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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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베트남의 제1대 국가주석. 세계적으로 유명한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가이다.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평가받는다. 베트민을 조직하여 프랑스와 일본에 의해 지배받던 '''식민지 베트남의 독립'''을 이루었으며, 이후 미국의 침략으로부터 '''베트남 전쟁을 통한 베트남의 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20대 초반부터 노년시절까지 반평생을 반식민지 해방 투쟁을 전개하며 살았던 인물.''''꿍아(함께 산다)' '꿍안(함께 먹는다)' '꿍담(함께 일한다)''''
본명은 응우옌신꿍(Nguyễn Sinh Cung, 阮生恭, 완생공). 자(字)는 필성(必成, Tất Thành). 호찌민은 가명이며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은 '호 아저씨'(Bác Hồ, 박 호, 伯胡)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호찌민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민족주의자란 이유로 수배되어 세계를 떠돌며 살았기 때문에 호찌민을 포함 대략 196개의 가명이 있었다고 한다.[2]
과거에는 한국식 한자음대로 '호지명'이라고 불렀고, 이후 한글로 ‘호치민’이라고 표기했으나 2004년 외래어 표기법에 베트남어 표기에 관한 세칙이 추가된 후에는 ‘호찌민’이라고 표기한다. 그러나 현재도 호찌민이라는 표기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아니라서 영화나, 다큐멘터리, 관련 서적과 같은 곳에서 호치민이라는 표기도 간간히 볼 수 있다. 그리고 과거 자료 중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어 발음인 후즈밍도 가끔 보인다. 1980년대 후반에 KBS에서 더빙 방영한 플래툰 더빙판에서도 베트콩을 쏴죽이면서 "덤벼라, 이 후즈밍의 개들아!"라는 한국어 더빙이 나온 바 있다.
2. 일생
2.1. 내력과 출생
호찌민은 1890년 베트남 응에안(Nghệ An, 乂安)성에 있는 호앙쭈(Hoàng Trù)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응우옌 신 삭은 농민 출신으로 가난한 유학자였고, 어머니는 서당 훈장의 딸이었다. 그의 가계가 객가(客家)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3] 그의 아버지가 관직에 오른 그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의 부친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응우옌 왕조의 관리가 되어 수도 후에로 가족을 데려올 수 있었으나, 자신의 일이 식민지 경영의 주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절망했고 결국 불복종을 이유로 해직된다. 현실에 실망한 그는 이후 후에를 떠나 시골에서 약제사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4]
2.2. 독립운동의 시작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호찌민은 물론 형과 누나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때문에 호찌민의 형과 누나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를 당해 수감된다. 호찌민 본인도 프랑스-베트남 학교인 국학 재학 시절인 1908년 징세반대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만다.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판 보이 쩌우의 도움을 받아 잠시 민족주의자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당시 베트남 독립운동 전반에 만연했던 '일본을 배우자.'란 구호를 넘어서[5] 도리어 독립을 위해서는 서양, 나아가 세계를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1911년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 해운회사에 견습 요리사로 취직[6] ,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를 타고 프랑스로 간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세네갈에 있는 다카르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데도 프랑스인들의 명령에 따라 배까지 헤엄쳐 가던 아프리카인 몇 명이 죽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 미국을 비롯한 여러나라를 떠돌면서 정원사, 청소부, 웨이터, 사진 수정자, 화부(火夫) 등으로 일했다. 미국에 있을 당시 보스턴에 있는 빵집에서 일도 했고, 흑인인권운동에도 참여했다 한다.
그 밖에도 영국, 미국 등을 전전하면서 신문물과 사상 등을 배우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들 덕분에 영어, 중국어의 여러 방언과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태국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도 능통했다.
2.3. 애국(愛國)
1917년 호찌민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뒤 1918년에는 제1차세계대전이 미영프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베르사유 회의에 우국지사들과 응우옌아이꾸옥(Nguyễn Ái Quốc, 阮'''愛國''')이란 이름으로 참가해 베트남인의 자유·민주·평등권을 요구했다. 이 시점에서의 호찌민은 프랑스로부터의 완전 독립보다는 프랑스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베트남인의 인권보장을 추구했다. 물론 최종 목표는 독립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신한청년단에서 독립청원서를 발표한 것과 비슷하게 이 가명으로 사용해 '안남 민족의 요구'라는 8개 조항을 베르사유 회의에 제출하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젊은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 운동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고, 향후 27년간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7] 베르사유 회의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우드로 윌슨을 만나 베트남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지만 애초에 민족 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들을 해체하기 위한 의도가 컸고, 미국도 당시 제국주의 열강으로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북마리아나제도 등 식민지들을 보유하며 수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승전국 프랑스의 식민지인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지지해줄 명분이나 이유가 하등 없었기에 윌슨은 호찌민의 호소를 무시했다.
1920년에 호찌민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당시 식민지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러시아 혁명의 여파를 받았듯이 호찌민 또한 사회주의에 입문하게 됐고, 그 시기 자본론이나 공산당 선언, 러시아 혁명사를 비롯한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을 읽었다. 특히나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러시아의 레닌이 발표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태제’가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던 국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지를 받았듯이 젊은 시절 호찌민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922년에는 <르 파리아(Le paria)>를 창간하여 편집인이자 중요한 기고자로 활동했고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낱낱이 비판했다. 때문에 프랑스 당국의 감시에 시달리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에서 활동할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인사들과 만나 교류하고 서로 협조한 사실이 2018년 문서로 확인되었다. 당시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파리의 정보경찰 장(Jean)이라는 인물의 기록에 따르면, '''"호찌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 호찌민과 파리의 임정 인사들간의 교류가 굉장히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호찌민은 임시정부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일본의 압제에 신음하던 한국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됐고, 호찌민은 프랑스 일간지 르 포퓔레르에 1919년 '인도차이나와 한국'이라는 글을 투고, 일본과 프랑스의 식민정책을 비교하기도 했다.
1923년에 개최된 제2차 프랑스 공산당 대회에서 대회 참가단 주석 자격으로 참가했다. 또한 그 해 호찌민은 프랑스 당국의 탄압과 사회주의를 배우기 위해 각국 식민지 농민 대표 자격으로 소련에 건너가 한동안 국제공산당에서 일했다.[8] 소련 유학 시절 그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레닌은 1924년에 사망해서 만나지는 못했지만, 국제공산당에서 일하면서 후에 스탈린의 심복이 될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 그리고 레온 트로츠키 등과 만나 교우했다.[9] 1924년 12월 그는 중국 광저우로 갔는데, 당시 이름을 다시 리투이(Li Thuy, 李瑞)로 바꿨다.[10] 여기서 그는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를 창립하고 동아시아 지역 피압박 민족연합회를 발족시켰다. 이후 소련으로 건너가 공산당원 중 최고급 당원만 유학한다는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한다. 이때 박헌영을 만났다는 일각의 얘기가 있지만, 역사학자 정병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박헌영과 호찌민이 만났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당시 호찌민은 엄연히 코민테른 요원으로, 소련 내에서는 일종의 피압박민족의 투사로서의 모델로 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후 중국과 베트남으로 파견되었을 때에는 혁명 조직을 형성하고 통합시키는 데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여, 베트남청년단, 안남 공산당, 베트남 공산당, 인도차이나 공산당 등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각지에서 만난 뛰어난 인재들을 소련으로 보내 교육시키는 등, 조직과 인재를 통해 혁명의 근간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잠시 태국에 머물 때조차 그곳에 있는 베트남 이주자들과 원주민들을 통합해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기도 하는 먼치킨의 능력을 보였다. 그리하여 1930년 호찌민은 홍콩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1930년 호찌민과 그의 동료들이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했을 시기, 베트남의 통킹과 안남지역을 중심으로 프랑스 식민지배에 맞서 베트남 국민당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주도 아래 노동자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응에 안 소비에트 봉기'라 알려진 이 봉기는 통킹과 안남 지역으로 베트남의 또다른 독립운동 단체인 베트남국민당의 주도로 신속하게 번졌고 인도차이나 공산당도 적극적으로 참가했지만,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던 프랑스는 이 봉기를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아주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그해 10월 호찌민은 공산당 내에서 큰 비판을 받았고, 1931년 6월 호찌민은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32년 12월에 석방된 호찌민은 1933년 1월 중국공산당의 도움으로 홍콩을 탈출했다. 호찌민은 1934년 소련의 모스크바로 갔고 레닌 대학에 입학했다. 1935년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스탈린 대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이 시기 호찌민은 교사로 있으면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좌익 소아병>을 베트남어로 번역했다. 스탈린의 대숙청이 한참이던 1935~37년 그는 소련에서 지내면서 대숙청의 광풍을 잘 피해갔고, 1938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중국 팔로군 지역본부에서 기자 일을 하면서 보건 담당 간부로 일하기도 했다. 1940년부터는 중국 쿤밍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다가[11] 1941년 2월 호찌민은 30년만에 고국인 베트남으로 귀국하였다.
2.4. 1년의 투옥
1942년 8월 호찌민(Ho Chi Minh)이라는 개명한 이름[12] 을 가지고 활동하다가 중국 국경에서 장제스의 중화민국 군대에 잡혀 1년 간 투옥되기도 했다. 1년 간의 감옥생활을 하며 그는 <옥중일기>를 집필했다. 1943년 9월 감옥에서 석방된 호찌민은 중국 남부에 혁명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끝나가던 1944년 12월 보응우옌지압의 지휘하는 베트남해방군이 창설됐다. 해외 생활 도중 미국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미국의 OSS는 호찌민이 말라리아로 쓰러지자 키니네를 구해주기도 했으며, 앞서 장제스가 체포한 호찌민을 OSS가 구해주기도 했다. 1944년 11월에는 미군 전투기가 베트남 상공에서 떨어져 공군조종사 한 명을 살려줌으로써 미국과의 접촉을 시도했다.[13] 또한 종전 직전인 1945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호찌민의 주선으로 OSS에 들어가 여러 훈련을 받기도 했다. 미국OSS로 부터 훈련을 받은 사슴팀과 베트민 부대는 보 구엔 지압의 지휘 아래 몇 개의 일본군 외각 초소를 공격하여, 미국과의 공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14] 이 훈련 경험은 훗날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또한 호찌민은 이때 도움을 준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여러 차례 메시지를 보내지만 당시 미국은 유럽과 일본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려 했고, 유럽에서는 특히 프랑스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메시지를 무시해 버렸다. '''그 결과는...'''2차세계대전 당시 OSS 요원으로서 베트민과의 공동작전을 펼쳤던, 아르키메데스 패티(Archimedes Patti) 소령은 자신이 쓴 저서 <알바트로스의 서곡 왜 베트남인가?:Why Viet Nam?: Prelude to America's Albatross>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15]
[image]"우리들 중 몇 사람은 우리가 제공한 무기와 훈련이 언젠가는 프랑스 사람들과 싸울 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상대가 미국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36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호찌민)
2.5. 항명의 성공, 독립 정부의 수립
1945년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정식으로 자신을 호찌민으로 소개하며[16] , 9월 2일, 호찌민은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해 봉건 군주제를 종식시켰다. 호찌민이 선포한 독립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그러한 권리이다."
