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레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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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Gaius Galerius Valerius Maximianus)
'''생몰 년도'''
260년 ~ 311년 5월 5일[1]
'''재위 기간'''
293년 3월 1일[2] / 305년 5월 1일[3] ~ 311년 5월 5일

1. 소개


로마 제국의 황제. 사두정치를 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 갈레리아 발레리아의 남편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동방 부제를 거쳐 장인의 은퇴 후 동방 정제로 있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세르디카(오늘날의 불가리아 소피아) 근교 로물리아눔 출신이다. 아버지는 트라키아인이었고 어머니는 다키아인이었다고 전해진다.[4] 미천한 변방 출신으로 여동생이 있었는데,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바로 갈레리우스 여동생의 아들이다.
부친은 일리리아 일대에서 살던 목동이었고, 갈레리우스는 비슷한 출신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직업을 가업으로 이어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얻게 된 별칭이 집안 가업인 목동에서 따온 아르멘타리우스(Armentarius)였다.

2.2. 황제


대개의 일리리아 출신 황제들이 그렇듯, 출세를 위해 로마군에 입대해 고위군 장교를 거쳐 로마 제국 지배층까지 오른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비슷하게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고위장교를 거친 세베루스 2세와 달리, 굉장히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또 그는 부제로 지명되기 전부터 탁월한 전략가이자 뛰어난 다뉴브 일대 주둔군 장군으로 평가받았다.
여기서 충격과 공포인 이야기가 있는데, 기독교도 저술가 락탄티우스(Lactantius)[5]에 따르면 갈레리우스는 본인을 '로마인'[6]이 아닌 ''''다키아인''''으로 여겼으며, '''스스로가 로마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내어 로마 원로원과 시민, 즉 '''SPQR'''이 경악했다고 한다. 200년 전 트라야누스다키아 전쟁을 통해 다키아를 속주로 삼은 일을 너희들도 느껴보라는 양[7] 로마 시민들을 가혹하게 취급한 것도 모자라, 제국의 이름마저 '로마 제국'에서 ''''다키아 제국''''으로 바꾸는 게 어떠냐는 제안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단, 이런 반로마적 풍문은 현 학계에서는 완전히 거짓으로 판단된다. 락탄티우스는 기독교인이자 원로원이었고 원로원을 처형하고 기독교인을 참수한 마지막 황제가 그에게 좋게 보이기 만무한 셈[8] 구글에 검색만해도 관련 검색은 위키를 제외한 그 어떤 글에도 그가 반로마였다는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책 제목만 봐도 the end of persecutors로 다분히 기독교적 성향이 들어가 있는 셈. 애초에 이것이 말이 되지 않는 이유인 것이 사두정치라는게 자신의 혈육에 황위를 물려주지 않고 지방 총독에서 뛰어나고 헌신적으로 뽑아쓰겠다는 것인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저런 사상을 가진 총독을 황제로 임명할리가 없고, 동시대에 존재한 다른 역사가들 글에서 그러한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갈레리우스는 기독교측에서 하는 말과는 달리 생각보다는 상식적인 인물이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충성을 다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위였던 건 맞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에게선 자녀를 얻지 못했고, 그 전에 얻은 사생아들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착한 딸이 자기 자녀처럼 입양해서 키운 가정 상황도 있다. 그는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사두정치 체제를 확립하면서 로마제국의 동부를 다스리는 부제[10](카이사르)에 임명되었으며, 도나우 강변에 웅거하던 이민족을 격퇴하여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는 한편, 296년에는 사산조 페르시아나르세스 1세에게 3연패했지만 298년에는 도리어 사탈라 전투[11] 에서 크게 이겨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했고 티그리스 강 동쪽까지 진출하는 쾌거(로마 제국 최대 동진)를 이루는 등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였다. 