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제국

 


'''인도'''
'''India'''[1]

대영제국식민지
[image]
[image]
'''국기'''
'''문장'''
[image][2]
'''1858년 ~ 1947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
'''인도 자치령'''
'''무굴 제국'''
'''파키스탄 자치령'''
'''국가'''
신이시여 국왕 폐하를 지켜주소서
'''위치'''
인도 반도
'''수도'''
캘커타(1858 - 1912)[3]
뉴델리(1912 - 1947)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황제[4]
'''정부수반'''
부왕 겸 총독
'''주요 총독'''
1대 케들스톤의 커즌 후작, 조지 커즌(1899~1905)
2대 린리스고 후작, 빅터 호프(1936~1943)
1대 웨이벌 백작, 아치볼트 웨이벌(1943~1947)
1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루이 마운트배튼(1947)
'''언어'''
영어, 힌디어, 우르두어, 벵골어, 버마어
'''민족'''
영국인, 인도인, 버마인, 싱할라인, 네팔인
'''종교'''
힌두교, 이슬람, 시크교, 불교
'''주요사건'''
1767년 인도 지부 영국 동인도 회사 설립
1857년 세포이 항쟁 → 황제의 강제 퇴위
ELC령 인도 성립
1858년 인도 제국 전환
1885년 인도국민회의 성립
1919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저항 운동
1935년 신인도통치법 제정
1947년 해체, '''인도, 파키스탄 독립'''
'''통화'''
영국령 인도 루피
1. 개요
2. 영국 통치 시기
3. 독립 이후
4. 그 외
5. 역대 황제
5.1. 역대 부왕총독
6.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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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58년 ~ 1947년까지 89년 간 존속한 인도의 제국이다. '''인도 역사상 최대 판도'''를 이루었으면서 '''인도 역사 상 인도 지역의 전역을 통일한 유일한 국가'''였다. 당시 단일 국가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부양하던 국가이다. '''대영제국의 최대 식민지'''이다.[5]
인도에서는 British Raj(reign)[6]이라 표현한다.

