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센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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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
(Marcus Aurelius Valerius Maxentius)
'''생몰년도'''
278년 ~ 312년 10월 28일
'''재위기간'''
306년 10월 28일[1] ~ 312년 10월 28일[2]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아들이자 갈레리우스 황제의 사위, 양자
서기 306년 10월 28일, 공동황제 갈레리우스 황제와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3] 그리고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4]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다. 하지만 그냥 추대된 건 아니고, 본인의 야심과 나름 이유 있는 억울함[5]이 로마 시의 사정과 잘 맞물린 것이다. 이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있었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도 은퇴를 번복하고 로마에 입성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6] 로마에서의 반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서방 정제였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공격해왔으나 아버지의 도움으로 이에 승리한 후 라벤나로 퇴각한(307.2) 세베루스를 포로로 붙잡아 처형한다.(307.9) 그 동안에 부자의 변칙적 행위에 대해서 갈레리우스 본인이 이탈리아로 진압군을 이끌고 왔지만 그 진압군의 대부분이 막센티우스에게 전향해서 갈레리우스는 제대로 된 전투도 못 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7]
이후 북아프리카와[8] 이탈리아 지역을 통치했는데, 콘스탄티누스 측의 악선전과는 달리 교양도 풍부했고, 사람을 이끄는 매력도 충분한 인물이었으며 군사적 지휘 능력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바로 윗 문단의 갈레리우스 군의 전향[9]도 그의 회유, 선전술 등 정치적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내치에도 꽤 재주가 있었던 듯하며, 부친 밑에서 십수 년 넘게 근무했던 군인들을 불과 몇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자기 사람들로 만들 정도로 인덕이 대단했던 인물.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의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막센티우스의 몇 년이 아니라 1년 만에 이뤄서 상위호환이라는 이상한 주장이 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그 전부터도 비르투스를 강조한다는 로마인들이 보기에도 거의 전설에 가까운 대단한 무용을 자랑하는 맹장으로 이름났고 다름아닌 아버지의 군대를 이끌고 1년 동안 야만족과 사투를 치르며 자기 능력을 제대로 입증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막센티우스는 이렇다할 전쟁도 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런 인격적 힘으로 이걸 일궈냈는데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점에서 함부로 막센티우스의 인격적 감화력이 콘스탄티누스만 못하다고 볼 순 없다. 그의 이러한 자제심과 인덕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대놓고 콘스탄티누스를 찬양하는 데도 그들을 처벌하지 않았고, 중과세 탓에 벌어진 경제난으로 로마에서 자신을 욕하는 시위가 일어나는 데도 무력을 써서 진압하지 않은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단히 자제력이 뛰어나고 정치적인 감각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한국, 아니 동양 유교적 기준으론 진짜 임금감은 어떻게 봐도 콘스탄티누스가 아닌 막센티우스였던 상황.
하지만 막센티우스에겐 불행하게도 최대 라이벌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이렇다할 통치술을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던 항우와는 달리 디오클레티아누스갈레리우스의 밑에서 10, 20대, 30대 초반을 보내면서 온갖 통치술을 배운 상태였고 명성도 대단했다. 반면 막센티우스는 질투심이 몹시 강한 아버지가 오히려 콘스탄티누스편에 서서 온갖 악선전을 행했던지라 이탈리아 지역 외엔[10] 여론전에서도 뒤져 있었다.
게다가 막센티우스는 모두의 공적이 된 상황이었다. 당시 실권황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선임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황제를 모았던 회합 때 갈레리우스의 친구였던 리키니우스를 서방의 정제로 올리고 막센티우스를 공적으로 선포한 것이다.[11]
갈레리우스가 사망하게 되자,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부제에서 동방 정제로 승급되었다고 하지만, 리키니우스가 슬금슬금 동방으로[12] 옮겨오려 하고 있어, 적의 적은 나의 친구[13]의 원리로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가 혼인동맹을 맺게 되자 자연스럽게 자신은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동맹을 맺게 된다.