공세종말점이라는 것이 있기에 수도를 계속 영유(즉 완전병탄, 멸망)할 수는 없었지만, 수도와 아르메니아 지방을 바꾸기로 함과 동시에 향후 40년 동안 계속될 평화조약을 맺었다.[12](299년) 나아가 이런 전공을 근거로 테살로니카개선문[13]을 세웠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동시에 제위에서 물러난 뒤 서부의 통치자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함께 정제(아우구스투스)가 되어 동부를 다스렸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스렸던 아나톨리아를 접수해서 부제 시절보다 큰 영토를 손에 넣었다. 사실 그가 공동정제이긴 했지만, 동방 부제인 자기 조카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서방 부제였던 원래 그의 부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는 지명시 본인의 입김이 많이 들어갔으므로 실질적으로 그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단독통치자나 다름 없었다. 이때 갈레리우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서 인계받았던 큰 자산은 아나톨리아 외에 다름아닌 콘스탄티누스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휘하에서도 이미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맹장이었고, 갈레리우스 휘하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갈레리우스에게 일종의 인질로서 의미도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콘스탄티누스와 갈레리우스 사이의 갈등은 기독교측에서 지나치게 과장한 측면이 있으므로 이 부분은 상당히 깎아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상관에게 크게 위협받고 있는데 뭐 보상 받을 게 있다고 남들 보기에 목숨을 내던지는 것 같다고 평가받을만큼 사정없이 적한테 돌격해서 자기 재능을 자랑하는 바보 같은 장군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306년 공동 통치자인 동시에 명목상으론 상급자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아들을 보내달라고 했을 때 바로 안 보내주고 뜸 들인 건 사실로 보이지만, 굳이 콘스탄티누스가 위협이 될 것 같고 인질로도 쓸만하다는 이유 외에도 콘스탄티누스 자체가 워낙 놓치기 싫은 인재였던 이유도 컸다고 봐야 한다.
물론 콘스탄티누스가 브리타니아의 픽트족 원정 중에 죽은 콘스탄티우스 1세의 뒤를 이어, (7.25) 순번을 깨고 아버지 군대의 추대를 받아[14] 정제를 칭하는 사태가 발생했을 때 갈레리우스가 화가 났다는 서술[15] 은 마냥 무시하긴 어렵지만, 여하튼 콘스탄티누스를 부제로 승인한 건 갈레리우스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를 제압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합법성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측근이었던 서방 부제인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서방 정제가 되어 콘스탄티우스 1세의 히스파니아 지역을 인수받았고(306.여름), 콘스탄티누스도 이를 인정한다. 이런 식으로 불만을 잠재우게 되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막센티우스가 로마 시의 상황을 적절히 이용해[16] 반란을 일으켜[17] 그 또한 정제를 칭하면서(306.10) 사두정치는 그야말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막센티우스 부자에게 라벤나에서 항복한 후(307.3) 처형당했고(307.9) 이후 갈레리우스 본인이 사태해결을 위해 로마로 진공해가지만 이 역시 막센티우스의 회유로 휘하 병력의 다수가 그에게 전향하면서(...)[18] 실패로 돌아갔고, 이 시점에선 사두정치는 전쟁 없이 제 정상으로 돌리기는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막시미아누스막센티우스 부자의 분열을 틈타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308년 회담을 갖고 막시미아누스의 은퇴, 자신의 '술'친구였던[19] 리키니우스를 서방 정제로 올리는데[20] 성공하면서 제3차 사두정치를 열게 된다. 그리고 막센티우스를 공적으로 선포하게 된다. [21]
하지만 그동안 동방 부제직에 있었던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서방의 콘스탄티누스는 무명의 리키니우스가 서방 정제직에 오른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22] 이는 그의 사후 사두 정치가 완전히 붕괴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는 311년, 병(장염)에 걸려서 죽을 것임을 느끼자 니코메디아에서 마지막으로 기독교 관용령을 내리고[23] 시르미움에서 죽게 된다. 향년 만(연) 51세였고 죽을 때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24][25]