2. 영국 통치 시기


순식간에 독립했던 브라질 제국과 더불어 한 시대에 '''제국과 식민지 타이틀을 모두 획득한''' 국가. 만주국1934년 국호를 대만주제국으로 고쳤기 때문에 괴뢰국도 같은 범주로 포함시키면 이와 같은 케이스가 된다. 또 베트남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베트남 제국이라는 괴뢰국이 세워진 적이 있다. 그리고 인도 제국은 대영제국이라는 비공식 식민 제국의 일원이었므로 명목상 '''제국 안의 제국'''이라는 진기록 또한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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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제국의 최대 영역.
지금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7]의 4개 나라'''[8], 아프가니스탄, 네팔, 부탄의 일부 지방, 멀리는 남예멘 지역[9]과 페르시아 만 연안의 휴전 오만, 말레이 반도해협 식민지까지[10] 포함했던 명실상부 식민지계의 메이저다. 다만 1862년에 해협식민지가 별개의 식민지로 독립하고 1937년에는 버마와 아덴이 별개의 영국 직할식민지로 독립해나와서 최종적으로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지역으로만 남게 되었다.
제국이라는 타이틀 탓인지 무굴 제국과 혼동되는 경우가 많은데, 무굴 제국은 인도 제국이 성립하기 전 인도에 존재하던 별개의 이슬람계 주권 국가로서 강역이 인도 제국에 크게 못 미친다. 세계사 시험에 자주 페이크로 출제되는 사항이니 유의하자.
그래도 무굴 제국 시기까지는 형식적으로 동인도 회사가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고 국가로서의 주권은 존중하는 것이었으나, 인도 제국은 대영제국 정부가 동인도 회사를 해산시키고 직접 통치하던 속령이다. 지배 주체가 바뀐 계기는 세포이 항쟁.
그리고 이 때부터 섬나라 영국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국 타이틀을 획득해 황제를 주장할 수 있었다. 영국은 관용상 '대영제국'으로 부르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 제국을 칭한 바가 없었고 '''영국의 왕인 동시에 인도 제국의 황제'''로서 인도에서 황제에 오른 것이다.
영국이 세계 최고의 국력임에도 불구하고 자국 왕을 황제로 올리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로마 제국의 정통성과 무관했기 때문이다.[11]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황제를 자처한 제국 - 카롤루스 대제프랑크 왕국과 뒤이은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이나 심지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까지도 - 은 반드시 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임을 자처했다.[12]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이 신성 로마 황제 선거에 도전할지언정 자국의 황제를 자처하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로, 이런 전통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이르러서 깨진다. 나폴레옹은 의회를 통해 국민이 황제로 임명해주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고, 그나마도 샤를마뉴 -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는 신성로마제국의 건국황제 - 의 후계자임을 자처해 간접적으로라도 로마와 연줄이 닿아 있다.
유럽 내 국가들이 제국을 칭하기 위해선 상술했듯이 로마 제국과의 연줄이 있어야 했지만 로마와의 연줄 없이도 황제를 칭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타 문화권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중동이나 인도, 중국 등 유럽 바깥의 타 문화권에서 황제를 칭할 경우 이 제국들은 로마와의 연줄이 없음에도 유럽 국가들은 이들을 제국으로 인정해 주었다.[13] 때문에 유럽 바깥의 타문화권인 인도를 제국으로 만들어 영국 국왕이 인도 황제를 겸해도 유럽 국가들은 이에 태클을 걸지 못한다. '인도 황제'라는 자리는 아예 타 문화권의 황제니까. 제국급의 '''식민지'''에 제국 타이틀을 달아준 것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영국은 인도 각지의 제후들의 자치를 계속 인정했기 때문에 영국 국왕이 그들 위에 군림한다는 모양새를 갖출 필요도 있어서 인도 황제 칭호를 덧붙인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빅토리아 여왕(Queen)의 장녀인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공주(동명이인)가 프로이센 왕국의 왕세자 프리드리히에게 시집갔는데,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만들게 되자 빅토리아 공주가 향후 황후(Empress)[14]가 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빅토리아 공주가 독일 황후(Empress)가 되면 모친인 빅토리아 영국 여왕(Queen)의 칭호를 역전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므로 자존심 상해 하던 영국인들이 일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벤저민 디즈레일리 당시 영국 총리가 인도 황제/여제라는 칭호를 쓰는 게 인도 통치에도 유리하고 영국 국민의 자존심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여제 칭호를 바치게 되었다.[15]
