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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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로 독일령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비르케나우)에 도착한 유대인들. 한가운데 초점이 맞춰진 집단은 '''아동, 여성, 노인, 즉 바로 가스실로 갈 집단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유대인들도 보이는데, 얼마 안 가 자신들에게 참혹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씁쓸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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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의 화장장[1] 시신을 불태워 처리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 존더코만도[2][3] 가 은밀히 촬영하였다. 현재 절멸수용소의 살인 공정 운영 장면[4] 이 촬영된 단 4개뿐인 사진 중 하나로써 그 가치가 매우 막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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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바이마르 근교에 위치한 부헨발트 노동수용소의 수감자들. 다들 극한의 기아로 뼈가 드러난 비참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사진을 찍는다니 밝은 표정이다. 1945년 해방[5] 직후 찍힌 사진이다.
홀로코스트 - 애니메이션/지도
이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1941년 7월 말 라트비아의 리예파야 시에서 독일군이 벌인 유대인 집단 학살을 촬영한 영상. 영상 출처는 이스라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공식 유튜브 채널이다. 당시 리예파야 해변 사구에서는 약 5천에서 7천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친위대 특무대와 보안대 주도 하에 오르포(질서경찰), 국방군(그 중에서도 육군 및 해군) 및 라트비아인 부역자들이 구덩이 속에 유대인들을 한 줄로 세우고 총살한 후 흙으로 덮는 것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영상에서 확인 가능하듯 수많은 국방군, 친위대, 민병대원들과 심지어는 주민들이 이 사건을 목격하고도 막지 않았으며, 오히려 구경하며 학살을 방관하였다.
이 영상은 독일 해군 중사였던 라인하르트 비너(Reinhard Wiener)가 8mm 필름 코닥 카메라를 통해 촬영하였는데, 그가 현장에서 대놓고 기록을 남기는데도 불구하고 제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반유대주의가 친위대, 국방군 가리지 않고 얼마나 일반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다. 비너는 전후인 1981년에 인터뷰를 통해 이 사건의 상세 정황을 설명하였는데, 그 인터뷰 영상 또한 야드 바셈 박물관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인터뷰 영상 1, 인터뷰 영상 2
1. 개요
Im Zuge der praktischen Durchführung der Endlösung wird Europa vom Westen nach Osten durchgekämmt.}}}최종 해결책이 수행되는 동안, 유대인들을 적절한 지침과 적당한 방식으로 동부로 이송시켜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해야 한다. 성별과 노동력에 따라 구분하여 대규모 노동대열로 조직해 도로 건설에 투입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원은 크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불가피하게 최후까지 남은 이들은 신체적으로 가장 강인한 자이니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수단을 동원해야만 한다. 그런 자들은 자연도태를 거친 자들이므로 만약 그들이 풀려나게 되면 새로이 유대인이 번성할 수 있는 생식 세포 역할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상기하기 바람.)
최종 해결책의 실제적 수행 과정에서 우리는 유럽을 서에서 동으로 쓸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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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주도하여 벌인 조직적 제노사이드로, 유대인을 중심으로 하여 약 1,100만 명의 민간인들과 전쟁 포로들을 가스실, 총살, 강제 노동, 계획된 영양실조 등의 방법으로 학살한 사건을 의미한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태생적 요소를 들어 특정 인간의 절멸을 목표로 제도적, 과학적으로 철저히 학살이 이뤄진 전무후무한 사례이다.-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 대리 겸 국가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1942년 1월 20일 열린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문제의 처리 방안에 대해 논하며. 반제 회의 회의록 7, 8 페이지에서 발췌. 7 페이지 8 페이지
홀로코스트의 주된 희생자였던 유대인의 경우 유럽 내 약 900만명의 유대인 중 3분의 2인 600만여명이 학살되어 그 피해가 가장 극심했다. 또한 롬인(집시)들도 주요 학살 대상 중 하나였으며, 최대 50만여명이 학살되어 유럽 롬인의 절반 가량이 사망하였다.[6] 슬라브인, 장애인, 성소수자, 포로, 또는 나치당을 정치적 이유로 거부한 사람들도 함께 학살되었다. 총 희생자의 수는 흔히 알려진 유대인 600만을 포함한 1,100만 정도로 잡는다. 좀 더 넓게 정의할 경우 동부전선에서 군사작전 중에 죽은 민간인을 제외한 나치 점령지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당한 소련인까지 포함해 1,700만까지 잡는 경우도 있다.[7][8]
이를 기획하고 주도적으로 학살한 주체는 나치 독일 정부와 그 군대임이 분명하지만, 그외의 추축국들이나 추축국의 괴뢰국, 점령지의 자생적인 파시스트들로 이루어진 나치 독일의 괴뢰 정권과 '풀뿌리 부역자들' 또한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추축국임에도 이러한 학살 행각에 동참하기를 끝까지 거부한 국가는 불가리아 왕국과 전쟁 말에 추축국으로부터 돌아선 핀란드 정도 뿐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강제 노동·절멸 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며 그 실상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인류가 여태까지 자부하던 과학 기술이 철두철미하게 특정 부류의 인간을 말살한다는 발상에 쓰였다는 사실은 전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이에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반면교사로 남게 되었다. 때문에 일부 사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기술력의 발달을 통한 낙관적인 미래라는 관점을 철저하게 부정시켰다는 점에 있어 제2차 세계대전을 근대와 현대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삼으며,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야만이다"라고 말한 바 있듯 인문학에서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에 큰 영향을 준 계기가 되었다.
2. 어원
어원은 그리스어로 '번제(燔祭)'를 뜻하는 '올로카프스토스(ὁλόκαυστος)'로, 제물을 불에 태워 그 연기로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의미한다. 이 외에도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 שואה)'로도 불린다. 한편 학살의 주체였던 나치 독일에서의 공식 명칭은 '최종 해결책'이라는 뜻의 '엔틀뢰중(Endlösung)', 정확히 말하자면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이라는 뜻의 '엔틀뢰중 데어 유덴프라게(Endlösung der Judenfrage)'로, 은유를 통해 대량 살해를 목적으로 함을 감추고 있다. 현재도 독일에서 최종 해결책이라는 용어는 홀로코스트를 칭하는 또다른 고유명사로 인식되며,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다른 유럽권 언어에서도 비슷하여, 영어로 'Final Solution'은 홀로코스트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인식되어 터부시된다.
3. 배경
사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독일을 포함한 전 유럽 대륙에서 반유대감정은 흔한 것이었다. 먼 옛날 기독교가 유럽 대륙으로 퍼지며 예수를 죽인 유대인을 '사탄'으로 규정했다. 거기타 자신의 나라 없이 전 유럽 대륙에 퍼져 있으면서도 그 나라에 융화되지 않았고, '유대인은 특별한 민족이다'라는 선민사상과 함께 이질적인 유대인만의 문화를 죽어라 지키기며 자신들의 영역(마을 혹은 공동체)을 만들며 살아갔기 때문에 만만하게 생각하거나 고깝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이렇게 넓게 퍼져있다보니 별 감정없는 일반인들도 있었으며, 중세시대 이후 국가관이 종교에서 왕국 혹은 국가에 충성하는 분위기로 접어들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냉담(즉 이름만 유대인이지 사실상 무종교)이나 타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고, 국가적으로도 종교적 색체가 옅어지면서 자연스래 유대인들은 일반인들 사이로 스며들고[9] , 반유대주의 또한 옅어지기 시작한다. 아돌프 히틀러 본인 역시 반유대주의 사상을 접하고도 상당 기간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10] 그렇기 때문에 중세시대부터 전근대기까지 유대인은 심하면 박해당하거나 왕따정도를 당하는 존재였긴 했어도, 홀로코스트 같이 조직적인 학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던 도중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궁지에 몰린 독일 제국은 항복을 선언했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은 종료됐으며,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패전국들은 모든 식민지를 잃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는 파멸에 이르렀다. 전후 독일에 세워진 바이마르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초인플레이션 등 혼란과 혼란을 거듭했다. 이러는 도중 독일에 패전 책임이 있는 극우,극수,군국주의자들이 배후중상설을 떠들며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의 원인이 유대인이라는 주장을 피기 시작했다. 배후중상설 참고.[11] 거기에 이렇게 힘든 독일에게 더 큰 시련이 오니, 1929년 전 세계를 강타한 세계 대공황은 더욱더 피폐해진 독일을 사실상 죽음으로 몰고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던 유대 자본가들이 비난받으며 전부터 쌓여왔던 반유대주의는 폭발적으로, 그리고 계층을 따지지 않고 넖게 퍼지기 시작한다.[12]
또한 러시아가 공산화 되자 그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유대-볼셰비즘설(Judeo-Bolshevism)이 널리 퍼졌으며, 유대인이 세계 지배 음모를 꾸민다는 시온 의정서가 신봉되었고, 반유대 언론을 소유한 헨리 포드의 반유대주의도 나치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온갖 반유대주의적 주장이 사회에 퍼졌는데, 예를 유대인이 어린아이를 해한다는 blood libel(피의 중상),[13] 유대인이 매음굴 포주라는 설, 유대인이 풍기문란의 주범이라는 설, 1차 대전에서 유대인이 징병을 거부했다는 설 등이 있었다.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문서 참조.
이러한 상황에서 빈틈을 파고든 이가 바로 히틀러다. 1차대전의 퇴역 군인이던 히틀러는 나치당 입당 후 연설 능력에서 두각을 나타네는데, 이러한 그의 연설도 반유대주의가 설파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의 지지 상승을 위해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이용했다.[14] 네로 작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틀러는 광기에 충실한 정치가였다. 비인간적인 광기와 문명의 거대한 힘이 결합하면서, 유대인 학살의 토대는 마련되고 있었다.
4. 특징
↑1942년 1월 20일 열린 반제 회의의 회의록 문서 중 6페이지. 이는 회의 참가자이자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 친위대 중령의 이름을 따 '아이히만 리스트'라 불리는 문서로, 유럽 전역의 유대인 수('''학살 대상자''')를 정리해 놓았다. 유형 A는 회의가 열렸던 42년 초 시점에 독일이 점령하여 직할하던 지역의 유대인들이며, 유형 B는 그 외의 지역들[22] 의 유대인들이다.
홀로코스트는 여타 학살과 구분되는 몇 가지 특이점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특징은, 전쟁터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지는 포로 학살이 아닌, '''자국(점령지) 내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산업적인 형태의 학살이라는 것.''' 사실 홀로코스트라는 건 아돌프 히틀러 혼자만의 작품은 아니다. 제3 제국의 인종 정책의 의미는 사실 '''땅을 점령해서 독일인에게 배분하겠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결국 "그 영토에 사는 사람들은 독일인이어야 했다"는 논리적 문제가 생기는 거다. 즉, 슬라브인이나 폴란드인들을 그 땅에서 추방하거나 잡아 죽이고 그 땅을 독일인에게 준다는 개념을 생각해 낸 것이 특징 아닌 특징이다.
게다가 어찌 보면 이 학살의 과정은 그냥 자기가 국민으로 삼은 데는 후하고, 아닌 놈들에겐 더없이 가혹했을 배타주의적 상징으로 시작된 거라고 보면 되지만, 유대인 학살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그 유대인들이 소유한 경제권과 상권, 자금을 독일인들에게 돌려준다는 개념으로 시작된 것으로 실제로 살던 집을 빼앗아서 독일인에게 줘 버리는 등의 행동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헌데 문제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되면 눈치를 챈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날라 버리거나 재산 챙겨서 3국으로 도주하는 등의 사태가 생기면 골치 아파지므로 아예 그냥 규모가 매우 거대한 '''강도질'''을 해 버린 거라고 보면 된다.
