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골 대기근

 

1. 개요
2. 원인
3. 경과와 대처
4. 결론과 논란
5. 출처 및 참고 자료


1. 개요


1942년 말부터 1944년까지 인도 제국에서 진행된 대기근. 약 200~300만명의 인도인이 아사한 사건으로 원인과 경과, 그리고 대처 과정에서 논란이 있는 대기근이다.

2. 원인


기근 문서에도 있는 전쟁, 자연재해, 정책의 미비 3개가 겹친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 전쟁: 때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로 일본군남방작전과 버마 공세로 인해서 버마의 난민들이 벵골 지방을 통해서 유입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일본 해군미드웨이 해전에서 패했어도 아직까진 동남아시아 지역의 영향력이 강한 시기였다.[1] 일본의 버마 공세로 인해 영국령 아시아 식량의 15%를 공급하는 곡창이었던 버마산 곡물 수입이 중단된 것도 큰 문제였다.
  • 자연재해: 1942년 겨울 벵갈 지역으로 폭풍이 왔다. 여기에 더불어 폭풍 후에 병풍해까지 겹쳤다.
  • 정책의 미비: 악덕 인도 상인들이 쌀을 유통하지 않고 가격을 올리기 위해 사재기했다. 또한 1935년 인도 정부법(Government of India Act 1935)에 의거하여 인도에는 수많은 지자체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벵골 인근지역의 힌두교 지자체들은 무슬림들이 많은 벵골에 식량지원을 거부했다.[2] 여기에 결정적으로, 이러한 인근 인도 상인들의 무자비한 이기주의나 힌두교와 이슬람 간의 극한 종교갈등 등 이 지역의 난제들을 바로잡고 무마해서 악영향을 최소화해야 할 영국의 행정력/정치력이 미비했다.

3. 경과와 대처


1943년부터 대기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당시 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주둔군과 여러 장성들은 인도 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본국에 식량 지원을 요청했지만 윈스턴 처칠의 전쟁 내각에서 반대했다. 이것에 대해선 여러 분석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1943년에 일본 해군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일본의 버마 대공세 등 군사적인 이유에서 손실이 계산에 들어갔다는 것이다.[3]
본토의 내각의 대처도 안이했지만 최소한의 대처는 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러 원인으로 인도로 식량 수송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동시에 호주미국에 원조 요청을 하여 식량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시점은 이미 대기근의 기세가 한풀 꺾인 뒤인 1944년 초이다.

4. 결론과 논란


약 300만 명의 인도인들이 아사하였고 1944년부터 연합군의 우세로 전황이 바뀌고 나서야 대기근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때 인도와의 약속을 어긴 영국에 대한 불신이 대기근으로 더욱 심해졌고, 이후 벵골 대기근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꾸준하게 처칠에 대한 비판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원인과 결과를 도출하는데 여러 논란이 일어나는데, 마두스리 무케르지(Madhusree Mukerjee)[4]의 저서 '처칠의 비밀 전쟁'을 바탕으로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들보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등 피해 규모가 부풀려지거나 처칠이 인도인을 학살하기 위해서 일부러 저질렀다는 주장이 정설인 양 퍼지기도 한다. 한국 인터넷상에서는 이 주장으로 인하여 영국에 적대 감정을 가진 사람이 많이 늘어났다.[5][6]
주로 국내 히틀러 추종자들이 양비론으로서 이를 인용하나,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나치 독일은 전쟁 패망 직전까지 홀로코스트를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와 달리 영국 정부는 대기근을 최대한 수습을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처칠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독일정부의 우생학 기반의 계획된 의도적인 대량 학살과 재난에 대한 대책 미비에 의한 대규모 아사를 동일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만약 뱅골대기근으로 영국탓을 한다면 경신대기근, 을병대기근으로 수백만이 죽은 조선 역시 현종,숙종의 의도적 학살로 비약이 가능해진다. 또한 위에 기술되어 있듯이, 당시 아사자가 속출하는 극한적인 상황에서조차도 해소되지 않았던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종교 대립이 사태를 더 심각하게 만든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단순히 당시 대영제국의 반인륜적인 횡포라거나 처칠의 계획적인 학살이라고 보는 시각은 무리가 있다.
게다가 인도는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기근이 심해서 1억 명에서 무려 2억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생을 하거나 굶어죽었다는 뉴스가 계속 들려올만큼, 식량의 분배 사정이 매우 좋지 않다.인도기근…사람은 굶고 소는 살찌고…, 독립 이후 인도의 기근 자료들, 창고엔 식량 남아도는데…3억명 굶주리는 인도, 인도에서는 약 1억 명이 기근으로 희생되었다.

5. 출처 및 참고 자료


Hungry Bengal: War, Famine, Riots, and the End of Empire, 1939~1946. Janam Mukherjee

[1] 미드웨이 해전 이후 벌어진 과달카날 전역에서 지난 전투의 피해를 나름 수습한 일본 해군이 미국 해군을 상대로 몇 번의 승전을 거두는 식으로 일본 해군의 영향력이 축소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2] 이후 벵골은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힌두교 다수 주 서벵골트리푸라로 분리되었다[3] 대기근 전에 캘커타를 향한 일본군의 폭격이 있었는데 인도 총독부는 이것을 근거로 소극적으로 나서며 영국 본토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구했다.[4] 서프라이즈 방송에선 역사학자라 소개됐으나, 역사경력과 무관한 과학자이고 시카고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았으며 미국 과학잡지에서 편집자로 일했었다. .[5] 무엇보다 네이버에서 활동하는 블로거에 의해서 퍼진 것이 강하다. 참고링크, 다른 참고 링크.[6] 인도인 다음으로 벵골 대기근의 피해를 입은 벵골인들의 의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지만 사망자들의 수가 300만을 초과한 건 아니라고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