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1. 개요
서라벌(徐羅伐) / 금성(金城)[2]
'''천년 왕국 신라의 수도'''.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기원전 57년 음력 4월 병진일부터 935년 음력 11월까지 약 991년 간 신라의 정궁인 월성이 위치한 수도로서 기능했다. 하나의 국가가 하나의 수도에서 천 년을 지속한 경우는 역사상 많지 않은 사례이며,[3] 서라벌이 바로 그 경우에 해당된다.
그 명칭은 서라벌/금성 외에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 경(京), 왕경(王京), 왕도(王都), 경사(京師), 경성(京城), 동경(東京), 동도(東都) 등이 있었다. 이 중 동경은 고려시대 경주의 이름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당시 기록인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탑비문이나 처용가와 같이 신라시기에도 경주를 동경으로 불렸던 기록이 존재한다.[4] 중국 기록 양서에서는 건모라(健牟羅)라고도 불렸다는데, 고대 한국어의 '큰 마을'의 음차로 추정되고 있다.
2. 행정
수도 서라벌은 9주 5소경 중 양주 땅에 둘러싸여 있지만 일단 양주 행정구역에 포함되지는 않았는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도 9주를 소개하기 전 맨 앞에 따로 경주를 소개하고 있으며, 수도 주변 동서남북을 둘러싸고 있는 의창군, 임관군, 대성군, 상성군 등은 양주에 속한 행정구역으로 나온다. 사실 양주의 치소(현대의 도청소재지 격)가 양주(양산시)인데 수도가 양주 소속이면 양산시 관할이란 말인데 당연히 기록상으로도 양주 도독이 수도를 관할하는 그런 정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면적이 넓지 않아서인지 현대에 나오는 신라 9주 5소경 지도에서는 그냥 양주 북쪽에 도시라는 점 하나 찍어놓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삼국사기 지리지대로라면 왕경은 지금의 경주시 동 지역 인근 정도 범위고 바깥지역 예를 들어 지금의 안강읍이나 외동읍 쪽은 별개 행정구역이란 말인데, 이 지역에 흥덕왕릉이나 원성왕릉이 있는데, 신라는 모든 신라왕릉을 왕경 범위 안에 조성했으므로[5] 이 지역도 왕경 범위 안으로 쳤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시대별로 범위가 바뀌었거나, 공식적인 행정경계와 관념적 경계가 일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수도 중심지(경주분지 가운데 지역) 동쪽은 대성군(大城郡), 서쪽은 상성군(商城郡)이다. 그런데 전국 다른 군은 밑에 현(행정구역)이 있는 것과 달리 이 대성군과 상성군 두 군은 특이하게 아래에 현 대신 정(停)이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상성군은 남기정(南畿停), 중기정(中畿停), 서기정(西畿停), 북기정(北畿停), 막야정(莫耶停) 5개의 정으로 되어있고, 대성군은 약장현(約章縣)과 동기정(東畿停)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기(畿) 자는 '도읍의 주변'이란 뜻으로, 바로 경기도 할 때의 기 자다. 지리적 위치로도 짐작할 수 있지만 대성군과 상성군은 일종의 경기도, 내지는 수도권 역할에 해당하는 특수 행정구역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정황상 여기까지는 보편적으로 왕경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에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라의 수도 서라벌 역시 이 정도 범위까지 포함된 개념을 말한다.
신라의 공식 행정구역명은 위와 같이 '동서남북+기'로 여러 개로 쪼개져 있었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여러 구절에 의하면 이를 통틀어 경기(京畿)라는 이름도 일상적으로는 사용되었다.
