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천
1. 개요
'''70년대 전반 국가대표팀의 에이스'''.
'''역대 국가대표 득점랭킹 3위'''.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 축구감독, 현 청주CITY FC 단장.
2. 선수 경력
2.1. 유소년 시절
초등학교 시절 처음에는 육상 선수로 활약하여 서울시 200m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유능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계속 축구부에 들어가지 않았던 박이천은 중학교 3학년이던 11월,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당시 영도중학교 축구부가 단 11명밖에 선수가 없어서 결국 1명이 빠지게 되어 일반 선수 중에서 반드시 1명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 닥쳐 박이천이 뽑히게 된다. 당시 윤재봉 감독은 영도중과 영등포공고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장학금을 조건으로 제시하며 박이천을 달랜 끝에 영등포공고 축구부에 박이천을 입단시키게 된다.
당시 영등포공고는 박이천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축구경력이 없던 이회택까지 진흙 속에서 발굴해낸다. 미래에서 되돌아보면 마치 고교축구를 호령할 것만 같았으나 이회택이 너무 대단한 활약을 한 나머지 부정선수라는 것이 걸려 영등포공고에서 동북고로 스카우트당하게 된다. 박이천이 2학년이 되자 영등포공고의 상황은 더욱 안 좋아져 해체설까지 나돌았다. 박이천은 광주상고로 잠시 전학을 가나 이회택의 추천으로 동북고에 들어가게 된다. 2학년에서 다시 1학년으로 동북고에 입학하게 된 박이천은 이회택과 마찬가지로 박병석 감독으로부터 기본기를 세밀하게 배우게 된다.
2학년부터 어느 정도 주전이 되었으나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으나, 3학년부터 전국대회를 휩쓸게 된다. 이회택 시절 동북고는 절반 정도를 우승했으나 박이천의 동북고는 11개 대회에서 9개 우승을 차지하며 박이천은 30골 정도 넣은 것 같다고 회상한다. 이 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67년 청소년 대표에도 뽑히게 된다.
2.2. 클럽
박병석 감독이 동북고와 중앙대를 겸임하고 있었기에 박이천은 67년 중앙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1학년을 마치고 양지에 들어가게 된다.
박이천은 69년부터 국가대표팀에서 뛰게 된다. 빠른 스피드를 바탕으로 오른쪽 윙어로 뛰게 된 박이천은 처음에는 조금 고생했으나, 영등포공고와 동북고에서 이미 발을 맞춰 본 이회택과의 호흡 등을 바탕으로 금세 국가대표팀에 자리잡게 된다. 그 계기가 된 70년 아시안게임에서 대한민국이 기록한 5골 중 2골을 득점하며 금메달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일본과의 4강전에서 연장 후반 9분 이회택의 패스를 받고 발리슛을 터트리는 등 활약했다.
72년 차범근이 합류해 오른쪽 윙이 되면서 박이천은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옮기게 된다. 이 때 열린 아시안컵에서 5경기 4골을 뽑아내는 절정의 활약을 과시했다. 1972년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에 주어진 단 한장의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놓고 벌여진 3차례의 경기 중 마지막 3차전에서는 정규풍과 함께 부상으로 빠지게 되며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74년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생활을 끝낸 박이천은 국민은행에서의 선수생활까지 끝내고 새로 창단한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의 감독을 맡게 된다. 그러나 78년 홍콩의 해봉 축구단에 입단한다. 선수로서의 생활과 홍콩에서의 생활에 차차 적응해 가던 중 아킬레스 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입는다. 여기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다시 2년 후인 사우스 차이나 AA 최초의 비 중국인 선수로 입단하게 되지만 허벅지 부상으로 고생하다 은퇴하게 된다.
3. 지도자 시절
잠시 개인사업을 하다가 86년부터 유소년 지도에 전념하게 되면서 1997년 U-20 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1승 제물로 생각했던 남아공과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 불안한 출발을 보이면서 이어 2차전에서는 프랑스에게 2-4[2] , 3차전이었던 브라질전에서는 무려 3-10[3] 의 어마어마하게 대패했던 쿠칭 참사 당시의 감독이었다.
부천 정명고등학교 감독직을 맡기도 했던[4] 박이천은 인천 유나이티드 창단 이후 인천의 기술고문직을 맡으면서 프런트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2006 시즌 종료 이후 장외룡 감독이 유학을 선택하자 2007 시즌을 대신 맡을 감독 대행으로 발탁되며 프로 무대에서 첫 감독 생활을 하게 된다. 박이천은 새로 영입된 '''데얀 다미아노비치'''와 김상록을 적극 활용하여 그간 수비를 중점에 두던 인천의 축구를 완전히 바꾸어 최고의 공격력을 지닌 팀으로 만들었다. 데얀, 김상록, 방승환이 이끄는 공격진은 많은 득점을 만들어냈지만, 반대급부로 수비는 아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인천은 재미있는 축구를 앞세워 괜찮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고, 2005 시즌에 이어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가능성도 보였지만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상대한 경기에서 에두와 임중용의 갈등에서 시작된 난장판의 여파로 주축 전재호와 방승환, 임중용이 징계를 당하고 구단 역시 벌금을 내는 등 큰 타격을 입었으며, 지속적으로 심판 판정에서 불이익을 받아 결국 7위로 시즌을 마치고 말았다. 시즌 종료 후 다시 장외룡 감독에게 감독직을 주고 본인은 부단장으로 보직을 변경하였다.
인천의 부단장으로 재직하던 박이천은 몇 년 후에 인천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며, 2010년대 중반으로 넘어와서는 청주CITY FC의 단장으로 재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