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문자

 



1. 개요
2. 여담


1. 개요


http://www.omniglot.com/writing/jurchen.htm

중세 여진족들이 사용한 문자이며, 한자, 거란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거란 문자처럼 대자(大字)와 소자(小字)로 나누어져 있다.[1]
금나라 태조 완안아골타가 만들었고, 금희종도 만드는 데 도와주었다고 한다.
대자와 소자가 있지만 거란 문자와 달리 구분하는 게 의미없거나 거의 비슷해서인지 대자와 소자가 있어도 구분이 되어있지 않다. 거란 문자에서 소자의 영향을 받았는데[2], 거란 문자처럼 표어문자이며, 쓰는 방법도 거란 문자와 비슷하다. 거란 문자나 여진문자는 겹쳐서 쓰는데 이런 특징이 한글과도 비슷하기 때문에, 겉보기론 별로 안 비슷해 보여도 자모음을 모아 글자 하나를 만든다는 원리는 이들 문자가 한글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여진거란처럼 자신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만들었으나 빠른 중국화로 인하여 쓰는 사람들은 갈수록 적어졌다. 금세종은 이를 우려하여 여진 문자를 사용하는 방법을 늘렸지만 결국 실패했다.
금나라, 동진(東眞) 등이 멸망한 이후에도 만주에 계속 있었던 여진 부족들은 여진 문자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며, 사용방법이 편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진어를 글로 적을때는 몽골 문자로 적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몽골문자로는 여진어의 음소 전체를 적을수가 없어 한계가 있었지만 여진문자로 적는것보다는 익히기 쉽고 편리하다는 이유때문이었다. 그래도 16세기 무렵까지는 여진문자를 읽고 쓰는 경우가 남은것으로 보이는데 누르하치에 의해 만주 문자[3]가 나타나면서 여진 문자는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2. 여담


주로 비석, 청동도구, 일부 그림들에 이 문자가 새겨져 있다.
아이신기오로 울히춘 교수는 거란어, 여진어, 만주어를 번역할 줄 알며, 거란 문자와 여진 문자를 번역한 자료도 있다.
함경도에서 여진 문자가 새겨진 비석이 나오기도 했다. 병자호란 이후에 세워진 삼전도비에도 여진 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청나라 시대에 개발된 만주 문자이다.

의정부에서 예조의 질문에 의하여 아뢰기를, '''“여진(女眞)의 문자(文字)가 장차 폐절될 것을 우려하여, 일찍이 생도 6명을 설치하고 부사정(副司正) 혹은 대장(隊長)의 체아직 한 자리를 주게 하고는 오로지 이를 연습하게 하였사온데, 뒤에 먼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객지에의 우거(寓居)의 곤란을 말하여, 그의 분번(分番)을 들어 주고 1년 만큼 서로 체번하게 하였던 바, 수가 적은 생도가 번을 나누어서 오르내리게 되므로, 혹은 하기도 하고, 혹은 중단하기도 하여 진실로 온당치 않사오니, 청하옵건대, 6명을 증가하여 모두 12명으로 하고, 이에 부사정·사용(司勇)의 체아직 한 자리를 더 주어서 분번(分番)을 없애고 상시 그 학업을 닦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1438년) 7월 6일 무자 3번째 기사

조선 초기 세종대왕 시절에 조선에 거주하던 여진족들 중에도 여진 문자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고, 세종은 이를 보존했다고 한다. 세종대왕, 여진 문자 폐절을 막다

[1] 대자는 처음에 먼저 만들어진 문자, 소자는 나중에 만들어진 문자를 뜻한다. 여진 대자는 아골타가, 여진 소자는 금 희종이 만들었다.[2] 그래서인지, 특히 거란 문자에서 소자와 제일 비슷하다.[3] 한자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거란 문자나 여진 문자와 달리 몽골 문자의 영향을 받았으며, 몽골 문자와 비슷하다. 몽골 문자는 위구르 문자의 영향을 받았으며, 여기서 몽골 문자와 만주 문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거란 문자의 소자와 여진 문자들도 위구르 문자의 영향을 받긴 했는데 한자의 영향도 받아서 형식은 한자와 더 닮았고, 몽골 문자와 만주 문자는 한자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그래서 위구르 문자와 비슷했고 이런 점은 표음문자로서 더욱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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