즉, 히틀러의 문제는 '''아리아계 독일인'''만 국민으로 생각하고 나머지는 폐품 취급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애초에 나치당 성격상 극좌와 극우가 섞여 있어서 생긴 상승 작용도 한몫한 것도 있다.
또한, 히틀러는 어찌 보면 "뭉뚱그린 개념"을 구상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실행자 측에서 과당 경쟁이 붙어서 '''효과적인 학살 방식'''과 '''학살정책'''을 내놓은 셈이다. 즉, 실제로 대부분 문제는 하인리히 힘러와 파울 요제프 괴벨스, 아돌프 아이히만 등의 작품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는 '''총통의 망상'''을 구체화한 셈이 되고, 이건 전쟁에 의한 과열 양상도 한몫한다. 요는 폴란드 등을 침공한 다음에 그 국가에 사는 독일계 주민을 선동해서 폴란드인들을 학대하게 하고 그로 인해서 물자 징발을 통해 전쟁 수행 능력을 보충하는 식으로 조성된 일종의 '''체계화된 약탈체제'''를 구상한 것이기도 하다. 이 경우 이민족은 가혹하게 수탈해도 되지만 상대적으로 독일인을 돈 뜯지 않아도 된다는 개념이 대두되는 셈이니...일단 인종주의는 '''명분'''이고 그 안에서 실리를 취득하려고 한 거다. 뭐 간단히 말해 (국가가 주도한) 명분 있는 약탈 강도 살인 정도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애인, 집시, 동성애자를 학살한 부분은 대략 이런 구도다.
먼저 장애인의 경우 나치당은 이들에 대한 과도한 복지정책 등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즉 장애인들에 대한 복지 등으로 낭비되는 재원 등을 고려하면 이것은 사회적 병폐와 나약함을 키운다고 생각했던 거다. 즉, 나치당은 장애인이 도태되면 그들의 공동체가 '''건강'''해 진다는 발상을 가졌던 거다. 이는 인권의 개념이 없던 고대에서는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거나 후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게 된 구성원을 추방하거나 죽이는 경우가 있었고 사람을 인권이나 생명보다는 노동력이나 자산의 개념으로 보던 고대의 이야기며 종교가 나타나는 기원전부터 인권과 생명의 가치는 추구되기 시작했다. 근데 홀로코스트는 그런 논리가 정당화될 고대가 아니다...
집시의 경우 유대인과 비슷하지만, 집시에 대한 관점은 좀 더 '''전통적인''' 개념에서 기인한다. 즉, 유대인들의 경우는 극좌화된 성격을 가졌던 이들의 일종의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증오의 성격이 있었다면, 집시에 대한 개념은 거의 '''극우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면 된다.
동성애자들은 대략 "전통윤리적" 개념을 가지고 이뤄진 학살이라고 보면 된다. 위의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나치당의 개념은 '''우생학적으로 우월한 아리안 인종'''을 번식하는 개념으로 정리되는데, 동성애자들은 당연히도 "번식" 자체의 행위를 피하는 '''부도덕'''으로 본 거다.
즉, 사실은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의 학살이 개념 구분되는 이유는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매개로 한 반면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각한 아이러니는 외려 나치당원이라는 사람들 중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즉, 극좌적 발상으로 유대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는 개념을 수반하긴 했지만, 반대로 실상을 보면 이건 부르주아 계층이 같은 부르주아 계층을 좌파 논리로 깎아내렸던 개념과 연관성이 생긴다.
이러한 모호하고 모순적인 증오에 대해 '좌파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 자본가에 대한 증오 때문에 유대인을 증오하고, 우파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 혁명가에 대한 증오로 유대인을 증오한다'는 표현이 유명하다. 이에 대해서 명확히 이해하려면 근대의 유럽에서 도시 시민(부르주아) 계층은 자본가의 산실인 동시에 지식인 혁명가의 모태이기도 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급속한 공업화로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도시로 인구와 사회적 영향력이 집중되었고, 도시 시민들이 새로운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 것. 말하자면, 기존의 농업 지주를 대신하여 도시의 공업, 금융자본가들이 경제적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도시화한 시민사회 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영향력을 넓히게 된 것. 그런데, 유대인들의 경우 토지 소유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고 배타적인 농촌 공동체에 편입하기는 어려웠기에 이전 시대부터 도시에 자리 잡고 사는 이들이 많았고, 따라서 도시 시민이 사회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면서 유대인들의 사회적 영향력 역시 성장했다. 즉,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 자체는 중세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고, 이러한 혐오가 부르주아(원문 그대로의 의미로써 부르주아, 즉 도시 거주 시민) 계급이 성장하여 사회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유대인들이 사회를 장악하고 사악한 음모를 꾸민다'는 망상의 형태로 다듬어진 것.
즉, 유대인과 집시/장애인/동성애자들과의 개념적인 구분은 약간 다르다.
이에 대해 라울 힐베르그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라는 책을 증거로 "홀로코스트가 본격화 되기 이전인 30년대 말 괴벨스의 선동으로 벌어진 유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행위조차도 독일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고 했으며. 즉 홀로코스트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더 덜 조직적이고 심지어는 온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조차도 독일 경제에는 이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한 "토지를 차지하기 위한 학살과도 그 궤를 달리하며, 경제 활동의 기반이 되는 "토지"를 가장 적은 비용으로 차지하기 위해 그 토지의 기존 거주자들을 학살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학살이 하나의 수단임을 의미하는데,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확실히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였다"고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대해선 햇갈리지 말아야할 부분이 있다.
나치의 경제 계획은 국유화를 통하여 통제 경제적인 방향을 조장하여 전시 대비에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결론적으로 실패한 경제 정책인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반론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결과"지만 당시 나치정권 자체는 그 "결과"에 대해서 '''몰랐다(...)'''. 즉, 유대인들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일종의 '''환상''' 때문에 그걸 다시 "독일인에게 빼앗아 주면"된다고 생각한 문제인 거다. 또한 후자의 경우 토지에 대한 '''명분'''을 가진 '''인종주의'''적 학살이라고 보면 된다. 즉, 홀로코스트가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보이는 이유는 그 수단을 종합적으로 써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뒤집어 말하면 그 안에도 '''영토 획득을 하면서 벌어진 인종주의적 관점의 학살행위'''와[23] , '''인종 그 자체를 학살하던 행위'''라는 점으로 나눠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겠다. 게다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나치는 애초에 "우월한 아리아인종"의 씨를 받겠다고 일종의 짝짓기를 시켜먹은 전례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또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상 나치당의 정책 자체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당내의 좌파적 성격을 지닌 SA출신 집단 등의 계보를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만 뭔가 '''증오의 타겟'''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유대인이 특별했던 거다.
물론 후대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독일이 유대인들을 탄압한 것 자체가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므로 경제적 이유로 유대인 학살의 이유는 없었다"는 결과론적 관점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애초에 실패한 경제 정책의 경우 그것이 실패할 줄 알고 저지르는 예는 거의 없다.
5. 원인
또한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간단히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과대망상에 가까운 혐오와 증오 탓'으로 치부하고, 또한 그렇게 치부하기를 원하나, 홀로코스트의 정확한 원인과 이유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거리일 것이다.[24][25]
우선, 홀로코스트는 나치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제2차 대전 당시 나치군 점령지에서 유대인들을 솎아내는 과정에서 나치군 점령지의 사람들은 대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일부는 직접 나서서''' 유대인들을 고발하기도 했다.[26] 유대인, 집시, 장애인들을 향한 유럽인들의 혐오와 불신은 뿌리깊은 것이었고 비단 나치 독일만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편적인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독재하에서 잔인한 방식으로 표출된 것뿐으로, 유대인을 향한 혐오 자체는 유럽 내의 어느 국가든 존재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거주구역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나눠주는 것에 아주 찬성하였으며, 유대인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도 그저 방관했다. 대학살은 절대 비밀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자랑스럽게 광고해대지만 않았을 뿐이지 시골에서 소식도 안 듣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구든지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저 유대인이 싫어서, 또는 포상금이나 유대인들이 가진 재산이 탐나서 유대인들을 고발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나치당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들도 홀로코스트의 공범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중세까지는 그리스도교의 영향[27] 이 있었고, 근대에는 만민평등사상이 널리 선포되어서 각종 제도적 차별이 철폐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짐과 동시에 국민국가의 등장, 산업화에 의한 사회변화가 맞물려서 반유대주의가 인종주의적이고 강경한 형태로 부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이 종교와 맞물린 형태라면,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같은 경우에는 근대적인 형태, 폴란드, 러시아의 포그롬은 양자가 복합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반유대 감정의 유구한 전통에 대한 어록이 있다.
또, 나치가 행한 잔혹행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는 많다.처음에 중세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유대교 신자인 이상,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그 다음에, 세속 세계 지도자들은 선언했다.
'너희들은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너희들은 살 권리가 없다.' '''
라울 힐베르크
위의 '경과'에 언급된 치안유지군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치안유지군은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저질렀지만 '''치안유지군의 구성원들은 열성적인 나치 추총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는 평범한 소시민 출신이었다.''' 학살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나치라서, 혹은 대상이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학살수용소로 다시 시점을 돌려서 생각해보자.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그 목표달성에 필요한 전체적인 계획도 무질서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 "만약 유럽 내외의 국제 유대인 자본이 또 다시 민족들을 세계대전으로 몰아 넣는 것에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의 유대민족의 섬멸이 될 것이다!"(Wenn es dem internationalen Finanzjudentum in und außerhalb Europas gelingen sollte, die Volker noch einmal in einen Weltkrieg zu sturzen, dann wird das Ergebnis nicht der Sieg des Judentums sein, sondern die Vernichtung der judischen Rasse in Europa!) - 히틀러 1939년 1월 30일 독일의회 연설
- "유대인들은 우리가 섬멸(vernichtet)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1918년 11월 9일(1차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한 날) 자신들이 저질렀던 행위에 대한 대가를 모면할 수 없다. 이 날의 대가는 치러져야 할 것이다." - (DGFP pp. 190-95) 히틀러가 1939년 1월 체코 외무장관 프란티셰크 흐발코프스키(František Chvalkovský)에게 보낸 편지
- "유대인의 특권을 없애는 합리적인 반유대주의가 필요하며 이것의 최종적 목표는 유대인의 완전한 제거(Entfernung)이어야 한다." - 히틀러의 1919년 9월 16일 편지 Werner Maser, Hitler’s Letters and Notes(New York, 1974), p.214.
