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경용천부
'''상경용천부 / 上京龍泉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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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에 위치한 과거 발해 5경[2] 중 하나이자 수도였던 도시.
당나라 장안성의 도시계획을 도입한[3] 네모 반듯한 계획도시였으며 수도 북쪽엔 발해의 궁궐이 위치해 있었다. 발해의 멸망과 함께 폐허가 되어 지금은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으며, 상경궁 유적지는 중국 정부에서 비공개 작업 중이며, 사진조차도 공개되지 않았다. 오직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발행하는 잡지에 실린 짤막한 발해 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비문 관련 기사처럼 온갖 루머나 추측도 횡행하는 상황.
2. 역사
2.1. 제1기(755~785)
안사의 난 이후 문왕 대흠무는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천도하였는데 이 때부터 상경이 발해의 중요도시로 떠오르게 된다. 당시 상경성은 홀한주 홀한성(忽汗城)이라 불린 듯 하다. 문왕 말년 다시 팔련성 동경용원부로 재천도 한다.
2.2. 제2기(794~926)
성왕 대화여가 동경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재천도했다. 이후 멸망할 때까지 발해의 수도로 자리잡으며 크게 발전하였다.
2.3. 발해 멸망 이후
926년 1월14일 발해가 멸망한 후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의 옛 땅에 동란국(東丹國)을 세우고 천복성(天福城)이라 하여 수도로 정하였다. 그러나 요 태종은 발해 고토에 대한 통치력 문제와 발해인들의 저항 문제를 해결하려고 동란국의 수도를 요양으로 옮기고 발해인들을 요서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려 했다. 이에 발해인들이 크게 반발하여 강제 이주를 거부하자, 요 태종은 상경성을 불태우는 초강수를 써서 발해인들의 저항을 진압하고 발해인 상당수를 요서로 강제 이주시켰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평양성이 그러했듯이 결국 상경 용천부도 폐허가 되고 말았고 그 뒤로 재건되지 못했다.
3. 도시 구조
당나라의 장안을 본 따 도시계획을 짰다. 그러다 보니 마찬가지로 장안성을 참고한 일본의 헤이죠쿄와도 비슷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도시 바깥엔 여러 성, 다리, 무덤군이 밀집해 있다.
3.1. 상경성
상경용천부의 성은 총 세가지다. 가장 밖을 둘러싼 외성(外城), 정부기관 및 궁성을 둘러싼 황성(皇城), 궁궐을 둘러싼 궁성(宮城). 이 구조는 상술했듯 당나라 장안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고려의 본궐, 장락궁, 고려궁지와 동일한 구분이 된다. 다만 아래에 적혀있다시피 구분만 같을 뿐 실제 구조는 꽤나 차이가 있다.
3.1.1. 외성(外城)
가로 4600 미터, 세로 3400 미터의 크기이다. 성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었다.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에서 기원한 온돌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평양성 외성, 백제 왕조의 부여 나성, 조선 왕조의 한양도성 격이다.
발해 상경성 외성은 위 왕조들과 구분이 같이 됐지만 그 구조나 모습은 크게 차이난다. 왜냐하면 고구려, 백제는 현대적 정의로 외성으로 구분 되지만 당나라가 만든 형식과 크게 차이나기 때문이다.
발해의 도성은 다른 한국 왕조의 도성들과 비교해보면 이질적인 느낌이 들 수 있다. 우리 왕조들 중 당제(唐制) 도성제를 철저히 본떠온 왕조는 발해 뿐이다.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등은 당나라가 건국되기도 한참 전에 이미 나라의 기틀이 완성된 왕조였으므로 독자적인 도성제를 구축했고 중국 도시계획은 나중에 부분적으로만 도입하였다. 고려, 조선은 발해처럼 당제 도성제를 따오긴 했지만 나성>황성>궁성 같은 전체적인 틀만 따왔고 성곽의 구체적 구조는 우리 왕조 고유의 특징들을 그대로 가져 왔다. 그렇기에 다른 우리 왕조와 발해의 도성을 비교하면 꽤나 큰 차이가 있다.
3.1.2. 황성(皇城)
외성의 북쪽 중앙에, 궁성의 남쪽에 위치하였다. 가로 1050 미터, 세로 500 미터이며 남문(황성 정문)이 있고 동, 서문이 있었다. 여러 건물 부지가 남아있어 발해의 3성 6부가 이 곳에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정석(?)답게 평지에 세워졌고 크기가 작다. 비교되는 고려 개경의 황성은 그런 거 없고 산을 에워쌌고 크기도 매우 컸다.
3.1.3. 궁성(宮城)
궁성 안의 궁궐은 고구려의 안학궁과 비슷한 구조가 특징으로, 총 7개에 달하는 큰 건물들이 일렬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모두 5개가 확인되어 제 1궁전, 제 2궁전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중 제 2궁전의 규모가 특기할만 한데, 돌로 된 기단의 크기가 정면 120m, 측면 30m 정도다.
궁성 정문은 오봉문(五鳳門)으로 불린 듯 하며 제 1궁전은 금란전(金鑾殿)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가장 먼저 축조된 성으로 보이며 궁성에 이어 황성, 외성 순으로 조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조의 경복궁 격이다.
4. 현재
중국이 상경용천부를 복원해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복원과 정비과정에서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발해를 고대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말갈족이 세웠으며, 당나라에 예속된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간주하는 중국 정부의 시각에 따라 상경성을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을 모방한 것으로 보고 건물의 배치나 각 부재의 기준 척도로 당척(唐尺)을 채택하는 등 당시 당나라의 규격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발해나 일본이 장안성 도시구조를 참고한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일본의 헤이안쿄 문서의 설명과 같이 현지화도 어느 정도 되었는데 이 점이 간과되고 있다.
중국이 상경성을 세계유산으로 신청한다면 한·중 간에 외교 분쟁과 역사 갈등이 초래될 가능성이 있다.# 앞서 고구려 관련 두 세계유산은 중국과 북한이 공동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에, 한국사 왕조의 유적에 중국이 단독으로 등재를 시도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밖에도 황성 일대를 제외한 성 내부엔 이미 고구마 밭농경지와 함께 크고 작은 마을이 들어선 상태다.
[1] 상경용천부에 세워진 해당 비석에는 사연이 있는데, 한국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 가운데 하나인 동경성 전투(1933.6.7)가 벌어졌던 곳이 바로 이 상경용천부 옛 터 인근이었다. 당시 지청천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과 중국 길림구국군 제14사의 합작으로 조직된 한중 연합 토일군(韓中聯合討日軍)이 동경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 그들을 성밖으로 내쫓는데 성공했는데, 일본군은 전사자 150여 명의 시체를 상경용천부터 인근에 파묻고 앞면에 ‘충혼비(忠魂碑)’, 뒷면에 ‘정기장산하(正氣壯山河)’ 라고 쓴 비석을 세웠고, 8·15 이후 중국 정부가 앞뒤의 비문을 모두 갈아 없애버리고 ‘발해 상경 용천부 유지’ 라고 써넣었다고. # [2] 상경용천부 외에 중경현덕부, 동경용원부, 서경압록부, 남경남해부가 있었다.[3] 당나라의 도시계획 도입은 7~8세기 동아시아의 트렌드였으며, 발해의 상경용천부와 일본의 헤이조쿄 및 헤이안쿄는 둘 다 장안을 모방해 서로 쌍둥이처럼 도시 외양이 비슷하다. 동시대 신라의 서라벌도 여기는 발해나 일본과 달리 원래 존재하던 도시를 개조한 셈이라 장안성의 구조를 똑같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도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