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조사략
1. 개요
''''본조사략''''이란 제목을 가진 고려시대 역사서에 관한 문서. '''본조(本朝)'''는 단순히 '우리나라', '우리왕조'란 뜻으로 고유명사는 아니다. 즉 사서의 진 제목은 '''사략''' 뿐이다.
고려시대엔 사략이란 이름을 가진 사서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삼국유사가 인용한 사'''략'''(史'''畧'''), 하나는 공민왕대에 제작된 사'''략'''(史'''略''')이다.
현재는 두 사서 모두 실전되었다.
2. 史畧
고려시대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서.가락기찬[1]
에 의하면 "한 가닥의 자줏빛 노끈이 드리워 여섯 개의 둥근 알을 내리니 다섯 개는 여러 고을로 들어가고 한 개가 이 성안에 남았다."라고 하였다. 즉 한 개는 수로왕이 되고 남은 다섯 개는 다른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니, 금관국을 다섯 숫자에 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본조사략(本朝史畧)'''에서는 금관국도 함께 꼽아 창녕이라 함부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按駕洛記賛云, “垂一紫纓下六圎卵五歸各邑一在兹城.” 則一爲首露王餘五各爲五伽耶之主, 金官不入五數當矣. 而本朝史畧並數金官而濫記昌寕誤.
-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5가야(五伽耶)조 서문 中.
공민왕 시기 편찬된 사'''략'''(史'''略''')과는 별개의 사서로 금관국을 제외한 5가야에 대해 쓴 책으로 추정되나 위의 기록과 940년 태조 왕건이 5가야의 이름을 고친 기록밖에 실리지 않아서 사서의 성격을 파악하기 어렵다.
삼국유사가 충렬왕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걸 감안하면 사략은 최소 충렬왕 이전에 제작되었다는 건 확실하다.
3. 史略
서기 1357년, 공민왕 재위 6년차에 제작된 고려의 역사서이다.
공민왕의 배향공신인 김해후 이제현이 감독을 맡아 제작했으며 당시엔 '''국사(國史)'''로 불렸다. 고려사 이제현 열전엔 이제현이 국사(사략) 편찬을 시작하자 당시 사관, 춘추관, 성균관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고 한다.
허나 시대가 시대였다보니 제작에 어려움을 겪었고, 제대로 완성시키지 못했다. 동문선 제92권에 수록된 '진고려국사전'과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 역사 기술 방식은 기년체(紀年體)[2] 였다.
- 기년(紀年), 전(傳), 지(志) 세 항목이 있었다.
- 국왕의 연대기는 기년에, 왕족 및 신료의 일대기는 전에, 고려의 문물은 지에 기록했다.
- 이제현은 16대 숙종까지 완성시켰다.
- 그를 보조하던 백문보, 이달충이 17대 예종부터 기록을 이어가야했지만 예종, 18대 인종 기년의 초고만 완성시켰을 뿐이다.
- 원고는 홍건적의 난을 거치며 사라졌고, 고려사가 편찬되던 시기엔 태조 기년과 기타 일부분만 남아있었다.
- 고려사 세가에 이제현의 논평이 수록된 것을 보아 고려사 제작자들이 이제현의 사략을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