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문화
1. 융합된 문화
발해는 고구려 문화의 토대 위에서 당나라의 문화를 수용했으며, 말갈인의 토착 문화와 융화되어 이를 바탕으로 발해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을 본떠 계획도시로 건설하였는데, 외성과 내성, 주작대로를 갖추었다. 그 안에 궁궐과 절을 세웠는데 궁궐터에서 발견된 온돌 장치, 절터에서 나온 벽돌과 기와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하고 있다. 무덤을 보더라도 고구려와 당나라의 영향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가령 정혜공주묘는 굴식 돌방 무덤 양식으로 고구려 고분에서 보이는 모줄임천장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보다 늦게 만들어진 정효공주묘는 벽돌 무덤으로 당과 고구려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데, 내부의 벽화는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한편 발해 초기의 흙 무덤과 출토 유물을 통해 말갈족 계통의 전통도 알 수 있다.
발해에서도 같은 시대 신라나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성행하여 주요 도시에 사찰을 세웠다. 수도 상경에서는 무려 10여 개의 대규모 절터가 발견되었고,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많은 불상이 나왔으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탑과 석등도 볼 수 있다. 탑은 당나라의 양식을 따라 벽돌로 만들었으며, 그 중엔 무덤 위에 세운 것도 있어 발해만의 특색을 보여준다. 절에 세운 석등 중에는 높이가 6m가 넘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석등도 있어 발해인의 힘찬 기상을 느낄 수 있다.
2. 문학
발해가 ‘북국(北國)’이라면 신라는 ‘남국(南國)’이라 할 수 있다. 두 나라가 함께 있는 시대를 ‘남북국 시대’라고 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이 부분은 조동일 교수의 책을 참고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현대적인 해석이다. 당시에 발해나 신라, 혹은 당에서 두 나라를 남국과 북국으로 대응되는 것으로 인식했다고 볼 뚜렷한 근거는 없다. 최치원 등이 발해를 북국으로 칭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현대적 해석을 배제하면 사실 단순히 북쪽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남국인 신라에 대응되는 북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이유가 없다. 또한 발해 입장에서 신라를 남국으로 칭한 근거 역시 찾기 어렵다. 발해 관련 사료로 일본이 주고 받은 국서가 일본에 많이 보관되어 있으며, 당나라 유학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중 당나라 문인이 발해인에게 준 시 등도 소중한 자료로 연구되고 있다. 발해는 당나라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일컬을 정도로 번영을 누리고 높은 한문학 수준을 자랑했지만, 발해를 멸망에 이르게 한 거란족의 침공으로 발해에서 편찬했을 거의 모든 문헌 자료가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발해 문학 관련 사료는 외국에 전해진 시문과 고고학 발굴의 성과 뿐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발해에도 자국어를 기록하는 방법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구당서>에서 발해에는 “자못 문자 및 서기(書記)가 있다”라고 한 말이 그 증거이며, 한자를 이용해서 독자적인 표기를 했던 것이 거의 확실시되나 아직 해독되지 못했다. 발해 집터를 발굴했을 때 출토된 기와 등에 문자가 발견되었고 또한 중국 사료에는 당 현종 시절 발해가 보낸 외교 문서를 당 조정이 해독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다가 이태백이 겨우 해독해냈다는 기록도 있어서 이두와 유사한 발해만의 독자적 표기방식도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발해 문인 중 오늘날까지 작품이 남아 전하는 경우는, 대부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시가 일본 문헌에 수록되어 전하는 것들이다. 일본에 간 발해 문인들은 자리잡기 시작한 일본 한문학에 상당한 자극과 영향을 미쳤다. 양태사, 왕효렴, 배구, 배정 등의 시가 남아 있다.
사신의 일행에 동참한 승려들의 시도 몇 편이 남아 있다. 발해 문학 작품이 국내에 남은 것은 2편의 비문(碑文)뿐인데, <정혜공주묘비>와 <정효공주묘비>이다. 이 비문은 변려문의 형식을 갖췄으며, 감각과 표현을 최대한 세련되게 갖춘 귀족 문학의 기풍을 아주 잘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두 비문은 고유 명사나 숫자 따위만 다르고, 다른 대목은 거의 같았다. 고정된 격식을 마련하고 필요한 대목만 고쳐 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홍라녀 녹라녀 전설'''은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얼마 안 되는 발해의 전설이다. 영화 무영검의 모티프가 되었다.
2.1. 언어
언어는 역사 문화의 계승관계 확인의 주요 기준이기 때문에 발해인들이 고구려어를 썼는지, 말갈어를 썼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발해는 그들의 왕을 가독부, 성왕, 기하로 불렀다는 신당서의 기록만이 남아있다.