3. 지리
같은 원삼국시대, 삼국시대(가야도 포함)와 통일신라, 남북국시대의 고구려와 백제, 발해가 외침과 내부 정책에 따라 수도를 여러 번 옮겼던 것, 연맹국가였지만 가야도 외침 등으로 금관국에서 반파국으로 가야의 여러 국가들 맹주가 바뀐 것과는 달리 삼국통일 이후 통일 신라 시대까지 1천년 동안 굳건한 신라의 수도로, 형산강과 그 지류에 위치하여 식수 확보가 쉬우면서 자연 해자 역할로 방어에도 용이한 지형에, 경상도 지역치고는 꽤 넓은 평지이자 한반도 남부 최대의 단일 선상지인 경주분지에 위치해 있어 식량 생산력도 높아 서라벌을 중심으로 한 사로국이 주변 소국을 복속하고 영역국가 신라가 될 수 있었다.[6]
전술했듯, 은근히 당시 기준 군사적 입지가 좋았다. 동남쪽으로 치우쳐 있어 주변의 강국인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했으며,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덕에 왜구의 소소한 노략질만 뺀다면 대규모 외침을 당한 적이 의외로 거의 없다. 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밀고 와서 경애왕을 자살로 몰아넣는 사건은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신라가 껍데기 뿐이었고, 사실상 서라벌만 남은 상태였던 터라 서라벌의 입지를 원인으로 보긴 어렵다. 다음 왕인 경순왕 때 고려에 항복했을 정도로 신라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다만, 서라벌의 이동이 100% 없었던 것은 아니고 지금의 경주시 영역 안에서 산발적으로 조금씩 왔다갔다한 적은 있다. 예를 들면 자비 마립간은 보문관광단지 근처의 명활성에 궁전을 옮겨 살았다.
그러나 통일 이후에는 한반도 전체에서 동남쪽으로 치우친 위치라는 한계성이 두드러졌다. 이에 31대 임금 신문왕이 달구벌 쪽으로 천도하려 시도했던 적이 한 번 있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수도를 이전하면 기득권인 귀족들의 힘은 약해지고, 상대적으로 국왕의 힘이 강해진다. 하지만 귀족들도 수도 편재성이 심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순 없었는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 5소경을 설치했다. 옛 금관가야, 고구려, 백제 땅에 5개의 소경을 설치하였다. 5소경은 각각 금관경(김해시)·남원경(남원시)·서원경(청주시)·중원경(충주시)·북원경(원주시)에 있었는데, 단지 좀 큰 지방도시 정도가 아니라 통치거점으로서 상당한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방 장악에 실패해 각 지역에서 호족들이 대두되게 되지만 이는 먼 미래의 일이었다.[7]
서라벌의 인구와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적어도 소도시가 된 '''지금의 경주시 시가지보다''' 넓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은 경주분지 안쪽에서도 시가지가 분지를 다 채우지 못해 논이 많이 있는데, 이런 곳도 당시에는 시가지였던 흔적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 특히 서라벌의 중심지역은 지금의 경주 시가지 중심부 기준으로 약간 남동쪽 월성동 지역에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경주읍성이 오늘날의 중부동 일원 (북부, 서부, 동부동)에 세워지면서 그 때 경주시 시가지 중심부가 북서쪽으로 약간 옮겨갔다. 그래서 수백년의 세월을 거쳐 월성동 쪽은 건물이 소실되고, 조선 이후 비어버린 월성동 일대는 오랫동안 논밭으로 가려졌는데, 경주에 가면 신라의 궁전으로 파악되는 경주 월성이나 첨성대, 안압지, 분황사, 황룡사지 등 주요 유적이 살짝 시가지 외곽의 논두렁 옆에 있는 게 이 때문이다. 이곳은 땅을 파헤치는 육중한 현대식 건축물이 별로 들어서지 않아서 많은 유적들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보존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동해남부선 철도가 경주에 놓이면서 이 곳을 관통해 사천왕사 등 많은 문화재 터가 훼손되기도 했다. 세계유산 보호를 위한 유네스코의 권고도 있고 해서 동해남부선은 현재 외곽 건천읍의 신경주역으로 이설공사 중이며 공사가 완료되면 경주 시가지의 경주역은 폐역, 선로는 모두 철거될 예정이다. 단선철도 하나 까는 것에도 이러한데 본격적으로 현대식 시가지가 개발되었다면 훨씬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4. 규모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안 호수가 17만 8936호(戶)에 1360방(坊)이요, 주위가 55리(里)였다. 서른다섯 개 금입택(金入宅)[8]
이 있었다.'''