이 불멸의 선언은 1776년 미합중국의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넓은 의미에서 이런 뜻입니다. 지상의 모든 민족들은 날 때부터 평등하며, 모든 민족은 생존의 권리, 행복과 자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1791년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문에는 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이 자유와 평등의 권리는 평생 유지되어야 한다."
출처: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2003 p.483~484
2.6. 혼란기와 프랑스의 축출
2차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에는 북위 16도선을 기점으로 북에는 중국의 국민당군과 남에는 영국군이 들어왔고, 영국군이 들어오는 동시에 프랑스 또한 같이 들어왔다. 이후 호찌민은 중국을 경계하여 권토중래를 노리는 프랑스와 협정을 체결하고자 했고, 호찌민은 "프랑스 연방의 일원이 되어야한다"는 프랑스의 요구에 응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퐁텐블로 협상이다. 1946년 호찌민을 비롯한 베트민 지도 세력들은 프랑스 퐁텐블로에서 회담을 가졌었다. 퐁텐블로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그 결과 호찌민은 별다른 성과없이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호찌민은 내심 미국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프랑스편이었던 미국은 이를 무시했다.[17] 프랑스는 호찌민이 폐위시킨 바오다이[18] 를 지도자로 내세운 괴뢰 정부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움으로 베트남을 계속 식민지배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냈고 협상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46년 11월 프랑스가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하여 민간인 6000명이 학살당하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반기인 1947년 10월 프랑스군이 비엑 박을 공격하여 프랑스군에게 체포될 뻔하기도 했으나 호찌민과 그의 수하들은 무사히 탈출하였다. 1949년 마오쩌둥의 중국이 통일을 이룩하자 중국공산당은 베트민을 지원했고, 1950년 10월 말에는 베트민이 홍강 삼각주 인근까지 프랑스군을 몰아낸다. 그 시기 마오쩌둥의 중국과 스탈린의 소련은 호찌민의 베트남을 독립 국가로 인정해줬다. 화력에서 우세한 프랑스였고 뒤에서 미국이 빵빵하게 지원했지만 모든 베트남 국민들은 독립을 원했고 호찌민은 베트남 국민들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호찌민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를 통해 프랑스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는 총 7만 명 이상이나 되는 병력을 전투에서 잃었다. 1954년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총2천명에서 3천명 정도가 전사하고 1만명 이상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19] 이후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게끔 하여 프랑스군을 베트남으로부터 완전히 몰아내고 '''프랑스 식민통치 종결''', 베트남 '''독립'''. 1954년 전투 지역으로부터 수도 하노이로 개선했다.
2.7. 디엔비엔푸 전투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철군했고, 제네바 협약에 따라 1954년 베트남은 17도선을 기점으로 분단됐다. 남북베트남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선거를 해야했으나 모든 베트남 국민들은 호찌민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호찌민의 압승이 예상되었고, 사실상 미국의 괴뢰정부였던 응오딘지엠 정권은 당연히 베트남인들에게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제네바 협약을 파기하고 독재를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베트남 국민이 호찌민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그의 권력 기반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고, 그는 친인척들을 주요 요직에 앉혔으며 이것은 각종 부정부패로 이어짐에 따라 남베트남을 혼란으로 이끈다.
한편 호찌민과 북베트남 정부는 1954년 독립 이후부터 토지개혁, 식량배급제 등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토지개혁의 경우 시행하는 과정에서 농지를 소유하던 농민들을 북베트남 정부 측에서 가혹하게 죽이거나 탄압하며 농지들을 강압적으로 국유화시키는 일이 벌어졌고, 토지개혁의 시정을 요구하는 농민과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이 일어나 이로 인해 군경의 시위 무력진압으로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들이 발생하면서 호찌민 본인이 스스로 자아비판하고 토지개혁을 주도했던 책임자 쯔엉찐이 해임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1956년에 접어들면서 호찌민의 토지개혁이 일단 마무리 되었다. 정권 쪽 입장에서는 토지개혁 정책을 성공으로 볼 수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2백만 에이커(80만 헥타르) 이상의 토지가 2백만 이상의 농민 가족에게 분배되었다. 마을에서 토지를 독점했던 향신 계급의 오랜 지배 체제는 붕괴되었고, 빈농과 중농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도력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토지개혁을 시행한 방법은 쓰라린 유산을 남겼다. 이 운동 기간에 처형된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는 격론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토지개혁에 공감하는 사람들조차도 최소 3천 명에서 5천 명은 죽었을 것이라고 인정하는데, 이들은 보통 지역 재판소에서 판결을 받은 직후 총살대에게 처형당했다. 1만 2천 명에서 1만 5천 명에 이르는 사람이 방해 활동이나 다른 방식의 반혁명 활동 지원이라는 엉터리 혐의로 부당하게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다.[20]
2.8. 대외 활동
한편 호찌민은 1957~58년 사이에 중국, 북한, 동독,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여러 국가들을 방문하며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다. 1959년부터는 북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 남부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남베트남은 애당초 제네바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총선을 거부해서 남베트남 내에서조차 반 정부 세력이 대부분이었고 이것은 결국 1960년 남베트남 안에서 남부인들 출신들로 구성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 응오딘지엠 정권 타토라는 목표하에 창설되기에 이른다.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주범이었던 미국은 도미노 이론에 따라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남베트남 정권을 지원했다. 그러나 미국의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결국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 본격적인 베트남 침략이 시작되었다. 미 대통령 린든 존슨이 사실상 선전포고을 하고, 베트콩과 남베트남군의 내전에서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절대적으로 친미반공국가였던 대한민국, 필리핀, 태국, 호주, 뉴질랜드가 미국을 따라 이 부도덕한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1965년 3월 미해병대가 다낭항에 상륙하고, 미국 항공기들이 북베트남에 대한 융단폭격을 시작하면서 미국의 베트남 침략이 가시화 되었다. 1966년 7월 호찌민은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라는 지금도 전 인류에게 회자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역사적인 명 구절은 북베트남인들의 통일전쟁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는 주제, 구호가 되었다.
2.9. 구정 공세와 최후
구정 공세가 일어나기 한달 전인 1967년 12월 호찌민은 당 지도부가 계획한 '총 공격과 봉기'를 승인 했고, 그의 최종적인 승인이 떨어짐에 따라 1968년 1월 31일 땟(tết) 공세가 시작되었다. 구정 공세 결과 북베트남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남베트남의 응우옌 반 티에우 정권은 무너지지 않았고, 전투의 결과만 놓고 보았을때 구정 공세는 베트콩에게 있어 치명적인 피해를 안겨 주었다. 그나마 눈에 띄었던 건 수도 사이공에서 미대사관 1층을 잠시나마 점령했던 것과, 대략 1달 간 후에를 점령했던 것 그리고 77일 동안 케산에 있는 미군기지를 포위하여 제2의 디엔비엔푸 전투를 연상시켰던 것 정도다. 하지만 생중계로 구정 공세를 지켜본 미국인들의 반전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었고, 이는 베트남 전쟁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1968년 3월 구정 공세로 인한 반전 운동으로 미국이 고민에 빠져있을 당시 호찌민은 베이징에서 구정 공세의 결과를 보고받았고, 베트남 정치국 국원인 레둑토가 "구정 공세 이후의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곧 남부로 출장을 갈 것"이라고 얘기하자, 호찌민 또한 함께 내려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고 한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시기 건강상 문제가 생겼던 호찌민은 요양 차원에서 중국을 자주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었기에 직접 남부로 내려가 활동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1969년 9월 2일 9시 47분, 염원이었던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심장병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21] 향년 79세. 당시 외신기자로서 베트남 하노이에서 호찌민의 장례식을 지켜본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남겼다.
그가 죽고 3년 후인 1972년 부활절 휴가 기간, 남베트남에 미군이 5만명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노이 정부는 새로운 군사작전을 다시한번 개시했다. 1973년 1월 베트남은 파리 평화 협정을 통해서 미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75년 3월 "남부를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4월 30일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마무리지으며 베트남은 '''통일'''을 이룬다. 공교롭게도 호찌민이 사망한 날은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세운 날인 9월 2일이었다.[22][23]“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비탄과 감동, 혼란이 함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듯이 행동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정치 지도자를 잃고 애도하는 그런 슬픔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슬픔을 꾹 참고 견디는 모습이었다. 호찌민의 인민들은 ‘호 아저씨’가 부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순간들이었다.”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 444
2.10. 기타
사망 전 유언으로 화장 후 재를 3등분하여 베트남의 북·중·남부에 한 줌씩 뿌려 줄 것을 요구했으나 베트남 정부는 하노이 바딘(Ba Dinh) 광장 앞에 대규모 영묘를 짓고 호찌민의 시신을 방부 처리한 뒤 안치하여 참배객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24] 이렇게 해서 레닌 이후 시신이 미이라로 보존되고 있는 두 번째 공산권 지도자가 되었다. 호찌민의 유언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유언 중 하나가 전쟁에서 승리 시 남베트남 사람들을 탄압하지 말라는 유언도 있었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의 탐사보도 잡기 오렌지 카운티 레지스터는 2001년 4월 29일 베트남 특집편에서 베트남 정신개조 수용소의 실상을 다뤘는데 100만명 이상이 공식 절차없이 강제투옥 됐고 최소한 16만 5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처형되었다고 밝혔다. 또 학대와 고문이 수시로 일어났으며 손과 다리를 족쇄에 채운 다리로 몇달씩 있게 해서 장애인이 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정신개조 대상의 우선순위는 오히려 해방과정에서 월맹에 협조한 교수 언론인 지식인 승려 그룹이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협조한데 대한 보상이 마땅치 않은데 대한 불만을 표출하자 바로 숙청의 대상이 된것이다. 틱 칙 꾸앙 같이 평화운동을 통해 남베트남 정부에 저항한 유명한 승려도 정신개조 수용소에서 25년을 감금당한후 장애인이 돼서 나올정도 였다. 또한 신경제구역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변방의 밀림 늪지대로 남베트남인 230만명 이상이 강제로 이주당해서 굶주림과 착취로 고통당했다.