이후 자신은 선전포고 후[14] 서방의 콘스탄티누스와의 결전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상당히 무리하게 군대를 확충하려 했고, 결국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 중과세를 할 수밖에는 없게 된다. 방탕과 폭정을 일삼았다는 기록은 악선전이지만, 그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 무리하게 과세해서 인기가 급격히 떨어졌던 건 사실이며 기독교측의 악선전은 주로 여기에 근거를 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센티우스는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당대 로마인의 수준에서 가능한 모든 수준의 최첨단 전술전략을 동원했다. 휘하의 루키우스 폼페이아누스는 대단히 유능한 지휘관으로 성을 방어하는 입장에서 끊임없는 인병출격으로 콘스탄티누스군에게 상당한 손실을 강요했고 결국 콘스탄티누스측의 포위망을 돌파해서 대규모 지원군을 불러들여 콘스탄티누스군은 꼼짝없이 말라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베로나 전투의 지휘관은 다름아닌 콘스탄티누스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최악의 상황에서 군대를 반으로 갈라 지원군을 몰고 오는 폼페이아누스를 향해 스스로가 선두에 서서 필사적으로 돌격했고, 폼페이아누스가 결국 콘스탄티누스의 돌격대에게 격살당하는 것을 보고 공황에 빠진 베로나 성은 스스로 항복하고만다. 하지만 막센티우스에겐 아직 여력은 남아 있었다. 그 다음 벌어지는 로마 근교에서의 전투에서 여기서 그가 고른[15] 밀비우스 다리는 콘스탄티누스가 어떻게 해도 전술적인 묘수를 부릴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결국, 알아도 대비하기 어려운 콘스탄티누스측의 전투력 탓에 결과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누스측의 대승으로 나타나고 만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당대 로마인들이 몹시 기이하게 생각한 돌격대장형의 지휘관이었다. 로마사를 보면 유명한 장군들이 일기토 등으로 일신의 무용을 뽐내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 중 제일 지명도가 높은 카이사르를 예로 들면, 그에 대한 여러 저술에서 전쟁/전투에 관한 것은 병참, 보급, 공성, 전투대형, 전술 등이 대부분이다. 여러분이 기억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럴 것이다. 그 다음 지명도 되는 스키피오, 폼페이우스, 마리우스, 술라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콘스탄티누스의 지휘 스타일은 쉽게 말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항우와 매우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최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가장 선두에 서서 적 전열의 가장 강한 지점부터 목숨을 돌보지 않고 돌격해 들어가는 전술을 즐겨 썼는데[16], 이건 막센티우스가 아무리 머리를 써도 해결이 어려운 내용이었다.
유방이야 압도적인 정치, 전략적 이점과 여론전에서 앞서서 항우를 제압할 수 있었으나, 이 부분에선 오히려 콘스탄티누스측이 대단히 유리했던 것도 막센티우스측으로선 어쩌는 수가 없었던 상황. 콘스탄티누스는 언제나 그랬듯 목숨을 돌보지 않는 무모한 돌격으로 막센티우스측의 최정예 보병 라인을 뭉갰고, 그 순간 막센티우스의 모든 대비책은 무효화되었다. 결국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의 전쟁 중에 일단 후퇴하다가 로마 근교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테베레 강[17]으로 떨어져 익사하고 만다.[18] 향년 만 34세. 여기서 더 나가서, 막센티우스는 죽은 뒤에도 콘스탄티누스의 승리와 로마 입성 행진에서 시신이 창에 꿰였고 또 그게 경고의 의미로 북아프리카로 보내지는 등 험한 꼴을 당했다.
부친이 좀 더 상식적인 인물이었다면, 통치술을 디오클레티아누스 밑에서 배웠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해 결국 사후에서까지 기독교측의 악선전으로 이미지가 크게 망가진 안타까운 인물.