'''《삼국유사》 제1 기이 진한'''
『'''삼국사기(三國史記)』 헌강왕 6년(880)'''』
'''“도성 안에 기와집만 있고 초가집은 한 채도 없으며, 노래와 음악 소리가 길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또 숯으로 밥을 짓고 땔나무를 쓰지 않았다.”'''
당시 수도 서라벌의 인구와 규모에 대한 기록은 대표적으로 삼국유사의 위 기록이 존재하는데, 당시 신라 정부가 세세한 인구조사를 실시할 체계와 능력이 있었던 것은 민정문서 발견으로 증명된 만큼 저 1단위까지 떨어지는 수치는 일연스님이 지어낸 것은 아니고 고려 중기까지 남아있었던 어떤 1차 사료를 인용한 수치일 가능성이 높다. 저 기록이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 호(戶)에 5명이라고 가정해도 '''경주 한 곳에만 인구 8~90만 명이 살았다는 뜻'''이다. 고려 수도 개경의 2~3 배, 조선 수도 한양의 4배, 현 경주시의 3.5배(!)가 넘는 수준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 헌강왕 6년(880)'''』
9월 9일에 왕이 좌우의 신라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侍中)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 라고 물었다.'''
'''민공이 “신(臣)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만 당시 신라가 이슬람 제국, 당과 같은 인구 수천만 규모의 대국도 아닌 상황에서 90만 명이 몰려 살았음은 납득이 어렵다. 이기봉과 같이 서라벌 인구 백만설을 진지하게 검토한 학자도 존재하지만 학계에서 전반적으로는 곧이곧대로 해석하지 않는 시각이 많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지만 경주 중심부의 경주분지 지형상 90만 명이나 몰려살 수 있을 만큼 들이 넓지 않다.[9] 아파트도 없던 시대라, 1~3층 정도 저층건물로 좁은 경주분지를 전부 꽉 채워도 90만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전성기 서라벌의 규모를 전하는 얼마 안 되는 기록인' 이 부분을 엉터리 기록으로 단정하고 넘겨버리기에는 여러 가지 다른 해석도 있는데, 예를 들면 삼국유사의 17만 8936호는 17만 8936'''명'''이나, 17만 8936'''구'''(약 35만)로 한 글자를 잘못 쓴 것이 아니냐는 주장부터, 서라벌과 그 일대 수도권을 다 합친 기록이 아니냐는 식으로 17만 호가 말하는 범위를 넓게 보는 설들이 있다. 신라의 수도 범위를 경주분지의 시가지 자체로만 한정하지 않고 넓혀서 본다면 90만명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10] 혹은 실제로는 신라 각 지방에 이런저런 이유로 나가 살고 있지만[11] 왕경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가문의 호적만 수도에 남겨두는 일종의 '''위장 전입이 전부 포함된 인구통계'''가 아닐까라고 본 설도 있다.[12] 실제로 현대에도 중국이나 북한 같은 나라는 수도에 산다는 신분증 자체가 일종의 귀족 신분증으로 직결되는 사회인 것처럼, 중앙집권적 귀족제 사회였던 신라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는 골품이 왕경인에게만 주어진다는 주장도 존재할 정도이니.
고고학적으로는 경주시 외곽인 지금의 건천읍 금척리, 모량리까지 방리도로 유적과 귀족 고분군 등이 드러나 일단 도시의 범위가 경주분지 중심지에 국한된 소규모는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삼국유사의 다른 부분인 권2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에서도 전성기 서라벌 시가지의 규모를 설명한 기록이 있는데, 제49대 헌강왕 시기 기준으로 서라벌의 중심지에서 동해 바다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연이어져 있었으며,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이 바다가 지금의 감포 앞바다인지 포항시 쪽인지 울산시 쪽인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진 않았지만, 어느 쪽이든 경주 중심지(월성)에서 약 30 km는 떨어진 곳이고 지금 경주시 시가지보다 훨씬 넓으며 개경이나 한양과도 비교할 수 없이 넓은 게 된다.[13] 물론 이 역시 은유적이고 과장된 기록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당대 한반도에서 압도적으로 규모가 큰 도시였음은 사실이고, 이런 뒷받침 덕에 고려시대에도 주요 대도시이자 3경으로 여전히 중요했다. 이후 이야기는 동경#s-2.2 문서 참고. 만약 서라벌이 쇠퇴하지 않고 아직까지 대도시로 남았더라면 일본의 교토 이상 되는 장관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서라벌은 이후 고려시대까지 금입택과 수천채의 기와집들이 남아있었으나..여몽전쟁당시 짜투리에 있던 경주까지 몽골군이 처들어와서 -경주를 초토화 시켜놓았다. 이때 황룡사까지 모조리 태워먹어 버렸다..
