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디드니 학살사건
Wounded Knee Massacre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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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전쟁의 마지막에 벌어진 일로 1890년 12월 29일, 미 육군 제7기병연대 500여 명이 사우스다코타 주 운디드니[1] 와 그 근처 언덕에서 저지른 북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살 사건. 이 사건으로 추장 큰발(Big Foot)을 비롯한 전사, 노인,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350명의 수우 족 중 300명 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운디드니(Wounded Knee)는 라코타어로 '상처입은 무릎'이란 뜻인 창크페 오피 와크팔라(Čhaŋkpé Ópi Wakpála)를 영어로 번역한 이름이다.
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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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자신들을 보호하고 부족의 죽음과 영토의 강탈, 파괴된 생활방식으로 얼룩진 자신들의 현재의 삶을 애도하고 이는 천국의 삶으로 바뀔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 원주민들은 워보카,[2] 차는 곰, 큰발 추장 등을 중심으로 '''유령춤(Ghost Dance)'''이라는 새로운 영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유령춤을 백인 개척민을 두렵게 만드는 악마적인 의식이며 국가에 대한 불복종이라는 이유로 금지했다. 이 무렵 훙크파파 부족의 타탕카 이요탕카가 휘말려들어 학살이 일어나기 2주 전에 인디언 경찰 당국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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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원주민들은 1890년 유령춤을 포기한 상태였고 폐렴을 앓고 있던 큰발이 자신을 따르는 미네콘주 라코타(수우) 지파[3] 와 함께 미국 백인들과 그나마 가깝게 지내던 마흐피야 루타(붉은 구름, Red Cloud)에게 도움을 받기 위하여 그가 있는 곳으로 피난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이 영혼의 춤을 포기한 것을 몰랐던 미 육군은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포사이스 육군 대령이 인솔하는 제7기병연대[4] 를 보냈고 이들은 항복하였다. 그리고 미 육군은 이들을 보호구역으로 보내기 위한 목적으로 운디드니 냇가에 천막을 친 350명 정도의 수우 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 때 큰발이 치료를 요청하자 군의관을 부르겠다며 기다리게 했다.
3. 전개
그런데 수우족의 무기를 수거하려는 미 육군과 이에 저항하는 수우족 전사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던 과정에서 검은 코요테(Black Coyote. 정확히는 그로 추정되는)라는 귀머거리 원주민이 자신의 무기를 백인 병사에게 건내주려고 하지 않고 총을 쏘아 미군 병사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로 인해 미 육군은 원주민들이 공격한다며 천막 안에 있던 원주민들에게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했고 대포와 기관총까지 쏘아대었다.
결국 백인 병사들은 피신처를 찾아 근처 언덕 너머로 도망간 원주민 대다수를 쫓아가서 죽였고 남은 50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당시 원주민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의 대부분은 활과 화살이었다. 총을 미군에게 전부 압수당했기 때문에 원주민들에겐 변변한 무기도 없었다.
