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

 


<color=#373a3c> '''고려의 문하시중'''
채하중

<color=#373a3c> '''이제현'''

염제신
[image][1]
'''시호'''
<colbgcolor=white,#191919>'''문충공(文忠公)'''
'''작위'''
김해후(金海侯)[2]
'''군호'''
부원군(府院君)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
'''본관'''
경주 이씨
'''이름'''
이제현(李齊賢)
'''초명'''
이지공(李之公)
'''자'''
중사(仲思)
'''호'''
익재(益齋), 역옹(櫟翁), 실재(實齋)
'''출생'''
1288년 1월 28일
'''사망'''
1367년 8월 24일
1. 개요
2. 생애
3. 업적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자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조선 사림파의 사상적 시조로 고려의 시인·문신·성리학자·역사학자·화가. 초명은 이지공(李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역옹(櫟翁), 실재(實齋).
본관은 경주이며 경주 이씨(慶州 李氏)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派祖)이다.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의 아들이며 생전 작위는 김해 지역의 후작(金海侯), 이후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공민왕 때 졸하였고 시호는 문충(文忠).

2. 생애


1301년 성균시에 1등으로 합격했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후 성리학 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권보의 딸과 혼인하였고 1303년부터 본격적인 관직의 길에 오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 권씨와 사별하고 박거실의 딸과 재혼했다. 이후 박씨마저 사별해 서중린의 딸과 3번째로 재혼하였다.
1314년 당시 상왕이었던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 수도 연경으로 건너가 만권당에 머무르면서 원나라 유학 생활이 시작된다. 만권당에서 원나라의 유명한 한족 문인들과 교우를 맺으면서 학문의 견문을 넓혔고 이로써 원나라 내륙까지 다닌 얼마 안 되는 고려인이 된다. 1316년 충선왕을 대신해 사천성의 명산인 아미산을 유람하였고 1318년 충선왕이 절강성의 보타사에 행차할 때 시종하였으며 1323년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기 위해 감숙성의 타마사까지 다녀왔다. 이 때 겪은 경험이 만권당에서 맺은 교우와 마찬가지로 이제현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후 충선왕의 유배로 원나라 생활이 끝났고 입성책동이 활발해지자 이를 막는 상소를 올렸다. 충선왕의 방환 운동도 벌여서 입성책동도 막아냈고 충선왕의 거처도 티베트에서 타마사로 옮기게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업적이 인정되어 1325년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1339년 충혜왕이 조적의 난으로 인해 원나라에 붙잡혀 갈 때 다시 복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이 활동으로 인해 두문불출하게 되었고 이 기간에 역옹패설을 저술하게 되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고 판삼사사에 임명되면서 정치 활동을 재개하는데 여러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충목왕 사후 원나라에 있던 왕기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1351년 원나라 순제에 의해 충정왕폐위되고 왕기가 고려 국왕 공민왕으로 봉해졌다. 원나라에서 귀국길에 오른 공민왕은 그 사이의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신진사대부들의 수장 격인 이제현을 섭정승 권단정동성사(攝政丞權斷征東省事)[3]에 임명하였다.[4] 1356년 기철을 숙청하는 반원 운동이 벌어지자 문하시중이 되어서 사태를 수습하다가 1357년 치사하였다. 국정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홍건적의 침입으로 인해 개경이 함락당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갔을 때도 공민왕을 배알하고 호종하였다. 이제현은 1367년 세상을 떠났는데 사후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오성과 한음 일화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李恒福)이 어렸을 때 유모가 졸고 있는 사이에 우물에 빠질 뻔 한 적이 있는데 꿈 속에 나타난 노인의 호통소리에 잠에서 깬 유모에 의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 후 유모가 사당에서 이제현의 초상을 보고 꿈 속의 노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5]

3. 업적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이 매우 뛰어나서 이를 바탕으로 사학(史學)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민지의 본조편년강목을 중수하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현존하는 저서로는 익재난고역옹패설이 있다. 그밖에도 전해지지 않는 저서로는 백문보, 이충달과 함께 편찬했다는 사략(史略)이 있는데 이는 성리학적 유교사관에 입각해서 저술한 고려사 편년체 통사 사서로 판단되며, 고려사고려사절요에 들어 있는 이제현의 논찬을 통해 어느 정도 특징을 알 수 있다.
유학에 있어서는 안향-6군자[6]-이제현-이색으로 이어지는 고려 성리학 계보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그의 시인 사리화(沙里花)는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를 비판하는 시로도 유명하다

黃雀何方來去飛 황작하방래거비

一年農事不曾知 일년농사부증지

鰥翁獨自耕耘了 환옹독자경운료

耗盡田中禾黍爲 모진전중화서위

참새야 어디서 오가며 나느냐

일 년 농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늙은 홀아비 홀로 갈고 맸는데

밭의 벼며 기장을 다 없애다니.


