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색정당

 

1. 정의
2. 사례
2.1. 대한민국
2.1.2.1. 선거참여정당
2.1.2.2. 활동 불발
2.1.2.3. 자발적 위성정당?
2.2. 북한
2.3. 중화인민공화국


1. 정의


具色政黨, Bloc party, Satellite party
일당제에서 정권을 차지하지 못하는 작은 정당이다. 보통 이들은 현실적으로 정권을 잡을 수 없고, 심지어는 그럴 의지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많다. 체제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한편 특정 계층의 이익을 약간 대변하는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1] 구색정당은 흔히 '우당'이라고도 하며 위성정당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
일당 독재 체제 구축 이전부터 활동하던 기존의 정치 단체를 구색정당으로 흡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국이나 북한도 괜히 의도적으로 정당을 만든게 아니라 기존에 활동하던 정당이나 정치 단체를 자신의 우당(友黨)으로 만든 것뿐이다. 자세한 것은 아래 구색정당 목록 참고.
일당제 국가에서 '우리도 복수 정당제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관제야당이라고도 한다. 제5공화국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이 그 예인데 이들은 집권당과의 합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그냥 껍데기만 있는 정당이었다. 제5공화국 당시 전두환이 야당 총재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누군가 "저희 야당"이라는 말을 하자, 전두환이 "우리나라에 야당이 어디 있습니까. 1당, 2당, 3당이지"라고 일갈했고, 이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나온 말이 바로 '2중대'라는 표현이다.[2]
정권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일정 부분 야당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에서는 자유화/민주화의 분위기가 불자 개혁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보통은 복수 정당제 민주주의가 실제로 정착하게 되면 사라진다. 실제로 중화민국의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은 자유화,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사실상 연구회 수준으로 몰락하였다. 제5공화국의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역시 정치활동의 자유가 확대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신한민주당(신민당) 돌풍이 불면서 몰락하였다.
기성 정당에 비해 세력이 매우 약해서 정권을 아직 잡을 힘이 없는 '군소 정당'과는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복수 정당제 민주주의에선 이 군소 정당에게도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당연히 보장한다. 가령 사실상의 양당제인 미국에는 민주당, 공화당 외에도 녹색당, 자유당 등이 있는데 이들에게도 당연히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하거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권리 등이 있다. 단, 국헌을 위협할 소지가 있는 암적 정당인 나치당과 같은 폐단을 막기 위해 위헌정당해산제도를 두고 있다.

2. 사례



2.1. 대한민국



2.1.1. 제5공화국



12.12 군사반란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0년 8월 집권여당 민주공화당과 제1야당 신민당을 포함해서 모든 정당을 강제해산해서 군부독재체제를 확고히 하였다. 그래도 대외적으론 민주주의라는 모양새를 갖춰야 했기에 민주정의당을 창당하면서 동시에 비교적 군사정권에 고분고분한 야당인사들을 회유, 협박, 매수 등의 방법으로 끌어모아서 여러개의 관제야당을 만들어냈다.
당시 신군부는 대한민국에도 사상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관제야당도 온건보수야당 민주한국당은 물론 사민주의 성향의 진보정당 민주사회당, 민주농민당까지 이념 스펙트럼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었다. 추가로 관제 극우야당까지 구상했지만 집권 민주정의당과 지지기반이 겹친다는 이유로 중도폐기했다.
이런 관제야당들은 다음 문단에서 설명하는 북한의 조선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처럼 아예 정권에서 직접 각 지역구마다 국회의원 선거 후보를 정해줄 정도로 사실상 무늬만 야당이었지, 정권의 노리개에 불과했다. 관제야당 창당과 1981년 대통령 선거 공천은 보안사에서 주도했고, 5공화국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안기부가 관리했다. 신군부는 기존의 제도권 정치세력을 모두 정치금지로 묶어놓고, 집권 민정당과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한 관제야당으로만 판을 짜서 편하게 독재를 할 수 있었다.
아래는 당시 5공 정권이 정치공작을 통해서 만들어낸 관제야당들이다. 이 정당들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시대가 열리자 모두 흔적도 없이 몰락하였다.[3]
일반인들도 기억할 법한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 외의 다른 군소정당도 1~2석 정도는 당선되었는데 이는 후보에 경쟁력이 있어서 라기 보다는, 5공 정권이 해당 지역구의 (다른 당) 후보 출마를 조정하여 인위적으로 당선을 유도한 것이다.

