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에리 앙리

 


'''티에리 앙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릴리앙 튀랑
(2008)

'''티에리 앙리
(2008~2010)'''


파트리스 에브라
(2010)

'''아스날 FC 주장'''
파트리크 비에라
(2002~2005)

'''티에리 앙리 '''
'''(2005~2007)'''

윌리엄 갈라스
(2007~2008)

'''티에리 앙리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2003 · 2006
2001-02 · 2003-04 · 2004-05 · 2005-06
2003-04 · 2004-05
2002-03 · 2003-04
2003-04 · 2005-06




'''베스트팀'''
2001 · 2002 · 2003 · 2004 · 2006
2000-01 · 2001-02 · 2002-03 · 2003-04 · 2004-05 · 2005-06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UEFA 유로 역대 베스트 XI'''[64]


'''2003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지네딘 지단
2위
'''티에리 앙리'''
3위
호나우두
'''2004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호나우지뉴
2위
'''티에리 앙리'''
3위
안드리 셰브첸코
<color=#373a3c> '''2003 Ballond'or'''
수상
파벨 네드베드
2위
'''티에리 앙리'''
3위
파올로 말디니
<color=#373a3c> '''2006 Ballond'or'''
수상
파비오 칸나바로
2위
잔루이지 부폰
3위
'''티에리 앙리'''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1998'''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2000'''

'''티에리 앙리의 기타 정보'''




'''프랑스의 축구감독'''
''' 이름 '''
'''티에리 앙리''' '''LHC'''
'''Thierry Henry LHC[1]'''
''' 본명 '''
티에리 다니엘 앙리
Thierry Daniel Henry
''' 출생 '''
1977년 8월 17일 (46세) /
프랑스 일드프랑스 지방 에송 주 레쥘리스 군
''' 국적 '''
'''프랑스''' | 과들루프
''' 신체 '''
188cm|체중 85kg
''' 주발 '''
오른발 (양발)
''' 직업 '''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CO 레줄리 (1983~1989 / 유스)
US 팔레조 (1989~1990 / 유스)
ES 비리 샤티용 (1990~1992 / 유스)
클레르퐁텐 (1992 / 유스)
AS 모나코 (1992~1994 / 유스)
AS 모나코 (1994~1999)
유벤투스 FC (1999)
'''아스날 FC (1999~2007)'''
'''FC 바르셀로나 (2007~2010)'''
뉴욕 레드불스 (2010~2014)
아스날 FC (2012 / 임대)
''' 감독 '''
벨기에 대표팀 (2016~2018 / 수석코치)
AS 모나코 (2018~2019)
앵팍트 드 몽레알 (2019~2021)
''' 국가대표 '''
123경기 '''51골'''[2] (프랑스 / 1997~2010)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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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14번 (클럽)
12번 (국가대표)[65]
'''별명'''
킹 (King)

1. 소개
2. 유년기
3. 클럽 경력
3.3.1. 1999-00 시즌
3.3.2. 2000-01 시즌
3.3.3. 2001-02 시즌
3.3.4. 2002-03 시즌
3.3.5. 2003-04 시즌
3.3.6. 2004-05 시즌
3.3.7. 2005-06 시즌
3.3.8. 2006-07 시즌
3.5.1. 2012년: 다시 아스날로
3.5.2. 임대 이후
4. 국가대표 경력
5. 플레이 스타일
5.1.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의 부진?
6. 은퇴 이후
7. 지도자 경력
8. 기록
8.1. 대회 기록
8.2. 개인 수상
8.3. 수훈
8.4. 통산 기록
9. 앙리에 대한 말말말
10.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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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프랑스축구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2019년부터 앵팍트 드 몽레알 감독을 맡고 있다.
아스날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로, 아스날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2003-04 시즌 PL 무패 우승을 이끌었고 프랑스의 1998 월드컵 · 유로 2000 우승 및 바르셀로나의 2008-09 시즌 6관왕에 공헌하였다.

2. 유년기


1977년 8월 17일[3] 파리 근교 에손 주(L'Essonne)의 도시 레줄리(Les Uli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과들루프 출신에 어머니는 마르티니크 출신으로, 이민 2세다. 출생지가 빈민가 지역이라 성장 환경이 좋지 않았다고 하며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리면서 악명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3. 클럽 경력



3.1. AS 모나코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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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모나코 시절, 단짝 다비드 트레제게와 함께'''
1992년, 앙리는 클레르 퐁텐 축구 아카데미에 입단해서 두각을 나타냈고[4] 이듬해인 1993년 AS 모나코 유스팀에 들어갔다. 이때 모나코의 감독이 바로 그 유명한 '''아르센 벵거.'''[5]
앙리의 첫 프로 경기는 1994년 8월 31일 OGC 니스와의 경기. 다음달인 9월 17일에 벵거 감독이 해임되었지만 이후 감독들에게도 역시 신뢰를 받았다. 1996-97 시즌 모나코가 리그와 컵 더블을 하며 앙리 역시 커리어에서 첫 우승을 기록한다. 자국에서 열린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윙 포워드로 출전하여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 프랑스의 월드컵 우승에 기여한다.
1998년 월드컵의 우승 이후 1998-99 시즌 중반까지 다소 부진했고, 1999년 1월에 겨울 이적 시장에서 세리에 A의 명문 유벤투스로 향하게 된다.
앙리는 모나코에서 4시즌 반 동안 141경기에서 28골 3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2. 유벤투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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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델피에로가 시즌 아웃을 당하며 리그에서 부진하던 유벤투스는 1250만 유로라는 거금을 들여 앙리를 데려왔는데 '''망했어요'''. 앙리의 장점은 탁월한 돌파와 스피드였는데 유벤투스에서는 앙리의 스피드와 돌파력만 가지고 윙에 쳐박은 게 문제다. 모나코에서 데뷔할 때부터 앙리는 스트라이커로 데뷔했다.
이때 유벤투스의 감독으로 새로 부임한 인물이 카를로 안첼로티였는데 루치아노 모지에게 앙리가 스트라이커 롤을 소화 할 수 있냐고 물어보고 모지가 그냥 윙만 뛸 줄 안다길래 판매에 찬성을 했다. 참고로 안첼로티가 가장 후회하는 게 이때 앙리를 스트라이커로 써보지도 않고 팔아버린 것이라고.
유벤투스에서 앙리는 반 시즌 동안 16경기 3골이라는 다소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다. 팬들도 월드컵 거품이 껴있다고 비판을 가했고 앙리는 실의에 빠져있었다. 이 6개월이 앙리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유베도 끝내 리그에서 6등을 기록한다.
위기에 빠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물은 프로 데뷔의 은사인 아르센 벵거였다. 레알 마드리드니콜라 아넬카를 보내며 2000만 파운드가 넘는 어마어마한 돈[6]을 거머쥐고 있던 그는 의외로 세리에 A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던 윙어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3.3. 아스날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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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의 감독은 자신을 데뷔시켜준 벵거였고 이미 비에이라나 프티같은 프랑스 국대 동료도 있어서 적응이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 앙리를 가장 잘 서포트해줄 수 있는 데니스 베르캄프라는 테크니션도 있었다. 프리미어리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스피디한 리그여서 앙리와 쿵짝이 잘 맞았다. 이러한 점들이 앙리의 성공 요소로 꼽힌다. 아스날에서 앙리는 4차례의 득점왕을 차지했고, 03-04, 04-05, 05-06 시즌에는 3연속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EPL 득점왕은 판 니스텔로이가 단 한 번 페널티킥을 몰아차면서 25골로 득점왕을 한 번 한 2002-03 시즌 이외에는 모두 앙리가 차지했다.[7] 그나마 그 시즌도 득점왕 못 했다고 못한 것도 아니고 PK도 없이 24골 20도움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만들어냈다. 아스날도 앙리의 활약 속에 이 기간 동안 2번의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전설적인 무패 우승'''도 바로 이때. 2000년대 중반까지 말 그대로 아스날의 왕이자 EPL의 왕으로 군림했으며, 특히 아스날에서의 기록은 언터처블 그 자체. 앙리가 아스날에서 기록한 총합 ''226골''은 아스날 클럽 역사상 최다골이었다. 그리고 2012년 1월 10일 임대 확정 후 리그에서 1골, FA컵에서 1골을 추가하며 자기가 자기 기록을 경신 하였다.

3.3.1. 1999-0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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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 첫 8경기에서 득점을 뽑아내지 못하는 등 처음 몇 경기에서는 굉장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지만[8] 그냥 적응기였을 뿐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9월 초 사우샘프턴과의 아스날 역사 첫골을 시작으로 첫 시즌부터 20골을 넘게 득점했다[9].
벵거는 유벤투스에서 윙 포워드로 뛰던 앙리에게 스트라이커의 임무를 주고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아스날의 패싱 축구와 공간침투는 피지컬보다는 스피드에 의존하는 앙리에게 안성 맞춤이었다. 시즌 초반 비난했던 팬들도 어느새 인정하고 앙리의 플레이에 감탄만 했으며 훗날 아스날을 이끌어가길 바라게 된다.
아스날에서 첫 시즌 프리미어리그에만 31경기 17골을 기록했으며 전체 성적은 47경기에서 26골 1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지난 유벤투스에서의 모습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3.3.2. 2000-01 시즌


UEFA 유로 2000을 제패하고 개막된 아스날에서의 두 번째 시즌이며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동료들이 영입된다.
앙리와 함께 UEFA 유로 2000 우승의 주역인 실뱅 윌토르로베르 피레스가 아스날에 합류하면서 팀워크가 한단계 좋아졌다. 거기에 기존에 있던 데니스 베르캄프와의 호흡도 갈수록 좋아지면서 앙리는 팀 내 최다골을 기록했고 프리미어리그 득점 3위에 랭크된다. 두 시즌 연속 리그에서 17골을 기록했다.
다만 첫 시즌과 두 번째 시즌에 맨유의 기세가 너무 강할 때여서 아스날은 리그 우승 판도에서 잠시 밀려나있을 시기였기에 트로피와는 인연이 없었다.[10] 실제로 맨유와의 리그 8R 홈경기에서 맨유를 상대로 처음으로 1골을 넣고 비겼지만, 28라운드 원정에서는 1골을[11] 넣고도 1:6으로 학살당했다. 또한 본인도 첫 두 시즌은 득점왕과는 인연이 없었으며 이후에는 득점왕을 4번이나 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8강에서 발렌시아에게 패했다.
그래도 시즌을 통틀어 총 55경기(4,069분)에 나와 22골 11도움을 찍는 좋은 활약을 했다. 또한 이 시즌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1년 UEFA 올해의 팀PFA 올해의 팀에 동시 선정되었다.