[1] <비잔티움 연대기>에서는 4월이라고 한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4월 or 5월이라고 한다.[2] 부제로서[3] 정제로서[4] 트라키아인과 다키아인은 언어, 혈통적으로 상당히 유사하다고 한다.[5] 영어 위키백과 : Lactantius[6] 이미 카라칼라의 시민권 칙령에서 백 년 가까이 지나서, '트라키아계 로마인'이나 '다키아계 로마인'도 매우 자연스러운 개념이었다.[7] 410년 로마 시 함락과 약탈 때의 알라리크도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 포위한 다음에,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굶주렸다면서, (당시 세계를 몇 백년간 지배해왔기에 배고픔 따위는 장식이었던) 로마인도 이런 굶주림을 겪어봐야 한다고 했다고.[8] 이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칙령으로 크리스트교에 대한 박해가 멈춘다[9] 그 (이란 내) 근거지와 출신종족은 달랐지만(파르티아는 이란 북동부,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 때와 마찬가지로 중남부 파르스(페르세폴리스)) 이란계로서의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묶는 데에 무리는 없다. 여기 나무위키에서는 여러 문서로 나뉘어 있고, 그 중 가장 마지막 전쟁이 '페르시아 전쟁'의 마지막 항목에 약술되어 있지만,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Roman–Persian Wars로 총정리된 문서가 있는데, 여기에서도 'Persian'에는 사산은 물론, 파르티아도 포함된다.[10] 발칸반도, 한편 동방정제는 아나톨리아+레반트+이집트. 정제가 훨씬 많이 가져간 것 같지만, 대신 사두 중 페르시아와 혼자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1차적으로는 혼자 싸워야 하므로, 그 자원 소요를 생각할 때 생각보다 불공평한 것은 아니다. 제정성립 이후로 서로마 말기 훈족과 게르만족이 서로마 각지에서 자기네 왕을 세우기 전까지는, 로마의 주변에서 부족 단계를 벗어나 제대로 국가체계와 독립된 군주를 가진 나라는 파르티아-페르시아[9]의 이란계 국가와, 다키아 뿐이다! 그런데 다키아는 체급, 국력이 페르시아와는 비교가 안 됐으며 위치가 로마의 저 먼 동쪽 끝이 아니라 중북부 정도로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로마의 국력투사가 어렵지 않아서 금방 망했다. 남는 것은 파르티아-페르시아 하나로, 당시 페르시아는 그런 미친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11] 기록에 따르면 본인이 직접 배추장수로 위장해서 페르시아 군 군영에 잠입하여 취약점을 알아낸 후 아침에 그 부분으로 군대를 보내 승리하였다고 한다[12] 여담으로 이때 받은 전쟁 배상금들이 엄청나서 로마로 수송하는 로마군 수송 담당관들이 골치를 앓았다고 한다[13] 영어 위키백과 : Arch of Galerius and Rotunda[14] 계승원칙이라는 게 엄연히 있는데도, 뒷공작 없이 그냥 추대를 받았을까는 의심스럽다. 콘스탄티누스 문서 참조[15] 그런데 <비잔티움 연대기>에서는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 시대 동시대의 '락탄티우스'라는 기독교계 학자의 기록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가 갈레리우스에게 보고할 때, 정제 추대 사실도 모자라서 '''정제의 복장을 입고 월계관까지 풀세팅한 자신의 초상화'''(...)를 같이 보냈다고 하며, 갈레리우스는 그렇게 받은 초상화를 냅다 불 속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측근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그제서야 분노를 진정시키고 부제 지위와 갈리아-브리타니아의 영토를 인정했다고 한다.[16] 원로원 세력, 일반 시민,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모두가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정부에 불만이 있었다.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정제 및 부제위를 장군, 총독들끼리만 주거니 받거니 하니까. 시민들에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문서에 써 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탈리아를 본국의 위치에서 격하시켜 일반 속주와 동등하게 했고, 면제되던 세금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로마 시는 예외라 계속 면세의 특권이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정부(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시에서마저도 특권을 폐지해 세금을 걷으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프라이토리아니의 로마 시내 주둔기지를 정리하는 작업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로 계속 차근차근 시행되고 있었다.[17] 막시미아누스는 서방정제로만 286~305로 20년 가까이 있었고, 자기는 그 적자이지만 아무것도 아닌데, 그에 비해 콘스탄티우스 1세는 그 20년 내내 아버지의 부하인 부제였고, 정제는 꼴랑 1년 하고 죽었는데(그것마저도 막시미아누스가 죽은 것도 아니었고, 자의로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물귀신마냥 같이 용퇴하자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내려간 결과인데) 그의 서자(정략결혼이지만 어쨌든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를 버렸으니까)인 콘스탄티누스는 그 1년 사이에 아버지 군대 안에서 뒷공작과 큰 그림을 그려 추대받아서, 먼저 정제로 흥정을 했고 결국 정제는 아니지만 부제를 받아냈으니까. 빡치려면 빡칠 만 하다. 사두정치에 내재된 문제점이 이것이다.[18] 갈레리우스가 당시 전 로마의 최강자였는데, 그 부대를 싸움 없이 회유로 분해시킨 것은 막센티우스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단지 콘스탄티누스가 모든 능력치가 더 좋았을 뿐(...)[19] <비잔티움 연대기> 의거. [20] 갈레리우스가 정, 부제를 3명이나 꽂아넣을 만큼 강력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의 2세대(?)를 확실히 주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21] 정제 발레리우스를 죽였다는 팩트가 확고하기 때문에...[22] 저 회동 자체가, 사두정치를 지키려는 의도였겠지만, '''오히려 스스로 사두정치를 파괴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정제를 부제에서 올려야지, 웬 듣보잡을(리키니우스는 이 당시 진짜 듣보잡이었다) 자기 친구라고 해도 바로 정제로 올렸기 때문이다.[23] 영어 위키백과 : Edict of toleration by Galerius. 이 전까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기조를 그 또한 이어오고 있었다.[24] <비잔티움 연대기>에 의하면 기독교인 유세비우스(에우세비우스)가 그의 죽기 전 상태를 폭식으로 인한 종기 및 종양으로 서술했는데, 비대한 기름 덩어리, 악취, 벌레 등 일부러 악의적인 표현을 같이 써 사실상 잘 죽었다고 비꼬았다. 기독교를 내내 박해했던 사람이니만큼 그로서는 고소(?)했을 것이다.[25] 한편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 문서에서 인물 소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그에 대한 전기문 을 쓴 사람이며, 이 즈음의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는 꽤나 중요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