴 하록> <은하철도 999>, <기동전사 건담>으로 대표되는 제2차 아니메 붐으로 이어진다. 이로써 마츠모토 레이지토미노 요시유키가 매니아들에게 우상으로 등극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1978년 도쿠마서점이 일본 최초 애니전문지 <아니메쥬>를 창간했다.

4.7. 스포츠


1970년대 당시 한국 스포츠는 아직 영향력이 없었으나, 스포츠 자체가 지닌 국민의 일체감과 단결력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 덕에 정권 차원에서 관심을 쏟았고, 이는 1980년대 들어 스포츠 강국으로 나아갈 자양분이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 인기를 끈 종목은 축구와 권투, 레슬링이었는데, 그 중 축구는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국민들의 절대적 사랑을 받아 국민 스포츠 지위에 올랐고, 아시아에서도 킹스컵 총 6회 우승(B팀 포함), 메르데카컵 총 6회 우승으로 각각 이름을 날렸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에 이르기까지 본선 진출을 매번 시도했으나 호주, 이란 등지에 패배하며 고배를 마셨고, 1972년 박스컵 준결승 때 버마에게 0-1로 지기도 했으나 여전히 사랑을 받았다. 이건 축구가 다른 종목에 비해 비교적 나았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미 말했듯 정권의 전폭적 지원도 같이 작용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1971년부터 '박대통령배 쟁탈 국제축구대회'를 매년 열어 국민들의 관심과 열기를 모아 이를 정치적 기반으로 활용하려 했다.
또 다른 인기스포츠인 권투에선 홍수환 선수가 1974년 7월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WBA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아놀드 테일러를 꺾어 김기수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 제패를 달성해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란 유행어를 전 국민에게 남겼고, 1977년 11월 파나마에서 개최된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전에서 엑토르 카라스키야를 4전 5기로 꺾어 또 신화창조를 했다. 그 외에 염동균, 유제두, 박찬희, 김태식, 김성준, 김환진 등 스타들이 배출되어 한국 권투의 황금기가 열렸고, 이 시기 동안 권투는 '헝그리 정신'의 표상임과 동시에 '진짜 남자의 스포츠'로 거듭났다.
메이저 국제 대회에선 1972 뮌헨 올림픽 때 북한에 밀려 부진했으나,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선 종합 4위로 북한을 앞서 자존심을 지킨 뒤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경기에서 처음으로 레슬링 선수 양정모대한민국에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안겨줘서 하이라이트를 이룩했고, 이 때에 들어서 한국 스포츠가 성장기를 거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아시아경기대회(아시안 게임)를 1970년에 열기로 하였으나 북한의 위협 문제와 경제문제 등으로 반납하게 되었고, 16년 후인 1986년에 가서야 아시아 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외에 1973년 4월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애리사와 정현숙 등이 이끄는 대표팀이 우승을 하여 국민들에게 박수를 받았고, 1979년 서독 서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김진호 선수가 개인종합 1위를 하고 전영 배드민턴 오픈대회에서도 황선애 선수가 우승해 국민 영웅이 됐다. 산악계에선 1977년 고상돈이 이끄는 한국등반대가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 전국민적으로 찬사를 받았다.
위와 같은 국위선양 활동과 더불어 프로레슬링도 한 시대를 풍미했는데, '박치기왕' 김일과 천규덕의 당수, 여건부의 알밤 까기 등 현란한 기술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TV 앞으로 모여들어 환호성을 지르게 만들었고, 특히 일본 선수와 대결할 때는 과거 일제 강점기 때 치욕을 갚아줬다는 대리만족을 선사케 했다. 특히 김일과 천규덕은 어린이들의 우상으로 거듭났다.
야구 중에선 고교야구가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이것은 출신교를 응원하고 지원하는 동문 및 그 가족들의 헌신에 힘입은 것이다. 이 시기를 풍미했던 대회로는 청룡기-황금사자기-대통령배-봉황대기 4대 대회가 있고, 고교 야구부는 전통의 명문 경북고와 경남고, 부산고, 부산상고, 대구상고, 중앙고, 그리고 신흥강호 신일고도 있었다. 이보다 더 특기할 만한 건 광주일고, 군산상고 등 호남 학교들의 활약인데, 특히 군산상고는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 때 이변을 일으켜 '역전의 명수'라는 호칭을 얻었고, 이 순간은 1977년작 정인엽 감독의 영화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에서 다뤄졌다.