4.1. 기타 도시들과의 비교
보수적으로 적게 해석해 17만 ~ 35만 정도라고 해도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도시임이 틀림없다. 한반도의 인구가 12배 늘어난 현재의 경주시보다 많았을 확률이 높다.
통일신라 시대인 10세기 전을 기준으로 하면 신라와 비교도 안 되는 영토를 지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50만 정도, 서유럽 최대의 도시인 파리와 로마가 5만 정도, 런던은 간신히 만 명을 넘었다는걸 보면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대도시 중 하나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이 시절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을 세계를 대표하는 3대 도시로 보고, 중국에는 수십만 도시들이 몇 개 더 있었으니 못해도 세계 10위 안에는 들었을 듯.[14] 만약 정말 90만이면 장안에 버금가는 대도시다. 사실 8세기 4대 주요 도시였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논쟁 중이긴 하다. 설령 17만 이하의 인구였다고 해도 작은 도시 수준은 절대 아니었고, 비단길에 발달된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일단 영문 위키백과에서도 8~9세기 서라벌이 장안,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다음으로 규모가 큰 4위 도시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당나라 제 2의 수도이자 장안 인구(약 100만)의 60% 정도 되던 낙양이 순위에 안들었는데 사실 낙양 인구(약 60만)가 서라벌 인구보다 많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사실 지역 할당제만 아니면 낙양이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각각 약 50만 추정)보다도 큰 도시였다. 경주와 비슷한 규모였던 헤이조쿄는 10만 정도로 추정된다.
17만 ~ 35만으로 봐도 후대 고려, 조선왕조의 개경, 한양에 못지 않거나 오히려 더 큰 규모로 나오는데, 사실 신라도 천년이나 되는 기간동안 경주를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관청도 많았고 살기에는 다른곳보단 괜찮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수도집중현상으로 90만명이나 되는 인구가 살았을 수도 있다. 반면 고려의 수도 개경(개성)은 주변에 산이 많아서 많은 인구가 몰려살기엔 좋지도 않고[15] 수도만 집중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닌 5도양계 곳곳에 목이라는 행정체계를 두고 그곳을 발전시켜왔기에 개경에만 인구가 집중된것이 아닐 수도 있다. 또한 개경은 서라벌과는 다르게 많은 외침을 당하고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기 때문에 인구가 전쟁중에 줄어든 것일 수도 있다.
조선의 경우는 다산 정약용이 자식에게 서울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로 서울 집중 현상이 심했지만, 그래도 수원 화성 등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관련 기사 관련 기사2
5. 구조
기본적으로 중심지구는 서쪽으로는 서천, 북쪽으로는 북천, 동쪽으로는 명활산과 낭산 사이, 남쪽으로는 포석정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에는 건천읍 모량리와 북천 건너편까지 주거지역이 확대됐다고 한다. 물론 이는 중심지구의 범위이고, 왕경으로 인정되는 범위는 더 넓었는데 곳곳에 시가지(부도심) 혹은 위성도시가 지금보다 촘촘히 존재했고 불국사, 이거사지 등의 크고 중요한 시설들이 배치되었다.
궁전인 경주 월성 북쪽으로 넓은 주작대로가 나 있어 정북쪽의 성동동 전랑지까지 이어졌다. 궁전의 남쪽은 남천이 흐르고 있어 정문이 북쪽인데, 옛날 동아시아 웬만한 도시들은 중국의 장안을 본따서 비슷비슷한 계획도시를 만들었는데[16] 중국식이라면 남쪽으로 나 있어야 할 궁전의 정문이 북쪽이라[17] 서라벌은 이런 표준에서 다소 벗어난 구조였다.
