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우스 세베루스
1. 소개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의 부하. 세베루스 2세라고도 한다. 305년 갈레리우스로부터 서방 부제로 발탁되어 이탈리아 및 북아프리카를 통치하였다.
2. 생애
서기 3세기 중반, 로마 제국의 일리리아 북부 지방에서 태어났다. 변방 출신인데다, 출신 가문 역시 미천했다고 한다. 따라서 출세를 위해 로마군에 입대했다고 하며, 이때 능력을 인정받아 군대 내 요직을 두루 거쳐 고위장교까지 승진했다. 군생활 중 갈레리우스와 인연을 맺은 것은 큰 도움이 되었고, 오랜 기간동안 갈레리우스의 부하로 남았다. 이후 동방 정제였던 갈레리우스는 305년 그를 새로운 서방 부제에 임명했다.
306년 공동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사망하고서, 난데없이 순번에도 없던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휘하 군대에 의해 추대되는 소동[4] 이 일어났고,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는 원래 순번대로(부제였으므로) 갈레리우스에 의해 서방 정제로 인정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방 부제직을 받게 된다.
306년 10월, 로마에서 전임황제인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여기에 격분하여[6] 원로원과 일반 시민[7] 그리고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의 정책적 불만[8] 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로 진격했으나 패배하고 라벤나로 퇴각한다.(307년 2월) 이후 라벤나의 요새를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막시미아누스의 계략에 속아, 원래는 제대로 대우받기로 약속하고 항복했지만 통수를 쳐서 포로가 되었다가 307년 9월 16일 처형당했다.
[1] 부제로서[2] 정제로서, 저 7월 25일은 서방정제 콘스탄티우스 1세가 병사한 날이다. 원래는 그대로 계승하는 게 맞겠으나, 아래 나올 아들 콘스탄티누스의 추대사태로 늦어졌다.[3] 막시미아누스-막센티우스 부자에게 항복[4] 아버지와 같이 있었던 1년간, 휘하 군인들에게 모범을 보여 천천히 군심을 모으다가,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져 타계가 가시권에 보이자, 여차하면 추대해달라고 미리 뒷공작을 했을 확률이 높다. 콘스탄티누스가 무슨 억울한 조선 왕족 A도 아니고,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추대를 한다는 것이 혈통적 요소가 약하고 군사적 실력주의 문화가 강한 로마에서는 어려웠으니까.[5] 정략결혼이었지만 어쨌든 그의 어머니인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를 버렸으니까.[6] 막시미아누스는 서방정제로만 286~305로 20년 가까이 있었고, 자기는 그 적자이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비해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는 그 20년 내내 아버지의 부하인 부제였고, 정제는 꼴랑 1년 하고 죽었는데(그것마저도 막시미아누스가 죽은 것도 아니었고, 자의로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물귀신마냥 같이 용퇴하자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내려간 결과인데) 그의 서자[5] 인 콘스탄티누스는 그 1년 사이에 아버지 군대 안에서 뒷공작과 큰 그림을 그려 추대받아서, 먼저 정제로 흥정을 했고 결국 정제는 아니지만 부제를 받아냈으니까. 빡치려면 빡칠 만 하다. 4두정치에 내재된 문제점이 이것이다.[7]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정제 및 부제위를 장군, 총독들끼리만 주거니 받거니 하니까. 시민들에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문서에 써 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탈리아를 본국의 위치에서 격하시켜 일반 속주와 동등하게 했고, 면제되던 세금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로마 시는 예외라 계속 면세의 특권이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정부(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시에서마저도 특권을 폐지해 세금을 걷으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8] 프라이토리아니의 로마 시내 주둔기지를 정리하는 작업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로 계속 차근차근 시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