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미아누스
1. 개요
로마 제국 제44대 황제. 풀네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285년 카이사르(부제)에 올라 브리타니아, 갈리아, 이탈리아, 아프리카 전선을 맡았고 286년 아우구스투스(정제)로 즉위해 제국 서방을 도맡았다. 293년 사두정치가 성립된 후에는 이탈리아, 에스파냐, 아프리카, 라인 전선을 다스렸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퇴위했으나 이듬해 아들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도왔다. 그러나 후에 아들과 갈등을 빚었고 콘스탄티누스에게 의탁했다가 이내 반란을 꾀하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처형되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막시미아누스는 250년 무렵 판노니아 지방의 시르미움 인근에서 태어났다. 막시미아누스의 집안은 농부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다뉴브 국경 지대에서 힘들게 살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막시미아누스는 성년이 되자마다 군대에 입대하여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황제 치하에서 친구 디오클레스와 함께 복무했다. 막시미아누스는 283년에 카루스 황제의 사산조 페르시아 정벌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해 11월 20일 친구 디오클레스가 이름을 디오클레티아누스로 개명하고 황제로 즉위할 때 지켜봤을 것이다.
막시미아누스는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고 깊게 생각하기보다는 행동이 앞섰다. 대단한 정력과 적극적인 성격을 갖췄으며 다부진 체격에 병 하나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체질이었다. 그는 정치가로서는 재능이 없었지만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다. 막시미아누스는 친구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존경했고 그의 결정에 언제나 전적으로 따랐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본인은 자신이 군인이라기보다는 정치가로서 적합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군사적 재능을 만회하려면 막시미아누스의 협력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해 그와 함께 제국을 이끌기로 결정한다.
2.2. 황제 막시미아누스
285년 7월 28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메디올라눔(지금의 밀라노)에서 막시미아누스를 카이사르, 즉 부제로 임명했다. 막시미아누스는 브리타니아, 갈리아, 이탈리아, 아프리카 등 제국 서방을 맡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발칸 반도, 소아시아, 이집트 등 제국 동방을 맡았다. 이후 286년 4월, 막시미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 즉 정제에 즉위했다.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동격의 위치에 올랐지만 권위는 디오클레티아누스보다 쳐졌고, 제국의 전반적인 정책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결정했으며 막시미아누스는 이를 따랐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을 요비우스(유피테르)로 칭했고, 막시미아누스는 헤르쿨리우스(헤라클레스)를 칭했다.
293년,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두 명의 부제를 선임했다.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지명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지명했다. 두 정제는 부제들과의 정치적 결연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부제들의 양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또한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에게 딸을 줬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역시 갈레리우스에게 딸을 줬다.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라인강 전선을 담당했고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 스페인, 브리타니아를 담당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트라키아, 이집트, 소아시아를 담당했고 갈레리우스는 다뉴브 전선을 담당했다.
2.2.1. 바가우다이 반란 진압
285년, 갈리아에서 바가우다이 반란이 일어났다. 4세기의 역사가 유스트로피우스는 바가우다이를 아만두스와 아엘리아누스의 지도하에 있는 농부들이라고 묘사했고, 오렐리우스 빅토르는 그들을 도적이라고 칭했다. 역사가 데이비드 S. 포터는 바가우다이들은 퇴역병과 소작민들의 연합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갈리에누스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통치에 이르는 20년의 세월 동안, 갈리아에서는 많은 소요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농민들의 비참한 삶과 연관이 있었다. 그들은 직속 상급자인 귀족, 군인, 세금 징수관에게 시달렸고 외적의 침략에 고통받았다. 이에 농민들은 절망에 빠져 폭동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이번 대규모 반란도 누적된 불만이 폭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엉성한 무기와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무장한 농민들은 갈리아 전역에서 들고 일어났다. 농민들은 보병이 되었고, 반란에 가담한 목동들은 기병이 되었다. 버려진 마을과 소개된 도시는 불타올랐고, 농민들은 귀족들을 마구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급기아 그들의 지도자인 아만두스와 아일리아누스는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다. 이에 막시미아누스는 로마군을 이끌고 이들을 삽시간에 토벌해 무기를 소지한 농민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나머지 농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2.2.2. 카라우시우스의 난