3.3.3. 2001-02 시즌


아스날의 주장인 토니 애덤스가 은퇴하고 토트넘의 주장인 솔 캠벨이 자유계약으로 아스날로 온 시즌이다. 비에이라가 이때부터 주장직을 맡게 된다.
캠벨이 수비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아스날 역시 더 강해졌고 때맞춰 로베르 피레스가 적응을 끝마치고 엄청난 활약[12]을 보이며 앙리와 완벽한 호흡을 맞추었고 이는 아스날의 프리미어리그와 FA컵 더블을 기록으로 이어졌다. 비록 챔피언스리그에서 팀이 이기면 8강으로 가는 그룹 스테이지 마지막 경기에서 PK를 실축하며 탈락에 이바지했지만, 앙리는 맨유의 뤼트 판니스텔로이를 제치고 33경기 24골로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 7골을 넣으며 총 32골을 넣었다.[13] 또한 이 시즌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2년 UEFA 올해의 팀PFA 올해의 팀에 동시 선정되었다.

3.3.4. 2002-03 시즌


2002-03 시즌에도 아스날의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한창 전성기가 왔던 나이라 아스날은 그야말로 뽕을 뽑았다. 팀의 주포로서 열심히 활약하며 아스날을 먹여살리나 리그에서 막판 뒷심으로 맨유에게 역전 우승을 당했고,[14] 앙리 본인도 반니에게 득점왕을 내주었다.
하지만 24골 20어시스트로[15] 20-20을 달성하며 이전 시즌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였다. 토트넘전에서 80미터를 단독으로 질주해 골을 넣은 시즌이 백미. 득점왕이 유력했으나 뤼트 판 니스텔로이가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페널티 킥으로 한 골을 추가하며 아쉽게 1골차로 득점 2위에 머물렀다.[16] 하지만 PFA 올해의 선수 및 FWA 올해의 선수는 모두 앙리가 차지한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총 7골을 넣었다. 도르트문트와 아인트호벤에게 3골을 넣으며 그룹 스테이지로 무난히 올라갔다. 그룹 스테이지 1차전 로마 원정에서 3골을 넣는 최고의 활약을 했지만 이후 4경기에서 침묵했고, 6차전 발렌시아 원정에서 1골을 넣었지만 져서 탈락했다.
이 20-20은 앙리 이후 '''무려 16년동안 나오지 않고 있다가,''' 2020년 7월 12일 리오넬 메시가 앙리를 이어 20-20 달성에 성공하였다. 여기다 시즌 전체를 놓고 보면 32골 23어시스트로 더욱 무지막지하다.
이 시즌에서의 맹활약과 2003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의 골든볼과 득점왕 동시 수상을 한 맹활약으로 UEFA 올해의 팀PFA 올해의 팀에 동시 선정되는 것과 함께 발롱도르FIFA 올해의 선수상에서도 2위를 차지한다.

3.3.5. 2003-0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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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버리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넣은 골 장면.[17]
커뮤니티 실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골을 넣고도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시즌을 시작했지만 팀과 본인 모두 역대급으로 잘했고 이 시즌 리그에서의 아스날은 명실상부한 최고의 팀이었다. 본인은 공격포인트를 꾸준히 쌓았고 리그에서만 30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오르게 된다. 아스날은 이런 앙리를 앞세워 26승 12무로 무패 우승을 달성했고 이때의 리그 우승은 앙리 본인과 현재까지 '''아스날의 마지막 PL 우승이다.''' 여기에 PFA 올해의 선수, PFA 팬 선정 올해의 선수, FWA 올해의 선수, 프리미어 리그 시즌의 선수 등 리그 내 모든 개인상을 쓸어담은 것은 물론 유러피언 골든슈까지 수상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된다. 거기에 2004년 UEFA 올해의 팀PFA 올해의 팀 선정은 덤이다. 하지만 정작 2004년 발롱도르는 리그 우승과 득점왕에 그쳐 앙리보다 부족한 활약을 보인 안드리 셰브첸코가 수상했고 앙리는 4위에 그치고, FIFA 올해의 선수상도 무관이었던 호나우지뉴가 수상하고 앙리는 2위에 그치게 되면서 지금까지도 이 수상들은 큰 논란이 되고 있다.[18]
FA컵에서는 4강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했고, 챔피언스 리그는 8강에서 첼시에게 원정에서 비기고 홈에서 패하며 탈락했다. 이 시즌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총 3무 1패를 기록했는데 아스날 안티들은 무패이긴 해도 맨유에게 전적이 밀린다며 폄하한다.
시즌 기록은 51경기 39골 15어시스트.

3.3.6. 2004-05 시즌


아스날의 주장이었던 파트릭 비에이라가 2004-05 시즌을 예기치 않게 출발하자 앙리는 잠시 동안 주장 완장을 달게 된다. 맨유와의 커뮤니티 실드에서 승리하며 좋은 출발을 한 앙리는 시즌 초부터 골을 적립했다. 25골로 2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다. 앙리는 유럽의 모든 대회에서 31 골을 넣으면서, 골든 부트를 수상했다. 또한 PFA 올해의 팀에도 선정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FA컵 결승전에서는 이전에 당한 부상으로 뛰지 못했다.[19] 그래도 팀은 승부차기 끝에 우승하였고, 이는 앙리 본인 커리어의 3번째 FA컵 우승이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조별리그 3차전부터 4경기 연속골로 16강 진출에 기여했는데 16강 1차전 바이에른 뮌헨 원정에서 1:3으로 패한 터라, 홈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었지만 대회에서 탈락했다.

3.3.7. 2005-06 시즌


[image]
아스날의 옛 홈구장 하이버리에서의 마지막 시즌. 주장인 패트릭 비에이라가 유벤투스로 떠나면서 앙리가 새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첼시와의 커뮤니티 실드에서 1:2로 패배하며 시즌을 시작한 앙리는 10월 17일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프라하 원정경기에서 역전골을 터트리며 이안 라이트를 제치고 아스날 소속 185번째 골을 터뜨리면서 아스날 역사상 최다득점자가 된다.
2006년 2월 1일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와의 경기에서는 골을 터뜨리며 아스날의 전설 클리프 바스틴의 기존 기록을 깨고 리그 151골을 기록하면서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리그에서 27골로 3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다. 팀은 전술의 중심인 비에이라가 이적하면서 많이 약해졌고 마지막 경기에서야 겨우 4위를 할 수 있었다. 하이버리 경기장에서의 마지막 경기인 프리미어리그 38라운드 위건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승리를 거두었으며, 팀을 리그 4위로 마무리지으면서 챔스권 진입에 안착시켰다. 이 경기에서 마지막 PK골을 넣고 잔디에 키스하며 자신의 전성기와 함께한 하이버리 경기장에 작별을 고했다. FA컵은 4라운드 볼턴 원더러스 원정에서 패하며 탈락.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유벤투스, 레알 마드리드 같은 강호들을 차례로 꺾으며 결승에 진출한다. 특히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진을 농락하며 기록한 골은 진정 끝판왕의 포스. FC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에서는 옌스 레만이 18분 만에 퇴장당하면서 수적 열세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솔 캠벨이 선취골을 기록하는 데 성공했지만 끝내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앙리 역시 발데스와의 일대일을 놓치고 기회를 날리는 등 잘했다고 보긴 무리인 경기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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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이어를 놓치고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메달을 받고 내려가는 앙리.'''
이 시즌의 활약과 직후 이어진 2006 독일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으로 이후 2006년 FIFPro 월드 XIUEFA 올해의 팀에 공격수로 뽑힌다. 거기에 PFA 올해의 팀에도 선정이 된다. 한편, 시즌 후 아스날에서 무관으로 인해 바르셀로나가 2천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제안했지만 아스날의 구단주가 거절했다는 등의 많은 이적설이 떠돌았으나, 앙리는 4년 재계약을 맺고 아스날에 남는다.