어쨌든 타고난 지형상 그건 어쩔 수 없고, 중대에 들어서 중국의 장안을 본따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도시를 네모 모양의 방리로 구획하였다. 기록상 469년 처음 방리명을 정하는데 현재 5세기의 도로나 도시계획은 확인되지 않으며, 6세기 1/4분기부터 도시유적을 찾을 수 있다
중심지구는 정사각형 36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1개 방은 16개의 작은 구획으로 나누었다. 경주 왕경 전체는 6부 55리 36방으로 되어있었다. 황룡사지 동편에서 완전한 형태의 1방이 조사됐는데(신라 왕경S1E1지구유적) 남북 172.5m, 동서폭 167.5m, 점유면적 28,700㎡며 방 전체가 방장(坊墻)이라는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방장을 따라 외곽 사방에 도로와 배수로가 있고 담장 내부에는 5~8개 정도 건물로 구성된 가호 18개가 들어있었다. 이들은 대부분은 거주 시설이고 소형 사찰, 창고 등도 들어있었다.
사각형 방들 사이 구획에는 자갈 등으로 폭 13~15미터 정도의 도로를 깔았다. 도로는 중앙은 굵은 자갈, 양측면은 잔자갈이나 모래를 깔아 포장했고 도로면에서 발견된 경계석 위치를 보아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존재했다. 도로 중에서는 수레바퀴 자국이 나와 차도를 통해 수레가 활발히 오갔던 것으로 보이며 도로 양편 가장자리에는 빗물과 생활하수 배수시설을 깔았다.
6. 어원
신라의 도읍을 적을 때에는 서라벌 이외에도 금성(金城),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서야(徐耶), 서야벌(徐耶), 서라(徐羅) 등 여러가지 표기가 있었는데, 한자가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넘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진한의 고유어(우리말)를 나중에 들어온 한자로 표기(음차)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이름으로 기록에 남은 것이다. 신라 건국 초기였던 원삼국시대에는 수도 서라벌, 즉 금성이 신라라는 국가 그 자체인 도시국가였고, 국가의 기틀을 잡고 난 뒤에도 한동안은 서라벌이라는 이름이 나라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으며[18] 사실 서라벌과 신라 둘 다 사로국, 사라 등 'ㅅㄹ' 계통의 동일 어원이다. 하나의 도시 정도에서 시작해 영역국가로 성장했고 도시 이름이 곧 나라 이름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지구 반대편의 도시 로마와 로마 제국의 관계로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서라벌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옛 명칭(국호) 및 '수도'를 의미하는 일반 명사로서의 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동음이의어) 문서 참조.
신라(新羅)는 덕업일신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에서 따왔다고 하지만 서라벌을 한자의 뜻으로 표기한 것으로 본다. 1천년간 경주지역 땅이름이 서라벌 또는 셔ᄫᅳᆯ이었고, 935년 개경으로 옮기면서 셔ᄫᅳᆯ(서울)은 일반명사로 1천년간 쓰이다가 1946년 미군정청에 의하여 경성이 서울특별자유시로 되고, 1948년 대한민국의 수도 땅이름이 되면서 다시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따라서 서울은 일반명사와 고유명사로 함께 쓰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깜삐돌리오가 영어의 capital(수도)로 된 것과 같다.
6.1. 옛 명칭 유래설
서라벌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들이 있지만 확실한 정설은 없다.
신라 초기 6촌 중 하나인 사량부(새라)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새라는 개울 이름이며, 이 개울의 위에 있는 들판이란 의미로 새라불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사량부에서 초대 왕 박혁거세를 후원하였으니, 사로국, 사라 등의 명칭도 모두 여기서 유래했다고 본다.
‘동쪽의 들판’이라는 의미로 추정하는 시각도 있다. 예컨대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은 소부리(所夫里)라고도 하는데, ‘소’는 샛바람의 ‘새’와 같이 ‘동쪽’이란 뜻이고, ‘부리’는 ‘벌판’이란 뜻이다. ‘부리’와 서라벌의 ‘벌’은 같은 단어로 본다. 그렇다면 소부리=소벌은 서라벌/셔벌(徐伐)/서울과 같은 어원을 갖는 단어였을 수 있다. 백제어(혹은 마한어)와 신라어 간의 친연성을 전제한다면 설득력이 있다.