막시미아누스의 활약으로 갈리아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도버 해협에 인접한 갈리아 북부 해안 지역은 여전히 프랑크 족과 색슨 족으로 구성된 해적들에게 고통받았다. 막시미아누스는 이 해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벨기에에 살고 있던 갈리아의 메나피족 출신의 로마 군인 카라우시우스에게 해적 소탕을 명령했다. 카라우시우스는 나름 일을 잘해 286년 무렵에 해적선을 대량으로 포획했다. 그런데 막시미아누스는 얼마 후 뜻 밖의 정보를 입수한다. 카라우시우스가 프랑크, 색슨 해적이 도버 해협을 통과해서 노략질을 하도록 내버려둔 뒤 그들이 재물과 포로를 싣고 돌아가려 할 때 출동해서 해적들을 소탕하고 재물을 모두 빼앗아 원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듬으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중범죄였고, 막시미아누스는 그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카라우시우스는 자신이 처형될 거라는 걸 눈치채고 휘하 함대와 일부 야만족 용병들을 이끌고 브리타니아로 피신했다. 그는 브리타니아에서 로마에 충성을 바치는 일부 로마군인들을 숙청하고 브리타니아를 장악한 후 스스로를 브리타니아 제국의 황제로 자칭했다. 막시미아누스는 이 반란에 대해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함대가 없었고 마침 헤룰리족과 프랑크족이 갈리아에 침입했던 터라 카라우시우스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한편 카라우시우스는 그의 함대를 강화하고 프랑크족 출신 용병대를 징집하고, 휘하 군대에게 막대한 재물을 나눠줘 절대적인 충성을 확보했다. 이후 그는 갈리아 북부와 도버 해협을 통제하고 자신의 모습을 새긴 동전을 주조했다.
289년, 막시미아누스는 마침내 함대를 갖추고 브리타니아 침공을 개시했지만 실패했다. 공식 기록에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함대가 침몰했다고 적혀 있지만, 카라우시우스는 자신이 군사적 승리를 거뒀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막시미아누스가 브리타니아 제국 평정에 실패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는 당분간 카라우시우스를 건드릴 수 없었다. 이후 막시미아누스는 291년 1월 메디올라눔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만나 카라우시우스 문제를 의논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현실을 인정하고 카라우시우스를 황제로 공인하라고 권유했던 것 같다. 막시미아누스는 어쩔 수 없이 카라우시우스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그의 브리타니아에서의 종주권을 묵인했다.
2.2.3. 라인강 전선
287년, 헤룰리족과 프랑크족이 갈리아를 대거 침범했다. 막시미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침략자들과 맞서 싸웠다. 기록이 미비해 그의 활약상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를 알기 어렵지만, 287년 말에 침략자들을 어느 정도 저지하는 데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막시미아누스는 287년 말 갈리아에서 개선식을 개최하면서 자신의 군사적 승리를 자축했다. 288년, 막시미아누스는 부르군트족과 알레만니족을 공격해 그들을 제압한 뒤 헤룰리족 등 여러 게르만족을 무찔렀다. 로마군은 도망치는 게르만인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괴멸시켰고, 막시미아누스는 여세를 몰아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 영토 깊숙이 들어가 적의 본토를 파괴하고 마을을 불살랐다. 288년 게르만족 제압에 성공한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 재건에 착수했다. 또한 국경 지역에 요새화된 도시를 건설했고 도로를 추가로 개설해 군대가 보다 신속하게 전선에 이동하도록 조치했다.
2.2.4. 브리타니아 평정
292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카라우시우스가 이끄는 군대의 요충지인 볼로뉴 항을 공략했다. 카라우시우스는 볼로뉴 항 상실 후 권위가 급격히 약화되어 293년 부하 알렉투스에게 암살되었다. 막시미아누스는 293년 3월 1일 콘스탄티우스를 부제로 임명하고 브리타니아 평정을 맡겼다. 콘스탄티우스는 먼저 카라우시우스의 동맹 세력인 프랑크족을 격파하고 몇 년간 함대를 건설했다. 296년 중순,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가 함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로 진군하는 동안 갈리아에서 카라우시우스와 동맹을 맺은 게르만족을 견제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아스클레피오도투스를 파견해 알렉투스를 주살했다. 이로서 브리타니아 제국은 멸망했고 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를 되찾았다.