미 육군에게 살육당한 대다수가 여자와 어린아이들이었다. 혼란 속에서 큰발 추장도 미군에게 살해되었다. 이때 눈발이 흩날렸는데 백인 병사들은 죽은 원주민들의 시신 위에 쌓인 눈을 걷어낸 뒤 시체를 구덩이에 던져버렸고 일당으로 2달러씩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부상을 입은 원주민들도 치료해달라고 했지만 무시하고 일부러 눈보라 치는 마차에 방치해서 몇 명이 얼어 죽었다. 그나마 나머지는 당시 의사로 있던 수우족 출신 오히예사(Ohíye S’a)[5] 와 그의 아내 엘레인 구달(Elaine Goodale)은 병사들의 이러한 잔혹성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하여 살아남은 부상자들을 데리고 와 보호구역 안의 교회에서 치료해서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다른 원주민들과 함께 운디드니에 간 백인 병사들은 그곳에서 늙은 장님 여인과 한 여자아기(진트칼라 누니)[6] 가 살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여자아이는 백인인 육군 장군에게 입양되었다. 그녀는 양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고[7] 백인으로 자라도록 키워졌으나, 그녀는 대다수의 백인들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동포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불행한 삶을 살다가 29~3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8]
미군 측 피해자는 대부분 아군의 오인사격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학살 당시에 백인 병사들은 광기에 차 있었다. 활과 화승총과 같은 전근대적인 무기를 사용하여 근대식 장총과 기관총 그리고 대포로 무장한 부대에게 피해를 주려면 대오를 갖추고 왕성한 용력과 철저한 정신력을 갖춘 공격부대를 편성하여 야밤에 기습을 하거나 또는 기동력과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각개전투를 하며 급습하고 급하게 빠지는 전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운디드니의 원주민 희생자들에 대한 기록물을 보면 정황상 미 육군 측이 선제기습을 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전투다운 전투도 없었고, 미군이 '''이미 항복한''' 민간인들에게 다짜고짜 기관총을 갈기고 돌격하다가 '''자기들끼리도''' 쏘아댄 것이다.
- 민간인 살상작전은 유난히 아군에 의한 오사가 많다. 군인들도 기계나 로봇 혹은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생존본능에 의한 전투활동이 아니라 순수한 제노사이드처럼 일방적인 살인행위를 벌일 때 엄청난 정신적 손상을 입는다. 때문에 민간인 학살은 대부분 마약/술을 이용한 심신미약 상태와 광신에 가까운 이데올로기가 결합되어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군사작전처럼 고도의 전술활동을 실행하게 되면 당연히(...). 집단활동의 정밀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4. 평가
사건 당시 기록화들에서는 평범한 전쟁으로 묘사되었고, 위 그림처럼 인디언은 야만인, 미군은 영웅으로 칭송하였다. 이에 공식표기도 운디드니 '전투(Battle)', 즉 양측이 동등하게 무장을 갖추고 싸운 것처럼 표기하고 있지만, 현실은 노약자, 어린이, 여성, 환자 등 최소한의 저항 능력조차 없는 약자들을 잘 훈련되고 철저하게 무장한 군인들이 일방적으로 쏴죽인 학살 사건이였고 이에 점점 전투(Battle) 표기를 학살(Massacare)로 바꾸고 있는 추세이다.
한편 상기한 학살사건의 가해자인 20명의 미 육군 장병들에게는 '전쟁'에서 승리했다며 명예 훈장이 국가로부터 주어졌다. 오늘날에는 원주민과 시민단체들이 명예 훈장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지적하고 있으나, 훈장 취소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4.1. 운디드니 점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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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80여 년 후인 1973년 2월 27일, AIM(미국 인디언 운동) 소속의 오글라라 라코타 부족 200여 명이 운디드니 마을[10] 을 점거하며 11명을 인질로 잡고는 보호구역 내에서의 부정부패 조사 및 처벌, 그리고 원주민들의 열악한 실태에 대한 해결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연방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무시하며 '당장 항복해라. 안 그러면 진압한다'며 경고를 했다. 결국 71일간의 대치 끝에 연방군 육군이 일방적으로 협상을 깨고 인디언 사무국(BIA) 측의 사병(私兵)들과 함께 무력으로 이들을 소탕하였다.[11] 또한 부정부패의 축으로 지목된 인디언 사무국 측에서 3년여에 걸쳐 폭력배를 사주하여 이에 동조한 원주민들을 살해하는 보복이 이어졌다. FBI의 개입 의혹이 무성하지만, 연방 정부는 현재까지 이를 부정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 과정에서 언론에 원주민들의 비참한 실상이 알려져, 원주민 인권에 대한 관점을 환기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대부(영화)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대배우 말론 브란도가 이 사건을 계기로 수상을 거부, 파장이 일기도 했다.