물론 인도 황제라는 칭호는 영국 국왕이라는 칭호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이었고 실제적 지배는 영국에서 파견한 총독이 했다. 인도 제국 성립 후에 파견된 인도 총독들은 '''인도 부왕(Viceroy of India)'''을 겸임했는데, 이런 영예로운 칭호가 붙는 탓에 이전의 인도 총독들과는 달리, 오로지 '''남작[16] 이상의 고위 귀족들만이 취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대 부왕 목록에서 귀족들의 작위의 상당수가 1대라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왕 내정자가 평민이거나 준남작 이하의 귀족일 경우 남작 이상의 귀족의 작위를 수여한 뒤 정식으로 부왕 임명장을 내리는 식으로 운용했다. 따라서 인도 부왕 겸 총독직은 평민들에게도 어느 정도 개방된 직위였다. 실제로 평민 출신인 웨이벌 원수도 인도 부왕직에 오르기 위해서 자작위를 받았다.[17]
식민지에 제국 타이틀을 달아준 건 포르투갈이 만든 브라질 제국이 원조다. 이건 자국용이고 인정을 못 받았다. 다만 이쪽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본토는 탈탈 털리고 브라질이 독립을 해서(...) 사실 브라질 왕국으로 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제국을 자칭한 걸 보면 황제 호칭을 바라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덕분에 인도는 식민지가 되면서 완전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18][19] 때문에 인도 전역이 통일된 것은 인도 제국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전 인도를 지배한 왕조가 하나도 없었다.[20] 도저히 융합이 불가능해 보이는 인도 내의 수많은 민족, 종교, 계급, 이해 세력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대영 제국의 강력한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인도에 근대화의 초석을 어느정도 깔아놓은 것도 영국의 힘이 컸다.
(조심하자,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의 식민지시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논리랑 비슷한 구석이 있다. 진짜 초석인지, 아니면 약탈을 위한 초석을 만든건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만 이것은 바꿔서 말하면 '인도'라는 민족성 자체가 대영제국의 식민지배를 통해 탄생했다는 얘기도 된다. 실제로 북부의 아리안계와 남부의 드라비다계는 종교를 제외하면 언어도 문화도 역사도 전혀 다르다.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 또한 적지 않은데, '''1757년부터 1947년 사이의 인도의 1인당 소득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실제로 19세기 후반기 동안 기근이 겹치고 상당수 농민들이 재산을 처분하고 임노동자로 전락하면서 소득이 절반 이하로 감소했을 거라는 추측이 우세하다.[출처] 1872년부터 1921년 인도 서민의 평균 수명은 놀랍게도 20퍼센트 정도 하락했다. 인도가 위생적으로 불량한것을 감안하더라도 영국의 위생상태가 획기적으로 나아져서 평균수명이 크게 늘어난것을 감안하면 인프라 시실에 돈을 생각보다 많이 들이지 않았다는 소리이며 또한 인도에 근대식 교육을 도입했다고는 하지만 그 교육을 받을수있는 계층은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했고 인도의 문맹률은 독립당시에 80%를 넘는 수준이었다. 인도의 문자들이 표음문자로 중국보다 문맹퇴치에 유리했음에도 말이다. 즉, 인도지배의 좋은 측면들은 거의 상류층에 국한 되었으며 하류층들은 별 혜택을 못봤다는 얘기이다. 다시 말해서 '''영국의 인도 아대륙 식민 지배는 13세기 몽골 제국의 중동 및 동유럽 침략과 반달리즘에 비견되는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고 봐야 한다.''' 다만, 완전히 상처만 남겼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인도의 악습 철폐 등의 업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영국조차도 '''선교계 최강의 '''인 '''힌두교'''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인도 본토에서는 말이다. 더구나 과거에도 불교이슬람교의 도전을 모두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도 인도는 최종 던전이다.
인도 제국이 세계사적으로 끼친 가장 유명하면서도 악명 높은 업적(?)은 아편이다. 당시 인도는 아편의 주산지였는데, 영국이 중국에 대한 거래 대금으로 이걸 뿌리는 바람에 아편전쟁이 터졌고,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청나라를 몰락시킨 간접 원인이 되면서 인도 제국은 중국의 붕괴를 사주한 꼴이 되고 말았다.

