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폭탄 테러

 


1. 개요
2. 사건 과정
3. 사건 조사
4. 사건 이후
5. 2005년 발리 폭탄 테러


1. 개요


2002년 10월 12일에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이슬람 과격파 조직의 테러 사건으로, 202명의 사망자와 209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영어로는 2002 Bali bombings. 밑에 후술한 2005년 발리 폭탄 테러와 구별하고자 연도를 썼다.

2. 사건 과정


2002년 10월 12일, 인도네시아 발리가 가장 바쁜 때였고, 3시간 거리에서 온 호주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특히 서양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쿠타 해변은 사람이 많이 붐볐다. 한편 압둘라 아지즈, 일명 사무드라는 독실한 무슬림으로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는 광신적 테러리스트였다. 제마 이슬라미아[1]라는 조직에서 일했는데, 알 카에다에게 수백 명의 조직원들이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네시아로 옮겨진 비밀 캠프에서 훈련 받았다. 이후 사무드라는 임대 주택에서 5명과 전략 회의를 하고, 사제 폭발물 1톤을 미쓰비시 자동차의 L300 에 싣고는 쿠타 해변 북동쪽의 미 영사관과 레기안 거리의 패디스 바와 사리 클럽에 테러를 준비 중이었다.
9시 30분, 번화가 레기안 거리의 클럽과 바들이 문을 열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사리 클럽에는 사람들이 약 350여 명이 들어섰고, 테러범들은 폭발 위험성이 있기에 차를 천천히 몰아가며 레기안 거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10시 20분에 쿠타 해변 리조트 쪽에 들어섰고, 11시 1분에 레기안 거리에 도착했다. 한명은 미국 영사관 밖에 설치한 폭탄을 터뜨리기 위해 스쿠터를 타고 떠났다. 두번째 테러범 패리도 폭탄 조끼를 입고 패디스 바로 향했다. 혼자만 남은 테러범은 길거리에 차를 세워둔 채로 내리지 않아 차가 정체되기 시작했다.
이후 '''패디스바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근처 사리클럽에서는 폭발음에 놀라 다들 춤을 멈추고 무슨 일인지 바라보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패디스바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 가운데 24살의 아나산이 밴 안의 스위치를 작동하면서 '''밴이 폭발했다.''' 사리 클럽은 벽이 무너져 내리고 불이 붙었다. 밴 뒤에 정체되어 있었던 차량들도 그자리서 폭발하고,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들에도 불이 붙었다가 연료탱크가 계속해서 터지면서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반경 120m의 건물에 불이 붙고 밴이 있던 자리에는 60cm깊이의 구덩이가 생겼다. 화상을 입거나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쿠타 해변의 교통 과장 아구스 뱅뱅[2]도 현장에 도착해 구조현장을 지휘했다. 클럽에선 생존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시체와 파편,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을 밟고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한편 호주에서 잠시 놀러온 축구 클럽의 벤 클로헨시[3]는 파편에서 빠져 나온뒤 생존자들을 벽위로 밀어 올려주며 구조하기 시작했다. 희생자들중 대부분은 서양 관광객이었고, 근처 덴파사에서 잠시 놀러온 사람들도 있었다.
새벽 1시, 응급 환자 시스템이 마비됐다. 현장의 300여명의 부상자들과 모여든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모두 구조를 하고 있었다. 구조차가 모자랄 지경에 이르자 자가용과 오토바이, 트럭, 스쿠터까지 동원해가며 부상자를 지역의 병원에 데려갔다.[4] 대부분의 부상은 화상이었고, 그 외에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은 환자들도 많았다. 이후 3일간 파편속에서 희생자를 찾아냈고, 총 20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그중 88명이 호주로 가장 많았고, 인도네시아가 38명, 영국 27명, 미국 7명, 스웨덴 6명, 독일 6명, 네덜란드4명, 프랑스 4명, 뉴질랜드 3명, 스위스 3명, 브라질 2명, 캐나다 2명, 대한민국 2명, 일본 2명, 에콰도르 1명, 남아프리카공화국 2명, 대만 1명, 이탈리아 1명, 포르투갈 1명, 그리스 1명, 아일랜드 1명, 그외에 신원불명의 시체 2구 였다.