금성(金城)이라는 다른 명칭에서 보듯이 쇠+벌에서 왔다는 주장, 나중에 신라(新羅)로 국호를 확정지은 것에서 보듯이 ‘새롭게 정착한 곳’이라는 의미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
고대 국가에서는 민족의 이름이 곧 사람을 뜻했고, 이게 다시 지명이 되는 일이 잦았다. 만약 '신라', '서라', '사라', '사로' 등의 'ㅅㄹ' 계통이 현대어로 '인간', 즉 '사람', '삶', 살-(live)'과 같은 'ㅅㄹ' 단어들과 어원이 같다면 저 'ㅅㄹ' 단어 + '벌'은 곧 '사람이 사는 땅'이 된다. 민족을 가리키는 말 뒤에 땅을 뜻하는 접미사를 붙이는 조어법은 실제로 중앙아시아의 '-stan', 유럽의 '-ia' 등으로 지구상에서 흔한 편이기도 하다.
6.2. 불교 유래설
인도의 도시 슈라바스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19] 현장법사가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면서 슈라바스티를 室羅伐悉底(실라벌실저)로 음차하였는데 사위성(舍衛城)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20] 실라벌실저에서 서라벌과 신라가 유래하였다는 것인데, 한반도에 불교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다는 것도 뒷받침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신라 중기에는 아예 왕족 이름을 석가모니의 가족 이름으로 짓는 등 굉장히 불교에 심취해 있었기에 그렇기도 하다.
다만 서라벌이나 신라와 동일 어원으로 보이는 비슷한 이름은 불교가 전해지기 훨씬 이전부터 쓰였으므로 신라 초기 연대가 좀 끌어올려졌다고 쳐도 시대가 안 맞는다. 가령 3세기에 쓰여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사로국이라는 이름. 정사 삼국지가 쓰여진 3세기는 말할 것도 없이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시기, 이차돈 순교로 공인된 시기보다 '''수백 년 이전'''이다. 3세기는 어쨌든 중국까진 불교가 확실히 넘어왔던 시대이고, 중국과 교류는 했으므로 어찌어찌 불교적 지식을 입수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직 이차돈 순교 이전으로 신라의 토착신앙이 건재하기 때문에 신라의 수도 이름을 불교식으로 지어줄 이유가 부족하다.
물론 우연히 음가가 비슷했고 나중에 입수한 불교적 지명에서 찾아 끼워맞췄을 수도 있고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불교와 관련된 문화가 이미 퍼져있을 수도 있다.[21]
7. 신라 이후
935년 제56대 경순왕이 서라벌을 떠나 개성에서 항복하면서 신라의 천년 사직이 끝나고 도시 이름도 지금의 경주로 바꾼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고려시대에도 서경 평양과 함께 3경 중 하나인 동경(東京)으로서 중요한 도시로 대접받았고 정지상의 시에서도 일만호로 표현할 만큼 큰 시가지에 황금절이 빛나 지나가는 사람이 구경하기 바쁜 화려한 대도시로 등장하고 있지만[22] , 수도였던 시절 전국의 세금이 모이는 거대 소비도시 구조와 인프라는 이제 지방도시가 된 경주로서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 예시로 1012년 황룡사 9층 목탑을 수리하기 위해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던 옛 신라 왕성의 일부인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건축자재를 사용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신라 때의 대형 사찰 중생사는 시주가 들어오지 않아 승려가 김해까지 탁발을 하러 갈 정도로 경영난을 겪었고 고선사와 창림사 석탑은 해체해서 개성 만월대로 가져가버리기도 했다.