하지만 위에 상술된 통일후 전후 처리과정 자료들은 상당히 미국측과 남베트남에서 탈출한 보트피플들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고, 과장된 보도다. 1975년 베트남이 통일 된 이후 베트남 또한 전후 처리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대략 100만 이상의 보트피플들이 발생했고, 100만 명 이상이 재교육을 받았다. 물론 말이 좋아 재교육이지 경우에 따라선 몇 년 이상 감옥생활을 하게되는 경우가 적잖게 있었다. 이들 중 10만 명 이상이 가혹한 처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관련 증언 대부분이 현재 미국이나 프랑스에 있는 보트피플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최병욱 교수가 쓴 '베트남 근현대사'에 베트남 통일 이후 대규모의 학살은 없었고, 이것이 통일 베트남 정부가 국제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사례라고 한다. 따라서 16만 5천 명 처형설은 확실한 근거가 없다.[25] 그러나 전후처리 과정에서 아무런 학살도 없이 평화스럽게 진행되었다는 주장 역시 한쪽의 편향된 주장이기 때문에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당시 베트남같은 나라에서 정권유지와 질서를 위해 반대세력 숙청 및 강압적인 전후처리는 필수일 수밖에 없다. 베트남의 대외선전도 미화될 수밖에 없고 보트피플 출신이라 객관성이 의심가고 믿을만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일제시대 우리나라 강제노역으로 끌려가거나 학살당한 사람들의 주장이 배상금을 타기 위한 조선인들의 일방적인 주장이기 때문 신뢰할 수 없다는 일본인들의 자세와 같은 시선일 수밖에 없다.
'''그가 사망한 것에 관계없이 베트남전은 3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1975년에 북베트남이 승리함으로써 그의 숙원인 베트남의 통일을 이룬다. 그리고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을 그의 이름을 따서 호찌민으로 개명하였으며, 통일 수도는 하노이가 되었다.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시키고, 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에 뿌려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으며 튼튼한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나 중국에 머물던 시절에 중국 여자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이후 혁명동지이자 애인이었던 응우옌 티 민 카이하고 결혼하려 했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호찌민이 체포되면서 이들 역시 실종되었고, 북베트남 주석이 된 이후 호찌민이 이들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이때는 주민등록제도와 같은 인구 파악 및 신분확인을 위한 제도가 완전하지 않은 시대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3.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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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과 함께 농사일을 하는 호찌민.
남들에게도 매우 친절하였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호찌민이 친척의 집에 갔을 때 친척들이 나중에 그가 유명한 호찌민이라는 것을 알아서 어찌할 줄 모르자 그는 "그냥 평소대로 해주세요."라고 했다. 진정한 대인배.유능한 지휘관이지만 툭하면 부하를 때리는 장군이 있었다. 호 아저씨는 그 장군을 주석 집무실로 불러 며칠을 같이 지내면서 복잡한 나랏일을 항상 침착하고 온화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는 갑자기 장군의 뺨을 때렸다. 장군은 얼떨결에 당하고 어쩔 줄 몰랐다. '''이렇게 맞는 심정이 어떠냐고.''' 이어서 호 아저씨는 부드럽게 당부했다. '''부대에 돌아가거든 부하를 때리지 말고 사랑하라고.'''
출처: '왜 호찌민인가?' p.8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했는데 낡은 옷을 기워서 입기가 일쑤였고, 폐타이어를 잘라 신발을 만들어 신었을 정도였다. 그 뿐만 아니라 하노이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는 고가 귀중품은커녕 고물 라디오 한 대와 책 몇 권이 있는 게 전부였다고 하니 이는 그가 얼마나 검소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3찬 만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왜 3찬 만을 드시냐고 물으니 "'내가 반찬 하나를 더 먹을 때마다 우리 국민 하나가 더 죽는다.'"라고 했다고 한다.[26]
호찌민이 죽은 뒤 그의 명성을 먹칠하고자 그가 실은 사치스럽게 지냈더라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으나 무엇 하나 증거도 없이 주장하던 거라서 결국 개소리로 묻혀졌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호찌민 연구가들도 꼼꼼하게 조사했지만 그가 사치를 누렸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보트피플을 비롯한 일각에서는 호찌민이 아동성폭행범이라는 주장도 하지만, 증거는 전혀없다.
그렇긴 한데 실은 그도 사람인지라 화려하고 풍족하게 살고픈 욕망이 없던 건 아니다. 친구에게 털어놓은 고백을 보면 '''"나도 마음껏 먹고 싶은 걸 먹고 편하게 살고 싶다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걸 실제로 이루지 않으며 살았기에 전설이 되었다.[27] 일화에 따르면 딱 하나 자신이 사치라고 부르던 것을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영국제 담배 555였다. 이것만은 양보 못 하겠다고.[28][29] 이 담배외에도 살렘, 말보로, 켄트도 좋아했고 누가 양담배를 구해주면 몹시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가는 곳을 경호원들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이는 갈 곳을 알리면 그 곳에 있는 주민들이 귀찮기 때문에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노이에는 호찌민이 기거했던 옛 주석궁이 있는데, 이곳은 본래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총독부였다. 당연히 상당히 호화로운 곳이지만, 호찌민은 정작 이 옛 총독부 관저를 쓰지 않고, 주석궁 안의 연못 옆에 작고 허름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와서 수염을 당기면서 '파파 호호'라는 애칭으로 불러주면 미소 지으면서 손수 베트남 고유악기를 치면서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불러주며 같이 놀아주곤 했다. 하루는 아랫사람이 아이들이 마구 뛰어놀면서 시끄럽다고 화내자,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처럼 활기찬 곳은 없다면서 놔두라고 했단다. 그 시절 그를 돌보던 가정 도우미는 그가 화를 내거나 불평불만을 낸 걸 좀처럼 볼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30]
이렇게 베트남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호찌민 덕에 베트남에는 꽤나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지만 큰 마찰은 없다고 한다. 호찌민도 생전에 소수민족도 우리의 동포라면서 그들의 풍습에 맞는 집에도 거주하였다고 한다. 호찌민은 가는 곳마다 소수민족을 설득하여 베트남 독립운동에 동참하라고 권했고 그들을 위한 간단한 신문을 만들었으며 문맹자들을 위해 외우기 쉬운 노래를 만들어 가르쳤다. 이들 중 공부를 좀 하는 젊은 학생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중국이나 소련에 유학보내기도 했다. 그 결과 몇년 후 북쪽 지역 대부분 소수민족들이 베트민이 되었고 소수민족의 협조는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이 승리하는데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31]
아무튼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의 정신적 지주이자 서민적인 모습으로 다가갔던 그를 기리기 위해 사이공을 호찌민으로 개명했다.[32] 그의 사망일은 공교롭게도 독립선언과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9월 2일과 일치하는데[33] ,이 날은 베트남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다. 그야말로 '''그는 전설이 되었다.'''
4. 평가
호찌민에 관한 논란 중 하나는 과연 호찌민이 민족주의자인지 아니면 공산주의자인지 여부였다. 실제로 한 동료에게 호찌민이 고백하기를 자신이 공산주의가 된 이유는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자신을 도와준 자들이 프랑스인 공산주의자들 뿐이어서 였다고 한다. 당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프랑스 좌파들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반대했고 해외 식민지 출신의 타민족을 배척하는 행동에 반대했다. 프랑스에 막 도착한 젊은 호찌민 입장에서는 먼저 손을 내미는 프랑스 좌파들의 도움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코민테른 요원이기까지 했으니 호찌민은 분명 공산주의자이긴 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 제3세계의 식민국가들의 '''독립을 도와준 유일한 세력은 소련이었다.''' 당연히 찬 밥 뜨거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닌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호찌민은 좀더 민족주의적인 측면을 인정하고 신경제정책 등을 펼치기도 했던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지자였고 많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심지어는 같은 동지들에게서도) 공산주의의 이론적인 이해가 떨어진다는 평을 들었을 정도다. 게다가 밑의 명언에서도 나오는 "나를 이끈 원동력은 공산주의가 아닌 애국심이었다."라는 말이나 일평생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신한 만큼 호찌민은 꼭 공산주의자이다 민족주의자이다 나누기 보다는 그 둘 모두로 바라보는 게 더 바람직할 것 같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찌민을 반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반은 블라디미르 레닌이라 정의하며 "그가 민족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하는 논쟁은 그 다지 의미가 없다."라고 했다.1952년 두 정상 사이에 회담이 열렸을 때 스탈린은 회의실의 의자 두 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스탈린: 호찌민 동지, 여기 의자 두 개가 있소. 하나는 민족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요. 동지는 어디에 앉고 싶소?
호찌민: 스탈린 동지, 나는 두 의자에 다 앉고 싶습니다.
출처: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2003 p.620~621[34]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적절히 버무린 점, 그리고 제2세계 국가에서 비교적 민주적인 운영 시도를 한 점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비견되는 지도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호찌민은 실용주의자기도 했는데, 이는 일생 줄곧 도덕적인 면모를 지켜나가면서도 혁명을 위해서라면 여러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든지, 그런 와중에서도 되도록이면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든지, 혹은 베트남민주공화국에서 공산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사적 소유'''를 크게 제한하지 않으며 '''신성한 권리'''라고 언급하는 등 여러모로 실용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는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을 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볼 수도 있지만, 유명한 공산주의자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호찌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과 겹쳐서 생각해본다면 이는 공산주의에 구애받지 않고 호찌민이 베트남 민족 모두를 포용한 정부를 세우려 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교계의 그랜드슬래머였다. 일본 제국을 몰아내기 위해 미국과 손을 잡고, 중국의 야욕을 견제하기 위해 (비록 걷어찼지만) 국치의 적인 프랑스에 손을 내밀고, 미국에게 호의 섞인 제스쳐를 보내기도 하며[35] , 감정이 악화된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적당히 줄타기를 하며 어느 한 나라와도 크게 적을 만들지 않았다.