2.2.5. 북아프리카 전선
289년, 유목민족인 베르베르인들이 북아프리카를 침략해 여러 정착촌을 약탈했다. 이에 마우레타니아 총독이 소규모 부대를 투입해 그들을 내쫓았지만, 베르베르인들은 곧 돌아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296년, 막시미아누스는 근위부대, 이집트인, 다뉴브 군대와 갈리아, 게르만 부대, 그리고 트라키아 신병 부대를 동원해 에스파냐로 진군했다. 그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마우레타니아로 진군한 뒤 베르베르인들을 공격했다. 막시미아누스는 297년에서 298년까지 북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인들을 추격했다. 그는 베르베르인들을 아틀라스 산맥 너머로 내쫓았고 뒤이어 베르베르인들의 본토로 쳐들어가 그들의 근거지를 파괴하고 가능한 많은 이들을 죽이며 나머지를 사하라 사막으로 내쫓았다. 298년 초 베르베르인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막시미아누스는 3월 10일에 카르타고에서 승리를 선포한 후 299년 초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2.2.6. 은퇴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로마에서 개선식을 개최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305년 5월 1일 밀라노와 니코메디아에서 열린 행사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동시에 은퇴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에게 정제 자리를 물려줬고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에게 정제 자리를 물러줬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고향인 살로니움에서 가까운 달마티아에 세운 궁전에서 여생을 보냈다. 막시미아누스는 캄파니아 또는 루카티아의 별장에서 은퇴 생활을 보냈다.
막시미아누스 본인은 은퇴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306년,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제위에 복귀해달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빙긋 웃으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막시미아누스가 이 말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계에 복귀하고 싶은 욕망을 단념하지 않았던 듯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진심으로 은퇴하길 희망했고 다시는 황위에 오를 생각이 없었지만, 막시미아누스는 그렇지 않았다. 55세의 막시미아누스는 아직 정력이 넘쳤고 건강했다. 존경하는 친구의 권유에 따라 은퇴하긴 했지만 자신의 넘쳐나는 열정을 억누르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한 그로서는 무리였다. 결국 그는 정계에서 은퇴한 지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정계에 뛰어든다."내 손으로 직접 심은 양배추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도 권력을 추구하는 데서 행복을 찾는 짓을 단념할 텐데."
2.3. 아들의 반란에 가담하다
306년 7월,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가 병사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7월 25일 군대의 추대를 받고 서방 정제를 칭했다. 이에 동방의 정제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부제 취임을 승인해줄 테니 정제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고, 자신의 재위가 합법화되길 희망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갈레리우스는 서방의 정제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지명했다. 그러자 막센티우스는 분노했다. 그는 20여 년간 제국을 위해 많은 공적을 남긴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이었고 갈레리우스의 딸과 결혼했다. 따라서 그는 적어도 부제에 오르기를 희망했는데, 아버지의 부하였던 자의 아들이 단숨에 부제가 되고 자신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막센티우스는 로마에 주둔한 근위대와 시민들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켜 세베루스 황제에게 충성하려는 로마 시장과 몇몇 고위 행정관들을 살해했다. 그 후 그는 306년 10월 28일 황제에 즉위했고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로마의 자유와 위엄을 수호해줄 보호자로 지명되었다. 이때 막시미아누스는 아들의 요청을 수락하고 로마로 달려와 황제의 의복을 입고 원로원으로부터 "2번째 아우구스투스"로 지명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세베루스 황제는 로마로 침공했으나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갖추고 전쟁 경험이 풍부한 막시미아누스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세베루스는 라벤나로 도주했지만 라벤나 시민들에 의해 막시미아누스에게 넘겨졌다. 막시미아누스는 포로가 된 세베루스를 로마로 데려가서 자의를 벗는 조건으로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곧 뒤집혔고, 세베루스는 스스로 혈관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자살했다.
307년 말, 갈레리우스는 반란을 일으킨 막센티우스를 토벌하러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로 진군했으나 결국 승리하지 못하고 본진으로 귀환했다.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수비를 강화하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협상하기 위해 갈리아로 갔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의논한 후 자신의 어린 딸 파우스타를 콘스탄티누스 1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 대가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막시미아누스와 동맹을 체결하고 이탈리아에서의 막센티우스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트리어에서 파우스타와 결혼식을 올린 후 아우구스투스를 칭했다.
