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 특별지원병 제도

 


1. 개요
2. 실상
3. 오해
4. 관련 문서


1. 개요


태평양 전쟁 후반에 일본군이, 제국의 황군의 육군 장교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식민지였던 조선대만에도 열어준 제도. 전황이 매우 불리해지고 인적 자원이 모자라다 보니 장교까지 식민지에서 뽑아간 흔적이다.

2. 실상


당시 구제고등학교 졸 이상의 고학력자[1]는 26살까지는 징병이 유예되었고, 그 뒤에도 보통은 예비역으로 병역을 마칠수 있었다. 그러나 미친듯이 격감하는 병력을 감당하지 못하자 이를 폐지하고 고등학생부터 입영대상으로 지정했고[2], 1943년부터는 문과계 학생들을 시작으로, 좀 뒤에는 타 학과 학생까지 범위를 확대하였다.
일제는 1943년 10월 병역법 일부를 개정하여, 고등·전문학교 이상 재학 중의 법문계(法文系) 학생에 대한 징집유예제도를 폐지하였다. 이에 따라 그간 징집유예를 받고 있던 일본의 법문계 학생들이 같은 해 11월 일제히 초급 장교부사관으로 입대하였다. 이와 관련해 일본정부는 같은 해 10월 육군성령(陸軍省令) 제48호로써 〈쇼와(昭和) 18년도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을 공포해, 병역의무가 없는 조선 학생들에 대해서도 법문계 재학생 또는 졸업생의 병원 동원을 강행하였다. 이 조치로 국내외를 통해 4,385명의 해당자들이 1944년 1월 20일 일제히 일본군문으로 끌려갔다.
이때를 기점으로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은 일본, 한반도, 대만을 합해 약 13만여명에 이르렀고 그중 사망자수는 아직도 정확하게 추산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일본이 얼마나 다급했으며 또한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진행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이처럼 '''모집과정에서의 강제성''' 때문에 '''입대에 대한 회피와 저항'''이 있었다.
학도지원병의 경우에도 함경북도 청진 검사정의 보고에 의하면 '''지원자 256명 중 “자발적으로 지원하였다고 볼 수 있는 자는 도내 겨우 10명 내외에 불과하고''', 다른 대부분은 모두 농후한 지도적 격려를 더하면서 결의 지원한 자”라고 하였고
ㅡ 高等法院檢事局, 「臨時陸軍特別支援兵の動向一斑」, 『朝鮮檢察要報』 1, 1944. 3, 2쪽.
구체적인 저항도 있었는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하준식(河俊植)이 학병 지원을 거부, 덕유산 은신골로 피신해 징용·징병 기피자 73명을 규합, 광명당(光明黨)을 조직해 '''후방 교란 게릴라전을 기도'''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저항적인 거부운동은 전국 주요 산악지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지리산·운문산·포천군 산악지대, 금강산 등은 이런 학병 거부자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학병에 강제지원하기 싫다고 에 들어간 사람들 얘기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학도지원병은 말로만 지원병이었다. 이 (학도)'지원'병은 '''부모,형제,처자에 대한 위협과 공갈에 기초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경북 의성 출신 오탁근은 명치대학 재학 중이었는데, 대학 교련교관, 의성경찰, 헌병 등이 총동원되어 '''가족을 위협하고 협박했다.''' 조선-일본간의 연락선은 물론 철도의 승차권 역시 엄격하게 제한되어 학병 '지원' 여부를 검사했다. '''가족들의 신변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학병들은 학병거부 및 도피를 택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215p)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가기 싫어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학병 해당자들은 여러 형태로 저항을 했다. 예를 들어 1943년 11월 이후 '''관공서를 습격, 파괴한 후 형사처벌을 받아 학병을 면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함남 북청 출신 이광림 등 '''학병 60명이 파출소를 습격'''하였고, 서재균 등은 '''재동파출소를 습격'''했으나 '''학도지원자라는 이유로 문책받지 않았다.''' 또한 서울에서는 경성제국대학의 이혁기, 보성전문의 이철승 등이 주동이 되어 학병 거부를 주도하며, 소기국소 총독과 학병문제로 담판을 지은 바 있다. (216p)
ㅡ 정병준 교수 저 '광복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이들은 귀환하게 되는데 규모는 약 6천 명 수준이었다.
이런 학병 출신 유명인으로 김준엽 (독립운동가, 교육자 - 고려대학교 전 총장), 김수환 추기경, 언론인 장준하, 영문과 교수이자 번역가 이가형[3]등이 있으며 일본 경우 전후 총리중 세 사람이 학병 출신이라고. 김 추기경은 중간에 탈락해 병으로 복무하였고, 김준엽, 장준하는 중국전선에서 탈출[4] 이가형은 임팔전투 직후에 미얀마 후퇴전에 참가해서 예하부대가 전멸(...) <버어마 전선 패잔기>라는 실록을 전후에 쓰게 된다.