호찌민 사후 공산당이 베트남을 급격히 공산화시키며 나타난 경제적인 폐해와, 팽창주의와 급격히 친소련으로 기욺에 따라 일어나게 된 중월전쟁까지, 호찌민이라는 지도자 하나가 사망함으로써 일어난 베트남의 변화는 결코 좋은 것이라 말하기 힘들다. 이후 베트남의 개혁주의자들이 괜히 '호 아저씨라면 오히려 좀 더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을 것이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비록 말년에 외교 분야를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많은 실권을 잃어버렸지만, 베트남의 국부로서 미국인들의 조지 워싱턴과 같은 이미지로 베트남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인물로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윗동네의 같은 공산주의자였던 마오쩌둥은 오늘날 중국에서조차 부분적인 비판은 받고 있지만[36] 호찌민은 베트남에서 그야말로 국부 급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에 가거나 베트남인이 있는 곳에서 호찌민을 까내리는 것은 반드시 삼가도록 하자.'''[37] 실제로 베트남 국민들중에서는 중국의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국민들을 여럿 죽이거나 탄압했던 것에 비하면 차라리 호아저씨가 다스리는게 더 나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정도이다.[38][39]
베트남으로 여행을 가든 출장을 가든, 베트남 공항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온 거리 온 건물 동서남북 어디에 있건 온통 호찌민의 초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지겹도록 보게 된다. 베트남의 따스한 아침햇살을 맞이함과 동시에 당신은 언제나 호찌민 초상화를 보며 상쾌한 하루를 시작할 것이고 호찌민 초상화를 보며 집으로 들어올 것이다. 예외는 없다. 진정한 국민적 스타가 호찌민이다. 이는 베트남의 통합을 이끌어내는 큰 정신적 자산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구 남베트남 출신으로 북베트남에 동화되지 않고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다.[40] 미국과 프랑스 등지에 사는 베트남계 이민자들이 대부분 구 남베트남 출신으로, 베트남전 전후로 도망쳐 나오거나, 이후 보트피플로 탈출한 사람들의 후예이기 때문. 실제로 1999년 한 젊은 베트남인이 미국의 베트남계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리틀 사이공에 있는 그의 비디오 가게에 호찌민의 사진을 걸었다가 베트남계 이민자들의 거의 테러에 가까운 분노가 섞인 항의를 받았을 정도.###[41] 한국 공중파 뉴스에서도 해외토픽 부분에 당시 상황이 나왔는데, 중장년 베트남계 이민자가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경찰이 출동하면서 말리자 '''"호찌민의 사진을 철거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라고 절규하는 모습이 나왔다. 미국이나 프랑스 같이 규모가 큰 베트남계 이민자 사회가 형성된 곳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보트 피플로서 망명해 온 구세대 이민자들과 90년대에 서방과 베트남의 관계가 정상화된 이후 유학이든, 사업이든 정상적으로 이민을 온 전후 세대 이민자들 사이의 갈등이 크다. 전자의 경우 당연히 통일 베트남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 나온거니 호찌민을 좋게 생각 할 수가 없으나, 국교 정상화 이후 떳떳하게 해외로 나온, 북베트남이나 통일 베트남의 교육을 받은 베트남인들에게 있어 호찌민은 당연히 국부이기 때문이다.[42][43]
1960년대 부터 베트남 전쟁을 연구해온 리영희는 호찌민을 매우 존경했다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3월 23일 베트남의 호찌민 묘소를 방문하면서 전 인류를 통틀어서 위대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5. 비판
5.1. 과대평가
허나 일각에서는 호찌민에 대해 시대를 잘못 예측한 이상주의자 또는 인품이 훌륭했어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 독재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마오쩌둥이 그렇듯, 68혁명 여파로 서구권에서 히피들에 의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무엇보다 외부적으로나, 베트남 내부적으로나 뭔가 뜬구름 잡는 훌륭한 민족지도자로서 '''존경'''만 받지, 제대로 '''연구'''된 적이 별로 없다고 주장한다.[44]
당장 이 항목만 봐도 호찌민이 이만큼 훌륭한 인물이었다, 피상적인 60년대 신좌파의 낭만적인 미화적인 시선이 지배적인데,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사생활이 굉장히 깔끔담백한 검소 그 자체였던 건 레닌과 스탈린도 마찬가지고, 공산주의는 부분적으로 빌리기만 하되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더 중점을 둔 건 편협한 반공 자체만을 위한 반공적 시각이 아니고선 전혀 그 자체로는 딱히 긍정적인 사실도 아니다! 폴포트, 김일성 같은 아시아 사회주의권의 대표적 폭군들도 '사상적으로 순수한'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거리가 먼 반면 조국과 민족 타령은 입만 열면 해댔고, 마오쩌둥이 주장한 마오이즘 역시 이론적인 차원에선 소련의 원형과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애초에 마르크스-엥겔스 듀오 본인들이 아예 이론뿐만 아니라 진짜 혁명을 일으켜 사회주의 국가를 세워서 자신들의 이론을 그대로 실천한 적이 없었던 만큼, 이리 보듯이 현실 정치의 역사에서 사실 순수한 오리지널 공산주의 국가의 원형을 찾는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상 허상에 가깝다. 반공 가치관의 영향인지 한국의 미디어물이나 인터넷, 서적, 지식인들과 논객들 사이 평론을 보면 '''"빨갱이들 중에서는 그나마 덜 빨갱이스러웠다"라는 어조로 티토나 호찌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 위 문단에서 설명했듯이 현실 정치사에서 순수한 공산주의 국가[45] 라는 물건 자체가 존재한 적이 없고, 해당 지도자들이 다른 공산권 독재자들에 비해 긍정적으로 평가 받는다면 그건 그들이 저질렀던 학살과 정치적 탄압이 다른 공산권 국가들에 비해 여러가지 이유로 덜 부각됐기 때문이지,[46] 사상적으로 더 순수하거나 덜 순수해서 긍정적으로 평가 받는게 아니다.[47][48]
베트남의 경우 친소적이고 베트남 내부에서만 떠들어대지 밖으로는 무슨 정확한 사상 체계인 양 흉내도 안내고, 아무도 그리 봐주지 않는 '호찌민사상'이란 물건만 제외하면 딱히 자신들만의 요상한 사회주의 브랜드를 주장한 적이 없는데, '''이건 말 그대로 사상적인 차원에서 보면 굉장히 유연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호찌민에 대한 구체적인 정치인으로서 평가가 아닌, 그냥 대충 훌륭했던 사람이란 식의 두루뭉실한 인식은 사실 다음과 같이 호찌민을 상대했던 다양한 입장들의 인식이 맞물리고 증폭되어 형성된 점이 크다.
대미 항전, 대불 항전을 벗어나 2차대전 이전 젊은 혁명가로서 호찌민이나 초기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행적과 발전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지금까지 알려진 붕 뜬 성자와 같은 두루뭉술하고 막연하게 긍정적인 이미지는 호찌민 본인과 베트남 공산당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형성한 이미지일 수 있으며, 실제로는 '''남의 힘(주로 프랑스 식민 총독부)을 빌려 적을 제거하는 것에 능숙했으며, 필요에 따라 자신은 공산주의자라 했다가 민족주의자라고 왔다갔다 하며 공산권, 서방 양쪽 상대로 말을 잘 바꾸었던 굉장히 영악하고 노련했던 희대의 먼치킨이자 그시대의 진정한 최종보스 정치인'''에 가까웠을 수도 있다.
5.2. 토지개혁 관련
호찌민에 대해 또 다른 논란의 대상은 그 유명한 토지개혁이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후인 1954년에서 1956년 동안 북베트남에서 토지 개혁을 무리하게 이끌다가 농민과 노동자들이 반발하여 파업, 시위까지 일으킨 이들을 철저하게 진압하였다.[49]
사실 이 문제는 좀 복잡하다.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호찌민의 베트민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중국의 도움을 받았었다. 따라서 베트남에는 중국 고문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문제는 이 때 중국은 '''대약진 운동''' 기간인데다 이 양반들이 '''마오주의'''에 물든 스페인 이단심문관급 인물들이었다는 것. 전쟁의 원조로 목소리가 높아진 것을 이용해 베트남에도 '''중국식''' 토지개혁과 사상개혁을 요구하고, 이를 소리높여 거부하기 힘든 호찌민 등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 일. 당시 베트남 공산당 지도자이던 쯔엉찐(Trường Chinh, 長征, 장정)의 지도 하에 이게 일어나게 된다.[50]
그러나 결과는 북베트남에 오랫동안 공헌해온 베트민 고참 퇴역병부터 베트민에 꾸준히 협력해온 지주들까지 전부 쓸어버린 말 그대로의 중국식 개혁이었다. 과거 중국에서 벌였던 것처럼 공산당 내부에서 지정한 수치를 들먹이며 지주는커녕 중농이라고도 볼 수도 없는 사람들을 지주로 몰아 죽이거나 고문하거나 투옥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이 과정에서 의욕 넘치는 개혁요원들이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반동으로 몰아 가혹하게 고문하였다. 해묵은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여기저기 밀고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 여파는 21세기인 현재까지 이어져서 아직까지도 베트남 북부 농촌에서는 토지개혁 문제로 철천지원수가 되어 어떠한 일로도 교류하지 않는 집안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당황한 호찌민과 북베트남 지도부는 2만명 이상의 억울한 피해자들을 석방하는 한편 조사를 통해[51] 과잉을 인정하고 피해보상 대책 등을 제시했으나 이미 분노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까지 치달아서 결국 대규모 농민시위와 노동자 파업이 벌어져 정권이 흔들리는 수준의 소요가 있었으며 진압 및 토지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1만~5만 가량이 사망하거나 수용소로 연행되거나 파업과 시위를 주도했던 노동자, 농민 지도자들이 총살되었다.
참고로 이 월맹 정권의 토지 개혁은 마침 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남북간 인구 교환 직전에 터진 사건이라 당시부터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마냥 월맹 정권을 미화하던 좌파 언론에 의해 가려져 있다가 새로 밝혀진 사실이 전혀 아니다. 처음에 토지 개혁 과정 중 10만 사망드립을 친건 프랑스인 공산주의자로서 처음에는 오히려 조국의 군대와 국가에 맞서 베트민에게 협조하다가 책이 아니라 몸으로 공산주의를 배우고 전향한 제라르 통가스(Gerard Tongas)로, 이를 이어 받아 당시 열혈 종군기자로 이름 높았던 버나드 폴이 5만을 주장하다가, 전쟁 중에 전향한 베트콩 호앙 반 끼가 갑자기 난데없이 자신의 저서에서 30만명설을 주장하던게 당시 미국 당국자들의 입맛에 맞아 100만명설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역풍으로 반전 성향의 학자, 언론인들은 게레스 포터가 1972년에 북베트남 당국의 결정을 옹호하는 어조로 겨우 1,500명 희생자를 주장했으나 이건 역으로 지나치게 적은 계산이다.[52] 학계 내에서는 이미 2000년대 후반에 당시 노동당 내에서 '''대충 천명당 지주 한명씩 죽여라'''라고 명시한 내부 문서와 이 주제만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에드윈 모이즈의 1만 5천명 추산이 맞아 떨어지면서, 당시 신생 정권의 통계적 부정확함, 통계에 잡히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례 등을 감안해 2만명 가량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53] 호치민 평전의 저자인 윌리엄 J 듀이커도 대략 1만 5천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따라서 10만 명 사망설은 매우 과장되었다는 것.
허나 이 토지개혁의 참상은 베트남 지도부들이 토지개혁을 경제개혁만이 아니라 반대파 축출로써의 기능을 이용하려다 역효과가 일어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자기나라에선 오히려 이런 참상을 보고 반동 척결한다고 박수치던 근성 어디 안간 중국인 고문들은 이것을 진정시킬 생각은 않고 오히려 이를 선동 부채질하며 문제를 악화시켰다. 심지어는 호찌민도 반대파 축출로써의 이 기능을 일부 인정하기도 했다. 때마침 1956년 모스크바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쇼프의 주도로 스탈린 격하 운동이 시작됨에 따라 스탈린식 토지개혁의 당위성도 사라져버리고 중국도 더 이상 토지개혁을 하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이 일은 중단되었다. 호찌민은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총서기 쯔엉찐을 비롯한 베트남 총지도부 4명을 해임했고[54] 호찌민 자신조차도 자신이 민주주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자아비판을 직접 할 정도로 참혹한 실패로 끝나 호찌민의 위신은 이때 큰 손상을 입었다.