2.4. 콘스탄티누스에게 의탁하다
308년 11월 11일, 갈레리우스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를 불러 다뉴브 강 상류의 카르눈툼에서 회담을 열었다. 막시미아누스는 이 자리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정계 복귀를 권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단호히 거부하고 막시미아누스에게 "당장 자의를 벗고 은퇴하라."고 요구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에 대한 존경심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던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설득되어 황위에서 물러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막시미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의 뜻에 따라 서방 정제로 리키니우스를 삼는 데 동의했다. 로마로 귀환한 막시미아누스는 아들과 충돌했다. 막센티우스는 아버지가 회담하러 가서 자신을 정식 황제로 삼도록 유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갈레리우스의 친구일 뿐 별다른 공적이 없던 자가 서방 정제로 즉위하는 데 동의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아들이 자신에게 반발하자, 막시미아누스 역시 격분했다. 그는 어느날 막센티우스가 제국을 약화시켰다고 비난하며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막센티우스의 자의를 강제로 벗겼다. 하지만 병사들은 막센티우스의 편을 들었고, 막시미아누스는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를 떠나야 했다. 막시미아누스는 309년 초에 갈리아로 가서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의탁했다.
2.5. 최후
310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프랑크족이 라인강을 도하해 갈리아를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출정했다. 이때 그는 막센티우스가 남쪽에서 쳐들어올 것을 우려해 막시미아누스에게 일부 병력을 맡겨 아를에서 수비하게 했다. 그런데 막시미아누스는 아를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전사했다며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막시미아누스는 모든 병사들에게 뇌물을 줬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그의 행위를 배신으로 간주했다. 결국 군대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막시미아누스는 아를을 떠나야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프랑크족과의 전투를 중단하고 재빨리 남하했다.
막시미아누스는 마실리아에 숨었고 콘스탄티누스 1세의 군대는 마실리아를 에워쌌다. 마실리아 주민들은 막시미아누스보다는 콘스탄티누스 1세를 따르는 쪽을 선택하고 막시미아누스를 넘겨줬다.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로부터 강하게 규탄받은 뒤 310년 7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버지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막센티우스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동전을 주조하고 아버지의 헌신적인 아들로서 복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막센티우스와 격돌하는 기간 동안에는 막시미아누스를 반역자로 단죄하고 그의 이름이 담긴 모든 비문을 파괴하며 그의 얼굴이 담은 초상화를 없앴다. 하지만 312년 10월 28일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전사시킨 후에는 막시미아누스를 복권시켰다.
3. 평가
막시미아누스는 3세기 말~4세기 초 로마 제국의 탁월한 군략가였다. 그는 재위 20여 년간 제국의 서방을 무난하게 관리했고 게르만족과 베르베르인들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했다. 브리타니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카라우시우스를 당장 제압하진 못했지만, 나중에 유능한 장군이었던 콘스탄티우스 1세에게 브리타니아 문제를 맡기고 자신은 후방에서 그를 지원해 브리타니아를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함께 전장을 누빈 동지이자 친구인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진심으로 존경했고 친구의 모든 결정에 전적으로 따랐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 덕분에 제국 서방의 방위 문제를 짊어질 필요가 없었고 제도 개혁에 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 이렇듯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파트너로서 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으며, 제국은 그 덕분에 평온해졌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은퇴한 후, 막시미아누스의 넘치는 열정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사실 은퇴할 마음이 없었지만 진심으로 존경하는 친구의 설득에 넘어가 은퇴를 택했다. 하지만 그는 별장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기에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건강했고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서 야만족과 맞서 싸우고 싶었다. 결국 그는 아들과 원로원의 설득에 넘어가 황제로 복귀했고 존경하는 친구가 애써 세웠던 체제를 파괴하는 데 일조했다. 급기야 정당한 방식으로 선임되었던 제국의 정제를 자살로 내몰며 상황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그러나 그는 정치 방면에서 심각할 정도로 무능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변덕이 극심했다. 그는 아들의 설득에 따라 황제를 칭하고 사두정치를 흔들어버렸지만 막상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대면하자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하긴 커녕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요구를 받아들여 황위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친구를 진심으로 존경했던 그는 친구의 뜻에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후 아들이 자신에게 반발하자, 그는 아들과 반목하다가 결국 쫓겨나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그는 황제가 되겠다는 야욕을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자신을 받아준 콘스탄티누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대가를 치렀다. 이렇듯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를 완성시키는 데 일조했으나 사두정치를 파괴하는 데도 일조하고 말았고, 평온을 되찾았던 제국은 그로 인해 내란에 휩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