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수
1. 회령시 출신 독립운동가, 崔正洙
최정수(崔正洙)는 1896년 함경북도 회령군 풍산면(현 회령시 풍산리)에서 태어났다.
1920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제1남지방부(第1南地方部) 통신원으로 중국 화룡현 및 회령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밀정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해 음력 7월 유봉춘(兪鳳春)·박준학·황운흥(黃雲興) 등과 함께 밀정 윤달수(尹達壽) 처단에 참여하였으며, 음력 8월 1일에는 회령군 팔을면 창효동에서 동민(洞民) 18명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다음날인 2일에도 팔을면 원산동에서 최태항(崔泰恒)·강기용(姜璣鎔)·최병윤(崔秉淵)·윤영준(尹永俊) 등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차출하겠다는 서약서를 받았다.
그해 8월 20일경에는 이용학(李龍學)·한창준 등과 함께 화룡현 사기동(砂器洞)에서 밀정 김덕기(金德基)를 심문하고 부근의 토성산복(土城山腹)으로 연행하여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21년 7월경 체포되었다.
1922년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살인, 강도죄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1년 8월 18일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 홍원군 출신 독립운동가, 崔正守
최정수(崔正守)는 1922년 1월 20일 함경남도 홍원군 주익면 남당리(현 홍원군 남천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일본 토요대학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라는 명목에 의해 일본군 평양사단 내 42보병부대에 입대하였다.[3]
이들 부대에 각기 배속되었던 학병들은 그해 7월에 초년 훈련병의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자 42보병부대를 중심으로 집단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때 그는 김완룡(金完龍)·박성화·전상엽·김윤영(金允永) 등과 함께 모의를 거듭하고 그해 8월부터는 동지를 포섭하는 등 항쟁준비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사단 내 각 부대의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는데, 이때 최정수는 학병항쟁 조직의 제1지대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당초 학병항쟁의 계획으로 평양사단 병영의 폭파 등이 제의되었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웠으므로 일단 부대탈출 후 한국-만주국 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는데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않아 부득이 거사일을 한 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계획을 탐지한 한인 헌병보조원이 그 사실을 일본군 헌병대에 밀고하였고, 또 학병 동지인 김완룡이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평양사단의 학병항쟁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도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그 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6월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이후 여생을 보내다가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1990년 12월 26일 별세하였다.
[1] 구한 말 회령군 풍산면 일리 상수동·보하동·천평동·맹가동·사동·봉의동·중도동 → 1914년 회령군 창두면 풍산동 → 1949년 회령군 창두면 풍산리 → 1952년 회령군 풍산리 → 1991년 회령시 풍산리.[2] 인근의 장정리와 함께 전주 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최팔용과 도명수·도상봉도 이 마을 출신이다.[3] 당시 일본군 평양사단은 42·43·44 보병부대 및 47포병부대와 48공병부대, 50치중병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