2.1.2.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대한민국 제5공화국이 막을 내린 이후 한국에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구색정당은 나오지 않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일부 포함한 선거법이 도입되면 정당 지지율보다 높은 비율로 지역구 의석을 획득한 정당은 비례대표 의석을 병립형인 17석 내에서만 배분받을 수 있기 때문에 비례대표 전용 위성정당을 만들어 비례대표 의석을 극대화한다는 발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위성정당들의 등장은 별도의 정당으로 위장된 거대정당이 비례대표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인 소수정당의 발언권 확대를 무색하게 만든다는 비판을 받았다.

2.1.2.1. 선거참여정당

  • 미래한국당: 2019년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대안신당, 민주평화당, 바른미래당 당권파의 4+1 협의체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합의하자, 자유한국당이 비례대표 전용 위성정당 창당을 공언하면서 위성정당의 출현이 현실화되었다.# 위성정당의 명칭은 비례한국당이 유력하였으나 최인식 등 구 통일한국당 세력이 10월에 창당한 정당과 당명이 겹쳐 해당 명칭으로의 창당은 불발되었다. 이에 '자유'를 넣어 비례자유한국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준비위원회 설립을 신고하였으나, 중앙선관위에서 당명에 '비례'를 넣은 명칭[4] 사용을 받아줄 수 없다고 하자, 2020년 1월 17일 미래한국당으로 명칭 변경 신고를 했다.# 미래통합당은 미래한국당을 "자매정당"으로 불렀으나 두 당을 제외한 정당들은 "위성정당"으로 간주했다. 2020년 5월 27일, 미래통합당과 합당 절차를 완료했으며, 최종적으로 5월 29일에 합당이 완료되었다.
  • 더불어시민당: 미래한국당 창당 이후 개정된 선거제도 아래에서 더불어민주당의 과반 확보가 불투명해졌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민주당은 선거연합정당을 통해 대응하기로 했으며, 미래통합당, 미래한국당 양당을 제외한 정당들과 연합해 선거철에만 존속하고 이후 각자 당으로 복귀하는 비례대표 전용 선거연합 위성정당 참여를 추진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가자환경당, 가자!평화인권당, 기본소득당, 시대전환과 플랫폼정당인 시민을위하여에 참여했다.# 시민을위하여는 이후 더불어시민당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공천과정에서의 문제로 가자환경당과 가자!평화인권당은 더불어시민당에서 이탈했다. 미래통합당, 미래한국당은 물론이고 선거연합체에 참여하지 않는 정의당, 녹색당, 민중당, 미래당 등은 더불어시민당을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으로 규정했었다. 2020년 5월 18일 더불어민주당에 흡수합당 되면서 소멸했다.

2.1.2.2. 활동 불발

  • 정치개혁연합: 미래한국당의 다수 비례대표 의석 획득을 막겠다며 출범한 정당이다. 친여 혹은 진보 성향의 정치, 사회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구성했으며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민중당, 녹색당, 미래당과의 선거 연합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민중당 참여, 지지부진한 선거플렛폼 정당 통합작업, 창당준비위원회 수준에 머물러 있는 현실 등을 이유로 민주당이 시간이 촉박하다며 더불어시민당에 참여를 선언한 이후 존재감이 미미해졌다. 이후 민생당, 민중당, 녹색당, 미래당 등에 선거연합체 제의를 했지만 민생당은 불참을 선언했고, 다른 진보정당들 역시 미온적인 반응을 보여 해체되었다.

2.1.2.3. 자발적 위성정당?