1941년 영국령 인도군의 훈련 모습.
그래도 잘 살펴보면 인도인들이 영국군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 편이다. 식민지에서 '영국군'으로 싸운 군인들 중 인도인들이 은근히 많다. 인도 군인들은 청나라를 공격하는데 동원되기도 했으며 이는 중국과 인도 관계가 틀어지는 사실상의 시발점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는 영국령 인도군(British Indian Army)이라는 이름으로 서부 전선, 갈리폴리 등에 투입. 특히 망해가는 오스만 제국과 치열하게 치고박고 싸우고 했던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전선은 대부분의 장병들이 영국령 인도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이를 두고 '''튀르크와 힌두스의 싸움'''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3. 독립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인도인 수십만 명의 피를 뿌리는 등 전쟁 수행에 협조한 것에다 영국 본국에 식민제국의 해체와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는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 내각이 들어선 결과 기나긴 영국의 지배가 끝나고 인도 제국의 독립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독립이 임박했다는 기쁨도 잠시, 인도 제국 내 무슬림들이 무슬림 만의 국가 수립을 요구하면서 인도 제국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종교 갈등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무슬림 만의 국가 수립을 놓고 인도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양대 독립운동 단체, 인도국민회의와 전인도무슬림연맹의 정치적 갈등은 인도 전역의 무슬림-비무슬림 간의 종교 갈등으로 번졌고 1946년 8월 16일, 다이렉트 액션 데이가 벌어진 캘커타에서 양측의 무력충돌로 수천 명이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인도 전역에서 무슬림-비무슬림 간의 충돌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등 준 내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영국은 인도 제국 내 무슬림 국가와 비무슬림 국가의 별개 독립을 승인했고 1947년 8월 14일, 무슬림 국가인 파키스탄 자치령이, 8월 15일, 비무슬림 국가인 인도 자치령이 수립되면서 인도 제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2개 국가로 갈라지게 되었다. 독립운동을 지휘했던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분열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들었지만 오히려 그에 반감을 느낀 힌두교 극우파 청년 나투람 고드세에게 암살당했다.
마침내 결국 1947년 카슈미르를 놓고 내전과 국제전 성격을 모두 가진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터졌으며 결과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은 지금까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지도를 찾아보면 인도-파키스탄 간 카슈미르의 국경은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두고 동족혐오라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원래 이들은 문화도 종교도 역사도 상당히 이질적인 민족과 지역들이 영국 점령기 치하에 한 나라로 묶인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이 한국과 일본, 만주, 대만 및 중국 동부 해안을 한 나라로 묶어서 '동아시아 제국' 따위의 이름으로 통치했다면 영국이 떠나간 이후에 이들간의 분열으로 헬게이트가 열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테고 이를 동족혐오라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21]
1962년에는 인도와 중국간에 국경분쟁으로 전쟁이 터졌고(중인전쟁 또는 중국-인도 국경분쟁), 이때 인도는 한 마디로 개발살났다. 그리고 이때 문제가 되었던 국경 역시 지금도 점선이다. 이것은 역사상 최초로 인도계 국가와 중국이 국가 주도의 전쟁을 수행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1965년에는 파키스탄이 인도가 중국에게 털렸던 것을 보고 자신감을 얻었는지, 석유가 묻혀있는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를 합병하려고 인도를 공격하면서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은 인도의 반격으로 파키스탄이 참패하여 수세에 몰리고 UN소련의 중재로 유야무야 끝났다.
인도 제국의 분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이번엔 파키스탄 내부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인도 제국 시절에는 벵골 주에 속했으며 파키스탄 독립 후 동파키스탄 지역이었던 방글라데시가 서파키스탄 중심의 파키스탄 정부의 지배와 지역 차별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1971년 독립을 선언하면서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결국 1979년 12월 인도가 분쟁에 개입, 파키스탄을 공격하여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인도는 방글라데시를 파키스탄의 지배에서 '''독립'''시켜 주었다. 그 결과 인도는 방글라데시를 우군으로 끌어들였지만[22]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이 같은 일련의 분열 과정은 인도 제국 시절의 역사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바로 1905년 영국이 인도의 지역감정을 조장할 목적으로 실시한 벵골 분할령이 그것. 인도인들의 통합을 막고 분열을 야기할 목적으로 실시한 이 정책은 아주 기가 막히게 효과를 봐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3국 분열 모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대망의 1998년, 3개월 차이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개발했다!''' 종교적 이견에서 출발한 갈등은 마침내 종교가 '''인류멸망을 초래할 수준에 도달해버린 것이다.'''[23] 만약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면 진원지로 가장 유력한 후보가 카슈미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편 인도 제국을 비롯한 영국의 남아시아 식민지는 1947년에 해체되었지만, 대신 인도 제국은 인도, 파키스탄, 실론(스리랑카)로 분할되어 각각 영국의 자치령이 되었다. 그래서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는 한동안 모두 형식적으로 영국 국왕을 왕으로 모시는 왕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각국은 헌법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자치령 체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하고 공화국이 되었는데, 인도는 1950년에 인도 공화국으로, 파키스탄은 1956년에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으로, 스리랑카는 1972년에 스리랑카 민주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그러나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헌장 이후 영국의 자치령은 내정 자치권뿐만 아니라 외교권과 군사권도 갖는 등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각국의 독립 시점은 자치령이 된 1947년(스리랑카는 1948년)으로 간주된다.