- 독일 민족운동의 최종 목표와 임무, 또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서 보자면, 이는 기생충이나 다름없는 동유럽의 유대인들을 철제 빗자루로 모두 쓸어내는 것이다. 이 일은 완벽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Volkischer Beobachter 1922. 3.10
- 법과 질서의 대명사인 우리 정부하에서 살육을 통해 다른 모든 범죄자들을 기어코 소탕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는 유대인 천민 집단을 말살시켜야 하는 중대한 필요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독일에서 유대인이 실제로 그리고 남김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 곧 절대적 절멸이어야 한다." Das Schwarz Korps
- 1938.11.24 나는 치안군 제3연대가 리투아니아 유대인 문제의 해결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에는 더 이상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을 위해 살려둔 근로 유대인은 샤블리에 약 4,500명, 코브노에 약 15,000명, 빌나에 약 15,000명 정도 존재한다. 나는 이들 역시 몰살시킬 것을 원했다. 잔존해 있는 근로 유대인들은 부득이하게 필요한 사람들이고 내 추측으로 이 인력은 이번 겨울이 지나가도 계속해서 절실하게 쓰일 것이다. 유대인의 번식을 막기 위해 근로 유대인 남성들을 즉각 거세시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여성이 임신하게 된다면 그녀는 제거되어야 한다." K. Jager 1941, 12.1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일반적으로는 학살, 절멸이라는 단어보다는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이라는 단어를 선호했으며, 그 해결에 필요한 방법도 독소전이 발발하기 까지는 추방과 절멸 사이를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독일 정권 내에서는 1941년까지 유럽 내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추방하여 비시 프랑스가 관리하는 '''마다가스카르로 이주시키는 방안'''이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논의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해상봉쇄라는 타파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서 유야무야된다. 독소전쟁이 진행되는 중에도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 있다면 우랄산맥 너머로 추방한다는 계획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이나 호주 역사에서도 보듯이 원주민들을 환경이 척박한 지역으로 내몰아 버리는 것도 학살이 되는 경우가 많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게토와 강제수용소라는 결과물을 낳았다는 것은 중요한 원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이후 유대인의 처우에 대해서까지 그러한 생각을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게토로 몰아넣었지만 그 이후 뒷처분에 고심한 것은 히틀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유대인을 관리해야 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적절한 수단"으로 대표되는 히틀러의 추상적인 명령과 유럽에 만연하던 반유대주의 그리고 잘 형성된 관료체제에서는 '''책임을 추궁할 대상이 애매해진다는 점''' 속에서[31] 피상적인 명령에 대한 '''효율적'''인 대응은 점차 광기에 찬 학살행위로 바뀌어갔다.[32] 이 때문에 학살 자체의 시행과 그 지향점에 대해서도 모순된 점이 자주 발견되는데, 가령 독일에서 절대적인 노동력의 부족으로 러시아의 전쟁포로들마저 군수공장에 투입되는 상황에서조차 유대인들을 노동력으로 쓰려는 시도조차 없었으며, 그들을 향한 "효율적"(살육의 방법 면에서)이면서 "비효율적"인 살육(귀중한 노동자원의 살해)은 멈추지 않았다.[33] 일례로 독소전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과정에서도 동부지역에서 유대인을 수용소로 이송하기 위한 열차들은 중요한 '''군수물자의 수송보다 우선 순위'''에 있었다. 이는 유대인 학살의 구조적인 문제 이외에도 나치 독일의 각부서간의 상호경쟁이 심화되어 서로가 우선 순위를 놓고 다투면서 생겨난 문제이기도 하다.이 학살 공장을 돌아가게 한 것은 반유대주의 신념에 찬 나치 수뇌부 관료들만이 아니었다. 내무부, 외무부, 법무부, 경제부, 재무부, 교통부, 체신부, 동유럽부, 선전부 등 거대한 독일 관료 기구 전체가 이 절멸 정책을 구상, 준비, 실행하는 데 참여했던 것이다. 법무부는 학살당할 유대인의 범위를 정의했고, 경제부는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해 파괴의 그물에 걸려들기 쉽게 했으며, 내무부는 절멸수용소로 이송될 유대인을 포획했다. 또한 교통부 산하의 제국철도는 전 유럽의 유대인을 절멸수용소로 이송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따라서 독일의 공무원들은 정책을 입안하고, 법령을 통과시키고, 사무실에서 회의하고, 전화를 주고받고, 공문에 서명하고, 절멸수용소로 가는 철도 시간표를 짬으로써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엄청난 규모의 학살 과정에 가담한 셈이었다. 파괴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는 데에는 굳이 반유대주의 신념이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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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덕 외 23인 공저, 《서양사 강좌》제 22장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30]
, 576 ~ 577p, 아카넷, 2016.2.20
이후 이어진 모든 광기학살행위는 관료제의 결과물에 걸맞게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히틀러가 처음 굴리기 시작했던 작은 눈덩이는 반유대주의라는 눈밭에서 전시체제의 관료제라는 추진력을 통해 학살이라는 거대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6.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과 유대인 탄압의 시작
히틀러는 젊은 시절 반유대주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오스트리아의 빈에 머무는 동안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흡수했다. 그러나 인종론에 바탕을 둔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세계관이자 이념적 목표가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부터였다. 히틀러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뒤 당시 많은 독일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패전과 독일이 겪은 모든 수모의 책임을 유대인의 탓으로 돌렸다. 1919년 9월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할 무렵에 이미 히틀러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전문가로 불렸다. 이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내내 나치당의 반유대주의는 자주 물리적 폭력으로 표출되었고,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한 뒤로 나치의 극렬한 반유대주의는 단발적인 폭력이 아닌 일관성 있는 정책적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치가 패전과 혁명, 정치 위기, 극심한 사회적 빈곤을 초래한 것이 유대인이라고 지목하며,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자 독일 사회 내에서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갈수록 커져 갔다. 이러한 나치의 선전과 활동으로 인해 유대인은 유난히 부자가 많고 경제를 장악하여 해악을 끼치고 문화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고정관념이 날이 갈수록 확산되었다. 그 결과 유대인은 종자가 다르며 독일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유대인이라는 생각이 벌써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도 전에 널리 퍼졌다. 히틀러가 일단 정권을 잡은 후 나치의 반유대주의 구호는 그런 부정적 여론을 등에 업고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들었고, 줄기찬 선전으로 부풀려져서 독일의 모든 곳에 퍼졌다. 이로 인해 독일이 다시 부흥하려면 민족을 순화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유대인을 독일에서 내몰아야 한다는 생각이 호응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1919년부터 히틀러 정부가 추진해야 할 목표로 내세웠던 '''유대인 제거'''는 조금씩 실현 가능한 목표로 떠올랐다. 나치당은 히틀러 내각을 새우자마자 그 즉시 유대인 탄압을 시작했다. 그 시작은 1933년 4월 7일에 Gesetz zur Wiederherstellung des Berufsbeamtentums, shortened to Berufsbeamtengesetz전문(독일어) 법률 번역해서 직업공무원재건법을 공포하고 이 법률 3조에 따라 비아리안 공무원 즉 유대인 공무원들을 공직에서 추방한다. 법률안 통과 직전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이 법안에 반대하는 편지를 4월 4일에 히틀러 총리에게 보냈지만 히틀러는 거부하는 답신을 4월 5일에 보낸다[34] 그러나 힌덴부르크의 반대가 껄끄러웠는지 답신에 참전용사나 유가족은 추방하지 않겠다고 넣었고 법안도 그렇게 만들었다. 여기에 4월 22일에 발표된 이법의 시행령에 따라 유대인 의사들이 의료보험공단에서 추방당해 사실상 자격을 잃는다. 분명 공무원 법 시행령으로 민간 의사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은 분명한 월권이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1933년 4월 22일에는 유대인 특허 공증인을 금지하는 법이, 5월 6일에는 세무사를 9월 이후에는 변호사를 금지하는 법안이 차례대로 공포되었다. 유대인 예술인의 경우 나치 집권직후 괴벨스를 중심으로 선전부가 만들어졌고 1933년 9월 22일 선전부 산하에 제국문화회의소가 설립되어 여기서 독일의 예술활동을 총괄하게 되는데 한스 힝켈 같은 나치당원들이 문화회의소 총재로 군림하면서 유태인 예술가들은 독일 예술시장에서 추방당한다. 여기에 1933년 10월 4일에는 유대인 신문 편집자를 해고하는 행정명령이 발표된다.[35] 1938년 6월 14일에는 유대인들이 기업의 소유나 이사직을 금지하는 법안을 공포했고, 11월 12일에는 무조건 유대인 이사를 해고하는 법률을 공포한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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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돌격대’를 비롯한 나치당 과격파들이 저지른 유대인 박해는 특히 1933년과 1935년, 1938년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수정의 밤’으로 불리는 1938년 11월 9일과 10일에 벌어진 유대교 회당 파괴와 유대인 살해, 유대인 상점 습격은 반유대주의 폭력의 정점이였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인종 학살을 통한 유대인 절멸이 처음부터 목표는 아니었다. 반유대주의 폭력이 확산되고 갈수록 과격해진 것이나, 전쟁 발발 후 나치의 유대인 정책이 독일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영토 해법에서 1942년 1월 ‘반제 회의’를 거치며 대량 학살을 통한 절멸 해법으로 바뀐 것은 모두 나치 독일의 전형적인 '''누적적 급진화'''의 사례였다.1941년 7월 31일, 베를린
제국원수(Der Reichmarschall des Großdeutschen Reiches)
4개년계획부 전권 장관(Beauftragter für den Vierjahresplan)
국방위원회 의장(Vorsitzender des Ministerrats für die Reichsverteidigung)
공안경찰(Sicherheitspolizei) 및 보안대(SD) 최고책임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중장(Gruppenführer) 귀하
베를린
1939년 1월 24일 최적의 수단을 동원해 유대인을 이주시키고 추방하라는 귀하의 의무에 더해, 독일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유럽에서의 유대인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기 위해 발생하는 조직적이고 기술적이며 실제적인 문제에 관련된 모든 필수적 사항들을 준비할 책임을 귀하에게 부여한다.
정부의 다른 부처가 관련될 경우 그들은 언제든 귀하에게 협조해야 한다.
나는 귀하에게 우리가 바라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직적, 기술적, 실제적 수단들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 계획을 가까운 시일 내에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바이다.
괴링(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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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제국원수 괴링이 보낸 서한. 이 명령을 받은 하이드리히는 베를린 교외의 별장에 독일 정부의 각 부서 요인들을 초대하여 유대인 문제 해결법에 대한 회의를 비밀리에 열었다. 이 회의가 그 유명한 '''반제 회의'''다.
사실 히틀러가 별로 나서지 않았어도 반유대 운동은 저절로 번졌으며, 독일인들이 알아서 유대인 탄압을 이끌고 주도하고 밀어붙였다. 물론 거기에는 '''이것이 나치즘의 위대한 사명을 완수하는 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지도자의 뜻을 좇아 일하는 전형적 사례였다. 물론 사람들은 대개는 실리를 따져서 그렇게 했지만 유대인을 제거할 목적으로 나온 조치는 히틀러의 장기적 목표를 이루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히틀러의 승인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유대 차별의 급진화를 밀어붙인 조직이나 기관, 개인은 저마다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고 또 노리는 것이 있었다. 이것들을 모두 묶어내고 그럴듯한 명분을 주는 것이 인종 정화의 구상이었고 '''유대인 없는''' 독일 건설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 구심점은 지도자였다. 그래서 때로는 영향이 간접적이었을지라도 히틀러의 역할은 중요했다.
1942년 6월 초면 유대인을 서유럽에서 추방하는 사업의 틀이 갖춰졌다. 서유럽 유대인의 수송은 1942년 7월부터 이루어졌고, 대부분은 당시 가동되던 시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멸수용소가 있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이송되었다. '''최종 해법'''은 실행에 옮겨졌고 조직적 대량 학살은 거칠 것이 없었다. 1942년 말까지 친위대 자체 집계에 따르면 이미 4백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히틀러는 반제 회의에 관여하지 않았다.[37] 사실은 관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독일이 또다시 세계대전에 휘말려 든 이상 유대인은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고 1941년 12월 명백히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때쯤이면 지역 차원에서는 위에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유대인 살해에 앞장섰다. 그 중에서도 친위대의 핵심이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포괄적인 유대인 동부 추방령을 등에 업고 유대인 박해를 범유럽 차원의 학살극으로 확대했다.
7. 경과
- 1933년. 나치당이 집권.