이를 두고 호찌민은 실권이 없었다, 반대를 했었다 운운하는 옹호도 있으나, 호찌민이 스탈린과 회동하는 와중 직접 이를 언급했을 만큼 적어도큰 계획 만큼은 호찌민이 알고 있었다는 점은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애초에 토지개혁과 관련된 정치적 폭력이 호찌민과 베트남 당국이 주장하는 만큼 '순진한 실수'였는지 자체가 의문이다. 막말로 자아 비판은 일단 저지른 다음에 나중에 그냥 한번 하고 치우면 될 일이고, 그나마 호찌민만큼의 양심이나 수치심도 없었던 다른 공산권 독재자들은 그런 최소한의 반성하는 모습도 보여준 적이 없는게 차이인데, 진짜 순수한 의도로 진행하다 생긴 '재난'치고는 당시 서방 상대로는 공산주의는 표면이고 자신은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했던 것과는 반대로 당시 소련, 중국에게는 자신의 공산주의자로서 순수성을 증명할 필요라는 그럴듯한 외부적 여건도 있었다. 게다가 애초에 그렇게 호찌민이 정치적 탄압을 가하는걸 꺼렸던 성자였다면 30, 40년대에 그리 이를 악물고 VNQDD와 같은 다른 민족주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힘을 썼을까? 이리 순진함에서 비롯된 실수라고 보기에는 토지 개혁을 강행하며 원하는 향촌 자치를 억누르고 전통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했던 농촌들을 정권의 통제에 편입 시키는등, 베트남 노동당이 토지 개혁을 통해 얻은 점이 너무 많다. 일각에서는따라서 토지 개혁에 관련한 일련의 위기 사태에 호찌민이 보였던 행보 전체를 쇼로 취급하고, 토지 개혁이 터진 시점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분수령이었음에 주목하여 의도적인 전시 공산주의의 연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55]
5.3. 정치적 탄압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북베트남 내에서도 정치적 반대파들에 대한 탄압은 존재하였다. 이 와중에서 전 세계 공산권의 역사에서 거의 항상 발견되는 패턴인 좌파 내 지분 독점성 숙청도 여전했다. 주로 트로츠키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상대로 자행 되었다. 현대 베트남에서이런 주제는 당연히 연구하기 힘든 지극히 민감한 주제이고, 외국 학자들도 주로 관심이 대미전쟁기에 집중 되다 보니 거의 연구 되지 않은 주제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인도차이나 출신 유학파 반불 급진 독립 운동가들은 딱 소련 다음으로 19-20세기 급진 좌파의 역사에서 중요하다 할만한프랑스의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과 직접 연결돼 있었고, 이 와중에 트로츠키주의나 아나키즘 또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40년대 중후반, 외부적으론 프랑스와 전쟁하며 내부적으로는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는 동안 호찌민과 베트민 정권은 1945년 독립 이후 하노이에서 프랑스 유학파 트로츠키주의자 서클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따 투 터우(Tạ Thu Thâu, 謝秋收)를 암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꾸준한 테러, 정치적 박해를 통해 '해방'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상당히 다채로웠던 인도차이나 반제국주의 급진 민족주의 세력을 일당 독재적 지도 아래 통합했다.[56] 이 와중에서 호찌민은 상술한 따 뚜 떠우 암살 사건만 하더라도 당시 베트민 정치범 석방 운동을 하던 프랑스 출신의 스페인 아나키스트 CNT 소속혁명가, 저널리스트였던 다니엘 게렝에게 자신과 상관 없는 공산당 평당원들이 저지른 우발적 테러라 주장하며 "그는 훌륭한 애국자지만 근본적으로 잘못된 노선 위에 있었다. 어쨌든 그리 죽은 건 애석한 일이다"라 말하는 기만적인 눈가리고 아웅하는 모습을 보였다.[57]
가톨릭 교도들을 탄압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미 베트남의 가톨릭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깊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단순히 '친불매국노'로만 볼 수 없는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었지만[58][59] 북베트남 정부는 가톨릭 교도들이 매국노라는 '''선입견 하에 그들을 매우 박해하고 차별했다.'''[60] 순전히 편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게 된 가톨릭 교도들은 크게 분노했고 카톨릭 농민 반란이 일어나 2500명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결국엔 북베트남의 150만명의 가톨릭 교도들 중에서 60만명 이상이 월남하였다.[61][62] 이 토지개혁-카톨릭 탄압 콤보를 본 미국은 북베트남을 전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고 미해군과 CIA는 군사작전으로 천주교 월남을 적극 도우면서 이를 프로파간다로 써먹었다. 응오딘지엠도 신앙의 자유도 없는 너네랑 어떻게 자유 선거를 하냐?란 식으로 총선거를 거부하게 된다.
호찌민 스스로는 인자하고 관대한 성품을 가졌지만, 한참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던 시절 부하들의 난폭하고 무자비한 행동에는 별다른 터치가 없었다고 한다. 사실 이는 역사상 많은 독재자,학살자들이 가진 의외의 일면이기도 하기 때문에 결국 호찌민 스스로는 착했다 해봐야 널리고 널린 독재자 타입중 하나에 불과하다. 도조 히데키도 개인적으로는 검소하고 부하들에게 인자한 인물이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근거로 도조의 거대한 전쟁범죄를 변호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북베트남 정권의 학살은 북베트남 지도부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현재도 남베트남인과 북베트남인 간의 갈등은 꽤 심하다. 북베트남인들은 남베트남인들을 보면서 저 돈만 아는 박쥐같은 앞잡이놈들이라고 하고, 남베트남인들은 북베트남인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으니 하면서 서로 경멸한다.[63] 남베트남이 적화통일되면서 대대적인 학살과 보복을 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 당장 지금 베트남 여행만 가도 관광코스에 매우 높은 확률로 보트피플 견학이 들어간다.
호찌민은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인물으로 인식되고 실제로 그런 모습도 보였지만, 권력 장악 과정에서 걸리적거리는 인물에게는 냉혹하게 대했다. 연립정부 수립 제안에서 응오딘지엠이 자신의 제안을 거부하자 호찌민은 응오딘지엠의 큰형을 살해하고 응오딘지엠을 납치하여 감금하기도 했다.[64] 이때 호찌민은 응오딘지엠을 해치면 민족주의 세력 포섭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응오딘지엠을 석방하지만 원래도 사상으로 충돌하던 응오딘지엠과 월맹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응오딘지엠이 성명을 통해 프랑스는 물론 월맹과도 협력하지 않겠다고 천명하자 호찌민은 응오딘지엠에 대한 암살지령을 내렸다.
5.4. 계획적인 학살의 최종 책임자
베트남에서 프랑스가 완전히 철수하고 남북분단이 된 이후, 호치민의 사주를 받아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던 베트콩들은 전쟁 기간 내내 엄청난 규모와 잔혹성을 가진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이 만행은 민간인 군인을 가리지 않고, 단순히 적 정권에 협력적이거나 호의적인 양민들만 죽이는 게 아니라, 별 정치적인 의도가 없더라도 그게 남베트남의 체제에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매우 잔혹하게 방해하고 탄압했다. 심지어 단순히 투표를 하러 가는 행위라든지 교육받으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도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베트콩은 경고랍시고 아이들에게조차 야만적인 폭력을 저질렀는데, 피해자들은 죽거나 살아남더라도 신체 정신 양쪽으로 엄청난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다음은 1969년 미국 의회 기록의 일부로, 애리조나 출신의 한 사람이, 미국의 히피 같은 반전운동가들이 미국인들을 아동학살자, 전쟁범죄자 등으로 몰아가면서 정작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잔혹성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고 있다고 탄원하면서 인용하는 글이다. 매우 잔혹한 내용이 많기 때문에, 비위가 강한 사람도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는 것이 좋다.
잔혹함 주의
하지만, 이 짓거리에 정면으로 반항하듯 남베트남의 교육 체계는 다시 굳세게 돌아왔다. 빨갱이들이 파괴한 학교는 다시 세워졌고,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했다. 많은 선생들은 그들의 집을 포기하고 매일 밤 다른 학생의 집에서 머물러서 빨갱이들이 그들을 찾지 못하도록 하거나, 아예 가족 곁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통근학기도 했다.}}}
특히나 악질인 점은, 단순히 아이들까지 가리지 않고 학살과 탄압 대상에 무조건적으로 포함시키는 것도 충분히 악질적이지만, 베트콩은 그걸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아이들을 주 타겟으로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교육 체계에 대한 사보타주에서 잘 드러나는 점은 이러한 테러리즘이 단순히 남베트남 정부의 폭정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우발적인 현상 같은 게 아니라, 철저하게 남베트남 체제를 약화시키기 위한 공작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즉, 베트콩과 그에 대한 지령을 내리는 북베트남 정부의 전쟁범죄는 전쟁이 복잡해지면서 나오는 우발적인 사태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추축국의 전쟁범죄와 마찬가지로 계획과 효율주의로 점철된 학살, 테러리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련의 사태에서 호치민에게서 책임을 돌리고 하부 조직들에게 대신 책임을 물리려는 시도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호치민은 죽을 때까지 북베트남의 공식적인 국가 원수였으며, 미군 개입기 동안 실질적인 북베트남의 지도자였다는 레주언이 월북한 건 1957년의 일이고, 공식적인 2인자 자리에 앉은 것도 60년의 일이다. 그 와중에도 베트콩은 끊임없이 남베트남의 민간인과 아이들에 대한 만행을 자행했다. 또한, 실질적인 지시를 내린 것이 부하들이라 한들, 최고 지도자로써 그것을 의도적으로 제지하지 않아놓고 책임을 피해갈 수 있는 국가원수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65]
결론적으로, 호치민은 추축국과 마찬가지로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전쟁범죄와 폭압, 학살을 자행한 집단의 지도자로써 그 책임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으며, 오히려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인물 중 하나라는 것이다.
5.5. 베트남 전쟁의 성격에 대한 쟁점
베트남 전쟁이 호찌민과 북베트남이 일으킨 침략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66]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이라는 희대의 뻥튀기를 벌이며 전쟁에 참여한것이다. 처음 충돌은 베트남 내전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과 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 군부들의 쿠데타로 인하여 남베트남이 불리해지자 통킹만 사건이라는 희대의 조작사건을 일으켜 베트남을 침략한건 엄연히 미국이었다. 사건 당시 사상자는 한명도 없었는데 전쟁에 참여하면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돌프 럼멜의 통계를 들이대며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1954년 부터 1975년 까지 최소 13만, 최대 30만으로 추산되는 민간인학살을 벌였으며,[67][68][69] 북베트남의 최고지도자 호찌민도 그 책임을 피할수 없다. '''...라고 하며 베트남 전쟁을 북베트남과 호찌민이 일으킨 것으로 보는 일각의 시선이 있는 모양인데,''' 분단 한국의 상황을 분단 베트남에게 일대일로 대입시키는거 자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역사적 관심 자체보다 일차원적인 정치적 이용에 더 관심이 쏠린 노골적인 시각이다.[70]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성격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당시 남한 내 좌익의 사회적 영향력과는 별개로 어쨋든 소련군정이든, 김일성 정권 아래든 공산 정권 아래 살아 본 경험 자체가 없고, 따라서 북한의 남침은 일방적인 침략 행위로 국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당시 사회적 분위기나 인식 되었다.