고려 현종은 기존 신라 왕경의 중심지였던 현 월성동에서 서북쪽으로 2km 가량 떨어진 지점에 경주읍성을 새로 만들어 관청 등 시설을 모았고 이후 고려, 조선을 거쳐 21세기까지 약 1천년간 경주의 중심지는 지금의 중부동 일대 경주읍성 지역이 된다. 이후의 역사는 경주읍성 문서 참조종
그 대신 신라 때 중심지였던 월성동 쪽은 시가지의 축소, 이민족의 침입, 관리 부족, 부실한 치수 등으로 쇠락해 대부분 유구만 남고 논밭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중심지 이동 덕분에 신라시대 유적지 위에는 더 이상 건물이 세워지지 않아 유적은 더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서울 풍납토성이 유적 위에 들어선 시가지로 훼손된 것 같은 위기는 피한 것이다.
대한민국부터는 신라의 수도였기도 하여 관광도시로서 유명하다. 경주시 학교들을 제외한 어느 정도 규모있는 다른 지역 학교들에서 수학여행으로 이곳을 찾아오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8. 기타
- 심시티 4의 기본 큰지도 이름이다.
- 서울 강북구에 서라벌중학교, 노원구에 서라벌고등학교가 있으며, 경주에 서라벌초등학교, 서라벌여자중학교, 서라벌대학교가 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630년에 지진이 발생해서 대궐의 뜰이 갈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2016년 경주 지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라벌이 위치한 경주 지역은 불국사 단층이 관통하여 예로부터 지진이 자주 일어났던 지역이다.
[1] 황룡사 9층 목탑의 정확한 형태에 대해서는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2] 한국사 검정 교과서 표기. 금성과 서라벌은 모두 같은 지명을 하나는 한자음으로(음독), 하나는 고유어로(훈독, 신라어독) 읽은 것이다. 금성을 순 우리말로 읽으면 '쇠벌'로 읽히므로 서라벌과 발음이 비슷해진다. 후술하겠지만 이는 셔ᄫᅳᆯ, 서울과도 연관이 있다.[3] 대표적으로 로마(고대 로마, BC 753~476), 콘스탄티노플(동로마 제국, 330~1453, 오스만 제국까지 합치면 1922년까지), 교토(일본, 794~1869) 파리 등이 있다. 런던은 에식스 왕국의 수도였지만, 잉글랜드 왕국의 수도였던 기간만 따지면 천년이 채 안된다. 마찬가지로 서울이나 중국의 시안시, 뤄양시, 베이징시 등도 수도였던 기간을 총합하면 천년이 넘지만 연속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4] 수도 서라벌을 '동쪽 수도'란 의미인 동경으로 칭한 것은 '서쪽 수도'로 간주한 곳도 존재했다는 의미인데, 이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당시 신라에서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해 설치된 행정 구역이었던 5소경에 대응된 호칭이라는 설이 있다. 이들 5개 소경은 '작은 수도'라는 의미답게 수도의 사람과 기능을 일부 옮겨 조성했고 위치도 모두 경주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다. 소경의 이름들을 봐도 김해를 제외하면 북원, 서원, 중원, 남원으로, 동 자가 붙은 소경만 없으므로 왕도가 그 자리라는 것을 추론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서쪽 당나라의 장안을 서경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대응해 신라를 중국과 대등한 문명국가로 간주해서 동경으로 칭했다는 설이 있다. 주보돈 교수는 2015년 신라의 동경과 그 의미라는 논문에서 8세기 중엽부터 신라인들이 고양된 문화의식과 자존의식 아래 그렇게 부르는 용법이 생겼으리라 추정했다. 이런 신라인의 자존의식의 예시로 황룡사 9층목탑의 의미, 태종 무열왕의 묘호 분쟁, 김헌창의 난 때 장안국을 칭한 것을 예로 들었다. 아무튼 동경이란 이름을 쓴 적이 있는 건 확실하지만, 이 시기 경주는 수도였기 때문에 굳이 동쪽 수도라는 의미의 동경보다는 경(京), 왕경(王京) 등 수도 그 자체로 더 많이 불렀다.[5] 멸망 이후 조성된 경순왕릉은 예외.[6] 현대에 경주보다 더 넓은 농토가 된 김해평야나 호남 지방의 평야 등은 고대에는 바다였거나 농사를 짓기 힘든 환경이었던 반면, 선상지를 형성한 경주는 고대부터 홍수 위험이 낮으면서도 우물을 얕게 만들어도 용수를 구할 수 있는 상태였다.