게슈타포에 의한 동성애자 사냥이 시작됨.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체포된 동성애자만 10만 명, 그중 5만여 명이 일반 교도소로, 1만 5천여 명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동성애자 중 60%가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4월, 유대인 상점에 대한 보이콧이 시작.
6월, 유대인이 모든 공직에서 추방. 강제수용소 및 노동수용소의 설치가 시작.
-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 시행.
- 1936년.
- 1938년. 11월 9일 유대인 대박해(크리스탈의 밤. Kristallnacht, 혹은 포그롬 Pogrom) 시작.
- 1939년. 2차대전 발발
정신적 육체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강제적 안락사. 병원 등에서 치료를 목적으로 온 장애인들을 무작위로 안락사. 장애의 정도, 종류에 관계없이 이루어짐. 부모나 보호자에게는 어떠한 설명도 이뤄지지 않았음. 총 희생자 수 약 20만 명. 이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추정한 수치이다. T-4 프로그램은 1941년에 중단되었는데 정확한 원인은 불분명하다. 명목상으로 보면 이 문서와 큰 관련이 없는 것 같이 보이나,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인력이 41년 이후 홀로코스트에 참여(특히, 노약자들 골라내는 것)했으며 인종차별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한다.
- 1940년. 게토실시.
현지인들은 유대인 이주에 직/간접적 협력. 게토에 대체로 호의적.
당시 유럽인들의 유태인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오를레앙 괴담 문서 참조.
친위특무대(Einsatzgruppe)의 학살 시작.
소련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죽음수용소가 가동되기 전까지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38] 아래 유대인, 소련인, 폴란드인을 대량학살. 이틀 만에 3만 명이 살해된 경우도 존재. 총 160만 명 살해.
최초의 학살수용소가 12월 헤움노(Chelmno)에 세워짐. 이어서 7곳으로 확대되었다. 이곳은 산업적인 방식으로 대량학살이 시행되었다(강제수용소/노동수용소와 다른 방식). 독가스를 통한 샤워실 학살이 이루어진 곳. 일반적인 살해방식에 의한 학살도 여전히 자행된다. 이곳을 비롯한 주요 절멸수용소들에서만 총 300만 명이 학살당했다.
- 1942년 초. 반제(Wannsee) 회의. 홀로코스트 전면실시. Endlösung(최종 해결책)이 채택되다. 7월, 게토에서 학살수용소로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짐. 베우제츠 절멸수용소를 필두로 학살수용소 본격적으로 가동 시작. 종전까지 가동된다.
- 1944년 죽음의 행진 시작.
- 1945년 패전
8. 가스실
나치는 살해대상들을 '''"정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살인법처럼 주로 구덩이를 파고 총살을 시켰다. 하지만 이 방법은 곧 한계에 다다르게 되는데 전쟁 통에 귀한 총알을 사형에 쓰느라 낭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에 수십, 수백 명을 쏴 죽인 SS대원은 PTSD 증상을 호소했고, 지휘부는 이들의 고충을 받아들여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바로 가스였다. 이 가스형을 생각하게 된 동기가 무시무시하다. 발터 라우프(Walther Rauff)[41] SS대령이 한적한 교외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잠을 청했는데 시동 끄는 것을 깜빡 잊었고, 문득 잠에서 깨보니 배기가스에 중독되어서 사지가 굳어 있어 꼼짝 못하고 죽을 뻔 했는데 정신이 아득한 상황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탈출하고 이 경험을 토대로 가스형을 개발했다. 최초의 가스실은 배기가스의 일산화탄소를 이용한 방식으로, 지하실 같은 밀폐된 공간에 수감자들을 가두고 꼼꼼히 빈틈을 막은 후 자동차 배기구에 호스를 달아 지하실에 연결한 뒤 열심히 공회전을 돌려 일산화탄소를 발생시키고, 산소부족으로 질식해 죽은 사체를 처리하는 방식이 한동안 유지되었다. 이것이 '''S트럭'''이라고 불린 처형 방식이다. 나치의 6개 절멸수용소 중 트레블링카[42] , 헤움노[43] , 베우제츠[44] , 소비보르 절멸수용소[45] 에서는 1944년까지 이 수용소들이 모두 폐쇄될 때까지 일산화탄소 중독을 주된 처형방식으로 이용했고, 후술할 '치클론 B방식'을 도입하지 않았다. 이 수용소들은 곧 트럭을 쓰지 않고 가스실에 거대한, 고정된 엔진을 부착했고 갖가지 연료(주로 석유)를 이용해 엔진을 공회전시켜 희생자들을 질식시켰다. 이 4개 절멸수용소에서 약 200만 명이 사망했다.1942년 6월 5일 베를린.
제국 기밀 업무(Geheime Reichssache)
현재 사용중이며 생산중인 특수차량(spezialwagen)에서 개선해야 할 사항.
1941년 12월 이래로 세 대의 특수차량을 이용해 97,000명을 ''처리''했고 차량에 별다른 결함은 없었음. (중략) 이전의 사례들로 판단컨데, 다음의 사항들이 개선되면 좋을 것임.
1) 과잉압력을 막고 일산화탄소가 빠르게 퍼지게 하기 위해 차량 후방 벽면의 위에다 10x1cm의 구멍을 뚫을 필요가 있음. 압력 과잉은 밖에서 이 구멍을 막는 덮개를 여닫음으로써 조절할 수 있음.
2) 통상 적재 시 평방미터 당 9~10명임. 사우러(Saurer) 사[40]
의 더 커다란 차량에도 그리 많이 적재하진 않음. 과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적재 시 비포장도로를 주행할 때 차량 안정성에 문제가 있음. 적재공간의 축소가 필요해 보임. (중략) 이를 위해 지금껏 했던 것처럼 ''화물''의 양을 줄여선 안됨. ''화물''의 양이 줄면 남는 공간에도 일산화탄소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가동 시간'이 늘어나게 됨. 반면 적재공간이 줄면, 공간이 완전히 ''화물''로 가득찬 상태이므로 '가동 시간'을 줄일 수 있음. 제작자들과의 회의에서 적재공간을 줄일 경우 무게중심에 문제가 생겨 앞 차축에 과부하가 걸릴것이라는 주장이 나왔으나, 사실 적재공간의 ''화물''들이 ''가동 중에'' 언제나 뒷문으로 몰리기 때문에 무게중심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수 있음. 따라서 앞 차축 과부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음.4) 차량 내부 청소를 쉽게 하기 위해 바닥 중앙에 밀봉된 배수구를 설치해야 함. 배수구의 지름은 20~30cm로 하고 여기에 사이펀을 설치해 '가동 중에' 액체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해야 함. 파이프 위에는 거름망을 설치해 오물에 의해 막히는 것을 방지해야 함. 큰 오물들은 가동 후 차량을 청소할 때 배수구의 뚜껑을 열어 제거할 수 있음. 적재공간의 바닥은 중앙을 향해 약간 기울도록 해서 오물들이 중앙으로 모아져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함.
6) 적재공간 내 램프를 더 철저하게 보호해야 됨. 램프에 철망을 씌워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함. 램프는 필요 없다고 없애버리자는 말도 있음. 하지만 관찰 결과, 문이 닫히려 할 때 깜깜해지기 시작하면 ''화물''들은 언제나 문을 밀치고 나오려 하기에 문을 닫기 어려워짐. 이는 화물들이 어둠 속에서 조금의 빛이라도 드는 곳으로 향하려 하기 때문임. 또한 어둠으로 인한 공포로 ''화물''들이 소음을 일으킴. 따라서 가동 초기엔 램프를 켜 두는 것이 더 적절함. 또한 야간 운영과 차량 내부 청소에도 도움이 됨.
상기한 사항들은 수리를 위해 입고될 경우에만 적용될 것임. 이미 주문한 10대의 사우러(Saurer) 사 차량들에는 가능한 한 개선이 이루어질 것임. 제작사는 회의 때 사소한 몇가지를 제외하고 개조가 당장 이루어지긴 어렵다고 함. 따라서, 10대 중 최소한 한대의 개조를 위해 다른 제작사를 알아본 결과 호헨마우트에 있는 회사가 적격이라고 제안함. 현 상황에서 이 차량의 개조엔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임.
II D 부서장 SS 상급돌격대지도자 발터 라우프(Walter Rauff)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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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움노 절멸수용소에서 베를린의 가스실 총책임자 발터 라우프에게 자신들이 사용 중인 학살용 가스 트럭의 개선점을 보고한 서한. 서신 전문, 독일어 원문
가스실을 이용한 학살은, ''효율적''인 학살방법으로 평가되었는데, 이때 등장한 아이디어가 '치클론 B를 이용하자'라는 것이었다. 치클론 B는 밀폐된 공간에 터트려서 방역을 하는 살충제로, 당시 독일 국방군은 마구간[46] 방역용으로 I.G 파르벤에서 대량의 치클론 B를 납품받아서 석유보다 공급이 넉넉했다.[47] 어찌되었든 치클론 B는 매우 치명적인 독가스였고, 1941년 9월 3일 아우슈비츠 1번 수용소 11번 구역에서 회스 수용소장 등이 참관한 가운데 600명의 소련 포로와 250명의 민간인 수용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치클론 B의 치명성을 본 나치들은(출처:The Encyclopedia of the Holocaust 1권 p113, Jozef Buszko) 이전에 쓰던 배기가스식 가스실보다 더 싼 값에 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었다.
한편 치클론 B는 절멸수용소에서 널리 쓰인 것은 아니어서 아우슈비츠(희생자 110만~120만), 마이다네크 수용소(희생자 최소 8만)에서만 사용되었다. 전쟁 중기 이후 치클론 B의 납품이 대규모로 가능했음에도 각 수용소마다 가스실의 작동방식이 달랐고 그것을 바꾸기 싫었던 수용소장들은 기존의 일산화탄소 방식을 고수했다. 루돌프 회스의 표현에 따라 ''덜 효과적인'' 일산화탄소를 이용하는 절멸수용소들은 대부분 1944년 이전에 폐쇄되었고, 남아있던 절멸수용소들, 더 ''효과적인'' 치클론 B를 쓰는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는 1944년 7월까지, 아우슈비츠에서는 1945년 1월까지 학살을 지속했다.
여담으로 독일 언론들은 수용소에 대량의 방역용 약품이 공급되는 것을 보고 나치 수용소가 정말 '''위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고 기사를 쓰는 짓을 저질렀다.
8.1. 절멸 수용소
독일 영내
독일 점령지 수용소
- 폴란드지역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노동 및 절멸수용소
-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 헤움노 절멸수용소
-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
- 말리 트로스테네츠 절멸수용소
- 바르샤바 노동 및 절멸수용소
-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
-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 야노프스카 노동 및 절멸수용소
-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 독립국)
8.2. 노동 수용소
독일 영내
- 부헨발트 수용소 - '부헨발트의 붉은 마녀'로 악명높은 일제 코흐가 이 수용소의 간부중 하나였다.
- 다하우 수용소
- 베르겐-벨젠 수용소
- 플로센뷔르크 수용소
- 그로스-로젠 수용소
- 힌체르트 수용소
-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 구젠 수용소 [48]
- 미텔바우-도라 수용소
- 나츠바일러-스트로토르프 수용소
- 노이엔감메 수용소
- 라벤스브뤽 수용소
- 작센하우젠-오라녠부르크 수용소
-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 헤르초헨부쉬 수용소
9. 전후 반응
하나도 놀랄 것 없이 종전 직후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는 서서히 잊혔다.'''
