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향공신

 

1. 개요
2. 역대 왕조의 배향공신
3. 문묘 및 종묘 동시 배향 인물
3.1. 조선 문묘 18현
4. 여담
4.1. 고려
4.2. 조선
5. 같이보기


1. 개요


配享功臣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이름을 떨친 공신들을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모셔놓은 것을 말한다. 이름하여 '종묘배향공신'. 나라의 제도에서 유래했다. 왕이 사망했을 경우 그의 치세에 큰 공을 세운 명신을 뽑아서 그 왕과 함께 왕실 사당인 종묘에 모시는 것으로, '''당대 최고의 권력가'''를 의미한다. 때문에 3대 영의정, 3대 대제학도 종묘배향공신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러 왕의 치세에 벼슬을 했던 신하가 있어도 공신으로는 한 번. 즉 한 명의 왕과만 함께 배향된다. 이것 때문에 가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일반적으로는 선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먼저 재위한 왕의 공신으로 올라간다.
공신이라는 위신에 걸맞게 특혜가 엄청났는데 심지어 후손들이 공신 가문이라는 이유로 처벌이 면제되거나 약화되는 해택을 누리기도 했다.

2. 역대 왕조의 배향공신



2.1. 한국



2.1.1. 고려



묘정
시호
작호
공신
이름
출생
사망
배향
비고
태조
무열공(武烈公)

[A]
배현경(裵玄慶)
?
936
994

충렬공(忠烈公)

[A]
홍유(洪儒)
?
936
994

무공공(武恭公)

[A]
복지겸(卜智謙)
?
?
994

장절공(壯節公)

[A]
신숭겸(申崇謙)
?
927
994

충절공(忠節公)

[1]
유금필(庾黔弼)
?
941
994

희개공(熙愷公)


최응(崔凝)
898
932
1027

혜종
엄의공(嚴毅公)

[B]
박술희(朴述熙)
?
945
994
태조의 고명대신
극익공(克翼公)

[B]
김견술(金堅術)
?
?
994

정종
위정공(威靜公)

[2]
왕식렴(王式廉)
?
949
994

광종
광위공(匡衛公)
-
[3]
유신성(劉新城)
?
?
994

정민공(貞敏公)
-
-
서필(徐弼)
901
965
994

경종
민휴공(敏休公)
-
-
최지몽(崔知夢)
907
987
994

광익공(匡益公)
-
-
박양유(朴良柔)
?
?
1027

성종
광빈공(匡彬公)
-
-
최량(崔亮)
?
995
998

문정공(文貞公)
청하후(淸河侯)
-
최승로(崔承老)
927
989
998

정헌공(貞憲公)
-
-
이몽유(李夢游)
?
?
1027

장위공(章威公)
-
-
서희(徐熙)
942
998
1027



-
이지백(李知白)
?
?
1027

목종
정신공(貞信公)
-
-
한언공(韓彦恭)
940
1004
1027

충의공(忠懿公)

-
최숙(崔肅)
?
?
1027
최승로의 아들

-
김승조(金承祚)
?
?
1027

현종
인헌공(仁憲公)
천수현개국후(天水縣開國侯)
[4]
강감찬(姜邯贊)
948
1031


절의공(節義公)
청하현개국자(淸河縣開國子)
[5]
최항(崔沆)
972
1024


정숙공(貞肅公)
청하현개국백(淸河縣開國伯)
[6]
최사위(崔士威)
961
1041
1052

영숙공(英肅公)
개성현개국백(開城縣開國伯)
[7]
왕가도(王可道)
?
1034

[8]
덕종
양의공(襄懿公)
-
[9]
유소(柳韶)
?
1038


정종
원숙공(元肅公)
-
-
서눌(徐訥)
?
1042

서필의 손자
서희의 아들[10]
경문공(景文公)
-
[11]
황주량(黃周亮)
?
?