[7] 사실 김헌창의 난 당시 수도에서 가장 먼 북부의 지방관들이 신속하게 지원군을 보냈던 걸 보면 통일신라의 지방 장악력이 한국사 다른 나라나 동시기 중국, 일본에 비해서 특별히 부족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물론 마지막 순간에는 지방 장악에 실패했지만 이게 통일신라 성립으로부터 계산해도 220여년만에 일어난 사건인데 220년 동안 지방의 반란을 차단해왔던 것은 세계사적으로 길면 길었지 짧은 것은 절대 아니다.[8] 황금을 집에 씌운 부잣집 큰 저택을 말한다.[9] 그래서 그런지 경주분지 땅에서 비교적 외곽 지역인 구 경주경마장 부지에서도 집단 집터와 숯을 굽던 가마터가 20기나 발견됐다. 이는 당시 경주분지 땅 안에서 인구집중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이다.[10] 그러나 경주분지 주변으로 넓혀서 봐도 의미 없는게 경주분지 주변지형은 죄다 산이다. 구글어스를 통해 경주시를 보면 대번에 드러난다.[11] 작은 수도라는 의미의 소경(小京)은 아예 중앙 귀족과 부유한 백성을 옮겨서 채웠다는 기록도 있다.[12] 하일식, 「신라 왕경인의 지방 이주와 편적지(編籍地)」,『신라문화』38, 2011[13] 다만 경주분지바깥의 단층이 발달한 지형상 현대의 부산이나 홍콩마냥 가늘고 길게 시가지가 쭉 이어졌다고 하면 감안할 여지는 있다. 양산단층 문서를 참고.[14] 당시 통일신라가 현 영국의 본토와 엇비슷한 면적의 영토를 가졌음에도, 10만 이상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 중엔 쌀이 있다. 중앙아시아부터 북아프리카, 그리고 중동을 넘어 유럽까지는 밀을 주식으로 삼았지만, 동아시아는 쌀을 주식으로 삼았는데, 밀보다 인구부양력도 높으며 농사에 더 많은 인구가 필요한 쌀의 특성상 같은 면적의 토지를 두더라도 서양보다 동양의 인구가 더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고대와 중세 서양사에서 왠만한 전투의 규모가 대개 수천명이었던 반면, 동시기 동양사에서는 최소 수천명, 보통 만 명의 단위를 오갔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예컨대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성채를 각각 침략했던 일본군의 숫자만 만 명이 넘으며, 중국사에서는 주로 몇십만명에서 크게는 100만이 넘는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실제로 7세기 초 수나라의 양제가 고구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최소 113만명이라는 군대를 동원했던 기록은 약 1300년이 지난 제1차 세계대전때야 깨지게 될 정도니. 물론 중국사 특성상 수나라 이전의 동원 기록에서는 과장과 왜곡의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럼에도 이를 감안하며 훨씬 낮게 추정하더라도 대개 몇만 단위에서 최대 몇십만의 군사가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15] 그런데 이건 경주도 마찬가지다.[16] 발해의 상경용천부, 일본의 나라현, 교토 등도 똑같이 장안을 본따서 정궁과 주작대로를 두고 구획을 지었다. 다만 발해, 일본과 케이스가 다른데 수당의 장안 정도 훨씬 이전부터 서라벌은 신라의 수도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의 요소를 완전히 수용해 거의 빈터에 새 도시를 지은 발해, 일본과 달리 신라의 서라벌은 구조적으로 장안성과 차이가 크고 기존에 이미 존재하던 대도시에 당의 요소를 부분적으로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17] 정석에 가까운 구조는 경복궁이나 자금성을 떠올려보면 된다. 경복궁의 경우 광화문 광장이 주작대로. 개성 만월대 역시 개경 내부에서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18] 지증왕의 국호 통일 이전[19] 금강경이 설해진 배경이 되는 도시이다.[20] 구마라습의 번역은 슈라바스티를 사위성으로 표기하였다.[21] 인접한 곳에 위치한 가야는 이미 일찍부터 불교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2]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백률사