3.3.8. 2006-0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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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의 새로운 구장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의 첫 시즌. 그리고 앙리의 아스날 커리어 마지막 시즌.
앙리가 최고 선수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자 큰 힘이었던 동료들은 에미레이츠 이전 정책으로 구단이 긴축재정에 들어감에 따라 어쩔수 없이 하나둘 정리되고 있었다.
비에이라와 에두는 이미 떠났고 베르캄프는 하이버리 경기장과 함께 은퇴했고[20] 피레스는 비야레알로 갔다. 주전경쟁에서 밀려난 솔 캠벨은 포츠머스로, 애슐리 콜은 첼시로 떠났다. 기대를 많이 받던 호세 레예스도 프리미어리그에 끝내 적응하지 못하며 임대형식으로 스페인으로 떠난다. 프레드릭 융베리는 예전같지 않았다. 팀은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주축으로 미래를 기약하고 있었다.
베르캄프와 피레스 등과 환상의 궁합을 보이던 앙리는 젊은 선수들과의 호흡에는 다소 문제를 보였다. 사실 호흡은 그럭저럭 맞았는데 문제는 베르캄프나 비에이라 같은 선수들과 너무 잘맞아서 상대적으로 안 맞아보였다는 것이다.
원래 본인이 워낙 벤치에 앉아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크지 않은 부상을 입었을 때는 출전을 강행했고 국가대표팀에서의 혹사 또한 이어졌다. 선수 본인도 최근 몇 년간 많은 경기를 뛰었고, 또 스피드와 활동량을 주무기로 하기에 신체적인 노쇠화가 점점 진행 중인 상태였다. 게다가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결승전까지 올랐으니 시즌 초반의 부진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였다. 결국 2007년 3월 챔피언스리그에서 당한 부상으로 인해 시즌 아웃되어 전력에서 이탈했다.[21]
시즌이 끝나고 무한도전을 찍었다. 당시 개인 전용기로 밤에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는데 한국의 아스날 팬사이트인 ‘하이버리’에서 버스를 빌려 30명 정도가 앙리를 열렬히 환영하기도...당시만 해도 아스날 소속이었는데 얼마 후 앙리가 바르셀로나로 떠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오게 된다. 구너들은 당연히 결사 반대를 외치는 중.
하지만 앙리는 챔스 우승권의 팀중에 호나우지뉴, 메시, 에투가 있던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된다. 벵거도 앙리의 피지컬이 떨어지고 있었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대한 열망을 알고 있었기에 이름값에 비해 싼 가격인 2천 4백만 유로에 이적을 허락했다. 다음 시즌 구상하는 새로운 팀에 앙리가 적응을 하지 못한다고 판단하며 그를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22] 프리미어리그, FA컵, 유럽선수권대회, 월드컵 등 거의 대부분의 우승컵을 들어올린 앙리에게 남은 것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었다. 아스날은 그 전에 빅이어를 들어올릴 절호의 찬스를 놓쳤고 경기장 이전으로 인한 재정 긴축정책 때문에 당분간 팀전력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앙리의 아스날 생활이 마무리 되었다. 369경기 226골. 이 기록은 몇 년 후에 임대 생활을 통해서 업데이트된다.

3.4. FC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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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5일 이적료 2400만 유로에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바르셀로나 입단 이후 등번호는 기존의 14번을 그대로 달았다.
당시 메디컬 체크에서 바르셀로나 의료진에게 "'''이 몸으로 어떻게 축구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앙리의 몸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라는 이야기가 돌곤 하는데, 이런 식의 이야기는 선수 이적 시 선수 당사자의 사기진작(?), 언론 플레이 등의 이유로 나오는 이야기라 엄청나게 과장된 이야기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아르연 로번의 경우를 예를 들면 그가 첼시에서 레알 마드리드, 레알 마드리드에서 바이에른 뮌헨으로 옮길때마다 새 소속팀의 의료진은 전 소속팀 의료진의 선수 관리 수준을 폭풍 디스 하였다. 역시나 바르셀로나 이적 후 앙리는 '''그 엉망인 몸으로(?) 상대편 수비진을 피지컬로 압도하는 플레이를 자주 선보여줬다.''' 위 서술대로 축구를 못 할 몸이었으면 전혀 불가능할 일. 물론 부상을 안고 뛰면서 몸에 부하가 심하게 걸렸던 건 맞다. 아스날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날리다시피한 건 이 때문이다.

3.4.1. 2007-08 시즌


9월 19일에 펼쳐진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1라운드 리옹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면서 바르사에서의 첫 골을 넣었다. 이후 약 1주 뒤, 레반테와의 리그 경기에서 바르사에서의 첫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부상으로 자주 빠지는 사무엘 에투 때문에 공격진에 구멍이 생겼으나 리오넬 메시와 함께 그래도 어느 정도 메꿔냈다. 팀은 부진하나 그래도 본인은 어느 정도 본인의 이름 값을 해 주었다. 하지만 앙리는 아스날에서와는 달리 주로 윙어로 출전한지라 아스날에서 보여준 만큼의 득점력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전성기에서 내려오기도 했고...
결국 리그 30경기 12골 10도움을 기록하고 챔스에서도 그럭저럭 괜찮은 활약을 보였으나 무관에 그쳤다. 전체적으로 팀이 침체했던 시즌이었으며 본인 또한 아스날 시절만큼의 압도적인 면모는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내 최다득점과 최다도움을 기록했다.
'''2007-08 시즌: 49경기 19골 12도움'''
라리가: 30경기 12골 10도움
UEFA 챔피언스 리그: 10경기 3골 2도움
코파 델 레이: 7경기 4골

3.4.2. 2008-09 시즌


2008/09시즌에는 이전 시즌보다 나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에투또한 지난 두 시즌과 달리 건강한 모습이었다. 메시는 각성하여 최고의 선수가 되었기에 최강의 공격진을 구축했다. 역대급 시즌을 보내고 있으며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와의 격차를 매우 크게 벌렸다.[23]
앙리의 움직임 자체는 예전 전성기만 못했지만 골 결정력은 살아 있어서 바르셀로나의 왼쪽 윙어로 출전하면서 티에리 앙리-사무엘 에투-리오넬 메시의 공포의 H-E-M 삼각편대를 구성하면서 셋 다 엄청난 '''스탯놀이'''를 했다. 다만 앙리 팬들에게 아쉬운 점이라면, 왼쪽 윙어로 뛰던 점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벤투스 때와는 달리 원숙해진 앙리는 윙어로도 준수한 활약을 보였다는 점이다.[24]
앙리는 특히 엘클라시코 같은 큰 경기(6대2 승)에서 활약하며 과르디올라의 팀 구상에 꼭 들어가는 선수였다. 리그에서 29경기 19골을 기록하며 전 시즌보다 나은 모습을 보였고 챔스에서도 6골을 기록한다. 리그와 국왕컵을 우승했으며 챔스 4강에서 첼시를 상대로 논란의 2차전에서 이니에스타의 골로 결승에 진출하게 되며 한 때 자신이 뛰었던 아스날의 라이벌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만나게 되었다.
결국 2008-09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풀이에 성공한다. 앙리는 이 시즌 26골을 기록하면서 바르셀로나의 트레블을 넘은 6관왕이란 대업에 기여한다. 이 때의 앙리-에투-메시 공격진은 바르사 역사상 MSN 다음의 최고의 공격진으로 꼽힌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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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이후 꿈에 그리던 빅 이어를 만지며 기뻐하는 앙리의 모습.'''
'''2008-09 시즌: 42경기 26골 11도움'''
라리가: 29경기 19골 7도움
UEFA 챔피언스 리그: 10경기 5골 3도움
UEFA 챔피언스 리그 3차 PO: 2경기 1골 1도움
코파 델 레이: 1경기 1골

3.4.3. 2009-10 시즌


하지만 2009/10 시즌에는 폼이 너무 하락한 데다[26] 페드로 로드리게스, 보얀 크르키치 등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신예들과 경쟁해야했고 결국 페드로에게 밀려났다.[27]
피지컬 하락에 따른 노쇠화의 진행과 신예들의 성장으로 자리를 잃은 앙리는 2009/10시즌 모든 대회 합쳐서 10골도 기록하지 못했고 2010년 바르셀로나가 스페인 국가대표 공격수인 다비드 비야를 영입하면서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앙리는 2010년 여름, FC 바르셀로나에서 미국 MLS의 뉴욕 레드불스로 이적한다.
'''2009-10 시즌: 32경기 4골 4도움'''[28]
라리가: 21경기 4골 3도움
UEFA 챔피언스 리그: 6경기 1도움
코파 델 레이: 1경기
FIFA 클럽 월드컵: 1경기
UEFA 슈퍼컵: 1경기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경기

3.5. 뉴욕 레드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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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즌 활약은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이후 18경기 동안 11골을 넣고 주장까지 하며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증명했다. 미국에선 헨리라고 부르는 듯. (…)[29]

3.5.1. 2012년: 다시 아스날로


2012년 1월부터 아스날로 2개월간 단기 임대가 확정되었다. 이로서 5년 만에 자신의 최전성기를 누렸던 팀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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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 FA컵에서 리즈 유나이티드를 만나 자신의 '후계자' 시오 월콧과 나란히 교체 출전하였고 0:0으로 답답하던 상황에서 78분 경 '''결승골'''을 뽑아냈다. 스피드는 느려졌지만 오프사이드를 뚫는 순간적인 움직임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슈팅으로 역시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왕의 귀환'''. 더불어 기록은 현재진행형. 다만 선수들과의 호흡 자체는 아직 완벽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앙리 본인 탓이라기보다도 팀 호흡 자체가 그리 잘 맞고 있지 않는 아스날이긴 하지만. 블랙번을 7-1로 폭격한 앙리의 마지막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경기에서 팀의 7번째 골을 기록했는데[30]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은 축제분위기였다고 한다. 그 직후 2월 12일에 열린 리그 25 라운드 선덜랜드 AFC 원정에서 인저리 타임에 극적인 역전골을 작렬하여 2:1 승리에 기여했다. 이로써 자신의 프리미어리그 통산 득점 기록도 1골 더 올려놨다.[31] 아스날 통산 376경기 228골 92어시스트.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던 시점이라 선수로서 아스날에 올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고 이 기록이 사실상 아스날의 최종 기록이라고 보면 될 듯.

