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차 사건
Boston Tea Party
직역하면 다과회(Tea party)인데 한국어로 번역할 땐 '보스턴 차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는 차를 바닷물에 타 마신다는 미국식 특유의 위트를 없앤 심심한 표현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냥 원어 그대로 티 파티를 사용하기도 하고, 해당 국가에서 '다과회'란 표현으로 번안하거나, 혹은 '''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곳도 있다.[1] 중국은 '보스턴에서 차를 쏟아버린 사건(波士頓傾茶事件)'이라고 하는데, 외국어여서 이질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파사둔(= 보스턴) 경차 사건'이라는 표현은 당장 한국어와 비교해도 동사 하나가 더 붙은, 한국어로 치면 '보스턴 차 투척 사건' 내지 '보스턴 차 폐기 사건' 정도가 되기 때문에 한국과 큰 차이는 없다.
1755년에 시작된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1763년, 영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그와 함께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되었다(그리고 식민지인 입장에선 프랑스나 원주민 등 경쟁자를 싹 쓸어버리면서, 이제 본국에게 개겨도 OK라는 안보환경을 얻었다). 당시 영국 정부의 부채는 세수 총액의 절반이었던 1억 3,000만 파운드로 어마어마했다. 이에 1764년부터 설탕세, 1765년에는 인지세를 내게 하면서 미국 식민지인들은 대거 반발, 대규모 폭력 사태를 일으켰고 결국 영국은 1766년 이를 철회한다.[2] 또한 1770년 2월 22일에는 크리스토퍼 세이더라는 미성년자가 세관 직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 동년 3월 5일 보스턴 학살 사건이 발생하는 등 민심도 흉흉했다.
여튼 반발을 무릅쓰고 세금을 부과했음에도 세수가 부족하자 1773년 봄, 영국 의회에서는 세수 확대 차원에서 홍차법을 제정, 이를 미국 식민지에도 적용하게 된다. 당시 홍차는 중국→네덜란드-(밀수)→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되어 네덜란드의 밀수업자들이 이득을 보는 구조였다. 반면 영국 정부가 제시한 홍차법은 중국→동인도회사→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망을 형성해 영국은 세수를 확보하고, 영국민들과 식민지인들은 거품이 빠진 정가에 홍차를 구매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었다.
영국법을 통해 동인도 회사가 직접 미국 식민지에 홍차를 납품하게 되었고, 이 덕에 '''미국 식민지인들은 기존의 홍차가격의 절반으로 홍차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당시 식민지인들은 이 법안에 큰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불만을 가지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여기까지 보면 '도대체 왜 반발한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불만을 가진 이들은 식민지의 홍차 소비자들이 아니라 식민지의 '''홍차 밀수 상인들이었다.''' 당시 홍차 밀수꾼들은 밀수입을 통해 세금을 내지 않았고 이를 통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차법이 통과가 되어 자신들의 밥줄이 끊어지게 생겼으니 당연히 분노가 치밀 수 밖에.
그리고 홍차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식민지의 지식인들이었다. 당시에는 북미 대륙의 여러 영국 식민지들에는 각각 따로 총독이 파견됐고 각 식민지들은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가지고 있었으며[3] 이들 식민지들을 통솔할 본국 정부는 대서양 건너편에 있었으므로 각각의 식민지들은 서로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미국은 영국의 다른 식민지들보다 자율성을 좀 더 부여받았다. 그래서 영국에서 정책을 제정 및 실행할 때 각 식민지 총독과 협의 끝에 결정되었는데, 설탕세부터 시작한 세수 확대 법안은 모두 영국 의회 독단으로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직접세를 부과한다는 것을 '''식민지 자치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6촌 형이었던 새뮤얼 애덤스.[4] 그는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라는 집단을 이끌고 행동에 나섰다.
