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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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김해 출신으로 목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배치문 의사는 한림면 어은마을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 서당에서 12살까지 한문을 공부하다 김해읍 답곡리[3] 로 이주한다.
김해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06년 17살의 나이로 졸업하고 1909년 가족은 전남 목포 창평동으로 이주하여 소매잡화점을 운영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목포에도 전해졌고 배치문은 지역 학생들과 함께 운동방법을 논의 하였다. 그뿐만아니라 지역유지들과 기독교인 지사교인들과 함께 지역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4월 8일 이들과 함께 목포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과 헌병은 40여명의 애국지사를 검거하였고 배치문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다.
1923년 3월 배치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 국내의 조직적인 독립투쟁이 필요하다는것을 깨달은 배치문의사는 의열단에 입단했다.
1924년 귀국하고 활동하던 배치문은 의열단을 추적하던 일본경찰에게 검거되었다.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동지와 조직을 보호하였다.
1925년 목포제유노조사건에 관여하여 제대로된 임금을 받지 못하고 민족적인 차별대우까지 받았던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힘썼다.
이러한 노동운동을 통해 자연스레 사회주의사상에 관심을 가졌고 경찰에 검거되었다.
1929년 석방된뒤 신간회에서 활동을 하였고 목포 신간회 지회장까지 역임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목포의 상업학교 학생들이 최초로 이에 동조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배치문은 이 사건에 실질적 지도자였다.
호남평론의 기자와 2대 편집장으로도 활동하면서 언론활동으로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다. 1941년 3월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은 배치문을 출판법, 보안법,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하였다.
결국 배치문 의사는 모진 고문끝에 1942년 5월 20일 목포형무소에서 순국 하였다.
3. 이야깃거리
- 후손들의 노력 끝에 1982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1989년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에 안장되었다.
- 김해 한림면의 친척들과 지역민들이 1983년 한림면사무소 앞에 비를 세웠다. 비는 2000년 한림명동 통일동산으로 이전되었다가 2007년 삼계화정공원으로 옮겨졌다. 매년 3월 1일 이 비석앞에서 추모식과 3.1절 기념식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