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학살 사건

 


'''Boston Massacre''' / 보스턴 대학살
[image]
'''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1. 개요
2. 명칭에 대한 논란
3. 대중매체에서
3.1. 게임
4. 관련 문서


1. 개요


오늘은 별다른 일이 없는 무료한 날이었다.

- 토마스 프레스턴. 1770년 3월 5일의 일기에서

영국에선 킹 거리 사건(incident on King street)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7년 전쟁으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조세를 강화하는 법안을 여러번 상정했고 이는 인지세, 타운센드법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은 본국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던 1770년 3월 5일, 보스턴 시에 주둔한 영국 육군 제29보병연대 병력들과 주둔지 앞에 모여있던 시민과의 갈등이 발단이 되어 보스턴시에서 인부 9명과 영국군 사이에 우발적인 분쟁이 일어나고 일부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곧 보스턴 시민들과 군인들의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위협을 느낀 육군 병사들이 장교의 명령이 없음에도 머스킷 소총을 쏘면서 시민 5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로 확대된다.
발포한 병사 8명과 당일 당직사관으로 이들에 대한 지휘책임을 지고 있던 토마스 프레스턴 육군 보병대위가 군사재판에 회부되나 무죄판결을 받고, 나머지 병사들도 두 명이 자그마한 벌[1]을 받는 선에서 처벌이 마무리되었다[2]. 이로 인해 식민지의 대영 여론은 더 악화되었다.
이후 식민지에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에 더욱 힘을 얻으며 후에 일어나는 보스턴 차 사건미국 독립 전쟁의 시발점이 된다.

2. 명칭에 대한 논란


[image]
보스턴, 매사추세츠 / 1770년 3월 5일
5명 사망, 6명 부상
운디드니, 사우스 다코타 / 1890년 12월 29일
300명 사망, 50명 부상
'''자 그럼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Q: 다음 중 진짜 학살은 무엇일까요?'''
미국 개척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한 사건들은 대학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데 비해 이 사건에는 대학살이라고 하는데 다소 비판이 있다. 사실 대학살이라고 표현하기엔 사상자들의 수가 매우 적으며 미국이 이 사건을 계기로 반 영국심리를 고조시키기 위해 붙인 단어였다는 논란도 있고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대학살이라는 단어선택은 잘못되었다는 의견이 많다.
더군다나 '''누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는지'''조차 확실치 않은 상황이다. 영국군이 먼저 총을 쐈다는 의견과 미국인들이 눈뭉치를 던지는 등 먼저 위협적으로 나가고 총까지 쐈다는 주장이 대립하는 사건. 사실 이 사건이 알려진 건 폴 리비어의 판화(위의 밈에 묘사된, 영국군들이 일방적으로 시민들을 학살하는 판화) 때문인데, 이 판화가 위의 위키피디아판 그림과는 달리 미국인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장면으로 묘사해서 여론몰이를 했다는 의견이 대다수. 실제로 리비어가 그런 성향이기도 했고.
《책 속의 책》이라는 책을 90년대에 쓴 폴 임이란 재미교포는 지들이 수백만 단위로 벌인 미국 원주민 학살은 서부개척으로 빚어진 결과라고 넘어간 주제에 고작 5명 죽은 게 학살이라며 비웃는 글을 쓰기도 했다.

3. 대중매체에서



3.1. 게임


어쌔신 크리드 3

4. 관련 문서



[1] 엄지손가락에 H자 낙인이 찍히는 벌. 지금 생각해보면 후덜덜한 벌이지만, 당시는 이 정도는 '가벼운 처벌'로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2] 다만 이게 틀리지 않았다는 의견이 있다. 말이 다섯 명 죽은 거지 실제로 당시 영국군 또한 미국 시민들에게 상당한 협박과 위협을 당했고, 결정적으로 당시 영국군을 변호한 변호사는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된 존 애덤스였다. 다시 말해, 같은 미국인들도 탐탁치 않게 보았다는 것. 사실 고작 다섯 명 죽었다고 학살이라면... 아래 반론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