이만큼 거대한 사건이 그토록 쉽게 잊힐 수 있다는 것은 얼핏 충격적이고 이상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 한국전쟁이나 4.3 사건 당시에 그토록 무수한 학살을 겪었으면서도, 막상 우리가 기억하는 학살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단순화되어 있지 않은가. 무수한 학살이 이뤄졌던 많은 장소들은 현재 평범한 아파트 단지이거나 시가지의 일부가 되어 있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장소에서 학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예를 들어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 당시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던 폐광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되지 않아 완전히 잊혔고, 인근 대학생들이 MT때 공포 체험용으로나 쓰는 담력훈련장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전후 유럽 전체에서 일어난 것이다. 전쟁은 많은 사람을 죽게하고, 한국전쟁이나, 2차대전 처럼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죽어나간 전쟁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의 상처를 잊고자 한다. 전쟁의 많은 면들이 연구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학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비록 민간에서의 연구에 국한되며 전범재판 등을 위한 사실파악은 꾸준히 이뤄졌지만, 이렇게 얻어진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도, 알려지게 할 의지도 없었다. 서서히 음지로 묻혀가던 학살의 기록들에 대한 관심을 되살린 것은 학살수용소에서 생존한 생존자들이 직접 제작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그리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역사가들 덕분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동 각국의 친소련화가 심화되고 미국의 대 중동전략이 변화되면서 이스라엘의 중요성이 강화되자 홀로코스트는 새로운 조명을 받았다는 해석도 있다.[49]
한편, 유대인 학살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이 집중됨으로서 다른 학살들이 외면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비난도 존재한다. 당장 2차대전 당시에 소련인들은 약 3000~4000만, 중국인들은 약 2300만이 죽었다. 또한 서유럽에서도 엄청난 인구가 죽었다. 유대인들은 대체로 600만이 죽었다고 추산되는데 대중은 유대인 학살에만 관심을 갖지, 더 많은 수가 죽은 그 이외의 학살이나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유태인 홀로코스트만큼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당장에 2차대전 하면 딱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만,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이나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볼라 학살, 네덜란드의 대기근, 노르웨이의 레벤스보른 사건을 떠올리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50]
비단 제2차 세계 대전뿐만 아니라, 예컨대 미국 워싱턴에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을 개관할 때 미국 원주민들은 그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정작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그들을 학살한 땅 위에 건설된 미국이 그에 대한 기억은 배제하면서 멀리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추모한다는 것은 위선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학살은 외면하고 오직 유대인 학살만을 강조하는 경향에는 미국 언론의 영향력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언론들의 절대다수가 유대계이며 이들은 당연히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만을, 그것도 '''유대인이 죽은 사실만''' 강조했다. 유대인의 3~4배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던 소련과 중국이 미국의 주요 적국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성향을 더욱 더 부채질했으며, 결국 우리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벌인 학살이라고 하면 홀로코스트'''만'''을 떠올리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고 말았다.
한편 사상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고도로 합리적인 관료 체계,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독일에서 이러한 기술을 활용하여 산업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학살하였다는 사실은 유럽 여러 학자들의 문제 의식을 자극하였고,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51] 로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목표의 정당성을 생각하지 않는 도구적인 합리성과 이성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하는 작업을 수행하며 유명한 저서를 다수 남겼다. 계몽의 변증법이 그 중 하나이다. 이것이 사회 교과서에서 나오는 실질적 법치주의와 형식적 법치주의의 예시, 뉘른베르크 법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었는가에 관련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이외에도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 문제로 이후에 체포된 아이히만 공판을 보고 기록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이는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를 낳으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일으키게 된다.
일부에서는 홀로코스트가 과대평가되었다는 비난도 있다. 그 중 한 가지 원인은 동구권의 몰락인데, 얼핏 듣기에는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동구권의 몰락은 유대인 문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동독이 대표적인 경우지만 이들은 반나치즘을 국시처럼 내세우면서 유대인 학살 문제 등을 과장하면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희석시키려던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동구권 몰락 후 아우슈비츠의 희생자 수가 30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가[52] 정정되는 등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나치즘의 반공산주의적 측면이 부각되면서 일부에서는 재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착각하지 말것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네오 나치가 아니다.이들 역시 네오 나치와 나치가 행한 여러 만행에 대해선 의견을 같이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정확한 수치가 알려진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 독일의 여건 등을 고려해보면 이와 같은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 다른 비판으론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국가들도 제노사이드를 행했는데 나치의 유대인 학살만 들먹이냐는 내용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 대규모 식민제국 외에도, 그 작은 벨기에조차 콩고에서 고무 등의 자원확보 과정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 보다 더 많은 1천 5백만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그 외에도 소련, 중국, 터키, 폴란드, 이라크, 이란, 스페인, 포르투갈, 몽골, 북한, 이스라엘 등에서 제노사이드가 발생해왔다. 상기한 워싱턴 홀로코스트 기념관 설립식에서 미국 원주민에게 행한 만행들은 사과하지 않고 유대인의 아픔을 기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던 외침은 쉽게 묵살할 것이 못 되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에 대한 강제이주 및 학살에 대한 범죄를 갖고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 소련도 아무리 못해도 2,000~3,00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어느 팔레스타인 역사학자는 "현재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만 들먹이며, 정작 나치처럼 학살한 자신들의 과거는 합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결과의 이유로는 가해국과 피해국의 선진국 여부와 세계적 영향력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홀로코스트의 주요 피해자 중 하나인 유대인은 미국에서 강한 경제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으며, 대영제국이나 프랑스 식민제국 등 여러 굵직한 식민제국들은 현대에도 선진국이거나 강대국으로서 강한 지위를 행사하는 반면 피해국들은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곳도 많을 정도로 현대의 약소국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지위도 낮고 국력도 약하니 조명을 받지 못 하는 것.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당사자들이었던 독일도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사과한다고 하지만 나미비아 문제에 대해서는 입 닦고 회피하려 들고 있기도 하고. 쉬운 이해를 위해 유럽에 무슨 나라가 있는지, 아프리카에 무슨 나라가 있는지 각각 나열해보자. 전자가 훨씬 쉽지 않은가? 사실 이것만이 아니라도 선진국에서 일어난 일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나라에서 일어난 일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역사에 가지는 의미를 고려한다면 확실히 잊지 말아야할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우린 홀로코스트와 함께 문명과 진보의 이름으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수 없이 많은 다른 학살 역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폴 포트나 천안문 사태 등이다.
동성애자들은 독일에 남아있던 동성애자 처벌법(소도미법 또는 계간죄)인 형법 175조로 인해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해방되자마자 다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것도 나치가 모았던 정보를 토대로 말이다. 독일 형법 175조는 1969년이 돼서야 사문화됐고 1994년이 돼서야 공식적으로 형법에서 삭제되었다. 2002년이나 돼서야 독일 정부는 동성애자 커뮤니티에게 사과했고, 형법 175조에 의한 피해자 구제는 2016년 현재 진행형이다.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옆에 가면 1만 9073㎡의 부지에 콘크리트 비석 2,711개가 설치된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가 있는데, 동성애자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길 건너 티어가르텐 한가한 구석에 코딱지만 하게 설치되어있다.[53]
또 한 가지, 홀로코스트에 대해 보이는 일부 유태인들의 입장 역시 씁쓸한 면이 있다.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 건립 당시 추모비에는 홀로코스트로 인한 희생자의 숫자가 1,000만 명으로 기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미국 내에 거주하는 유태인들[54] 의 강경한 반대로 인해 결국 해당 추모비에는 희생자가 600만 명으로 기재되었다. 문제는 1,000만 명과 600만 명이라는 희생자 수의 차이가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모든 사람'''의 수를 합친 경우와 '''유태인''' 희생자의 수에 한정한 경우의 차이라는 것. 즉, 미국의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의 추모비가 유태인뿐 아니라 폴란드 등의 슬라브인 및 전쟁포로들, 집시들, 동성애자, 장애인, 나치에 반항한 항거자[55] 등 모든 희생자를 기리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유태인만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2016년 현재 모든 희생자를 언급하고 명시되어 있다. 이건 와전된 이야기 아트 슈피겔만의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도 인종차별적인 면모를 보이는 미국 거주 유태인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바 있고, 이 일화를 국내에 소개한 한양대학교 사학과 임지현교수 역시 이런 유태인들의 배타적 태도를 비판한 바 있다. 또한, 임 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유태인들의 배타적 태도가 반드시 외부 집단에 한정되었던 것도 아니고, 시오니즘 운동에 참여하여 팔레스타인에 이주했던 유태인들이 전후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에서 유럽에 잔류했다가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태인들에 대하여 보인 우월의식에 대하여 비판한 바도 있으니 참고할 만 하다.
그래도 독일 의회는 매년 1월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초청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연다.
10. 일부 시오니즘 과격파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오류
당시 시오니즘에 입각하여 이스라엘의 건국을 주장하던 유대인 중 일부 과격파는 이 학살을 동조, 호의적으로 평가해서 묵인했다. 그들에게 홀로코스트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유대인 국가 건국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유대인들을 이주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게 최악으로 발현된 것이 어떤 것이냐면, 나치와 시오니즘 지도부가 협력관계를 구축한 사례들이다. 다만,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직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밝혀지기 이전이었으므로 유대인의 학살이 아닌 추방을 지지한 경우였다.[56]
우선 1941년 1월 11일 이츠하크 샤미르는 '''시오니즘 군사조직 아르군과 독일 나치 사이의 군사협약'''을 제안한다. 이것은 위에 쓴 대로 나치의 목적이 유대인의 학살이 아닌 추방이라고 생각한 점도 있었지만, 이스라엘 건국의 가장 큰 걸림돌이 영국이라고 생각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 지방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은 가장 큰 적이었고, 마침 영국과 적대적인 데다가 유대인들을 추방시키고 있다고 믿었던 나치는 자연스러운 동맹 대상이었다.
샤미르가 보낸 편지는 나치에게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스라엘 독립 활동(게릴라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의 유태인을 팔레스타인으로 추방하고 물자를 지원해 주면 이스라엘이 나치 독일의 우방이 될 것임을 명시했다. 나치는 이 편지를 무시했지만, 샤미르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7대 총리가 된다.유럽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것은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독일의 계획에 따라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과 유대인의 진정한 민족적 열망 사이에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다.
- 이츠하크 샤미르
또한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은 전부가 죽는 것보다는 소수(특히 건강한 젊은이와 유명 인사)라도 살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나치와 협력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도 엄청난 논란이 일어날 게 뻔한데, 이쪽은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킨 격이니 더욱 문제점이 크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일화로, 194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유대인 위원회 소속 카스트너는 나치의 아돌프 아이히만과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의 내용은 1,000여 명의 유대인을 살려주는 대가로 많은 돈을 지불한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이게 왜 문제가 되나 싶지만, 카스트너는 나치로부터 이 '''정확히 1864명의 유대인을 살리는 대가로 대부분의 나머지 80여만 유대인들의 학살을 묵인했다. 즉, 유대인들에게 수용소로 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카스트너 자신부터가 유대인이었으므로 자기를 포함해서 모든 유대인들이 죽는 것보다는 일부라도 살리는 것이 나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카스트너 자신이 말하기로도 저명한 유대인들[57] 과 젊고 건강하며 일을 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43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죽도록 놔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치에게 이 유대인들의 목숨값으로 지불하기로 한 돈을 조달하기 위해서 카스트너는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들 중 150여 명의 부자들에게 경매를 통해서 학살을 피할 수 있는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권리를 팔았고, 이 돈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협약의 내용이 알려지기 전에 카스트너는 이스라엘 정계에서 홀로코스트로부터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이 사실이 폭로되자 이스라엘의 법원에서 "악마의 계약을 체결한 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뒤 1957년 유대인 극단주의자에게 피살당한다. 비록 카스트너가 죽은 후에 상위 법원에서 그를 무죄로 고치긴 했지만, 이미 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진 뒤였다.
