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례랑
1. 개요
夫禮郞
신라 중대 효소왕 재위기의 화랑.
2. 생애
692년 9월 7일 효소왕의 명으로 국선이 되었는데, 그를 따르는 낭도가 휘하에 1천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안상(安常)[1] 과 부례랑이 특히 친했다고 전한다.
693년 3월에 부례랑은 낭도를 거느리고 금란(金蘭, 지금의 강원도 통천군)으로 유람을 떠났는데, 3월 11일에 북명(北溟, 원산시 일대로 추정)에서 부례랑이 적적(狄賊)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적적의 실체는 몇몇 설이 있는데, 아직 발해가 건국(698년)되기 전이므로 말갈족 혹은 신라 국경선 바깥의 잔존 고구려 세력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혹은 나당전쟁 당시 대양성 전투, 도림성 전투 등 강원 북부-함경도 남부 지역도 전장이 되면서 기존 고구려인들이 빠져나가고 공백지가 되다시피한 이 지역에 새로 유입된 말갈 부족들이 이 적적의 실체라는 설도 있다.[2] 아무튼 지휘관 화랑이 납치되자 부례랑을 따르던 낭도들은 어쩔 줄 몰라하던 중에 안상만이 홀로 추격했다.
한편 국선이 납치되었단 소식이 서라벌에도 전해져 효소왕이 당황해하던 찰나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 창고를 뒤덮었고, 놀라 조사해보니 그 안에 있던 보물 만파식적이 사라져 있었다.
효소왕은 창고를 관리하던 김정고(金貞高) 등 5명을 감옥에 가두고 4월에 백성들에게 만파식적을 찾아오는 자에게 1년 조세를 상으로 주겠다 말하였다.짐이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었고, 또 오늘은 가야금과 피리까지 잃었단 말인가?
한편 부례랑의 부모는 백율사라는 절의 관음보살상 앞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빌며 저녁마다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5월 15일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이 불상 뒤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그 사연을 물어보니 부례랑은 납치된 후 대도구라(大都仇羅)라는 자의 집에서 목동이 되어 대오라니(大烏羅尼)라는 들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한 스님이 나타나 부례랑을 바닷가로 데려갔고 거기서 안상을 만나 스님은 들고 있던 피리(만파식적)을 둘로 쪼개 두 사람에게 하나씩 타게 하고 자신은 거문고를 타고서는 서라벌의 백율사까지 금방 날아왔다는 것이다. 이에 효소왕은 많은 공물을 백률사에 바치고 만파식적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높여 부르게 했다고 한다. 물론 김정고 등 5명도 풀어주고 위로 차원에서 5급 벼슬도 내려주었다.
화랑이었던 부례랑이 북쪽 국경지대로 유람을 갔다가 북방의 이민족에게 납치당하고 그 낭도 중 안상이 우여곡절 끝에 그를 구출해 돌아왔다는 대략적인 이야기는 사건의 진행 날짜까지 구체적으로 써 있을 정도로 꽤 상세한 탓에 설화적인 부분만 제외하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삼국유사의 일화답게 이야기에 설화적 색채가 짙은 편이다. 그 외에 고구려 멸망과 발해 건국 중간기의 잔여 세력의 존재가 나타나있기도 하고, 낭도가 1천 명이나 됐는데 안상 외에는 화랑을 구하러 제대로 뛰어든 자가 없이 다들 겁을 먹었다는 점에서 삼국통일전쟁이 끝난 후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가 시작되면서 화랑도 역시 상당히 문약해진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1] 신라사선 중 한 명으로도 여겨진다.[2] 이에 따르면 이들이 이후 잠깐 발해의 간접 지배권에 들었다가 신라 후기에 '흑수국'으로 자립, 후삼국시대에 호족 윤선을 따른 '흑수번중'을 거쳐서 고려시대 함경도의 여진족으로 이어지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