  • 열린민주당, 한국경제당: 두 당은 모당 없이 독자적인 창당과정을 겪었고[5], 독자적으로 활동하여 원칙적으로는 위성정당으로 규정할 수 없었다. 다만 21대 총선 과정에서 선거 이후 더불어민주당, 미래통합당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발언을 하며 위성정당을 자처해 자발적 위성정당으로 보는 의견도 있었다.[6]

    이에 대해 민주당, 통합당 측은 모두 난색을 표했는데, 민주당 측은 열린민주당에 영구제명을 거론했고, 통합당 측도 경제당에 냉담하게 반응했다.

    선거 이후 열린민주당은 독자노선을 택했으며, 한국경제당은 3% 득표에 실패한 이후 이은재 의원이 탈당해버려 없는 일이 되었다.

2.2. 북한



북한에서는 우당(友黨)이라는 표현을 쓴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정당들도 최고인민회의의 의석을 일부(전체 687석 중 80석) 점하고 있다. 모두 조선로동당과 함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가맹돼있으며 공동으로 선거 후보를 공천한다.
하지만 북한 정치에서 이들은 어떤 차별성도 보이지 않는다. 성명서도 대부분 조선로동당의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것뿐이다. 지역조직도 50년대 말부터 거의 와해되었다가 80년대부터 북한 언론에 평양직할시당과 일부 도(道)당이 다시 언급되는 등 몇몇 도당조직이 복구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2000년대 초반 남북교류 당시 민주노동당 간부 등 이들을 방문한 인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보석세공공장 등 일부 기업을 소유·경영하면서 지역경제 운영에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해방 후 소련군 군정 당시 조만식으로 대표되는 우파 민족주의 세력, 강량욱으로 대표되는 좌파 개신교 세력, 김일성과 같은 파인 최용건 세력에 의해 창당된 조선민주당이 원형이다. 그러나 조만식이 신탁통치 반대를 이유로 숙청당한 뒤 최용건을 비롯한 빨치산 계열과 강량욱 계열 기독교계 인사들이 당을 장악하였고, 8월 종파사건 이후에는 완전히 조선로동당김일성의 빨치산 계열에 종속된다. 창당 때부터 지금까지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2000년부터 조선사회민주당과 자매정당으로 교류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진보당과 교류중이다. 교류 당시 방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 운영의 대부분은 소유하고 있는 기업소의 경영으로 충당한다고 한다. 기관지로는 계간지 《조선사회민주당》을 발행하고 있으며 출판사로 《조선사회민주당 출판사》을 운영하고 있다.
이 정당은 이 항목의 다른 구색정당 들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데, 해당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조만식이 지도하던 창당 초기에는 구색 정당이 아닌 진짜 야당이었다. 그러다가 조만식이 연금되고 당권이 최용건에게 넘어가면서 구색정당화 한 것. 사실 조만식 이후 초기 10여년 간 당수였던 최용건 또한 단순히 야당 당수는 아니고, 북한 최고지도부의 일원이었는데, 최용건만 놓고 보면 초기 조선민주당은 조선로동당과의 연립 여당(?) 성격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최용건은 한국전쟁 개전 당시에 북한의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군통수권자였으며, 심지어 1958년 이후 14년간은 법적인 국가원수 이기까지 했다.[7]
천도교 이념을 바탕으로 1919년 창당된 뒤 일제 탄압으로 해체됐다가 해방 후 재조직화를 거쳐 1946년 창당된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이 원형이다. 위의 조선민주당과 달리 1946년의 천도교청우당은 재창당 당시부터 구색정당이었다.
1950년 월북한 남조선천도교청우당 조직을 흡수해 조선천도교청우당을 발족했다. 그러나 8월 종파사건 후 지역조직들이 거의 와해되어, 지금은 조선로동당에 완전히 종속된 구색정당에 불과하다. 조선로동당에 종속된 후로는 강장수 등 조선로동당에서 파견된 천도교 교리도 모르는 간부도 있었다. 천도교인이었던 최덕신, 류미영 부부가 월북하여 당대표를 맡은 이후로는 다시 천도교 색채가 짙어졌다.