11. 전후 비판
홀로코스트란 역사적 사건은 분명 다시는 있어선 안 될 참극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홀로코스트를 산업화 시켜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사용한다는 비난 여론도 나온다. 미국 유대인 로비 단체들이 학살된 유대인들의 유럽은행 예금이나, 몰수된 재산과 미술품 등에 막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해 받아내 상당액수를 유용하거나 하는 문제가 지적된 바 있다. 한국에서도 출판된 <홀로코스트 산업>을 보면 지은이 노르만 핀켈슈타인[58] 또한 조부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유태인임에도,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들먹이며 일부의 배만 채운다고 강력하게 비난하며 여러 자료를 내보이고 있다. 게다가 홀로코스트를 핑계삼아 이스라엘을 건국한 시오니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하는 짓도 결코 좋게 봐줄 수 없다. 더욱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미국의 언론을 주도하는 세력이 유대인이기에 이 점을 고의적으로 우회하고 그들의 적인 아랍인의 잘못만 들춰서 비난하는 여론 조장에도 상당한 한몫을 한다. 실제로 이 홀로코스트 악용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은, 2차대전 이후의 반유대주의에겐 핑계거리가 되었다. 반유대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 부인론을 짖어대는 근거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팔레스타인 문제와는 또 다르다. 역사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느냐 아니냐가 문제이다.''' 유대인은 전자이고, 팔레스타인은 후자다.(이스라엘은 전자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 중에서도 '역사적인 진실을 법적인 진실로 만들 필요가 없다'라며 반홀로코스트 부정법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11.1. 홀로코스트 허구설
홀로코스트는 수용소를 해방시킨 연합군에 의해 상세히 조사되었다. 생존자들의 증언, 수용소 해방 당시 미군, 소련군이 촬영했던 영상 필름, 유럽 전역에서 체포된 수용소 근무자들의 진술, 수용소에 남아있던 증거물, 나치의 명령서, 나치가 직접 찍은 학살 영상기록 등 방대한 자료를 통해 입증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및 전후 독일 재판에서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에게 유죄가 선고 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반이스라엘 감정이 있는 중동지역이나 네오나치, 일부 나치 전범의 후손, 반유대주의자들이 꾸준하게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의 비극을 폄하, 축소 시키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서 참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사역사학'''에 속한다.
12. 황당한 유대인 분류 기준
홀로코스트의 대상이 주로 유대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피해자들은 그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이고 일반 상식으로 보아도 유대인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럽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거치거나, 자신의 종교에 냉담해지면서 서구 사회에 동화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보다 국가가 중요하게 된 근대 시기에는 이런 사례가 더 많이 나타났다. 유대인이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는 사고방식이 강해졌던 것이다.'''Wer ein Jud' ist, bestimme ich!'''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
- 헤르만 괴링[59]
[60][61]
그런데 인종주의에 경도된 나치의 유대인 판정법은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조상까지 봐서 유대인 혈통이 조금 섞여 있으면 유대인'으로 보는 정신나간 기준이었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꼼꼼하게 따져서 판정해도 학살을 정당화할 수 없는 일인데 그조차도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몇 대조 조상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고 유대인으로 분류당하는 사람도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몇 대조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고 한들, 자신이나 그전 세대에서 이미 개종을 해서 유대교를 믿지도 않고 문화적으로는 유럽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고, 자신도 자기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100년 전 조상이 유대인이었다고 해서 그 후손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리가 없는 것이다. 히틀러가 집권하기 한참 전부터 유대인을 욕하고 다녔는데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에 있다가 봉변을 당한 이유 중 하나도, 그들 자신들부터가 자신은 유대인이기 이전에 독일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 TV 미니시리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에서도 주인공들 중 1명인 유대인의 나이먹은 아버지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며 독일을 탈출해야 한다는 아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난 1차대전 때 독일을 위해 싸웠던 참전용사인데 설마 어떻게야 하겠느냐', '진정한 독일 시민이라면 정부의 정책을 믿고 지시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도리다'라며 가만히 있다가 결국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서 사망한다.[64][65] 다만 이 사람은 1차대전 참전 경험 때문에 같은 참전용사 출신인 히틀러를 지지하고 나치 독일에 동조하는 인물이었다. 유대인이면서도! 자신도 유대인이라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유대인이기 이전에 독일 국민'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정서는 19세기에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는데, 시오니즘의 아버지 테오도르 헤르츨조차 젊을 때 합스부르크에 충성하는 독일민족주의자로서 "중부유럽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주류사회에 편입하여 선진국민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이러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실화를 베이스로 한 이야기기 때문에 적어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고는 할 수 있는 셈. 사족이지만 히틀러와 나치는 집권 초기만 해도 대단히 인기가 많았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탄압도 단계적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다른 창작물인 아트 슈피겔만의 쥐에서도 아우슈비츠에서 한 수감자가 "나는 저 유대인과 서 있을 수 없소! 나는 독일인이란 말이오! 내 아들은 독일군이고 나는 독일 황제에게 훈장도 받았소!"라고 항의하다가 경비병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아우슈비츠에는 일반 독일인 죄수들도 있긴 했지만, 그 유대인 또한 이렇게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실하게 자리잡은 인물일 가능성도 있었다는 점을 표현한 것이다. 그 수감자가 항의하는 장면이 두번 나오는데 처음에는 쥐(유대인)으로 나오고 두번째는 고양이(독일인)으로 나온다. 그 수감자가 정말로 독일인이었냐는 아티의 질문에[66] 블라덱은 일반 독일인 죄수도 있었으니 알 수 없지만 독일군에게는 그 수감자도 유대인일 뿐이었다고 답한다.
그리고, 이처럼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유대인' 집단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반유대주의가 철저히 금기시되기 이전까지 서구 문화권 국가 전반에서 반유대주의가 만연해 있었고, 이처럼 반유대주의가 만연했던 근세~근대 초중반까지는 오히려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으로 유대인을 억누른 다른 지역에 비해 독일 문화권이 오히려 유대인들이 터 잡고 살기에 유리한 지역이었던 것부터 생각해야 한다. 일본의 동유럽 문제 전문가이자 작가인 요네하라 마리에 따르면 루마니아 등 원래 독일계 인구 비중이 적은 지역에서는 독일식 성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태인을 구별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있을 정도로 독일 문화권이 중-동부 유럽의 유태인 사회의 거점이었던 것. 이처럼 상대적으로 차별이나 박해가 덜 한 독일 문화권 지역에서 여러 대에 걸쳐 정착하고 대를 이어 살아온 유대인들이 그 지역 사회에 정착하고, 국가에 대한 소속감 역시 가지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상태에서 대학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나치가 정한 유대인 기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유대인 외모를 가진 자는 유대인으로 규정한다거나 상당수 독일계 유대인은 제외되거나''' 등의 객관성, 일관성은 아예 없는 왜곡된 기준들이다. 충공깽한 수준. 즉 히틀러는 그저 감정의 희생양이 필요했을 뿐이다. 정식 영토나 국가가 없어 차후 합법적 보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만만한 희생양이…만약 유대인이나 집시들이 영토를 가진 정식 국가였다면 종전 후 구체적 피해 금액 요구가 가능해지니깐!
특히 나치 고관들은 자신의 친구나 지인이 유태인이거나 했으면 '''그들은 학살에서 쏙 빼주기도 했다. 당장 위에 언급된 괘지는 물론이요 그 히틀러마저도!''' 가령 에두아르트 블로흐(Eduard Bloch)라는 유대인 의사는 히틀러의 어머니를 치료해주고 치료비를 깎아준 적이 있어서 히틀러가 그를 대단히 좋아했다. 1940년까지 히틀러의 특별 보호를 받았고 "모든 유대인이 블로흐 같았다면 유대인 문제는 있을 수가 없다"라는 발언까지 할 정도였다. 블로흐는 유대인 탄압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94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긴 했지만 재산을 제대로 챙겨서 갈 수 있을 정도로 대우를 받았다. 또한 1차세계대전때 본인이 속한 연대의 지휘관이었던 에른스트 헤스(Ernst Moritz Hess)도 특별히 봐준 적도 있으며 거기에 에밀 마우리스(Emil Maurice) 또한 유대인 혈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당원 초기부터 같이 지내던 친맥으로 하인리히 힘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직접 명예 아리아인 칭호를 주면서 슈츠슈타펠의 장교직에 붙었다.
결국 나치 기준으로도 '''자기가 유대인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조상님들 가운데 유대인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했던 사람도 하루 아침에 유대인으로 찍혀서 끌려가서 살해당할 수 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사자들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이는 편협한 인종주의가 극단적으로 치달을 때 얼마나 위험하게 변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실 이전에도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있었지만 나치처럼 무조건적 말살을 당연시한 사례는 없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결정적으로 유대 사회는 모계 사회이다.''' 이 원칙은 기원 후 70년 이스라엘이 로마에게 완전히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전 세계(특히 유럽)로 흩어지면서 아버지가 누군진 몰라도 엄마는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기에 지켜져 왔던 원칙이다. 즉,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남자가 현지인 여자랑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 자식도 현지인들과 결혼해 후손을 낳고 또 낳아서, 유대인 사회를 떠나 현지인 사회 일원의 하나로 정착해버린 경우도 많았다. 70년부터 시작된 유대인 민족 대이동은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기 전까지 무려 1863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뤄졌는데 히틀러 그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자신의 어머니도 가계를 쭉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유대계 피가 한 방울이라도 안 섞였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순수 혈통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짬뽕 혈통 유럽 사회에서? 애시당초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도 순수 혈통으로만 이루어진 민족 따위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해도 그건 인구가 부족급 단위로 적고 교류도 없었던 곳에나 가능하지 인구는 몇백만 이상의 광역급+교류의 역사도 있었던 곳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그리고 이미 19세기부터 독일의 유대인들은 독일 사회로 적극적으로 진입하고자 했다. 19세기 초부터 독일은 유대인에 대한 제한을 풀어주기 시작했고 말에 이르러서는 종교를 개종하면서까지 법학자가 된 사람과 작위를 받은 판사가 배출된 정도였다. 물론 독일에서 인종적 관점에서 관대해진 것보다는 성장한 유태계 상인과 중산층들을 보장해주는 방식으로 거래적인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거래를 통한다고 해도 유태인들에게 독일 주류 사회로 입장하는 최종 관문이 있었는데 바로 독일의 전통적인 크리스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태인들은 자발적으로 개종을 할 정도로 유대인들은 독일 사회에 편입하는 것이 적극적이었고 중산층에 유태인들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67] 이 때문에 유태인이라는 자각 없이 자신은 혈통은 유태인이지만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가 영문도 모르고 자신이 충성했던 독일에 의해 홀로코스트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존재했다.
