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남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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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관은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潘南面)이다. 시조는 고려시대 인물 박응주(朴應珠)이며 선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조선시대 때 조선 개국 공신 평도공 박은(朴訔), 또한 조선조 최고 영예인 문묘 종사 및 종묘배향공신(숙종)인 소론의 영수 박세채를 배출하면서 최고 명문가인 국반(國班)의 대열에 등극했다. [1]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 종묘배향공신(고종)이자 개화파의 아버지인 우의정 박규수도 배출했다.
총 정승 7명, 대제학 2명, 왕비 2명(선조 비 의인왕후, 인종 비 인성왕후), 후궁 1명(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문과 급제자 215명, 무과 급제자 23명, 의과 1명, 음관 176명, 상신(정승) 7명, 청백리 2명, 왕비 2명, 공신 6명, 장신 3명, 호당(부마) 5명, 사마시 422명을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조선 중기 노론이 집권할 때도 중심에 있었고, 후기 세도 정치가 판을 칠 때도 중앙에서 세력을 유지했다. 정조(조선)의 후궁이자 순조의 어머니인 수빈 박씨 때 왕실의 인척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세채 등 소론의 거물도 배출했고 영남 남인들의 소외를 해결하기 위해 힘쓰는 등, 당쟁을 거부했다. 조선조 때 글좀 한다는 대다수 집안이 주자학과 붕당에 치우쳐 있을 때도 반남 박씨는 북학 등 새로운 사조를 연구하는 데도 힘썼다. 결국 박지원(실학자), 박규수 등 개화된 인물도 배출했다. 이들이 개화파를 키워내게 된다.
2. 내용
조선 시대에 크게 현달[2] 한 가문이다. 시조 박응주가 나주 벌집 명당에 묘를 쓰고, 후손들이 '벌처럼 일어났다'라는 야사가 있다. 조선 시대 박씨 성을 가진 정승 12명 중 7명이 반남이다. 이미 고려 말 신진사대부의 일원이었던 박상충과 그의 아들이자 조선 태종 대에 정승[3] 을 지낸 박은(朴訔)이 있었고, 특히 조선 후기에 인물들이 많이 보이는데, 특히 문묘에 배향된 대학자 박세채 및 박세당(朴世堂), 박태보(朴泰輔) 등이 숙종 대에 활약한 인물들이다. 또한 연암 박지원, 환재 박규수 등의 이름난 실학자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이들의 명단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정치적으로는 대체로 서인 계열로서 노소론을 가리지는 않는 가문이었다. 태종 때 박은과 세종의 장인 심온 사이의 악연이 깊어 반남 박씨는 청송 심씨와 서로 통혼하지 않는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구한말 을사오적의 박영효, 박제순 등의 친일파들도 있다. 하지만 박제순의 손자 박승유는 독립운동가였고 박찬익도 독립운동가이자 민족대표 39인중 한 사람이다.
현대 인물을 꼽자면 영화감독 박찬욱과 배우 박신양, 박보검 소설가 박완서, 축구감독 박항서, 농구선수 박찬숙, K팝스타 출신 가수 박지민, 아나운서 출신으로 더불어민주당의 거물 정치인 박영선 등이 있고,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때려 죽인 박기서도 있다.
항렬자를 잘 따르는 가문이다. 박신양의 경우 나이대에 비해 항렬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2.1. 분포 지역
전라남도 나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집안이지만 의외로 전라남도, 광주에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다. 통계청 2000년 인구 자료 기준 전체 인구는 139,438명이며, 분포 지역은 서울 32,775명, 인천 8,886명, 대전 8,461명, 부산 5,897명, 대구 4,579명, 광주 3,298명, 울산 1,824명, 경기 31,462명, 강원 3,100명, 충북 4,684명, 충남 6,896명, 전북 6,209명, 전남 3,501명, 경북 8,936명, 경남 5,000명, 제주 295명으로 전국적으로 고루 분포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경상북도, 전라북도, 충청남도, 수도권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경북 서북부, 충남 남부, 전북 북부 지역, 경기도 고양시. 서울 토박이 중에서도 반남 박씨 비율이 꽤 높은 편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박씨 중에서 밀양 박씨가 가장 많겠지만, 친구나 지인 이름에 박○서(緖), 박찬(贊)○, 박○우(雨)가 들어가 있으면 매우 높은 확률로 반남 박씨이다.
3. 파(派)
- 공순공 숭질 파
- 군수공 병덕 파
- 금성부원군 용 파
- 길주공 동망 파
- 남곽공 동열 파
- 남일공 응남 파
- 도사공 동준 파: 영남 서부, 특히 상주에 대거 세거 중이다.
- 도정공 응인 파: 호서 일대에 세거한다
- 동정공 상질 파
- 대종파: 파주 문산에 많이 세거한다
- 부솔공 동윤 파: 주로 호남과 영남 남서부에 집중적으로 몰려있다.
- 부윤공 훤 파: 예산에 집성촌이 있다
- 사의공 의지 파
- 서포공파 : 박세당, 그의 아들이자 박세후에게 입양된 박태보, 박계양이 포함되어있다.