[12]
문헌공(文憲公)
-
[13]
최충(崔冲)
984
1068
1086

정간공(貞簡公)
-
-
김원충(金元冲)
?
?
1086

문종
순공공(順恭公)
-
-
최제안(崔齊顔)
?
1046
1086

장화공(章和公)
경원군개국공(慶源郡開國公)
[14]
이자연(李子淵)
1003
1061
1086
이자겸의 조부
경숙공(景肅公)
-
-
왕총지(王寵之)
?
1067
1086

문화공(文和公)
-
[15]
최유선(崔惟善)
?
1075
1086
최충의 아들
순종
문충공(文忠公)
-
-
이정공(李靖恭)
?
1099
1107

선종
정헌공(貞獻公)
장연현개국백(長淵縣開國伯)
[16]
문정(文正)
?
1093


광숙공(匡肅公)
-
-
유홍(柳洪)
?
1091

명의태후의 아버지
문정공(文貞公)
-
-
김상기(金上琦)
1031
?


숙종
충겸공(忠謙公)
-
[17]
소태보(邵台輔)
1034
1104


경렬공(景烈公)
-
-
왕국모(王國髦)
?
1095


충경공(忠景公)
대령군개국후(大寧郡開國侯)
[18]
최사추(崔思諏)
1034
1115

최충의 손자
예종
정간공(貞簡公)
-
-
유인저(柳仁著)
?
1113


문숙공(文肅公)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19]
윤관(尹瓘)
?
1111
1130

문성공(文成公)
-
[20]
김인존(金仁存)
?
1127


충렬공(忠烈公)
-
-
위계정(魏繼廷)
?
1107



-
-




배향 철회[21]
인종
장경공(莊景公)
-
[22]
최사전(崔思全)
1067
1139
1147

문열공(文烈公)
낙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候)
[23]
김부식(金富軾)
1075
1151
1153
<삼국사기>의 저자
의종


최윤의(崔允儀)



<상정고금예문>의 저자
공숙공(恭肅公)


유필(庾弼)






문공원(文公元)




명종
문정공(文定公)


윤인첨(尹鱗瞻)



윤관의 손자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




신종
문경공(文景公)


조영인(趙永仁)




희종
문의공(文懿公)


최선(崔詵)




양숙공(良淑公)


임유(任濡)




강종
익렬공(翊烈公)


정극온(鄭克溫)




고종
문정공(文定公)


조충(趙冲)



조영인의 아들



이항(李杭)




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




원종


이세재(李世材)






채정(蔡楨)




충렬왕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




문량공(文良公)


설공검(薛公儉)




충선왕
충정공(忠正公)


홍자번(洪子藩)




문정공(文定公)


정가신(鄭可臣)




충혜왕
사숙공(思肅公)


한악(韓渥)







이규(李揆)




문열공(文烈公)
성산군(星山君)
[24]
이조년(李兆年)
1269
1343


충정왕
문정공(文貞公)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25]
이암(李嵒)
1297
1364
1375

문충공(文忠公)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26]
이인복(李仁復)
1308
1374
1375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형
공민왕
정헌공(正獻公)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
왕후(王煦)
1296
1349
1374
본래 이름은 권재(權載)
문충공(文忠公)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
이제현(李齊賢)
1287
1367
1376
혜비 이씨의 아버지
문충공(文忠公)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
[27]
이공수(李公遂)
1308
1366
1376

양평공(襄平公)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28]
조익청(曺益淸)
?
1353
1376

문희공(文僖公)
서령군(瑞寧君)
[29]
유숙(柳淑)
1316
1368
1376


2.1.2. 조선


묘정
시호
작호
공신
이름
출생
사망
배향
비고
태조
문충공(文忠公)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30]
조준(趙浚)
1346
1405
1410