3.5.2. 임대 이후


아스널 임대기간 동안의 활약에 고무됐는지 2012시즌엔 2011년보다 한층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준 편이다. 시즌 성적은 25경기 15골 12어시. 물론 아스널 리즈시절에 비하면 좀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수는 없다.
이후 2013시즌과 2014시즌 모두 리그 30경기 출전 10골을 기록했다
2014 시즌 이후 레드불스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 것이고 팀을 떠날 것이라고 한다. 2014 MLS 시즌 종료 이후 앙리는 선수생활 연장 대신 현역에서 은퇴하기로 결정하였다. 기사

4.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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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청소년 대표로 유럽 청소년선수권대회 우승 트로피를 안겼고, 1997년 FIFA U-20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며 세계적으로도 유망한 선수로 인식된다.[32]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티에리는 96년 프랑스 풋볼에서 선정한 올해의 유망주상, 97년 프랑스 프로축구협회에서 선정한 올해의 유망주상을 수상하면서 프랑스 최고의 유망주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이후 뽑힌 국가대표에서의 활약도 준수한 편으로, 프랑스가 세계 최강 자리를 노리고 있을 그 때, 자국에서 열린 1998 월드컵에 참가하였다. 주전 공격수는 스테판 기바르쉬였지만, 기바르쉬가 한 골도 못넣은 것과는 달리 앙리는 3골을 넣어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그래서 월드컵 이후로 국가대표팀의 주전 공격수가 되었다. UEFA 유로 2000에서도 역시 3골을 기록해 팀의 우승을 견인했다.
2002년 월드컵 역시 1998 월드컵 우승 멤버에 앙리의 전성기까지 더해져 당연히 우승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팀은 처참하게 굴욕당했고 앙리 본인도 2차전 우루과이에서 전반에 위험한 태클로 다이렉트 퇴장 당한 탓에 3차전까지도 출장 정지로 나오지를 못했다. 대회 시작 전에는 득점왕 후보 중 1명으로 꼽혔지만,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씁쓸하게 짐을 싸야만 했다. 대부분 좋은 모습을 보여주던 전성기에 남아있는 큰 오점. 한 골도 못 넣었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을 기록하였다. 조별리그에서 토고한국을 상대로 각각 한골을 기록, 8강 브라질에서는 지네딘 지단의 세트피스 크로스를 논스톱 다이렉트 슛으로 득점[33]에 연결하여 호나우두의 커리어 마지막 월드컵을 종료시켰고, 4강 포르투갈은 문전상황에서 PK를 유발하여 결승골을 유도하였다. 이에 대한 공헌으로 인해 클로제와 함께 월드컵 베스트 XI에 뽑혔다.
1998 월드컵에서는 대단한 활약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격수 중 최다 득점자/최장 시간 출장자가 앙리.[34][35] 트레제게와의 조합은 이론상 완벽했지만[36][37] 현실은 시궁창으로 트레제게는 앙리에게 밀려 로테이션으로 활약했으며, 투톱으로 나오는 경기에서는 둘다 부진하는 등 궁합이 좋지 못했으나, 이상하게 비에이라-마케렐레의 중앙라인처럼 뛰어난 조합인 듯 평가 받았다.[38]
센추리클럽 멤버이며, 2007년에는 미셸 플라티니가 가지고 있던 국가대표 최다골 타이틀을 경신해버렸다. 123경기 51골.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유럽대륙 플레이오프 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프랑스의 결승골을 만드는 과정에서 핸들링을 했는데, 심판이 이걸 골로 인정하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프랑스는 이렇게 본선에 올라가놓고서도 우루과이와 비겼을 뿐 나머지 두 팀에게 연달아 패배하면서 탈락했다. 이에 아일랜드 언론은 일제히 "프랑스 탈락은 쌤통이다."라며 대서특필했다. 쌤통 항목에 이 문단의 글귀가 그대로 적혀 있다.
앙리 본인은 경기 후에 핸들링임을 인정하긴 했지만 '''해결책은 재경기밖에 없다'''라 말하면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얼렁뚱땅 넘어가는 듯한 태도를 보여 전세계적으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한동안 아일랜드에서는 앙리를 죽입시다 앙리는 나의 원수 후덜덜한 분위기가 계속되었으며 급기야 수상까지 프랑스 대통령에게 재경기를 요청하는 사태까지 가고 말았다.
지단 이후의 프랑스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팀은 팀대로 막장의 끝을 보여주면서 '''예선 무승 탈락'''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나마도 앙리가 활약할 수 있는 기회조차 별반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워낙 막장으로 굴러가는 와중에 아오안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국가대표 은퇴 선언.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로서는 여러모로 안습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5. 플레이 스타일


무지막지하게 빠른 스피드와 파워를 겸비한 돌파와 공간침투, 그에 이은 골 결정력도 탁월해서 수 차례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어시스트 능력도 있어서 20-20 클럽에 가입하기도 했다. 특히 '앙리 존'이라고 불리는 골포스트 오른쪽 공간에서의 측면 오른발 감아차기는 당대 최고 수준으로 꼽힐 만큼 명품 슈팅으로 수많은 골을 만들어냈다. 부드럽고 정확한 슛으로 유명했으며 다비드 비야 못지 않은 침투력으로 1대1 상황을 만들고 골키퍼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구석에 꽃아버리는 킥이 일품이였다. 프리킥도 매우 잘 찼다. 그러나 몸으로 버텨주는 능력이나 공중전 능력은 좋지 못했다. 188cm에 80kg대 중후반의 체중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의외인 부분이다. 앙리는 프리미어리그 통산 174골을 기록했는데, 이 중 헤딩골은 고작 6골 뿐이다. 실제로 앙리는 중앙에서 버텨주기보다는 측면에서 스리슬쩍 서 있다가 엄청난 스피드를 이용해 중앙으로 밀고 들어오는 패턴이 많았다.[39] 이와 같은 문제 때문에 국가대표에서는 클럽에서의 위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적었다.[40] 지단과 동선이 겹치는 측면이 있기도 했고.[41]
그리고 베르캄프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원래부터 테크닉이 대단해서 자연스럽게 된 것인지 몰라도 플레이메이킹에도 상당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스날이 베르캄프 & 앙리 시절부터 ~ 페르시 & 아데바요르 시절까지 4-4-2를 구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재다능한 공격수의 존재가 컸는데 그 시발점이 된 선수이기도 하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좌우 윙어들과 콤비네이션이다. 피레스나 융베리가 어그로를 끌면 그 공간에 앙리가 침투해서 득점을 한다거나, 그 역의 상황이 나오던가 하는 방식으로 득점을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현재 4-3-3이건 4-2-3-1에서 주로 보여주는 2선 윙어의 원형이라고 봐도 될 플레이를 한게 바로 과거의 아스날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앙리와 베르캄프가 있었다.
참고로, 과거에는 이 롤을 베르캄프가 홀로 담당하였다. 이안 라이트나 아넬카도 EPL 탑클래스의 선수이지만, 앙리처럼 경기 자체를 조율한다기 보다는 적극적인 침투로 득점에 강한 선수들이였다. 실제로 베르캄프는 자신의 파트너로 앙리보다 아넬카가 더 직선적이어서 좋았다고 말한 적도 있다.
앙리의 02/03시즌 20-20기록은 심지어 EPL 어시스트 룰이 개정된 이후로도[42] 그대로 20어시스트로 기록되어있는것으로, 전부 오픈 플레이에서 나온 어시스트라는 점에서 한층 더 대단한 기록이다. 측면에서 축구를 시작한 만큼 욕심을 부려서는 안된다는 사고방식이 생겼으며, 득점을 할 때 보다 어시스트를 기록할 때가 더 짜릿하다고 할 정도. 다만 이 때문에 공격수임에도 불구하고 득점 찬스에서도 동료를 찾는다는 비판이 있기도 했다.#
현존하는 스트라이커들 중에서는 오바메양과 도르트문트 시절 레반도프스키가 이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폭발적인 스피드와 공간침투를 오바메양이 닮았다고 한다면, 전체적인 플레이 스타일이나 다양한 지점에서 득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레반도프스키가 많이 닮고 있다.

5.1.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의 부진?


앙리의 챔스 통산 기록은 13시즌 120경기 50골(토너먼트 12골)이다. 수치상으로는 훌륭하지만 위상에 비해 순도가 떨어져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일단 토너먼트에서의 득점이 적고, 소위 클러치 상황이라 부를 때 결정적 기회를 여러번 날렸다. 결승전에서 득점이 없고[43] 4강에서도 1골밖에[44] 넣지 못했다. 지금부터 사례를 살펴보자.
  • 2001-02 시즌 그룹 스테이지 4[45] 유벤투스전에서 이기면 팀이 8강으로 가는 상황에서 52분에 PK를 날렸고 팀은 76분에 실점하며 그대로 탈락했다.
  • 2002-03 시즌 그룹 스테이지 2에서도 6경기를 풀타임 출전했지만 팀은 탈락했다. 이때 앙리는 AS 로마를 상대로 3골을 기록하며 이겼지만, 다른 5경기에서는 발렌시아에게 1골을 넣은 게 전부였고 그나마도 졌다.

  • 2003-04 시즌 16강에서 셀타비고에게 2골을 넣었지만, 첼시와의 8강에서[46] 170분이나 나왔지만 무득점에 기회를 여러 차례 날렸다.
  • 2005-06 시즌엔 조별리그, 16강 레알 마드리드전, 8강 유벤투스전에서 골고루 득점하여 총 4골을 넣었지만 정작 결승전에서 프리킥 어시스트를 제외하고 2번의 1대1 찬스를 날리며 그대로 패배했다.
  • 2008-09 시즌에는 우승을 차지했다. 앙리는 리옹과의 16강전 2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캐리했지만 8강부터 넣은 골은 뮌헨과의 8강 1차전에서 팀이 3:0으로 앞선 상황에서 넣은 1골이 전부였다.