1773년 12월 16일 저녁 7시. 미국 보스턴 항구에 등장한 100여명의 자유의 아들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던 모호크족 복장을 하고 있었다.[5] 그들은 손에는 도끼, 얼굴에는 석탄가루를 바르고 있었는데 어두운 저녁이었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도록 방지한 것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차가 잔뜩 실린 동인도 회사 소유의 무역선이었다. 100여명이 총 3그룹으로 나뉘어 3척의 배에 올라탔고 이들은 선장과 선원을 협박해 화물칸 열쇠를 얻어냈다. 그리고 화물칸에 쌓인 342개에 달하는 상자들을 박살내 그 안에 있던 우이옌(武夷巖) 차들을 모두 바다에 버려버렸다. 바다에 뿌려진 우이옌 차의 총 가치는 9,000 파운드로, 현재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6억원에 달한다.
사건의 여파로 얼마 동안 보스턴 앞바다의 색깔은 희미한 갈색을 띄었다고 하며 며칠 동안 찻잎이 떠올라 해변에 밀려왔다고 한다. 이걸 주워다 끓여 마신 사람도 있었다는데,[6] 차가 워낙 비싸서 중산층이나 귀족들조차 한 번 달인 다음 도로 건져 건조시켰다가 찻물이 아예 안 나오고 맹물만 나올 때까지 우려먹는 귀하신 몸이던 시기였으니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다.
1773-1774년의 겨울 동안 보스턴 차 사건을 본뜬 소규모의 차 사건들이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뉴저지의 그린위치에선 마을 광장에서 차를 불태웠고 필라델피아에선 차를 실은 선박들을 위협하여 돌려보냈다. 메릴랜드의 체스터타운도 보스턴의 예를 따랐고 뉴욕에서도 선장이 배 바닥에 숨겨두었던 차 상자가 발견되자 같은 결과로 이어졌다. 볼티모어 인근의 아나폴리스에선 차를 실은 배들이 불태워지기까지 하였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선 시위대의 분노를 실감한 선장들이 자발적으로 차 상자를 바다에 던지기도 했다. 이로 인한 영국 동인도 회사의 경제적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영국은 물론 미국 내에서조차 반응은 "무슨 짓거리야!!!!"였다. 심지어 당시 미국 식민지의 주요인사인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도 "이건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라며 대차게 깠다. 특히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 사건으로 영국 측이 입은 손실을 메꿔주자고 했고, 실제로 11억원 가량의 성금을 모으는데 성공, 당시 영국 수상 노스 경에게 가져갔으나 거절당했다.
꼭지가 돈 영국은 당연히 "이 새끼들이 내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기어올라?"라는 반응을 보였으며 이듬해인 1774년 함대를 파견해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자치정부를 해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자치통치에서 직접통치로 식민지배의 방향을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물론 이 사건 때문에 독립을 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게 아니다. 애초에 미국 식민지 주민들과 지식인들은 독립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원했던 건 과거처럼 식민지의 자치권을 보장해주고, 영국 정부의 간섭을 과거처럼 최소화해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 독립 전쟁을 일으킨 '건국의 아버지'들이 했던 초기 생각도 "국왕 폐하의 눈을 가리는 본국 의회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식이었다. 다만 '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란 표현에 대해 실제로 영국 본토에서 식민지에 '그럼 대표 보내 봐' 했지만 식민지인들은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는 식민지만의 의회를 원한 것이었으므로 거부했다.[7]
즉, 당시 식민지 주민들의 생각은 아예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보다 나은 대우, 나아가 자신들만의 의회를 꾸려서 조세권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정도였다. 당시의 영국이나 지금의 영국이나, 영국의 정체성은 '연합왕국'으로 영국 내에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등의 구성원들이 의회도 독자적으로 구성하고 어느정도 자치권을 행사하는 나라다. 때문에 미국의 입장은 자기네들을 식민지인으로 차별하지 말고, 이를테면 '북아메리카 왕국' 같은 것을 만들어서 자기네들을 연합왕국의 일원으로서 제대로 대우해달라는 정도에 가까웠다.
본격적으로 독립하자는 의견이 불붙기 시작한 때는 전쟁 중에 발간된 토머스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이 대박난 이후였다.
결국 사건 자체는 프랑스 혁명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처럼 후대의 필요에 의해 윤색된 사건이기도 하다. 한 예로 티 파티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은 사건이 일어난지 50여년 후인 '''1830년대'''였고, 그 이전까지 이 사건은 '홍차 파기 사건(Destruction of the Tea)이라고 불렸다.
