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향공신
1. 개요
配享功臣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이름을 떨친 공신들을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모셔놓은 것을 말한다. 이름하여 '종묘배향공신'. 당나라의 제도에서 유래했다. 왕이 사망했을 경우 그의 치세에 큰 공을 세운 명신을 뽑아서 그 왕과 함께 왕실 사당인 종묘에 모시는 것으로, '''당대 최고의 권력가'''를 의미한다. 때문에 3대 영의정, 3대 대제학도 종묘배향공신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러 왕의 치세에 벼슬을 했던 신하가 있어도 공신으로는 한 번. 즉 한 명의 왕과만 함께 배향된다. 이것 때문에 가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일반적으로는 선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먼저 재위한 왕의 공신으로 올라간다.
공신이라는 위신에 걸맞게 특혜가 엄청났는데 심지어 후손들이 공신 가문이라는 이유로 처벌이 면제되거나 약화되는 해택을 누리기도 했다.
2. 역대 왕조의 배향공신
2.1. 한국
2.1.1. 고려
2.1.2. 조선
- 철종 - 이헌구, 익평군 이희, 김수근[82]
- 고종 - 박규수[83] ,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 순종 - 송근수, 김병시, 이경직[84] , 서정순[85] , : 들어갔으나 해방 후 위패가 사라졌다. 아래 여담 참조.
2.2. 중국
2.2.1. 당(통일왕조)
2.2.2. 북송 및 남송
2.2.3. 명나라
2.2.4. 청나라
3. 문묘 및 종묘 동시 배향 인물
공신은 아니지만 공자의 사당인 성균관 문묘나 향교에 모시는 유명한 선비로 '문묘명현(文廟名賢)'이라는 것이 있다. 한국의 유학자로는 18인이 모셔져 있는데 이들을 '문묘 18현(文廟十八賢)'이라고 부른다. 문묘에 모셔지는 사람의 신위는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성리학자로 인정받은 자의 신위로서 유교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이 현인을 배출한 인물의 가문은 조선을 대표하는 국반(國班)으로 명실공히 인정받았다.
따라서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본인은 물론 물론 양반 사대부 가문들과 학통을 잇는 후대 유학자들에게 있어 엄청난 영광이었고[86][87] 그에 걸맞게 단순히 학문의 업적만 가지고 될 수 있는게 아니였다. 때문에 문묘 당대의 정치상황이 고려되어 수많은 갑론을박을 거치며 정해졌으며, 후대에 정치 상황이 바뀌면 추가로 모셔지거나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숙종시절 환국으로 정국이 어수선할 때 이이와 성혼은 문묘에서 빠졌다가 다시 배향되기를 반복했다. 오늘날에는 둘 다 문묘에 배향되어 있다. 또한 남인은 서인 노론이 정권을 잡은 17세기 이후 단 한 명도 문묘 배향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88]
조선조에 와서 문묘와 종묘에 모두 배향된 인물은 단 6명에 불과하며, 이들을 배출한 가문은 왕조를 대표하는 가문, 즉 국반(國班)으로 인정받았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
3.1. 조선 문묘 18현
전왕조 예우 차원에서 신라시대 2인(설총, 최치원), 고려시대 2인(안향, 정몽주), 나머지 14명은 조선시대 인물이다.
4. 여담
4.1. 고려
- 고려의 배향공신은 태조가 6명으로 가장 많다. 다음은 성종, 예종과 공민왕으로 각 5명이지만, 예종의 공신 왕자지가 취소되어 성종과 공민왕이 태조 다음으로 가장 많다.
- 고려의 배향공신은 기록이 다수 실전되어 생애는 커녕 시호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최윤의와 문공원 같은 경우는 고려사에선 실전됐지만 본인의 묘지명에서 찾을 수 있었던 특이 케이스다.
- 고려시대 가장 많은 배향공신을 배출한 가문은 경주 최씨이다. 총 5명. 그 다음은 해주 최씨 가문으로 총 4명. 이천 서씨, 정주 류씨는 각 3명, 강릉 김씨, 무송 유씨, 파평 윤씨, 남평 문씨, 성주 이씨, 횡천 조씨는 2명씩 배출했다.
- 고려의 배향공신은 조선의 배향공신보다 친인척으로 연결된 정도가 더욱 심했다. 이는 고려의 지배 계층이 문벌귀족이었기 때문이다.
- 태조의 배향공신 중 후손도 배향공신이 된 공신은 유금필 뿐이다. 그의 후손 유필이 의종의 공신이 되었다.
- 충혜왕의 배향공신 성산후 이조년은 본인 열전엔 묘정에 배향되었다고 하지만 태묘 예지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4.2. 조선
- 태조는 7명의 배향공신이 있었고 태조보다 많은 공신을 배향한 국왕은 없다.