2.3.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 이외에도 '다당 합작(多黨合作/多党合作)'이라는 명목으로 민주당파(民主黨派/民主党派, United Front)라고 불리는 8개의 정당이 있고 실제로 정국 건국초기에 이들이 중국공산당의 비판세력으로 야당노릇을 할때도 있었지만 반우파 투쟁과 문화대혁명으로 타격을 크게 입으며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고,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나서는 조직이 복구되었지만 공산당 동의 없이는 기금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무늬만 정당이 되었다. 차라리 공산당 내 비공식 파벌들이 사실상의 여당과 야당 노릇을 한다고 보는 게 맞을 수도 있다.
명칭
약칭
한글
번체자
간화자
한글
번체자
간화자
영문
영문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中國國民黨革命委員會
中国国民党革命委员会
민혁
民革
Revolutionary Committee of the Chinese Kuomintang
RCCK
중국 민주 동맹
中國民主同盟
中国民主同盟
민맹
民盟
China Democratic League
CDL
중국 민주 건국회
中國民主建國會
中国民主建国会
민건
民建
China Democratic National Construction Association
CDNCA
중국 민주 촉진회
中國民主促進會
中国民主促进会
민진
民進
民进
China Association for Promoting Democracy
CAPD
중국 농공 민주당
中國農工民主黨
中国农工民主党
농공당
農工黨
农工党
Chinese Peasants' and Workers' Democratic Party
CPWDP
중국 치공당
中國致公黨
中国致公党
치공당
致公黨
致公党
China Zhi Gong Party[8]
CZGP
구삼 학사
九三學社
九三学社
구삼
九三
Jiu San Society[9]
JSS
대만 민주 자치 동맹
台灣民主自治同盟[10]
台湾民主自治同盟
대맹
台盟[11]
Taiwan Democratic Self-Government League
TDSGL
그런데 중국 민주당이라는 [12] 정당이 인터넷, 휴대전화 문자, 전자우편 등으로 지지와 세력을 얻어가자 위협을 느낀 중국 공산당이 해산시키고 금순공정을 만든 일도 있었다. 한편 2013년에는 실각한 보시라이를 지지하며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중국 지헌당(中國至憲黨/中国至宪党)이 창당됐지만 역시 코렁탕행이었다. 지헌당 측은 중국 공산당의 지도 체계를 인정한다면서 구색정당 행세를 하는 식으로 불법화를 피하려 했지만 당연히 중국 정부는 얄짤없었다.

2.4. 중화민국(대만)


  • 중국 청년당: 유학생과 중산층이 지지하는 국가주의자들의 정당. 국민혁명 시기 쩡치의 지도 아래에 마지막까지 북양정부를 지지했고 1938년에 국민당과 공식합작하기 전까지 10년 이상 국민당에 저항한 역사가 있지만 국부천대 이후 지지기반이 붕괴되고 무력한 관제야당으로 전락했으며 1960년부터 총통과 부총통 후보를 내는 것조차 포기하게 된다.
  • 중국 민주 사회당: 화교와 학자가 지지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당. 중화인민공화국 구색정당이 된 중국민주동맹에서 분열되었다.[13]
1928년 중국 국민당이 북양정부를 타도하면서 생성된 국민정부는 삼민주의 이념의 [ 군정 => 훈정 => 헌정 ] 논리를 바탕으로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여당/무소속/직업단체의 직선으로 선출한 '제헌' 국민대회를 1946년에 소집했으며, 중화민국 헌법을 반포하면서 다당제 헌정으로 전환했는데, 1947년에 여당/야당/무소속/직업단체의 직선으로 선출해 소집한 '행헌' 국민대회/'행헌' 입법원/'행헌' 감찰원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참정을 거부하면서 중국 국민당(大)/중국 청년당(中)/중국 민주 사회당(小)의 여대야소를 자연스럽게 연출했으니, 장제스의 책략으로 '3당 훈정'을 형성했다. 여기서 '3당 훈정'은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1946년에 장제스는 3당 훈정의 막후 공작을 추진하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고, 곧이어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지만, 그들의 표밭은 어디까지나 중국대륙의 대도시에 한정되어 있었다. 결국 1949년부터 1950년까지 국공내전의 패전으로 중화민국이 중국대륙의 99%를 상실하면서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은 지지세력의 99%를 잃어버렸다. 중화민국의 중앙정부가 타이베이로 천도하면서 3대 정당들의 본부도 타이완 섬으로 이전했다.
원래 타이완 섬에서는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장제스 정권이 총력전을 명분으로 야당의 창당을 금지한 덕택에 역설적으로 기사회생한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은 중국 국민당의 협찬으로 토착인 무소속 정치인들을 포섭하면서 외성인의 표밭으로 명맥을 유지했지만, 민주화 이후인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국민대회/입법원/감찰원/성의회/현의회에서 모든 의석을 모두 상실해 연구회 수준의 야당으로 전락했다. 애초부터 국민당의 자금지원으로 버텼던 군소정당인데다가 본성인의 표밭으로 승승장구하는 민주진보당이 온나라의 곳곳에서 버티는 마당에 외성인들의 대다수가 중국 국민당의 노선을 지지하면서 외성인의 야당들은 아무런 경쟁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2.5. 독일민주공화국(동독)