경무공(景武公)
의안대군(義安大君)
[31]
이화(李和)
1348
1408
1410
태조의 이복동생
충경공(忠景公)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32]
남재(南在)
1351
1419
1422
[33]
경무공(景武公)
흥안군(興安君)
[34]
이제(李濟)
?
1398
1422
[35]
양렬공(襄烈公)
청해군(靑海君)
[36]
이지란(李之蘭)
1331
1402
1410
태조의 의형제
강무공(剛武公)
의성군(宜城君)
[37]
남은(南誾)
1354
1398
1421
[38]
충정공(忠靖公)
한산군(漢山君)
[39]
조인옥(趙仁沃)
1347
1396
1410
정종
안양공(安襄公)
익안대군(益安大君)
[40]
이방의(李芳毅)
1360
1404
1422
태조의 3남
태종
문충공(文忠公)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41]
하륜(河崙)
1347
1416
1424

충무공(忠武公)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42]
조영무(趙英茂)
1338
1414
1424
익경공(翼景公)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43]
정탁(鄭擢)
1363
1423
1424
양도공(襄度公)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44]
이천우(李天祐)
?
1417
1424
태조의 조카
경절공(景節公)
계성군(鷄城君)
[45]
이래(李來)
1362
1416
1424
[46]
세종
익성공(翼成公)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47]
황희(黃喜)
1363
1452
1452
정렬공(貞烈公)


최윤덕(崔閏德)
1376
1445
1452
[48]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
1369
1439
1452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1374
1446
1452
문정공(文靖公)

이수(李隨)
1374
1430
1452
[49]
강정공(剛靖公)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
1394
1462
1865
세종의 큰형
정효공(靖孝公)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
1396
1486
1865
세종의 작은형
문종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
1376
1453
1454

세조
익평공(翼平公)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50]
권람(權擥)
1416
1465
1470
양절공(襄節公)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51]
한확(韓確)
1403
1456
1470
성종의 외조부[52]
충성공(忠成公)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53]
한명회(韓明澮)
1415
1487
1489
예종, 성종의 장인[C]
예종
문헌공(文獻公)
[54]
박원형(朴元亨)
1411
1469
1471
성종
문충공(文忠公)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55]
신숙주(申叔舟)
1417
1475
1496
[C]
충정공(忠貞公)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56]
정창손(鄭昌孫)
1402
1487
1496
충정공(忠貞公)
[57]
홍응(洪應)
1428
1492
1496
중종
무열공(武烈公)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58]
박원종(朴元宗)
1467
1510
1546
충정공(忠定公)

[59]
성희안(成希顔)
1461
1513
1546
문정공(文貞公)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60]
유순정(柳順汀)
1459
1512
1546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1462
1538
1546
[61]
인종
문희공(文僖公)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62]
홍언필(洪彦弼)
1476
1549
1554
[63]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
1478
1543
1554
[64]
명종
충혜공(忠惠公)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65]
심연원(沈連源)
1491
1558
1569
[66][67]
문원공(文元公)
여성군(驪城君)
[68]
이언적(李彦迪)
1491
1553
1546
[D][69]
선조
충정공(忠正公)


이준경(李浚慶)
1499
1572
1610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1501
1570
1610
[D]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1536
1584
1866
[D]
인조
문충공(文忠公)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70]
이원익(李元翼)
1547
1634
1651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
1566
1628
1651
[71]
문충공(文忠公)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72]
김류(金瑬)
1571
1648
1651
충정공(忠定公)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E]
이귀(李貴)
1557
1633
1651
충익공(忠翼公)

[E]
신경진(申景禛)
1575
1643
1651
충정공(忠定公)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E]
이서(李曙)
1580
1637
1651
정효공(貞孝公)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
1592
1656
1865
인조의 동생
효종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1570
1652
1661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
1574
1656
1661
[73][D]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1607
1689
1778
[D]
충경공(忠敬公)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
1622
1658
1865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
1628
1692
1886
민유중의 형
문정공(文貞公)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
1630
1687
1890
숙종의 장인
현종
익헌공(翼憲公)


정태화(鄭太和)
1602
1673
1676

충숙공(忠肅公)