- 숙종시기 이후로 당쟁이 심화됨에 따라 배향공신도 왔다갔다 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현종의 배향공신에는 원래 조경이 있었는데 예송논쟁 시기에 윤선도를 옹호했던 일 때문에 서인에게 밉보였는지 숙종 6년의 경신환국 이후 출향되었으며 김종수는 정조의 배향공신이었지만 시파가 집권하자 출향되었다.
- 이완용이 종묘에 최소 5년간 배향되는 대참사가 있었다. 1928년 5월에 대한제국 시기의 고위 관료와 황실 인사들이 후보 추천과 투표를 거쳐 순종의 배향공신으로 송근수·김병시·이경직·서정순 4인을 정한 후, 순종의 후사였던 황태자 이은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다[89] .
그러나 며칠 후 이왕직 장관인 한창수의 주장에 따라 김병시·이경직이 보류되고 이완용이 추가되었으며[90] , 배향공신 논의에 참여했던 고위 관료 출신과 황실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자 7월에 이왕직은 배향공신의 종묘 배향을 일단 보류하였다.
하지만 1940년 3월 11일에 송근수, 12일에 이완용, 13일에 서정순을 종묘에 배향하는 의식을 정식으로 치렀으며[91] , 이왕직에서 간행한 기록물에 이를 등재하였다.
해방 후에 이완용의 신위는 당연히 치워졌으며, 김병시·이경직의 종묘 배향이 정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아서 다수 기록물에 순종의 배향공신이 송근수·서정순 2인만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1940년 3월 11일에 송근수, 12일에 이완용, 13일에 서정순을 종묘에 배향하는 의식을 정식으로 치렀으며[91] , 이왕직에서 간행한 기록물에 이를 등재하였다.
해방 후에 이완용의 신위는 당연히 치워졌으며, 김병시·이경직의 종묘 배향이 정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아서 다수 기록물에 순종의 배향공신이 송근수·서정순 2인만 기재되어 있다.
5. 같이보기
[A] A B C D 개국일등공신, 삼한벽상공신[1] 개국이등공신[B] A B 개국공신[2] 개국공신, 광국익찬공신(匡國翊贊功臣)[3] 공신[4]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5]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 수정공신(守正功臣)[6] 추충좌리동덕공신(推忠佐理同德功臣), 광국공신(匡國功臣)[7] 치성공신(致盛功臣), 수충창궐공신(輸忠創闕功臣)[8] 현종이 당시 무신정변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하여 왕씨 성을 하사하였다. 원래의 이름은 이자림(李子琳).[9]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10] 이 집안은 살아서는 3대가 모두 재상을 지냈고 죽어서는 3대가 모두 종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다.[11] 추충진절문덕광국공신(推忠盡節文德匡國功臣)[12] 여요전쟁 때 불타버린 실록을 복원한 '7대 실록'의 편찬자.[13]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14] 추성좌세보사공신(推誠佐世保社功臣)[15] 추충찬화강정수제공신(推忠贊化康靖綏濟功臣)[16] 추충찬화탕구정새공신(推忠贊化蕩寇靜塞功臣)[17] 협모공신(協謀功臣)[18] 보정공신(輔正功臣), 추성봉국공신(推誠奉國功臣)[19]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20]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21] 탐욕이 심하고 부정부패했다 하여 배향이 철회되었다.[22]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23]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동덕찬화공신호(同德贊化功臣)[24]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25]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26] 단성좌리공신(端誠佐理功臣)[27]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28]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城直節同德贊化功臣)[29] 연저수종일등공신(燕邸隨從一等功臣), 안사공신(安社功臣),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30] 분충동덕분의개국정난정사공신(奮忠仗義同德開國靖難定社功臣)[31] 동덕분의개국정난정사좌명공신(同德奮義開國靖難定社佐命功臣)[32] 순충분의개국공신(純忠奮義開國功臣)[33] 남은의 형. 동생과는 달리 무인정사 당시 이방원의 편에 속해 있었기에 살아남았고, 이후 부귀영화를 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태종이 태상왕이 된 뒤 그 동생이랑 같이 배향공신에 추가되었다.[34] 순충분의좌명개국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35] 태조의 사위로 경순공주의 남편이다. 무인정사 당시에 정도전과 함께 정안군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었으나 후일 태종이 태상왕이 된 뒤 배향공신에 추가되었다.[36] 순충분의개국정사좌명공신(純忠奮義定社佐命開國功臣)[37] 순충분의좌명개국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38] 남재의 동생. 무인정사 당시 정도전과 함께 정안군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었으나 후일 태종이 태상왕이 된 뒤 배향공신에 추가되었다. 이쪽의 경우 태종이 진짜로 제거해버린걸 후회한 말을 했다.[39] 수충좌명개국공신(輸忠佐命開國功臣)[40] 순충분의좌명개국정사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定社功臣)[41] 분충장의동덕정사좌명공신(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42] 추충장의정사정난좌명공신(推忠仗義靖難定社佐命功臣)[43] 추충분의개국정사공신(推忠奮義開國定社功臣)[44] 추충정난정사좌명공신(推忠靖難定社佐命功臣)[45] 추충분의좌명공신(推忠紛議佐命功臣)[46] 양녕대군의 세자 시절 글스승이기도 하다.