6. 은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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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팀 아스날에서 아르센 벵거 감독의 지도 아래 코치 연수를 받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으나, 일단 영국 스카이스포츠에서 게리 네빌제이미 캐러거와 함께 축구 방송 중계를 한다고 밝혔다. 스카이스포츠와 코치직 겸직을 가능한 계약을 맺었기에 웨일즈 축구협회에서 지도자 라이선스를 취득하기 위한 연수를 받기 시작했고, 2015년 2월 20일부로 아스날의 U-16 팀 코치에 부임했다.
월드컵 기간에 BBC에 분석가로 출연했지만, 스카이 스포츠가 워낙 거액을 베팅해서 스카이스포츠로 가게 되었다. 기존 스타 분석가인 게리 네빌이나 제이미 캐러거보다 두 배가 넘는 연봉을 받는다.
해설가를 맡은 이후 문제가 될 만한 발언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몇 번 있다. 치차리토가 극적인 골을 넣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세리머니를 하자 도움을 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챙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는데, 별 문제 없지 않느냐는 의견이 우세했다. 최근엔 첼시가 최근에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한 팀들 중 최고 수준이 아니었다고 비꼬았다. [47] 친정팀인 아스날의 스트라이커인 올리비에 지루에 대해서는 영입으로 대체가 필요하다고 해 구너들의 갑론을박을 불러일으켰다.[48] 어쩌다 보니 2015년 후반기에 들어서 거의 맞는 말로 판명이 되었다(...). 물론 첫 사건인 치차리토와 호날두 사이는 여전히 그냥 상관없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나 첼시가 진짜 몰락했고 지루도 탄식형 스트라이커로 각성하면서 뒤의 두 사건은 어느 정도 맞는 말임이 증명되어 버렸다. 물론 이러한 팩트폭력이 팬들에게는 사이다이긴 한데 듣는 선수들 입장에선 몹시 쓰라린 법. 2017년 여름에는 옥병장의 리버풀 이적을 두고 리버풀이 뭣하러 저딴 무장점 선수한테 거액을 쓰냐 깠는데, 부들부들하던 옥병장은 시행착오 끝에 리버풀에서 '''옥황상제'''로 업그레이드하고는 앙리를 까기도 했다. 비난이라기보다는 대충 "형이랑 같이 뛴 동생한테 어쩜 그런 소리까지 할 수가 있어요???" 하는 눈물나는 읍소...인터뷰를 보면 맨유 출신 축알못한테도 똑같이 까였건만 별말 없는 걸 보면 앙리는 자기가 아스날에서 갓 데뷔했을 때부터 함께 뛰었던 대선배였기에 쓴소리를 듣자 상심도 컸던 모양. 대신 나중에 리버풀에서 옥스의 활약은 훌륭하다며 극찬했고 "사람들이 내가 한 말을 오해하는데 나는 옥스가 아스날에서 그냥 맞지 않았던 선수라고 얘기했던 것 뿐이다. 리버풀에서는 그가 최고로 활약할 수 있는 롤을 알아냈고 그는 훌륭한 활약을 하고 있다"며 옥스를 비난했던게 아니라고 했다. #
2016년 3월에는 'UEFA A 라이선스'를 취득하였다. UEFA A 라이선스는 국가대표팀을 맡을 수 있는 최고 레벨의 축구 코치 라이선스 중에 하나이다. 최고 라이선스인 만큼 기존의 Level 1, 2, 3와는 달리 코스도 Part 1(12일), Part 2(8일)로 나누어져 있으며, 보통 2년 동안 진행된다. 앙리와 함께 교육을 수강했던 스완지 시티 레전드 윌 폴리가 현지 언론을 통해 "A급 자격증은 1년 동안 180시간의 강의를 수료해야 취득할 수 있다. TV 해설과 외부 활동으로 바빴던 앙리가 이렇게 빨리 자격증을 획득할리 없다”라고 문제를 제기했었다. 폴리는 "앙리가 B급 라이선스를 취득하면서 동시에 A급에 필요한 자격을 충족시킨 것은 어려운 일이다”라며 “교육을 주관했던 웨일스축구협회(FAW)는 앙리가 유명인사라는 점을 고려해 특혜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밝히기도해서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이후 아스날의 U-18 팀 코치 제의를 받았으나 방송 활동에 제한을 건다는 이유로 거절한 후, 2016년 8월 26일 로베르토 마르티네스가 새로운 사령탑으로 부임한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로 부임하게 됐다.
한편 스카이스포츠의 해설위원도 겸직하고 있는 앙리는, 9월 19일 프리미어 리그 5라운드 토트넘 홋스퍼 FC선덜랜드 AFC의 경기를 보고 손흥민이 토트넘에서 활약할 만한 선수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참고로, 다른 해설가들과 달리 감독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 점 때문에 축구팬들에게 게리 네빌이나 캐러거보다 아쉽다는 평을 들었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 알려진 이후에[49] 앙리처럼 감독의 분야는 쉽게 비판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50] 다만, 그 점때문에 해외팬들에게는 게리 네빌이나 캐러거급의 해설가로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그리고 벨기에 수석 코치를 하면서 많은 것을 느꼇는지 몰라도, 마침내 감독직을 위하여 해설 위원직을 벗기로 결심하였다.

7. 지도자 경력



7.1.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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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코치로 처음으로 맞는 2016년 9월 2일 3시 45분(한국시간)에 보두앵 국왕 경기장(King Baudouin Stadium)에서 열린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A매치 평가전에서 벨기에 대표팀은 다비드 실바에게 멀티골을 내주며 0:2로 패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벨기에의 4강 진출을 도왔다. 4강 맞대결 상대가 프랑스. 조국과의 경기에서 앙리가 카메라에 잡힐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벨기에는 프랑스에게 1:0으로 패했다.
그리고 이때 느낀 바가 있는지 몰라도, 겸직으로 있었던 방송국 해설자 자리를 벗게 되었다. 기존 국대 코치직만이라면 굳이 옷을 벗을 필요가 없었는데, 굳이 벗은 것으로 봐서는 본격적으로 감독직을 맡으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현재 백수인 아르센 벵거와 함께 본격적으로 클럽에서 감독 연수를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때 FC 지롱댕 드 보르도 감독 부임이 유력시 되었으나 최종적으로 거절함으로서 무산되었다.

7.2. AS 모나코 FC 감독


2018년 10월 13일, AS 모나코 FC 감독으로 부임했다. 기사 계약기간은 2021년까지 3년간이다. 레오나르두 자르딤을 경질한 AS 모나코아스톤 빌라가 앙리에게 접근했으나, 앙리는 AV를 거절하고 모나코와 합의한 것이다. 기사
감독 데뷔전이었던 리그 1 10라운드 RC 스트라스부르전에서 1-2 패배를 거두었다.
이어진 디종 FCO와의 리그 경기와 클럽 브뤼헤 KV와의 챔스 조별 예선 3차전에서 각각 2-2와 1-1로 연달아 비겼다. 이후 스타드 드 랭스와의 리그 경기에서 0-1로 패하더니 챔스 조별 예선 4차전에서는 조에서 최약체라고 평가받은 클럽 브뤼헤 KV에게 4골을 내주며 4-0으로 대패했다. 감독 부임 이후 5경기에서 2무 3패 4득점 10실점을 기록하며 처참한 첫 한 달을 보내고 있다. 더군다나 11월 A매치 휴식기 전에 갖는 마지막 리그 경기에서 파리 생제르맹 FC를 만나 0-4로 대패했다.
바로 다음 경기 캉 원정 에서 1-0으로 신고하며 첫승을 신고하였다. 이후 몽펠리에에게 1-2 패배 후 강등권에 턱걸이하고 있던 아미앵 원정에서 2-0으로 승리하며 격차를 조금씩 좁히고 있다.
17라운드가 끝난 현재 모나코는 승점 13점으로 19위에 위치해 있으며, 17위 아미앵과는 3점차다.
모나코에 부임할 당시 모나코의 부상자 수는 무려 '''13명'''이나 되었다. 주전, 비주전 할 것 없이 스쿼드가 초토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경기력이 너무 안 좋다. 더구나 18라운드에 주전을 여럿 가동한 스쿼드를 썼는데도 리그 최하위인 갱강한테 홈에서 2대 0으로 완패당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결국 1월 24일, 부임 후 4개월 만에 감독직에서 직무 정지되면서 사실상 경질되었다. 후임으로는 '''또''' 레오나르두 자르딤이 임명되었다.
앙리가 첫 감독직을 처참한 실패로 마무리 짓게된 이유로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자신의 선수 시절 역량과 현 선수단의 역량 차이를 생각하지 못하고 동일시한 점이 가장 크다. 스타 출신 감독이 실패하는 이유로 위와 같은 이유가 많이 꼽히고 있는데 앙리도 이와 비슷한 테크를 타면서 물러났다.
실제로 앙리는 선수들이 부족한 플레이를 펼칠 때 마다 공개석상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투로 선수들을 비판했는데 이는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 감독이 됐을때 범하는 실수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대외적으로 선수 플레이에 대한 비판을 일삼다 보니 선수들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은 당연지사고 성적도 악화일로를 걸어 결국 초라하게 경질되며 AS 모나코 감독 생활을 끝내야만 했다.
다만, 같은 선수시절 동료이자 호흡을 맞췄던 지단은 똑같은 환경에서도 전혀 다른 성적을 내며 레알마드리드의 명장이 되었기에, 비교가 되며 까이고 있다.
더 자세한 것은 한준희와 장지현이 분석한 '104일 천하' 앙리 감독의 리더십의 문제는?을 보면 앙리 감독의 실패 이유를 분석했으니 참고.
여담으로 프랑스 풋볼에서 4월 1일 발표된 2018-19 시즌 축구 감독 연봉 순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디에고 시메오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前 감독이었던 주제 무리뉴에 뒤를 이어 3위를 차지하면서 사람들을 약간 놀라게 했다.#

7.3. 앵팍트 드 몽레알 감독


모나코에서의 치명적인 실패로 당분간 감독직 복귀가 어려우리라 예상되었지만, 2019년 11월 14일(현지시각), MLS의 앵팍트 드 몽레알(몬트리올 임팩트)에서 앙리가 신임 감독으로 부임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임기는 2020년부터 2년동안이며 2022년에 계약 연장을 할지 선택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2021년 2월 잉글랜드 챔피언십의 AFC 본머스에서 감독 제의를 받았다. 2021년 2월 26일, 앞으로는 런던에 사는 자녀들에게 충실하고 싶다며 사임 의사를 밝히고 앵팍트 드 몽레알과 상호 합의하에 계약을 해지했다. 그래서 잉글랜드 내 리그 감독 복귀설이 더더욱 신빙성을 얻고 있다.