1. 소개
1773년 12월 16일 밤, 미국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주민들이 영국 본토로부터의 차(茶) 수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영국적 선박을 습격해서 당시에 사치품이었던 차 상자들을 바다에 폐기한 사건을 말한다. '''미국 독립 전쟁'''의 불씨가 된 사건 중 하나로 유명하다. 영국 정부에서 과세는 크게 낮춰 주었으나 식민지인들의 본토에 대한 반발심은 생각보다 훨씬 컸고, 그 반발심이 '홍차 조례'에 의해 일거에 폭발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물고기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잔으로 차를 만들어 준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즐겁다.
참가 당시 16세였던 대장장이 조슈아 와이어스
2. 명칭에 대해
직역하면 다과회(Tea party)인데 한국어로 번역할 땐 '보스턴 차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는 차를 바닷물에 타 마신다는 미국식 특유의 위트를 없앤 심심한 표현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냥 원어 그대로 티 파티를 사용하기도 하고, 해당 국가에서 '다과회'란 표현으로 번안하거나, 혹은 '''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곳도 있다.[1] 중국은 '보스턴에서 차를 쏟아버린 사건(波士頓傾茶事件)'이라고 하는데, 외국어여서 이질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파사둔(= 보스턴) 경차 사건'이라는 표현은 당장 한국어와 비교해도 동사 하나가 더 붙은, 한국어로 치면 '보스턴 차 투척 사건' 내지 '보스턴 차 폐기 사건' 정도가 되기 때문에 한국과 큰 차이는 없다.
3. 전개
3.1. 전쟁의 나비 효과
1755년에 시작된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1763년, 영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그와 함께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되었다(그리고 식민지인 입장에선 프랑스나 원주민 등 경쟁자를 싹 쓸어버리면서, 이제 본국에게 개겨도 OK라는 안보환경을 얻었다). 당시 영국 정부의 부채는 세수 총액의 절반이었던 1억 3,000만 파운드로 어마어마했다. 이에 1764년부터 설탕세, 1765년에는 인지세를 내게 하면서 미국 식민지인들은 대거 반발, 대규모 폭력 사태를 일으켰고 결국 영국은 1766년 이를 철회한다.[2] 또한 1770년 2월 22일에는 크리스토퍼 세이더라는 미성년자가 세관 직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 동년 3월 5일 보스턴 학살 사건이 발생하는 등 민심도 흉흉했다.
여튼 반발을 무릅쓰고 세금을 부과했음에도 세수가 부족하자 1773년 봄, 영국 의회에서는 세수 확대 차원에서 홍차법을 제정, 이를 미국 식민지에도 적용하게 된다. 당시 홍차는 중국→네덜란드-(밀수)→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되어 네덜란드의 밀수업자들이 이득을 보는 구조였다. 반면 영국 정부가 제시한 홍차법은 중국→동인도회사→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망을 형성해 영국은 세수를 확보하고, 영국민들과 식민지인들은 거품이 빠진 정가에 홍차를 구매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었다.
영국법을 통해 동인도 회사가 직접 미국 식민지에 홍차를 납품하게 되었고, 이 덕에 '''미국 식민지인들은 기존의 홍차가격의 절반으로 홍차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당시 식민지인들은 이 법안에 큰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불만을 가지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여기까지 보면 '도대체 왜 반발한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불만을 가진 이들은 식민지의 홍차 소비자들이 아니라 식민지의 '''홍차 밀수 상인들이었다.''' 당시 홍차 밀수꾼들은 밀수입을 통해 세금을 내지 않았고 이를 통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차법이 통과가 되어 자신들의 밥줄이 끊어지게 생겼으니 당연히 분노가 치밀 수 밖에.