이 때 가독부란 최고 통치자를 일컫던 발해의 고유어일 가능성이 높으며 마치 신라의 거서간, 차차웅, 마립간의 호칭과 같은 예다. 그리고 발해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면서 발해의 언어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일부 중국학자는 한자의 변용이라고 주장했으나 구당서에 따르면 발해는 자못 문자와 서기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해 문자와 한자 경전과 서적이 있다는 뜻으로 발해 문자가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다.“그 나라 사람들은 왕을 일컬어 가독부(可毒夫”) 또는 성왕(聖王) 또는 기하(基下)라 한다. 명(命)은 교(敎)라 한다. 왕의 아버지는 노왕(老王)·어머니는 태비(太妃) 아내는 귀비(貴妃)·장자는 부왕(副王) 다른 아들들은 왕자(王子)라 한다.”『신당서』권219, 북적열전 발해
그렇다면 발해 언어는 ‘말갈어’를 썼는가? 이 부분은 역사민족학적으로 발해 언어 계통을 짐작해 볼 필요가 있다. 구당서에 따르면 발해를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같고 문자 및 서기도 상당히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에는 ‘그 나라가 귀중히 여기는 것은 태백산의 … 등이 있다. 이 밖의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대개 같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말갈을 동이로 보았던 북사에서는 거란과 말갈의 풍속이 같다고 기록했다. 그럼 기록에 따라 고구려와 거란, 말갈과 발해는 모두 같은 풍속인가. 먼저 고구려와 거란과의 관계는 정치와 종족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대부분의 말갈은 고구려의 변방인을 일컫는 말이었기에 고구려와 말갈의 풍속이 같다는 것은 당연한 소리다. 고구려와 말갈을 같이 보았기 때문에 기록에 발해와 고구려와 같은 풍속이라 기록되어 있지 말갈과 같았다는 소리는 없다는 것이 증거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발해 언어를 ‘말갈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때 말갈은 절대 흑수말갈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발해는 고구려어와 비슷한 풍속을 지녔기에(고구려를 계승했기에) 언어 또한 같았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언어와 발해의 언어 사이에는 ‘구결문자’가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구결문자는참고 이미지 한자를 쉽게 해독하기 위해 단어나 구절 사이에 들어가는 토로, 차자법 한자를 빌려 고유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런 구결문자나 차자법은 신라를 비롯해 삼국에서도 발견되는 고유어 표기로 발해가 우리 민족의 한 맥락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1] 중국 조선족 학자 최희수는 발해 기와에서 발견된 특이한 문자들이 한자의 속자나 오자가 아니라 발해의 고유 문자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최희수, 渤海文字에 대하여: 李强선생과 商論함, 한국전통문화연구 6권, 1990).
반면 발해의 말갈어 사용에 주목한 측으로는 러시아의 발해와 여진시대 전문가인 E.V. 샤프쿠노프가 있다. 그는 발해문자가 여진 문자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고,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발해 문자가 여진 문자의 모태라는 가설을 제출하였다. 또한 샤프쿠노프는 '가독부(可毒夫)'가 다스린다는 의미의 만주어 '카달암비(Kadalambi)'와 연관성이 깊다고 추론했다.
3. 음악과 무용
3.1. 왕립 음악기관
『발해국지장편』에 따르면, 발해국의 음악과 무용을 포함한 공연 활동과 관련된 중앙행정기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의부’는 예의와 제사를 관장하는 육부 중 하나로, 의부의 관리로는 경 1명과 소경 1명이 있었다. 발해의 궁중 의식과 제사에는 의식 음악과 의식 무용이 반드시 포함되었는데, 이러한 공연활동은 의부의 산하기관이었던 ‘태상시’가 관장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태상시의 경 1명이 교묘, 즉 하늘의 제사와 종묘의 제사를 관장했다고 전해지는데, 경 1명 이외의 나머지 태상시 관리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태상시는 신라의 음악서와 같은 발해의 왕립 음악기관으로, 제례악 외 발해의 궁중 의식과 궁중 잔치를 위한연례악 등의 공연 활동을 교묘와 더불어 관장하였다.
3.2. 발해금과 발해교방
3.2.1. 발해금
『송사』[2] 131권에서는 ‘발해금’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발해금이 어떤 종류의 현악기였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크게한국 음악 학자의 해석과 중국 음악 학자의 해석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한국 음악 학자의 견해를 보면, 발해금은 악기명대로 발해국의 금으로 해석된다. 옛날에는 악기 이름에 가야금, 신라금, 고려적, 백제적과 같이 국명을 앞에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발해의 대표적인 현악기가 금이었다면, 발해금을 거문고로 보는 것이 순리에 맞는다. 거문고가 고구려의 멸망 이후에도 계속 연주되어 발해악의 대표적인 현악기가 되었으리라는 개연성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 첫 번째 근거이고, 거문고가 고구려의 멸망 이후에도 일본 조정에서 군후로 불렸으며, 군후를 가르친 고구려 악사와 백제 악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일본 『육국사』에 전해지는 것이 두 번째 근거이다.
하지만 중국 음악 학자 허창린은 발해금이 가야금이나 거문고처럼 현이 많은 치터류가 아니라 류트류인 3현 악기라고 주장한다.[3] 허창린의 이러한 주장은 중국 『금서대전』의 험금과 흠금에 대한 기록과 『대악의』의 호로금과 발해금에 대한 간략한 기록에 의거한다.