8. 기록



8.1. 대회 기록



8.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위: 2003; 3위: 2006
  • 발롱도르 드림팀 3군: 2020
  • FIFA 올해의 선수 2위: 2003, 2004
  • FIFA 100: 2004
  • FIFA FIFPro 월드 XI: 2006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6
  • UEFA 올해의 팀: 2001, 2002, 2003, 2004, 2006
  • UEFA 올해의 궁극적인 팀: 2015, 2017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0
  • UEFA 유로 올타임 XI: 2016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골든볼: 2003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골든슈: 2003
  • 유러피언 골든슈: 2003-04, 2004-05
  • 프리미어 리그 시즌의 선수: 2003-04, 2005-06
  •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2001-02, 2003-04, 2004-05, 2005-06
  • 프리미어 리그 도움왕: 2002-03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2000년 4월, 2002년 10월, 2004년 1월, 2004년 4월
  •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베스트 XI[51]: 2002
  • 프리미어 리그 20주년 베스트 XI[52]: 2012
  • PFA 올해의 선수: 2002-03, 2003-04
  • PFA 팬 선정 올해의 선수: 2002-03, 2003-04
  • PFA 올해의 팀: 2000-01, 2001-02, 2002-03, 2003-04, 2004-05, 2005-06
  • PFA 세기의 팀[53]: 2007
  • FWA 올해의 선수: 2002-03, 2003-04, 2005-06
  • ESM 올해의 팀: 2003-04
  • BBC 올해의 골: 2002-03
  • 디비지옹 1 올해의 영플레이어: 1996-97
  • 코파 델 레이 득점왕: 2007-08
  • MLS MVP: 2013
  • MLS 베스트 XI: 2011, 2012, 2014
  • MLS 올스타: 2011, 2012, 2013, 2014
  • MLS 이달의 선수: 2012년 3월
  • 옹즈도르: 2003, 2006
  • 옹즈 드 옹즈: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 프랑스 올해의 선수: 2000, 2003, 2004, 2005, 2006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8
  • lFFHS 올해의 골: 2003
  • lFFHS 세계 최고 득점자: 2003
  • 타임 100: 2007

8.3. 수훈



8.4. 통산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대륙대회

경기
득점
어시
경기
득점
어시
경기
득점
어시
경기
득점
어시
1994/95
AS 모나코
리그 1
8
3
1
0
0
0
0
0
0
8
3
1
1995/96
AS 모나코
리그 1
18
3
5
3
0
1
1
0
0
22
3
6
1996/97
AS 모나코
리그 1
36
9
8
3
0
1
9
1
4
48
10
13
1997/98
AS 모나코
리그 1
30
4
9
5
0
2
9
7
1
44
11
12
1998/99
AS 모나코
리그 1
13
1
3
1
0
0
5
0
2
19
1
5
합계
AS 모나코
리그 1
105
20
26
12
0
4
24
8
7
141
28
37
1998/99
유벤투스 FC
세리에 A
16
3
2
3
0
0
1
0
0
19
3
2
합계
유벤투스
세리에 A
16
3
2
3
0
0
1
0
0
19
3
2
1999/00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31
17
9
5
1
0
11
8
2
47
26
11
2000/01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35
17
3
4
1
0
14
4
0
53
22
3
2001/02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33
24
5
5
1
2
11
7
0
49
32
7
2002/03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37
24
20
6
1
1
12
7
2
55
32
23
2003/04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37
30
9
4
4
2
10
5
3
51
39
14
2004/05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32
25
15
2
0
1
8
5
1
42
30
17
2005/06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32
27
7
2
1
0
11
5
2
45
33
9
2006/07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17
10
6
3
1
1
7
1
0
27
12
7
합계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254
174
74
31
10
7
84
42
10
369
226
92
2007/08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30
12
9
7
4
0
10
3
2
47
19
11
2008/09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9
19
8
1
1
0
12
6
4
42
26
12
2009/10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1
4
3
3
0
0
8
0
1
32
4
3
통산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80
35
19
11
5
0
30
9
7
121
49
26
2010
뉴욕 레드 불스
메이저리그 사커
11
2
3
1
0
0
0
0
0
12
2
3
2011
뉴욕 레드 불스
메이저리그 사커
26
14
4
3
1
1
0
0
0
29
15
5
2012
뉴욕 레드 불스
메이저리그 사커
25
15
12
2
0
0
0
0
0
27
15
12
2013
뉴욕 레드 불스
메이저리그 사커
30
10
9
2
0
1
0
0
0
32
10
10
2014
뉴욕 레드 불스
메이저리그 사커
30
10
11
5
0
0
0
0
0
21
7
11
합계
뉴욕 레드 불스
메이저리그 사커
122
51
39
13
1
2
0
0
0
135
52
41
2011/12
아스날 FC (임대)
프리미어 리그
4
1
0
2
1
0
1
0
0
7
2
0
합계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258
175
74
33
11
7
85
42
10
376
228
92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대륙대회

경기
득점
어시
경기
득점
어시
경기
득점
어시
경기
득점
어시
94~14
-
-
581
284
160
72
17
13
139
59
24
792
360
197

9. 앙리에 대한 말말말


[image]

'''앙리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입니다. 티에리는 스트라이커에게 필요한 모든 자질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스피드, 파워, 그리고 골센스. 그와는 통하는 게 있어서 어디에 패스를 넣으면 좋을지 100% 이해하고 있습니다.'''

- 데니스 베르캄프[54]

'''내가 가르쳤던 선수들 가운데 최고는…아마도 티에리 앙리일 것이다.'''

아르센 벵거[55]

'''앙리가 처음 바르셀로나 라커룸에 들어왔을 때 감히 그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잉글랜드 무대를 정복하고 온 상태였고 난 앙리에 대한 감탄과 존경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팀에서 뛴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날렵하고 부드러운 터치로 볼을 받아 간단하게 골을 집어넣는 그의 플레이는 내게 인상적일 만큼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리오넬 메시

'''티에리는 프랑스가 낳았던 위대한 선수들 중 하나입니다. 저는 1998 월드컵에서 그를 만난 이래로 그가 특별한 선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티에리 앙리는 위대한 커리어를 가졌고, 축구계에 많은 공헌을 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네딘 지단

'''앙리는 가장 상대하기 두려운 선수였다. 그는 정말로 무서웠고 단연코 최고였다. 그는 스트라이커로서 정석적인 포지셔닝과 모든 무기를 가진 선수였다. 나는 항상 아스날의 앙리를 상대하기 전날이면 '내일은 힘든 하루가 되겠군'이라고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 커리어를 통틀어 이런 공포를 안긴 상대는 없었다. 오직 티에리 앙리뿐이었다.'''

존 테리

'''어떤 사람들은 앙리를 쥐스트 퐁텐과 비교하지만 그건 오히려 앙리에게 실례일 정도이다. 그는 내가 평생 갈망했던 타입의 선수였다. 우리가 영원히 그리워할 그의 모습은 프리미어리그에서 보여줬던 믿을 수 없는 시즌들이다. 나는 아스날 시절 앙리가 탄성이 나올 정도의 활약을 했던 시간들을 영원히 그리워할 것이다.'''

주제 무리뉴

'''티에리 앙리는 내가 지금까지 봐 온 선수 중 최고의 성장속도와 골 감각을 가지고 있다. 앙리는 프랑스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골 감각을 갖춘 스트라이커다.'''

- 미셸 플라티니

'''티에리 앙리는 상대편 수비수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다. 지능적이고, 팀이 원할 때 언제든 골을 터뜨려 주는 선수이다. 2002년 발롱도르는 앙리가 수상했어야 했다.'''

- 요한 크루이프

'''전세계 모든 선수들을 둘러봤지만 티에리 앙리야말로 바르셀로나의 스타일에 가장 적합한 선수다. 바르셀로나가 앙리를 데려올 수만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 앙리가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입고 함께 공격을 이끄는 것은 정말로 꿈만 같은 일이다. 앙리의 리듬과 스피드, 기술은 그를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할 수 있게끔 만든다.'''

'''나는 그들의 열렬한 팬이며 플레이를 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인간적으로도 앙리를 존경한다. 축구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그의 모습은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 호나우지뉴

'''만약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세계 최고의 선수인 티에리 앙리와 함께 뛸 수 있는 아스날을 선택할 것'''

- 토마시 로시츠키[56]

, 아스날 이적설이 나돌때, 앙리와 함께 하고싶다며[57]

'''아스날 시절에 앙리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다. 그는 바르셀로나 시절 함께 뛰어본 최고의 동료 중 하나였다.'''

야야 투레

'''저의 어린시절 우상이었어요. 그의 기술, 명성, 업적을 보세요. 그는 제 플레이에 영감을 주는 선수였죠.'''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10. 여담


  • 현재 EPL에는 시즌 MVP가 4개 있다. 선수단이 뽑는 PPY, 기자단이 뽑는 FWA, 팬들이 뽑는 FPY, EPL의 스폰서인 바클레이에서 주는 Barclays Player of the Year. 이 네 개의 상을 한 시즌 동안 독식한 것은 03-04의 앙리와 06-07/07-08의 호날두 둘뿐이었으며, 13-14 시즌 루이스 수아레스가 MVP 4개를 석권하면서 겨우 3명으로 늘어났다.[58]