그리고 홍차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식민지의 지식인들이었다. 당시에는 북미 대륙의 여러 영국 식민지들에는 각각 따로 총독이 파견됐고 각 식민지들은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가지고 있었으며[3] 이들 식민지들을 통솔할 본국 정부는 대서양 건너편에 있었으므로 각각의 식민지들은 서로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미국은 영국의 다른 식민지들보다 자율성을 좀 더 부여받았다. 그래서 영국에서 정책을 제정 및 실행할 때 각 식민지 총독과 협의 끝에 결정되었는데, 설탕세부터 시작한 세수 확대 법안은 모두 영국 의회 독단으로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직접세를 부과한다는 것을 '''식민지 자치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6촌 형이었던 새뮤얼 애덤스.[4] 그는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라는 집단을 이끌고 행동에 나섰다.
3.2. 행동 개시
1773년 12월 16일 저녁 7시. 미국 보스턴 항구에 등장한 100여명의 자유의 아들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던 모호크족 복장을 하고 있었다.[5] 그들은 손에는 도끼, 얼굴에는 석탄가루를 바르고 있었는데 어두운 저녁이었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도록 방지한 것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차가 잔뜩 실린 동인도 회사 소유의 무역선이었다. 100여명이 총 3그룹으로 나뉘어 3척의 배에 올라탔고 이들은 선장과 선원을 협박해 화물칸 열쇠를 얻어냈다. 그리고 화물칸에 쌓인 342개에 달하는 상자들을 박살내 그 안에 있던 우이옌(武夷巖) 차들을 모두 바다에 버려버렸다. 바다에 뿌려진 우이옌 차의 총 가치는 9,000 파운드로, 현재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6억원에 달한다.
사건의 여파로 얼마 동안 보스턴 앞바다의 색깔은 희미한 갈색을 띄었다고 하며 며칠 동안 찻잎이 떠올라 해변에 밀려왔다고 한다. 이걸 주워다 끓여 마신 사람도 있었다는데,[6] 차가 워낙 비싸서 중산층이나 귀족들조차 한 번 달인 다음 도로 건져 건조시켰다가 찻물이 아예 안 나오고 맹물만 나올 때까지 우려먹는 귀하신 몸이던 시기였으니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다.
3.3. 전국적 확산
1773-1774년의 겨울 동안 보스턴 차 사건을 본뜬 소규모의 차 사건들이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뉴저지의 그린위치에선 마을 광장에서 차를 불태웠고 필라델피아에선 차를 실은 선박들을 위협하여 돌려보냈다. 메릴랜드의 체스터타운도 보스턴의 예를 따랐고 뉴욕에서도 선장이 배 바닥에 숨겨두었던 차 상자가 발견되자 같은 결과로 이어졌다. 볼티모어 인근의 아나폴리스에선 차를 실은 배들이 불태워지기까지 하였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선 시위대의 분노를 실감한 선장들이 자발적으로 차 상자를 바다에 던지기도 했다. 이로 인한 영국 동인도 회사의 경제적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4. 후폭풍
영국은 물론 미국 내에서조차 반응은 "무슨 짓거리야!!!!"였다. 심지어 당시 미국 식민지의 주요인사인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도 "이건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라며 대차게 깠다. 특히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 사건으로 영국 측이 입은 손실을 메꿔주자고 했고, 실제로 11억원 가량의 성금을 모으는데 성공, 당시 영국 수상 노스 경에게 가져갔으나 거절당했다.
꼭지가 돈 영국은 당연히 "이 새끼들이 내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기어올라?"라는 반응을 보였으며 이듬해인 1774년 함대를 파견해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자치정부를 해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자치통치에서 직접통치로 식민지배의 방향을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5. 미국 독립 전쟁과의 연관성
그리고 이듬해인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물론 이 사건 때문에 독립을 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게 아니다. 애초에 미국 식민지 주민들과 지식인들은 독립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원했던 건 과거처럼 식민지의 자치권을 보장해주고, 영국 정부의 간섭을 과거처럼 최소화해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 독립 전쟁을 일으킨 '건국의 아버지'들이 했던 초기 생각도 "국왕 폐하의 눈을 가리는 본국 의회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식이었다. 다만 '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란 표현에 대해 실제로 영국 본토에서 식민지에 '그럼 대표 보내 봐' 했지만 식민지인들은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는 식민지만의 의회를 원한 것이었으므로 거부했다.[7]
즉, 당시 식민지 주민들의 생각은 아예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보다 나은 대우, 나아가 자신들만의 의회를 꾸려서 조세권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정도였다. 당시의 영국이나 지금의 영국이나, 영국의 정체성은 '연합왕국'으로 영국 내에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등의 구성원들이 의회도 독자적으로 구성하고 어느정도 자치권을 행사하는 나라다. 때문에 미국의 입장은 자기네들을 식민지인으로 차별하지 말고, 이를테면 '북아메리카 왕국' 같은 것을 만들어서 자기네들을 연합왕국의 일원으로서 제대로 대우해달라는 정도에 가까웠다.
