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

 

1. 書堂
1.1. 개요
1.2. 상세
1.3. 여담
1.4. 유사기구
1.4.1. 한국
1.4.1.1. 국립
1.4.1.2. 사립
1.4.2. 외국
2. 誓幢


1. 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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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김홍도의 <서당도>.)

1.1. 개요


대한민국의 전근대 시대에 존재하던 교육기관. 현대의 초등학교~고등학교에 대응된다. 글방이라고도 한다.
서당의 기원은 고구려의 경당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송나라 사람이었던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도 서당의 존재가 언급되며 조선시대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서당이 세워졌고 일제치하에서도 여전히 서당은 존재하였다. 일본 정부는 일본본토 내의 데라코야가 소학교로 대체되었듯이 자연스럽게 소학교가 서당을 대체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서당에 대해 탄압하지 않았다. 그러나 2만 4천개의 서당이 감소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는 당연했다. 소학교가 의무교육이 아니었던데다가 소학교를 전국 방방곡곡에다가 설치한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학비가 서당에 비해 비쌌기 때문이었다.(이는 1930년대까지 개선이 되지 않아서 1945년 기준으로 문맹률이 78%[1]에 달하는 결과를 낳았다.) 더군다나 만행을 일삼는 일제에 대한 반감도 심한 것도 당연히 있기 때문에 여전히 서당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았던 것. 여기에 항일 지식인들이 개량서당을 만들었고 애국심과 신학문도 같이 가르쳤다. 이에 일본은 1918년 서당규칙을 제정해 저런 형태로 운영되는 서당을 폐쇄했고, 이후로 서당은 야학으로 변모했다.
이후로 서당은 조금씩 사라져나갔으나, 위에 적혀있듯이 소학교가 없는 동네가 많았기 때문에 나중에 거물급 정치인사로 활약하게 되는 김대중김종필도 유년시절에 서당에 수학했던것을 보면 이때도 서당에서 공부를 한 사람은 상당수 존재해 있다는것을 알수있다. 실제로 보통학교 학생 수가 서당 학생 수를 추월한 것은 1920년대 중반에 가서야 이루어졌으며 #, 일제 말기인 1943년에도 14만 명의 학생이 서당을 다니고 있었다.# 링크한 주소에 나온 딴지일보의 기사에서는 해방 이후에도 시골에 서당이 있어서 그곳에서 한자를 배운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21세기 현대에도 소수가 존재하며 지금은 공식 교육 기관과는 다른 대안학교나 청소년 수련원, 기타 사설학원의 형태로 운영되며 전통 예절 및 한문을 가르치고 있다. 갱정유도 신자들의 교육 역시 담당한다고 한다. 검정고시를 통해 1998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던 한재훈이 대표적. 그리고 서당에선 친구를 때리면 벌을 받았다.