4. 그 외


인도 제국은 알게 모르게 한국의 역사에도 간접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바로 1905년 2차 영일동맹 당시 영국이 인도 제국의 지배를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일본 제국대한제국 지배를 공인해버린 것.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입김이 강했던 영국이 한국 보호국화를 인정해버렸다.(엄밀히 말하면 이미 반석에 오른 인도의 통치보다는 '인도의 국경선을 보장', 즉 영국이 병합한 지 얼마 안 된 미얀마의 병합을 승인하는 목적이 강했다. 영일동맹의 가장 본질적인 조건은 영국 제1의 적이었던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한일병합을 긍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영국은 1910년 한일병합 당시에는 일본에 항의할 것을 고려해 보기도 했다. 사실 외교란 게 오늘의 동맹이 내일의 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작정 일본이 커지기만 하면 영국 입장에서도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엄청나게 팽창한 일본군(하지만 당시 일본도 영국군보단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독립시켜 중국 국민당군을 압박하려는 의도로 인도를 공략한 것이 크다.) 때문에 인도에 주둔한 영국군이 긴장타야 했다.
흔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까지 정복'''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알렉산더 대왕은 우리가 흔히 인도라고 부르는 곳의 본토에 침입하기는커녕 지금의 파키스탄 언저리만 살짝 찔러보고 회군했다.[24][25] 다만 당시에는 이란 동쪽에서 인더스강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인도였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인도를 정복한 게 맞기는 하다. 그 유명한 간다라 미술도 본국인 인도 입장에서는 파키스탄 일부 지방의 변방 민속 예술 수준에 불과하다.
엘리자베스 1세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이는 토마스 칼라일의 말이 와전된 것이다.
지배국인 영국이 그래도 비교적 평화롭게 독립을 허용해 줘서인지 인도 제국에서 갈라진 네 나라 모두 영연방에 가입해 있는 상태이다.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불화 문제로 1972년 연방을 탈퇴했으나 2004년에 복귀했다.
인도 제국에서 갈라진 4국은 하나같이 인구가 어마어마하다. 네 나라 중 가장 인구가 적은 미얀마도 5500만 명으로 대한민국보다도 많고 인도 동쪽에 조그맣게 끼어있는 방글라데시 인구가 '''1억 6천만 명'''이다(세계 7~8위이다).[26] 파키스탄의 인구가 '''2억'''이다. 인도는 14억 명을 넘길 것 같다. 이 인구를 다 합치면 18억에 육박하며 중국 인구를 압도한다. 더구나 산아제한정책으로 출산율이 세대교체율을 밑도는 중국과는 달리 이들 인도계 국가는 하루가 다르게 인구 폭증, 해마다 수천만 단위로 인구가 늘어난다. 인도 한 개의 국가의 인구만으로도 2020년 이후에는 중국을 앞지르게 될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인도 제국이 간디의 소망대로 분열 없이 쭉 이어졌다면 중국은 인구에서 2위가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이미 중국은 서서히 2등 라인이 되어가는 중이다.[27]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제국의 작위를 가져다 황제위를 칭한 것과 관련해, 인도 제국은 무굴 제국의 후손이고 무굴 제국은 티무르 제국의 후손이며, 티무르 제국은 일 칸국의 후손이므로 빅토리아 여왕은 사실 '''빅토리아 카간'''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존재한다.

5. 역대 황제


황제/여제
즉위연월일
퇴위연월일
재위기간
대관식(Delhi Durbar)
빅토리아
1876.5.1
1901.1.22
24년 21일
1876.5.1
에드워드 7세
1901.1.22
1910.5.6
9년 104일
1903.1.1
조지 5세
1910.5.6
1936.1.20
25년 259일
1911.12.12
에드워드 8세
1936.1.20
1936.12.11
10개월 22일
없음
조지 6세
1936.12.11
1947.8.14[28]
10년 249일
없음
영국 및 영국 자치령 국왕/여왕·왕비 겸 인도 황제/여제·황후는 줄여서 King-Emperor/Queen-Empress로 불렸고 라틴어 약자로 R.[29]I.[30]라고 표기하기도 하였다.
이름이 인도 제국 황제인데 진퉁 인도인은 한 명도 없고 죄다 영국인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윌리엄 왕세손이 영국 왕위에 오르게 되면 그 이후로는 직계가 단절되지 않는 한 미약하게나마 인도인 혈통을 가진 영국 국왕이 대대로 배출될 예정이다. 윌리엄 왕세손의 어머니인 다이애나 스펜서의 조상들 중에 인도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5.1. 역대 부왕총독


작위
이름
임기시작
임기종료
1대 캐닝 백작
(1st Earl Canning)
찰스 존 캐닝
(Charles John Canning)
1858. 11. 1
1862. 3. 21
8대 엘긴 백작
(8th Earl of Elgin)
제임스 브루스
(James Bruce)
1862. 3. 21
1863. 11. 20
1대 막달라의 네이피어 남작
(1st Baron Napier of Magdala)
로버트 코널리스 네이피어
(Robert Cornelis Napier)
1862. 11. 21
1863. 12. 2

윌리엄 토머스 데니슨 경
(Sir William Thomas Denison)
1863. 12. 2
1864. 1 12
1대 로런스 남작
(1st Baron Lawrence)
존 레어드 메어 로런스
(John Laird Mair Lawrence)
1864. 1. 12
1869. 1. 12
6대 마요 백작
(6th Earl of Mayo)
리처드 사우스웰 버크
(Richard Southwell Bourke)
1869. 1. 12
1872. 2. 8