3.2.2. 발해교방
『금사』[4] 39권에 따르면, ‘발해교방’은 발해국의 여자 기생들을 교습시키던 기관이었다. 이렇게 춤을 추는 여기를 교습하던 전문 기관에 발해 고유의 춤이 존재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삼국시대 때 고구려에서 일본 조정으로 파견된 악사 4명 가운데 고구려 춤을 가르치는 무사가 포함되어 있었을 만큼[5] , 고구려 춤은 고려악의 중요한 공연 종목 중 하나였다. 고구려 유민들이 거문고를 전승해 발해금을 만들었듯이, 고구려 춤을 전승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으며, 이렇게 전승된 고구려 춤을 추는 발해국의 여자 기생을 보고 『금사』의 저자가 발해교방에 대해 기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춤을 계승한 발해 춤의 종목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문헌상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의 궁중 음악인 아악의 고려악갈래 중에 말갈족과 관련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 신말갈 및 고조소, 신조소, 자소리, 박모, 귀덕후 등과 같은 고려악의 무악곡이 발해 춤의 일면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추정할 뿐이다. 이러한 추정은 앞으로 새로 발굴될 고분벽화의 고고학 자료에 의거하여 검증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3. 고고학 자료에 나타난 발해 악기
[image][6]
1980년 중국 지린 성 화룡현 용수향 룽터우 산에서는 정효공주묘의 고분벽화가 발굴되었다. 정효공주는 발해국의 세 번째 왕인 문왕 대흠무(737~793년)의 넷째 딸이며, 그녀의 고분벽화는 학계에서 발해 악기의 정체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고분벽화에는 3종의 발해 악기가 나온다. 정인갑의 논문에 따르면, 서쪽 벽화에 그려진 그 3종은 ‘박판’, ‘수공후’, ‘비파’이다. 정효공주의 비문을 보면 공주는 792년 사망했으므로, 8세기 후반 발해국에서 연주된 악기는 발해금 이외에도 3종이 더 있는 것이다.
정효공주묘의 벽화에 나오는 ‘박판’은 당나라의 속악기 중의 하나인 박판을 수용한 것으로, 주로 관현악이나 춤의 리듬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으며 『삼국사기』 악지에 나오는 통일신라악의 박판과 동일 계통의 타악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의 박판은 고구려의 악기를 계승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이는 중국 『북사』나 『구당서』[7] 에 기록된 고구려 악기 가운데 박판이 없음으로 뒷받침 된다. 즉, 발해의 박판은 당속악의 박판을 발해가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효공주묘의 ‘공후’는 연주자의 몸 쪽으로 안고 연주하는 악기로, 수공후의 일종이다. 다만 벽화상으로는 몇 줄의 수공후인지 알기 어렵다. 벽화의 수공후는 고구려의 수공후를 전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악기 중에 수공후가 있었다는 기록을 가진 『구당서』 29권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효공주묘의 ‘비파’는 벽화 상에서 목이 굽은 것으로 보아 곡경비파, 즉 4현짜리 당비파로 해석된다. 그러나 발해의 비파가 『구당서』의 고구려 비파를 계승한 것인지, 아니면 당나라의 비파를 수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구당서』에 기록된 고구려 비파가 곡경비파가 아닌 5현짜리 직경비파, 향비파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발해의 세 악기를 연주한 음악인들은 머리에 복두를 썼고 도포같은 옷을 입었으며, 허리에는 띠를 둘렀고 검은색 장화를 신고 있다. 발해악인의 이러한 복색은 『구당서』에 기록된 고구려 악공의 복색과 매우 비슷하다. 따라서 발해 음악인들의 복식은 고구려 악공의 화려한 복식을 거의 그대로 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4. 발해 사신과 발해악
삼국시대 이후 일본에서는 일본 조정에 파견된 외국사신을 위해 베풀어진 잔치에서 사신의 모국 음악을 연주해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을 위한 잔치에서도 그러한 관례에 따라 발해의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속일본기』에는 740년 쇼무 천황이 발해사신을 위해 본국악을 연주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쇼무 천황이 당시 발해 사신 이진몽을 위해 연주하도록 한 본국악은 글자대로라면 발해악으로 해석되지만,[8] 사실 그 본국악은 고구려의 멸망 이후 발해에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남았던 고구려 음악인이 연주한 고려악이었다. 이를 볼 때,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을 위한 잔치에서 연주되던 발해악은 발해국에서 온 발해의 악사와 악생들이 연주한 음악이 아닌, 삼국 시대 때 일본에 파견되었던 고구려 악사와 악생들이 일본에 남아 연주한 고려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3.5. 발해악의 음악사적 의의