본격적으로 독립하자는 의견이 불붙기 시작한 때는 전쟁 중에 발간된 토머스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이 대박난 이후였다.
결국 사건 자체는 프랑스 혁명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처럼 후대의 필요에 의해 윤색된 사건이기도 하다. 한 예로 티 파티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은 사건이 일어난지 50여년 후인 '''1830년대'''였고, 그 이전까지 이 사건은 '홍차 파기 사건(Destruction of the Tea)이라고 불렸다.
6. 기타
- 보스턴 차 사건의 영향으로 미국인들이 "우리는 영국놈들이 마시는 차는 먹지 않겠다! 대신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다는 식의 애국심을 강조하는 듯한 속설은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으나[8] 사실 미국에서 커피를 더 많이 마시는 이유는 그냥 커피값이 차값보다 싸서(...)이다. 과거에 차는 인도에서 영국으로 싣고 온 걸 다시 미국으로 실어 날랐는데, 커피는 미국 코 앞에 있는 쿠바와 브라질에서 대량 재배되고 있었으니 운송비가 싼데다가 구하기 쉬웠던 것. 출처
- [image][9]
이 차(茶; 마시는 차)와 타는 차(車)의 발음이 같다는 것을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일부러 드립을 치기도 하는데, 포드 자동차가 포드 모델 T(Tea)를 개발해서 대량 생산으로 식민지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가자, 영국이 롤스로이스로 대표되는 자국의 자동차 산업에 위협을 느껴서 포드 차량에 무거운 세금을 물렸고, 이에 분개한 식민지인들이 동인도 회사 무역선에 실린 롤스로이스를 전부 바다에 밀어 버렸다는 것(...). 백괴사전에서는 대놓고 이 사건을 이렇게 꼬아 놓았다. - 미국의 극우 단체 티 파티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으며, 미국 공화당의 정치세력으로 자리했다.
- 한국의 MMORPG 트리 오브 세이비어에서 일어난 르권마-온갤 전쟁이 이 사건에 비유되고 있다. 온갤 길드원이 르권마 길드 아지트에 쳐들어가(?) 재배중이던 작물을 무단으로 재배 해버린 게 발단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지만, 보스턴 차 사건은 식민지와 본국의 갈등과 세금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므로 이것도 병맛으로 오해하진 말자.
- 이 당시 야사로 자물쇠 이야기가 있다. 자유의 아들들이 배를 습격했을 당시 자물쇠를 부쉈는데, 사건이 끝난 후에 이들이 수리공을 불러다가 자물쇠를 고치도록 했단다. 자신들은 영국 정부에게 항의하기 위해 차를 버린 것이지 개인의 재산을 망가뜨릴 의도는 없었다나?
- 1773년 12월 17일, 존 로빈슨이 전날의 보스턴 차 사건 현장에서 기념품으로 건져올린 차 상자 하나는 지금까지도 보스턴 티 파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미국인의 자유와 국가 탄생의 상징이라고.
- 동인도 회사라는 이름의 홍차 브랜드에서 'Boston Tea Party'라는 홍차 블렌드를 내놓기도 했다. 물론 이 동인도 회사는 실제 사건이 벌어진 당시의 동인도 회사와는 무관하고, 영국 정부에게 문장과 회사 이름을 사용하도록 허가를 받은 사실상 별개의 회사이다. 업체 홈페이지의 해당 제품 목록
- 잘못된 정보로 당시 버려진 찻잎은 요즘 우리가 애용하는 건조된 찻잎이 아닌 압축된 찻잎으로 버려진 찻잎들의 가격은 무려 170만 달러라고 하며 나무토막 한 덩어리만한 압축된 찻잎을 1년 동안 긁어먹었다는 이야기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반박 내용을 알고 싶다면 이 글을 보자.