김좌명(金佐明)
1616
1671
1676
[74]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
1629
1689
1886
문충공(文忠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F]
김만기(金萬基)
1633
1687
1651
숙종의 장인
숙종
문충공(文忠公)


남구만(南九萬)
1629
1711
1722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
1631
1695
1722
[D]
충정공(忠正公)

윤지완(尹趾完)
1635
1719
1772
문정공(文貞公)

최석정(崔錫鼎)
1646
1715
1722
[75]
문충공(文忠公)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F]
김석주(金錫胄)
1622
1634
1886
[76]
문효공(文孝公)

김만중(金萬重)
1637
1692
1886
김만기의 동생[77]
경종
혜정공(惠定公)


이유(李濡)
1645
1721
1726

충문공(忠文公)


민진후(閔鎭厚)
1659
1720
1726

영조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1648
1722
1778
김수항의 아들
충정공(忠貞公)

최규서(崔奎瑞)
1650
1735
1778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
1664
1736
1778
숙종의 처남
문충공(文忠公)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
[78]
조문명(趙文命)
1680
1732
1778
효장세자의 장인
충정공(忠靖公)


김재로(金在魯)
1682
1759
1778

장조
혜정공(惠定公)


이종성(李宗城)
1692
1759
1899

정헌공(正獻公)


민백상(閔百祥)
1711
1761
1899
민진원의 아들
정조
문충공(文忠公)


김종수(金鍾秀)
1728
1799
1802
[79]
충문공(忠文公)

유언호(崔奎瑞)
1730
1796
1802

충문공(忠文公)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1765
1832
1833
순조의 장인
순조
충정공(忠正公)


이시수(李時秀)
1745
1821
1836
[80]
문충공(文忠公)


김재찬(金載瓚)
1746
1827
1836
문정공(文貞公)


김이교(閔百祥)
1764
1832
1836
[81]
충정공(忠正公)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
1788
1836
1865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문충공(文忠公)


조득영(趙得永)
1762
1824
1836

충경공(忠敬公)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
1776
1846
1865
효명세자의 장인
문조
문헌공(文獻公)


남공철(趙萬永)
1760
1840
1875
남이의 후손
문헌공(文獻公)


김로(金鏴)
1783
?
1875

문숙공(文肅公)


조병구(趙秉龜)
1801
1845
1875
조만영의 아들
신정왕후의 오라비
헌종
문익공(文翼公)


이상황(李相璜)
1763
1841
1851

문충공(文忠公)


조인영(趙寅永)
1782
1850
1851
조만영의 동생
  • 철종 - 이헌구, 익평군 이희, 김수근[82]
  • 고종 - 박규수[83],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 순종 - 송근수, 김병시, 이경직[84], 서정순[85], : 들어갔으나 해방 후 위패가 사라졌다. 아래 여담 참조.

2.2. 중국



2.2.1. 당(통일왕조)



2.2.2. 북송남송



2.2.3. 명나라



2.2.4. 청나라



3. 문묘 및 종묘 동시 배향 인물


공신은 아니지만 공자의 사당인 성균관 문묘나 향교에 모시는 유명한 선비로 '문묘명현(文廟名賢)'이라는 것이 있다. 한국의 유학자로는 18인이 모셔져 있는데 이들을 '문묘 18현(文廟十八賢)'이라고 부른다. 문묘에 모셔지는 사람의 신위는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성리학자로 인정받은 자의 신위로서 유교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이 현인을 배출한 인물의 가문은 조선을 대표하는 국반(國班)으로 명실공히 인정받았다.
따라서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본인은 물론 물론 양반 사대부 가문들과 학통을 잇는 후대 유학자들에게 있어 엄청난 영광이었고[86][87] 그에 걸맞게 단순히 학문의 업적만 가지고 될 수 있는게 아니였다. 때문에 문묘 당대의 정치상황이 고려되어 수많은 갑론을박을 거치며 정해졌으며, 후대에 정치 상황이 바뀌면 추가로 모셔지거나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숙종시절 환국으로 정국이 어수선할 때 이이성혼은 문묘에서 빠졌다가 다시 배향되기를 반복했다. 오늘날에는 둘 다 문묘에 배향되어 있다. 또한 남인서인 노론이 정권을 잡은 17세기 이후 단 한 명도 문묘 배향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88]
조선조에 와서 문묘와 종묘에 모두 배향된 인물은 단 6명에 불과하며, 이들을 배출한 가문은 왕조를 대표하는 가문, 즉 국반(國班)으로 인정받았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