927년 문화 수준이 낮았던 거란족에게 정복당한 발해는 자국의 음악과 무용 등을 제대로 후대에 계승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이로 인해 발해 음악사는 한국 음악사의 주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발해국의 역사를 기록한 독자적인 문헌이 우리나라에 하나도 전해지지 않은 관계로, 중국과 일본 역사서의 단편적인 기록에 의거해 발해의 음악과 무용의 극히 일면만을 여기에서 서술할 수 있었다. 학계는 언젠가 새로이 발굴될 고고학 자료가 발해의 음악과 무용에 대해 더 알려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4. 식문화
발해는 수렵과 목축업을 중심으로 하면서 지리적 조건에 따라 농업, 수산업도 발달하여 다양한 식재료 생산이 가능하였다. 발해의 서부·남부는주로 농업, 동부는 농업·어업·수렵·목축, 북부에서는 주로 어업·수렵·목축에 종사하였고 식재료를 얻기 위한 생산 방법이 이전 삼국시대보다 발전하여 이에 따라 발해의 음식 문화가 발전하였다. 즉 발해의 음식 문화는 삼국시대의 것을 계승하였으되 삼국시대보다 한층 더 향상되었다.『발해고(渤海考)』에는 “남해부 다시마, 책성부 된장, 노성 벼, 환도 오얏, 낙유 배, 태백산 토끼, 부여부 사슴, 막힐부 돼지, 솔빈부 말, 미타호 붕어”가 내용으로 농산물, 가축 및 어류 등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또 『신당서』 발해전 에서도 “풍속에 귀하게 여기는 것은 태백산의 새삼, 남해의 다시마, 책성의 메주,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솔빈부의 말, 현주의 베, 육주의 햇솜, 용주의 명주, 입성부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가있다. 과실은 환도의 오얏(자두)과 낙유의 배가 유명하다.“를 통해서도 지역별 발해의 음식 문화를 알 수 있다. 이외에 발해는 활발한 대외 교류속에서 발해의 특산물을 사신 등을 통해 보내기도 했다. 3대 문왕이 일본 쇼무천황(聖武天皇)에게 보낸 국서에 “약홀주도독 서요덕을 통해 가죽과 인삼 30근, 꿀3곡”을 보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인삼30근은 현재의 단위로 18kg(1근=600g), 끌 3곡은 541.17L(1곡=10말, 1말=18.039L)에 해당된다. 이는 발해가 상당한 분량의 특산물을 매번 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생산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출처]
4.1. 식재료
4.1.1. 육류
발해의 육류 획득은 넓은 삼림 지대에서의 수렵에 의한 것으로, 수렵은 고구려 시대부터 즐겼던 생활 방식이었다. 이러한 수렵을 통해 토끼, 매,꿩, 담비(貂), 사슴, 호랑이, 표범, 말곰(羆), 멧돼지(野猪) 등을 획득하였고, 이러한 획득물은 식용, 의료 등으로 사용했으며 그 외에 수출품으로도 당나라와 일본에서 환영받았다. 발해인들은 돼지, 소 등의 가축을 기르기도 했다. 특히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는데, 예전의 부여국 자리였던 발해 막힐부의 돼지는 유명했다. 이지역에서는 예로부터 돼지를 많이 길렀고, 이는 음식이나 의복재료로도 이용되었다. 『발해국지(渤海國志)』 흑수부에는 “그들은 돼지를 잘 길렀는데, 부유한 집에서는 몇 백 마리나 되었다. 그들은 돼지의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지어 입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발해의 소는 식용이나 농사를 지을 때 이용되었고 양은 938년 발해 후신인 동란국이 양 3만 마리를 남당(南唐)에 수출한 일이 있어 발해에서 많은 양을 길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발해 솔빈의 말이 우수하여 역사적으로 유명했다. 또 제5차 한·러 공동 연해주 발해문화유적 발굴조사단이 체르냐찌노2 주거유적 발굴 중에 생활 폐기물 유구에서 개고기의 뼈가 다량으로 발견되어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 [출처]
4.1.2. 농산물
발해의 농업은 서부의 쑹화강, 압록강, 무단강(牡丹江) 유역과 기후가 따뜻하고 땅이 비옥한 남부의 평야 지대에서 발달하였다. 곡식류는 지리적 특징에 따라 달랐다. 기후가 낮고 무상기가 짧은 북쪽 지역은 보리,밀,메밀 등이 주로 재배되었고, 이 외에 조, 콩, 피, 수수 등이 생산되었다. 반면 기후가 따뜻하고 땅이 비옥하고 물이 풍부한 남부 지역은 벼를 심었다. 책성은 유명한 된장 생산지로 좋은 된장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콩이 필요하였으므로 이 지역의 콩은 품질이 우수했을 것으로 본다. 또한 이 시기부터 발해의 주식은 쌀이 되었는데, 노성에서 생산된 벼가 이용되었다. 이때 쌀을 이용하여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요사(遼史)』에서 발해인들은 단오 때 쑥떡을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발해 유적에서 시루가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발해인들이 떡을 쪄서 먹었음을 알수 있다. 과일은 발해 낙유의 배와 환도의 오얏이 유명했다.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에서 영고탑(寧古塔) 지방의 배가 작기는 하지만 맛이 아주 좋았다는 것을 통해서 낙유의 배가 유명했고 오얏은 자두의 다른 이름으로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에서는 집 오얏과 산 오얏으로 구분하는데 집 오얏은 붉은색에 맛이 달고 산 오얏은 약간 시고 수분이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채소, 인삼, 잣, 꿀도 생산되어 식생활 재료로 사용되었다. 발해의 채소류 중 유명한 것은 아욱으로, 발해 동북부 지역에서 아욱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책부원구(冊府元龜)』기록에 발해 사신이 925년 후당(後唐)에 인삼과 잣을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고, 꿀은 발해 건국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속일본기(續日本紀)』로 천평(天平) 11년(739) 7월 기록에 발해 사신이 일본으로 가면서 꿀을 선물로 가져갔다고 하였다. [출처]