1.2. 상세


주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서당의 주인이자 선생인 훈장이 이들을 가르친다. 무학년제(학년이나 계열을 두지 않고 배우는 사람의 학업 성취 진도에 따라 교육하는 것)로 운영되었다.
문자를 접하기 쉬운 양반 출신이 훈장인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성별은 남성.
규모가 크고 학동 수가 최다인 서당에서는 훈장을 대신하여 고학력급을 가진 학동을 위주로 한 '''접장'''이라는 직책을 통해서 학동들을 가르치기도 한다.[2] 또 훈장이 병고(病苦)[3] 및 유고(有故)[4]로 인한 공석중인 경우에도 통용된다.
학동 또한 남자가 대부분이었고, 여자아이들이 다니는 서당이 없지는 않았지만 공부한다고 해도 여자가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기초적 문자만 배웠다. 민간에서는 남•녀 모두 한자교육을 시킬 필요성을 별로 못 느껴서 그 수는 적었고 대부분은 집 안에서 개인적으로 언문(한글)을 가르쳐 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갑오개혁때 신분제가 사라지고 일제강점기가 되면 교육의 필요성이 증가하여 여자아이들도 서당에 가서 한글 등을 공부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오늘날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할머니들 상당수가 소학교가 아닌 동네 서당에서 글을 배웠다.[5] 허나 평민하대 성격이 강한 양반, 여전히 교육의 필요를 모르던 평민출신들은 이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교육은 강독과 제술, 습자로 이루어졌다. 보통 오전에는 강독, 오후에는 습자, 야간에는 제술을 학습했다.
강독의 경우 기본적으로 천자문을 시작으로 유합, 동몽선습, 사자소학, 추구 등까지 기초교육이 이루어지고 그 다음으로 통감절요로 들어가서 한문 문리를 터득하게 된다. 그 외에 명심보감, 채근담, 삼강오륜, 근사록, 소학 등도 기본 교양으로 가르친다. 통감절요역사를 배운다기보다는 주로 문리를 깨우치기 위한 교재로 사용되었고 대개 제7권 양태부가의상소(梁太傅賈誼上疏)까지를 배우게 되는데 여기까지가 대략 한문을 습득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문 독해력이 대충 갖추어졌다 싶으면 사서삼경 같은 경서를 공부하게 된다.
제술의 경우 오언절구, 칠언절구, 사율, 고풍, 십팔구시, 작문으로 이루어졌으며 주로 서당의 고학년을 대상으로 했다. 제술은 문학적 소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훈장의 자질에 따라 제술이 제외되기도 했다.
습자의 경우 으로 글씨를 쓰는 교과인데 글씨를 반듯하게 쓰는 해서를 주로 쓰며 단계적으로 행서초서로 나아갔다. 대다수의 학동은 강독보다 습자를 더 부담스러워했다.
학동이 책 하나를 모두 통달하게 되면 '책거리', 혹은 '책씻이'라고 하여 학동의 집에서 훈장에게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 여기에서 단자수신을 줬다.
양반 자제만 서당에 다닌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선 전기에는 서당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대개 양반들의 자제나 사족들이 다니는 수준이었다. 평민들이나 향반[6] 출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이 늘게 된다.[7] 물론 신분이 낮은 아이들을 가르쳤던 서당은 편지 읽기나 벽보(방) 읽기 정도를 수업의 목표로 맞추었고, 그만큼 훈장의 수준이 다소 낮아서 교육의 질은 보장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명문가 출신에 권세있는 양반 자제가 다니는 서당은 명망 있는 훈장의 밑에서 과거시험에 커리큘럼을 맞추어 질 높은 수업을 진행했고, 실제로 이들은 수학 후 고등 기관인 향교서원, 성균관으로 많이 진출하여 과거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다. 물론 조선 후기로 가면서 과거시험에 대한 수요가 많이 늘어[8] 대부분의 서당이 과거시험에 커리큘럼을 맞추어 가게 된다.
모든 서당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일반적으로 엄숙한 분위기에서 교육이 이뤄졌다.
서당이 많아지면서 훈장들의 교육 수준도 천차만별이 되어버리자 중앙정부는 서당을 통제하기 위해서 마을마다 훈장들 중 한 명을 '면훈장'으로 지정해 통제했다. 그렇지만 조선 말기 들어서 통제가 소홀해진 모양인지 서당이 민란의 주요 거점지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 시대 경제력이 발달하면서 테라코야(寺子屋)라는 비슷한 개념의 사립 교육기관이 형성되었다. 문자 읽기, 쓰기, 산술부터 일본지리, 역사,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절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가장 주된 교육 목적은 법률, 일상적 글쓰기 등을 배우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교육자 중 10%정도가 여자였다. 남녀공학이 대부분이었지만 남자 학생만 받는 곳과 여자 학생만 받는 곳도 있었다. 조선 서당에 비해 여자아이들이 교육을 받은 경우는 많았으나 남자아이들과 같은 내용을 배운 것은 아니고 주로 산술(算術)이나 바느질, 간단한 문장 읽기쓰기 등을 교육받았다. 여자아이들이 교육을 받은 이유는 결혼 때문이였는데 에도시대 평민 중 그나마 잘나가는 신랑감, 즉 상인이나 장인들의 집안에서는 아내에게 가사능력보다 주판 두들리기나 장부 작성 등 사무 능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가 알아서 결혼 상대를 찾아오는 고위 무사 집안 등 소위 잘사는 집 딸들은 꽃꽂이나 예법 같은 교양과목을 가정교육 받는 정도로 충분하였고 실용적인 학문에서는 오히려 중산층 가정 여자아이들보다 못한 경우가 많았다. 소학교 제도가 생겨나면서 테라코야의 교육자들중 일부를 소학교 교사로 채용했다. 규모가 큰 테라코야는 소학교로 변경되어서 공식 교육기관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테라코야는 서당과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국내에 들어오는 일본 매체에서 테라코야를 '서당' 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서당과 같은 사립 교육기관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고 대신 과외식의 교사 초청이 크게 일었다. 심지어 나이만 많으면 과거 비합격자도 선생을 할수있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는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교재들이 서당에 보급되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천자문이 중국의 고사를 담고 있는 등 아이들이 배우기 어려운 점을 들어 처음부터 동몽선습을 시작하는 서당도 있었다.
서당 교육의 단계는 음이불석(音而不釋)[9]에서 시작해 훈석(訓釋)을 거쳐 과문위주(科文爲主)의 단계[10]까지 3단계가 있다. 천자문, 유합, 훈몽자회, 아학편, 신증유합, 몽학이천자 등을 배우는 시기는 음이불석이라면 사략, 통감절요, 격몽요결, 명심보감, 대동소학, 동몽선학, 경민편, 계몽편 등은 훈석의 단계에서 배운다. 소학, 사서오경, 동국제사, 통감강목, 자치통감 등은 과문위주의 단계에서 배운다.
성적 평가 방식은 순(純)-통(通)-약(略)-조(粗)-불(不)이나 대통(大通)-통(通)-약통(略通)-조통(粗通)-불통(不通)으로 나뉜다. 다만 일부 서당에서는 통(通)-약(略)-조(粗)-불(不)의 4단계 평가만 했다.