3. 사건 조사


28 헥타르에 달하는 피해 지역을 조사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서는 경찰청장 '아이 마데 파스티카'를 수석 수사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파스티카는 인도네시아에는 이러한 테러를 조사할 인력과 경험, 기술이 없다 판단하고 호주 연방 경찰 AFP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레이엄 애쉬톤이 합동수사관으로 파견되었다. 애쉬톤은 이후 수석 법의학 화학자 데이빗 로이즈 등 140여명의 인원과 함께 발리로 향했다.[5]
처음으로 얻은 테러에 대한 단서는 미 영사관의 신고였다. 레기안 거리의 폭탄이 터진지 1분도 안돼 폭발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길거리에 있던 폭탄이 터진 것이었는데 보도 블럭과 떨어져 있던 핸드폰 조각에서 TNT 양성반응이 나왔다. 핸드폰을 이용해 원격 폭탄을 만든것이 밝혀졌다.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새로운 테러방식을 전세계에 소개''' 하는것이 이들의 목적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수사한 지 2주가 지났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힌두교였던 지역인들이 희생자의 영혼이 지역에 출몰한다며 파편을 바다에 수장해 정화하는 의식을 치뤄야 한다고 주장 한 것이다. 표본을 더 채취할 거라면 2시간 안에 끝내라 하자 인도네시아와 호주의 수사관들은 테러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으면 이곳의 주 산업인 관광업이 더이상 성장하기 힘들것이라며 지역인들과 협상을 한뒤 하루가 지나서 협상이 끝나고 2주의 시간을 겨우 얻어냈다.
수백 명의 목격자들과 인터뷰를 한 뒤 목격자들이 말했던 '길거리에 세워져 있던 하얀 밴' 의 잔해 찾아나섰다. 이후 수색 4일 만에 폭발로 사리 클럽 건너 편의 2층 건물 지붕에 올라간 1.5m 길이의 자동차 잔해를 발견했다. 차량의 엔진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아무리 조사해도 등록 번호가 나오질 않았다. 테러범들은 이미 이런것을 예상하고 등록번호를 지웠고, 결국 해당 잔해는 일단 둔채로 다른 단서를 찾아나섰다.
문제는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물을 뿌린 상태여서 폭발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태였다. 결국 '''가로수의 나뭇잎과 표지판, 전화선'''까지 조사해가며 폭발물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나뭇잎에서 염소산 칼륨 양성 반응이 나왔다. 산업용 세정 물질에서 발견되며, 테러범들이 자주 만드는 사제 폭탄의 재료이기도 했다. 조사 팀은 염소산 칼륨을 다량 구매한 사람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추적은 실패로 돌아갔고, 밴의 주인을 찾는것도 실패로 돌아갔다.
패디스 바에서도 조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작은 구리선 하나가 발견되었다. 구리선에서 폭발물 양성 반응을 보였고 폭발물의 뇌관선이었다는것이 밝혀졌다. 이후 바에 줄을 설치해 교차점을 찾아내 폭탄이 터진곳을 발견했다. 폭탄이 터진 곳은 지상 1m 지점이었고, 바로 위에서 다량의 인체조직이 발견되었고, 그 인체 조직이 다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자살 폭탄 테러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파스티카는 수사 종료 6일전 혹시 모르니 차량 잔해를 다시 조사하라 명령하고 조사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사건 해결을 부탁하는 기도를 드리러 힌두교 신전에 갔다가 번호를 발견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인도네시아의 상용 차량은 차량 등록번호를 3군데에 등록하는데 테러범이 미처 지우지 못한곳이 있었다. 차량의 전 주인이 철판으로 용접하면서 가린 차량 번호를 발견하지 못 한 것이다. 발견한 차량 번호를 조회했고, 7명의 소유주중 마지막 소유주인 앰로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앰로지는 이미 제마 이슬라미아의 테러 조직의 일원으로 알려진 상태였다. 이후 앰로지는 2002년 11월 5일 자바 섬에서 '''웃으면서''' 체포됐다. 이후 인터뷰로 '''테러를 할때 황홀했다'''고 밝혀 세간을 놀라게 했다. 몇주후 테러를 지휘한 사무드라를 비롯한 공모자들도 체포했다.
이후 34명의 제마 이슬라미아 일원이 유죄를 인정받았고 3명이 사형을 받고 나머지는 구속되었다.

4. 사건 이후


호주를 포함한 서방 정부들이 동남아시아에 테러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 밝혀졌다. 미국과 호주는 자국 여행객들에게 경고를 미리 하지 않아 피해를 봤다.
폭탄 테러 발생 한 달이 지나고, 수사관들은 현장을 주민들에게 넘겼고, 주민들은 파편을 바닷물에 정화하는 의식을 치루었다.
사고가 발생한 지 10년이 훌쩍 지난 2013년에도 발리에서 규모가 있는 레스토랑이나 리조트에 입장할 때는 모든 차량과 사람을 금속 탐지 한다. 여성이 들고 다니는 핸드백의 경우에도 얄짤없이 검색한다.(다만 쿠따나 덴파사, 울루와뚜 같은 해안 관광지에서 주로 검문이 빡센 편이며, 우붓 같은 내륙은 상대적으로 검색 강도가 강하지 않다.) 그만큼 발리와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 사고였던 셈이다.
2020년 12월에 폭탄 제조업자가 체포되었다.#

5. 2005년 발리 폭탄 테러


하지만 2005년 10월 1일, 발리는 또 다시 폭탄 테러 참극을 당해야 했다. 저녁 8시, 식사를 하러 온 관광객들로 붐비는 발리 짐바란해변과 쿠타해변의 식당 3곳에서 3건의 폭탄이 몇 분 간격으로 잇따라 터져 범인 3명을 더하자면 모두 23명이 죽었다. 범인은 자살 폭탄 테러로 3명 모두 그 자리에서 죽었다.
한국인 피해는 6명 부상으로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1] Jemaah Islamiah. 언론에서는 이름이 너무 긴건지 '''J.I''' 라는 약칭으로 부르기도 하며, 인도네시아-필리핀 남부-말레이시아를 아우르는 범 이슬람 국가 건설을 도모하던 단체였다.[2] 이슬람 교도였는데 이 테러를 일으킨게 이슬람 극단주의의 짓이란걸 알게되고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고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3] 축구 클럽 회원 21명과 함께 갔지만 14명과 함께 살아서 돌아가야 했다.[4] 이 과정에서 서로 떨어져서 실종자가 일시적으로 증가했다.[5] 향하는 비행기에는 희생자를 찾으러 가던 호주인들이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