4.1.3. 수산물
발해는 동쪽의 바다와 쑹화강(松花湖), 무단강, 헤이둥 강, 우수리 강 및 징보호, 쑹화호 등 많은 강과 하천, 호수들이 있어 다량의 수산물 채취가 가능하였다. 이 수산물들은 내수용이나 외국과의 무역품으로 수출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고 있는데, 『책부원구(冊府元龜)』 기록에 따르면 발해는 729년에 숭어, 730년에 물개 가죽, 738년에 말린 문어를 당으로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다. 대표적인 수산물은 다시마, 숭어(치어), 낙지(석거), 말린 문어, 방해(대게), 교어, 고래 눈, 대모 등이 있다. 다시마의 생산지는 남해(현 함경남·북도 앞바다)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함경도의 특산물로 미역, 다시마가 기록되어 있다. 숭어는 조수가 미치는 강하천의 하류에 사는 물고기로 발해의 동해, 남해, 서해 연안의 강 하류들에서 생산되었고, 방해는 동해에서 나는 붉은색을 띤 큰 바닷게 일종이었다. 문어는 738년 발해에서 당으로 100구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요 수출품임을 알 수 있다. [출처]
그밖에 수산물을 이용한 저장 음식도 발달하였는데, 포·젓갈이 그것이다. 이 음식들은 오랜 기간 동안 저장이 가능하여 계절에 관계없이 먹을 수있도록 한 것으로, 발해인들의 식생활 지혜를 알 수 있다.[10]
4.2. 그릇
[image][11]
발해 유적의 집터와 그 주변에서는 발해인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식기가 다량 발견되고 있다. 돈화시(敦化市) 마권자고성(馬圈子古城),화룡현(和龍縣) 하남둔 고성, 청해토성(靑海土城) 터 등에서는 쇠솥과 쇠칼이, 송산리 무덤에서는 놋숟가락 등이, 상경 용천부에서는 보시기, 단지, 접시, 자배기, 버치, 사루 , 독 등의 질그릇이,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 발해 건축터에서도 보시기, 단지, 독, 솥, 쇠칼, 방아확[12] 이 출토 되었다. 이를 통해 발해인들의 음식 문화를 알 수 있다.[출처]
5. 복식,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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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전통 복식을 매우 수준 높게 고증한 블로그.@.
6. 건축
6.1. 상경용천부
발해의 역사상 가장 오래동안 사용된 발해의 도성이다. 제3대 문왕 대흠무가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후 동경용원부로 일시 천도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멸망때까지 계속해서 약 170년 동안 발해의 도성으로 이용되었다.
전체적인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며, 규모는 1965년도 보고서에 의하면 동벽은 3,358.5M, 서벽은 3,406M, 남벽은 4,586M, 북벽은 4,946M로 전체 길이는 16,296.5M로 기록되어 있으나, 기록마다 수치가 조금씩 차이가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성곽 기단부의 너비는 약 14M~18M, 상부의 너비 1M~3M 정도이며, 높이는 약 3.5M 이다.[13]
외성의 밖으로는 해자를 돌렸는데, 동벽과 북벽의 바깥쪽에 흔적이 잘 남아 있으며 외성의 네 모서리에는 각루를 세웠던 흔적이 있다.
외성 내부에는 남북과 동서 방향의 도로가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전체가 바둑판 모양의 방(坊)을 이루고 있다.
중심 도로인 주작대로(朱雀大路)가 성 안을 동서로 양분하게 되며, 이외에 큰 도로가 남북과 동서의 구획으로 나누어 방을 구성하고 있다.
궁성은 북쪽 중앙 부분에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는 4개의 구역으로 나뉘는데, 중심 구역에 궁전 건물들이 있고, 나머지 구역에 부속 시설들이 있으며, 궁전 건물들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황성은 궁성 남쪽에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3개 구역으로 구성된 내부에는 관청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14]
7. 고분
발해 고분은 첫 도읍지였던 중국 길림성 돈화 (中國 吉林省 敦化)를 비롯하여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중국에서는 57개 고분군에서 1,700여 기를 확인하고, 600기 정도를 발굴하였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 이후에 함경도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21개 고분군에서 1,600여 기를 확인하고 100여 기를 발굴하였다. 또 연해주에서도 2개 고분군에서 5기를 발굴하였다(이상 1999년 기준). 주요 고분군으로는 돈화 육정산(敦化 六頂山) 고분군, 평안 삼능둔 대주준 홍준어장(寧安 三陵屯·大朱屯·虹鱒魚場), 장용 용두산 북대(和龍 龍頭山·北大 )고분군, 안도 동청(安圖 東淸) 고분군, 해림 산저자 양초구 (海林 山咀子·羊草溝) 고분군, 영길 양둔 대해맹 사리파 (永吉 楊屯 大海猛·査里巴) 고분군, 유수 노하심 (楡樹 老河深) 고분군, 북청 평리(坪里) 고분군, 화대 정문리(旌門里) 창덕 고분군, 청진(淸津) 부거리(富居里) 고분군, 연해주 아브리코스(Abrikos) 고분군 등이 있다.