3. 오해


노무현 정부때 친일인명사전과 관련된 논란으로 인터넷 등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이력때문에 친일이니 뭐니하면서 이슈가 되고 있긴 한데, 당시 해당자의 인터뷰를 참조하자.

일본은 계속해서 필리핀, 월남,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수마트라, 뉴기니아, 그리고 진주만 폭격으로 전쟁을 벌여 나갔는데 그래서 병력이 많이 소모되고 모자르게 되어 결국 대만과 한국을 황국신민화시키고 실업학교[5]

를 많이 만들어서 한국인구 2천만에 2백만을, 대만인구 8백만에 1백만을 전쟁에 동원하자는 계획으로 지원병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한국에서도 태능에 지원병 훈련소를 만들어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직전에 전문대학에 다니는 인문계통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라는 것이 생겼는데 말이 좋아 지원병이지 실제로는 강제징발을 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때 나도 강제지원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지원에 응하지 않으면 공민권 박탈은 물론이고 만주벽지 탄광에 노무자로 보내느니 식구들 사업도 방해하고 또 공무원도 못하게 되어 있어 마지못해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지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6.25 전쟁 당시 25연대장, 김병휘 장군 인터뷰 중. 월간 군사세계.

이들 중 전문학교생부터 '지원'을 받기 시작해 장교를 양성하기 시작하지만 당연히 '지원' 대상자들도 같은 처지다. 즉, 말이 장교 지원이지 징병대상자로서 끌려간 점은 일반 징병과 별 다를것은 없지만, 장교라는 계급 자체의 이득이 있다, 즉 이들은 친일이 목적이 아닌 신분의 유지측면으로 볼 수가 있다. 말하자면 징병자인 일본이 그나마 고학력자를 골라 뽑아준 쪽으로 간 것이랄까.
김수환 추기경 또한 징병을 피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 유학중이던 사람이 헌병이나 특고의 추적을 뿌리치고 일본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있기라도 할까?[6] 즉 '''이름은 지원병이지만 실제는 강제 징집이다.''' 즉 복무 자체를 갖고 친일여부를 판단해선 안되며 복무의 적극성 여부를 통해 친일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이들은 미 군정대한민국 국군의 초기형태를 구상할 때 귀중한 인적자원으로 쓰였는데 이게 광복후 군대 친일화 운운 하는 소리의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물론 스스로 자원해서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쳐서 일본군에 복무한 사람들도 많이 들어갔지만, 조선지원병학병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 간도 특설대 같이 자신들이 '''자원해서 제대로 친일 행위를 한 자들과 학병 출신은 엄연히 구분을 해야한다.'''
실제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을 졸업한 지식인, 엘리트인데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서 남의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쓰였다는 것이 안타까운 사실이다. 이런 점 때문에 1945년 해방이후 학병출신들이 뭉쳐서 만든 학병동맹은 친일파 청산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등 대단한 위세를 가졌다고 한다.
물론, 이들중에 '''분명 친일파는 있을 수 있다.''' 세상이 세상인 만큼 없는게 이상하겠지. 하지만 그들 자체가 모두 친일파라는 것은 전혀 다른 소리. 또 역설적으로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대다수의 장성들은 구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이북 인민군 장교중에도 학병 출신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러한 강제 징용은 천일공노할 행위임에 맞지만, 지원자에 한해서 30년을 지배하에 있으며 2등국민으로 살아가는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약간 다른 상황으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다. 물론 일본의 만행이 씻겨지는것도, 진성 친일파들의 이름이 깨끗해 지는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군 사관학교에 조선인의 지원 비율은 지금의 고위 사립대학교 뺨치게 높았다. 2등국민으로 사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몇안되는 '계급상승'의 통로였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비슷한 경우로, 베네딕토 16세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한 것에 대해 논란이 있긴 했었는데, 이쪽도 그 당시에는 '''의무 가입'''이라서 안 까였다. 조선은 그에 비하면 더 열악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학병 논쟁이 위에 상술한바대로 친일파 논쟁으로밖에 비화가 되지 않은데, 1980년대만 해도 학병세대의 체험에 대한 문학이 하나의 장르였다. 작가 이병주가 이런쪽으로 대단히 많은 작품을 남겼고[7],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고뇌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엘리트로서 식민지 현실에 눈을 일찍 떴지만 그 자신들이 선택받은 특권층[8]이라는 자괴감과 해방 이후 격동기를 몸으로 부딪혔던 운명등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9] 2009년에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관련 서적이 출간되었으니 학병 세대를 세대론적으로 보실려면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4. 관련 문서


