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트 포르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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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베르나르뒤스 뤼도비퀴스 포르호프
(Bernardus Ludovicus Voorhoof)
생년월일
1910년 5월 10일
사망년월일
1974년 2월 18일
국적
벨기에
출신지
리르
포지션
포워드
신체조건
176cm / 74kg
등번호
-[1]
소속팀
'''리르서 스포르트크링[2] (1927-1948)'''
R.R.F.C 몽테녜 (1948-1949)
국가대표
61경기 / 30골 (1928-1940)
1. 생애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3. 뒷이야기
4. 수상
4.1. 클럽


1. 생애



1.1. 클럽


포르호프는 13살 무렵부터 고향팀인 리르서에서 축구 선수로서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1926년에는 서류상의 착오로 인해 잠시 에르스탈에서 머무르기도 했다.
1927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포르호프는 거의 모든 커리어를 고향팀 리르서에서 보냈으며, 1927년 10월 16일에 벨지언 퍼스트 리그에 데뷔하였다.
1932년에 리그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으며, 총 2차례의 벨기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3] 그리고 총 21시즌을 보내면서 473경기, 281골의 기록을 남겼고, 이는 벨기에 리그 역대 득점 랭킹 3위의 기록이다. 총 출전과 득점 기록은 529경기 출전 350골. 당연히 리르서에서는 역대 최다 출장 기록과 최다 득점 기록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마지막 시즌에는 3부 리그 몽테녜에서 잠시 뛰면서 30경기 14골을 기록하였다.

1.2. 국가대표


포르호프는 17살에 리그에 데뷔하여 20경기에 출전, 11골을 집어넣음으로서 1928년에는 벨기에 대표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프랑스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른 그는 데뷔골을 기록하며 3대2의 승리를 이끌었고, 올림픽 대표팀에도 선발이 되었지만 경기를 뛰지는 못했다.
포르호프는 초대 월드컵에도 참가했지만, 3주간의 항해로 인해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였다. 살이 많이 쪘고, 그로 인해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펼쳐보일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벨기에 대표팀 전체가 아예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2전 전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다음 월드컵에서 벨기에는 독일을 만났다. 포르호프는 2골을 넣으며 벨기에 대표팀의 첫 월드컵 득점자가 되는 동시에 전 대회의 불명예를 씻어내는 좋은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팀은 에드문트 코넨에게 해트 트릭을 허용하며 독일에 5대2로 대패하였다.
포르호프는 1938년 월드컵에도 참가하여, 골키퍼 아놀드 바주와 함께 30년대의 3개 월드컵 대회를 모두 참가하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벨기에는 호스트 프랑스를 만나 패배하여, 세 대회에서 단 한 번도 1라운드를 통과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940년, 포르호프는 대표팀 생활을 끝냈고, 61경기 30골의 기록을 남겼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헤딩과 패스에 능한 스트라이커. 즉흥적인 전술을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축구 지능도 좋았다.
골은 많이 터뜨렸지만 의외로 리그 득점왕 기록은 단 한 번도 없다. 1940-41 시즌에 득점왕 기록이 있지만 전쟁 때문에 비공식 시즌이 되어 반쪽짜리 기록 취급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대표팀 기록으로는 30골을 기록, 77년간 벨기에 대표팀 내 역대 최다 득점자 자리를 지켰다. 그의 기록 옆에는 파울 판힘스트만이 있었지만 포르호프는 61경기 만에 기록을 달성하였고 판힘스트는 81경기에 걸쳐 기록을 달성하였다. 물론 센터 포워드였던 포르호프와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까웠던 판힘스트를 비교해서 무조건 포르호프가 우위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다만 현재는 후배인 로멜루 루카쿠가 포르호프의 기록을 아득히 추월하였다.

3. 뒷이야기


  • 포르호프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3개의 월드컵에 모두 참가한 6명의 선수[4] 중 한 명이다. 연속 출전 기록으로 범위를 좁히면 4명[5]으로 더욱 줄어든다.
  • 벨기에 리그 단일 경기 최다 득점 기록도 포르호프가 가지고 있다. 1939-40 시즌에 엔트라흐트 알스트를 상대로 8골을 기록하였다.

4. 수상



4.1. 클럽


  • 벨지언 퍼스트 디비전 우승 2회: 1931–32, 1941–42(리르서 스포르트크링)
  • 벨지언 퍼스트 디비전 준우승 2회: 1934–35, 1938–39(리르서 스포르트크링)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現 리르서 SK[3] 1940-41의 비공식 시즌을 더하면 3회의 우승 기록을 남겼다.[4] 에드몽 델푸르, 에티엔 마틀레르, 에밀 베낭트, 니콜라에 코바치, 아르놀 바주.[5] 에드몽 델푸르, 에티엔 마틀레르, 니콜라에 코바치, 그리고 포르호프까지 4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