4. 기타


고려사에 있는 그의 열전을 보면 그가 충선왕과 나누었던 대화나 각종 상소들이 자세하게 올라와 있으며,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제현이 신돈을 비판하였던 일도 고려사에 전하는데, 공민왕에게 '신돈의 골상이 옛날의 흉악한 자들과 같으니 가까이하지 말라'고 충언을 올렸다고 한다.[7] 이후 신돈을 반역 혐의로 처형시킨 뒤 공민왕은 미리 앞을 내다본 이제현의 식견에 감탄했다고 한다.
공민왕의 2비 혜비 이씨가 이제현의 딸로, 그녀는 공민왕이 시해당한 뒤에 공민왕의 5비인 신비 염씨와 함께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한 후비들은 공민왕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했다.
이제현의 차녀가 공조전서 문창공 이계손에게 시집을 갔는데 여기서 아들 즉 이제현의 외손자가 연안 이씨 통례문부사공파중의 소윤공파 파조인 삼사사 이척이다.
대체적으로 지공거 문제와 관련해서 숱한 지탄을 받는 대표 인물로 그래서인지 조선왕조에선 학식이 뛰어나나 인성은 그에 못따라간다고 해서 높은 평을 받지 못했다. 대신 토지제도에 대한 문제에 처음으로 연구한 인물 중 하나로 뽑힌다.또한 자신도 문관임에도 이제까지 고려 문관들의 탁상공론의 원흉을 문아에만 치중한 과거제로 꼽은 첫 인물이다. 고려의 문관과거제에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인물이다. 정작 이제현 본인도 유교에 대해서 공론만 떠드는 수준 밖에 안된다고 고려사 열전에 기록했다.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원로배우 송재호가 열연했다. 염제신, 이인복과 셋이 세트로 몰려다니며 늘 나라걱정에 여념이 없지만, 막상 행동하기에는 살짝 모자란 유약한 샌님 타입으로 묘사된다.

5. 관련 문서




[1] 이 초상화는 고려 시대에 그려진 초상화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작품이다. 이제현이 33세가 되던 1319년(충선왕 6)에 충선왕과 더불어 원나라에 방문했을 때 원나라의 화가인 진감여가 그리고 석학이었던 탕병룡이 찬문을 지었으며 이제현은 고려로 돌아올 때 이 초상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잃어버렸다가 나중에 다시 원나라를 방문했을 때 우연히 되찾았고, 1364년에 고려에서 다시 그려진 자신의 초상화와 이 초상화를 비교하면서 감회를 느끼며 시도 지었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엄지손가락이 삐져나와 있기도 하다.[2] 김해후에 봉해지고 문하시중 직위를 받음.[3] 섭정승은 고려의 국무를 관장하였던 도첨의사사의 최고위직인 정승을 대리하는 직책이고 권단정동성사는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던 정동행성의 업무를 임시로 총괄하는 직책이다. 이제현은 명목상 고려왕이 겸임하던 정동행성의 최고위직인 승상에 임명된 것이다.[4] 이 때 충정왕 대의 권력자였던 모후 희비의 오빠 윤시우탄핵해 귀양보냈다.[5] 이항복은 이제현의 사촌형제인 상서공(尙書公) 이과(李薖)의 후손이라 직계손은 아니다. 이제현은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이고 이과는 상서공파(尙書公派)의 파조이다.[6] 안향의 대표적인 여섯 제자로 이진, 권부, 백이정, 우탁, 이조년, 신천. 이제현은 이진의 아들이자 권부의 사위, 백이정의 제자이다.[7] 이에 원한을 품은 신돈은 이제현을 헐뜯었지만 연로한 탓에 별다른 처벌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