[47]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48] 4군의 개척자로 조영무와 더불어 몇 안되는 무장 정승이며 배향된 걸로는 조영무와 최윤덕이 유일하다.[49] 세종의 대군 시절 글스승이기도 하다.[50]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協策靖亂同德佐翼功臣)[51] 수충위사협찬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功臣)[52] 명나라 영락제, 선덕제의 처남이기도 하다.[53]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보사병기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C] A B 4차례에 걸쳐 공신에 책봉되었다.[54] 추충좌익정난익대공신(推忠佐翼定難翊戴功臣)[55]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보사병기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56] 수충경절좌익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輸忠勁節佐翼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57]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좌리공신(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佐理功臣)[58]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추성보사우세정난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推誠保社祐世定難功臣)[59]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60]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추성보사우세정난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推誠保社祐世定難功臣)[61] 중종 때 두 차례에 걸쳐 14년이나 정승을 맡았고 그중에 11년은 영의정을 한 중종대의 명재상이다.[62] [63] 을사사화 결과로 보익공신 2등이 되었으나, 선조10년(1577)에 삭훈(공신칭호박탈)되었다.[64] 기묘사화 때 화를 입었다고 중종 말 중종에 의해 복권한다.[65] [66] 명종의 장인인 청릉부원군 심강의 아버지. 그의 손자가 붕당정치의 시작과 관련된 인물인 심의겸이다.[67] 을사사화 결과로 보익공신 3등이 되었으나, 본인은 당시 극력 사양, 거절했으며 을사사화 재평가가 일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선조10년(1577)에 삭훈 되었다.[68] [D] A B C D E F 조선조 역사상 단 6명 뿐인 문묘 동시 종사 배향공신이다.[69] 을사사화 결과로 보익공신 3등이 되었으나, 선조10년(1577)에 삭훈(공신칭호박탈)되었다.[70]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71] 선조의 고명대신 7명중 하나이다.[72]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효충분위병기결책영국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效忠奮威炳幾決策寧國功臣)[E] A B C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73]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아들이자 수제자로, 그의 제자에는 대표적으로 송시열, 송준길이 있다.[74] 대동법 시행의 핵심 인물인 김육의 장남. 김좌명의 동생인 김우명은 현종 비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이다.[F] A B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奮忠效義炳幾協謨保社功臣)[75] 최명길의 손자.[76] 효종의 배향공신 김좌명의 아들.[77] 《구운몽》, 《사씨남정기》를 쓴 김만중이기도 하다.[78]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幾効力奮武功臣)[79] 순조 7년(1807)에 출향되나 고종 때 복귀[80] 소론으로 대왕대비가 중용했다. 그러나 대왕대비의 2차수렴시도를 저지시켰다.[81] 8자흉언사건을 꺼내서 벽파의 재기의 뿌리를 제거해버렸다.[82] 철종 비인 철인왕후 김씨의 백부이다.[83]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해결자이자 개화파의 선조격인 인물이다.[84] 을미사변 당시 일본군을 막아서다 살해당한 인물이다.[85] 네 명 모두 순종이 즉위하기 전에 죽었으므로 실제 순종을 모신 사람은 없다.[86] 그냥 당사자들만 되고 당사자 가문들만 혜택보고 그걸로 끝인 종묘 배향 공신들과 달리 문묘 배향은 사림과 유학자들에게 있어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조선 사림은 중요 기반과 결집의 구심점은 학통이며''' 자신들이 잇는 학통에 속한 선대 유학자가 문묘 배향이 되느냐 마느냐는 사림과 사림에 속한 양반 사대부들에게 있어 굉장히 중대한 사안이였다. 때문에 이 문묘 배향이 의논되었다 하면 관료들의 거센 주장에, 성균관 유생들, 지방 사림들의 집단 상소 러쉬가 비일비재했고 심지어 임금과 사림간의 정치적 줄타기가 오갔다.[87] 조선 성리학의 거목인 퇴계 이황 선생만 하더라도 문묘 배향을 해야 한다는 사림들의 거센 성토에도 왕이 허락하지 않아서 결국 문묘 배향 요청 41년이 지난 뒤에 문묘 배향이 되었을 정도다.[88] 소론은 박세채가 18현 중 마지막 인물로 배향되긴 했다.[89]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純宗孝皇帝純明孝皇后祔廟主監儀軌)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3일자 '四人抄啓別單書入之意敢稟答曰知道(4인을 초계하여 별단으로 들이니 품의에 대해 답하시기를 알았다)'[90]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9일 '下敎曰忠文公金炳始忠肅公李耕稙姑爲保留內 閣總理大臣李完用添書以入(하교하기를, 충문공 김병시·충숙공 이경직을 보류하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추가 기재하여 넣으라)'[91] 종묘숙직일지(宗廟宿直日誌) 1940년 3월 11·12·13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