3.1. 조선 문묘 18현


전왕조 예우 차원에서 신라시대 2인(설총, 최치원), 고려시대 2인(안향, 정몽주), 나머지 14명은 조선시대 인물이다.

4. 여담



4.1. 고려


  • 고려의 배향공신은 태조가 6명으로 가장 많다. 다음은 성종, 예종과 공민왕으로 각 5명이지만, 예종의 공신 왕자지가 취소되어 성종과 공민왕이 태조 다음으로 가장 많다.
  • 고려의 배향공신은 기록이 다수 실전되어 생애는 커녕 시호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최윤의문공원 같은 경우는 고려사에선 실전됐지만 본인의 묘지명에서 찾을 수 있었던 특이 케이스다.
  • 고려의 배향공신은 조선의 배향공신보다 친인척으로 연결된 정도가 더욱 심했다. 이는 고려의 지배 계층이 문벌귀족이었기 때문이다.
  • 태조의 배향공신 중 후손도 배향공신이 된 공신은 유금필 뿐이다. 그의 후손 유필이 의종의 공신이 되었다.
  • 사후 묘정에 배향됐지만 취소된 공신은 예종 태묘의 왕자지, 강종 태묘의 최이이다.
  • 충혜왕의 배향공신 성산후 이조년은 본인 열전엔 묘정에 배향되었다고 하지만 태묘 예지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4.2. 조선


  • 태조는 7명의 배향공신이 있었고 태조보다 많은 공신을 배향한 국왕은 없다.
  • 숙종시기 이후로 당쟁이 심화됨에 따라 배향공신도 왔다갔다 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현종의 배향공신에는 원래 조경이 있었는데 예송논쟁 시기에 윤선도를 옹호했던 일 때문에 서인에게 밉보였는지 숙종 6년의 경신환국 이후 출향되었으며 김종수는 정조의 배향공신이었지만 시파가 집권하자 출향되었다.
  • 이완용이 종묘에 최소 5년간 배향되는 대참사가 있었다. 1928년 5월에 대한제국 시기의 고위 관료와 황실 인사들이 후보 추천과 투표를 거쳐 순종의 배향공신으로 송근수·김병시·이경직·서정순 4인을 정한 후, 순종의 후사였던 황태자 이은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다[89].
그러나 며칠 후 이왕직 장관인 한창수의 주장에 따라 김병시·이경직이 보류되고 이완용이 추가되었으며[90], 배향공신 논의에 참여했던 고위 관료 출신과 황실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자 7월에 이왕직은 배향공신의 종묘 배향을 일단 보류하였다.
하지만 1940년 3월 11일에 송근수, 12일에 이완용, 13일에 서정순을 종묘에 배향하는 의식을 정식으로 치렀으며[91], 이왕직에서 간행한 기록물에 이를 등재하였다.
해방 후에 이완용의 신위는 당연히 치워졌으며, 김병시·이경직의 종묘 배향이 정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아서 다수 기록물에 순종의 배향공신이 송근수·서정순 2인만 기재되어 있다.