13. 참상을 담은 시각자료들
14. 기타
- 산업적 학살을 위해 독가스를 사용한 최초의 국가가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아니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통령[73] 이던 당시의 프랑스 제1공화국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Claude Ribbe[74] 이 2005년 저술한 '나폴레옹의 범죄들: 히틀러를 위한 청사진'에 따르면, 1801년 나폴레옹의 명을 받고 출동한 르클레르의 프랑스군은 아이티에서 벌어진 흑인 노예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곤 포로들을 가스실로 개조한 함선의 선창에 처넣어 이산화황으로 질식시켜 살해했다. 그리고는 가스선을 먼 바다로 몰고 나가 시체들을 바다에 갖다 버렸다. 클로드에 따르면 이 학살이 벌어진 이유는 이러하다. 아이티는 프랑스 제1식민제국의 주요 수입원이었고, 그 핵심에는 아이티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있었다. 이 플랜테이션은 노예들을 통해 운영되었는데,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 사상을 접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기존의 흑인들을 그대로 놔두면 노예 노동에 방해가 될 것이었다. 때문에 나폴레옹은 반란 세대를 모조리 제거하고 자유 민권 사상에 물들지 않은 새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데려오고자 했는데, 한 섬의 인구 전체를 신속하게 말살하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연구 끝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가스실 학살법이 고안되었다. 클로드는 그렇게 설치된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은 아이티 흑인들이 10만 명을 상회한다고 주장하였다. 단, 논란은 존재하며 나폴레옹의 가스실 학살의 명백한 근거 또한 부족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주장은 여러 반박을 받아 아직까지는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아트 슈피겔만의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자신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과 전후 세대인 그 아들(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충격적인 실화가 나오는데 전쟁이 끝난 후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해방되었는데도 유대인 학살이 계속되었다. 그 이유는 나치는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면서 귀금속과 돈, 돈될 만한 물건들은 나치가 갖고, 가질 수 없는 토지나 집, 공장은 폴란드인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전쟁이 끝나면서 유대인들이 돌아오자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차지한 집과 토지를 돌려주기 싫었던 폴란드인들은 돌아온 유대인을 죽이거나 추방시켰다. 작중 나오는 대사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이런 꼴을 당하려고 그 지옥을 빠져 나온 거죠." 이런 일들은 전쟁이 끝난지 1년이 지나서야 폴란드가 안정을 찾자 중단되었다. 다큐멘터리 "아우슈비츠"에서는 살아돌아온 유대인이 고향에 있는 자기 집을 되찾으려고 하자 그 유대인의 집을 차지하고 있던 새 주인은 그 집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고 보물을 찾기 위해 그 집을 철거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폴란드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 지배당하거나 협력했던 모든 국가들에서 있었다.
- 탈출, 혹은 연합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되자 굶주려 있던 유대인들은 연합군이나 민간인들이 주는 음식을 먹다가 토사곽란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랫동안 못먹어 작아져 있던 위장이 갑자기 많은 음식을 섭취하게 되니까 놀란 것이다. 이는 당시 생존자들의 공통적인 증언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나치의 만행에 분노한 이지중대원들이 유대인들에게 독일 민간인들에게서 징발한 빵과 치즈를 나눠주다 군의관에게 제지받는 장면이 있다. 그나마 서방연합군은 이정도였지만 의료체계 및 수준이 뒤떨어지던 소련군은 유대인들에게 먹을 것을 지급했다가 유대인들이 그걸 먹고 죽어서 당황했다는 기록이 간간히 있다. 스탈린 대숙청으로 수용소 신세를 진 소련군들도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보고 경악했다. 소련의 수용소는 적어도 노동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면이 있어 가혹하기는 마찬가지 이지만 적어도 합리적인 면이 있어 닥치고 학살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치는 "수용소=사형장"이라는 공식이 적용되어 소련보다 더 비인간적으로 운영되었다.
- 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면서 홀로코스트가 멈추지 않고 지속되어 유대인 1,100만 명이 살해되고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유대인이 아예 전멸했다. 독일인들에게 유대인은 옛날에 분명히 있었는데 이제는 사라진 존재 정도로 거의 잊혀졌고, 홀로코스트의 존재는 극소수의 나치 간부들만 알고 있다.
-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남북전쟁에서 아메리카 연합국이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 북부와 독일이 승리한 뒤 남부에서 파시즘이 대두되고, 유대인 대신 흑인을 대상으로 홀로코스트가 시행된다.[76]
- 홀로코스트의 최고령 생존자인 앨리스 헤르츠좀머 씨가 2014년 2월 24일에 11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 앞서 언급된 것처럼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다. 동성애자, 집시, 공산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장애인들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특히 집시들은 '포라이모스(Porajmos)'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유명한데, 적어도 80만 이상이 죽거나 이로 인해 유럽내 집시 인구가 소수민족 중에서도 존재감이 미미한 수준으로 줄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많다. 다만 집시들은 유대인과 다르게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국방군 등에 의한 무자비 학살의 대상으로 희생당한 사람도 많고, 정확한 기록이 부족하여 사망자수가 유대인보다 훨씬 부정확하다. 그래도 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고 1944년 8월 2일 하루에만 4,000여 명의 집시들이 학살됐다. 지금도 살아남은 집시들은 '집시들의 날'을 제정해서 이들의 희생을 추모한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희생에 대한 동정여론은 모두 유대인들에게 돌아갔고, 독일과 스위스의 배상금은 유대인 희생자도 아닌 시오니즘 단체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건국비용으로 소모되었다.
- 동성애자들도 마찬가지로, 희생자들은 5,000명에서 15,000명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주로 게이들이 많이 학살되었다. 전후 배상도 가장 차별받은 케이스였는데, 당시 동성애자들에 대한 유럽, 아니 세계의 사회적 시선은 그야말로 벌레 보듯한 시선이었기 때문이다(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한 영국의 앨런 튜링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화학적 거세를 받았을 정도다.). 1960년대 후반에야 동, 서독에서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나치는 이들에게 분홍색 역삼각형 문양을 붙였는데, 이것을 뒤집은 분홍색 삼각형은 핑크 트라이앵글(Pink Triangle)이라고 하면서 게이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 대량학살이야 인류역사상 흔히 일어난 일이었지만, 수백만 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한다는 사실은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고,[77] 영화와 미디어 사업을 꽉 쥐고 있는 게 유대인들이었던 만큼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소재로 나왔다. 하지만 중동에서는 요새국가화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지는 데다가 해외의 유대계들도 이에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짓을 터뜨려서, "지금의 이스라엘이 과거 나치랑 다를바가 뭐냐."라는 비난의 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덕분에 홀로코스트는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불쌍한 유대인"이라는 이미지는 날아가버려서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가 나오면 호불호가 갈리는 등 예전만한 평가를 못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디파이언스와 1943년 유대인 게토 봉기를 다룬 영화 업라이징.[78]
- '정말 600만이 죽었나'라는 책에선 실제론 이 수치가 매우 부풀려졌다고 주장했다. 최대로 추산해봐야 40만이 넘지 않는다고 하는데…문제는 이거 저자가 영국민족전선(British National Front)의 부의장과 당 기관지 편집장을 지냈던 사람이라는 것. 이 영국민족전선은 쉽게 말해서 영국의 네오나치들이다. 정당은 백인만 가입할 수 있고, 정책도 백인을 제외한 사람들의 이민을 금지한다는 등 극우 파시스트에 인종차별 성향을 보인다. 당연히 이 책에도 객관적인 시각따윈 없고, 그 어떤 역사학자도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 다만 학살자 수에서는 부풀려져 있다는 주장이 위에 네오 나치 같은 또라이가 아닌 이들도 제기한 사항이다. 이를테면 1950년대 이스라엘에서도 200~400만 정도로 추정했다는 것. 그런데 학살자 수를 더 늘려서 배상금을 더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바로 유대인이자 조부모가 아유수비츠에서 학살당한 노르만 핀켈슈타인이다. 당연히 나치에 대해서는 이를 갈고 있으며 학살극의 존재를 분명히 인정한다. 다만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돈벌기 사업으로 쓰며 피해자 상당수에게 돈을 안 주며 엉뚱한 사람이 가로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핀켈스타인은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책자로 피해 보상금을 일부 시오니즘 극단주의자들 배를 채우게 했다고 비난하며 나아가 팔레스타인에서 나치가 하는 짓을 유대인이 벌인다고 비난하고 있다. 놈 촘스키 또한 유대인이지만 그도 1950년대 200~400만이 갑자기 수가 늘었다면서 돈 더 달라고 하곤 그걸로 이스라엘 건국과 일부만 배를 채운 더러운 보상금이 되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 2015년 10월 21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홀로코스트는 팔레스타인이 히틀러에게 사주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발언하여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사인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가 친나치 활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네타냐후는 아예 대놓고 팔레스타인 때문에 유대인 학살이 발생했다고 주장해 버린 것.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냥 묻혀졌다. 미국에서도 이렇더라 보도하고 그랬냐? 넘어갔으며 극단적인 일부 유대인들만 옹호했다. 놈 촘스키는 "아랍 모두가 나치를 지지했다고 늘려서 엉터리 주장해라"고 비난했다.
- 홀로코스트 여파는 폴란드의 민족구성을 완전히 바꿔 놓을 정도였다. 폴란드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직전만 하더라도 유대인이 약 3백만 명 가량 거주하여 유대인 비율이 상당히 높은 나라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일찍 나치 점령지가 되었고, 대규모 수용소를 건립하는 등 가장 혹독하게 학살이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수용소의 죽거나 외국으로 도피했기 때문에 종전 직후에는 이전의 1%인 3만 명조차 남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현재 폴란드는 인구의 대부분이 폴란드계이며 유대인은 극소수인종이 되었다.[79]
- 이러한 유대인 학살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명백한 범죄행위이지만, 그것이 과장됨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찜찜한 진실 또한 존재한다. 우선, 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애도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 방면, 제1차 세계대전이전 독일 제2제국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헤레로족 학살이나 마지마지 운동 당시의 초토화 작전에 관해선 '미안하긴한데 배상이나 공식적 사과 같은건 좀 그런데;;...' 식의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상대적으로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크다는 점(반대로 오늘날의 나미비아와 탄자니아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덜하고 저개발국인 점)과, 유대인 또한 백인인 반면 중남아프리카에는 흑인이 많은 점을 고려하면, 이 또한 일종의 국가적/인종적 차별이 아닌가, 또한 오늘날 이스라엘이 저개발국이거나 유대인의 영향력이 오늘날처럼 막강하지 않았으면 독일이 진정한 사과를 했을까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는 시선도 있지만 독일이 자신들이 거의 전멸시킨 집시들 보호에 유럽국가중 제일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점이나 체코침공날이나 2차대전 발발일인 9월1일과 종전기념일날 폴란드와 체코 그리고 벨기에 러시아 등 추모를 하는것을 보아 앞선 시선에 대한 반론이 강한편이다 물론 이런 독일의 모습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진출을 위한 가면이라고 비난하는 시선이 가장 큰 피해를 본 동유럽에서 강하게 있다는것도 유념해야한다
- 연합군의 전쟁 중 벌인 범죄나 다른 독재자들의 학살을 빌미로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물타기 하려는 자들도 있다. 아니, 꽤나 많다. 주된 레퍼토리는 마오쩌둥, 스탈린 시대의 희생자 수나 영국 지배 하의 인도에서 벌어진 벵골 대기근을 들먹이는 것. 하지만 마오나 스탈린 시대의 희생자는 주로 농업 정책 실패와 문제점을 간언할 수 없을 정도로 경직된 사회 분위기가 맞물려 일어난 것이므로 이를 '의도성'을 지닌 '학살'이라 부를 수는 없다. 한편 그들이 직접적으로 지시한 학살 또한 정치적인 의미의 학살로, 자본주의자 또는 반혁명주의자라는 '계층'또는 '정치집단'을 타깃으로 했다. 따라서 이는 사실 역사적으로 계층 간의 반목이나 정치적인 대립이 발생했을 시에 우발적으로, 또는 계획적으로 숱하게 일어났던 학살들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이러한 학살은 보통 대립 상황이 수그러질 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나치의 경우 어느 한 인종 자체를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유만으로 태생적인 '존재 가치' 자체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전무후무하다. 그리고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타국을 침공하면서 이루어졌지만, 결정적으로 본국에 살던, 자신이 스스로 독일인이라고 여기던 유대인들까지 학살한 것이다.