무덤 양식에는 돌무덤, 벽돌무덤, 흙무덤이 있다. 돌무덤은 다시 돌방무덤(石室墓)·돌덧널무덤(石槨墓)·돌널무덤(石棺墓)으로 나뉜다. 그러나 돌방무덤과 돌덧널무덤의 분류에는 천장시설의 유무, 널길(羨道)의 유무, 4벽과 천장의 축조순서 등으로 연구자마다 기준을 달리하고 있다. 1980년대 초까지는 3가지 돌무덤 전체를 막연히 돌무지무덤(積石墓)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돌을 이용하여 무덤을 쌓는 방식은 원래 고구려적인 전통인데, 특히 주축을 이루는 돌방봉토무덤(石室封土墓)은 고구려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정혜공주 무덤이 있다.
- 정혜공주묘
정혜공주묘는 육정산 고분군에 위치하며 1949년에 발굴된 것이다. 육정산 고분군은 2개의 지역으로 구분되며 제1고분군에 30여 기, 2고분군에 약 50여 기의 무덤이 있는데 이들은 발해의 구국 전기 왕실의 무덤으로 인정된다. 정혜공주묘는 발해 왕실의 무덤군으로 추정하는 2고분군 내에 있다.
약간 경사진 지면을 반반하게 고른 후, 지하에 묘실을 축조한 것으로 묘실, 연도, 묘도로 구성된 단실묘의 봉토석실분이다. 묘실의 형태는 길이 280~294cm에 너비는 260~274cm의 약간 길이가 긴 방형의 구조이고, 높이는 바닥에서 정중앙의 천정까지는 260cm의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축조는 현무암과 용암을 이용하여 벽면을 축조하였는데, 벽면은 위로 갈수록 약간 안으로 기울어진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천정은 평행고임의 형식으로 가구하면서 정부에 판석을 덮어 마무리한 형식이다. 벽면은 백회를 발랐으나 이미 탈락되었고, 바닥은 하단에 정방형의 벽돌을, 그리고 그위에 목탄과 모래를 깔고 있다. 연도는 남벽 중앙에 설치하였는데, 길이 174cm, 너비 110cm, 그리고 높이 140cm이며, 연도의 천정은 평천정으로 판석을 덮었다. 연도 앞의 묘도는 길이 11m에 너비 245cm로 이루어져 있다. 정혜공주 묘의 굴식 돌방무덤 양식과 모줄임 천장 구조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15]
벽돌무덤은 당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8세기 후반 무렵부터 상층부에서 수용하였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다. 대표적인 것으로 정효공주 무덤과 마적달(馬滴達) 무덤이 있다. 흙무덤은 발해 건국 이전부터 유행하던 말갈 전통에 따른 것으로서 발해 변방지역에서 지속되었다. 유수 노하심 고분군이나 영길 대해맹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한편,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이 결합된 양상을 보여주는 것도 있으니, 정효공주 무덤은 벽은 벽돌로 쌓으면서 천장은 돌로 평행고임을 하였다. 상경성 부근의 三陵屯 1호묘도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축조하였다.약간 경사진 지면을 반반하게 고른 후, 지하에 묘실을 축조한 것으로 묘실, 연도, 묘도로 구성된 단실묘의 봉토석실분이다. 묘실의 형태는 길이 280~294cm에 너비는 260~274cm의 약간 길이가 긴 방형의 구조이고, 높이는 바닥에서 정중앙의 천정까지는 260cm의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축조는 현무암과 용암을 이용하여 벽면을 축조하였는데, 벽면은 위로 갈수록 약간 안으로 기울어진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천정은 평행고임의 형식으로 가구하면서 정부에 판석을 덮어 마무리한 형식이다. 벽면은 백회를 발랐으나 이미 탈락되었고, 바닥은 하단에 정방형의 벽돌을, 그리고 그위에 목탄과 모래를 깔고 있다. 연도는 남벽 중앙에 설치하였는데, 길이 174cm, 너비 110cm, 그리고 높이 140cm이며, 연도의 천정은 평천정으로 판석을 덮었다. 연도 앞의 묘도는 길이 11m에 너비 245cm로 이루어져 있다. 정혜공주 묘의 굴식 돌방무덤 양식과 모줄임 천장 구조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15]
매장방식으로는 단인장(單人葬), 2인합장(二人合葬), 다인합장(多人合葬)이 모두 나타난다. 2인합장은 부부합장이 대부분이다. 다인합장은 발해 매장습속의 특색을 이루는데, 많을 경우에 17명까지 매장된 예가 있다. 왕릉급에 해당하는 三陵屯 2호묘에서 15인의 인골이 발굴되었고, 大城子 1호묘에서 1·2차장 인골 16인분이 확인되었으며, 동청 1호묘에서는 2차장 인골 17인분이 상하 양층으로 매장되어 있었다. 大城子 1호묘나 大朱屯 1호묘에서처럼 주종관계가 뚜렷이 드러나는 예도 있다. 배장자에는 주인공에 예속되었던 노비(奴婢)나 부곡(部曲)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므로, 순장(殉葬)의 유풍으로 볼 수 있다.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의 배치상태로 보아 1차장과 2차장이 모두 실행되었으며, 무덤 하나에서 2가지가 혼재된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 2차장 인골은 추가장 된 것이다. 1차장의 경우에 나무널(木棺)을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직접 묻은 예도 보인다.
