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외룡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20년 현재 충칭 당다이 리판 감독을 맡고 있다.
선수로서 국가대표를 지냈으며, 지도자로 한중일 여러 팀을 지도하였다.
2. 선수 경력
전남 고흥군 출신으로 선수로서는 매우 늦은 중학교 2학년때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 경성중-고를 졸업했는데, 경성고는 성적이 좋은 학교가 아닌데다가 수비수로서는 피지컬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연세대 축구부를 찾아가 테스트를 받고 입학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대우 축구단에 입단하였다. 1983년 프로축구리그가 창설되자 대우 로얄즈의 창단 멤버가 되었으며 1984년, 1987년의 팀의 우승에 공헌하였고, 1983년과 1985년에는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기도 하였지만 무릎 부상으로 1987년 이른 나이에 은퇴하였다. 대우에서 67경기에 출장하였다. 은퇴 이후 도스 퓨처스에서 잠깐 플레잉코치로 1989년 뛰기도 하였다.
국가대표로는 1979년 성인 대표로 데뷔하였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멤버로 합류가 예정되었으나 무릎 부상으로 하차하였다. 1980년 AFC 아시안컵에 뛰었고, 30경기에 나서 1골을 넣었다.
3. 지도자 경력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중일 3개국의 1부리그 감독을 모두 역임해본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한 1980년대부터 계속 일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감독을 경험해 본 몇 안되는 인물이다. 다만 지도력에 비해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인천 감독 시절 때 주목을 받은 바 있지만, 그 외에는 K리그와는 별 인연이 없었다. 오히려 해외에서 지도력을 인정받는 감독이다.
3.1. 1980년대
은퇴이후 1987년 대우 로얄즈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1988년 아주대학교 코치를 했다.
3.2. 1990년대
1989년 도스 퓨처스의 코치가 되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1992년 도스 퓨처스 유스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1995년 도스 퓨처스의 코치를 거쳤고, 감독대행과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이 당시 일본 축구 협회 S급 지도자 자격을 획득했다고 한다.
1997년 한국으로 넘어와 부산 대우 로얄즈의 코치로 부임하였다. 1999년 신윤기 감독대행의 사망으로 임시 감독대행이 되어 팀을 준우승까지 이끌었다. 1999년 일본축구협회 공인 S급 라이선스를 취득하고, 2000년 베르디 가와사키 감독직에 부임하였다. 베르디 가와사키 당시 이국수 총감독의 뒷받침으로 한국 선수들을 많이 영입했는데, 김현석, 김도근이 그들이었으며, 조선적 선수인 량규사도 이 당시에 프로 데뷔를 했다.
3.3. 2000년대
[image]
인천 감독 시절
2001년부터는 콘사도레 삿포로의 코치로 이동하였으며, 2002년과 2003년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
2004년 인천 유나이티드의 수석코치직을 맡았고, 베르너 로란트 감독이 성적 부진과 개인 사정으로 사임하자 감독대행을 맡다가 2005년 정식으로 인천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특히 악조건이었던 시민구단의 얇은 선수층을 이끌고 전기리그 7승 3무 2패 2위, 후기리그 6승 3무 3패 5위를 기록하며 통합 13승 6무 5패로 우승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플레이오프에서 전기리그 우승팀 부산 아이파크를 2-0으로 꺾고,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였다. 아쉽게도 챔피언결정전에서 울산 현대 호랑이에게 통산스코어 3-6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게 되었으나, 프로축구연맹은 그의 지도력을 인정해 그해 감독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 감독상은 우승팀이 아닌 팀의 감독이 최초로 수상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인천의 2005년 시즌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2006년 10월 임유철 감독이 비상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여 개봉하기도 하였다. 2006년 시즌 종료후 영국으로 1년 축구연수를 다녀왔고, 2008년 다시 인천의 지휘봉을 잡았다.
이 당시가 인천의 리즈시절이었으며, 인천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인천의 역대 최고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기에 올드 인천팬들은 후임 감독을 꼽을 때마다 장외룡 감독을 언급하기도 한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오미야 아르디자의 감독직에 부임하였다. 이 당시 장외룡은 박원재, 마토 네레틀랴크, 안영학을 K리그로부터 불러들여 팀을 꾸렸으나, 2009년 13위, 2010년에는 17위까지 순위가 내려가자 사임했다.
3.4. 2010년대
3.4.1. 칭다오 중넝 및 다롄 아얼빈
이후 중국에 진출하여 여러 성과를 남겼지만, 이장수에 가려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2011년 칭다오 중넝을 맡아 리그 2위까지 올렸으나, 여러 이유로 해임되고 다롄 아얼빈을 맡았다. 하지만 부인의 병환으로 계약을 해지하고 귀국했다가, 칭다오의 삼고초려로 다시 칭다오로 갔으나, 얼마 못가 다시 구단과의 마찰로 해임되었다.[2]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2014년 9월 대한축구협회의 수석 기술위원으로 선임되었다.#
3.4.2. 충칭 당다이 리판
[image]
2017년 충칭 재임당시 홍위병 컨셉의 허난젠예전 홈경기 홍보포스터. 학생증을 가져오면 할인해준다는 내용. 장외룡 감독을 따르는 개인 팬덤이 있기 때문에, 눈에 띄는 스타 플레이어가 없던 충칭 구단측은 마케팅용으로 감독을 내세웠다.