4.8. 게임


세계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를 비롯한 1세대 게임기들인 , 테레비 테니스, 아타리 비디오 핀볼 (일본에 수입되어 로컬라이징된 타이틀은 ''에포크 TV 블록''), 컬러 TV 게임등이 출시되었다. 이 시기는 이른바 게임계의 석기시대. 이때를 보통 게임 산업의 태동기로 본다.
한국에서 전자오락실이 처음 생긴 것이 1974년이고, 1976년 아타리의 브레이크아웃이 인기를 얻어 시내 중심부에만 있던 전자오락실이 점차 변두리로 확산되고, 1978~1979년, 타이토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일본 뿐만이 아니라, 한국, 미국, 유럽에서도 큰 인기를 끌게된다.
1970년대에 등장한 게임으로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 1972년 아타리
  • 1973년 타이토 축구 - 퐁의 변형으로 개량형으로 최초의 Made in Japan 게임. 한국에선 1975년 이 게임을 기본으로 축구, 탁구, 스쿼시, 사격1, 사격2 가 들어간 게임기를 제작.
  • 1974년 타이토 스피드 레이스 - 세계 최초의 드라이브/레이싱 게임
  • 1975년 타이토 웨스턴 건 - 한국에서는 무법자 란 이름으로 유통. 세계 최초의 동시 2인용 슈팅게임.
  • 1976년 아타리 브레이크아웃 - 벽돌깨기 게임의 원조
  • 1977년 엑시디 서커스 - 시소를 이용한 풍선 터뜨리기 게임
  • 1977년 아타리 아타리 비디오 핀볼 - 최초의 가정용 벽돌깨기 게임. 1978년, 일본 에포크社에서 수입, '에포크 TV 블록'으로 로컬라이징

Epoch Terebi TV Block System Console JP

5.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해당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 제외. 가상역사/SF물인 경우 ▼.

6.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


  • 교수 재임용제도: 1975년 교육공무원법 개정에 따라 도입됨.
  • 민방위

7. 이 시대의 상징들



7.1. 인물



7.1.1. 정/관계



7.1.1.1. 대한민국


7.1.1.2. 해외


7.1.2. 군부



7.1.3. 재야운동가



7.1.4. 재계


  •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 강진구 삼성전자 사장
  • 구자경 럭키그룹 회장
  • 박승찬 금성사 사장
  •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 정세영 현대자동차 사장
  • 정인영 현대양행 사장
  •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 최준문 동아그룹 명예회장
  •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 박두병 OB그룹 회장
  • 정수창 두산그룹 회장
  •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
  • 양규모 진양화학 회장
  • 장경호 동국제강 회장
  • 장상태 동국제강 사장
  • 권철현 연합철강 회장
  • 조내벽 라이프그룹 회장
  • 주창균 일신제강 회장
  • 최종환 삼환기업 회장
  • 김종희 한국화약그룹 회장
  • 김용산 극동건설 회장
  • 이재준 대림그룹 회장
  •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 조정구 삼부토건 회장
  • 배정일 남광토건 회장
  • 조봉구 삼호주택 회장
  • 배종렬 한양그룹 회장
  • 김형종 한신공영 회장
  • 이종욱 삼익건설 회장
  • 김인득 벽산그룹 회장
  • 신기수 경남기업 사장
  • 정태수 한보주택 사장
  • 박용학 대농그룹 회장
  • 김두식 삼미사 회장
  • 이상순 원풍산업 회장
  • 박흥식 화신산업 사장
  • 남궁련 대한조선공사 회장
  • 조홍제 효성그룹 회장
  • 조석래 동양나이론 사장
  • 장선곤 한국타이어제조 사장
  • 최종건 선경그룹 회장
  •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
  • 박인천 금호그룹 회장
  •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
  • 김한수 한일합섬 회장
  • 이종성 충남방적 회장
  • 정종화 동일방직 사장
  • 최준규 서통그룹 회장
  • 김지태 한국생사그룹 회장
  • 단사천 한국제지 회장
  •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 박병규 해태제과 사장
  • 설원량 대한전선 회장
  • 김상홍 삼양그룹 회장
  • 전중윤 삼양식품 사장
  • 최성모 신동아그룹 회장
  • 최태섭 한국유리 회장
  • 김치복 대한화재 회장
  • 이한원 대한제분 회장
  • 이필석 국제화재 사장
  • 임대홍 미원그룹 회장
  • 신선호 율산실업 사장
  • 정인욱 강원산업 회장
  • 유성연 삼척탄좌개발 회장
  • 이장균 삼천리산업 회장
  • 김수근 대성산업 사장
  • 원길남 원기업 사장
  • 이창우 제세산업 사장
  • 김병만 대봉산업 사장

7.1.5. 방송/연예계



7.1.5.1. 대한민국

''' 배우 '''