[1] 로마 시에서의 추대와 즉위 기준. 사두정치의 네 명과는 상관없는 것이라 엄밀히 말하면 참칭자 내지는 찬탈자(Usurper)라서 정제냐 부제냐의 구분은 의미 없다. 하지만 그러고도 6년을 버텼기 때문에 통상 그냥 황제로 인정한다.(...)[2] 정확히 6년이다. [3]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정제 및 부제위를 장군, 총독들끼리만 주거니 받거니 하니까. 시민들에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문서에 써 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탈리아를 본국의 위치에서 격하시켜 일반 속주와 동등하게 했고, 면제되던 세금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로마 시는 예외라 계속 면세의 특권이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정부(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시에서마저도 특권을 폐지해 세금을 걷으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4] 프라이토리아니의 로마 시내 주둔기지를 정리하는 작업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로 계속 차근차근 시행되고 있었다.[5] 막시미아누스는 서방정제로만 286~305로 20년 가까이 있었고, 자기는 그 적자이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에 비해 콘스탄티우스는 그 20년 내내 아버지의 부하인 부제였고, 정제는 꼴랑 1년 하고 죽었는데(그것마저도 막시미아누스가 죽은 것도 아니었고, 자의로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물귀신마냥 같이 용퇴하자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내려간 결과인데) 그의 서자인 콘스탄티누스는 그 1년 사이에 아버지 군대 안에서 뒷공작과 큰 그림을 그려 추대받아서, 먼저 정제로 흥정을 했고 결국 정제는 아니지만 부제를 받아냈으니까. 빡치려면 빡칠 만 하다. 사두정치에 내재된 문제점이 이것이다. [6] 당시 로마는 두명의 황제와 두명의 부황제가 제국을 나누어 지배하는 방식으로 통치되었다.[7] 영어 위키백과에 '''defected(전향) to Maxentius'''라고 나와 있다.[8] 308년 도미티우스 알렉산데르가 북아프리카에서 황제를 자칭해서 311년에 격파. 즉 막센티우스의 실질 지배는 얼마 안 되었다.[9] 갈레리우스는 당시 로마 전체의 최강자였으므로 전투는 최대한 피해야 했다.[10] 앞서 말했듯 막센티우스의 추대와 즉위 과정 자체가 로마 시 및 이탈리아 지역의 사정과 뗄레야 뗄 수 없다.[11] 정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죽였다는 팩트가 확실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또한 저 회동 자체가, 사두정치를 지키려는 의도였겠지만, '''오히려 스스로 사두정치를 파괴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정제를 부제에서 올려야지, 웬 듣보잡을 자기 친구라고 해서 바로 정제로 올렸기 때문이다.[12] 서방에는 경쟁자가 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 둘인데 동방에는 경쟁자가 다이아 하나인 점 때문으로 보인다.[13] 원래 리키니우스는 서방 정제로, 서방에서 가장 중요한, 즉 정제가 영유할 땅은 당연히 로마 시가 있는 이탈리아고, 그런 이탈리아는 식량 안보 및 지정학적 특징 때문에 북아프리카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원래라면 리키니우스의 땅이었을 곳을 막센티우스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14] 저 자는 20년 간 서방정제였던 우리 아버지이자 자기 장인을 죽인 놈이다.[15] 로마 근교이므로, 오늘날 영국-프랑스 쪽의 콘스탄티누스가 공격하는 입장이었고, 이탈리아에 웅거했던 막센티우스는 수비하는 입장이었다.[16] 유럽에는 그 당시까지도 등자가 없었기 때문에 기병의 돌격력에 제한이 크게 걸렸고, 양성도 쉽지 않은 기병전력을 잘 훈련된 밀집보병대에 꼴아박는건 전술적으로는 대단히 불리한 행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의 없는 장점까지 만들어가며 칭송하기 바빴던 기독교측 기록도, 이러한 일면에 대해선 강력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17] 로마 시의 젖줄인 그 강이 맞다.[18] 퇴각하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했는데, 그런 강물과 다리 자체가 전장이었으므로 사고사라기보다는 전사로 보는 것이 더 맞다. 바다나 강에서 선박끼리 해전을 치르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사고사가 아니라 전사로 보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