1.3. 여담


오늘날 학교 중에서도 한자 과목 선생을 '''훈장'''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또한 한자나 유학을 공부한 지식인들이 사설 서당을 열어서 일반인들에게 한자 및 유교식 교양을 가르치기도 한다.
이른바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이 있다. 사자성어로 당구풍월(堂狗風月)이라 하고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도 학문을 어깨너머로 접하다 보면 알아서 깨우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바리에이션으로 PC방 개 삼 년이면 디아블로를 한다던가, 식당 개 삼 년이면 컵라면을 끓인다던가(...)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서당과 관련된 유명한 작품으로는 김홍도서당도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이 있다. 유명한 김홍도의 서당도는 김홍도가 상상해서 그린 그림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학생들이 신분에 따라 앉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망했거나 돈으로 양반족보를 사서 양반만 다니는 서당에 갈 수 없는 양반 자제여서 평민처럼 취급받는 것일 수도 있다.
삼국지의 등장인물 관우도 출사를 하기 이전에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을 했었다고 한다.
서당초등학교라는 학교도 있다! 분당신도시, 천안시에 있다고.
EBS에서 서당 다큐멘터리를 3편 방영했다.
각종 매스컴에서 한복을 입고 출연하는 김봉곤은 서당 교육만 받아서인지 학력미달로 군 면제를 받았다고 한다.

1.4. 유사기구



1.4.1. 한국



1.4.1.1. 국립


1.4.1.2. 사립


1.4.2. 외국



2. 誓幢


통일신라의 중앙군이다. 9서당이 있었는데 신라인(녹금서당, 자금서당, 비금서당), 고구려 유민(황금서당), 보덕국민(벽금서당, 적금서당), 백제 유민(백금서당, 청금서당), 말갈인(흑금서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신라의 민족 융합 정책 때문이었다.

[1] 여자는 더 높았다.[2] 오늘날로 따지자면 조교.[3] 질병으로 인해 휴직한 경우[4] 훈장 본인이 '''사망'''한 경우[5] 간혹 간이학교 출신도 있다.[6] 신분은 양반이지만 4대가 넘게 가문에서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해 생활 수준은 평민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을 뜻한다. 맹꽁이 서당에 나오는 학동들이 이러한 예이다.[7] 실제로 병인양요때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군 장교에 의하면, 집집마다 천자문, 동몽선습 등의 책이 있어 프랑스군을 매우 놀라게 했다고 기록되었을 정도.[8] 정조 때만 해도 과거응시자가 10만명 단위로 대폭 늘어나게 된다.[9] 아동으로 하여금 한자의 음만 깨우치게 하고 해석까지는 하지 않는 단계.[10] 대다수의 서당은 여기까지 가지 않고 훈석의 단계에서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