5. 관련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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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된 책으로는 <운디드니의 잃어버린 새: 라코타의 영혼Lost Bird of Wounded Knee: Spirit of the Lakota>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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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등이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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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는 2007년 HBO 제작하에 TV영화화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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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인식은 이렇게 '전투(battle)'로 보았다. 그 위에 붉은 스프레이로 학살(massacre)이라 고쳐놓았다.
미국에서도 20세기 들어서 (100여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관심을 받기 시작한 사건이라서 직접 다루는 매체는 적다.
- 폴아웃 시리즈
그러나 모티브가 된 사건과 달리, NCR의 학살 자체는 의도된 것이 아닌 일종의 사고였으며 뒤에 나오지만 이러한 사건의 근본 원인은 위대한 칸의 막장 짓거리 때문이었다. 애초에 NCR이 전쟁 전 미국이나 엔클레이브 같은 놈들이었으면 위대한 칸 전투원만 박살내려는 계획이 아닌 아예 위대한 칸 자체를 학살했을 가능성이 크고, 사과따윈 할리가 없을 것이다. 전쟁 전 미국 정부가 시민들이 시위를 하면 그냥 쫓아내는 수준이 아닌, 아예 다 죽여버리거나 심지어 마루타로 잡아갔다는 걸 생각하면 NCR의 행동보다 온건하게 행동할 것이라는 보장따위는 없다. 특히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 없이 버티는 현실의 미국 정부와는 달리 NCR은 공개적으로 사과라도 했다.
그리고 실제 아메리카 원주민과 달리 위대한 칸 자체도 억울한 희생자는 아니다. 맨날 마약을 빨아가며 NCR의 민간인들을 살해하고 약탈하는 등 모하비 황무지에 온갖 범죄를 저지른지라 빡칠대로 빡친 NCR 군대가 위대한 칸을 토벌한 것이다. 비터 룻에게 이것에 대해 물어보면, 그의 원래 아버지가 맨날 약을 빨아가며 NCR 시민들을 저격하는데, 어른이고 아이고 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뉴 캘리포니아 공화국의 공격이란게 지휘체계의 병크로 인해 학살이 되어버렸다는게 문제였지만.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과 달리 위대한 칸은 모하비 황무지의 원주민도 아닌 그냥 황무지에 흘러들어와서 약탈이나 하는 레이더에 지나지 않았다.
- 바이오쇼크
- 비고 모텐슨이 주연한 영화 '히달고' 초반부에 운디드니 학살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 드라마
- RED
- Run To The Hills
- We were all wounded at Wounded Knee
6. 기타
학살사건을 일으킨 제7기병연대는 약 60년 뒤 한국에서 노근리 학살 사건을 일으킨다.
[1] 파인 리지 보호구역 옆이다. 파인 리지는 인디언 보호구역이 다 그렇듯이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한 곳이며 자살율도 높다.[2] 아메리카원주민 밴드 Redbone이 그와 유령춤에 대한 노래 Wovoka를 부른 적 있다.[3] 차는 곰의 출신 부족이다.[4] 커스터가 지휘했었다.[5] 찰스 이스트먼(Charles Eastman)으로도 알려져 있다[6] Zintkala Nuni(라코타 어로 잃어버린 새 Lost Bird)[7] 하지만 진짜 애정을 준 사람은 양모이고 양부는 애정을 주지않았으며 나중엔 양부모가 이혼하게되었고 양부는 재혼하여 다른 주로 이사갔다.[8] 죽은 원인이 결혼했을때 남편으로부터 매독이 옮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남편과도 부부관계가 틀어져 몇주만에 결혼생활을 끝내고 말았다.[9] 컬러 버전: https://fineartamerica.com/featured/1-wounded-knee-1890-granger.html[10] 오글라라족이 정착한 파인 리지 보호구역 근처에 있다.[11] 진압과정에서 투항을 거부하던 원주민 2명을 사살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항복했다.[12] 표지 사진 속 사람이 '진트칼라 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