- 세양공 강 파: 호서에 많이살고, 그밖에도 경기도 남부, 전북 정읍에 많다.
- 오창공파 : 중시조는 오창공(梧窓公) 박동량(朴東亮)[4] 이 며, 박동량의 손자이자 종묘와 문묘에 배향된 공신 박세채,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 개화파의 아버지인 환재 박규수, 그리고 친일파이자 부마인 박영효가 오창공파에 포함되어있다.
- 직장공 상경 파: 호남 북부, 호서 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중시조인 박상경의 묘소와 사당이 금산에 위치해있다
- 직장공 환무 파: 위의 파와는 전혀 다르다. 박상경 직장공은 5세손이고, 이쪽은 3세손으로 매우 오래되었다.
- 참봉공파 : 친일파인 박제순, 그의 손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승유가 포함되어있다.
- 판관공 병균 파: 영주, 안동 등 경북을 대표하는 사림 집안이다. 단일 파로서 문과급제자 14명, 무과급제자 4명, 초시합격자는 28명이라는 통계를 냈으며 현대에도 전통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특히 1660년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한 대도 빠지지 않고 문과급제자를 냈다.
4. 항렬자
항렬자는 27세부터 수교법(修交法)[5] 을 사용한다. 참고로 26세까지는 일월법(日月法)[6] 을 쓴다. 또한, 반남박씨의 모든 파가 동일한 항렬을 따른다.
5. 인물
5.1. 고려시대 인물
5.2. 조선시대 인물
5.3. 22세손
5.4. 23세손
5.5. 24세손
5.6. 25세손
5.7. 26세손
- 박찬석(정치인): 17대 국회의원
- 박찬대: 20~21대 국회의원
- 박찬법: 금호아시아나그룹 전 회장 [12]
- 박찬웅: 독립운동가
- 박찬숙(방송인): 17대 국회의원
- 박찬숙(농구인)
- 박찬주
- 박찬욱: 영화감독
- 박찬익: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9인 중 한명
- 박찬주(군인)
- 박찬주(교육자): 고종(대한제국) 손자인 이우의 아내이자 박영효의 손녀
- 박찬환: 배우
- 박찬호: 디자이너
5.8. 27세손
5.9. 28세손
5.10. 29세손
- 박남춘: 19~20대 국회의원이자 15대 인천광역시장
5.11. 30세손
- 박헌도: 야구선수
5.12. 35세손
5.13. 항렬 미상
- 박지민
- 박찬도
- 박찬성: 개명 전 이름은 박유민이다.
- 박건우: 개명 전 이름은 박승재다.
- 커맨더지코 (박광우)
- 박양우: 제51대 문화체육관광부장관
- 박승동
- 박승춘: 2016년 국가보훈처장
- 박승화: 가수
- 박영선: 17~20대 국회의원이자 제2대 중소벤처기업부장관
- 박동철
- 박명환: 야구선수, 현 투수코치
- 박보검
- 박삼구
- 박태민: 프로게이머
- 박제윤
- 박제후
- 박제업
[1] 여주 이씨, 진성 이씨, 덕수 이씨, 광산 김씨, 은진 송씨가 같은 국반이다.[2] 顯達 : 벼슬, 명성 등이 높아서 세상에 알려지다.[3] 좌의정[4] 선조 시절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대중 외교에 힘썼으며 봉산옥사당시 무고임을 알고 연루자를 용서하려 했다가 미움을 받고 탄핵당했다고 한다. 계축옥사 당시에는 혐의가 희박해 극형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인목대비의 사주로 의인왕후의 능에 저주를 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인조반정 이후에 저주 사건이 무고였음을 시인해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죄로 유배되었다. 인조 10년에 석방되었으며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었다.[5] 항렬자 안에 숫자에 해당하는 한자가 있다! 수교법 문서를 참조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참고로 안동 권씨도 역시 이 방법을 쓴다.[6] 항렬자 안에 日과 月이 번갈아가며 나온다.[7] 현존하는 반남 박씨 중에서 상당히 높은 항렬. 대부분의 반남박씨들의 할아버지~증,고조 할아버지급 항렬로, 같은 항렬을 쓰는 박정양은 헌종때 태어나 구한말에 활동한 인물이며 같은 항렬인 박신양과 120년정도 차이난다.[8] 갑신정변에 가담한 박영효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영(泳)자가 승(勝)자로 바뀌었다는 근거없는 풍문이 나도는데, 반남박씨 족보 乙酉譜(1825년 발행)에는 이때 이미 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다. 즉, 갑신정변(1884년)이 발생한지 근 60년 전에 이미 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으며 박영효의 집안인 오창공파 금양위 분서공 미(瀰)의 자손들은 갑신정변 이후에도 계속 泳자 항렬을 사용했다.[9] 태극기를 정식으로 먼저 사용한 그 사람 맞다.[10] 할아버지랑 정반대;;[11] 집성촌인 산청이 고향이다.[12] 박인천 초대 회장의 일가는 밀양 박씨이므로 친인척 관계가 아닌 사원 출신의 CEO.[13] 항렬이 여기 기록된 인물 중 가장 나중인데, 보통 사람들과 7~8항렬 차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