[1] 물론 지금의 교육과정과 일제 강점기의 교육과정을 동일시 하면 심히 곤란하다. 당시 고등학교:舊制高校로 통칭)는 지금의 대학교 1, 2년 과정에 해당된다. 독일의 김나지움과 비슷한 제도라고 보면 될 듯(사실 당시 일본의 교육제도는 유럽식이었고, 2차대전 패전 후 미국식 6-3-3 제도로 바뀌게 된다.). 김웅수 장군의 회고록에 기술된 내용에 따르면, 초반에는 무차별적인 징집이 아니라 지원을 받아서 차출해나갔다고 한다. 물론 지원을 하지 않으면 직간접적인 불이익이 상당했기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 지원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고..[2] 덕분에 한자리수였던 대입경쟁률은 10:1까지 치솟았다.[3] 80년대 해문 팬더 출판사에서 나온 일본 추리번안 아동물이 대부분 이 사람의 손을 거쳤다. 한국 추리문학의 아버지 격.[4] 여담이지만 중국이 아닌 다른 전선에 발령 받을 경우 탈출이 어려웠기 때문에 중국탈출을 꿈꿨다고 한다.[5] 구제전문학교는 국내에서도 남아있다. 부산고등수산학교(현 부경대), 수원고등농업학교(서울대 농과대), 대구농업전문학교(경북대 농과대), 경성약학전문학교(서울대 약학대),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서울대 치대),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통합),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서울대 공과대학), 평양공업전문학교등이 당시 일제가 만든 전문학교들.[6] 역시 학병 출신자인 언론인 장준하의 경우, 부대가 중국에서 대기중일때에 비로소 틈을 보아 탈출할 수 있었다.[7] 그는 중국전선에서 참가해서 소주(쑤저우) 부근에서 종전을 맞았다.[8] 찢어지게 가난한 학생이 연희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니고..."는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시 전문학교-일본유학-학병코스를 밟는 사람의 경제적인 능력은 지금 기준으로 하면 상위 1%에 해당한다[9] 이병주의 관부연락선이 학병 시대를 그렸고. 지리산이 학병세대의 해방공간에서의 좌절, 그해 5월은 중년의 학병세대가 5.16박정희 정권을 보는 시각이다. 단편으로 변명은 독립전선에 뛰어든 학병세대를 그리고 있고 미완작이자 유고작에서는 특권층으로서의 학병세대의 고민을 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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