00-01 시즌부터 05-06 시즌에 이르기까지 6시즌 연속으로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팀에서 획득한 트로피 같은 것은 몰라도 순수하게 개인으로서 행사한 리그 지배력을 놓고 보면 EPL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프로축구 역사를 통틀어도 손꼽힐 수준.
  • 2007년 바르셀로나 이적을 앞두고 무한도전에 출연해 한국 내에서 인지도를 확 올렸다. 무한도전 출연 당시 세계적 스타답지 않은 소탈한 모습과 예능감을 어필하면서 한국 내에서 호감형 선수로 주가가 올라갔다. 게다가 2007년에 출연한 지 6년이 지난 2013년에는 무한도전에 출연한 것을 매우 즐거운 추억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무한도전 멤버들과 했던 약속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라고밝혔다. 여담으로 무도 출연 때 했던 물공헤딩을 앙리측 에이전트에서 부상을 이유로 절대 하지 말라고 했는데, 본인이 괜찮다며 쿨하게 수행했다고 한다. 물론 제작진측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공을 높이 안 띄우고 강도조절을 했다고. 앙리가 출연했다는 유명세를 거르고 봐도 일반 시청자들까지 레전드 특집 중 하나로 평가할 정도로 방송 자체도 굉장히 재미있었고, 앙리의 적극적이고 친절한 태도 덕분에 해외 축구선수 내한 및 국내 예능 출연의 모범적인 예시로 남아 있다. 덤으로 박지성의 친구인 파트리스 에브라도 앙리의 출연분을 보고 박지성에게 자기도 이 방송 나가고 싶다고 어필을 했었다고 한다.
  • 아스날 시절 페널티 킥 키커 1순위였으나 본인이 얻어낸 PK를 본인이 차지않는 징크스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PK를 얻어내면 2순위 키커였던 로렌이 차거나 3순위였던 로베르 피레스가 PK를 찼다. 만약 그런 징크스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기록보다 더 많은 골을 넣었을 것이다. 그 징크스 덕분에 많은 도움을 기록한 것도 있다.
  • 최근에는 수염을 일부러(...) 기르는 듯한데 무한도전에 나왔던 그 앙리 맞나 싶을 정도.
  • 축빠가 많은 축구선수들 중에서도 최고의 축덕력을 자랑한다. 큰 경기는 물론 2~3부리그 경기까지 시청하는데, 심지어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후 처음으로 가진 심층 인터뷰에서는 영국 2부리그 축구경기를 틀어놓고 인터뷰를 할 정도.[59][60]
  • 2016년 아스날과 바르셀로나의 챔피언스리그 2차전을 앞두고 두 팀사이에 앙리를 둔 신경전이 펼쳐졌다. 서로 자신의 팀에 있을 때의 앙리의 활약상을 경쟁적으로 올린 것.
  • 상복이 지지리도 없는 선수로 유명하다. 발롱도르에서 2위, 3위를 잇달아 기록하며 단 한 차례도 수상하지 못했다. 또한 FIFA 올해의 선수상도 2년 연속으로 2위를 차지하면서 수상하지 못했다. 20-20을 기록했던 2002/2003 시즌은 프랑스의 월드컵 광탈 충격의 여파와 아스날의 챔피언스 리그 부진으로 인해 네드베드에 밀려 발롱도르 2위에 그쳤으며(피올에서도 지단에게 밀려 2위), 프랑스의 2003년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과 대회 득점왕과 골든볼, 그리고 아스날의 무패 우승을 이끌며 유러피언 골든슈, 프리미어 리그 골든부츠를 독식한 2003/2004 시즌에는 수상이 유력했지만 안드리 솁첸코, 안데르송 데쿠, 호나우지뉴에 밀려 발롱도르 4위에 머문다(피올에서는 지뉴에게 밀려 2위). 마지막으로 상을 탈 기회였던 2006년에는 프랑스의 월드컵 결승을 이끌며 수상이 점쳐졌지만, 승부차기끝에 준우승에 그치면서 다시금 실패한다. 발롱도르나 FIFA 올해의 선수상이 없다는 점이 아스날 역사상 최다득점자, 프랑스에서 유로컵, 컨페더레이션스 컵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국대 탑 스코어러로 등극한 앙리의 무시무시한 커리어에서의 유일한 흠이다.
  • 인종차별 반대로도 유명해서, 인종차별반대 홍보대사도 하고는 했다. 그런 앙리가 오히려 인종차별을 했다고 한국내에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2005년 1월 설기현이 소속된 울버햄튼와의 FA컵 경기에서 날개짓 흉내를 낸 것이 인종차별이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제스처는 'poule mouillee'[61]로 당시 2부 리그 소속이던 울버햄튼이 10백, 속칭 버스축구를 구사하는 것에 대해서 겁쟁이라고 가볍게 놀린 표현으로 밝혀졌다. 앙리가 유럽 축구의 인종차별반대 홍보대사이기도 했기 때문에 해외에서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반응이었고, 앙리 본인의 해명도 있어서 빨리 마감이 된 사건이었는데, 이후 인종차별 드립이 나올 때마다 가져다 붙이는 바람에 이미지가 이상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2006년 월드컵에서의 매너있는 모습으로 이미지회복을 다소 했고, 2007년 무한도전 출연으로 확실히 변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 이슈가 나오면 다시 은근슬쩍 꺼내서 쓰이기도 하는데, 인종차별 논란은 뒤늦게라도 알게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에 해명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 파리 변두리에서 유색인종으로서 인종차별을 겪으며 성장했기에 인종차별 반대 홍보대사로 십수년째 활약중인 앙리를 생각해 보면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루머다. 허나 사실 인종차별이라기보단 비매너적인 행위긴 하지만, 따져보자니 그렇다는 거지 축구 내의 관행으로 생각해 보면 별 거 아니다. 애초에 인종차별이랑 비매너는 완전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 프랑스어 발음을 한국어로 옮기자면 띠에히 엉히에 가깝다. 프랑스인이랑 축구얘기 하다가 앙리얘기 꺼낼때 앙리라 그러면 못 알아먹는다.[62]
  • 국내에서는 루메니게 등 역대급 레전드보다는 밑에 위치한 선수이지 않느냐 하는데... 최근에 UEFA 유로 2016을 앞두고, 선수들이나 유럽팬들이 뽑은 역대 유로 베스트에서 스트라이커 포지션뿐만 아니라, 전 포지션을 보더라도 가장 높은 빈도로 뽑히기도 하였다. 참고로, 무리뉴도 그렇고 프랑스 몇몇 언론에서는 쥐스트 퐁텐보다 더 우위에 있는 선수라고 보는 경향이 존재한다. 사실, 국대를 제외하고 클럽만 보면 당연한 말이기는 하다. 허나 퐁텐느의 국대에서의 활약은 지단 & 플라티니급인지라...
  • 손흥민을 대상으로한 다큐멘터리인 손세이셔널 - 그를 만든 시간에 게스트로 참여한다.[63]
  • 대표팀 선배이기도 한 칸토나처럼 셀러브레이션이 과하지 않은것으로 유명하다. 한창 전성기 시절이던 아스날 시절에는 골을 넣어놓고 마치 당연히 넣을것을 넣은것마냥 무심한 제스쳐를 자주 취하곤 했다.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2000년대 공격수들 중 1위에 이름을 올렸다.
[1] 1998년 FIFA 월드컵 수훈,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Légion d'Honneur Chevalier[2]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3] 프랑스의 축구선수 윌리엄 갈라스와 생일이 같다. 1992년에는 클레르퐁텐 유스 팀에서 잠시 같이 있었고, 나중에 아스날에서 재회한다.[4] 클레르 퐁텐 출신에는 니콜라 아넬카, 윌리엄 갈라스, 루이 사하, 아부 디아비, 하템 벤 아르파 등이 있다.[5] 벵거는 1987년 여름부터 모나코의 감독이었다.[6] 1997년 PSG에서 단돈 50만 파운드에 사왔는데 2시즌 쓰고 2250만 파운드에 레알로 팔았다. 이적료 차이가 40배가 넘는다.[7] 간혹 반니가 챔스 득점왕을 3번이나 했다는 점을 이유로 반니>앙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일단 반니의 챔스 골 56골 중에 토너먼트 골은 겨우 5골에 불과한데 이는 앙리가 득점한 기록의 절반도 안된다.(앙리는 50골 중 12골) 거기다 반니는 챔스 4강 이상을 가본 적이 없는 반면 앙리는 아스날 시절에 이미 준우승까지 달성한 상태였다. 챔스 골 기록면에서 반니가 우세한 것은 사실이지만 반니의 기록은 실속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큰 차이가 아니라는 것.[8] 이적 직후 공격수로 뛰라는 벵거의 지시에 '네? 저는 윙인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후일 앙리가 은퇴할 즈음에 벵거는 앙리가 스스로 '봐요. 전 골을 못 넣잖아요.'라고 밝혔다면서 골도 못 넣는 공격수 치고는 꽤 잘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9] 스트라이커 롤에 자신감이 없었던 앙리에게 아스날의 레전드 마틴 키언이 아스날 선수였던 어느 선수의 득점 영상을 보여주며 '너보다 발도 느리고 키도 작은 선수였지만 아스날에서 100골을 넣었다.'는 말을 해주었고 이것으로 앙리의 마인드가 바뀌었다는 얘기가 있다. 앙리보다 키도 작고 발도 느렸던 그 선수는 바로 이안 라이트.[10] 저 당시에는 맨유가 트레블을 한 이후인지라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또한, 사실상 92 유스들의 주축인 베컴 & 긱스, 네빌, 스콜스 등의 전성기였다.[11] 앙리의 유일한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득점이다.[12] 로베르 피레스는 2001-02 시즌 도움왕과 PFA 올해의 선수, FWA 올해의 선수를 휩쓸었다.[13] FA컵은 4경기 0골, 어시스트는 리그에서 1도움.[14] 맨유와의 리그 2경기는 1무1패였는데 앙리는 홈에서 멀티 골을 넣었다.[15] 트랜스퍼마켓에는 25어시스트로 돼있음.[16] 만약 앙리가 이 시즌에도 득점왕을 차지했다면 01-02 시즌부터 05-06 시즌까지 '''5시즌 연속 득점왕'''이라는 진기록이 나올 뻔 했다.[17] 2004년 4월 9일 경기로, 처음에 넘어진 선수가 독일의 디트마어 하만이고 골 넣기 직전에 훼이크에 속은 선수가 제이미 캐러거이다.