반면 베트남의 경우 질적으로 뿌리 자체가 다르다. 월맹 정부가 프랑스와의 협약으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낸 1954년 제네바 협정 당시, 훗날 남베트남의 영토가 되는 베트남국 영토의 까오다이를 비롯한 무장 종교 교단 세력이 먹은 곳 빼고 60에서 90%가 프랑스 식민 당국 자체의추산으로 월맹의 통치 아래 있었고, 무엇보다 1950년 6월 25일이라는 뚜렷하고 구체적인 시간에맞추어 공개적인 침략 전쟁을 시작했던 북한과달리, 베트남전 당시 월맹군의 직접 개입은 일러도 1972년 '부활절 공세'라 불리오는 춘계 공세다.[71] 이 이전까지 베트콩과의 전쟁은 실제로 베트콩 내부에 북부에서 파견하여 내려온 조직원의 비중이 작았다 하면 그것도 뻔한 거짓말이지만, 원칙적으로 닉슨 행정부의 베트남화 정책 이전 베트남전은 남베트남 내부의 자생적인 게릴라 조직을 토벌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그리고 베트콩 항목에도 들어가보면 나와 있는 내용이지만, 사이공 정부에 대한 무력 투쟁은 월맹 정부가 아니라 월남 내 잔존해 있던 베트민 세력으로 인해 시작됐다.[72] 물론, 이들은 곧바로 북베트남 정부의 의지 아래에서 활동했으며 그들의 의도에 따라 남베트남 민중들에게 여러 만행을 저질렀으므로 큰 의미는 없다. 애초에 남베트남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그것이 남베트남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나 최소한 묵인 같은 걸 받았다는 증거가 되지도 않고 말이다.
역사학자도 아닌 네오콘 성향의 정치학자이자 어용학자 루돌프 럼멜의 근거 출처가 불확실한 통계를 들고와서 침략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3만~30만의 학살을 벌였다고 주장하는데, 각잡고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 책임여부를 상세하게 따지자면 저게 전부 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직접 저질렀다는 증거는 어딨는가?[73][74][75][76] 베트콩이 큰 지휘 체계로 따지면 하노이에 있는 노동당의 지시를 따른건 맞지만, 베트콩 항목에나와 있듯이 대규모 작전이 아닌일상적인 차원에서 게릴라전은 현지 지도부 재량으로 움직였고, 월맹에서 남파된 인원이 많았다 한들 애초에 중부 고원지대와 사이공 외곽은 프랑스 식민시절 부터 독립 공산 세력의 안마당 같은지방이라서 그 남파된 인원도 막상 따지고 보면 남베트남인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것이 호찌민이 전쟁책임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비슷한 사례가 쿠바에 있는데, 바로 쿠바계 이민자들이 미군의 원조를 받아 벌인 피그만 침공이다. 피그만 침공이 쿠바계 이민자들이 했으니 미국에게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애초에, 적지에 대해 잘 아는 적국 출신 변절자를 첩보원으로 기용하는 건 매우 흔한 일이다. 남베트남과 미국 연합군도 월남한 전직 북베트남군 장교들을 첩보원으로 다시 북파시키고는 했는데, 이걸 가지고 남베트남의 북파 공작원들이 남베트남과는 큰 연관이 없는 독립적인 조직이었다고 말할 수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결국 베트콩에 남쪽 출신 인물이 재남파된 인물이 많다는 걸 근거로 이들이 반쯤 독립적인 조직이며 베트남 공산당과 그 우두머리 호치민이 베트콩의 침략행위 및 만행에 책임이 없다는 건 끼워맞추기조차 되지 않는 주장이다.
이미 베트콩의 공식적인 결성일인 1960년보다 3년 이른 1957년, 각 시골 지역의 인물들에 대한 각종 테러가 자행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RAND 연구소에서 1970년에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지금의 DARPA)를 위해 연구해 제출한 보고서에 드러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 당시의 테러리즘은 주로 마을 촌장,입법 위원회의 위원장, 일반 경비원이나 시골 지역의 전 명사 등에 집중되었다고 한다. 아직까지는 시골의 권력층에 집중된 것이며, 1960년부터 시작되는 베트남 일반 양민들에 대한 전면적인 폭력과 학살 수준까지는 발전하지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이들 목표들의 대부분이 민간인이라는 점에서 이미 그 불순하기 짝이 없는 의도를 볼 수 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종교 탄압 등의 실정에 대한 저항이 목적이라면 어디까지나 사이공의 중앙 정부 인사들이나 가톨릭 인사들에게 집중되었어야 할 테러가 오히려 아무 상관 없는 시골 인사들에게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이 테러리즘 행위는 남베트남 체제 그 자체를 붕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더러운 선제공격이 북베트남 쪽의 지령에 의해서건 아니면 남베트남의 자생적 공산주의 및 다른 반정부 인사들의 자체적인 공작이건, 북베트남 및 호치민 옹호파가 주장하는 '58년까지 조용히 있다가 응오딘지엠 정권의 탄압에 분개해서 들고일어난 저항세력'이라는 전제는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다.
같은 보고서에서의 한 RAND 쪽 첩보원이 1958년에 남긴 기록에 따르면, 당시 베트민의[77] 테러리즘은 더 이상 대 프랑스전쟁 당시의 지방 행정관에 대한 협박에 그치지 않고 시골 현지의 경찰 간부나 경비원들, 마을 재무담당자나 청년지도자들 등에 대한 테러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이게 최종적으로 누구에 의한 결정이건간에, 남베트남 정권 핵심 인사도 아닌 각 시골마을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대한, 즉 남베트남 체제 자체에 대한 테러리즘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에 대한 항전의식으로 뭉친 저항세력이고, 곧 미래에 나타날 베트콩의 정체라는 주장의 기본 전제부터가 붕괴된다. 물론 미국과 남베트남 쪽이 총선거를 거부한 것 자체는 명분이 없는 짓이 맞지만,그 거부의 원인이었던 공산주의자들과 반체제 인사들이 온갖 더러운 짓으로 남베트남 사회를 교란하리라는 불안은 아주 제대로 맞아떨어진 셈이다.
베트콩이 했던 만행 중 가장 유명한 만행인 후에 대학살의 경우, 매우 명백하게 베트콩이 자행했던 학살들의 성격이 우발적이거나 착각, 또는 현지 지휘관의 감정 통제 실패로 일어난 학살이 아닌, 철저하게 상부로부터 꾸며진 계획적이고 주도면밀한 추축국 스타일의 학살임을 드러낸다. 남베트남이 후에를 재탈환한 뒤 공식적으로 발표한 학살 희생자 통계가 4062명인데, 이때 베트콩한테 납치되거나 시신이 영구히 유기되면서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다. 베트콩 및 호치민 옹호론자들은 남베트남이 보복 부대를 만들어서 베트콩들을 척살했다는 서술을 근거로[78]
상당수가 오히려 남베트남 쪽의 짓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베트콩과 북베트남이 저지른 후에 학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목격자들과 발굴자들의 증언으로 상당수는 정립이 끝난 상태다. 가렛 포터가 조작 인용했던 알예 베네마 교수의 경우 지아 호이 지역에서만 2397개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추산해서, 이미 남베트남 정부 공식 통계의 반을 넘어간다.[79] 이 희생자들은 이미 베네마 교수가 생존자들에게서 인민재판으로 처형된 사람들이라는 증언을 받아 기록한 상태라 남베트남이 어쩌구 할 여지 자체가 없다. 다 마이 개천에서 발견된 500명 역시 마찬가지. 애당초 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4062명만 해도 이미 다 신원확인이 끝난 마당에 남베트남 보복 부대의 책임이 크다는 주장이 어디에 끼어들어갈 여지가 있을까?
베트콩 및 호치민 옹호론자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의 전직 베트민 인원들에 대한 대규모 정치적 탄압과 투옥 등의 행태 때문에 당시 월맹(뒷날의 베트콩)들이 과격화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우지만, 이런 논리는 상술한 57년부터 베트민 인원들이 응오딘지엠 중앙정권이 아닌 각 시골의 유지들 그리고 조금 뒤에는 시골의 일반 양민들까지 타겟으로 무차별적인 대규모 테러리즘을 벌였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논리로 전락했다. 응오딘지엠이 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그 때문에 저항세력이 만들어졌다면 당연히 응오딘지엠의 정권 주축에 해당하는 인사들을 상대로 테러리즘이 벌어져야지, 시골 사람들이 가장 먼저 타겟이 되었다는 건 두 가지 의미 중 하나다. 하나, 이들 베트민 인사들이 애초부터 응오딘지엠의 판단대로 죄 없는 민간인들을 상대로 테러리즘을 벌일 위험분자였던지, 아니면 55년 이후로 이들의 행동원리가 이미 북베트남 정권에게 종속된 뒤든지.
1968년 구정 공세 때 북베트남과 베트콩측이 기대한 일제 봉기가 없었고,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기대와는 달리 응우옌반티에우 정권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서 마치 수정주의적 시각이 학술적으로 옳은 내용인 마냥 과대해석 하는데, 구정 공세의 실패는 공산군이 68년 2월이라는 구체적인 순간에 자신들이 생각했던 만큼 민심이 일방적으로 하노이측으로 기울어진건 아니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있어도, 십만 단위의 게릴라 반정부 단체가 국가 내 국가를 만들어[80] 10년 동안 그걸 유지하다 겁대가리도 없게 이걸기반으로 남베트남정부와 이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54만9천명이나 되는 세계 초강대국의 군대[81] 에게 전면전을 걸을 만큼 성장했다는 문맥 자체는 싹 빼두고 이게 마치 남베트남이 국민일반의 지지를 받는 정상 국가의 증거였다는 양 '''제시하는 건 얄팍하고도 단편적인 관점이다.'''