초기에는 六頂山 고분군에서처럼 화장(火葬)도 유행하였다. 이것은 시신을 관에 넣은 채 무덤 안에서 불에 태우는 방식이다. 이러한 풍습은 중기 이후에 점차 사라진다. 이밖에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에서는 사람뼈와 함께 동물뼈들도 출토되었는데, 확인된 동물로는 말, 소, 개가 있다.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풍습도 있었다. 삼릉둔 (三陵屯) 1호묘와 하남둔(河南屯) 고분에서는 봉토 위에서 주춧돌이 발견되었고, 육정산(六頂山) 고분군과 용두산(龍頭山) 고분군에서는 봉토에서 기와들이 다수 노출되었다. 무덤 건물은 불교가 성행하면서 탑으로 대체되었는데, 정효공주 무덤과 마적달 무덤은 승려의 무덤이 아닌데도 그 위에 벽돌로 만든 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중국학자들이 말갈의 풍속을 계승한 것으로 주장하나, 고구려적인 전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문헌출처[출처][출처][16][17][18][19]
7.1. 정효공주묘
발해 제 3대 문왕(발해)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756~792년)의 무덤은 중경 현덕부에 자리한 지린 성 화룡현 서고성(西古城)에서 13km 떨어진 룽터우산(龍頭山)의 왕족 묏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발해의 전축분[벽돌무덤] 으로 2기의 고분이 벽돌로 축조된 것이 확인되었다.
룽터우산은 남에서 북으로 뻗으면서 약간 만곡된 산의 중간부에 서향으로 전개된 구릉이 있고, 고분군은 이 산의 말단부에 남향한 형태로 남아 있다. 정효공주묘가 위치한 지역은 인위적으로 평지를 조성한 약 2,000km²의 면적 중에 약 100m²를 주변보다 50cm정도 돌출된 형태로 조성하였다. 정효공주묘는 1차 조사 후 북한 학자들에 의해 추가로 묘도 부분의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출처]
출토 유물 묘비와 함께 벽화견본기도판, 도용[20] , 도금한 동식, 동모식정 등이 수습되었다. 인골도 수습되었는데 모두 31점으로 남녀의 것으로 구분되며 여성의 것이 5점, 남성의 것이 26점이다. 골격에 의하면 여성의 키는 156cm, 남성의 키는 161cm이고, 나이는 대략 25~45세로 추정된다. 여성의 경우는 정효공주로 36세에 사망하였다는 점과 일치하고, 남성의 골격은 발해 무덤이 부부합장이란 점을 근거하여 정효공주의 부군으로 추정한다.[출처]
7.1.1. 정효공주 묘의 구조형식
정효공주 묘의 구조 형식은 무덤 외관의 규모는 남북길이 15m, 동서너비 7m이며 방향은 남향으로 방향각은 170도이다. 무덤의 내부는 묘도(墓道), 묘문(墓文), 용도(甬道:복도), 묘실(墓室), 지상탑(地上塔) 등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탑은 이미 무너져 훼손된 상태로 현재 기단만 남아있다. 묘도는 남쪽에 위치하여 길이는 7,1m, 남쪽 너비 5.75m, 북쪽 너비는 3.3m에 이르며 동서 두 벽은 판축되어 있다. 묘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5.5m 떨어진 곳으로부터 계단 형태가 시작되는데 5층으로 되어있다. 묘도의 북쪽 끝에 있는 묘문은 비탈 식으로 길이는 1.6m이며 위에 백회를 발랐다. 묘문의 뒤는 복도로 전체 길이는 1.9m, 남쪽 너비 1.6m, 북쪽 너비는 1.7m이다. 복도는 두 부채형태의 돌문을 세워 경계로 삼아 앞과 뒤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 뒤에 위치한 묘실은 장방형으로 남북길이 3.1m, 동서 너비 2.1m이며 묘실 바닥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는 약 3.4m이다. 묘실의 지붕은 평행고임천정으로 쌓았고, 네 벽은 장방형 벽돌로 엇갈리게 쌓았으며 남쪽 벽이 수직을 이루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 동, 서, 북의 세 벽은 모두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어졌다.
무덤의 묘실과 복도에서는 벽화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벽화는 12명의 인물을 주제로 하였으며 0.981.17m 크기로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안쪽 좌・우 벽에는 무사가 각 1명씩 마주보는 위치에 그려져 있다. [출처]
7.1.2. 정효공주 묘의 벽화
정효공주 묘의 벽화는 묘실(墓室:널방) 동·서·북 세 벽과 연도(羨道)[널길] 안에 그려져 있다. 모두 12인의 인물 벽화이다. 인물들은 그 직분에 따라 무사, 시위, 악기, 시종, 내시 등의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연도 뒤편에는 무사 2명이 그려져 있는데 동쪽과 서쪽에 마주하고 있다. 그들은 붉은 술을 단 투구를 쓰고 고기비늘 무늬 갑옷을 걸치고 왼쪽 허리에 검을 차고, 오른손으로 철퇴를 잡아 어깨에 메고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묘실 동쪽 벽에는 4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머리에 붉은 머리띠를 두르거나 두 날개를 교차시킨 복두(幞頭)를 썼다. 손에는 철퇴, 구리거울, 봇짐 등을 들고 있으며 첫 번째 철퇴를 든 사람은 공주를 경호하는 시위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공주의 시중을 드는 내시들이다. 서쪽 벽에도 네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첫 번째 사람은 호위병이고 나머지 세 명은 공주의 시중을 드는 악사들이다. 북쪽에는 활을 메고, 화개(華蓋)로 보이는 양산을 들고 있는 두 명의 시종이 묘사되어 있다.