존 스트레이치 경 [31]
(Sir John Strachey)
1872. 2. 9
1872. 2. 23
10대 네이피어 경
(10th Lord Napier)
프랜시스 네이피어[32]
(Francis Napier)
1872. 2. 24
1872. 5. 3
1대 노스브룩 백작
(1st Earl of Northbrook)
토마스 조지 베어링
(Thomas George Baring)
1872. 5. 3
1876. 4. 12
1대 리턴 백작
(1st Earl of Lytton)
에드워드 로버트 리튼 불워리튼
(Edward Robert Lytton Bulwer-Lytton)
1876. 4. 12
1880. 6. 8
1대 리폰 후작
(1st Marquess of Ripon)
조지 프레더릭 새뮤얼 로빈슨
(George Frederick Samuel Robinson)
1880. 6. 8
1884. 12. 13
1대 더퍼린과 아바 후작
(1st Marquess of Dufferin and Ava)
프레더릭 해밀턴템플블랙우드
(Frederick Hamilton
-Temple-Blackwood)
1884. 12. 13
1888. 12. 10
5대 랜스다운 후작[33]
(5th Marquess of Lansdowne)
헨리 찰스 키스 패티피츠모리스
(Henry Charles Keith Petty-Fitzmaurice)
1888. 12. 10
1894. 10. 11
9대 엘긴 백작
(9th Earl of Elgin)
빅터 알렉산더 브루스
(Victor Alexander Bruce)
1894. 10. 11
1899. 1. 6
1대 케들스턴의 커즌 후작
(1st Marquess Curzon of Kedleston)
조지 너새니얼 커즌
(George Nathaniel Curzon)
1899. 1. 6
1905. 11. 18
4대 민토 백작
(4th Earl of Minto)
길버트 존 엘리엇머리킨마운드
(Gilbert John Elliot-Murray-Kynynmound)
1905. 11. 18
1910. 11. 23
1대 펜스허스트의 하딩 남작
(1st Baron Hardinge of Penshurst)
찰스 하딩
(Charles Hardinge)
1910. 11. 23
1916. 4. 4
1대 첼름스퍼드 자작
(1st Viscount Chelmsford)
프레더릭 네이피어 세시저
(Frederic John Napier Thesiger)
1916. 4. 4
1921. 4. 2
1대 리딩 후작
(1st Marquess of Reading)
루퍼스 아이작스
(Rufus Isaacs)
1921. 4. 2
1926. 4. 3
1대 핼리팩스 백작
(1st Earl of Halifax)
에드워드 프레더릭 린들리 우드
(Edward Frederick Lindley Wood)
1926. 4. 3
1931. 4. 18
1대 윌링든 후작
(1st Marquess of Willingdon)
프리먼 프리먼토머스
(Freeman Freeman-Thomas)
1931. 4. 18
1936. 4. 18
2대 린리스고 후작
(2nd Marquess of Linlithgow)
빅터 알렉산더 존 호프
(Victor Alexander John Hope)
1936. 4. 18
1943. 10. 1
1대 웨이벌 백작
(1st Earl Wavell)
아치볼드 퍼시벌 웨이벌
(Archibald Percival Wavell)
1943. 10. 1
1947. 2. 21
1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34]
(1st Earl Mountbatten of Burma)
루이 프랜시스 앨버트 빅터 니콜라스 마운트배튼
(Louis Francis Albert Victor Nicholas Mountbatten)
1947. 2. 21
1947. 8. 15