10만 단위의 베트콩이 유지되었다는 건 남베트남의 폭정 때문에 남베트남 안에 자체적인 저항세력이 온존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베트콩이 꾸준히 북베트남의 물적, 인적 지원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단순히 테트 공세에서 남베트남인들의 봉기가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것 같은가? 애당초 이 십만 단위의 베트콩들이 내내 벌여된 인민재판, 신체절단 등의 가혹한 폭력행위, 학살 등으로 인해 남베트남 민중들의 민심은 베트콩에게서 아주 단단히 떠나 있었고, 그 증거가 바로 미군이 본격적으로 민병대 육성에 자원을 투자하기 시작한 1965년부터 수만 단위에 불과했던 민병대가 몇 년 안되어 70만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것이다.[82] 또한, 테트 공세 이후인 68년 중반에는 인민 자기방어군이라는 더 낮은 단계의 민병대까지[83] 백만 단위로 생겨났는데, 한 마디로 인구가 2천만에다 주 산업이 농업인 남베트남에서, 전시동원상태도 아니었던 상황에서 이 정도 숫자의 사람들이 가족들과 이웃들,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겠다고 형편없는 제반조건과 위험한 환경 아래에서도 자원해서 총을 들고 나선 것이다. 베트콩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민심이 매우 험악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즉 남베트남인들은 무능의 끝을 달리는 남베트남 정권을 지지하지는 않을지언정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더욱 싫어하고 저항했다는 뜻이다.[84]
다시 50년대로 돌아와서, 이런 식으로 57년부터 민간인들을 살해하며 날뛰던 남쪽 베트민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해주기 시작하면서 시비를 걸었던 건 분명히 총선거 거부 가지고는 명분을 만들어 낼 수 없는 명백한 도발행위가 분명하다. 응오딘지엠 정권이 자국 내부의 베트민 인사를 탄압했을지언정 북베트남처럼 이런 상대국 내부의 막나가는 테러리스트를 대규모로 지원하면서 아예 교육받는 아이들까지 공격하라는 개막장 지령을 내린 적은 없다. 남북 베트남 자국 각자의 내부 문제를 넘어서 상대국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던 것은 분명히 북베트남이 먼저이며, 그 방식까지 추축국에 비견될 만한 악질이었던 점에서 북베트남 정권 그 자체와 당시까지 분명히 명목상으로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그 최고 지도자였던 호치민이 책임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분명히, 호치민, 쯔엉찐 등의 북베트남 수뇌부는 대규모 기습 전면전으로 길고 참혹한 전쟁을 만들어 낸 김일성이나 박헌영 같은 자들과 동급의 전범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따져보더라도 북베트남 정권은 분명히 50년대 후반부터 이미 악질 테러범들을 지원하고 지령까지 내리는 테러지원국 위치에 있었으며, 북베트남이 어느 정도 명분을 가지고 있었어도 그따위 방식의 더러운 수법이 정당화될 만큼은 절대 아니었다.[85] 결국 호치민은 김일성이나 히틀러 같은 인간들과 동급 전범만 아닐 뿐이지 분명히 전범으로 취급되어야 할 인물들이다.
5.6. 지역 패권주의
베트남 민족주의자로서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 지도부는 전근대 베트남의 패권주의적 발상 또한 모순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와 라오스, 미얀마를 포함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의 독립(을 이룩하고 베트남의 패권 아래에 두는 것)이었다. 또한 베트남 공산주의 행동강령에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일찍이 하였다. 얼핏 봐도 라오스, 캄보디아 민족과 베트남 민족은 전혀 딴판이고 국민감정도 매우 나쁜데, 호찌민 입장에서는 동일하게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아왔으니 베트남이 큰 형으로서 같이 도와줘서 독립해서 함께 잘 살자(그러니 내 말 들어)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프랑스와 미국을 무찌르고 내친김에 중국까지 따끔하게 혼내준 베트남은 위풍당당해져서 단숨에 인도차이나 반도의 깡패 패권국가가 되었다. 한마디로 호랑이가 없어진 동굴에서는 여우가 왕이 되어버린 셈. 전 세계적으론 베트남 전쟁 당시 압도적인 미국의 국력에 의한 피해자 기믹으로 부각되어서 그렇지 원래 베트남은 양쯔강 유역에서 대거 남진하여 동남아에 최초로 국가를 세운 이후로 중세와 근세에 걸쳐 심심하면 크메르, 란쌍 같은 주변국들을 침략하고 땅을 뺏으며 태국, 인도네시아, 버마와 함께 동남아시아의 팽창주의적 지역 열강이었고, 호찌민을 비롯한 허울이나 좋아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이지, 실질적으로 베트남인들이 다 해먹었던 지도부의 인식도 여기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전근대 왕조 시절처럼 대놓고 봉신화, 속국화가 아니라 냉전기 소련이 잘 하던 것처럼 겉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연대', '민족 해방 중 큰 형' 따위 표면적 평등 아래 누가 대빵인지 확실하게 말해주는 공산권 특유의 수사법을 구사하며 라오스, 캄보디아 '동지'들에게 자신들의 '자리'를 알려주려고 했을 뿐.
또한 호찌민 사후에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점령해서 90년대까지 수년간 캄보디아에 주둔하게 된다. 이는 현 캄보디아의 불안정한 정치상황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게 되었고 이는 서방 세계로부터 큰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캄보디아 침공에 대해서는 제국주의 논리로만 따질 수는 없는 것이, 당시 캄보디아의 상황과 캄보디아의 선제공격과 베트남인 학살이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공격했던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86][87] 폴 포트와 킬링필드의 막장성은 누구나 인정하기 때문에,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부정적인 결과를 남기고 갔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어도 모든 책임을 베트남에게만 돌리기는 힘들다.[88] 그리고 그 와중에 미국은 진영논리에 따라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고 있었으니 이뭐병...
그리고 일부에서는 현대 베트남의 경제적, 정치적 난맥이 극단적 이상주의자인 호찌민의 무조건적인 공산화 경제정책과 친중전략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호찌민의 친중은 공산주의자인 호찌민 입장으로선 프랑스, 미국 등과 싸우기 위해 필연적인 측면도 있었으며, 베트남 전쟁 이전에는 프랑스와 중국[89] 을 견제하기 위한 측면에서라도 호찌민이 미국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호찌민이 미국의 힘을 잘못 평가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시당초 호찌민 자체도 전술했듯이 극단적 공산주의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으며, 베트남의 경제정책 실패를 호찌민의 잘못된 이상주의 탓이라 주장하는 것은 베트남의 주석이 타 공산국가와 같은 독재자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전제로부터 기인된다. 주석으로서 호찌민의 역할은 주로 외교분야와 대외적 이미지 담당의 측면이 강했으며, 주요 정책들은 쯔엉찐이나 레주언과 같은 공산당 서기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주석인 호찌민을 무시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호찌민의 지시를 받는 위치는 아니었으며[90] 이들이 꼭 호찌민의 측근인 것도 아니었고, 특히 급격한 공산주의화 정책을 펼친 레주언은 자신을 호찌민에 맞먹는 이미지로 만들며 독재 체제를 강화하려 하다 실패하였다.
오늘날 베트남의 경제적, 정치적 난맥에 호찌민의 책임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베트남 주석과 공산당의 분리 없이 호찌민의 이상주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호찌민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라 할 수 있다. 한국인 입장에서 공산권을 공부 할 때 마다 강조되는 항목이지만, '''공산독재 국가들 중에서도 북한 김씨 왕조가 유달리 막장이다.'''[91] 일반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정은 '''당의 독재'''를 원칙으로 하고, 이는 '''개인의 독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천하의 그 블라디미르 레닌도 막상 정치국 내에서는 죽을 때까지 마음대로 다른 정치국위원들을 마음대로 찍어누르거나 하지 못했고[92] , 스탈린도 완전한 권력 장악까지 일정 부분 당내 민주주의를 실행해야 했으며,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한 뒤 소련은 다시 과두 정치, 집단 지도체제로 돌아갔다. 북베트남은 이 와중에서도 솔직히 하노이 정권이 단단하게 자리 잡았을 시점인 1950년대, 60년대에 들어서는 호찌민도 노인이었기 때문에 상징적 국가 원수 역할이 더 강했지, 실무 통치는 쯔엉찐, 레주언, 레둑토 같은 정치국의 고위 관료들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돌아갔고, 산하 조직인 베트콩의 경우 쩐반짜, 응웬치짠, 팜반둥 같은 인민혁명당 중앙 행정 위원회(미국측 자료에서는 그냥 남베트남 중앙 위원회, 줄여서 COSVN으로 일컬는다.) 지도부가 하노이 정치국의 지령을 받아가며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6. 어록
'''나를 이끈 원동력은 공산주의가 아닌 애국심이었다.'''
'''어려운 것이란 없다. 단지 흔들리는 마음이 두려울 뿐. 산을 파고 바다를 메울 수 있다. 마음을 굳게 먹는다면 할 수 있다.'''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우리가 당신들을 1명 죽일 때 당신들은 우리 10명을 죽일 것이다. 하지만 먼저 지치는 쪽은 당신들이 될 것이다.'''[93]
'''내 안의 변하지 않는 한 가지로 세상의 만 가지 변화에 대처한다.'''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조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던가?'''[94]
[95]
'''그것은 코끼리와 호랑이의 싸움이 될 것 입니다. 만일 호랑이가 가만히 서 있는다면 코끼리가 그 막강한 엄니로 호랑이를 짓누르겠지요. 그러나 호랑이는 가만히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는 낮에는 밀림에 숨어 있고 밤에 나타납니다. 호랑이는 코끼리의 등에 뛰어올라 코끼리의 가죽을 찢어놓고 다시 어두운 밀림으로 뛰어들어 갑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천천히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이것이 인도차이나의 전쟁이 될 것입니다.'''
1946년 9월 11일, <뉴욕타임스> 통신원 쇼에브런과 한 인터뷰에서
'''자본주의는 식민지를 통해 자신을 부양하고, 자신을 방어하고, 여러분과 싸우는데, 여러 동지들은 왜 식민지를 무시합니까?'''
1924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여러분이 이 작은 그룹 내에서도 단결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조국으로 돌아간 뒤에 어떻게 대중을 단결시켜 식민주의자들과 싸우게 하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 나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왜 프랑스 사람들은 우리를 문명화한다고 하기 전에 자기 동포들부터 문명화하지 않는 거지?'''
1911년 7월 6일 프랑스의 마르세유 항구에 입항한 이후 프랑스의 모습을 보면서 남긴 말.[96]
'''정부가 어려워서 너희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지만, 너희들은 지금 전쟁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인민들에게 크나큰 빚을 지는 것이다.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것은 분명하지만 시간이 좀 많이 걸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조국의 많은 인재들이 희생될 것이고 너희들의 부모형제들도 죽어갈 것이다. 조국을 대신해서 이 아저씨가 너희들에게 받아두어야 할 약속이 꼭 하나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희들은 학업을 마치기 전에는 돌아와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승리한 다음, 너희들이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의 강산을 과거보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아름답게 재건해야 한다. 너희들은 공부하는 것이 전투다.'''
1965년 미국의 참전으로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자 몇몇 장학생들을 해외로 유학보내며 유학생들에게 남긴 명언
'''우리의 강,'''
'''우리의 산,'''
'''우리 인민들은'''
'''그대로일 것이다.'''