정효공주묘 벽화는 벽돌 위에 회칠을 하고 그렸다는 점과 시위도[21] 를 중심 제재로 하였다는 점에서 당나라 고분벽화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덤의 구조나 사신도, 병풍, 시녀 등이 등장하지 않는 점 등에서 중국의 벽화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 시기 당나라 고문벽화가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정효공주묘의 벽화에서 발해인들은 그 형식을 독자적으로 소화해 표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출처]
7.1.3. 정효공주묘의 비문
정효공주의 묘지명은 발굴 당시 완전한 모습으로 크기는 높이 105cm, 너비 58cm, 두께 26cm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묘비문은 모두 18행으로 728자이며 9자는 손상된 탓에 판독하기 어려웠으나 나머지 719자는 판별이 가능했다. 묘지문의 제 1행은 비문이고 제 2행에서 13행은 서문이며 제 14행부터 제 18행까지가 명문이다. 현재 이 묘지명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명에 따르면 정효공주는 문왕의 넷째 딸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유순하고 빼어난 용모를 가진 인물이다. 정효공주는 정혜공주와 마찬가지로 시서와 예악을 즐길 줄 아는 훌륭한 배필로 군자에게 시집을 갔으며 문장력이 뛰어나고 말은 이치에 맞았으며, 갈고 닦아서 순결한 지조를 갖추고자 하였다. 또한 역시 남편이 일찍 죽고 그 어린 딸도 일찍 사망하였는데 묘지명에는 이후 육행을 크게 갖추고 삼종을 지켰다고 서술되어 있다. 공주는 대흥 56년(792) 여름 6월 9일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사망 후 정효공주라는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28일 기묘일에 염곡(染谷)의 서쪽 언덕에 배장되었으며 묘지명을 작성한 날짜는 기록되지 않았다.
발해제국의 정혜공주와 정효공주 묘지명이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서술되었던 이유에 대해서 한정인은 문적원 같은 곳에 원본을 두고 개인적 신상에 관한 부분들만 수정을 하여 비문을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며 발해 특유의 묘지명 구성방식이 있었기에 아마도 당의 묘지명과 구성상 큰 틀에서는 유사한 형식을 보이지만 내용 구성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출처]
7.2. 관련 문서
8. 발해 불교
9. 기타 문화
부인들은 투기가 심하다. 대체로 다른 성씨들과 서로 10자매라는 (의자매) 관계를 맺어 번갈아 남편들을 감시하며 첩을 두지 못하게 한다. 남편이 밖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독살을 모의하여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인다. 한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그 아내가 깨닫지 못하면 아홉 자매가 떼지어 가서 비난한다. 이처럼 다투어 투기하는 것을 서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므로 거란, 여진 등 여러 나라에는 모두 창기(娼妓)가 있으며 양인 남자들은 첩과 시비를 두지만, 발해에만 없다.
<송막기문 발해국 中>
[1]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 - 해당 강의자료[2] 중국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로 총 49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3] 이진여(2000), 삼현-발해금, 한국음악사학회,159~174p[4] 중국 이십사사 중 하나로, 금나라에 대한 역사책이다[5] 송방송, 한국음악통사, 일조각, 78p[6] 사진 출처 : 중국의 발해사 연구, 고구려연구재단 편, 353p[7] 중국의 이십사사 가운데 하나로, 당나라에 관한 역사서이다[8] 이진원, 한국고대음악사의재조명, 33~37p에서 본국악이 발해악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출처] A B C D E F G H I J K L - 박은미, 唐代 중국 소재 한국 여성 묘지명의 내용과 특징(석사학위논문, 학교명(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전공, 2017년), pp.39~40.[9] 출처 - 연해주 체르냐찌노 2 옥저·발해 주거유적 :제5차 한·러 공동 연해주 발해문화유적 발굴조사(정석배, 부여:문화재청, 2008)[10] 출처 -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1994a), 『조선의 민속전통1(식생활풍습)』, 29p [11] 사진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12] 방앗공이로 찧을 수 있게 돌절구 모양으로 우묵하게 판 돌[13] 당시의 규모는 높이 6M, 하부 너비 16M~18M, 상부 너비 6~7M 추정[14]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15]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16] 출처 - 六頂山與渤海鎭-唐代渤海國的貴族墓地與都城遺址-(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編著,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 1997년)[17] 출처 - 발해돌방봉토무덤에 대한 고찰(박윤무, 발해사연구 2, 연변대학출판사, 1991년)[18] 출처 - 발해문화(주영헌, 사회과학출판사, 1971년)[19] 출처 - 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12.31)[벽돌무덤] [20] 陶俑:예전에 순장할 때 사람 대신 함께 묻던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널길] [21] 侍衛圖:무덤 주인을 지키고 호위하며 시중을 드는 인물을 묘사한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