[18] 당시 발롱도르는 EPL 명칭 변경 이후 최초의 무패 우승과 EPL내 모든 개인상들을 휩쓴 앙리 혹은 FC 포르투의 리그와 챔스 더블, 포르투갈의 유로 2004 준우승에 크게 일조한 데쿠가 좀 더 나은 대상자라는 논란이 컸다.[19] FA컵 7경기 중 4라운드 울버햄튼전에서만 나와 1어시스트 기록[20] 다만 은퇴 경기는 에미레이츠 개장 기념 경기였다. 2006년 7월 22일 베르캄프의 전 소속팀인 아약스와의 경기. 60세가 넘은 요한 크루이프도 베르캄프 기념경기에 와서 뛰었다.[21] 2006/07 시즌 초반 아스날은 월드컵까지 풀로 뛴 앙리를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한 앙리를 벤치에 앉혔지만 프랑스 국가대표팀 감독인 도메네크는 그런 거 없이 친선경기에도 앙리를 풀타임 소화시켰다.[22] 이때 아스날팬뿐만 아니라 많은 축구팬들이 앙리의 빈자리를 걱정했다. 대체자라고 영입한 건 크로아티아리그의 에두아르도 다 실바에 뜬금없이 오른쪽 풀백 바카리 사냐를 영입한게 전부. 그런데 막상 새 시즌이 시작되더니 아데바요르가 갓데발이 되면서 1위를 질주했다. 물론 시즌 후반 이후에 부상신의 강림으로 팀전력이 흔들리면서 DTD하여 우승엔 실패했지만 적어도 시즌 전체로 볼 때 앙리의 공백은 느껴지지않았다.[23] 레알은 반대로 침몰하면서, 다음시즌에 갈락티코 2기가 시작된다.[24] 에투와 스트라이커 대결에서 과연 누가 우위를 점할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앙리는 하락세였고 윙어 소화능력은 앙리가 더 뛰어났다. 그리고 바르사의 윙어 자리에서 앙리만큼 해준 선수는 그다지 없었다. 페드로가 메시 비야 페드로 라인의 일원으로 활약했지만 앙리보다 앞섰는가를 묻자면 섣불리 대답하기 어렵다. 산체스는 바르셀로나에서는 기복이 좀 심한 편이었고 비야 역시 활약상이 만족할 수준은 아니었고, 네이마르만이 충공깽스러운 활약상을 선보이며 윙어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었다.[25] 오언은 리그우승을 위해 09-10시즌에 맨유로 합류하면서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라는 희대의 망언을 했는데 물론 리그우승을 하긴 했지만 그것도 팀빨로 겨우 얻은것이다. 챔스우승을 위해서 합류했다가 전관왕을 먹은 앙리와는 천지차이. 게다가 앙리는 바르셀로나의 전관왕에 큰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26]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유일한 이유였던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이뤄지면서 바르셀로나에서의 동기부여 자체가 없어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고질적인 등부상이 악화되어 신체능력이 급감하였다.[27] 앙리가 결정적으로 신예 페드로에게 밀려난 원인은 수비 가담 문제였다. 바르셀로나의 수비시 전방압박에서 메시와 앙리는 최전방을 압박하는 에투의 뒤를 받쳐 주면서 패스 루트를 측면으로 한정시키거나 직접적인 가로채기를 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본래 스트라이커인 앙리는 측면에 너무 많은 공간을 내 주는 경향이 있었다. 공격 스탯이야 나무랄데 없었지만 말이다.[28] 후반기 뉴욕 레드불스 출전 기록 제외[29] EPL 감독들의 인터뷰 영상을 자주 보는 사람들 혹은 피파온라인4(...) 유저들은 대체로 해설진들이나 기자들이 원 발음에 기초해서 이름을 불러주는걸 알 수 있다. 물론 호날두는 곧 죽어도 로날도라고 부른다.[30] 이후에 자책골로 변경되었다.[31] 이 시즌 아스날은 승점 1점 차이로 토튼햄을 제치고 3위를 차지했는데 만일 이 골이 터지지 못했으면 아스날이 챔스를 못갈 뻔 했다.[32] 조별예선에서 대한민국과 경기를 치뤘는데 프랑스가 4-2로 승리하였고, 앙리와 트레제게가 사이좋게 2골씩 넣었다. 경기 시작 10분만에 3골을 넣었다. 드리블 치는 앙리를 막고자 한국 수비수들은 태클을 시도했으나 앙리는 가볍게 제꼈다.[33] 여담으로 지단과 앙리가 같이 선발출장한 A매치 수는 60경기인데 지단의 어시스트 - 앙리 골은 이때가 유일하다.[34] 하지만 1998 월드컵의 국대 주전은 조르카예프, 뒤가리, 기바르쉬였으며 트레제게, 앙리는 후보 선수였다. 유로 2000에서는 주전 원톱으로 출장.[35] 앙리가 1998 월드컵에서 에메 자케 감독의 최초 계획에는 로테이션 정도로 평가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대회에서는 많은 경기를 선발로 출전했다. 그 이유는 주전 스트라이커 기바르쉬가 매우 부진했기 때문이며 앙리의 컨디션이 좋았기에 주로 왼쪽 윙포워드로 출전해 특유의 스피드를 바탕으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괜히 1998 월드컵 프랑스 대표팀 공격수 최다 출전시간 및 최다 득점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실질적으로 앙리는 1998 월드컵에서 주전이었다고 평가해도 무방하다. 매치 리포트[36] 폭발적인 스피드와 돌파 그리고 완벽한 마무리를 보여주는 앙리, 피지컬과 헤딩 경합이 우수하며 골 냄새를 잘 맡는 트레제게의 조합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빅 앤 스몰 콤비다. [37] 앙리는 빅앤스몰형 조합에서의 스몰맨 스타일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오히려 10번 유형의 공격수에 가깝지, 스몰맨형식의 어드밴스 포워드로 사용할 경우 앙리의 다재다능함이 반감된다.[38] 트레제게의 영혼의 파트너로 꼽는 공격수는 유벤투스의 파트너 알레산드로 델피에로였으며, 둘의 찰떡궁합은 역대 최고의 투톱을 뽑을 때 거론될 정도이다. 참고로 앙리와 정말 영혼의 파트너였던 선수는 데니스 베르캄프다. 비에라-마케렐레 라인은 그야말로 현시창으로 2006 독일 월드컵을 제외하면 이름값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39] 과거 아스날의 442는 말이 442이지, 사실상 4231에 가까운 컨셉이었다. 베르캄프가 플메와 센터 포워드를 오가는 벤제마롤을 맡았다.[40]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적었다는 것이지 부진했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앙리는 UEFA 유로 20002006 독일 월드컵에서의 활약 뿐만 아니라 2003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는 아예 대회 득점왕과 골든볼을 차지하였다.[41] 지단도 왼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다. 레알마드리드에서는 왼쪽미드필더로 자주 나오기까지 했을 정도.[42] 이전까지는 PK를 얻어서 다른 키커가 차서 넣거나, 키퍼나 골대에 맞고 튕겨나온 공을 다른 팀원이 차서 넣는 등 간접적인 경우에도 어시스트로 기록해주었다. 이를 13/14시즌에 바꾸면서 이전의 기록에도 소급 적용되었고, 호날두의 경우 06/07시즌 18어시로 도움왕이었으나 8개로 정정되기도 했다.[43] 앙리는 클럽에서 맞은 9번의 결승전에서 모두 무득점을 기록했다. 도움도 05-06 챔스 결승전에서 기록한 1개가 끝.[44] 9경기 1골. 모나코에서 뛴 1998년 4강 2차전.[45] 16강 팀을 4개조로 나눈 방식. 32강 조별리그가 아님. 그리고 조별리그는 알파벳으로 표기한다.[46] 1차전 풀타임, 2차전 80분.[47] 물론 이건 첼시 팬들도 동의하는 바였다. 괜히 첼시의 챔스 우승이 기적이라고 평가받겠는가?[48] 지루는 경기력이 좋을 때에도 팬들 사이에서 평가가 엇갈렸다. 한계가 명확한 스타일이었기에.[49] 정확하게는 네빌의 발렌시아 감독 시절(...) 이후.[50] 게다가 현실적으로 앙리가 감독 비판을 한다는건 아르센 벵거까지도 비판을 하게 된다는 점까지도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감독 비판을 안할수 밖에 없다.[51] 1992~2002[52] 1992~2012[53] 1907~2007, 1997~2007[54] 앙리를 논함에 있어 벵거와 함께 결코 빠져서는 안될 인물. 앙리의 폭발적인 스피드와 왕성한 활동량 그리고 베르캄프의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스는 그야말로 프리미어리그를 넘어 축구 역사에 남을 완벽한 투톱조합이었다.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파트너였던 셈.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잘 모르는 것인데 베르캄프와 앙리는 경기장 안에서만 그랬고(...), 경기장 밖에서는 지극히 사무적인 사이라고 한다.[55] 유벤투스에서 윙포지션으로 뛰던 유망주 앙리를 아스날로 영입해 스트라이커로 변신시켜 최고의 선수로 만든 앙리의 은사. 그로 인해 앙리와 베르캄프 투톱 조합이 완성됐다.[56] 로시츠키는 사실 앙리가 아스날에 오기 이전부터인 1997-1998시즌 더블을 할 당시에도 베르캄프의 플레이를 좋아했던 체코의 구너였다.[57] 로시츠키가 06-07시즌에 아스날로 오면서 앙리의 마지막 시즌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58] 그런데 수아레스는 둘과는 다르게 이 시즌에 리그 우승을 못 했다...지못미.[59] 그렇지만 이건 선수들 취향에 따른 문제로, 축구 별로 안 보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앙리처럼 지독하게 보는 선수도 많다. 예를 들면 에투는 경기의 흐름을 관찰하기 위해 시간 나면 그냥 축구 나오는 아무 채널이나 틀어서 세계 어떤 리그나 시청한다고 한다.[60] 반면 직업으로 축구선수를 하지만 여가시간에는 축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선수도 있다.[61] 직역하자면 물에 젖은 닭[62] 실제 프랑스어의 r은 굳이 우리말로 치면 ㅎ에 가까운 발음인데, 약간 코웃음치는 듯한 작고 가벼운 ㅎ발음이 난다. 우리가 흔히 봉주르라고 읽는 프랑스 인사도 실제로는 봉주~(ㅎ) 에 가깝다.[63] 손흥민과 꽤 친분을 쌓아 온 듯한데, 둘의 소속팀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