5. 같이보기



[A] A B C D 개국일등공신, 삼한벽상공신[1] 개국이등공신[B] A B 개국공신[2] 개국공신, 광국익찬공신(匡國翊贊功臣)[3] 공신[4]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5]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 수정공신(守正功臣)[6] 추충좌리동덕공신(推忠佐理同德功臣), 광국공신(匡國功臣)[7] 치성공신(致盛功臣), 수충창궐공신(輸忠創闕功臣)[8] 현종이 당시 무신정변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하여 왕씨 성을 하사하였다. 원래의 이름은 이자림(李子琳).[9]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10] 이 집안은 살아서는 3대가 모두 재상을 지냈고 죽어서는 3대가 모두 종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다.[11] 추충진절문덕광국공신(推忠盡節文德匡國功臣)[12] 여요전쟁 때 불타버린 실록을 복원한 '7대 실록'의 편찬자.[13]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14] 추성좌세보사공신(推誠佐世保社功臣)[15] 추충찬화강정수제공신(推忠贊化康靖綏濟功臣)[16] 추충찬화탕구정새공신(推忠贊化蕩寇靜塞功臣)[17] 협모공신(協謀功臣)[18] 보정공신(輔正功臣), 추성봉국공신(推誠奉國功臣)[19]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20]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21] 탐욕이 심하고 부정부패했다 하여 배향이 철회되었다.[22]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23]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동덕찬화공신호(同德贊化功臣)[24]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25]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26] 단성좌리공신(端誠佐理功臣)[27]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28]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城直節同德贊化功臣)[29] 연저수종일등공신(燕邸隨從一等功臣), 안사공신(安社功臣),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30] 분충동덕분의개국정난정사공신(奮忠仗義同德開國靖難定社功臣)[31] 동덕분의개국정난정사좌명공신(同德奮義開國靖難定社佐命功臣)[32] 순충분의개국공신(純忠奮義開國功臣)[33] 남은의 형. 동생과는 달리 무인정사 당시 이방원의 편에 속해 있었기에 살아남았고, 이후 부귀영화를 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태종이 태상왕이 된 뒤 그 동생이랑 같이 배향공신에 추가되었다.[34] 순충분의좌명개국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35] 태조의 사위로 경순공주의 남편이다. 무인정사 당시에 정도전과 함께 정안군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었으나 후일 태종이 태상왕이 된 뒤 배향공신에 추가되었다.[36] 순충분의개국정사좌명공신(純忠奮義定社佐命開國功臣)[37] 순충분의좌명개국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38] 남재의 동생. 무인정사 당시 정도전과 함께 정안군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었으나 후일 태종이 태상왕이 된 뒤 배향공신에 추가되었다. 이쪽의 경우 태종이 진짜로 제거해버린걸 후회한 말을 했다.[39] 수충좌명개국공신(輸忠佐命開國功臣)[40] 순충분의좌명개국정사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定社功臣)[41] 분충장의동덕정사좌명공신(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42] 추충장의정사정난좌명공신(推忠仗義靖難定社佐命功臣)[43] 추충분의개국정사공신(推忠奮義開國定社功臣)[44] 추충정난정사좌명공신(推忠靖難定社佐命功臣)[45] 추충분의좌명공신(推忠紛議佐命功臣)[46] 양녕대군의 세자 시절 글스승이기도 하다.[47]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48] 4군의 개척자로 조영무와 더불어 몇 안되는 무장 정승이며 배향된 걸로는 조영무와 최윤덕이 유일하다.[49] 세종의 대군 시절 글스승이기도 하다.[50]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協策靖亂同德佐翼功臣)[51] 수충위사협찬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功臣)[52] 명나라 영락제, 선덕제의 처남이기도 하다.[53]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보사병기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C] A B 4차례에 걸쳐 공신에 책봉되었다.