  •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 자유민주당(LDPD): 독일의 주요 정당인 자유민주당(FDP)하고는 명칭이 다르다.
  • 독일 민주농민당 (DBD)
  • 독일국가민주당 (NDPD):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후신이다. 물론 직계후손은 따로 있었다. 창당 당시 지도부 중 일부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군에 항복한 독일군 장교 출신이었으며 당원의 과반수가 전 나치당 당원이었다. 당연하게도 전후에 독일 서부는 물론 동부에도 전 나치당 당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을 어떻게 활용할까 구상하던 소련과 동독 공산주의자들은 전 나치당 당원들로 구성된 정당 창당을 허용하여 이들을 자신들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활용하고자 결정했다. 전쟁 중 투항한 전 독일군 장교들이 주도하여 전 나치당 당원들을 당원으로 모집했다. 창당대회 때에는 소련군 고위 간부와 사회주의통일당 고위 간부가 가면을 쓰고 몰래 참관했다. 물론 하켄크로이츠는 동독에서도 금지되었으므로 곡엽(참나무 잎사귀)에 NDPD라고 써진 깃발을 사용했다.(영문 위키피디아) 다행스럽게도 통독 후 네오 나치 정당인 NPD에 흡수되는 일은 면했으며, 대신 위의 LDPD와 함께 FDP에 흡수되었다.
기독교민주연합과 자유민주당은 서독에도 같은 이름의 정당이 있었는데, 통독 이후에 기민련과 자민당은 서독의 기민련, 자민당에 흡수되었다.

[1] 단지 장난이나 풍자를 목적으로 만든 장난 정당과는 엄연히 다르다![2] 훗날 5공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전두환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정당들은 모두 한 편이고, 오직 북한의 조선로동당 등만이 반대편, 즉 야당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 북한에서도 야당을 우당이라 한다는걸 생각하면..[3] 이들 정당들은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거치면서 지역구 당선자를 한명도 내지 못하거나 전국 득표율이 2%에 미달하면서 당시 선거법 규정에 의해서 해산되었다. 참고로 득표율 2% 미만 정당에 대한 자동해산 조항은 2014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받아서 사라졌다.[4] 비례○○당.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창준위만 3개가 있었다.[5] 한국경제당은 이미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 결성되었다.[6] 자발적 위성정당이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추후 학계에서 용어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면 위성정당의 한 모습으로 규정할 수 있다.[7] 이때는 탈당하여 조선로동당에 입당[8] China Party for Public Interest으로 옮기기도 한다.[9] Jiusan Society, September 3 Society로 옮기기도 한다.[10] 본래 '중화민국'의 번체자가 臺灣이므로 臺灣民主自治同盟으로 적기도 한다. 중국어 정체자(번체자)에서는 臺와 台가 혼용된다.[11] 번체자의 경우 臺灣民主自治同盟을 줄여 臺盟으로 쓰기도 한다.[12]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불법이지만 민주국가 입장에서는 정치 탄압이다.[13] 물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에 분당된 것이라 당시에는 중국민주동맹도 공산당의 구색정당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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