6. 둘러보기 틀









[1] Crown rule in India나 Direct rule in India로도 불렸으며 비공식적으로는 Indian Empire으로 불렸다.[2] 빨강색은 영국 직접 통치, 보라색은 토후국을 통한 사실상의 영국 통치.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 편을 든 토후국은 영국의 지배권 하에 두어 남겨 놓았다. 버마는 1937년 영국의 직할령으로 따로 분리해 나왔다.[3] 여름에는 수도 기능이 잠시 심라로 옮겨졌다.[4] 영국 국왕이 겸임.[5] 면적은 캐나다호주가 훨씬 넓지만 인구는 저 두 국가를 합쳐도 방글라데시의 절반도 안 된다.[6] ब्रिटिश राज, 번역하자면 영제시대 정도. 위키피디아에서는 영국의 지배로 번역한다. 보통 1858년을 라지의 시작으로 친다.[7] 미얀마 전역이 인도 제국에 편입된 시기도 있었으나 편입 시기가 인도 본토보다 훨씬 늦고 1937년에는 인도 제국과 별도로 영국직할령이 된다.[8] 의외로 인도 반도 바로 밑에 있는 스리랑카는 인도 제국의 일부가 아닌 영국령 실론이라는 별개의 식민지였다.[9] 1937년 별개의 식민지로 독립한다.[10] 여기는 1862년 인도 제국과 별개의 식민지로 독립한다.[11] 사실 로마 제국 계승성을 주장하는 것은 그냥 적당히 갖다 붙이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황제를 자칭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는 있었고 실제로도 이전에 영국이 자체적으로 국왕에게 황제 칭호를 부여하고 했던 시도가 있었다. 조지 3세 시절 아미앵 조약으로 프랑스 제1공화국을 승인하면서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거긴 하지만) 프랑스 왕위 타이틀을 포기해야 했고 미국 독립 전쟁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아일랜드인들이 프랑스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아일랜드인들의 효과적인 통제을 위해 영국의 속령이긴 했으나 아직까지는 명목상으로는 영국과는 별개의 국가였던 아일랜드 왕국정식으로 영국 본토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이렇게 왕위 2개를 잃어버린 왕을 위로하고자 영국 의회에서 자국 군주에게 황제 칭호를 부여하고자 했으나, 영국 왕이 동군연합으로서 겸하고 있던 하노버 선제후(신성로마제국 산하의 봉신국)라는 이중 직위로 인한 외교 마찰을 우려한 조지 3세에 의해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하지만 조지 3세가 황제 칭호를 사용하자는 제안을 기각한 지 불과 몇 년 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를 자칭하면서 유럽 군주들의 칭호 인플레가 시작되었다. 더군다나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 얼마 안 있어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던 점도 있다.[12] 자세한 것은 제3의 로마 항목을 참조.[13] 무굴 제국의 미르자, 페르시아의 샤, 명과 청의 천자, 일본의 덴노, 에티오피아의 네구스 네게스티 등 유럽 바깥의 황제급의 칭호를 유럽의 황제와 똑같이 취급한 것도 바로 이 이유에서였다. 오스만의 경우 (일단은) 유럽 국가이지만 로마의 정통성과 무관했음에도 황제로 인정해주었는데 오스만 황제가 중동의 황제 격인 칼리파를 칭했기 때문이었다.[14] 알다시피 영어에서는 '여성 군주'와 '남성 군주의 아내'에게 붙이는 칭호 형태가 동일하다.[15] 이 조치가 취해지자, 영국 국내에서는 독일 제국에 자존심 상해 하던 일각의 반응과 정반대로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빈정거리는 반응도 나왔다. 빅토리아 여왕 문서를 보면, 인도 여제 칭호를 바칠 당시 이것을 비꼬던 풍자화를 볼 수 있다. 해당 문서 참고.[16] 영국에서는 준남작 이하 귀족의 경칭으로 Sir/Dame이 붙는데 반해 남작 이상의 귀족에게는 더 높은 Lord/Lady가 붙는다. 그리고 지금은 제도가 바뀌었지만 과거 영국은 1990년대 말 토니 블레어 정권 초기까지 왕족을 제외한 남작 이상의 귀족들은 무조건 자동으로 종신직 귀족원(상원) 의원이 되었다. 애초에 영국 귀족원의 영어 표기가 House of Lords이다.[17] 사실 영국은 과거의 인도 부왕직 뿐만 아니라, 지금도 몇몇 고위직에 대해 이런 식으로 평민에게 작위를 주고 임명하는 식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귀족원(상원) 의원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또는 대법관으로 임명하기 위해 남작 이상의 작위를 내리는 식이다.[18] 포르투갈(고아, 다만, 디우, 다드라나가르하벨리)이나 프랑스가 지배한 곳(퐁디셰리, 야나옹, 마에, 카라칼, 찬데르나고르)도 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 통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포르투갈과 프랑스가 점유한 지역은 영국이 점유한 지역에 비하면 그야말로 코딱지만큼 작았던지라...