  • 남배우
    • 이낙훈
    • 이순재
    • 김순철
    • 오현경
    • 임동진
    • 이동진
    • 노주현
    • 나시찬
    • 김시원
    • 허영
    • 김상훈
    • 박해상
    • 윤덕용
    • 천정우
    • 서상익
    • 맹호림
    • 이일웅
    • 장욱제
    • 강민호
    • 송재호
    • 김세윤
    • 김성원
    • 연규진
    • 주선태
    • 한주열
    • 장항선
    • 정운용
    • 신구
    • 윤일봉
    • 남궁원
    • 박암
    • 황해
    • 독고성
    • 박노식
    • 신성일
    • 장동휘
    • 장민호
    • 김진규
    • 전운
    • 김무생
    • 민욱
    • 최불암
    • 김상순
    • 김호정
    • 남성훈
    • 손창호
    • 이덕화
    • 조경환
    • 홍성민
    • 이정길
    • 이대근
    • 한지일
    • 신일룡
    • 백일섭
    • 박근형
    • 전영록
  • 여배우
    • 오수미
    • 정애란
    • 강효실
    • 박주아
    • 정윤희
    • 유지인
    • 장미희
    • 염복순
    • 김혜자
    • 김교순
    • 김형자
    • 김민자
    • 여운계
    • 정영숙
    • 도금봉
    • 복혜숙
    • 서승희
    • 서승현
    • 강부자
    • 안인숙
    • 안옥희
    • 한혜숙
    • 양정화
    • 김영란
    • 김자옥
    • 김영애
    • 이효춘
    • 사미자
  • 아역
    • 김정훈
    • 강남길
    • 송승환
    • 이승현
    • 진유영
    • 임예진
    • 강수연
    • 손창민
    • 최유리
    • 윤유선
    • 신민경
    • 배수일
    • 김민희
''' 가수 '''

  • 남진
  • 나훈아
  • 이미자
  • 패티김
  • 하춘화
  • 김정호
  • 사월과 오월
  • 별셋
  • 송창식
  • 최헌
  • 둘다섯
  • 한대수
  • 신중현
  • 이장희
  • 김민기
  • 송대관
  • 윤형주
  • 최병걸
  • 조경수
  • 전영록
  • 최백호
  • 하사와 병장
  • 하수영
  • 산울림
  • 어니언스
  • 샌드페블스
  • 서수남과 하청일
  • 윤수일
  • 송골매
  • 김추자
  • 진미령
  • 혜은이
  • 현미
  • 전영
  • 최인순
  • 양희은
  • 윤복희
  • 심수봉
  • 바니걸스(토끼소녀)
  • 이은하
''' 개그맨 '''

  • 곽규석
  • 구봉서
  • 배삼룡
  • 서영춘
  • 송해
  • 권귀옥
  • 이순주
  • 배일집
  • 배연정
  • 이기동
  • 남철&남성남
  • 이영일
  • 이설란
  • 최용순
  • 심철호
  • 이대성
  • 임희춘
''' 진행자 '''

  • 앵커
    • 김택환
    • 봉두완
    • 구박
    • 박근숙
    • 김기주
    • 이득렬
    • 하순봉
  • 아나운서
    • 이정부
    • 김동건
    • 김승한
    • 이규항
    • 이병혜
    • 박종세
    • 황인용
    • 맹관영
    • 유수호
    • 고려진
    • 윤여복
    • 박초아
    • 임택근
    • 정경수
    • 변웅전
    • 차인태
    • 임국희
    • 오영제
    • 전영우
    • 현옥
  • MC/DJ
    • 곽규석
    • 허참
    • 송해
    • 박상규
    • 임성훈
    • 최미나
    • 명현숙
    • 선우혜경
    • 최동욱
    • 이종환
    • 박원웅
    • 김세원
    • 이수만
    • 배한성

7.1.6. 스포츠



7.1.6.1. 대한민국

''' 선수 '''

  • 야구
    • 강병철
    • 천보성
    • 노길상
    • 배대웅
    • 남우식
    • 윤몽룡
    • 김봉연
    • 장효조
    • 성낙수
    • 최동원
    • 노상수
    • 이만수
    • 김시진
    • 김경문
    • 조범현
    • 김성한
    • 김정수
    • 박노준
    • 윤여국
    • 양상문
    • 문병권
  • 권투
    • 고생근
    • 구상모
    • 김상현
    • 김성준
    • 김태식
    • 김태호
    • 문태진
    • 박찬희
    • 염동균
    • 오영호
    • 유제두
    • 임재근
    • 주호
    • 홍수환
    • 황복수
  • 축구
    • 김재한
    • 김철수
    • 김호곤
    • 박이천
    • 이영무
    • 이차만
    • 이회택
    • 정규풍
    • 조광래
    • 최재모
    • 황재만
  • 농구
    • 김동광
    • 박한
    • 이충희
    • 임정명
    • 최명룡
    • 최인선
    • 황유하
    • 박찬숙
  • 배구
    • 강만수
    • 김호철
    • 조혜정
    • 윤영내
  • 권투
    • 김태식
    • 박찬희
    • 염동균
    • 홍수환