- 벵골 대기근의 경우는 많이 왜곡된 케이스이다. 보통 '독일로부터 영국을 구한 윈스턴 처칠은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의 인도 침략을 우려해 벵골 지역의 쌀을 모조리 뺏어가고, 수백만의 벵골 지역의 주민을 굶겨 죽임으로써 학살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인도가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처칠은 이를 묵살하고, 미국과 호주가 벵골 지역에 대해 도움의 손길을 뻗었으나 처칠은 상륙 불허로 대답해 무려 700만의 인구를 굶겨 죽인 적이 있다.'라는 말들이 나도는데,[80] 이것은 악의적인 왜곡이다. 당시 대기근이 일어난 1943년은 일본 해군이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전력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안전한 수송루트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였고 일본군의 버마 공세로 인해 육지 수송로도 위험한 상황이었다.[81] 심지어 42년에는 작물 병충해와 태풍이 같이 발생한 최악의 자연재해까지 겹쳤다. 영국 정부도 식민지 인도를 상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43년 9월부터 기아를 막으려고 했으나 탁상행정이었고 이렇게 지원을 온 식량들도 지방 지주와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전통적으로 지방분권적이던 인도의 지방관들이나 인도 제국의 제후국들 사이에 소속감 따위는 없었기에[82] 원조 물자를 공평하게 분배하기보다는 제 하나 살기 위해 식량을 마구 빼돌린 것. 심지어 위에서 식량 수송을 거부했다는 말과 다르게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보낸 서신에서 호주를 통한 물자지원을 요청했고 전선에 투입되는 물자를 줄여서 기아 대책을 추진했지만 부족해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출처] 물론 윈스턴 처칠과 식민지를 경영하는 영국 정부의 대처가 부족하고 안일했다는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홀로코스트처럼 특정 인종의 말살을 위해서 국가적인 역량을 총동원하여 의도적으로 대기근을 발생시켰다고 볼 여지는 전혀 없다. 게다가 공식적인 기록에 나타나는 300만 내외의 희생자를 유대인 학살 피해자 수보다 많은 700만으로 부풀리는 것에서도 악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 굳이 홀로코스트이 견줄만할 학살을 찾아보자면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주도한 콩고대학살이 있다. 홀로코스트와는 달리 인종 자체의 전멸이 목적이 었던건 아니지만, 강제 노역에 복종시킨다는 이유로 팔을 자른 뒤 무참히 죽이고, 부족간 이간질로 싸움을 붙여, 적게잡아도 천만 이상의 사람을 희생시켰다. 허나 콩고의 국제적 위상이 처참하기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 유명한 프로레슬링 매니저 폴 헤이먼의 모친이 생존자들 중 한명이다.
- 2020년에 네덜란드가 홀로코스트 대한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 의외라면 의외지만 홀로코스트가 벌어지던 당시 이런 유대인 절멸정책에 대해 대놓고 반대는 못해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던 독일인들이 꽤 있었다.[내용출처] 그런데 사실 그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유대인이 불쌍하다거나 인권에 대한 것이 아니라[83] 다름아닌 유대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연합군의 보복을 두려워한 것인데, 당시 나치 독일의 군인과 민간인들 다수가 영국과 미국은 유대인 자본가들에게, 소련은 유대인 공산당원에게 지배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홀로코스트의 강도에 대해서도 견해 차이가 있었는데 한 독일군 포로는 전쟁 당시 아버지와의 대화를 회상하면서 자신은 독일 내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동의하지만,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죽일 줄은[84][85] 몰랐다고 말했다. 이에 아버지는 이런 짓을 계속 벌이면 언젠가는 보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15. 관련 어록
'''라인강을 건너 독일에 들어서자 갑자기 중세시대에 온 것 같았다. 나는 20세기 대명천지에 그 잔혹한 범죄들이 어떻게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미군병사의 증언[86]
[87]
'''여자들과 노인들이 거리에서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우리에겐 아무 힘이 없고 길거리에서 우리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큼 우리는 고독하다. 우리는 너무나 약하다.'''
- 폴란드 유대인의 회상
유태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
인종적 오염을 거부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강제수용소가 우리에게 안좋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확실하다.
난 내 눈을 의심했다. 20세기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마치 중세를 보는 듯 했다. (중략) 우리 젊은 유대인들은 비와 추위에 떨며 나라를 지켰다. 이러한 일에 역겨워할 전우들은 없는가? 우리는 길가를 걸으며 과거에 많은 좋은 일들을 함께 한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이제 만족스런 미소를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냈다. (중략) 이런 변화는 불과 몇 시간 안에 일어났다. 지금까지 내가 사랑하고 아껴 온 이 국가와 사람들이 갑자기 적으로 돌변했다. 나는 더 이상 독일인이 아니었다. 아니 최소한 독일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몇 시간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갑자기 깨달은 것일 뿐이다. 한때나마 이들(독일인)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적의를 감춰왔던 이들을 신뢰한 것이 부끄러웠다. 순간 이 거리가, 아니 전 도시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 때 기분은 형언하기가 어렵다.
Edwin Landau[88]
[89]
근처에 수용소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하지만, 너무나도 잘 위장해놔서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은 전혀 몰랐어요. 저도 저기 바로 밑에 마을에 살고 있었지만 하나도 몰랐거든요.
[91]
우리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무덤을 파게 했다. '''그 독일인들도 모두 거기에 묻어버리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바로 코 앞에 있었는데도 자기들은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빡빡 우기길래 '''나는 당신들도 똑같은 살인마라고 소리쳐줬다.'''
'''“캠프에서의 첫날 밤은 절대로 잊지 못한다. 나의 인생을 긴 밤으로 물들여버린 그날, 일곱 번 저주하고 일곱 번 회개했다...나의 신을 죽이고, 나의 영혼을 짓밟고, 내 꿈을 먼지로 만들어버린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절대로 이것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내가 신만큼 오래 산다고 해도.”'''
이미 일어난 사건은 바꿀 수 없다. 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사를 통해 배우고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16. 홀로코스트를 다룬 매체
16.1. 문학
- 안네의 일기: 역사인물 안네 프랑크가 쓴 '실제 일기.' 다만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까지만 기록되어 있다.
- 당신들의 조국
-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 - 작가의 아버지가 겪었던 유대인 탄압과 아우슈비츠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만화.
- 이것이 인간인가 - 홀로코스트 생존자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후 그때를 회상하며 쓴 기록
- 소피의 선택
- 해바라기 - 시몬 비젠탈이 쓴 책.
- 높은 성의 사나이 - 원작 소설에선 일본이 유대인을 잡아다 나치에게 넘기지만, 드라마판에선 가스실을 설치하여 직접 학살한다. 게다가 학살에 사용되는 가스는 치클론 B를 업그레이드시킨 치클론 D.[94]
- 별을 헤아리며
- 밤 - 트란실바니아 출신의 유대인 앨리 위젤이 쓴 자전적 소설. 최신 판본에서는 나이트로 영어 제목을 직역해서 들여왔다.
- 운명 - 임레 케르테스의 자전적 소설.
- 사자와 맞선 소녀 : 나치에 저항한 여호와의 증인 시몬 아놀드 립스터의 회고록
16.2. 영화, 드라마
- 쉰들러 리스트 - 이 분야계의 레전설.
- 사울의 아들
-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 유대인 수용소소장의 아들과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 소년의 우정을 다루었다.
- 인생은 아름다워 - 이탈리아계 유대인 가족의 애환을 다룬 명작.
- 9번째 날
-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영화) - 바르샤바 게토에 살던 유대인 피아니스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 홀로코스트의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 디파이언스 - 홀로코스트에 대항하여 총을 들고 싸우는 유대인을 다룬다.
- 트라이엄프 -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그리스인 권투 선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 밴드 오브 브라더스: 후반부에 유대인 수용소를 해방시키는 내용이 있다.
- 조조 래빗
- 어둠 속의 빛 - 폴란드 르부프를 배경으로 430일 동안 하수구 밑에 11명을 유대인을 숨겨주었던 '레오폴드 소하'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 쇼아 - 프랑스의 클로드 란츠만 감독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수용소 간부들을 인터뷰하여 제작한 9시간짜리 대작 다큐멘터리.
- 밤과 안개 -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 작품.
- 소피의 선택
- 카포 - 수용소 탈출을 시도하는 유대인 소녀를 다룬 영화.
- 홀로코스트 - 홀로코스트 당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유대인 가족을 다룬 영화.
- 생명의 기차
- 죽음의 연주 - 나치를 위해 연주를 하며 살아남아야 했던 유대계 여성 음악가의 실화를 다룬 영화.
- 그레이 존
- 제이콥의 거짓말
- 아멘
- 전장의 로망스
- 컨스피러시 - 소위 '최종 해결책'이라 불리는 유대인 절멸 정책이 결정된 회의를 다룬 영화.
- 안네 프랑크 - 안네 프랑크의 삶을 다룬 전기영화.
- 업라이징 - 나치의 유대인 차별과 홀로코스트에 저항한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다룬 영화.
- 소비버 탈출 - 소비보르 절멸수용소를 탈출하려는 유대인을 다룬 영화.
- 갓 온 트라이얼
- 우리 중에 살인자가 있다
- 벤트
- 버드가의 섬
- 선샤인
- 중심가의 상점
- 전당포
- 이레나 센들러의 용기
- 나치의 그늘
- 뉘른베르크 재판
- 로젠스트라시
- 맥스와 헬렌
- 엣지 오브 더 로드
- 아리아 커플
- 휴전
- 악마의 계산
-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 뮤직 박스
- 나는 부정한다
- 유로파 유로파
16.3. 비문학
-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 홀로코스트 연구의 권위자 라울 힐베르크가 쓴 저서로 홀로코스트에 대한 과정과 실태가 상세하게 적혀 있다. 엄청난 분량과 권위를 자랑하지만, 국내에서는 절판되어 현재는 중고장터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으로 읽고 싶은 사람은 소장 도서관을 찾아서 가봐야 한다.
- 나쁜 의사들 - 홀로코스트 당시 강제수용소의 나치 의사들을 다루고 있다.
16.4. 음악
- Final Solution - 스웨덴의 메탈밴드 Sabaton이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만든 곡. 영상은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갤러리에서 만들었다.
17. 관련 문서
- 여호와의 증인/역사#s-3.1/나치의 여호와의 증인 탄압
- T-4 프로젝트[95]
- 광기
- 나치 - 히틀러
- 니콜라스 윈턴
- 독일의 전쟁범죄
- 드레퓌스 사건
- 반제 회의
- 수정의 밤
- 시오니즘
- 집시
- 아시안 홀로코스트
- 우생학
- 우스타샤[96]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요제프 멩겔레
- 의미치료[97]
- 이스라엘
- 이르마 그레제
- 일제 코흐
- 파시즘 - 군국주의
- 툴레 협회
- 학살 - 양민학살
- 하인리히 힘러
- 홀로코스트 부인론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아돌프 아이히만
- 슈츠슈타펠
- 국방군 무오설
- 게토
- 유대인 경찰
- 카포
- 엘리 비젤[98]
- 오스카 쉰들러
- 허펑산
- 스기하라 지우네
- 731 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