- 2019년 7월 2일 벌어진 여자 월드컵 준결승에서 미국과 잉글랜드가 맞붙었는데, 1:1 동점 상황서 미국 팀의 주장 알렉스 모건이 역전결승골을 넣은 뒤 차를 마시는 세리머니를 했다. 본인도 경기 후 트위터에서 차 마신 모션이 맞다고 인증했고, 마침 이틀 뒤가 미국 독립기념일이기도 했다. 당연히 미국에선 이에 대해 통쾌해 했고 영국은 분노했다. 영국에 대한 제3국들의 반응은 내로남불 수준이라며 냉랭하다.
- 영국 브리스톨에 '보스턴 티 파티'라는 카페 체인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일회용컵 사용금지 및 지역사회와의 협력 등 사회공헌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
- 보스턴에는 이 사건을 기념하는 보스턴 티 파티 박물관이 있다. 정식 명칭은 Boston Tea Party Ships & Museum. 실제 사건이 벌어진 현장으로 추정하는 장소에 건립했으며, 당시 사용했던 선박을 복원해서 전시했다. 안내 직원들도 시대 고증을 거친 당대의 복장을 갖춰 입고 있다. 위에 언급한 차 상자 등 당시의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차 상자를 바다에 던지는 체험을 직접 할 수 있다.
- NFL의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역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팀명을 지은 것이다.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어쌔신 크리드 3에서도 역시 이 사건이 등장하며 플레이어가 직접 바다에 차를 던져버릴 수도 있다.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원주민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던졌다고 나오며, 작중에서도 대륙군과 '자유의 아들들'이 차를 집어던지고 원주민이라고는 코너 켄웨이뿐이다. 영국이 차에 과세를 매기자 성당기사단이 이를 역이용해 밀수업으로 돈을 벌고 있었는데 이를 엿먹이기 위해 기획한 사건으로 등장한다. 미션 제목은 'The Tea Party'이며, 한글판에서는 다과회로 번역되었다.
- 미국 드라마 슬리피 할로우에선 헤센 용병들이 가져온 헬게이트를 여는 열쇠를 털기 위해 일으킨 양동작전이라고 한다.
- 투믹스 웹툰 마키시의 이웃들에서 등장하는 홍차의 정령과 녹차의 정령이 뮤지션 듀오를 결성하면서 붙인 듀오명이 보스턴 엑시던트이다.
[1] 예를들면 일본에서는 ボストン茶会事件(보스턴 다과회 사건)으로 표기하고 있다.[2] 13개 식민지인들은 이때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늘리고자, 식민지 의회가 영국 의회에서 대표성을 갖기를 희망했다. "대표없이 과세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란 주장이 여기에서 비롯한다.[3] 그래서 당시에는 '미국인(American)'이란 인식 자체가 없었다. 식민지인들은 스스로를 '버지니아 주 사람(Virginian)', '필라델피아 사람(Philadelphian)' 등으로 여겼다. 애초에 State는 주(province)라는 뜻도 있지만 국가(nation)의 뜻도 있다. 즉 버지니아 국가, 필라델피아 국가 등. 마키아벨리의 '국가론'에서도 국가를 Stato로 썼을 정도다.[4] 미국에서는 존 애덤스와 함께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며 애국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맥주 덕후들에게 사랑받는 유명한 보스턴 라거의 이름이 바로 그에게서 따온 것.[5] 사건의 실행자들은 원주민으로 분장했지만, 퍼포먼스 의도 이상은 없다고 보인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이 일을 저질렀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여론은 드물었다. 미국과 영국의 반응도 비슷했다.[6] 아예 그걸 레시피로 삼은 잎차도 있다(...). 기타 문단 참조.[7] 이것도 영연방을 유지하면서 조세를 포함한 자치권을 가지는 형태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세금 안 내겠다는 소리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식민지에 대한 조세 특권 주장을 많이 했기 때문.[8] 이 말 자체는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가 한 말이다.[9] 이 움짤은 닷지 챌린저의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