'''양키가 패전하면'''
'''우리는 이 나라를'''
'''열 배 이상'''
'''아름답게 재건할 것이다.'''
호찌민의 자작시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45
7. 여담
호찌민이 유럽이나 미국을 일하며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의외의 곳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미국 보스턴의 유서깊은 호텔인 Omni Parker House(옴니 파커 하우스)는 호찌민이 1912부터 1913까지 제빵사로 일했던 사실로 유명하다.[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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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 중.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앉아있는 사람이 박헌영이다. 뒷줄 맨 오른쪽이 호찌민.(최근에는 이 사진이 1921년에 촬영되었고 뒷줄 맨 오른쪽의 사람은 호찌민이 아니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출처- 정병준,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2015)
호찌민이 1929년 소련에서 국제레닌대학교에 유학했을 시절에 박헌영과 만나 교류했고 친분관계를 쌓았다. 박헌영은 호찌민에게 목민심서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호찌민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는데, 실제로 그가 크게 감명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근거는 없다. 심지어 목민심서가 호찌민 시신의 머리맡에 놓여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며, 박물관에 있다는 말[98]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90년대 KBS-1에서 베트남 현지 취재를 가서 촬영한 영상에 의하면 호찌민의 서재에 목민심서 책이 있었던 걸 보여준 적이 있으며, 서재 담당이 호찌민이 즐겨봤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2006년 호찌민 관련 유품이 '''12만점'''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목민심서가 없다는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프랑스에서 활동할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인사들과 만나 교류하고 서로 협조한 사실이 2018년 문서로 확인되었다. 당시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파리의 정보경찰 장(Jean)이라는 인물의 기록에 따르면, "호찌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 호찌민과 파리의 임정 인사들간의 교류가 굉장히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바딘 광장에 있는 호찌민 묘소는 하절기에는 07:30~10:30, 동절기에는 08:00~11:00에만 출입이 가능하며 및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휴관한다. 그리고 매년 10월부터 12월까지는 호찌민 시신의 방부 처리를 위해 폐관한다. 호찌민 묘소 구내에서는 사진 촬영뿐만 아니라 전자 기기의 휴대 및 사용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만일 호찌민 묘소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휴대전화를 제외한 모든 전자·통신 기기를 내놓고 들어가야 한다.[99] 호찌민 묘소에 들어가는 입구가 따로 있는데, 일반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바딘 광장의 모습과는 달리 줄을 서야 하며, 줄을 서는 와중에 촬영하려 하면 지키고 있던 군인이 막기도 한다. 호찌민 묘소에는 흰색 제복을 입은 경비병이 4인 1조로 시신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입구 및 출구에 경비 근무를 서는 경비병을 볼 수 있다. 호찌민 묘소 내부에서는 휴대전화는 진동 혹은 무음으로 전환해야 하고 절대로 큰 소리로 대화할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참배 시에 유의하자. 참배를 마치고 반대편으로 나오면 입구에서 맡겨 두었던 전자·통신 기기를 찾아갈 수 있다. 사실은 호찌민의 유언에 따라 북부, 동부, 남부의 화장되어 나눠지고 방문록 정도를 적을수 있고 나무를 심을 수 있게 해 후일 베트남의 도움이 되어야 했으나, 베트남 국민들은 유언에 따르지 않고 전국에서 온갖 재려를 모아 지었다 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호찌민 박물관과 한 기둥 사원 그리고 집무실이 있다. 호찌민 박물관은 어른 40000동 어린이는 무료 입장이며, 들어갈 때 짐을 사물함에 넣거나 공항에서 볼 수 있는 x-ray를 통과해야 한다. 한기둥 사원은 일주사로도 불리며 한기둥 사원은 말 그대로 한 기둥인데 자세히 보면 크기가 애매하다. 그리고 또 현재 베트남에서 가이드로 활동하는 분의 말로는 바딘 광장, 호찌민 생가에서 가이드가 사진을 찍히면 공안들이 집으로 찾아와 벌금으로 10,000불을 내야한다고 한다. 10,000불을 내지 못하면 추방까지 당할 수 있다고 한다. 가이드가 왜 사진을 찍히면 벌금을 내야하는가? 이유는 '왜 너네들이 우리의 호찌민을 설명하려 하냐!'라고 주장하고 부정부패가 심한 베트남에선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여담으로 호찌민이 이오시프 스탈린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는 사회주의 조국의 지도자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며 친필 사인을 요청했는데 그가 사인을 받아들고 돌아간 뒤 스탈린은 갑자기 "그 작자, 태도가 수상해."라면서 KGB에게 자기 사인을 도로 훔쳐오도록 시켰다. 이후 사인이 없어진 것을 알고 호찌민은 소지품을 모두 뒤지며 매우 당황했다고 하는데 라브렌티 베리야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스탈린은 굉장히 기뻐했다고 전한다.
삼국지, 수호지를 즐겨읽었다고한다 네이버캐스트 호찌민
호찌민은 중국에 방문했을당시 공자 생가를 방문하며 "나는 공자를 존경해왔다."라고 얘기했다 한다.[100]
8. 관련 서적
<호치민 평전>(윌리엄J듀이커 지음/정영목 역, 푸른숲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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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했던 듀이커가 호찌민이라는 인물에 매료되어 30년간 중국, 베트남, 프랑스, 러시아에 있는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비교하여 쓴 호치민 평전이다. 신화로서의 호찌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호찌민을 재조명 했다. 특히 호찌민의 초기 성장과정부터 독립운동 투신 그리고 베트남 독립 선언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까지의 내용이 매우 탄탄하다. 다만 베트남 전쟁 당시의 호찌민에 대해선 깊게 다루지 않는다. 책 서문에 저자가 왜 베트남 전쟁 당시의 호찌민 행적을 깊게 다루지 않았는지 나온다. 저자에 따르면 1960년대 호찌민의 일과는 사실상 병가로 인한 중국에서의 요양이 대부분이었기에, 깊게 다루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알고 싶은 위키러들은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기 전 이 사실을 참고하자.[101] 976페이지[102] 라는 엄청난 분량이 압도적이기는하나 호찌민을 아는데 있어서 매우 유용하다.
'''<호치민 평전>(찰스스펜 지음/김기태 역, 자인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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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 OSS로 근무하며 호찌민을 직접 만났던 찰스 스펜이 쓴 호치민 평전이다. 30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의 호치민 평전이기에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이 읽기 버거우면 이 책을 읽는것도 나쁘지 않다. 책 저자가 호찌민을 직접 만나봤던 사람이기에 호찌민을 만났던 미국인이 호찌민에 대해 어떤관점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왜 호찌민인가?>(송필경 지음, 에녹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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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의사이자 한베평화재단 이사역을 맡고 있는 저자 송필경이 쓴 책이다. 베트남 여행을 통해서 저자가 알게 된 호찌민과 베트남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한국군 문제에 대해 알 수 있다. 사실상 저자의 여행기이도 하다. 책을 통해서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가 의외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과 호찌민을 직접만났던 베트남 사람들[103] 에 대한 스토리를 알 수 있다.[104]
'''<옥중일기>(호찌민 지음/안경환 역, 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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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호찌민이 감옥에 있을 당시 감옥에서 쓴 옥중일기 라고 하지만 4행시 형태의 시집이다. 호찌민 주석이 비참하고도 혹독한 수감 생활과 베트남 독립을 염원하는 그의 심정을 알 수 있는 시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집이기에 읽는데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는다.[105]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김태완(글)/주경훈(그림)/손영운(기획),주니어김영사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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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위인전이다. 2012년 12월 28일 초판을 발행했다. 어린이용 도서이긴 한데 호찌민에 대한 내용과 베트남 전쟁 관련한 내용이 굉장히 탄탄하다. 호찌민의 일대기와 베트남 전쟁 관련해서 있을 내용은 거의다 있다. 심지어 호찌민의 최대 실책이라 할 수 있는 토지개혁도 응오딘지엠의 탄압과 더불어 이 책에서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다산 어린이에서 출간한 Who? 시리즈의 호찌민 위인전[106] 에 비해 역사에 대한 설명과 고증 면에서 매우 탄탄하다. 평전 자체가 부담스럽다면 입문격으로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식민주의를 타도하라>(호찌민 지음, 윌든 벨로 (엮음)/배기현 (옮긴이), 프레시안북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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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이 살아생전에 남긴 글과 편지 그리고 연설들을 묶은 책이다. 1920년 투르 회의에서 했던 호찌민의 연설부터 1969년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까지 다루고 있으며, 그의 연설과 글을 통해 많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여기 나무위키에 상술된 호찌민의 어록들 대다수가 이책에도 나온다고 보면 된다.
9. 매체에서
- 창작물에서는 80년대 중후반[107] 에 쓰여진 어떤 동화에서는 악인은 아니지만 "공산국가 지도자"였다는 이유로 악역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 밖에도 1988~1990년까지 월간 보물섬에 연재된 이우정 만화 맹코상사에선 은빛여우 민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베트콩 지도자가 영락없이 호찌민이다. 이 만화에선 그냥 악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하튼 이 시절까지 호찌민에 대하여 한국에선 무조건 부정적이었었다.
- '메이드 인 베트남'이라는 소설에서는 베트남의 운동화 공장의 노동자들[108] 이 "호찌민 아저씨도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길거야!"라며 파업을 준비한다
- 한대수가 2002년 11월 14일에 발매한 앨범 '고민'에 수록된 곡 중에 같은 이름(호찌민)을 가진 곡이 있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호찌민이라는 사람을 알려주는 형식. 한대수의 독특한 랩과 강렬한 전주가 들어볼만한 곡이다.
- 화이트 솔져 베트남 묵시록(Soldat Blanc)이라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배경으로한 프랑스 영화에서 잠깐 등장한다. 영화 주인공인 카리우가 그를 엄호하는 모습이 나온다.
- 김종필은 회고록 <소이부답>을 통해 1968년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독대한 자리에서 프랑코가 "월맹의 호찌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 질문하자 "비록 공산주의자지만 호찌민은 존경할 만한 지도자입니다.시종일관 꿋꿋한 의지를 가지고 싸워 프랑스를 물리치고, 미국과도 강하게 맞서고 있지 않습니까. 대단한 사람입니다."라 호평했고, 프랑코 역시 동의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밝혔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비록 공산주의자이긴 하지만 프랑스를 상대로 자주독립을 쟁취한 호찌민을 암암리에 높게 평가하는 여론이 강했던 모양이다.
10. 참고 문헌
-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푸른숲(2003)
- 호치민 평전, 찰스 스펜, 자인(2010)
- 왜 호찌민인가, 송필경, 에녹스(2013)
-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1999)
- 호치민 혁명과 애국의 길에서, 다니엘 에므리, 시공사(1998)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을유문화사(2002)
-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책갈피(2004)
-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 손영운/김태완, 주니어김영사(2012)
- 베트남 전쟁, 박태균, 한겨레출판(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