[19] 이 점은 아일랜드도 비슷하다. 잉글랜드 왕국헨리 8세가 아일랜드 섬을 모두 정복하고 아일랜드 왕국을 선포하면서 아일랜드 통일이 이뤄진다.[20] 마우리아 왕조무굴 제국이 최남단 일대를 제외한 인도 전역을 통일하여 통일 직전까지 간 적은 있었다.[출처] : Late Victorian Holocausts / 마이크 데이비스 저[21] 오늘날 현재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의 상당수 국가들이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아직까지도 내전과 전쟁, 민족분쟁, 종교분쟁, 영토분쟁 등을 겪고 있다.[22] 그렇지만 방글라데시와 인도 역시 방글라데시가 독립한 이후에는 영토 분쟁과 국경 분쟁으로 관계가 안 좋아진 적도 있었다. 자세한건 방글라데시 문서 참조[23] 다만 아직 둘 다 보유하기는 했어도 투사력은 둘째 치고 '''위력이 확실한지'''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 상황이다. 특히 인도의 핵 전력은 대부분의 학자들도 위력이 약할 것이라고 수긍하지만 파키스탄은 현재까지 논란이 있는 편이다.[24] 포루스 왕이 이끄는 코끼리 군단에게 의외의 고전을 한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사실 포루스 왕은 인도의 군벌 중 가장 약한 녀석이었지!"'''라는 소문에 경악해 겁에 질려버렸고(사실 이건 전투에서 진 포루스 왕의 병사들이 뻥을 친 것이다 포루스 왕의 펀자브 왕국은 당시 인도 내의 수많은 국가들 중 강하기로는 한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나라였다), 천하의 알렉산드로스도 끝내 부하들의 사기를 되돌리지 못하고 바빌론으로 회군한 후 병사한다. 물론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펀자브 왕국의 병사들의 거짓말을 들었다고 사기가 바닥을 칠 정도로 바보도 아니었고 이들에게 심각하게 당한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북서부 지역을 공략하고 이 거짓말을 들은 뒤 만난 다음 상대가 그 펀자브 왕국을 털어먹던 '''당시 인도 북부의 끝판왕 난다 왕국이었던 게 문제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난다 왕국의 군세 앞에서는 여태까지의 기세가 꺾이고 말았고, 난다 왕국의 강력한 군사력에 발이 멈춘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사기도 뚝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25]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병사한 후에 마케도니아 제국의 후계국 중 하나인 그레코-박트리아 왕국 시절에 그리스인들이 재차 침략해와서는, 알렉산드로스 때와는 달리 정말로 인도의 여러 나라들을 개발살내고 떡하니 나라까지 세워서, 서기 9세기 경까지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26] 방글라데시 인구가 '''러시아'''를 능가한다. 러시아 지도와 방글라데시 지도를 번갈아 비교해보면서 놀라주자. 일부 출처에서는 1억 6500만 명까지도 올라간다. 더군다나 여기는 더 놀랄 일이 따로 있다. 바티칸 같은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이 국가가 '''세계 인구밀도 1위'''이다. km²당 인구가 1100명에 달한다. 2위가 대한민국이다.[27] 사실 중국 인구가 인도보다 많았던 것은 최근 5백여년밖에 안 된다. 서기 1년경 중국 인구는 세계인구의 26.4%, 인도 인구는 33.2%를 차지했으며, 서기 1500년에는 각 23.5%, 25.1%.[28] 이후 인도 자치령과 파키스탄 자치령에서도 황제가 아닌 국왕의 칭호를 썼다. 인도 자치령이 현재의 인도 공화국이 되면서 인도에서 국왕 칭호를 내려 놓게 된다(대신 이때부터 영연방 원수라는 새로운 칭호를 쓰기 시작한다). 파키스탄은 조지 6세 사망 이후 엘리자베스 2세 치세 초기까지 자치령으로 남았기에 엘리자베스 2세가 마지막 파키스탄 여왕이 된다.[29] Rex/Regina.[30] Imperator/Imperatrix.[31] 전임자 마요 백작이 암살당해 부왕 자리가 공석이 되자 임시로 맡음.[32] 수학에서의 log, 즉 로거리듬을 만든 존 네이피어의 후손이다. 단, 존 네이피어의 부계 직계 계승은 아니다. 6대 네이피어 경은 모계 계승이었다.[33] 대한제국사에 관심이 있다면 알겠지만 하야시와 함께 제 1차 영일동맹을 체결한 사람(...)맞다. 체결 당시 외무상[34] 피의 일요일 사건 보복으로 IRA에게 폭탄으로 끔살당한 그 양반이다. 그래서 암살당했을 때도 아일랜드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천벌 받았다며 고인드립을 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