2016년 계약 기간 3년에 충칭 당다이 리판의 감독으로 영입되었다. 2016에서 팀을 슈퍼리그에 8위에 잔류시켰고(전해도 8위), 2017년에는 4월에 3연패를 해서 중도해임설 등 위기를 맞았으나, 이후 선전하여 7월 현재 충칭은 상위스플릿(8위)에 머물고 있다. 다른 한국인 감독들이 죽쑤는[3] 것을 고려하면 그나마 안정적인 운영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2017년 시즌을 10위로 마감, 부진한 성적으로 계약 기간 1년을 남기고 팀을 떠나게 되었다. 사실 충칭은 슈퍼리그에서도 페이롤이 매우 적은 구단이라서 성적을 잘 내기는 쉽지 않은데, 2017년부터 리판그룹으로부터 구단을 인수하고 대대적인 투자를 하려고 하는 당다이 그룹이 유럽 명장을 데려 오기 위해 계약을 해지한 것이다. 그러니까 구단주가 바뀌는 바람에 가성비의 성적을 보여주고도 안타깝게 내려오게 되었다.[4]
후임감독으로는 포르투갈 골든 제네레이션의 일원인 파울루 벤투가 확정되었다.[5]
3.4.3. 허난 젠예
워낙 중국에서 명망이 있어서 4월 25일 허난 젠예의 감독으로 취임해서 6개월만에 다시 슈퍼리그로 복귀했다. 장외룡 감독은 그동안 호주에 있는 딸의 집에 지내다가 벨기에서 축구 공부를 하러 머물렀다고 한다. 허난 젠예는 태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활약한 크로아티아 출신 드라간 탈라이치 감독이 부임했으나, 14위로 부진하자 시즌 시작 두달만에 전격 감독을 교체한 것이다. 탈라이치 감독이 낙마한 직접적인 계기는 24일에 열린 중국 FA컵에서 을급리그(3부리그)팀인 선양 청스에게 2-1로 참패한 것이다. 허난 젠예 측은 탈라이치가 계막부터 계속 부진하자, 3월부터 일본 감독에서 잘린 바히드 할릴호지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할릴호지치는 일본 축협에 유감이 많은지 새로운 자리를 찾기 보다는 일본축협에 대한 비난 언플에 더 신경쓰는지라 당장 급한 허난 젠예는 중국 축구에 밝고, 충칭에서도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둔 장감독을 모셔온 듯 하다.
허난 젠예는 예전에 김학범 감독과 조 본프레레 감독이 재임한 적이 있어서 한국과 여러가지로 인연이 있는 구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축구 열기는 대단하지만, 돈을 많이 쓰는 구단은 아니다. 팀 리더십이 무너진 가운데 장외룡 감독이 성적을 잘 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중국 현지에서는 장외룡 감독 "룽거(龙哥)"(외룡 따꺼의 줄임말)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개인 팬들이 많다.
장외룡 감독은 충칭에서 자신을 보좌한 이상은 코치도 데려왔다.
허난 젠예는 4월 부임 때까지만 해도 강등권인 15위에 머물고 있었으나, 장외룡 감독의 지휘로 강등권을 벗어나 8월 초 현재 13위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8월 초부터 기나긴 무승행보(4연패후 1무) 다시 14위로까지 내려왔다. 잘못하면 다시 강등권(15위, 16위)로 쳐박힐 수 있다. 결국 8월 이래 7게임 1무 6패라는 부진한 성적으로 9월 27일 성적 부진의 책임을 물어 전격 경질되었다.
3.4.4. 다시 충칭
충칭 구단주 장리장이 고액 유럽감독인 파울루 벤투와 요르디 크루이프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는지 2019년 12월, 2년 전 해임했던 장외룡 감독을 다시 불러왔다.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양대리그(각각 8개팀. 총 14라운드) - 결승 토너먼트로 개편되어 7월 개막한 중국 슈퍼 리그에서 장외룡이 지휘하는 충칭은 초반에는 계속 연패를 하면서 강등 토너먼트로 쳐박힐 뻔 했으나 8월말부터 6연승을 거두면서 B리그 3위까지 올라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산둥 루넝과의 5,6위 결정전에서 1차전에서 산둥을 4-3으로 이긴 뒤, 2차전에서 1-2로 진 후 승부차기 끝에 패해 6위를 기록했다. 결승 토너먼트제긴 했지만 어찌됐건 구단을 역사상 최고 순위까지 끌어올렸다.
4. 해설자 경력
2014년 K리그 클래식 시즌 초반에 MBC SPORTS+의 해설위원으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1] 구단차원에서 영국으로 축구 유학을 보내주어 2007시즌은 박이천 대행이 팀을 이끌었다.[2] 이렇게 2000년대 중국 리그에서 감독 해임같은 무리수가 잦았던 이유는 2000년대 들어 중국 프로팀이 우후죽순처럼 생겨서 프로팀 운영에 일정한 철학이 없는 구단주가 많은 데다가, 서포터즈 또한 엄청나게 성급하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3게임만 무승이어도 사퇴 여론에 시달린다. 2010년대 후반 들어서 이런 점은 나아지고 있다.[3] 최용수나 홍명보는 자의반 타의반 사임하였고, 이장수는 6라운드 마치고 해임되었다.[4] 슈퍼리그 평균 연봉 1위인 상하이 상강이 평균 연봉이 1590만 위안(약 24억원)인데 반해, 충칭 리판은 꼴지에서 세번째인 220만 위안(약 3억원)이다. 최하는 조선족 지역에 있는 구단인 연변FC의 87만위안.(1억 3천만원)[5] 현임 한국 대표팀 감독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