[54] 추충좌익정난익대공신(推忠佐翼定難翊戴功臣)[55]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보사병기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56] 수충경절좌익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輸忠勁節佐翼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57]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좌리공신(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佐理功臣)[58]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추성보사우세정난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推誠保社祐世定難功臣)[59]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60]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추성보사우세정난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推誠保社祐世定難功臣)[61] 중종 때 두 차례에 걸쳐 14년이나 정승을 맡았고 그중에 11년은 영의정을 한 중종대의 명재상이다.[62] [63] 을사사화 결과로 보익공신 2등이 되었으나, 선조10년(1577)에 삭훈(공신칭호박탈)되었다.[64] 기묘사화 때 화를 입었다고 중종 말 중종에 의해 복권한다.[65] [66] 명종의 장인인 청릉부원군 심강의 아버지. 그의 손자가 붕당정치의 시작과 관련된 인물인 심의겸이다.[67] 을사사화 결과로 보익공신 3등이 되었으나, 본인은 당시 극력 사양, 거절했으며 을사사화 재평가가 일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선조10년(1577)에 삭훈 되었다.[68] [D] A B C D E F 조선조 역사상 단 6명 뿐인 문묘 동시 종사 배향공신이다.[69] 을사사화 결과로 보익공신 3등이 되었으나, 선조10년(1577)에 삭훈(공신칭호박탈)되었다.[70]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71] 선조의 고명대신 7명중 하나이다.[72]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효충분위병기결책영국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效忠奮威炳幾決策寧國功臣)[E] A B C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73]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아들이자 수제자로, 그의 제자에는 대표적으로 송시열, 송준길이 있다.[74] 대동법 시행의 핵심 인물인 김육의 장남. 김좌명의 동생인 김우명은 현종 비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이다.[F] A B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奮忠效義炳幾協謨保社功臣)[75] 최명길의 손자.[76] 효종의 배향공신 김좌명의 아들.[77]구운몽》, 《사씨남정기》를 쓴 김만중이기도 하다.[78]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幾効力奮武功臣)[79] 순조 7년(1807)에 출향되나 고종 때 복귀[80] 소론으로 대왕대비가 중용했다. 그러나 대왕대비의 2차수렴시도를 저지시켰다.[81] 8자흉언사건을 꺼내서 벽파의 재기의 뿌리를 제거해버렸다.[82] 철종 비인 철인왕후 김씨의 백부이다.[83]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해결자이자 개화파의 선조격인 인물이다.[84] 을미사변 당시 일본군을 막아서다 살해당한 인물이다.[85] 네 명 모두 순종이 즉위하기 전에 죽었으므로 실제 순종을 모신 사람은 없다.[86] 그냥 당사자들만 되고 당사자 가문들만 혜택보고 그걸로 끝인 종묘 배향 공신들과 달리 문묘 배향은 사림과 유학자들에게 있어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조선 사림은 중요 기반과 결집의 구심점은 학통이며''' 자신들이 잇는 학통에 속한 선대 유학자가 문묘 배향이 되느냐 마느냐는 사림과 사림에 속한 양반 사대부들에게 있어 굉장히 중대한 사안이였다. 때문에 이 문묘 배향이 의논되었다 하면 관료들의 거센 주장에, 성균관 유생들, 지방 사림들의 집단 상소 러쉬가 비일비재했고 심지어 임금과 사림간의 정치적 줄타기가 오갔다.[87] 조선 성리학의 거목인 퇴계 이황 선생만 하더라도 문묘 배향을 해야 한다는 사림들의 거센 성토에도 왕이 허락하지 않아서 결국 문묘 배향 요청 41년이 지난 뒤에 문묘 배향이 되었을 정도다.[88] 소론은 박세채가 18현 중 마지막 인물로 배향되긴 했다.[89]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純宗孝皇帝純明孝皇后祔廟主監儀軌)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3일자 '四人抄啓別單書入之意敢稟答曰知道(4인을 초계하여 별단으로 들이니 품의에 대해 답하시기를 알았다)'[90]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9일 '下敎曰忠文公金炳始忠肅公李耕稙姑爲保留內 閣總理大臣李完用添書以入(하교하기를, 충문공 김병시·충숙공 이경직을 보류하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추가 기재하여 넣으라)'[91] 종묘숙직일지(宗廟宿直日誌) 1940년 3월 11·12·13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