7.2. 사회/문화



7.2.1. 대한민국


  • 113 수사본부
  • 경부고속도로
  •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 국민교육헌장
  • 교련 과목
  • 선데이 서울
  • 어깨동무, 소년중앙, 소년생활, 새소년: 1970년대 4대 어린이잡지다.
  • 창작과 비평
  • 문학과 지성
  • 씨알의 소리
  • 뿌리깊은 나무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조세희 저.
  • 리영희 교수의 저서들
    •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 황석영의 작품들
    • 객지, 장길산, 삼포 가는 길
  • 우리 동네 - 이문구 저.
  •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 강만길 저.
  • 쇼쇼쇼
  • 수사반장 - 1978년까지 최불암, 김상순, 조경환, 김호정 체제가 황금라인이었으나, 김호정 사후 남성훈으로 대체됐다.
  • 웃으면 복이와요
  • 여로
  • 아씨
  • 전우 (1975년판)
  • 하이틴 영화
  • 호스티스 영화: <별들의 고향>이 대표적이다.
  • 포크 송
  • 그룹사운드
  • 통블생: 통기타, 블루진(청바지), 생맥주의 준말. 해당 시기 한국 젊은이들의 삶을 함축하는 단어이다.
  • 쌍쌍파티
  • 메이퀸 선발대회
  • 기생관광
  • 중동 건설사업

7.2.2. 세계 공통



8. 1970년대생




9. 1970년대에 들어가는 해


1970년 - 1971년 - 1972년 - 1973년 - 1974년 - 1975년 - 1976년 - 1977년 - 1978년 - 1979년

10. 참고/관련 문헌


  • 고쳐 쓴 한국현대사 - 강만길 저. 창작과비평사. 1994.
  •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2권: 휴전에서 10.26까지 - 박세길 저. 돌베개. 1989(초판)/2015(재판).
  • 대한민국사: 1945~2008 - 임영태 저. 들녘. 2008.
  • 바로보는 우리역사 2권 -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 저. 거름. 1990.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 서중석 저. 웅진지식하우스. 2005(초판)/2020(개정증보 3판).
  •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15권 - 서중석/김덕련 저. 오월의봄. 2017~2018.
  • 실록 민주화운동: 우리 강물이 되어 - 유시춘 저. 경향신문사. 2005.
  • 유신: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시대 - 한홍구 저. 한겨레출판. 2014.
  • 한국현대사 3권 - 한국역사연구회 저. 풀빛. 1991.
  •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전 3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2.
  • 함께보는 한국근현대사 - 역사학연구소 저. 서해문집. 2003(초판)/2016(개정판).

[1]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등.[2] 1960년대 중반생부터는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그렇게 쉽게 평가하지 못하게 됐고, 1970년대생들은 명백한 외환위기 이후 세대다.[3] 공교롭게도 이 세 그룹은 각 그룹의 핵심멤버가 요절했는데, 카펜터스의 경우 여동생이자 메인보컬인 캐런 카펜터가 1983년 거식증의 후유증으로 요절했고, 잭슨5의 경우 메인보컬이자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마이클 잭슨이 2009년 프로포폴 투약사고로 숨졌다. 비 지스의 경우 메인보컬이자 맏형인 배리 깁은 살아있지만, 나머지 쌍둥이 두 명과 솔로 활동에 주력하던 앤디 깁이 모두 요절했다.[4] 소녀만화 <캐릭캐릭 체인지>에 나오는 아무의 수호캐릭터 3명이 해당 아이돌을 모티브로 했다.[5] 아침방송은 1981년 5월에야 부활한다.[6] 6시대 어린이 프로그램, 7시대 뉴스와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 8시대 가족 대상 프로그램, 9시대 뉴스와 드라마 등.[7] 특히 MBC가 이 지침을 철저히 지켜서 뉴스데스크는 뉴스의 현장으로, 그랜드쇼는 토요일토요일밤에로 제목을 변경했고, 가수들의 이름도 바니걸즈를 토끼소녀로, 어니언즈를 양파들로 바뀌었다.[8] 1991년 신규 개국한 SBS가 종합뉴스를 8시에 편성하면서 9시=종합뉴스 공식이 처음 깨졌지만 실질적으로 이 공식이 힘을 잃은 건 2012년 MBC 뉴스데스크의 시간대 이동과 이후 JTBC 뉴스룸의 영향이 컸다.[9] 물론 드라마도 당국에서 "사회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규정할 경우(...) 조기종영하는 사례가 심심찮게 있었다. 1978년 MBC 주말연속극 청춘의 덫이 불륜을 소재로 다뤘다는 이유로 조기종영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1999년에 리메이크된다.[10] 두 사람의 부부연기 대표작인 전원일기는 1980년에 시작했다.[11] '''후라이보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1세대 코미디언.[12] 배우와 동명이인으로,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당시 북한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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